유럽 봉건 사회의 성립과정역사교육 3학기 송선애목 차Ⅰ. 머리말Ⅱ.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게르만 왕국의 형성Ⅲ. 프랑크 왕국의 형성과 붕괴Ⅳ. 봉건제의 개념과 해석Ⅴ. 맺음말Ⅰ. 머리말‘봉건제’라는 정치체제는 서양의, 특히 유럽의 중세시기를 대변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용어이다. 흔히 봉건제라는 체제가 이용되던 시기를 중세의 시기로 구분 지을 수 있을 만큼 봉건제에 대한 연구는 서양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중세 봉건제는 극도로 혼란한 시대의 와중에 발생하였다. 어느 면에서는 이 같은 혼란 자체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세기 전, 게르만족의 침입 속에서 형성되었던 서유럽의 새로운 문명은 고대 로마의 문화와 새로운 게르만의 문화가 융합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본문에서는 게르만족의 이동과 동시에 이루어지게 되는 봉건사회의 형성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게르만족의 이동과 게르만 왕국의 형성서양 중세 세계의 기본적인 형성요소는 로마제국의 문명과 기독교 문화 그리고 이민족의 문화였다. 특히 켈트족과 게르만족을 포함한 이민족의 문화는 중세문명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들의 관습법은 로마제국 말기의 혼란과는 대조적으로 로마제국 이후 사회 안정과 결속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로마 사회와 이민족 사회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1세기 이래로 로마인과 게르만족은 상호 영향 속에 융합되고 있었으며, 갈리아(Gaul)와 브리튼(Britain)이 로마 속주로 편입될 때부터 켈트족 문명과도 융합되었다. 로마제국은 일찍부터 게르만인을 노예나 콜로누스(Colonus)로 이용하거나 군대에서 용병으로 기용했다. 게르만 용병들은 개별적으로 로마 군대에 입대하거나 동맹군(foederati)이라는 이름으로 부대를 이루어 게르만족 지휘관 휘하의 로마군에 편입되어 로마를 위해 싸웠다. 그 대가로 그들은 변경지역의 토지를 부여 받았다. 이처럼 로마는 실질적으로 제국 변경에까지 그 문명을 확산시켰던 것이 또 다른 분파인 동고트족은 453년 훈족의 해체를 틈타 다뉴브강을 건너 동로마제국의 발칸 지역 속주를 위협했다. 이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노는 동고트족의 테오도릭을 설득하여, 오도아케르를 징계할 동로마 제국의 관리로 임명해서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489년 테오도릭은 오도아케르를 죽인 후 이탈리아에 동고트왕국을 건설하고 그 지역의 통치자로 군림했다.Ⅲ. 프랑크 왕국의 형성과 붕괴1. 메로빙 왕조와 카롤링 왕조486년에는 프랑크족의 지도자인 클로비스가 세느강과 르와르강 사이의 지역을 점령하고, 그곳을 기반으로 프랑크 왕국을 건설했다. 이어 알레만족을 축출하고 지금의 남서 독일 지방을 정복했다. 클로비스는 496년 아타나시우스파 카톨릭교로 개종함으로써 이후 프랑크 왕국의 발전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존속에도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남부 갈리아 지방의 주민은 대다수가 아타나시우스파 카톨릭교인으로서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던 서고트족에게 지배당하고 있었으므로, 507년에 클로비스가 남부 갈리아 지방의 해방을 선언했을 때 그들은 클로비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 결과 클로비스는 피레네 산맥에서 라인강의 프랑크족 원주지에 이르기까지의 광대한 지역에 프랑크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50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는 과거 서로마 제국의 전 영역이 게르만족 왕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제국의 영내에 왕국을 건설한 게르만족들의 정착양상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브리튼에 정착한 앵글족과 색슨족은 브리튼에서 로마화된 켈트 원주민을 거의 모두 축출하고 로마 문명의 흔적을 거의 완전히 없애버렸다.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은 로마의 관직을 독점하고 피정복민으로부터 공납을 거두어들이는 정복자로서 군림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아리우스파로서 정통 카톨릭(아타나시우스파)인 피정복민과는 인종, 문화, 종교면에서 완전히 구별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갈리아 지방을 장악한 프랑크족은 그들의 원주지로부터 이주하지 않고 팽창하는 정책을 폈다. 즉, 그들은 라만족의 원시적인 관습법이 로마의 법과 제도를 대신하였다. 징세제도에 있어서도 서기와 회계관에 의해 운용되는 로마시대의 징세체제는 소멸되었다. 초기 프랑크의 왕들에게는 로마에서와 같이 잘 훈련된 세금 전문가도 없었고 또 시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것을 본질적으로 나쁘게 생각하는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의 징세체제가 유지될 수 없었다. 로마시대의 토지세는 영지로부터의 관례적인 연공(tribute)으로 축소되었다. 그 외 간접세, 관세 그리고 시장세는 손쉽게 거둘 수 있었으나 지방의 백이 독식하고 국왕은 자신의 사유지인 왕령지로부터의 수입으로 생활해야 했다.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과거의 경제조직이 방치되어 쇠퇴하는 과정에 있었다. 프랑크족은 기본적으로 전사들이었으므로 도시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프랑크의 왕들도 도로건설, 교량보수, 교역로 유지, 상인보호, 교역과 상업의 장려 등과 같은 일들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도시와 내륙에서의 교역활동은 거의 소멸되었다. 메로빙 왕조의 말기의 갈리아 지방은 본질적으로 농촌경제를 위주로 한 농업지역이 되었다. 화폐는 거의 유통되지 않았으며 상인도 거의 없었다. 따라서 자급자족적인 원시 농업 경제를 향한 추세가 가속되었다.종교적으로는 클로비스의 개종 이래로 프랑크족 전체가 카톨릭교로 개종함으로써 카톨릭교가 보편적 종교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성직자의 질은 로마 시대보다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중세의 교구교회가 되는 농촌교회는 대개 그 지방의 영주를 후견인으로 삼고 있었으며, 후견인은 그 교회의 사제를 임명할 특권을 누렸다. 따라서 성직 임명에 있어서는 점점 세속 권력자로부터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나 수도원에는 세속 권력자들에 의해서 재산과 특권이 부여됨으로써 주교가 대영주가 되고 수도원이 더욱더 부유해졌다. 교회의 특권은 원시적 게르만법 대신에 교회 자체에 사법권이 주어진 불입권으로까지 확대되었다.2. 카롤링 왕조의 발전과 이민족의 침입칼 마르텔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새롭게 궁재가 처를 회복하는 데는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또한 경작지의 피해도 막심하여 때로는 황폐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토지들은 이전의 경계를 분간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 개간을 해야만 했고, 사람들은 그들의 권력에 따라서 토지를 점유하였다. 정신적인 혼란도 매우 커서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불안에 휩싸이고 있었다.) 10세기의 사회적인 환란과 무질서는 이외에도 당대의 사회구조와 당대인들의 생활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첫째, 경제적 분양에서의 폭력이다. 10세기의 경제는 경작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토지경제였다. 외침과 더불어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촌락과 촌락 사이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주로 토지의 산물로 생활하였으며, 화폐는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도시나 상인이 존재하지 않는 여건에서 농민들은 자가소비를 위한 생산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상업 활동이 이같이 희소하고 어려울 때 부자가 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강탈과 특권적인 권력의 행사였다. 영주와 전사들은 주로 이러한 수입을 통하여 생활하였다. 둘째, 법률분야에서의 폭력적인 요소이다. 개인이 독자적으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의무화한 뿌리 깊은 전통과 관습법이 갖고 있는 자의적인 성격은 재판권의 행사 과정에서 폭력이 허용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갖고 있었다. 셋째, 사람들의 행동방식에 있어서의 폭력적인 요소이다. 당시대인들은 고통의 광경을 보고도 감정적으로 둔감했으며 인간 생명에 대한 존경심이 적었다. 또한 직접적인 충동에 대한 자제력이 약했으며 육체적인 힘의 과시를 명예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생활환경의 조악한 조건을 들 수 있다. 외침과 더불어 교통상태는 지극히 나쁜 조건에 있었다. 원거리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정보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으며, 그러한 조건에서는 새로운 소식은 거의 들을 수 없었고 루머만이 만연하였다. 또한 그들의 생활은 자연 그 자체이거나 그것의 일부였으며 원시적이고 위험한 것이었다.이러한 불안정한 사회현상은 당시 사람들정한 봉사에 대한 대가로서의 조건부 토지 보유는 옛 로마의 토지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프랑크족 치하의 갈리아 지방에서는, 그렇게 보유된 토지는 은대지(恩貸地, benefice)라 불렀다.)게르만족 사회에서는 게르만 부족의 수장과 그를 따르는 전사집단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설정되어 있었다. 게르만 수장은 자신을 따르는 전사집단에게 생계를 보장해주고 대신에 그들로부터 전투 시에 군사적인 봉사를 받았다. 이러한 게르만족들 사이의 군사적 관계를 코미타투스(종사제)라고 불렀고 게르만족 자신들은 트루스테(truste)라고 불렀다. 이러한 게르만족의 종사제는 수장과 그를 추종하는 전사집단 사이의 군사 관계로서 사회적 평등관계였다.로마제국 말기에 변방을 중심으로 무력한 자유민들이 유력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commendatio)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것을 피호제(clientele)라고 했다. 또한 제국 말기에 무력한 토지 보유자가 유력자에게 자신의 토지를 양도하고 그것을 다시 은대지의 형태로 다시 되받아 경작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것을 은대지제(precarium)라고 했다. 이것은 토지에 대한 법적 점유권을 양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은대지에는 농장전체가 포함되었다.이와 같이 봉건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는 아주 이른 시기에 이미 존재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따로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주군을 위해 싸울 것을 맹세한 전사가 반드시 주군으로부터 은대지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은대지 보유자는 충성의 맹세를 한 봉신이 아니었다. 사법권과 토지보유는 아무 연관도 맺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 말기에 게르만적 기원의 종사제와 로마적 기원의 은대지제가 결합되어 봉건제가 형성되었다. 봉건제는 게르만족의 종사제에 기원을 둔 주종제와 라틴적 기원의 은대지제가 결합되어 봉건 주군과 봉신 사이에 맺어진 정치, 군사적 충성 관계를 의미한다. )2. 봉건제의 확립 시기와 적용봉건적 토지 소유관계, 영주와 농노 사이의 인신적 지배 예속관계의 싹은다.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시대역사교육 2학기 20534038 송선애{목 차Ⅰ. 머리말Ⅱ. 삼국 시대와 서진(西晉)의 통일Ⅲ. 오호의 대두와 동진, 남조1. 호족의 화북진출2. 동진정권과 강남의 정권Ⅳ. 북조의 통일과 분열1. 북위의 건국과 화북통일2. 북위의 한화정책3. 북위의 분열과 동ㆍ서위Ⅴ. 맺음말Ⅰ. 머리말한제국이 붕괴된 후로 중국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길고 긴 동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호족들의 겸병에 따른 사회적 불안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게다가 일련의 심각한 정치투쟁 속에서 전란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마침내 이민족의 침입으로 사회질서는 철저히 와해되었다. 그리하여 각 지역마다 일제히 자위체제가 조직됨으로써 중국은 새로운 형태의 전국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Ⅱ. 삼국 분열의 시대와 서진(西晉)의 통일황건의 난에 의해 한제국의 지배는 대타격을 받았다. 반란에 의해 살해된 지방관도 있었고 한 왕조에 대항해 자립을 꾀하는 움직임도 등장해 지방분권의 형성을 조장했다. 189년에 영제가 사망하자 다시 환관과 외척 사이의 정쟁이 재개되었다. 외척인 하진(何進)은 일류 명족이었던 원소(袁紹)와 강족(羌族)의 반란을 성공리에 진압한 동탁(董卓)과 협력해 환관을 타도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하진은 살해되었고, 원소는 환관세력을 일소했다. 이를 기점으로 해 각지의 군웅이 일어나 패권을 다투는 새로운 정치상황이 등장했다. 원소와 동탁, 조조(曹操)와 손견(孫堅) 등이 여타의 호족과 결합하면서 세력을 넓혀 군벌로서 전국을 분할했다.{ 군벌 가운데 황하 중ㆍ하류의 원소와 조조의 세력이 제일 강하였다. 원소는 집안 4대 가운데 3공이 5명 나올 만큼 널리 알려진 집안이었다. 따라서 원씨 집안은 집안과 구세력의 지지를 받아 기주(冀州)ㆍ청주(靑州)ㆍ유주(幽州)ㆍ병주(幷州)의 4주를 점거한 북방 최대의 할거 세력이었다. 때문에 동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 난을 진압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한편, 원소의 동맹군에 참여하였던 조조는 곤주(袞州)를 점거하고 청주 황건군을 물리친 뒤서, 둔전의 경작자는 일반 주군민 중에서 모집하거나 피정복민을 강제로 이주시켜 확보했다. 둔전민에 대한 토지의 지급면적은 1호당 100무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되며, 호족의 토지를 소작할 때와 비슷하게 수확의 50~60% 정도를 국가에 바쳐 이를 군량으로 확보했다. 후한 말 중원 지방에서 전투가 격화됨에 따라 군량과 병력확보를 위한 군사적 기능을 겸하는 농경조직이 시대적 필요에 생겨난 것이며 이것이 곧 조조의 둔전제이다. 둔전제는 유민의 생활 안정과 안정적인 군량확보를 할 수 있게 되어 위는 삼국 중 가장 강대한 국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위진남북조사』, 이공범, 지식산업사, 2004, 15~18쪽.)또한 병제면에서도 부자ㆍ형제 대대로 병역의 의무를 부과시키는 병호(兵戶)를 설정하여 병호제(兵戶制)를 만들었다.{ 조조의 병호제는 특히 유민(流民)ㆍ항병(降兵) 등으로 병호를 편성했는데 병(兵)은 가족과 함께 병적에 등록되어 영대적(永代的)인 병역의무를 졌으며 관리와 통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에 비해 일반서민은 원칙적으로 병역의 의무가 없이 임시 징발만이 되었다. (『中國歷史』, 중국사연구실, 新書苑, 1993, 267~269쪽.)조조는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도 유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명사의 추천에 의해 관리가 되는 후한의 방식을 버리고 오로지 재능만 있으면 발탁하는 등용법을 채택했다.{ 이때의 조조에게 초미의 급선무는 이미 그 휘하에 포섭되어 있는 부하들에게 적절한 관직을 수여함으로써 그 개인이나 그 집단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아울러 그 개개인의 권력지향성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또 조조는 그 세력 확대를 위해서는 관리등용에 요구되는 기존의 덕목에 구애될 만큼 여유가 없었다. 이같은 조조의 관료등용책은 전쟁으로 지새고 있을 때는 권의지책(權宜之策)으로 유효하고 유리했다. 그러나 위왕조가 성립되어 안정되어 가면서 권력기반을 충실히 하고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관료를 사대부층에서 선발해야 했다. 즉 유교 윤리에서 벗어난 인물을 등용하는 파격적인 관리등용책설이 일치하고 있지 않지만 그 기본은 일반 농민에게는 일호당 백무 정도의 경지를 확보 가능하게 한다. 그 대신 조세를 엄격히 징수한다. 귀족이나 관료층에 대해서는 전객(佃客)이 딸린 토지의 보유 면적의 최고 한도액을 신분에 따른 형태로 규정하여 방치되어 있는 토지 겸병을 규제한다. 고 하는 점에 있었다고 보인다. 이 토지법과 함께 시행된 세제 호조식은 모든 세(稅)를 모두 물납(物納)의 조(調)로 대체하여 가(家)를 단위로 세금을 징수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실정에 맞았다. (『중국사개설』, 송환도웅, 한울, 1999, 154~155쪽.)한편 진왕조는 위가 창안한 관리 등용법을 계승하여 구품중정법을 실시하였다. 이 방식은 호족세력의 존재를 인정한 황제의 수족으로의 관료기구를 만드는 데 효과적이며 실정에 맞았다. 그러나 위에서 기술한 진의 여러 제도는 결국 각지 호족세력들을 북돋아 주었을 뿐 학술상으로 문벌귀족 을 명명되는 새로운 지배자계급을 확실하게 성장시켜 버렸다.{ 『중국사개설』, 송환도웅, 한울, 1999, 155쪽.한말 이래 분열의 경향은 서진의 일시적인 통일로 극복되었지만 서진이 안정된 상태로 통치와 질서를 유지했던 것은 무제 일대에 그쳤다. 더구나 한말 이래 지방호족의 발전으로 끊임없이 유민이 발생했고, 분권적인 통치가 형성되어 주군의 지방관은 이들의 지지를 얻어 군사력을 장악한 상태였다.무제는 위나라의 멸망 원인이 황족을 억압해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공신에게 군과 현 단위로 봉토를 지급했다. 그리고 총 27명에 이르는 사마씨 일족을 제왕(諸王)으로 봉해 정권을 지탱해 주는 울타리로 삼았다. 이들 제왕들은 봉토만 받은 것이 아니라 5천 호에서 2만 호에 이르는 호구도 나누어 받았다. 또한 일정 수의 군대를 받아 각종 장군직과 도독(都督)의 직책도 겸했으며, 지방군부의 병력까지 통솔하게 되었다. 이는 바로 고대 봉건제의 재판이었다.{ 무제는 서진건국 후 오등봉작(五等封爵)을 회복하여 일족을 제후왕에 대대적으로 봉함으로써 정권을 공고히화돼 전란으로 빠져들어 갔다. 유연은 석륵을 파견해 하남ㆍ산동과 화북을 점령했고, 310년 유연이 죽은 후 아들인 유총(劉聰)이 그 뒤를 이어 유요(劉曜)를 파견해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격했다. 낙양은 311년 함락되었고 회제는 살해되었다. 이를 영가(永嘉)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서진은 멸망하게 된다. 이처럼 흉노인 유연이 왕이라 칭한 다음부터 남조 송문제 원가(元嘉) 16년(439) 선비족의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기까지 136년 동안을 오호난화(五胡亂華) 라고 부른다.서진이 멸망한 후 화북에서는 한족을 포함해 여섯 민족이 130년간 전후 18개국, 22개의 정권을 건립하는 오호십육국의 동란시대를 맞이했다.{ 오호(五胡)란 흉노, 선비, 저, 갈, 강족을 말하며, 십육국이란 최홍(崔鴻)이 지은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라는 저서에서 시대의 이름을 딴 것으로 정확히 16개국은 아니었다.전체적으로 보면 유목민족의 전투집단이 권력투쟁의 틈바구니 속으로 파고들도록 유도한 것은 문화적인 결합력에 기초를 둔 황권체제의 붕괴였다고 할 수 있다. 즉, 한대가지 지속되던 이 체제가 무너지자, 소수민족들이 그 틈을 타서 중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주동적으로 중원을 침입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중국, 그 거대한 행보』, 레이황, 경당, 2002, 151쪽.전통적인 한족의 관점에서는 오호십육국시대를 야만적인 폭군이 속출한 무질서한 난세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호족과 한족의 대립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오호시대를 거치면서 호족과 한족은 스스로의 장단점과 한계를 인식했고, 이후 북조에서 호ㆍ한의 융합체제를 성립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로써 중국의 문화에도 활력을 불어넣은 역동적인 시기였다.{ 『(한국인을 위한)중국사』, 신성곤, 서해문집, 2004, 134쪽.이 외민족은 한족에 견주어 문화ㆍ사회ㆍ경제적으로 낮은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한족과 접촉과정에서 선진적인 한족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여기에서 오호 시대에는 오호들이 원래조와 대립했다. 이를 남북조시대라 하는데, 남조의 역사는 420년 송의 건국부터 589년 진의 멸망까지 170여 년간 이어졌다.동진에서는 399년에 손은(孫恩)ㆍ노순(盧循)의 반란{ 손은은 산동성 낭야 출신으로 대대로 오두미교를 믿다가 도교의 일파인 천사도라는 민간종교를 바탕으로 민중의 불안과 불만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 노순은 손은의 매부로서 손은의 사망 후 후계자가 되어 세력 만회를 도모하였다. 이것은 귀족들의 사치와 정권의 부패 및 과중한 세역 부담에 저항해 일어난 농민반란이었지만 결국 411년 유유에 의해 평정되었다.이 일어났다. 이 반란을 평정한 유유는 남연(南燕)과 후진(後秦)을 멸망시키고 낙양과 장안 두 도시를 탈환했다. 유유는 환현(桓玄)의 반란까지 평정하고 마침내 동진의 공제에게 선양을 받기에 이른다.(420) 유유는 사씨나 왕씨 등의 문벌귀족이 아니라 지체가 낮은 가문을 의미하는 한문(寒門) 출신의 무장으로 화북 이주민의 자식이었다. 송의 무제가 된 유유는 명문귀족을 축출하고 한문 출신 군인과 관료들을 대거 발탁했다. 또한 이어 등장한 문제의 치세 30년간은 원가(元嘉)의 치세라고 일컬어지듯 남조를 통틀어 가장 국력이 강성했고 영토도 최대로 확대된 시기였다. 문제는 무제가 추진했던 소농민 위주의 경제정책과 호적의 정리작업을 계승해 농경지의 개간을 장려했고, 세역을 담당하는 호구인 과호(課戶)를 증가시켜 국가의 병력원과 재원을 확보했다.한문 출신의 황제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군사력뿐이었다. 군사력은 각지의 군단장으로 임명된 일족에게 나누어져 있었다. 따라서 일족의 실력자들 간에 내전을 피할수 없는 일이었다. 효무제 이후 10년 동안 6명의 황제가 바뀌었고 8명의 황제 중 암살을 면한 것은 3명뿐이었다. 이로써 민생의 안정이라는 국가의 기본 임무는 소홀하게 되었고, 마침내 송조를 배반한 무장 출신 소도성(蕭道成)이 실권을 장악해 제를 건립했다.(479) 소도성 역시 유유처럼 한문 출신의 무인이었다. 송조 말기의 내전에서 군공을 세워 제를 건립달한다.
Ⅰ. 머리말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 모택동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온힘을 쏟았다. 모택동은 사회주의 개조를 지도하여 독자적인 방법으로 국내건설을 추진하였다. 모택동은 사회주의 건설의 이념이 흔들리거나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면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사건을 일으키곤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대약진운동 이 될 것이다. 대약진운동은 중국에서의 사회주의(社會主義) 건설에 관해, 1958년부터 60년 전반기(前半期)까지 행해진 대대적인 건설운동으로 중국 현대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운동이다. 중국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흐름인 문화대혁명 역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다. 모택동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의 경제력을 극복하려 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련의 대중 캠페인 으로서 대약진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결핍된 자본과 자원을 인민 대중에 대한 착취를 더욱더 증가시킴으로써 충당하려는 것이다.본문에서는 중국현대사를 논함에 있어 빠질 수 없는 대약진운동의 원인과 전개,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대약진운동의 원인중국 공산당은 중국 국내와 국제적인 정세의 영향과 폴란드와 헝가리사건의 교훈을 감안하여 8대에서는 당의 건설을 강화할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정풍(整風)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정풍운동은 처음에는 각급기관ㆍ연국기관ㆍ학교ㆍ문화예술 기관등의 비평과 건설적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풍운동의 방법인 대명(大鳴)ㆍ대방(大放)ㆍ대자보(大字報)ㆍ대변론(大辯論) 등을 하는 과정 중에 지식인들의 중공비판이 의외로 신랄하게 전개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중공은 이를 사회주의를 파괴하는 부르조아 우파분자의 행위로 단정, 6월 8일부터 정풍운동은 반우파 투쟁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이로 하여 이때 비판적 지식인들은 탄압을 받았으며 정국은 더욱 극좌로 향하였다.이 심각한 우파투쟁의 확대화는 또 중국공산당내의 좌 경사상의 발전을 직접적으로 조장하게 되었다. 정치와 이론적인 면에서 반영된 가장 중공8대의 중국사회 주요 모순에 대한 과학적인 진단을 바꾸어버린 데 있다. 그리하여 1957년 10월 모택동은 중공8기 3중전당대회에서 현재 중국의 주요 모순은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의 모순, 사회주의의 길과 자본주의의 길의 모순이라고 잘못된 지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58년 5월 당의 8대 2차회의에서는 모택동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국에 여전히 두 개의 수탈계급이 존재한다고 확정지었다. 하나는 자산계급우파이며 이들은 타도되었던 지주매판계급과 기타 반동파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민족자산계급과 지식분자라는 것이다. 그 결과 계급투쟁은 부단히 확대되고 고도로 집중된 통일 지도와 관리를 강화하게 되어 정치체제는 진일보 집권화의 추세로 치닫게 되었다.당의 좌경사상의 발전은 주로 경제건설면에 반영하게 되었다. 중공8대에서 제의한 반보수 반모진하면서 종합적으로 온전한 평형속에서 전진한다는 지침에서 벗어나 맹목적으로 신속함과 성취함을 추구하였고 우경파 보수를 부단히 반대하였으며 크게 군중운동을 전개하면서 생산건설의 초고속발전을 기도하였다. 1958년의 대약진 과 인민공사화운동의 실행되면서 좌경사상은 절정에 다르게 된다.1957년 후반기 무렵, 모택동은 더 이상 소비에트의 모형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았다. 경제 성장은 너무 더뎠고, 기술 전문가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았으며 자본 부족으로 너무 많은 제약을 받았다. 더욱 빠른 속도로 현대화하는 길을 찾으려면 중국이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자원, 바로 노동력을 이용하여야 했다. 모택동은 대약진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수억 명의 민중들이 힘을 모아 함께 일을 하면 중국은 가난한 국가에서 부강한 국가로 변모될 것이며, 이전에 국내와 국제 착취 계급에 의해 막혀 있던 중국 대중들의 잠재적인 창조적 역량이 해방되어 중국은 15년 이내에 공업 생산력에서 영국을 능가할 것이라 주장하였다. 또한 반우파 투쟁도 계속되어, 특히 지방의 지도자로 적극적이지 않다고 보였던 사람들 대다수가 실각되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1958년 당 제8차 전국대회 제 2차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서는 급진적인 사회주의화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 이 채택되었다. 이른바 대약진운동 의 시작이었다.Ⅲ. 대약진운동의 전개대약진의 야심은 주은래의 말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공업 생산량이 매년 20%정도 혹은 그 이상이면 소약진이고, 25%정도 혹은 그 이상이면 대약진이며 30%이상이면 대대약진 이라 하였다. 대약진이란 말은 의 1957년 11월 13일자 사론인 전민을 발동하여 40조 강요를 토론하고 농업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 에서 비롯되었다. 중공 중앙과 모택동이 제출한 농업발전강요 40조 에 따르면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는다. 와 고전 3년만 하면 면모를 바꿀 수 있다. 고 하였다.이와 같은 구호아래 전국의 농ㆍ공업 전선에서는 선진 기술을 배워 선진을 따라잡자는 노동시합을 전개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긴축된 경제를 계속 발전시킬 수 있는 관건은 중국의 잉여 노동력이고, 또 하나는 노동자들의 각성과 창조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 밖의 중국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또한 경제 발전의 규율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구체적으로는 공업목표가 철강 생산에 편중되었으며, 그 품질은 거의 무시되고 오직 증산만을 강조했다. 첫해의 목표는 1957년도 실적인 535만 톤의 두배인 1,070만 톤으로 증산한다는 것이었다. 농업면에서의 목표는 국가와 공업 부문에서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농민의 집약농업에 의지하고, 대중운동에 바탕을 둔 대규모 수리ㆍ관개건설과 비료주기운동을 전개해 식량 생산을 대폭적으로 증산한다는 것이었다.가속화된 공업화의 전망은 한층 더 나아간 농촌의 변혁과 짝을 이루었다. 1958년 수개월 사이에 전국의 농업 합작사가 거대한 인민공사(人民公社)로 합병되었다. 인민공사는 등소평 시대 초기에 해체될 때까지 중국형 사회주의 전형이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사회구성 부분이었다. 인민공사들은, 농민들을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고 그들에게 학교ㆍ병원 도시 생활의 편익을 가져다주어,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를 완성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농민들이 독창적으로 씨앗을 촘촘하게 심거나 혹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료를 사용하는 소규모의 공장들을 개업함으로써 생산성의 향상을 단언하였다.모택동을 신뢰한 당 간부와 일반 근로자들은 이상주의적 열정의 물결에 휩쓸렸다. 교육받은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경제학자들과 공학자들이 그 전 해에 반우파 투쟁에서 강등되거나 해임되었기 때문에, 계획은 전문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열의를 보여 주기에 여념이 없는 지방 간부들에 의해 짜였다. 1958년 늦여름과 가을에 인민공사ㆍ공장ㆍ학교와 그 밖의 단위들이 소규모의 토착 기술을 대규모의 외국기술과 결합하여 강철 생산을 배가하기 위한 철강 용광로 를 세웠다. 여성들이 논밭의 대부분을 떠맡은 반면 농촌 남자들은 공공사업을 하러 행진해 갔다. 농촌 여성이나 남성 모두 더욱 많이, 더욱 빠르게, 더욱 좋게 하고, 더욱 아끼자. 와 같은 구호와 공산주의는 천국이다. 인민공사는 사다리다. 만약 우리가 사다리를 만든다면 우리는 고지에 오를 수 있다. 와 같은 노래들에 고무되었다. 노동자들이 이러한 사업에 장시간 동원되면서 집이나 일상적인 농장 일에는 거의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자 그들을 위해 단위들에 무료 식당을 세우도록 장려하였다. 논평자들은 이러한 조치를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상의 주요한 단계로 환호하였다. 현들은 농업 생산이 1,000% 심지어 1만% 증가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밀이 빽빽하게 자라서 아이들이 밀 꼭대기에 서 있어도 밀이 꺼지지 않는 밭의 사진들이 출판되었다. 중앙위원회는 밀의 전국 생산량이 한 해 만에 거의 배가 되었다는 주장을 해외에 떠들썩하게 알렸다.Ⅳ. 대약진운동의 결과대약진운동의 결과를 결론적으로 실패였다. 모택동의 기대대로 경제가 팽창하기는커녕, 대약진운동은 근 10년간의 경제 발전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렀다. 196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체 생산량이 1957년 수준을 되찾았다. 모택 야기된 파국은 1959~60년에 소련 고문관들이 사실상 모두 떠나버려 100여 건의 주요 건설 계획이 중단됨에 따라 더욱 악화됐다.대약진운동은 각각의 객관적 조건과 역량 및 상호간의 균형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진행과정을 조정할 수 있는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곧 심각한 왜곡 현상을 드러냈다. 또 인민공사의 급속한 증가는 대부분의 경우 물질적, 제도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채 실시되었기 때문에 간판만 인민공사이고 실제로는 종래의 합작사 그대로였던 것이 많았다. 더구나 인민공사에서는 일하든 일하지 않든 똑같다. 라는 왜곡된 평등주의와 위로부터 이루어진 명령주의와 조달주의 때문에 농민의 생산 의욕이 대폭적으로 저하되는 현상이 확산되었다. 또한 자유롭게 식사하는 공공식당과 같이 공산풍(共産風) 때문에 식량과 자재를 심각하게 낭비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우파 투쟁이후 이러한 급진주의 노선을 제어하자는 주장이나 급진주의 노선과 다른 방향을 제기하는 것은 점점 어렵게 되었으며, 하급간부는 상급간부에게 비판받지 않기 위해 생산보고를 과장하고, 그것이 위로 가면서 눈덩이처럼 부풀어올라 비현실적인 숫자로 발전했다.일부 대약진운동은 성공적이었다. 전국에 걸쳐 교량ㆍ철로ㆍ운하ㆍ저수지ㆍ발전소ㆍ광산ㆍ관개 사업들이 진행되었고 그중 다수는 영속적인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사업이 너무 조급하게 기술 지식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땅을 너무 깊이 갈아 토양이 염화되는 등의 오류가 범해지는 경우가 흔하였다.목표로 설정된 수확량을 채우기 위해 허위보고가 성행했고 식량 부족 현상은 더욱 확대되었다. 중앙정부는 이러한 보고에 기초하여 징발을 했기 때문에 식량 공급의 과다한 몫을 농촌에서 떼어갔다. 여러 지역에서 지방 농민들은 생존에 필요한 식량이 절반도 남지 않았다. 배급이 널리 확대되었고, 아사를 막기 위해 멀건 죽을 나누어주기 위한 죽 취사장이 세워졌다. 이후의 인구 조사 자료를 보면, 3년간의 고난 시기(1959~1962)의 기근으로 대략 3,000만 명 이상이
여성해방운동(女性解放運動, women's liberation movement)이란 남녀의 성별(性別)에서 오는 모든 차별을 철폐하려는 운동을 말한다. 요즘 들어 많이 들려오는 페미니즘(feminism)의 뜻이 이와 비슷하다. 페미니즘(feminism)은 여성억압의 원인과 상태를 기술{하고 여성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운동 또는 그 이론이다. 페미니즘이란 용어는 보통 여성해방 또는 남녀평등주의라 해석되기도 한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는 여성해방운동이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본문에서는 이 여성해방운동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보고 그 성과와 과제에 대해서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페미니즘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서양은 근대 이후 인간 평등사상이 널리 퍼짐으로써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봉건적 절대주의를 붕괴시켰다. 이 사건은 피억압자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해방시켰다는 것, 더욱이 해방된 자는 모두 피억압자라는 시민혁명의 이념을 세우게 하였고 역시 피억압자였던 여성에게도 여성해방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근대의 시민혁명의 한계는 그 해방된 자들은 소유권에 대한 불가침의 신성권의 주장으 로 인해 무산자인 여성은 그 해방으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근대사회가 해방한 인간이란 일부 시민계급인 남성일 뿐이었고, 봉건적 압제로부터의 해방이란 남성에게 가장의 지위를 보장해 주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여성을 토대로 한 남성의 해방일 뿐, 본격적으로 여성해방이 시작된 시기, 즉 여성해방의 사회적 계기가 된 때는 "산업혁명"때였다. 참정권 획득운동, 교육의 동등한 기회요구와 매춘 금지 등의 요구가 이 때 제기되었는데 이는 중상층의 지식층 출신의 여성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때문에 형식적 권리의 한정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여성 해방운동은 다시 소강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 후 1960년대 후반의 미국 내 반체제 운동(인종차별 반대운동, 히피문화, 공허반대운동)의 커다란 흐름을 배경으로 여성해방운동이 탄생하게 된다. 인간사회에서의 계급이라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이외에도 인종에 의한 억압과 차별의 관계가 있으며, 또한 성에 의한 차별들도 있다는 것을 여성자신이 자각하고 전면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즉 여성해방운동은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여성의 전면적인 해방, 성차별 사회의 철폐라는 인류사적 전망을 지닌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자본주의의 대두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성운동과 여성해방이론은 크게 자유주의적, 마르크스주의적, 급진적, 사회주의적,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등 다섯 가지 조류를 이루면서 발전해왔다.{) 『여성종속과 여성해방』, 유성희. 이원철, 용인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인문사회논총 제7호 (2001. 8) pp.205-235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억압의 원인을 여성들이 천성적으로 남성들보다 지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능력이 부족하다는 잘못된 신념에 의한 남성들과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제도적 불평등에서 찾고 있다. 여성해방은 인간이 천부적으로 갖고있는 이성에 의한 제도적 개혁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서구에서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대두한 초기 여성운동을 통해 20세기초에 이르러 여성들이 시민으로서의 권리, 즉 보통선거권을 획득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여성종속과 여성해방』, 유성희. 이원철, 용인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인문사회논총 제7호 (2001. 8) pp.205-235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이론을 부인하고, 그 대신 인간의 존재는 의식이 아닌 노동 산물의 결과, 즉 생산양식에 의한 존재 구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인하여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여성문제의 원인과 그 해결책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근본적인 변혁 없이는 그 체제 내부의 사회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있어서 여성억압은 계급사회의 등장과 동시에 출현한 가부장적 일부일처제의 가족의 형성에서 비롯되고, 여성해방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한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인 사회관계의 철폐를 통해 이루어진다. 사유재산이 폐지되고 계급불평등이 소멸된 사회에서는 일부일처제 가족이 더 이상 재산 상속의 수단이나 경제단위로서 기능하지 않으며 이성간의 애정과 평등에 기초한 진정한 일부일처제로서 자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종속과 여성해방』, 유성희. 이원철, 용인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인문사회논총 제7호 (2001. 8) pp.205-235서구에서 도시빈민운동, 학생운동, 반전운동 등 주변계급들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형성된 급진적 페미니즘은 서구에서 자유주의적 여권운동의 한계가 노정되고 사회주의적 사회로 발전한 나라들에서도 여성차별의 잔존으로 여성해방운동의 실패가 지적되는 사회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여성문제의 해결은 제도적 개혁, 사유재산의 폐지 등의 관점을 모두 거부하고 성(sex) 자체에 근거한 독자적 이론을 정립하였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성차별의 기반이 되는 구조로서 가부장제 개념을 도입하고 자연적 조건으로 간주되어 온 생리적 제약을 문제시한 점은 여성문제의 다양한 영역들을 발굴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여성종속과 여성해방』, 유성희. 이원철, 용인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인문사회논총 제7호 (2001. 8) pp.205-235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수용하면서, 급진적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은 프로이드의 생물학적 억압이론을 거부하고 그 대신 여성의 성별 정 체성과 태도를 형성하는 경험적, 문화적 영향력을 강조한 입장이다.사상의 집합체로 이해될 수 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론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두 가지 접근방식{) 이원 체계이론과 통합체계이론을 말한다. 이원 체계이론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별개의 다 른 사회 관계 형태이고, 각각 별도의 독자적인 물적 토대를 가진 별개의 현상으로 나타나다 가 그 다음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여성을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통합체계이론은 정신이 육체와 별개일 수 없듯이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한 가지 개념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다.을 발전시켰다. 이 접근방식들은 둘 다 모두 여성억압의 완벽한 설명을 제공하는데 목표를 두지만 아주 다른 방식을 채택한다.{) 『사회주의 여성해방론』, 공미혜, 부산여자대학 여성문제연구소, 여성연구논집 3('92.3) pp.49-59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진리와 실재에 대한 전통적 가설들을 거부(해체)하기 때문에 여성억압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해결책을 제공하기를 희망하는 그러한 페미니스트들에게 이론적 문제점을 야기할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거부는 복수성, 다원성, 차이라는 페미니즘의 실재를 잘 표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은 먼저 여성의 타자성을 해체하여 긍정적인 혁명 등을 부각시킨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의 원인은 불문하고 한마디로 해체를 통한 비 이분법적으로 여성해방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여성종속과 여성해방』, 유성희. 이원철, 용인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인문사회논총 제7호 (2001. 8) pp.205-2351차대전 이전의 시기에 이미 여성해방운동은 전개되고 있었다. 국제여성회의 는 경제, 가족, 정치의 면에서 여성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을 계속했다. 각 지역에는 지부가 설립되었고 같은 무렵에 국제여성참정권동맹 이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미국과 영국에서 조직된 여성참정권에 반대하는 위원회에 대해서 대항했다. 여성의 참정권을 추진하기 위해서 서양 국가들에는 각국 지부가 형성되었다.1차대전 이후 21개 국가의 여성들이 투표권을 획득했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단체들이 만들어져 여성해방운동에 힘썼다. 서양 여성해방론자들이 경제적 정치적 시민권 면에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을 때 러시아 여성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남성들과 함께 활발하게 준비한다. 이 혁명에 의해 러시아 여성들은 그들의 권리에 도달하였다. 한편, 파시즘{) 1919년 이탈리아 B.무솔리니가 주장·조직한 국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반공적인 정치적 주의운동.국가에서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도구적 여성 개념이 수립되었다. 그리하여 20세기 후반 여성해방운동은 파시즘에 대한 저항으로 전개되었다. 2차대전 후의 20년 동안의 사회는 여성의 가능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은 생산하고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1965년도 이후에는 피임약의 개발이 가능하게 되면서 여성들은 성과 생식을 분리한다는 몹시 오랜 시도를 실현할 수가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서양의 많은 나라에서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이 출현하게 된다. 그녀들은 어머니 세대보다 높은 교육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베티 프리단이 전미여성기구 를 창립했는데 특히 기혼여성을 결집시켰다. 독신의 젊은 여성들은 전미여성기구 를 떠나 1967년부터 훨씬 급진적인 운동인 여성해방운동 의 최초의 핵을 구성했다. 여성해방운동 은 압력단체로서 공권력, 연방정부, 지방정부제, 매스 미디어, 신문과 텔레비전의 연결망, 대학에 대하여 수없이 많은 활동을 하였다. 구체적으로 성차별주의적인 여성상을 변화시키고 고용과 임금의 면에서 여성차별을 폐지했으며 임신중절이 권리를 획득하였다.
1945년에 이루어진 해방은 우리의 주체적인 해방이 아닌 강대국에 의해 이루어진 해방이었다. 남북한의 배후에는 미소라는 냉전체제의 대립이 있었다. 한국전쟁은 비록 국내전의 양상을 띠면서 시작되었지만 발발 직후 미국이 참여하면서 전면전의 양상을 띠며, 그 결과 한국전쟁은 해방정국과는 질적으로 다른 1950년대를 시작하는 시발점이 되었다.국내적으로 한국전쟁의 기원은 일제 때부터 비롯되고 해방정국에서 현재화된 혁명과 반혁명의 갈등, 곧 일제시기 이후의 한국사회 모순에서 비롯된 반제반봉건혁명을 둘러싼 갈등에서 찾을 수 있다. 국제적으로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계기로 대립하게 된 미소의 대립과 그 속에서 전개된 동아시아 사회주의적 민족해방투쟁 세력과 미국 또는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 사이의 대립에서 찾을 수 있다. 대체적으로 1945년 이후 1947년까지의 국내외 상황이 여기에 해당 될 것이다. 1947년 이후 국내외적으로 적대적인 양극구조는 점차 분명한 모습을 갖추어갔고 1949년에 이르러 거의 완성하게 된다. 1949년에 들어 유독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상대방을 자극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또한 미국의 정책이 봉쇄정책에서 롤백(roll back)정책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롤백정책은 38선에 이북으로까지 미국의 행동반경이 확대될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한 국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결국 1950년에 들어 남한정권의 내부위기, 북한 군사력의 강화, 주변정세 등이 겹쳐지면서 상황은 전쟁으로 치달았던 것이다.한국전쟁의 직접적 결과로서는 인적 물적 피해를 들 수 있다. 구조적 영향으로서는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 체제에 미친 영향, 미ㆍ일ㆍ중ㆍ소에 미친 영향, 남북한 분단구조 및 세계적 냉전구조 등에 미친 영향을 들 수 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북한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체제를 형성해 나갔다. 전쟁 이후 북한 사회주의에 미친 가장 커다란 특징적 영향은 전쟁으로 파괴된 생산력을 전쟁으로 고양된 의식을 통하여 일거에 증대시켜 산업화하려 했다는 점일 것이다. 한편 전쟁은 남한이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어 자신의 자본주의체제를 재생산하도록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게는 반공반소의 극단적인 매카시즘적 분위기를 야기시켰고 병참기지 역할을 한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켰다. 중국은 전쟁에 참전하여 제 3세계에서 위신을 높이는 한편 내부적으로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지도력을 높였다. 그러나 중국은 동시에 많은 인명을 희생을 했으며 대만 통일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한편, 미국과 대립하였다. 소련은 한국전쟁에 대한 어중간한 태도로 인하여 양 진영에서 환영받지 못하였고, 북한이 친중국화 하도록 만들었다. 전후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무산되었고 남북은 언제든지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휴전상태에서 군사적 대립을 계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