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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리뷰] 영화 [도가니]를 보고 느낀 짧은 감상평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라-영화 [도가니]와 현실의 ‘도가니’영화 [도가니]가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떴어. 그리고 이상하게도(?) 쉽게 가라앉질 않아. 뭐 수퍼매가톤블럭버스터서스펜스스릴러어드벤처스펙타클무모액션 영화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높이, 오래 떠 있는 이유는 대체 뭐야? 그래서 그 연유를 찾아나서기로 마음먹게 된 거야.[도가니]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었으니, 일단 영화를 봐야겠지 싶어서 영화관으로 달려갔어. 표를 끊으려고 매표소 앞에서 줄을 서고 있는데, [도가니]를 방금 보고 영화관을 나서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영 심상칠 않아. 그들이 쏟아내는 “아……!”라는 감탄사가 어떤 감정을 토해내고 있는지를 알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어. 두 시간 가량의 런닝타임을 죽이고 영화관을 나섰을 때 내 구강을 통해 튀어나왔던 언어 또한 그들과 같았으니깐. 바로 분노라는 이물감이었어. 그 감탄사를 참아가면서 영화관을 나선다는 건 몇 년 간 묵언수행을 해오던 고승이라 해도 아마 견디기 어려웠을 거야.그랬구나! 우리들-시민, 소시민, 그리고 널리 통틀어서 사회적 열등계급이거나 그런 인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만-은 지난 세월 동안 승자만이 홀로 모든 걸 독차지해 버리는 이 사회를 경험하면서 거기에 적응하고, 자신도 모르게 억울함이라든가 분노 따위는 제3공화국 시절의 모범적인 시민집단처럼 일종의 적응기제로 잠복시켜왔던 거야. ‘뭉치면 잡혀간다’는 공포의식을 모종으로 합의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서를 파편화시켰고, 그 안에서 소시민적인 자질만 기하급수적으로 향상시켜왔던 거지. 한때 참여정부 시절에 ‘뭉쳐도 괜찮더라’는 진정한 시민자질이 차츰 무르익어 갈 즈음에, 오늘날의 위대한 가카께서 그 바통을 씹어드셨지. 어쩔 수 없잖아? ‘뭉쳐도 잡혀가진 않는데, 괜찮지는 않은 거 같여’와 같은 싸구려 비빔밥을 우리는 한동안 비벼왔던 거야. 존나 맛없는 줄 알면서도 말이지. 그러면서 대충 승자독식 강자불패의 시대가 서둘러 떠나주기만을 기다리면서 숨죽여 살아왔지. 그런데 어디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대충 이 한 시절이 끝나준다 해도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떨까?그래서 공지영 님께서 우리들의 막힌 숨통과 인식을 조금이나마 터주려고 [도가니]를 들고 나타나신 거야. 그리고 황동혁 님께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영상을 보태서 우리들에게 그간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요 ‘분노’라는 놈을 발기시켰던 거지. 그러면서 영화와 SNS(파편화된 감정을 대충 씨부려도 아직은 괜찮은 것처럼 여겨지는 물외의 세계)를 통해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고, 의외로 많은 인파가 발기된 분노를 가지고 뭉쳤던 거야. 우리 사회 기득권층들이 분뇨 냄새 범벅으로 쌓아올린 온갖 비리들과 그간 묻어왔던 추악스런 진실이 빙산의 일각이겠지만 잠시 뽀록나면서 우리들은 공분을 쌀 기회를 얻었던 것이고, 그걸 일종의 신드롬으로까지 명명하게 된 거겠지.달리 말하자면, 우리를 분노의 도가니로 밀어넣은 건 공지영의 [도가니]도 아니고, 황동혁의 [도가니]도 아니야. 바로 약한 아이들까지 짓밟으면서까지 자신들의 쾌감을 탐하고, 달랑달랑거리는 면죄부를 지 새까만 불알처럼 달고 다니던 그 추잡하고 비도덕적인 기득권층들이야. 그리고 그들이 폭력면죄, 부패면죄의 표창을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게끔 비호해 주는 우리 사회의 ‘정의수호집단’들이겠지.그런데 이 신드롬이 그냥 냄비근성처럼 휘익- 하고 사라질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뭐 네티즌들이 서명운동도 전개하고, 관할기관에 항의전화도 해 대고 하니깐 그간 일도 없이 조폭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며 염탐질이나 해대던 경찰님들께서 친히 수사에까지 나서게 된 거야. 결국엔 그 사건이 발생했던 학교의 폐지까지 검토하게 만들었어. 사실 나도 [도가니]의 파급효과가 그 정도까지 될 줄은 몰랐어. 정치권은 ‘도가니 특별법’인가를 만든다고 늑장법석을 떨고, 딴나라당에서는 사회복지시설에 ‘공익 이사제’를 도입하겠다고 침을 튀기고 있지. 것두 지들이 예전에 생지랄쳐서 막아냈던 법안을 이제는 손발 걷어붙이고 입안에까지 나서는 꼬라지를 보면 참으로 한심무량할 정도라니깐. 암튼 기득권층은 참 뒷북치기의 달인이야. 아니, 인면수심의 제우스라고 해야 하나? 암튼 천인공노할 폭력은 지근거리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지만, 그 폭력을 단죄하는 법의 도덕성을 강제로 끌어 세우는 데는 6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지. 정말 법은 우리로부터 너무 멀리 있는 거 같애. 까. 마. 득. 히.“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공지영, 소설 [도가니] 중에서암튼 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앞으로 우리 사회가 도덕과 양심을 밑장에 깔고 달리는 민주적인 기관차가 되는 건가? 우리는 [도가니]를 발판으로 해서 앞으로 합법의 탈을 쓰고 자행되고 있는 무시무시한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건가? ㅠㅠ. 현실의 결론은 씁쓸하지만 ‘아니올시다’일 테지. 왜냐면 우리도 잠시 분노의 ‘도가니’에서 함께 했던 추억을 가진 채 영화 속 ‘강인호’처럼 소시민의 일상으로 조용히 물러나야 하니깐. 그렇다고 그런 우리들을 누가 비난하거나 쇠고랑 채우러 오는 건 아니야. 그게 바로 인지상정이란 거지. 세상을 변화시킬 힘은 세상을 버텨나갈 힘부터 갖춘 다음에라야 가능한 거 아니겠어?
    독후감/창작| 2012.10.15| 3페이지| 1,000원| 조회(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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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를 통해 본 남편과 아내
    문학작품을 통해 본 아내와 남편―현대시를 중심으로1. 들어가며문학작품 속에서는 남녀의 품행, 외모, 성격 등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을까? 소설 속에서 나오는 표현 방식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이들이 점검한 바 있다. 소설은 아무래도 외연적 의미가 쉽게 포착이 되고, 겉으로 드러난 의미만으로도 이러한 표현 방식을 분류하고 분석해 내는 게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을 것이다. 운문 쪽에서는 특이하게도 고시조를 통해서 이러한 표현 방식을 고찰해 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평시조와 사설시조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통해 묘사됨으로써 엘리트적 묘사와 민중적인 묘사의 차이점만 발견된다는 게 아쉬운 대목이다.문학작품 속에서 남녀의 품행을 전반적으로 살펴본다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임에 틀림없으며, 개념적 체계를 가능한 객관적으로 마련하는 일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이 글에서는 문학작품 속에 나오는 여성(아내)과 남성(남편)에 대한 묘사만을 언급하도록 한다. 그리고 가급적 딱딱한 분류 방식을 택하지 않고, 각각의 작품에 표현된 남녀의 면모만을 살펴보는 것으로 한정하기로 한다.2. 현대시의 시각문학이란 인간의 자유와 진실 추구를 표방하는데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남성만이 아닌 여성을 포함한 역사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연구 상황은 문학이 인간을 위한 표방이라면서 주로 남성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남성들의 평가 위주만이 한국 문학의 상황이었다. 특히 이는 남성 저자에 의해 쓰여진 많은 문학 작품이 알게 모르게 사회 내부에 침투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제 문학이든 문학사든 기존의 의식인 인간표방, 즉 남성만으로 대부분 좌우되었던 의식은 여성 문학의 위상을 재정립함으로써 반성 비판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각이 등장하고 있다.문학 작품을 통해 여성과 남성의 현 지위를 살펴본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최고 교양자이며, 최고의 엘리트라 여겨지는 문학자들의 이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현대무엇이며, 또한 그러한 묘사 속에 감추어진 여성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지를 건드려 보도록 하겠다.3. 시 속에 등장하는 아내라는 이름“아내를 얻는 것은 행복을 얻는 길, 야훼께서 주시는 선물이다.잠언에 쓰여 있는 이 구절은 구약시대 유대인 남성들의 아내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당시의 아내들은 일생에 걸쳐 남편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도 여성들은 집안에 갇혀 지내야 했고 예배당에 갈 때 외에는 거의 외출조차 하지 못하는 처지였다.우리 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아내의 역할은 '내조자'였고, 또 오랜 기간 그렇게 인식되어져 왔다. 그런데 여성의 권위가 향상되고 경제활동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이런 부분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내가 경제활동 능력이 크다면 남편도 내조를 할 수 있다'.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이런 인식이 자리 잡혀 온 것이다.하지만 여성의 내조는 그 형식이 바뀌었을 뿐, 그리고 그 지나침에 대한 항변의 목소리가 커졌을 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아내의 경제력이 크게 향상된 오늘날에도 많은 남편들은 아내의 정신적 내조에 힘입어 살아가고 있으니까.나 바람 나지 말라고아내가 새벽마다 장돗대에 떠 놓은삼천 사발의 냉숫물.내 남루(襤褸)와 피리 옆에서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서정주, ?내 아내? 부분이 시 속에 나오는 아내는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남편이 ‘바람 나지 말라고’ 새벽마다 장독대에 냉숫물을 떠놓는 여성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이 가난의 탈피를 위한 그 무엇이 아닌 단지 ‘바람 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아내는 가난하지만 피리(예술)을 불 줄 아는 남편을 존경하며, 그의 ‘바람끼’만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조강지처의 면모로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의 남편은 별다른 생계를 하지 않는 ‘피리’ 부는 사람 정도로 나온다. 예술을 즐기는 남편을 섬기는 여성의 태도란, 그 예술을 감상하고 평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평등적 존재로서가 아닌 그 예술과는 무관하게 만족시키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는 일종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물론 우리는 그 아름다움이 어떠한 종류인지는 개개인마다 다르다. 내가 이것을 겪으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반면, 상대방은 다른 것을 할 때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생에서 아름다움이라고 여길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함으로써 사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간의 애정은 하늘이 선택하여 내려준 고귀한 것일 수밖에는 없다.여기서의 아내는 꽃구경 갔다가 돌아온 다음 날, 이 세상을 하직한 슬픈 상을 간직하고 있는 여성이다.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는 이 시 속에서 그의 아내는 하나의 가녀린 꽃잎으로 떨궈지고 말았다. 여기서 표현된 꽃잎은 바람에 힘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심상으로 드러난다. 많은 시들에서 여성을 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대체로 ‘꽃’이라는 어감이 지니는 아름다움의 면모와 함께, 그 ‘꽃’이 유발하는 나약한 심상이 여성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고 여긴 모양이다.오오 안해여, 나의 사랑!하늘이 묶어준 짝이라고믿고 살음이 마땅치 아니한가.아직 다시 그러랴, 안 그러랴?이상하고 별나운 사람의 맘,저 몰라라, 참인지, 거짓인지?―김소월, ?부부(夫婦)? 부분현대시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내는 하늘이 점지해 준 짝으로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여성은 남성의 귀속물로서 그 남성을 신뢰하고 하늘처럼 떠받들 때 행복한 것이고, 그 신뢰가 무너졌을 때 여성의 불행은 시작된다는 논리로 귀결되는 게 특징이다.이 시 속에서도 경제적인 책무를 다하지 못한 남편이 여성에게 건네는 일종의 ‘떠봄’의 언질을 주는 식으로, 자신을 믿고 산 것이 다행한 것인지, 아니면 못 마땅한 것인지를 밝혀 달라는 내용이다.성역할 고정 관념이란 게 있다. 어디에서나 남성이 여성보다 더 우수하거나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점. 실제로 남성위주의 결정이나 정책이 실제로 행해지고 있다. 성역할 고정 관념시각이 갖는 문제점이란 많은 경우에‘아내’로 탈바꿈 한 상태에서는 이러한 시각도 차단되는 듯하다.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당당한 여성은 등장하지만, 당당한 아내는 거의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3. 시 속에 등장하는 남편이라는 이름남자답게 산다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많은 남성이 불현듯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고 여자로 태어나 부담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갈등을 겪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그러나 대부분 남성은 다시 태어나도 남성이고 싶다고 말한다. 개방 설문을 중심으로 왜 남자로 태어나고 싶은가를 정리해 보면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다", "남자가 편하다", "남자에게 기회와 가능성이 많다", "여자는 약하고 남자는 강하다" 등으로 남성이 누리는 혜택이 많다는 이유를 든다.기회와 가능성을 잡지 못하고 실패한 남성은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다시 남자로 태어나기를 원하는 실정이다. 실제로 남성이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할 가능성은 적다. 중산층에서 입지전적인 대재벌로 상승하기는 어려우며, 노동자 출신이 학자나 자본가로 성공할 확률도 희박하다. 오히려 꿈을 이루기보다는 "여자보다는 낫다"는 지위를 지키려는 동안 남성은 더 많은 질병과 사고, 죽음을 맞이한다. 남성의 평균 수명이 여성보다 7, 8년 적고 과로사의 위험도 많다. 그렇지만 남성은 포기하지 않는다. 실패했을 때, 또는 가장 역할을 다하지 못했을 때 엄청난 두려움과 좌절을 겪게 되어도 그것이 남성다움이 주는 압력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단지 남자의 운명일 뿐 자신의 두려움이 어디서 오는지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우리의 현대시 속에는 남편의 모습은 방금 말한 남성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현대시 속에서 남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시들이 아내들을 상대로 한 것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이는 남성 작가들이 주류를 이루는 문단의 성격 탓으로 돌릴 수도 있으나, 시적 소재로 삼기엔 남편의 모습은 그닥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시인들의 인식에 기인하는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문정희,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부분"나도 남자동료들과 똑같이 훌륭한 물리학자가 될 수 있어요, 여자도 남자처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아내로 아인슈타인과 같은 물리학자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상대성 이론과 광양자 이론 등의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 그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큰 공헌을 한 여성이다. 하지만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그녀는 모든 것을 잃고 남편과도 이별을 해야만 했던 불운의 여성이기도 하다.이 글은 학창시절에 공부도 잘 하고, 대학까지 졸업하면서 남성과 동등한 능력 이상을 발휘하던 여성들이 ‘부엌데기’로 전락해 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서 남편이라는 존재는 살짝 그려지면서 넘어가고 있는데,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먹어치우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직장에 나가 하루 종일 고생하는 남편을 위해 아내는 정성 들여 감자국을 끓여야 하고, 감자국에 대한 품평을 남편으로부터 기대하게 되는데, 남편은 직장으로부터 ‘퇴근’했을 따름이다. 즉 가정 내부적인 일에 결코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다. 설거지, 아이들 숙제 돌보기 등의 작업은 남편의 것일 수 없다.얼금얼금 금이 가고 등이 터진 게오랜 나날 짜들린 살림살이온몸에 잔금이 갈대로 간 자기마누라와 꼭 닮았다는 생각이자꾸만 들었기 때문그러나 도공의 아내는왜 이 그릇만 그렇게 오래도록남편 옆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까닭을 알지 못했다.―나태주, ?옹배기? 부분여성다움의 강조의 근간은 우리 나라에서는 유교 전통에 기반하는데, 현대에서 논하다.
    인문/어학| 2006.10.28| 11페이지| 1,000원| 조회(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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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리 문학의 민족주의
    김동리 소설의 민족성 재검토목 차?서론 : 연구목적 및 접근방향?본론 :­ 민족주의와 민족문학­ 김동리 소설과, 민족문학 혹은 순수문학­ 순수문학논쟁을 통해 본 김동리의 문학관­ 민족문학에 대한 재고?결론 : 민족문학을 찾아서서론 : 연구목적 및 접근방향현대문학사에서 김동리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김동리는 우리 민족의 내면에 깊이 자리한 샤머니즘을 발굴하고, 황토색 짙은 작품을 통해 우리의 것을 잃지 않기를 갈망한 작가이다. 특히 김동리는 그의 문학적 출발에서부터 마지막 지점까지 거의 동일한 주제의식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우리 소설계의 독보적인 위상을 점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문학사에서 김동리만큼 비평과 논쟁의 중심에 서 온 사람도 드물다. 김동리의 문학은 본격적인 순수문학을 추구했다고 보는 긍정적인 평가로부터 反역사적 현실도피문학이라는, 양 극단을 오가는 평가 속에서 현재까지 진행 중인 ‘문제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의 문학이 ‘민족주의 문학’이라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옳건 그르건 자신만의 확고한 ‘노선’을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이 글에서는 일차적으로 민족주의라는 관념에 접근해 보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김동리 문학에 나타난 민족주의적 성향에 대한 고찰을 통해 민족주의 문학의 진정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해 보도록 한다.민족주의와 민족문학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교과서나 대중 매체 등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하여 지겹도록 들어오는 말이 있다. 바로 우리가 "단일민족국가"라는 말이다. 단일민족국가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반만년 유구한 역사 속에 순수한 한민족의 피를 지켜왔으며, 세계에 단일민족국가는 흔한 것이 아니요, 조금 더 확장시켜서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세뇌를 받고 자랐다. 그래서 민족주의라는 말은 정치적 혹은 문화적으로 그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신성한 관념쯤으로 여겨온 것 또한 사실이다.일반적으로 민족이라 하면 같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공동생활을내부에서 실현시키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민족주의는 여러 학문과 연결되어 논해지면서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여러 주의나 사조와도 연결되어 각 국가나 지역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즉 고정된 이념 체계라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라의 대외적, 대내적 상황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며, 역할 면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민족 문학을 논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김동리 소설과, 민족문학 혹은 순수문학김동리가 문단에 등단한 1930년대 후반기는 우리 문학사가 지적 혼돈과 새로운 주류의 탐색을 특성으로 하는 문학의 혼란기라고 할 수 있다. 30년대 후반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사건은 경향문학과 함께 당대 문단을 주도해 오던 모더니즘의 쇠퇴라는 점이다. 결국 근대성의 추구라는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 리얼리즘(경향문학)과 모더니즘은 30년대 후반의 비합리적 세계 상태 속에서 합리적 추구 강조를 약화시키며 범근대주의라는 형태로 서로 접근하게 된 것이다.)예술주의 또는 문학주의로 범칭되는 순문학적 경향의 대두는 이러한 문학사적 요구에 대한 하나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이 합리주의에 근거한 계몽주의적 특징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음에 반해 순수문학은 자율적 미의식의 추구에 보다 적극적이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김동리는 후자의 문학관을 택하게 되는데, 그는 기존의 순수문학 이론에 자신의 이론을 접목시킨 새로운 형태의 순수문학을 주장하기에 이른다.먼저 해방 전에 김동리가 추구한 순수문학은 낭만주의 세계관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이것은 합리적 이성 개념(모더니즘)을 거부하고 미적 자율성과 유미주의를 보다 전면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그러나 해방 이후 김동리가 추구한 순수 문학은 민족문학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서 김동리는 사상적 측면에서 민족문학이 곧 순수문학이라는 문학론을 내세우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후에 그의 논리를 비판하는 논의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그는 민다. ―김동리, , (도서출판 벽호) pp.15∼16그것은 언젠가 한 번 저 무지개와도 같이 하늘 끝까지 시원스레 뿜어졌어야 했을 불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기 동네 장정들도 겨우 다룬다는 들돌을 들어서 허리를 편 것으로 온 마을을 뒤집어 놓은 것은 그의 나이 열 세 살 나던 해다. “장사 났군.”, “황토골 장사 났다!” 사람들은 숙덕거리기 시작하여, 이튿날은 노인들이 의관을 하고 동회에 모여들었다. ―예로부터 황토골에 장사가 나면 부모한테 불효하거나 나라의 역적이 된댔겄다. ―김동리, 〈황토기> (도서출판 벽호) pp.48∼49.그러나 그러한 월희가 을화의 눈에는 비치지도 않는 듯, 꼭 빈방에서처럼, 그녀는 그녀의 명도 거울이 모셔져 있는 신단 위에 성화수를 옮겨 놓자 천천히 일어나 손을 비비며 빌기 시작했다. "선왕마님, 선왕마님, 복 주시고 요 주시고, 화 쫓아 주시는 선왕마님 큰마님, 오늘도 저희 애미 딸의 실낱같은 이 목숨을 꽉 잡아 주오시고 지켜 주옵소서, 선왕마님 큰마님, 지난 밤 꿈에 이년을 찾아왔던 큰 뿔돋친 몽달귀가 어디서 난 몽달귄지, 어이해 온 몽달귄지, 이 집 근방을 빙빙 돌고 떠나지 않사오니, 이 집엘랑 아예 발도 듸례 놓지 못하도록, 선왕마님 큰마님께서 에헴 큰 소리로 내쫓아 주옵소서. ―김동리, , (소담출판사) pp 150∼151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민족 고유의 핵심적인 얼이 바로 샤머니즘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위의 발췌문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에서 모화의 딸 낭이가 수국 용신님의 딸이었다는 점이나, 아버지의 명을 어겨 벌을 받고 수국에서 쫓겨나 귀가 먹었다는 낭이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 또 에서처럼 황토골에 장사가 나면 나라의 역적이 된다는 샤머니즘적 믿음, 혹은 에서 보여지듯이 꿈에 보이는 몽달귀를 쫓기 위해 선왕마님께 비는 월화의 모습은 모두 샤머니즘적이고 토속적인 소재들이다.김동리는 항상 사상적으로 동양의 사상을 강조했고, 한국적인 것(샤머니즘)을 다루고자 했으며, 그것이 현실적으로 몰락되고 그림처럼 작중 인물의 행동과 운명을 암시한다. 억쇠와 득보는 피흘리며 죽어간 용들과 같이 끝도 없는 싸움을 계속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것이다. 에서는 무당의 신분인 을화나, 그녀의 딸로 태어난 월희는 그 신분에 걸맞는 운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김동리의 운명애는 인간에 대한 무관심의 소치나 부정에서 내려진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사소한 일상생활에 자기의 운명을 걸고 있는 비소한 인간으로부터 총체적 운명을 걸고 있는 인간에까지 그의 심야는 심화된 것이다.)이러한 소재, 주제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김동리 문학에 있어 민족문학 내지는 순수문학으로 대별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쉽게 간과해 버릴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김동리 자신이 주장한 순수문학론을 말하는 것인데, 민족문학 곧 순수문학이라는 그의 문학관은 현재까지도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순수문학논쟁을 통해 본 김동리의 문학관이 논쟁은 그 전개 과정 자체만을 살펴볼 때는 그렇게 깊이 있는 이론 전개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에 대한 정리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여기서 얻어진 문학정신의 본질에 관한 이론가들의 견해가 해방 이후 우리 문단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성 옹호론과 순수문학 이론의 접합이 이 논쟁의 전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김동리의 생각으로는 ‘문학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질적 풍족만을 최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정신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택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문학 자체도 구경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구경적 생의 형식으로서 문학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 되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는 유기적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에게 부여된 이 공통된 운명을 발견하고 이것의 타개에 노력하는 것”이 된다.이러한 주장은 문학의 소재와 주제에 관문학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외면하는 문학이며, 의도적으로 현실을 도피하기 때문에 반동적 세력에 이용되는 문학이라고 비판을 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구국문학이란 자체가 좌익 측 문학이 생존을 위해 탈바꿈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어서 김동리의 순수문학론을 맞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정치·사회적으로 우익 진영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가는 상황에서 승리를 예감하고 있던 김동리는 그러한 논의를 아예 무시한 채 순수문학을 민족문학의 실제적 모습으로 확정지어 해방직후 문단의 실질적 승자가 되고자 한다. 그러한 그의 생각은 ‘민족문학론’)에 담겨 있다. 그동안 발표되었던 어떠한 글보다도 좌익 측에 대한 공격의 강도가 높은 글인데, 우익 측의 승리가 기정사실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단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지 않는 상황에 자극을 받은 듯하다. 참고로 당시의 분위기를 잠깐 엿보고 넘어가기로 하자.정치적 상황으로는 우익 측의 승리가 확고해지지만 사회적 분위기, 특히 문단 분위기는 좌익적 성향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심지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그러한 경향이 지속되었는데, 문총이 1948년 12월 27일부터 28일까지 양일간에 걸쳐 시공관에서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 대회’를 개최)하고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여 모든 매체들을 장악함으로써 좌익 측의 세력이 소멸되었다.김동리는 ‘민족문학론’에서 당대의 민족문학에 대한 주장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계급투쟁 문학으로서의 민족문학, 둘째 민족주의 문학으로서의 민족문학, 셋째 본격문학으로서의 민족문학이 그것이다. 물론 참다운 민족문학을 꼽는 김동리의 입장은 세 번째에 있으며, 그것은 계급이란 전체의 부분일 뿐이므로 그들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문학은 본령의 문학이 되지 못한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김동리는 좌익 측 문학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문학”으로 규정하여 그 이전보다 훨씬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좌익 측의 문학은 “민족을 부인하려는 반민족적 각도에서 제작된 문학”이
    인문/어학| 2006.09.16| 15페이지| 1,000원| 조회(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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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비평] 우리 문화의 숨결
    우리 문화의 숨결"전통의 단절은 우리를 방황케 하고, 미래로 열린 현재성 없는 전통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닐는지. 하여 지금의 우리 민족은 심히 아프다. 공해로 아프고,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 그리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국을 들쑤시는 보수 공사로 몸살을 앓고 있다. 무작위적인 외래 문화의 수용으로 민족 고유의 특이한 색깔은 잡탕으로 변질되었으며, 또 한편의 극단에서는 쇼비니즘(국수주의)으로 세계로 열린 대문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알아들을 수 없는 자폐증처럼 웅얼거림만을 되뇌이고 있다.우리는 건강했던 우리의 숨결을 되찾아야 한다. 그것은 무슨 거창한 일이 아니라 단지 기억을 더듬는 일이다. 건강했던 우리의 숨결을 기억해 내는 일은, 현재를 건강하게 살아 미래에 대해서도 희망적일 수 있는 행동과 양식을 만들어 내는 최초의 사건이다.죽음에 대한 숨의 이치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는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의 이치란 지극히 간단하다.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핵심은 '숨'이다. 안락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 운운하는 식물인간도 숨을 쉬고 있으므로 생명이며 나무도 숨을 쉰다.숨은 들이마심과 내쉼의 연속이다. 그것이 전부인가? 아니다. 들이마셨다가 내쉬기 전의 찰나에, 또 내쉬었다가 마시기 전의 찰나에 정지 상태가 있다. 생명체마다 다르긴 하지만 그 정지 상태가 보통 때보다 어느 정도 길어지면 그 생명은 숨을 거두고 죽는 것이다.추상화시켜 얘기하면 인간공동체의 생명도 마찬가지다. 역사상 많은 민족과 국가가 멸망해 간 것은 숨의 정지 상태를 들숨 날숨으로 연속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어떠한가?공동체의 삶과 죽음우리 민족은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 누구는 반 만 년 동안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그 이상이라고도 하지만 어쨌든 꽤 오랜 세월 동안 숨을 쉬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정상적인 정지 상태가 아닌 비정상적인 정지 상태가 있었다. 자체의 분열로 영원히 숨이 멎을 위기도 있었고 몽고나 일본의 침입 을 연속시키는 어떤 열쇠가 있다.얘기의 초점을 다시 우리 민족에게로 되돌려 보자.대륙의 한쪽 끄트머리 작은 한반도에 자리잡았고, 남쪽으로는 일본과 대치하고 있어 한시도 바람잘 날 없었던 우리 민족은 어떻게 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 남았을까? 경제적으로 대국이었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옛 고구려 시절에 군사적으로 강력했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 후에 중국의 엄청난 군사적 힘을 생각해 보면 그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비밀은 아마도 '문화의 힘'에서 찾아야만 할 것 같다.합리성이라는 이름의 서구문명의 편집증방금 말한, 우리 민족의 숨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문화의 '힘'이란 다름아닌 합리성이다.사람들은 합리성이라고 하면 흔히들 서구유럽문화을 얼른 떠올리게 된다. 더치페이, 페미니즘, 최소경비 최대효과, 법률지상주의 등등은 서구유럽문화의 합리성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심지어 종교에서조차 그들은 유일신 사상으로 합리성을 표방한다. 신은 하나인데 신을 여럿 가지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동양은 얼마나 비합리적이냐는 것이다.그들은 정말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산업혁명은 생산의 비합리성을 몰아내고 경제합리주의를 선포하더니 끝없는 기술 개발로 치달리고 있으며, 神의 비합리성을 증명하기 위해 우주로 로켓트를 쏘아 올렸으니 말이다. 그들은 모든 걸 자로 재고, 획일화시키고, 무엇이든 논리적 시스템에 의해 정돈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며,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미신이나 미개라는 딱지를 붙여 쓰레기장으로 몰아 넣는다. 그리고 그 쓰레기 더미 속에는 망상이 꿈틀거린다.망상에서 비롯된 이 병은 너무도 뿌리가 깊다. 누구든, 어느 민족이나 나라든 다 망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망상이 체계화되면 위험하다. 정신병 중에서도 Paranoia(체계화된 망상을 지닌 정신병)은 얼마나 위험한가.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일본의 천황이 그랬다. 베트남전과 걸프전에서의 소위 '정의구현'이라는 이름의 Paranoia적 성과(?)는 그 얼마나 끔찍한 합반'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오로지 앞을 향해 쭉쭉 내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뒤처지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고 낙오자는 그냥 버려진다. 이것은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단거리 육상 경기와도 같다. 미국은 육상 세계 1위국이라는 사실에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1등을 제외한 수많은 소외자를 뒤로 한 채 말이다.몇천 년과 56억7천만 년서양 기독교 문명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역사는 그 수명을 다했다. 곧 종말인 것이다. 그리고는 신이 다스리는 천 년의 왕국이 있다지만, 그 이후에 인간이 설 땅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종말이 다가왔으니 어서 빨리 회개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비하면 미륵보살을 좋아했던 한국인의 정서는 어떠한가. 한국인들은 보살 중에서도 미륵을 특히나 좋아한다. 미륵은 56억 7천 1만 년 후에 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이자 동시에 보살이다. 5,670,010,000년이라니! 도대체 한국인들은 그 비현실적인 숫자만큼의 해가 흐른 후에 정말로 미륵이 도래한다고 믿었단 말인가. 그러나 정작 이것을 믿고 안 믿고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한국인의 넉넉한 '여유로움'인 것이다. (재미있게도)지구의 나이만큼의 56억 7천 1만 년의 세월 앞에서 그 누가 급할 수가 있겠는가. 1등과 꼴찌도, 부자와 빈자도, 내 나라와 네 나라도, 이 모든 것들이 그 영겁의 세월 속에서 얽히고 설켜 용해되는 것이다. 또한, 간단히 회개로서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지은 죄를 인간이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영겁의 세월을 견딜 수 없다는 자기 책임적 역사 의식이 거기엔 담겨 있다. 너무도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그 무한의 비현실적인 숫자에 담겨 있는 한국인의 마음은, 인간의 일은 그 세월 동안 인간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는 고도의 합리성인 것이다.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미학서구 문명인들이 신대륙을 찾기 위해 그토록 연연한 것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다. 어디론가 뛰쳐나가지 않고는 한漢족 중국의 경우와 잘 비교가 된다. 그 때 그들은 거기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고 있는데 굳이 밖으로 출정한 이유가 어디 있었겠는가. 교류를 위해 길은 만들되 그것을 전쟁을 위한 광기의 길로 삼고 싶지는 않았을 게다. 이를 일컬어 서양 문명인들은 '미개', '진보되지 못한' 등의 말로 표현했으며, 혁명가 마르크스조차도 이를 두고 '아시아적 정체성'이라 하였다.도대체 왜 진출하고 개척하는가? 자연의 황폐화와 인간의 소외만을 남기는 그 짓을 왜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들 스스로도 모른다. 그저 멈출 수가 없을 뿐이다. 그것은 브레이크 없는 핵폭탄이다. 핵폭탄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것은 서구 문명의 분열증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물건이다. 모든 것을 마구 쪼개어 눈에 안 보이는 원자로까지 쪼개더니 결국에는 그 원자까지도 쪼개 버렸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물건이 핵분열 에너지를 이용한 원자폭탄이다. 분열미학의 극치인 것이다.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몇몇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신분열증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정신분열증에 관한 학문이 발달한 것이다. 분열증에 걸릴 일이 거의 없었던 옛 우리 나라에서는 당연히 그런 학문이 발달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그럼으로써 광기가 진정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불행히도 이번에는 '분열'이 아닌 '융합'의 극단으로 치달았다. 합치고, 합치고, 또 합치더니 결국에는 쪼갰던 원자를 다시 합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핵융합 에너지를 이용한 수소폭탄이다. 융합미학의 극치인 것이다. 분열의 극단과 융합의 극단. 결코 조화되지 않았던 두 극단 사이에는 전쟁과 파괴, 기아와 공포, 오염과 기형아, 초토화, 불바다, 종말 등등의 유행어만이 난무한다. 이런 것들이 지저분하다고 느껴, 무기물은 놔두고 생명체만 죽이는 중성자탄까지 만들어 냈으니, 도대체 광기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이리하여 서구 문명인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치부하기 위해 합리성이라는 것을 고안해 냈다. 자신들의 광기를, 그야말로 '합리화시키는' 것이 그 칼날이 안으로 향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날이 사용하는 사람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다. 서구의 밖으로 베어내는 낫질이나 앞으로 찔러대는 쇠스랑질과 비교해 보자. 전자는 생명을 가꾸는 것에서 발상한 것이고 후자는 생명을 죽일 수 있는 무기에서 발상한 것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날이 자기로 향해 있다는 것은 스스로 날을 두려워하여 타자의 생명까지도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생명 중시의 정서이다. 또한 그것은, 남에게 칼날을 들이대면 나도 다치게 된다는 화해와 타협의 합리성이기도 하다. 식사할 때 쓰는 도구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수저와 젓가락을 쓰지만 저들은 포크와 나이프를 쓴다. 포크와 나이프는 언제라도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베거나 자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우리의 칼날문화. 거무튀튀한 우리의 무쇠 식칼은 잘 안 드는 것으로 얼마나 유명한가. 하얗게 휘번뜩이는 일본의 회칼에 비하면, 그것은 오히려 친근감마저 준다. 미륵의 그 신비스러운 미소를 다듬어 낸 사람들이 날을 세울 기술이 없어서 그랬겠는가.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무기에서 발상한 문화를 가진 나라는 수없이 멸망해 갔어도 생명의 문화를 가진 우리 나라는 수 천 년을 꿋꿋이 살아오고 있다. 생명의 문화는 생명 특유의 유연함, 즉 합리성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조선왕조를 비판할 때 중국에 대한 사대의 비굴함을 말한다. 이에 대해 홍일식 교수는 다른 견해를 밝힌다. 힘으로 붙어 봐야 질 것이 뻔한데 그렇게 한다는 것은 우매한 짓이라는 거다."중국이 목숨처럼 숭상하는 유교사상을 받아들이니 그들도 우리 민족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유교사상을 받아들인 나라를 친다는 것은 자신 스스로의 근본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논어에도,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섬기는 것은 하늘의 뜻을 따름이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함이라, 고 하여 사대와 사소를 동일시했으니 중국도 우리 민족을 사소로 대한 것이다."아주 일리 있는 견해이다다.
    인문/어학| 2003.11.27| 8페이지| 1,000원| 조회(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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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 나쁜 피와 성스러운 피
    파멸의 상징인가 희망의 상징인가―와 를 보고모든 것에 대해서 기억할 수 있는 데까지 만이라도 기억해 보자. 망각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사람들은 늘 바삐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어야 한다.세계는 혼돈이다세계는 온통 혼돈에 휩싸여 있다. 너무나 급속도로 변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멀리 기억을 더듬어 볼 여유도 없지만 메스미디어를 통해 내가 직접 접했던 일만 더듬어 보아도 혼돈은 극도에 달해 있는 것 같다. 몇 십년 만이다 백년 만이다, 하고 떠들어 대던, 유난히도 더웠던 94년의 여름이 그러하고, 유람선이 침몰하고 비행기가 추락했던 일이 그러하다. 그리고 1994년의 피날레(?)를 장식했던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더이상의 혼돈이 없기를 기원하던 모든 사람들의 바램을 붕괴 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들이 마치 더 큰 불행의 충격을 완충시키기 위한 예행 연습이기라도 했다는 듯이 어느날 갑자기 커다란 백화점 하나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예행연습이 너무도 훌륭했던 탓에 사람들은 그 불행했던 사건을 낙차 큰 망각의 폭포속으로 묻어 버렸다. 희생자들이 흘린 처절한 피의 아우성이 잊혀져 간 것이다.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 지구상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병인줄 알았던 페스트에 휩쓸렸던 인도, 지진으로 흔들렸던 일본, 추위와 더위로 많은 사람이 죽었던 미국. 풍요의 메시지가 인공위성을 타고 세계로 뻗어 나가던 바로 그 시간에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죽어간 수많은 소말리아인들. 인구의 30%가 비만증 환자인 미국. 그러한 미국의 소말리아에 대한 원조는 비만증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까? 마치 지구 전체가 AIDS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모든 면역체계가 파괴된 것처럼 보인다.지구가 둥글어서 그런지 왠 라운드는 그리도 많은지. 우루과이 라운드다, 그린라운드다, 블루라운드다, 몇 라운드에 끝날 지 알 수 없는 떼거리 복싱경기가 열화와 같은 응원 속에서 진행되고 있고, 누화를 비평하는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니 이렇게 혼돈스러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두 편의 영화만큼이나...두 영화의 공통점은 제목에 '피'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단어를 대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말하라고할 때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강렬하게 그 이미지가 떠오르는 단어중의 하나가 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바로 이 순간, 피와 더불어 나에게 떠오르는 것은 드라큐라이다. 인간의 피를 먹고 사는 드라큐라. 그는 왜 피만 먹고 사는 것일까?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드라큐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피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것이 가지는 의미, 즉 인간적인 그 무엇이다. 과거에 인간이었고 인간에 대한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는 드라큐라는 피를 마심으로써 인간적인 삶을 향수하는 것이다. 물론 드라큐라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여러가지 측면에 빛을 쪼여 스스로를 되돌아 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어찌됐던 피에 관한 일반적인 이미지들은 열정, 강렬함, 뜨거움, 사랑과 증오, 혼탁함, 승리이자 패배, 뭐 이런 것들이 아닐까?와 라는 두 영화는 제목에서도 풍겨 나듯이 이러한 이미지들 만큼이나 강렬하고 혼돈스럽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군데군데 인상 깊었던 이미지만 남고 그 메시지를 포착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영화는 정말로 잘 만든 영화이다. 아니, 단순히 잘 만든 영화라기보다는 인간적인 고뇌의 흔적이 깊이 배어있는 철학적인 영화이다. 나는 며칠동안 영화의 의미들을 되새겨 보고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게다가 그 철학적 고뇌를 그토록 뛰어난 영상 이미지로 표현해 냈다는 점이 내가 두 영화에 보내는 또 하나의 박수갈채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느리게 진행되고 어떤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빠르게 진행된다. 하지만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은 그 완급이 훌륭한 바이얼린 연주처럼 잘 조화되어 있다. 빛의 색감도 야수파 화가인 마티스의 그림처럼 짙 않은지.의 감독 레오 까락스는 이토록 혼돈한 현대사회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상 기온으로 찌는 듯한 더위가 춤을 추다가 갑자기 눈이 내리고, 사랑 없이 섹스를 하면 걸린다는 STBO라는 병이 만연해 있다. 그 병은 애무만으로도 전염이 된다니 시로 무서운 병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이어서 혼이 달아나버릴 것만 같다.혼돈은 단절을 낳았다. 아니, 어쩌면 단절이 혼돈을 낳은 건지도 모른다. 세 남자와 한 여자가 모여 사는 집의 출입문은 유리로 되어있다. 성도착증 환자가 가끔씩 안을 들여다보고 여자는 그것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 잘 보이라고 만들어 놓은 유리문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뒤틀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 거리는 맨발로는 디딜 수 없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의 어머니 대지와 인간의 맨발이 서로 닿을 수 없을 만큼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유리문은 마음의 벽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탁 트인 것 같지만, 오히려 보이면서 서로 닿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더 슬프다. 대상이 시각적으로는 보이지만, 서로를 차단하고 있는 마음의 벽은 불투명하여 그 실체를 알 수 없다.핑크플로이드라는 그룹이 'The wall'이라는 앨범을 통해서 깨뜨리려고 했던 것도 이러한 보이지 않는 인간들 사이의 벽이 아닐까? 그 벽이란 편견과 선입견, 무관심, 의심, 시기, 질투, 증오 이러한 것들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고 굴곡된 유리창을 통해서, 백미러를 통해서 보려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감정조차도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알렉스를 사랑하는 리즈는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백미러를 통해서 자기를 보아달라고 말한다. 알렉스가 자신을 보지 않자, 리즈는 오토바이에서 뛰어 내린다. 이 사건을 지금 안나에게 얘기해 주고 있는 알렉스는 안나를 백미러를 통해서 보고 있다. 전철 안에서 잠깐 본 안나를 알렉스는 사랑하는 것이다. 마치 달리는 차의 백미러를 통해서 얼핏 본 듯한 안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굴절된 백미러의 환상적인 이미지를 사랑한 것인가. 무엇이 실체고 무엇이 허상인지, 무엇을 사랑했고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지 알렉스는 알게 되었을까? 그러나 이미 자신의 옆구리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고, 흐르는 피의 양만큼 자신의 생명도 빠져나가고 있다.죽어가면서 지어지는 알렉스의 웃음은 허무함의 극단일까, 아니면 사랑과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음에 대한 기쁨일까, 그것도 아니면 새로운 백신이 STBO라는 병으로부터 어떻게 인간을 구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보다는 돈과 한 여자에 대한 사랑에만 집착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일까.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은 무척이나 절망적이다. 알렉스는 죽고, 리즈는 오토바이 배기통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허탈하게 되돌아간다. 더구나 백신이 병으로부터 인간을 구한다는 얘기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약을 둘러싼 인간들의 더러운 욕심만이 난무한다. 어쩌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그러한 약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는, 한 층 더 깊은 메시지 주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감독이 어떤 메시지를 연출하고 배우가 무슨 의미를 연기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나는 혼돈과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싶을 뿐이다. 맹목적이고 허상과도 같은 사랑으로부터 탈출하여 날개짓을 해보지만, 날아지지 않는 마지막 장면의 안나를 보면서 말이다. 어차피 인간이 날 수 있는 조건은 겨드랑이의 날개가 아니니까.잘 자라 우리 아가, 내가 널 지켜 줄게영화 를 보다가 이런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작년(1994년)에 김준선의 마마보이라는 노래가 나왔을 때 그것은 나에게 아주 신선한 바람을 넣어 주었다. 엄마가 없이는 먹는 것도 여자 친구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주체성을 상실한 아이들이 있다. '마마보이'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과잉보호와 그로인한 나약한 의존성에 대한 경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엄마의 치맛폭에 싸인 마마보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노래는 아니다.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은 '보이'인 사람들도 있다. 권력이 없이는, 폭력이 없이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는, 방바닥에 깔 만큼의 돈이, 아니면 결핍되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이 물음엔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문제의 핵심은 과잉이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왜곡된 형태에 있다. 아이 앞에서 온 몸에 문신을 한 여자와 섹스하는 것을 보여 준다거나, 남자답게 기른다고 가슴에 문신을 새겨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주인공의 아버지는 생각했던 것이다. 아들 역시도 비참하게 죽어간 어머니를 동정한다거나 그 기억을 오래 간직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괴상망측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심한 정신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는, 서로를 충분히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질적으로 왜곡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얼만큼 사랑하느냐보다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사실 이 영화의 주제는 협소하다. 한 사람이 어머니에게 영혼을 잠식당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벙어리 소녀를 통해서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고 그리고 자신을 되찾는다는 그런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무엇엔가에 영혼을 빼앗겨 버린 듯한 현대인들의 혼돈을 해부할 수 있는 계기를 충분히 주고 있다.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영혼과 육체를 잠식당하고 있는가. 권력도 있고 명예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들 중의 백미(?)는 아마도 상품이 아닐까? 상품 때문에 웃고, 상품 때문에 울고, 상품 광고를 보면서 즐거워한다. 그것 때문에 살인하고 약탈하고 자물쇠를 걸고 단절한다. 혼수가 부족해서 이혼하고, 유산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돈을 요구하기 위해서 아이를 유괴해서 살해하고, 자기 손으로 만든 상품을 자기가 충분히 소유하지 못해서 자살하고, 자국의 국민들에게 (비교적)더 많은 상품을 주기 위해 무역이라는 이름의 끊임없는 전쟁을 벌인다. 상품은 또 영특하게도 자신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싸가지 없는(?)세대인 X세대를 추켜세울 줄도 안다. 이리하여 상품은 '잘자라 우리 인간 내가 널 지켜줄께'하고 노래한다. 과잉보호를 하는 부모들이 '내가 널 어떻게 키웠
    인문/어학| 2003.11.27| 9페이지| 1,000원| 조회(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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