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의도***'세속의 신'으로 군림하는 TV를 깔보는 자 그 누구인가.TV를 가리켜 '제2의 신'이라고 말하는 건 결코 온당치 않다. 우리 시대의 무신론자들에게 '제2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쟈끄 앨뤼의 표현 그대로, TV는 오만한 과학문명도 해결해내지 못한 죽음에 대한 망각을 위해 존재하는 '인공적 천국'인 것이다.현대인들은 엄청난 정보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격이라 할 만한 TV... 허나 많은 이들이 보는 TV가 잘못된 정보를 전하고 있다면? TV의 자기 반성이자 자아 비판 격인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너무도 오만하게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는 TV는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한다. "시청자는 왕"인 것이다. 시청자들의 따끔한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자기 발전의 발판으로 삼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이에 이 프로그램의 필요성이 더 절실하고 존재성이 더 확고한 것이다.***구성***매주 토요일 오전 8시에 방송되는 MBC-TV 「TV속의 TV」는 방송 비판 의견을 수렴하고 개선을 모색하고 방송 정보를 알려주는 TV 옴부즈맨 프로그램이다. 정준영 동덕여대 교수와 이주연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방송되는 「TV속의 TV」는 방송과 시청자와의 의사소통을 위한 통로로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고 보다 나은 방송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시청자 의견', '쓴소리 한마디', 'TV속의 TV', '집중점검', '이윤철의 옛날 TV' 등 다양한 코너로 구성돼 있다.이번 주 코너별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1. 시청자 의견「일요일 일요일밤에」 서경석을 위한 게릴라 콘서트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시청자들이 MBC에 바라는 따끔한 충고로 이루어진 여러 지적들을 위주로 방송한다.2. TV를 말한다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언론 개혁에 대하여... 또 언론 매체에 의하여 왜곡된 사례들을 (대우차 노조 운동) 알아보고 지난 잘못들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아본다.3. 집중 점검 즉, 몸이나 정신 등이 일반인들보다 불편한 이들... 대중 속에서 소외당하던 이들을 다룬 TV방송을 파헤쳐 본다. 이런 프로그램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알아보고 자기 반성을 해본다.4. 이윤철의 옛날 TV < TV >경제위기의 고비 때마다 TV 는 각종 캠페인과 드라마 내용에서 경제 살리기를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보여왔다. 심지어는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경제 살리기의 내용을 많이 선보여왔는데, TV가 경제 살리기 역사에 어떻게 긍정적으로 기여해왔는지 알아본다.5. 쓴 소리 한마디 목표 달성 토요일 등의 프로그램에서의 고 서지원 노래 제목의 오류등 여러 프로에서의 눈에 띄는 오점 , 오자, 미흡한 점등을 점검한다.****평가****'세상은 요지경' 하면 개성파 배우 신신애가 엽기적 표정으로 막춤을 추며 부르던 노래가 떠오를 것이다. 그 가사가 신랄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이런 부분이 기억난다. 엿새 동안 열심히 죄를 짓고 일주일에 한번 예배당 가서 또 열심히 회개하고 다시 죽어 라고 죄짓고 사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텔레비전의 옴부즈맨 프로그램이 처한 환경도 엇비슷하다. 평상시엔 글자 그대로 평상심으로 제작하다가 갑자기 옴부즈맨 시간이 되면 반성도 하고 다짐도 하고 막 그런다. 그러나 웬걸. 개선의 풍경은 전혀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이라 지만 이건 참 해도 너무 한 것 같다.정치판에서 주고받는 식의 이야기로 하자면 옴부즈맨은 그야말로 제작의 2중대 노릇을 하고 있다. 면피용, 혹은 구색 맞추기식 이라는 말이다. 제목은 모두 그럴 듯하다. 'TV속의 TV' (MBC), 'TV는 내 친구' (KBS), '열린 TV 시청자세상' (SBS)등 제목대로라면 정말 친구가 되어 열린 TV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한다.
-프랑스 영화, 다양성의 미학-프랑스 영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다. 물론 상반되는 입장이 공존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대략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정리된다. "따뜻하고 감성적이나 대개는 지루하게 끌다가 밋밋하게 끝나버리는 영화들".그러나, 그럴듯해 보이는 이 표현이 바로 프랑스 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오해를 낳는 주범이다. 영화를 탄생시켰고 영화사의 주요 시점마다 중요한 변화의 흐름을 주도했던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한 지나친 평가절하인 것이다. 한 마디로, 프랑스 영화는 세계 어느 나라의 영화보다 다양한 작품들을 생산해냈다. 초현실주의가 풍미했던 1920년대의 실험 영화들에서부터 고다르(Jean-Luc Godard)와 트뤼포(Francois Truffaut)가 주도한 1960년대의 누벨 바그(Nouvelle Vague) 영화들에 이르기까지, 장 가뱅(Jean Gabin)과 미셀 모르강(Michele Morgan)이 등장하는 1930-40년대의 문예 영화들에서부터 알랭 들롱(Alain Delon)과 장폴 벨몽도(Jean-Paul Belmondo)를 앞세운 1970년대의 갱영화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영화의 온갖 다양한 장르와 형식들을 넘나들며 그 어느 나라보다도 열정적인 시도를 벌여왔던 것이다. 어느 표현으로도 정의하기 힘든 '다양성', 이것이 바로 프랑스 영화에 대한 진정한 정의가 될 것이다.그러므로 이제 되풀이되어온 오해에서 벗어나, 따뜻하지 않고 감성적이지도 않은, 또 그런 대로 재미있고 충격적이기도 한 다양한 프랑스 영화들을 진지하게 찾아보기로 한다. 진지한 시선의 시작은, 일단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현재로 내려와 보는 것이다. 따라서, 짧은 개괄이 되겠지만 프랑스 영화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본다. 그리고 단순한 요약이 되지 않도록, 프랑스 영화의 다양한 경향들을 세계 영화의 흐름 속에 통시적, 공시적으로 위치시켜보는 일도 함께 한다.@프랑스 영화의 성장과 하강뤼미에르 형제와 멜리에스의 영화들을 발판으로 프랑스 영화는 영화사 초기의 세계 영화 흐름을 주도하면서 급속한 성장을 거듭한다. 1900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도 한 몫을 하는데, 각종 영사기와 필름 등이 출품되었고 박람회 기간 동안 150만 명의 관객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또한 파테(Pathe)와 고몽(Gaumont) 영화사의 창립은 프랑스 영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1896년 파테 삼 형제가 세운 파테 영화사는 필름의 생산과 영화 제작, 극장 상영 등 영화 산업의 전 분야를 아우르면서 단기간에 급성장한다. 그리고 같은 해 레옹이 설립한 고몽 영화사도 프랑스 영화 산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프랑스 제2의 영화사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1900에서 1910년 사이, 이 두 영화사의 영화 제작편수는 한때 미국 영화 전체의 제작편수의 두 배를 넘을 정도로 엄청난 양을 기록했고, 또 전 세계에 자회사를 둘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거두었다. 이 두 영화사를 중심으로 1914년까지 수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으며, 특히 배우인 막스 린데(Max Linder)와 감독 페르디낭 제카(Ferdinand Zecca), 루이 푀이야드(Louis Feuillade) 등에 의해 희극 영화와 시리즈 영화들이 양산되었다. 그러나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프랑스 영화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대부분의 영화제작사는 전쟁기계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반면, 동시기의 미국에서는, 미국의 영화산업을 독점하고 있던 에디슨의 권력이 독점 규제법의 의회 승인으로 무너지게 되고(1915), 당시 헐리우드라는 변방에 모여 힘겹게 투쟁하던 독립영화사들(워너 브라더스, 폭스 영화사 등)이 새로운 활기를 찾게 된다. 따라서 1910년대 후반부터 채플린(Charlie Chaplin)과 더글라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 등을 앞세운 미국 영화들이 프랑스 영화 시장을 잠식해 들어왔고 프랑스 영화 대 미국 영화의 비율은 1대 8까지 떨어지게 된다.-독일 표현주의 영화-미국의 대표적인 청년문화지 월간 (Wired)가 ‘수호성인(聖人) ’으로 추대했던 마샬 맥루한은 저서 에서 “미디어는 메 시지”라는 말을 했다. 정보는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의 형식에 따라 달라 진다는 뜻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는 맥루한의 화두에서 출발한다. 하지 만 독일 표현주의자들은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 자체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음향, 색조, 영상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영화의 본질을 깊이 탐구하며 한걸음 전진한다. 즉 영화가 단순한 기계가 아닌 제7의 예술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독일 표현주의자들은 현실을 기계적으로 복제하는 사실주의를 넘어, 영화 적인 현실세계에 주목하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 소리, 색, 시공간적 연속 성 등 매체의 한계이자 장점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이들은 피사체를 객관 적으로 반영하는 카메라에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시각을 부여했다. 또 빛 의 화가 렘브란트를 연상시키는 로 키(Low-key)와 키 라이트(Key-light) 를 사용한 극단적 명암과 정밀하게 짜인 세팅을 종종 사용하고, 심지어 배우들의 연기조차 과장되면서도 정교화됐다. 영화의 공간도 초현실주의 적인 이미지를 담으며 그로테스크하게 바뀌고, 기하학적이고 왜곡된 미장 센이 도입됐다.예를 들어 온화한 표정을 가진 살인마 K를 설정해보자. 기계적인 사실주 의에 입각한다면, 평안한 모습의 살인마의 ‘현상’만 찍을 것이다. 그러 나 K의 ‘본질’은 살인마다. 표현주의자들은 이러한 본질에 집착한다. 따라서 K가 비록 웃고 있을지라도, 악마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대비된 조명을 쓰고, 주인공의 웃는 연기조차 과장될 것이다. 또 배경 역 시 기괴한 선이나 공간으로 바뀔 것이다. 자 그럼 생각해보자. 어떤 장면 이 더욱 사실적일까? 아마도 살인마란 본질에 더욱 가까운 표현주의자들 의 형식에 손을 더 들어줄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리얼리즘(die Neue Sac hichkeit)에 대한 믿음이 표현주의의 시작이자 끝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는 마치 어두운 조명과 같이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출 발한다. 표현주의 영화는 문학의 로스트제너레이션 사조처럼, 1차대전 후 의 포연내음 속에 나온 형식이다. 전쟁 뒤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에 따른 굴욕감과 패배주의로 물들었고, 기존 가치관의 붕괴, 탈도덕성, 불확실한 미래는 물가 폭등에 따른 마르크화의 폭락, 무정부에 가까운 사회 폭동 등과 맞물려 최악의 상태를 맞이했다. 이렇게 위축된 심리상태와 터질듯 한 불안감 속에서, 새로운 양식의 영화를 발달시키려는 사회적 카타르시 스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의 브레히트와 게오르크 카 이저의 희곡들, 차가운 추상으로 유명한 칸딘스키, 폴 클레 등을 중심으 로 새로운 미술 경향이 대두됐고, 이런 새로운 양식들은 그대로 영화에 흡수됐다. 이렇게 형성된 표현주의 영화는 아른하임이 지적하듯, 조작되 는 서술구조를 통해 현실을 해석하고 재배열하고 강화시킴으로써 현실세 계를 초월하면서도 얽매이는 이미지를 갖게 한다.본격적으로 표현주의 영화가 확립된 시기는 1920년 전후다. 로베르트 비 네 감독의 과 프리츠 랑 감독의 가 만들어진 것이 1919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감독의 가 제작된 것이 1922년이었다. 그리고 이들 표현주의 영화 삼총사 와 더불어 촬영감독 프리츠 바그너나 빌리 하메이스터, 미술감독 헤르만 바름, 오토 훈테 그리고 배우 에밀 야닝스 등이 활동하며 표현주의 영화 의 기본 골격을 마련한다. 그리고 20년대 중반에 이르러 같은 작품들이 제작되어 표현주의는 세계 영화사의 한획을 긋게 된다. 이후 히틀러의 징고이즘적 통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표현 주의 거장들은 30년대 할리우드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기괴한 미장 센, 조명, 분장의 특성을 가진 표현주의적 특성들은 (1931 ), (1931) 등 공포영화에 응용됐다. 40년대 필름누아르 장르의 발달에도 독일 표현주의 영화는 산파역할을 했다. 또 표현주의 영화 기법 은 프랑스의 전위 영화에도 영향을 주었다.-1950년대 / 일본 영화의 황금기-1899년, 근대화의 일환으로 다른 서구 문화 문물과 함께 받아들여진 영화는 일본에서 재현 방식이나 산업 등 모든 면에서 서구와는 다른 독특한 양식으로 발달했다. 일본은 1912년네 '니카츠 (日活)'를 건립하여 대형 메이저 영화사를 중심으로 한 스튜디오 시스템 을 탄생시켰고, 변사라는 특이한 제도와 함께 가부끼와 노 등 전통적인 재현 양식을 통한 일본만의 독특한 영화 양식을 개발하였다.일본 메이져 시스템의 역사는 상당히 길다. 1904년부터 소규모 촬영소가 도쿄와 교토에 자리잡았고, 이 영화사가 1912년에 합병되면서 최초의 메이져 영화사인 니카츠가 탄생한다. 그 후 메이져 대형 영화사의 스튜디오 시스템은 도호, 도에이, 신도호, 쇼치쿠, 다이에이 등의 합세로 1950년 대에 이르면 6대 메이저 시대를 맞는다. 이들은 교토와 도쿄에 시대극과 현대극 스튜디오를 따로 두고 각기 다양하게 영화를 제작했다. 일지감치 스튜디오 시스템을 정착시킨 일본은 대작을 제작하여 외국 영화와의 경쟁에서 늘 우위를 지켰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프란시스 스코트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Fitzgerald)의 대표작 를 읽었다. 도입 부분은 참 잘 읽혀졌는데, 뒤로 갈수록 지루하고 따분했다.작가의 1925년 발표작. 이 작품은 '눈부신 예술적 성공'이니 '완벽한 장편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이 작품은 영화 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책표지 그림이 그 영화의 한 장면이다. 두 남녀 주인공의 모습. 로버트 레드포드가 개츠비 역. 기회가 되면 영화로도 보고 싶다.이 작가는 191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쳐 미국에서 활동한 풍속 소설가로 평가된다고 한다. 작품에 묘사된 그 당시 미국 상류층의 모습은 따분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만큼이나 따분했다.개츠비의 옆집에 사는 캐러웨이가 소설을 전개한다. 작중 화자다. 호화 저택에서 연일 파티를 여는 수수께끼의 인물 개츠비에 대한 이야기. 가난한 청년(개츠비)이 부잣집 여자(데이지)를 사랑했으나, 신분 격차를 느끼고 5년 후에 성공을 거두어 데이지를 다시 만나 사랑하고자 한다. 그러나 데이지는 이미 결혼한 상태.연일 파티를 여는 이유는 바로 데이지가 자신의 집에 오기를 바래서다. 작중 화자가 데이지와 개츠비를 재회시켜 준다. 다시 옛사랑을 떠올리는 두 사람. "데이지는 나를 사랑한다."라고 데이지의 남편 앞에서 당당하게 단언하는 개츠비. 5년이나 지났는데,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다니. 개츠비, 너무 멋있당!데이지가 차 사고를 내서 사람을 죽이는데, 그 죄를 개츠비가 뒤집어쓰려고 한다. 아직 확실한 사고의 조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차 사고로 아내를 잃은 남편(월슨)이 무작정 범인이 개츠비라고 추측하고 그를 쏴 버린다. 5년만에 만나 데이지와 제대로 사랑도 못하고 죽은 개츠비. 아구, 불쌍해라!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개츠비의 파티에 왔었건만, 장례식에는 한 사람도 안 온다. 데이지마저 오지 않다니. 쓸쓸한 죽음. 한 여자를 위해 5년간을 성공을 위해 바쳤건만,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 버리다니. 데이지, 너 참 나쁜 년이다. 어떻게 장례식에도 오지 않니. 여자란 정말 못 믿을 동물이야.소설 시작 부분에 주인공 개츠비는 그 호화롭고 시끌벅적한 파티에서 술도 안 마시고 조용히 혼자만 있다. 이거 주인공의 쓸쓸한 죽음을 미리 암시했던 것이 아니었을까.단편으로 쓸 수 있는 것을 애써 비교적 짧은 장편으로 쓴 듯하다. 작중 화자 방식으로 쓰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다면 분명히 단편으로 쓰여질 소설. 작중 화자가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 작품의 문학적 아름다움이다. 이런 소설 구성의 이유로 장편이 된 듯.이 소설을 번역한 사람은 그 유명한 시인 정현종 씨다. 을 쓴 시인. 그는 작품 해설에서 시적 감각이 뛰어나다고 이 소설을 평했다. 그런 소설의 특징 때문인지 문예출판사에서는 번역을 시인에게 맡긴 모양이다.작중 화자인 캐러웨이가 주인공 개츠비를 바라보는 시선이 시적이랄까. 매우 감각적이고 심리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아주 독특한 묘사다. 작가의 재능.기억에 남는 구절은 두 군데다.소설 첫 시작하는 부분. 작중 화자의 아버지가 한 충고. "네가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이런 걸 생각하거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네가 가졌었던 그런 유리한 처지에 있지 못했다는 걸 말이다." 5쪽
동화란 무엇인가동화란 성인 작가가 어린이에게 들려주거나 읽히기 위해 어린이 시점(동심),즉 인간이 살아가면서 잃지 않아야 될 삶의 진실, 인간이 추구해야할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가치로운 것을 바탕으로 쓴 서사물이다. 원래의 동화는 환상적인 요소가 중요시 되어 있었으나 과학의 발달과 생활상의 변화에 아이들에게도 사실적 동화의 필요성이 생겨 아동소설로 발전하기도 하였다.동화는 넓은 의미로는 사실적인 아동소설을 포함하나 좁은 의미로는 물활론적 사고에 입각한 환상적인 동화만을 지칭한다. 요 근래엔 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성인을 위한 동화가 나오기도 한다.동화와 아동문학의 차이아동 문학은 동화보다 상위개념으로 동화, 동시, 동극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동화가 순수히 어린이를 독자층으로 삼은데 반해 아동문학은 독자가 성인과 아동으로 이중적이다. 허나 여전히 최고의 주요 독자는 아동으로 아동문학은 아동의 기준에 맞추어서 쓰여져야 한다.아동문학하면 아동이 쓴 글 등도 포함된다 생각할 수 있으나 미성년의 글은 아동문학이 아니다. 이는 동화도 아동 소설도 마찬가지이다.동화의 특징①동화는 환상이 지배적 요소로 작용하는 이야기 문학이다☞동화에서 환상은 창작원리이며 필연적인 것이다. 동화에서 다루어지는 환상은 현실과 상관성을 가지며 현실의 문학적인 미화라고도 할 수 있다. 환상의 궁극적인 기능은 현실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과 어린이간의 충돌과 거기서 발생하는 어린이의 성처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②동화는 주요 독자가 성장기에 놓여있는 아동이라는 점에서 최대한 이상성을 추구한다.☞아직 미성숙 단계에 있는 아동에게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은 정서적으로나 가치관의 형성 측면에서도 단순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동화적 세계에서의 현실은 불행한 현실이나 사실, 그 자체를 보여주기보다는 시련과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모습으로 제시되어야 한다.③동화는 자유롭게 자연과 교감하는 양상을 띈다.☞동화문학은 자연이나 사물을 인격화하거나 생명을 불어넣어 어린이로 하여금 인간이 속한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해준다.④동화는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그 사상에 있어서 심오함을 가지고 있다.☞동화가 간결하고 단순하다는 것은 미학적인 결함이 아니라 그 고유한 특성이며, 그런 간결함 안에서도 인생에 대한 나름의 깊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⑤소재면에서 동화는 자연 지향성이 강하다.☞동호가 전래동화의 유산을 계승하고 그것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는 것도 동화의 向(향)土(토)性(성)을 강화하는 요인이 된다. 곧 산업화 시대의 빠른 속도를 거부하고 자연의 흐름에 맞추고자 하는 지향성을 동화는 지니고 있는 것이다.⑥동화는 주제면에서 사랑과 모험, 권선징악을 보편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아동들에게 진,선,미의 가치를 내재화 하도록 하고 있다.
미륵 사지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하는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30대 무왕(600년∼641년)에 의해 창건되었고,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지가 발굴되기 이전에는 백제 창건당시에 세워진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1기, 그리고 석탑의 북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과 통일신라시대에 사찰의 정양쪽에 세워진 당간지주 1쌍(보물 236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미륵사지에 대한 조사연구는 일본인들이 1910년 고적조사를 개시로 남아있는 석탑과 관련, 부분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品' 자형 가람배치를 갖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그 후 1974년과 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는 동쪽에 남아잇는 탑자리가 목조탑인지 석조탑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동탑지부근을 발굴조사하여 서탑과 같은 규모의 석탑지임을 확인하였다.1980년에 들어서 문화재 연구소에서는 백제 문화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당시 최대규모의 사찰인 미륵사지를 정비하고 보호하여 이를 사회교육도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종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종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 일본인들이 주장한 '品'자형의 가람배치는 맞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확인되 가람배치에 의하면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법당)의 성격을 지닌 건물이 하나씩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있어 동쪽은 동원), 서쪽은 서원, 중앙은 중원이라는 개념의 삼원 병립식 가람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중원의 북측에 거대한 강당 하나만을 두고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가람'이란 승가라마의 준말로 범어의 Sangh rama에서 유래 된 것으로 여러 승려들이 한군데 모여 살면서 불도를 닦는 것을 뜻하였으나, 후세에 와서는 절에 속한 집을 말하는 것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아무튼 이러한 가람배치는 동양 가람배치연구에서는 밝혀진 바가없는 전혀 새로운 형식의 특수한 형태이다..미륵사지의 발굴은 1980년에서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막새기와류와 기와의 등에 문자를 새긴 명문와, 토기류 그리고 자기류가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특히 건물의 서가래 끝에 붙이는 녹유 연꽃무늬서까래 기와는 백제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수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밖에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금속제품, 묵제품, 벽화편, 토제품, 유리 및 옥제품, 석제품 등도 수습되어 종류면에서 비교적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한 호국사찰로서 성격을 띄고 세워졌던 것으로 여겨지고 잇다. 따라서 미륵사는 백제가 망할때가지 왕실 사찰로 혹은 호국사찰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찰이다..미륵사지는 연못을 매운 절이라고 삼국유사에 나타나있다.. 실제로 조사결과 연못이었다는 증거를 나타낼수 있는 여러 생물흔적이 나왔다... 물배수를 위해 아래와같이 배수로를 설치하였다..익산지역에는 무왕(武王)과 관련된 많은 유적이 있다.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으로 유명한 미륵사지와 모질메산성으로 불리우는 왕궁평성, 오금산성, 오금사지, 제석사지, 쌍릉 등 궁성, 절터, 성터, 무덤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유적들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익산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왕위에 오른 무왕(武王)이 익산을 중심으로 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왕위에 오른 무왕은 성왕의 관산성(管山城)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즉위초에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그것이 무왕 3년(602)의 아막산성(阿莫山城)의 전투이다. 백제가 평상시에 유지하는 병력은 약 6만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백제는 이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2/3에 달하는 4만명의 병력을 상실한 이 전투는 백제 내부에 또한번 커다란 위기의식과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이러한 아막산성(阿莫山城) 전투의 패배로 사회적 혼란을 무왕은 국왕의 권력강화의 기회로 이용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무왕과 관련된 곳인 익산지역에 대한 경영에 박차를 가하였을 것이다.그것은 하나가 미륵사지의 창건이요, 또 하나는 왕궁평성의 운영이라고 볼 수 있다.미륵사지( 석탑과 아울러 삼원병립식(三院 立式)의 가람배치를 가진 한국 최대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삼국유사- 무왕조에는 미륵사지의 창건 연기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현재의 미륵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이 말을 듣고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곧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루밤 사이에 산을 헐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塔)과 낭무(廊 )를 세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 그 역사를 돕게 하니 그 절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미륵사지는 원광대학교의 1974년도 동탑지 발굴과 1980∼1995년까지 문화재 연구소와 부여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에 의해서 그 전모가 밝혀져 그 규모의 웅장함과 더불어 화려한 치장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있다.당시의 모습의 일부나마 전하고 있는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탑 양식을 이어받아 그 규모가 거대할 뿐 아니라 한국 석탑의 시원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어 그 중요성이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지고 있다.그리고 가람배치에 있어서 세 개의 사찰을 한곳에 배치한 삼원병립식(三院 立式)의 배치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도 유례가 없는 형태로 그 특이함에는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뿐만 아니라, 미륵사지 발굴과정에서 드러난 녹유연목와와 연꽃무늬 수막새 기와, 그리고 석등에 나타나는 조각의 아름다움은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이와 같은 대가람인 미륵사지는 어떤 이유에서 이곳 익산에 세워졌을까?역사에는 의외성이란 없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에는 당위성과 더불어 필요성이 내재해 있다. 미륵사상(彌勒思想)은 기독교의 메시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구원론적인 구세주의 나타남을 의미하기도 한다.이러한 미륵신앙은 삼국시대에서 널리 유행했는데 백제에서는 6세기 이후부터 널리 신앙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신앙이란 도솔천(도率天)에 올라가 천인(天人)들에게 설법하고 있는 미륵보살이 석가모니불이 입멸하여 56억 7천만년이 지난 뒤, 인간의 수명이 차츰 늘어 8만세가 될때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설법하며, 세차례의 설법으로 272억인을 교화한다는 신앙을 말한다. 이 신앙은 미륵상생신앙(彌勒上生信仰)과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이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미륵상생신앙이란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도率天)에 태어나 미륵보살을 만날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成佛)할 때 그를 쫓아 제일 먼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그리고, 미륵하생신앙은 먼 장래에 미륵불이 출현할 것이며, 그때 이세사은 즐거운 땅(樂土)으로 변하고 사람의 수명은 8만여세가 된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미처 제도(制度)하지 못한 중생들을 3회에 걸친 용화법회(龍華法會)로서 모두 구제한다. 따라서 이 신앙은 미래의 일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들 중 미륵상생신앙은 스스로 노력하고 덕을 닦아야 한다는 점에서 엄격한 계율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귀족적인 성향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익산에서 이러한 미륵상생신앙의 요소는 지명법사(知命法師)가 거주했다는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師)를 통해서 살펴 볼 수가 있다. 사자사는 미륵보살이 도술천에서 수행하였던 사자상좌(獅子上座)에서 따온 사찰 이름으로 미륵상생신앙적인 요소를 지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미륵하생신앙의 구현은 미륵사지의 창건을 통해서 엿 볼수 있다.앞의 『삼국유사』의 내용과 관련하여 미륵하생신앙을 살펴보면, 미륵이 하생(下生)할 곳은 땅이 사금(砂金)으로 덮혀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무다는 금은 바로 이것과 관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륵이 성불(成佛)하여 용화수(容華樹)아래에서 3회의설법을 한다고 하는데 이를 상징하는 용화산, 연못속에서 미륵 삼존이 출현하였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곧 미륵의 하생(下生)을 의미한다. 아울러 미륵사지가 세 개의 사찰을 지닌 3원병립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것은, 곧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3회(龍華三會)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 미륵경전(彌勒經典)의 내용을 구상화 해 놓은 것이다. 즉 미륵의 이상세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륵이 하생하여 교화한 세계에는 평화와 화합의 세계가 이룩된다.당시 무왕은 지명법사(知命法師)와의 관계로 미뤄 보더라도 미륵신앙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이와같이 미륵신앙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진 무왕은 옛 마한의 중심지인 이곳 익산지역에서 깊이 믿어진 용신앙(龍信仰)과 연결하여 미륵하생신앙을 전개시킴으로서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강화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8대성(八大姓)으로 알려진 백제의 귀족세력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사비(沙 =현재 부여)에서 이러한 미륵하생신앙을 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한편으로는 미륵사의 창건은 무왕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이것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위엄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생각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전륜성왕(轉輪聖王)이란, 미륵이 용화수(龍華樹)아래 성불(成佛)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미륵을 맞이하러 간다고 한다. 이는 미륵사지 창건연기설화에서 보듯이 백제 무왕이 용화산 아래의 큰 연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났다는 내용과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잇다. 이러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다스리는 나라는, 바른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7가지의 보물(七寶)이 있는데 이 7가지의 보물로 나라를 다스릴 뿐 무기나 권력으로 억누르지 않아도 모든 적으로부터 저절로 항복을 받는다. 또 네곳에 저절로 생긴 보물창고가 있는데 전륜성왕(轉輪聖王)은 이 보물들을 모두 보시해서 자신이 가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