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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훈민정음의 역사적 의미 평가A좋아요
    1. 서론현재 훈민정음은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자신만의 문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훈민정음과 같이 특정한 사람이 독창적으로 문자를 만들고 새 문자에 대한 해설을 책으로 출판한 일은 유례가 없었던 역사적인 일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집현전 학자들의 최대의 업적이자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적 역량을 세계에 과시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일반적으로 한글 창제의 동기와 의의를 세종의 민본주의나 언어학적 역량에 집중시켜왔다. 물론 세종이 가졌던 특별한 소양은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배경과 동기, 활용에 대해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 이 과정에서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백성의 역할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이를 통해 훈민정음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2.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지배층으로 하여금 글을 가르치지 않고는 다스릴 수 없게 만듦으로써 지금까지 문화생활권 밖에 팽개쳐져 있었던 자신들의 위치를 스스로 개선하여 문화생활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역시 백성세계의 자의식의 향상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백성세계의 자의식이 높아진 계기는 멀리 고려중기의 무신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2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무신들의 정변은 고려사회의 귀족적 지배질서를 무너뜨렸고 그 것을 계기로 개경을 중심으로 한 노만적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하면서 신분해방을 물론 정권쟁취까지 노렸다. 백성세계의 이와 같은 새로운 움직임은 무신정권의 독재와 탄압으로 기세가 꺽였으나 이후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고 그 것에 굴복하는 과정을 통해 자의식이 더욱 높아졌다. 피난정권의 지배세력 내부에 분쟁이 일어나고 결국 몽고에 항복하였을 때 백성들에게 이는 지배층의 배신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몽고에 항복한 이후 고려의 귀족층은 몽고세력과 결탁하여 농장을 차지하고 농민을 수탈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려의 왕권은 119, 小字1132) 등 대개 백여 년씩의 간격을 두고 10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등장한 문자체계들이 그것이다. 태조 2년(1393)에 설치된 사역원에서는 이른바 4학이라 하여 한어, 몽고어, 일본어, 여진어의 학습제도가 있었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새 문자 창제의 충동이 있었을 것이다.)세종대에 들어와서 명나라로부터 『4서대전』, 『5경대전』, 『성리대전』 등 영락3대전이 입수되었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이 책들을 깊이 연구하는가 하면 이 책들을 여러 차례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게 하였다. 『성리대전』은 세종대 禮樂刑政의 제도를 새로 만드는 철학적인 근거가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소강절의 황극경세서와 채원정의 『율려신서』는 세종과 유신들의 음운학과 음악 연구열을 자극시켰다. 소강절은 풍토가 다르면 그 곳에 사는 인간의 발음도 달라지니 正聲과 正音이 있어야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이 정성과 정음을 바로잡는 일이야말로 왕도정치를 펴는 첩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적 사고가 표준발음을 정리한 韻書의 편찬을 계획하게 하였다. 이 때 마침 명나라로부터 『홍무정운』이 전해졌다. 『홍무정운』은 1375년에 황제의 명으로 각종 방언이 뒤섞인 중국의 음운체계를 통일하기 위해 편찬된 운서였다. 세종과 그 주변학자들은 여기에 고무되어 차제에 중국처럼 조선의 음운체계를 바로잡아 유교적인 왕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해 볼 야심을 갖게 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1269년 원 세조는 티베트의 고승 파스파로 하여금 범어 계통의 음소문자인 위구르 문자를 바탕으로 음절문자인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 공문서에 사용하도록 한 바 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150년 전의 일이다. 이 또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자극하였다.)3.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훈민정음 창제의 동기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서문에 명백히 적혀 있다.“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와 명나라는 원수관계에 있었고 명에 사대하는 조선으로서는 원나라의 한자 발음 체계를 그대로 쓸 수 없었다.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조선은 독자적인 문자와 발음 체계를 개발하여 한자음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할 여건이 성숙되어 있기도 하였다. 세종대에 이르러 조선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고 신 왕조에 벼슬하려는 많은 인재들이 모여 있었으며 세종은 이러한 일을 추진 할 의욕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여건이 세종으로 하여금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기왕에 잘못된 한자음을 바로잡는 것도 시급한 일이었다. 잘못된 한자음을 중국발음과 일치시키는 일이 중요했다. 명나라의 『홍무정운』을 통한 언어통일 정책이 실패했듯이 이를 모방한 세종의 『동국정운』을 통한 언어통일 정책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뒤인 1445년에는 『홍무정운』을 훈민정음으로 음을 단 『홍무정운훈의』를 편찬하도록 명하였는데 이 것으로 미루어 보아 훈민정음 창제 목적 중의 하나가 한자음을 정확하게 표기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한글창제의 직접적 이유 중 하나는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고 있던 이두의 문제점 때문이었다. 조선은 태조 때 『원육전』을 이두로 편찬하여 관아의 아전과 관리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일반 백성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자 세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재위 14년 11월 7일에 律文을 이두로 번역하여 반포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법률을 이두로 번역해 백성들에게 반포하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 이 일이 추진되지 않았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두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두는 비록 한문에 비해 쉽기는 했지만 적으로 기본적인 한자는 알아야만 읽어낼 수 있었는데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 것도 용이하지 않았다. 그 뒤에 세종은 일반 백성들에게 유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서에 이두 번역문을 함께 표기하는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하이다. 당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은 공식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문과 다른 문자를 제정함에 따른 국내외적인 반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적인 반감은 곧바로 나타나는 것이었고 국제적인 경우는 바로 중국의 반응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차후 중국에 전하는 세종의 행장에서 그 정음 창제의 사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로써 짐작될 만 하다. 물론 집현전 학자들 중 일부가 도움을 줬을 수는 있으나 세종은 거의 홀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진행하였다. 세종의 언어학에 대한 깊이는 당대 최고였다. 당시 어문정책에 참여했던 정인지는 세종의 탁월한 정음 창제 능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 연원에 정밀한 뜻의 오묘함은 신하들이 발휘할 수 있는 바 아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임금님은 하늘이 낳은 성인으로서 제도 펼침이 百王에 초월하셨다. 정음의 제작은 일찍이 서술 된 바 없으나 자연에서 이루었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인위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開物成務의 큰 지혜는 무릇 오늘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로다.”)정인지가 쓴 글에서 보듯이 창제과정에서 나타난 세종의 역할은 가히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의 정책 가운데서도 훈민정음 정책은 그의 창의성이 크게 작용한 예이다. 그러나 관료들에게 그 창의성은 색다른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대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반대 의견을 개진했던 사람들도 운서를 깊이 연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세종은 군자다운 인간성과 학자적인 전문성을 가지고 결심한 바를 이루었다.)하지만 세종이 한글전용론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가 편찬하도록 한 중요한 책들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고 백성들이 꼭 읽어야 할 책들만을 훈민정음으로 언해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심지어 국왕의 敎書는 한문으로 반포하고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서는 대왕대비나 왕대비의 諺文敎書를 별도로 내렸다. 한자를 眞書, 훈 안다는 것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한문이 어려워서 백성들이 배우기 곤란하다는 점도 있었지만 또한 백성들에게 한문을 배우게 하여 지배층과 백성 사이에 있는 벽을 무너뜨릴 수도 없었다. 따라서 백성들만이 쓸 훈민정음을 만들어 지배목적에 부합하게 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4. 훈민정음의 활용세종 임금은 무엇보다 먼저 백성들을 위해서 만든 이 글자가 얼마나 잘 된 것인지를 시범하기 위하여 신하들에게 두 가지 책을 짓게 했다. 첫째는 『용비어천가』로서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태조, 태종과 그 조상들의 위업을 기릴 목적으로 지은 노래였다. 이는 우선 사대부들로 하여금 읽어 달라는 것이고 나아가 한문에 익숙치 못한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 한자만 알면 읽을 수 있게 한 것으로 중인 계층까지 염두에 두어 가급적 널리 알리겠다는 의도와 함께 새 문자 운용의 실례를 널리 알린 것이다. 두 번째는 『석보상절』로서 부처의 생애를 서술하여 백성을 교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석보상절』이 다 된 것을 받아 보고 나서 그 줄거리를 따라 가며 부처를 예찬하는 내용으로 몸소 방대한 분량의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월인천강지곡』이나『석보상절』의 경우 당대 전 계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지러운 한자음을 통일하고 이의 보급측면까지 고려한 것이라 이해된다. 또한 세종은 신숙주 등과 함께 당시 한자의 소릿값을 교정하기 위해 『동국정운』을 지어 음성 기호로서의 한글의 표음 능력을 유감 없이 활용하고 과시하였다. 다음으로 『3강행실도』,『4서5경』등이 언해되었다. 『3강행실도』는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중국과 한국의 충신, 효자, 열녀의 사례를 국한문으로 소개하고 그림까지 곁들인 책으로 성종대에 가서야 간행되었으며 『4서5경』언해는 과거시험을 보는 사람들과 일반인들의 경전지식을 넓히기 위하여 번역한 책으로 선조 조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또한 세종은 한글을 보급하는 방편으로 ‘효대례의’라는 한글을 새긴 동전을 만들기도 했고 다.)
    인문/어학| 2004.04.07| 7페이지| 2,000원| 조회(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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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국제정치] 현대 국제 정치-역사의 종말』과 『문명의 충돌』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
    현대 국제 정치『역사의 종말』과 『문명의 충돌』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은 사회주의의 전면적인 붕괴를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하였고 자유민주주의보다 더 훌륭한 사회적, 정치적 제도와 원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역사는 자유주의의 승리로 발전의 끝에 이르렀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상반된 주장을 펼친 지식인이 등장했는데 그가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이다. 90년대 초반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민족주의 강화로 이어지는 민족 분쟁과 아시아의 권위주의, 이슬람의 신정 체제 등이었다. 그는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에서 종교와 문화를 근간으로 한 문명권 사이의 유혈 대립이 앞으로 올 역사의 법칙이며, 그 대립 전선은 서구문명과 유교문명 및 이슬람문명 사이에 그어질 것이다. 이런 전제 아래서 그는 문명들이 서로 섞이지 않고 사는 것만이 파국을 피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역사의 종말』과 『문명의 충돌』의 전문을 분석, 요약하고 이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 현대 국제 정치의 상황과 그 미래에 대해 전망해 보고자 한다.1.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가 인류의 이데올로기 진화의 종점이나 인류 최후의 정부 형태가 되며, 따라서 역사는 종말 하였다고 선언하였다. 그가 '역사의 종말'을 주장하는 것은 서문에서도 밝히 듯이 심각한 대 사건을 포함한 여러 역사적 사실의 발생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를 말함이다. 즉 어떤 시대나 민족의 경험을 생각하더라도 유일한, 그리고 일관된 진화의 과정으로서의 역사가 끝났다는 의미이다. 헤겔은 역사를 보다 고도의 합리성과 자유의 실현을 향한 인간의 진보로 간주하여 인간이 절대적인 자의 각 국은 과학기술 발전에 유리한 사회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진 한 근대 과학의 논리는 인류사회를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인도한다. 최근의 소련, 중국, 동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장시스템으로의 전환은 역사의 필연이며 이는 중앙계획경제의 메커니즘을 분쇄하고 자본주의가 부활하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의 최종목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동시에 세계시장경제에 있어서도 자유시장경제의 최종승리이다.하지만 인간은 단순한 경제적 동물이 아니다. 인간은 경제적 관심과는 무관한 동기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출현을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바라고 그 것을 성립시키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삶의 방식을 구축하려고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인간이 필요하다. 후쿠야마는 여기서 헤겔의 인지에의 욕구 개념을 사용한다. 개인은 자유롭고 자율적인 인간으로 만인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보편적인 기반 위에서 성립한 인지의 추구로 해석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택한 경우에 중요한 것은 그 것이 우리에게 자유로이 돈벌이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영혼 속의 욕망의 부분을 채워준다는 점만은 아니다. 더욱 중요하고 최종적인 것은 이 사회가 우리의 존엄을 인정해 준다는 점이다.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가 이러한 인정에의 욕구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공산주의가 패배한 것은 경제적인 문제 뿐 아니라 인지의 욕구를 실현할 수 없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의 종말에 등장하는 보편적이고 균일한 국가는 경제와 인지의 두 기둥 위에 성립한다.그는 현재 역사의 최종점에 서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현재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인간의 인정에의 욕망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욕망과 패기가 한 사회적, 정치적 제도에 의해 잘 충족 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는 자유주의라는 구조의 내부에서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자유로운 사회는 어회의 정신적 물질적 관습, 가치, 기준, 제도, 사고 틀을 총체적으로 담아내는 문화적인 실체로 생각한다. 따라서 종교와 윤리 등 비물질적인 문화적 요소가 한 사회의 물질적 제 관계의 성격에 못지 않게 그 문명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문명은 포괄적이며 문명권의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귀속감을 제공한다. 한 문명권을 구성하는 구성단위는 그 문명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그 특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문명은 장기적인 생명력을 지니지만 역사성을 지니면서 변화를 거듭한다. 문명은 그 하위에 한 개 이상의 정치, 경제적 실체로 구성된다. 반드시 하나의 정치 단위 가 하나의 문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명은 오히려 두 개 이상의 정치적 단위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헌팅턴은 위에서 언급한 문명의 이러한 주요 특성에 의거하여 세계를 서구 기독교 문명, 동방 정교 문명, 이슬람 문명, 힌두 문명, 중화 또는 유교 문명, 일본 문명, 아프리카 문명 등 상이한 문명들의 대립 질서로 파악하였다. 즉 문명권간의 관계는 우호적이거나 교류와 협력을 추구하기보다는 상호 배타적인 갈등관계의 원리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원칙 하에 내부적인 결속이 이루어지며 타 문명과의 일종의 전략적 협력관계가 가능할 수 있다.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은 보편 문명론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된다. 보편 문명론은 그들 주장의 근거로 냉전 종식 후 자유주의의 승리와 세계적 확산을 꼽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른 서구의 오만에 속하는 것으로 세계에는 자유 민주주의를 결코 사회적 대안으로 생각지 않는 국가들과 그 외부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종교적인 대안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헌팅턴은 냉전의 종식이 민족, 종교 등 문명의 대두와 그들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치달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보편 문명을 주장하는 서구의 지론은 오히려 비서구 문명의 대항적 수용과 거부를 불러일으켰고 비서구 각각의 문화적 정체성을 더욱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탈냉전 이후인 20세기지역은 헌팅턴이 정의하는 문명 중 6대 문명이 존재하는 지역으로 19세기말 20세기 초 중반의 서구로부터의 수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현재 이 지역은 강력한 경제 성장을 필두로 하여 군사력을 점증, 서구에 필적할 만한 역량을 가진 지역으로 변화하였다. 미국과 동아시아의 강국인 중국과 일본은 인권과 무역전쟁으로 갈등의 강도가 높아지고 또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다. 동아시아 과거 패권 국은 중국이었고 현재의 중국 움직임에 대해서도 크게 견제하는 나라는 없다. 그것은 서구의 유럽과는 달리, 동아시아의 역사상 견제보다는 패권 국에 편승하려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은 중국의 부상에 우려를 표명하지만 중국의 헤게모니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결국 어느 한 지역에서 절대적인 패권을 행사하는 강대국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이익에 상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둘러싼 아시아 주변국들의 도움 없이 중국의 헤게모니 확대에 버거움을 느낄 것이며 그 속에서 예측 할 수 없는 갈등이 다양한 형태와 수준의 분쟁을 야기할 것이다.집단 또는 국가는 하나의 문명에 속하게 되며 이러한 문명은 다른 문명과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 그들 문명의 또 다른 구성원의 지지를 얻게된다. 냉전 시대의 국가들은 양대 초강대국과 동맹국, 위성국, 종속국, 중립국, 비동맹국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탈냉전 시대의 국가들은 문명들과 소속국, 핵심국, 고립국, 단절국, 분열국으로서 관계를 맺는다. 헌팅턴의 문명권 내부 권력 구조에 대한 묘사에서 주목할 것은 문명의 핵심국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를 둘러싼 다양한 성격의 주변국의 설정이다. 핵심국은 문명권의 통일성과 정체성을 주도하며 문명의 주변국을 대변한다. 문명권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며 타 문명권과의 관계 속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갖는다.앞으로의 분쟁은 대부분 문명사이의 단층 선에서 일어날 것이며, 또한 문명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대규모 문명 전쟁을 사전에 방지하려면 핵심 국들이 다른 문명 내부90년대에 들어서 세계는 분명히 개선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형태로 자리잡지 않는 한 역사는 끝났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 승리는 제도가 가진 모든 한계들을 해결함으로써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의 붕괴가 곧 자유주의의 승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경제적 불평등, 환경 오염 문제, 실업문제, 신자유주의,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는 국제 갈등 등은 전혀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라는 제도 자체를 회의하는 사람도 많다. 또한 지금의 세계는 자유민주주의적 국가체제보다 그렇지 않은 나라가 훨씬 많다. 더구나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믿어지는 국가 안에서도 이른바 대등 욕망의 상호 인정은 어쩌면 요원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분명히 인식되고 그 해결책을 찾았을 때만 우리는 감히 역사의 종말을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그는 분명 자유민주주의가 인지에의 욕망을 충분히 실현시켜주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과연 우리가 역사의 마지막에 서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대등 욕망이 결코 완벽히 충족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또한 욕망과 패기가 동시에 충족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우리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그 결과를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는 역사가 아직 종언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그는 모든 문제가 언젠가는 해결될 것이라 믿는 심각한 낙관론자이다.미국은 냉전 이 후 탈 헤게모니 적 국제 협력론에 맞서 새로운 헤게모니를 창출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헤게모니 창출론에 대한 철학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프랜시스 후쿠야마이다. 『역사의 종말』은 특히 일본이 새로운 패권국가로 거론되면서 미국인들의 상처 이다.
    인문/어학| 2003.12.20| 8페이지| 2,000원| 조회(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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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의 이해] 원령공주 감상문 평가B괜찮아요
    〈 원령공주 감상문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는 혼란의 시대인 현재에 인간과 자연의 공존은 가능한가에 관해 묻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배경은 작품의 주제를 나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간적으로 영화의 배경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산과 숲을 신이 사는 성지라 여겼던 사고방식이 붕괴되기 시작한 무로마치 시대이다. 이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제철업을 발전시켜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인간의 운명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여자들이 훨씬 자유로웠다. 영화에 무기를 만들며 남성과 대등하게 생활하는 여성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공간적으로 영화의 배경은 생명의 근원인 숲이다. 서구인에게 암울한 미래의 모습이 어둡고 음침한 도시라면 동양인인 감독에게 황폐해진 미래의 모습은 숲이 그 생명력을 잃는 데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작품에 은연중 배어있는 일본의 신토사상은 서구와 반대되는 동양의 전통적인 자연합일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자연의 파괴는 서구인의 산물로만 볼 수 없으므로 이 것은 서구인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이라기 보다 자연 친화적 전통을 잃어버린 인류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려는 목적이 크다고 하겠다.영화의 등장 인물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산림을 개간해 도시를 건설하고, 늑대와 맷돼지로부터 마을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철 탄환을 만드는 에보시는 진보와 개발이라는 인류의 사명을 짊어진 결코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 인간을 미워하며 숲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숲의 전령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려는 인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자연의 모습이다. 인간은 자연에게 그들을 원한과 분노의 화신으로 만드는 돌덩이를 쏘아대고 자연 또한 인간의 마을에 침입해 인간을 물어 죽이고 죽음의 저주를 내린다. 지금까지의 영화들이 자연을 파괴시키는 인간에 대한 비난과 인간의 멸망을 소재로 삼았던 반면 이 영화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인간과 자연의 필연적 관계에 대해 안타까운 눈길로 주시한다. 인간과 자연의 싸움에서 죽음의 저주라는 최대의 처벌을 받게 된 아시타카와 인간이지만 동시에 동물적 성향을 가진 산은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이들은 인간과 자연의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시종일관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의 전쟁이 서로에게 원한만을 남길 뿐이라고 말하며, 계속해서 조화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끝까지 해결점을 찾아내지는 못한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 인간이 계속해서 던지고 있는 질문이며 그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며 한계인 것이다.결말에 인간의 욕망과 무지는 극에 달하여 결국 생명을 주관하는 신인 시시가마의 목을 베어낸다. 신의 분노는 숲을 파괴시키고 숲의 파괴는 인간의 터전과 생명을 위협하여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인간이 자연과의 공생의 길을 찾아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인간과 자연은 모체와 태아와의 관계와 같아서 모체가 없이 태아가 존재할 수 없듯이 자연이 없이 인간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의 인위적 분리는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긴다. 뒤늦게 깨달은 인간에 의해 신의 노여움은 풀리고 숲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다. 마지막 장면에 코다마 한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끝나는 장면은 자연의회복을 나타내는 증거이자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것은 예전의 숲이 소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전의 숲은 이미 죽은 것이고 과거의 것은 파괴되고 사라진 것이다. 숲이 되살아 난 것은 해피엔딩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볼 수도 있지만 그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에보시나 지코와 같은 인간 집단이나 모로와 같은 자연신들은 모두 각자의 길만을 가려고 하며 상대방을 자신과 합치시키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자연과 인간 모두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반면 아시타카나 산은 이들과 공존하려고 한다. 마지막에 에보시는 모로 덕분에 목숨을 구하게 되고 자연은 아시타카와 산에 의해 그 모습을 회복하게 된다. 감독의 메시지는 여기에 있다. 인간과 자연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살아나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자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는 반면 인간은 계속 발전을 거듭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독후감/창작| 2003.12.20| 2페이지| 1,500원| 조회(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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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 교권과 제권의 대립, 그 중심에 있었던 결혼
    교권과 제권의 대립, 그 중심에 있었던 결혼1. 들어가는 말서양 중세 사회는 봉건제도와 카톨릭교로 대변된다. 주종제와 봉건제를 기초로 한 봉건사회가 중세 유럽인을 육체적으로 구속했다면 카톨릭교는 정신적 지주로서 그들을 구속했다.교회의 정신적 힘은 세례로부터 이어지는 의무들과 카톨릭 교회의 명령을 어기면 신의 나라 즉 천당에 갈 수 없고, 구제 받지 못할 것이라는 위협으로 발현된 것이었고 교회의 중심인 교황청은 교황령과 신자들의 기증, 세금을 거둬들여 막대한 경제적 힘을 가진 동시에 로마로부터 이어진 관료기구와 더불어 미약한 왕권을 위협하는 정치적 권력을 가졌다. 이처럼 중세 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구가 아닌 하나의 국가, 사회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카톨릭교는 정치, 문화, 사회 전반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 강력한 교권은 필연적으로 지상의 권력자인 제권과 계속적으로 대립하였다. 본고에서는 중세와 종교 개혁 시기를 중심으로 교권과 제권이 대립하는 가운데 결혼에 교회가 관여하여 발생한 정치적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2. 교권과 제권, 그 대립의 역사교황과 황제는 기독교 시대의 두 우두머리로써 또 성직자적 질서와 세속적 질서의 지배자로서 끊임없이 대립하였다. 중세 초기의 카톨릭교의 현실적 기반은 미약하였지만 중세 안정기에는 봉건 질서를 이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는 중심이 되었고 9세기경에는 독일과 영국 11세기경에는 폴란드와 헝가리를 비롯한 북유럽까지 전파되어 유럽의 중심으로 확고부동한 위치에 이르렀다. 교황의 세력은 세속 군주의 세력에 우위에 위치하였으며 15세기경까지 이러한 강력한 권위는 유지된다. 교회의 가르침은 중세인의 정신은 물론 경제 활동, 사회적 계층의 고정화 교육, 학문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교회의 규칙을 어기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믿었던 중세인 들의 신념은 교회가 이렇게 강력한 권위를 가지게 한 중요한 원인이다. 당시 교회는 영혼의 구원은 성세, 견지, 성체, 고백, 병자성사 등 교회의 성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설교하였고 교회를 순수한 원시 교회로 복귀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성직 매매에 대한 투쟁과 성직자의 독신 생활의 정착, 세속군주제후에 의한 성직자임명 금지 등의 조치로 그가 종교적 위계 서열에서 뿐 아니라 세속적 위계 서열에서도 우두머리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황제와 교황간의 대립은 서임권 문제를 두고 절정에 달하였는데 1077년 카노사 사건은 로마 교황이 신성 로마의 황제를 굴복시킨 듯 보였으나 참회를 한 황제는 즉시 복수하여 성직임명권을 다시 행사하였다.카노사 사건 후 한 세기가 지난 후에도 교권과 제권의 대립은 계속되어 프레데릭 바르바롯사는 교황권에 대한 억압 수단을 장악하기도 했고, 그레고리 9세, 이노센트 4세 등과 같은 교황은 황제를 공격하여 프레데릭 2세를 파문시켰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최종의 승리자는 교황처럼 보이지만 교황은 황제를 공격하면서도 왕이라는 새로운 권력을 인식하지 못했다. 특히 교황권의 신장, 성지 탈환 등을 기치로 내건 십자군 원정은 봉건 체제가 흔들리고 교황권이 쇠퇴하는 반면 군주국가의 출현을 가능케 해주었다.{) 차하순 『서양사총론』1986 탐구당 PP.194∼206쟈크 르 고프 / 유희수 옮김 『서양중세문명』1992 문학과지성사 PP.119∼121, 318∼3293. 카톨릭교와 결혼제도결혼제도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는 인류가 양성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두 육신은 하나가 되게끔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결혼의 남, 여 불평등은 드러나는데{) 초기 교회에서는 여자는 인간의 원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하여 예배 참여 등 공적 업무에서 여성을 배제 시켰다.여자는 열등하고 나약한 존재로 남자의 부차적 반영에 불과하다고 한다. 예수는 창세기를 근거로 결혼은 파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아내를 버리는 경우는 아내가 음행을 한 경우로 제한하고 있다.{) 조르주 뒤비 / 최애리 옮김 『중세의 결혼』1998 새물결 PP.35∼37카톨릭교는 동정 생활을 바람직한 행위로 축복하였지만 결혼 자 국한된 것으로서 속인들 사이에서는 동거가 자유롭게 행해졌다. 엥크마르는 혼인증여재산 제도를 위시하여 결혼 절차를 설명하면서 합법적 결혼에 의한 결합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여기서 합법적 결혼이란 표현은 다른 형태의 부부 관계 즉 비공식 동거 제도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조르주 뒤비 위의책 P.56그레고리우스 개혁이라 불리는 교회 개혁은 분리되어 있던 속인들의 결혼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레고리우스 개혁은 교권의 독립과 속권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려는 운동으로 영적 권세가 세속권세 보다 우월함을 밝혀 세속사회를 지배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중의 타락에서 세속인 들을 구원해야 했는데 하나는 당대의 학자들이 시모니(simonie)라 부르던 성직 매매로 교회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에 세속 권력이 끼어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니콜라주의(nicolarism)로 세상의 쾌락에 특히 여색에 빠져드는 악습이었다. 11C 중반에 교회령과 십일조를 회복함으로써 교회의 권한은 막강해져 궁정에서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영주의 권세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교회 대리인이나 백작, 성주 등의 세속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일부 영지민 들에게 왕의 특권에 속하는 재판권을 행사하고 강간이나 간음 등 혼인법에 대한 위반을 다스리기도 하였다. 개혁자들은 성직 정화를 위해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했는데 예를 들어 캉브레 주교는 신이 그들에게 인류를 종속시키는 것은 그들이 정결하기 때문이니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결혼이 금지된 것은 그들뿐이다. 라고 했다. 개혁자들이 독신을 강조한 이유는 금기된 불순한 액체인 피와 정액의 오염으로부터 성직자 계급을 보호함으로써 비천한 세속인과 성직자 계급을 분리하기 위해서 였다.동시에 교회 개혁은 속인들을 계도해야 할 의무감으로 결혼의 실천적 수칙을 강조했다. 여기에는 일부일처제의 복음적 법칙, 7촌(우리 식으로는 14촌) 미만 친족과의 결혼 금지, 결혼 불가분의 원칙 등이 있다. 이러한 원칙은 이브 드 샤르트르의 캐논 텍스트 PP.327∼329당시 성직자들은 결혼과 이혼을 규제하고 결혼 관습을 성직자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세속에 대한 영적 권력의 지배를 강화하였다. 교회는 결혼의 성립과 파기에 모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었으며 결혼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교회에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 교회는 정혼을 강조하여 결혼 제도를 성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엄격한 규칙을 정함으로써 세속인 들을 길들이고 통제하여 교회의 강력한 권위를 유지해 나갔다. 귀족들은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여 성적 관습에 대한 통제를 받아들였고 교회의 세속적 권위가 커짐에 따라 지상의 권력자인 왕권과 계속적으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후에 결혼 제도는 왕권에 대항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3. 결혼에 의해 변화한 역사중세의 결혼은 카톨릭교에 의해 사상적으로 구속받은 동시에 교회라는 강력한 집단에 속박되어 있었다. 필자는 당시 교권과 제권 중 어느 하나가 우세한 시점에서 결혼이 이러한 우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한 측면은 교권 우세의 시기로 기독교 교리에 의한 신성한 결혼 제도의 원칙이 정혼의 강조와 근친혼, 이혼의 불가 등을 이유로 왕들의 자유로운 결혼에 제동을 걸어 왕권을 약화시키는 데 이용했다는 것이고 다른 측면은 기독교적 결혼 제도의 파기가 제권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 작용했다는 점이다.1 까페 왕조 필립의 파문당시는 교회 개혁, 즉 사회 정화 작업이 이루어진 시기로 필립 1세의 파문은 그의 결혼 문제 때문이었다. 그는 997년 왕과 봉신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플랑드르 백작의 딸 베르트 드 프리즈와 정략 결혼을 하게된다. 그러나 그는 앙주 백작의 아내였던 베르트라드를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되자마자 이혼하고 종친 관계에 해당하는 그녀와 결혼했다. 샤르트르 주교는 그의 결혼이 두 가지 쟁점에서 어긋남을 주장하였는데 이혼에 관해 첫 번째 아내와의 중혼의 혐의와 두 번째 아내와의 근친혼의 혐의에 관한 것이었다. 샤르트르 주교는 왕과 절연하고 교황에게 필립이 합법 프랑스 왕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로마 교황청이 교회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벌인 공격이었다. 당시에 필립에 대한 항의와 질책들이 쏟아졌는데 오데릭 비탈에 의하면 그는 신으로부터 치욕스런 질병의 책벌을 받았고 푸크는 셍세르주 당제를 위한 봉헌 증세에 프랑스가 파렴치한 왕 필립의 간통으로 더럽혀진 때에 준한 연도를 적었으며 교황청은 파문의 이유가 된 여인과 절연하기 전에 그의 탄핵을 풀어주려는 고위 성직자들을 정죄 하였다.{) 쟈크 르 고프 위의책 P.327, 조르주 뒤비 위의책 PP.22∼23결국 필립 1세는 파문을 견디지 못하고 교회의 강력한 힘 앞에 굴복해 베르트라드와 이혼을 하게 된다.필립의 사건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 한데 이 이야기가 교회의 지원 없이 권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까페 왕조 초기의 왕들의 약점을 그대로 나타내 준다는 것{) 앙드레 모로아 / 신용석 옮김 『프랑스사』1980 P.50과 이러한 왕의 결혼에 대한 엄격한 규제는 당대 교회 개혁의 목적인 영적 권력과 함께 세속 권력을 지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결혼에 대한 모든 권리는 교회만이 가질 수 있으며 교회는 왕의 결혼에 대해서도 규제할 수 있고 그러므로 교회는 왕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식이 어느 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2 영국 종교 개혁과 헨리 8세의 결혼영국 종교 개혁의 원인은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교회가 중세 대중의 신앙생활 안에 존재하도록 내버려둔 미신적 관행에 대한 비난이 있었다. 또 당시에 교회는 영국 토지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토지소유는 권력을 낳았고, 이 권력이 발휘되는 과정에서 부정이 생겼다. 성직자들은 정부와 행정을 독점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성직자들의 금력(金力)과 부도덕성을 혐오하게 되었다.{) 윌리엄 A. 스코트 / 김쾌상 옮김 『개신교 신학 사상사』1988 대한기독교서회 P.101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종교와 정치가 충돌하는 기점에 있었던 헨리 8세의 결혼 문제이다. 결혼은 교회의 성사로서 교이었다.
    인문/어학| 2003.12.20| 7페이지| 1,500원| 조회(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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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 빅토르위고의 사회,정치, 문학활동 평가A좋아요
    프랑스는 19세기에 세 차례의 혁명과 3개의 공화체제, 왕정복고와 2번의 제정 등으로 유례없는 정치적 혼란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사회적인 변동과 혼란으로 이어졌다. 19세기 프랑스 문학은 이러한 배경에서 18세기 고전주의와 대비되는 낭만주의라는 근대 문학을 꽃피웠다. 빅토르 위고는『크롬웰 서문』으로 낭만주의를 선언함으로써 낭만주의의 거장이 되었으며 1850년 이후 자연주의가 낭만주의의 상속을 받는 시기에 이르러서도 낭만주의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낭만주의를 이야기 할 때 위고의 역할이 등한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혼란기에서 많은 작가들은 사회적, 정치적 투쟁에 참여하는데 위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정치가로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사상적 변화들은 그의 문학작품들 속에 투영되었고 그의 작품들은 그의 정치적 변화 노선, 사회와 세계, 인간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드러내주었다. 따라서 그의 정치, 사회적 활동과 문학활동을 분리해내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결국은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여기서는 첫째로 19세기의 정치, 사회적 혼란과 19 세기 문예사조의 바탕이 되는 낭만주의 정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둘째로 19세기 프랑스에서 빅토르 위고가 행했던 정치, 사회, 문학 활동들에 대해 시기별로 알아보겠다. 마지막으로 위고의 정치 ,사회 사상의 변화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몇 몇 작품들을 좀더 자세히 봄으로써 위고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빅토르 위고가 정치가로서, 문학가로서 19세기 프랑스에 끼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고 위고의 작품들을 바탕으로 정치와 문학간의 뗄 수 없는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1. 19세기 프랑스와 낭만주의 정신프랑스의 19세기는 무엇보다 먼저 정치적 상황의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 전세기 말의 대혁명으로 시작된 사회적 변혁은 이어서 나폴레옹의 집정정부, 나폴레옹이 제위에 오름으로써 문학운동의 변화는 문학 자체의 성숙과 프랑스 사회의 변동에 발맞춘 것이다. 낭만주의 운동이 프랑스에서처럼 정치적, 이념적 갈등과 뒤엉켜 있는 예는 찾기 힘들다.) 김붕구 외, 『(새로운) 프랑스 문학사』, 일조각, 1983, 194쪽 참조.낭만주의는 18세기를 거쳐 19세기초기에 까지 이어져 내려온 신고전주의라는 이름의 해묵은 지적, 예술적 전통에 대한 반발로 설명될 수 있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까지 독창성 없는 모방자들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해 가던 고전문학은 사실상 그 힘을 소진하였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와의 대응은 통제와 자유와의 대응으로 압축된다. 그리고 1830년 에르나니 파는 낭만주의 시대 최대 논쟁에서 승리했다. 그들은 삼일치 법칙, 드라마와 비극의 장점에 대한 논쟁 등 형식에 관한 논쟁을 넘어서 감정과 감수성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추론이성에 맞서 감정과 감수성의 권리를 옹호했다. 낭만주의 문학가들은 지성에 대한 감정의 우위를 표현했으며 사실상 합리적 사고를 거부하였다. 낭만주의는 하나의 정신적 태도이며 감성과 종교적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주의에 반발한 국경이 없는 국제적 문학운동이었다.) 조르주 뒤비, 로베르 망드루/ 김현일 옮김, 『프랑스 문명사 (下)』, 까치, 1995, 644∼645쪽 참조.낭만주의자들이 보편적 이성의 통제와 외형적 규칙의 예속에서 풀려나면서 그들은 개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19세기 문학에서는 개인의 감정과 삶이 중심이 되고 사회적인 규범이나 도덕은 그 개인의 상황을 뒷받침하는 배경의 의미만을 갖게 되었다.) 김붕구 위의 책 194쪽 참조.루소와 샤토브리앙 등 전기 낭만주의의 주역들은 작가 자신, 자신 안의 내밀한 존재에 대해 그렸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을 그 무엇에도 환원될 수 없는 하나의 절대자로 간주하며 자신의 세계의 단일성을 믿었다. 그리고 개인적 운명의 공간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철학을 정립하였다. 낭만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시간의 철학은 자연스럽게 역사에 대한 관념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개인적 운명의 공간이라면 대한 관심으로 발전되어 나가기도 하였다. 가령 낭만주의 대표적 시인인 라마르틴느는 국회위원이었으며 뒤에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기도 하였다. 비니는 여러 번 선거에 출마하였다. 특히 빅토르 위고는 당시의 상황과 그의 사상의 변화에 따라 많은 정치적 경험들을 하였다.) 김붕구 위의 책 195쪽 참조.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순순한 낭만주의 문학 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도와 사상의 변화를 드러내는 도구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2. 빅토르 위고의 정치, 사회, 문학 활동1802년 프랑스 브장송에서 태어나 1885년까지 83년의 긴 세월을 살아온 빅토르 위고의 삶은 19세기 프랑스 역사와 같이 했다. 권력 지향적인 위고는 생애에 있어 정치적으로 많은 변신을 거듭하였다. 빅토르 위고가 태어난 1802년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제 1집정관이 되어 황제 즉위를 준비하던 때였다. 위고는 아버지인 레오폴이 나폴레옹 군대의 장군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장 전형적인 부르주아지 성정을 갖게되었다. 그는 10세 때 스페인의 귀족학교에서 돌아온 후 루이 18세로부터 백합의 기사라는 칭호를 받고 부르봉 왕조의 지지자가 되었는데 이 것은 그의 청년기 정치적인 성향을 결정짓는 사건이었다. 위고는 17살의 나이에 형의 도움을 받아 《문학 수호자》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1822년 『오드와 잡영집』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제 1제정을 거쳐 왕정복고 시대의 문학사의 특징은 무성보다 이성에 대신한 감정과 상상력에 중심을 두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많은 논쟁들이 벌어지면서 문학파는 왕당파 고전주의, 왕당파 낭만주의, 자유주의파 고전주의와 자유주의파 낭만주의 등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위고는 보수적 낭만주의자로서 국왕과 교회를 찬미하는 왕당파이면서 문학에 있어 새로운 경지를 찾는 경향을 가졌다. 황제의 은덕을 입은 아버지가 있었고 왕정지지파인 빅토르 위고로서 젊은 시절의 왕당파 낭만주의의 성향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박흥순, 『소설과 역사』, 청동거울, 2002, 12∼15쪽 참조.왕당파와 자유주의파로0년 국왕은 긴급권을 남용하여 4개조의 소위 7월 칙령을 발표하였고 국민들은 이를 정치적인 쿠테타로 생각하였다. 이에 7월 26일 자유주의 저널리즘은 이에 반대선언을 발표하고 민중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파리의 왕궁은 민주의 힘으로 점령되고 29일 시가전은 정부측의 패배로 끝났다. 7월 시민왕정이 들어서자 정치적 행보가 빨랐던 빅토르 위고는 왕당파에서 공화파 쪽에 마음이 쏠려 부르주아지 성향의 자유주의로 전향하게 되었다. 1830년 7월 혁명은 낭만주의의 승리를 결정적이고도 유리한 방향으로 부추겼다. 모든 문학의 성채로부터 젊은 작가들이 봉기한 것은 자유의 이름 아래였다.샤를르 10세가 망명의 길을 떠나고 그가 금지했던 연극 『마리오 드 로름므』가 열광적인 분위기로 공연되었다. 그러나 7월 왕정은 부가 우선인 황금 만능의 시대였으며 사회적 부조리가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을 일으켰다. 이는 민중이 원하던 이상적인 사회는 아니었다. 귀족계급의 몰락과 함께 금융가, 기업가들이 신흥귀족층이 되었다. 문학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노동력만 착취당하던 노동자 계급을 외면하지 않고 그 것을 비판하고 개혁하는 선도자의 역할을 담당할 의무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계층의 양분화처럼 작가들도 사회주의적 효용성을 옹호하는 그룹과 부르주아지 현에서 그들의 도덕, 양식을 지지하는 그룹으로 나뉘게 되었다. 당시 위고는 정계의 거물이 되기를 꿈꾸었다. 그는 빅토르 자작의 작위를 얻고 레지옹 도뇌르 4등 훈장을 받았으며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선출되었고 루이 필립의 측근이 된 그는 1845년 왕에 의해 종신직 상원의원에 임명되었다. 대중의 빈곤에 민감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는 질서에 집착하였다. 이 당시 그는 체제를 대변하는 거의 공식적인 시인이 되었다. 이러한 세속적 영예는 각지의 공격목표가 되어 위고는 공화주의자들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위고의 문학적 명성도 『성주들』의 대 실패로 위기를 맞이하였다. 낭만주의의 승리 이후에도 고전주의의 저항은 계속되었국했다. 위고는 자심감과 자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그는 인류의 교화자, 예언자, 국민의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갖기를 원했다. 그리고 특히 그의 말년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 피압박자, 하층계급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졌다. 망명 기간동안 그는 풍자문인 소책자 『꼬마 나폴레옹』을 시작으로 1853년 『징벌시집』을 출간했다. 그리고 낭만주의 사회소설의 대표적 걸작인 『레 미제라블』이 1862년 출간되었다.) 박흥순 위의 책23∼26쪽, 폴 프티티에 위의 책 65쪽 참조.1870년 제 2제정의 몰락으로 다시 정치가로 복귀한 위고는 1871년 2월 8일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파리 꼬뮌 기간 중 벨기에의 브뤼셀에 머물던 위고는 꼬뮌파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하여 룩셈부르크 등지로 떠돌아다니다가 1872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꼬뮌 투사들의 완전한 사면을 요구하며 계속 투쟁하였다. 1885년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정치활동과 사회활동을 계속하였다. 1880년에는 위고가 활발히 주장하던 사면에 대한 법안이 가결되었고 1885년 프랑스인들의 애도 속에서 그의 장례가 거행되었다. 20대에 문예운동의 거두로 등장하여 50대 이후 자유와 약자보호를 위해 싸웠던 위고의 열정은 프랑스 공화국 이념과 맞닿아 있다. 그의 강한 사회적 연민의 정은 그에 있어서 그의 정치적 전향보다 이전에 있었던 것이고 또 그것이 그의 정치적 전향을 준비했다. 그는 프랑스의 개화적 사명과 인간 영혼의 점진적인 향상을 믿고 있었고 관용과 인자와 같은 상투어를 믿었으며 자기 자신이 그 전도자가 되기를 바랬다.) 박흥순 위의 책27∼29쪽, G. 랑송, P. 튀프로/정기수 옮김, 『랑송 불문학사(下)』, 을유문화사, 1983, 68∼69쪽 참조.3. 빅토르 위고의 작품 세계작가들의 정치사상은 실상 그 것이 문학 텍스트에 곧바로 적용되지 않더라도 문학과 그의 사회적 목적, 시인의 역할 그리고 미학적 원리라는 개념의 기초를 이룬다. 또한 문학 텍스트에 통합된 정치 사상은 정당.
    인문/어학| 2003.11.24| 8페이지| 2,000원| 조회(1,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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