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 누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부르는가?요즘 보수와 진보 논의가 때 아니게 한참 유행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나 보수와 진보는 존재한다. 근현대로 접어든 이후,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의 대립으로 시작해서 광복후 신탁통치에 대한 찬탁과 반탁 사이의 대립, 분단과정에서 좌익과 우익의 용공논란, 그리고 최근의 보수와 진보의 보혁논쟁까지 우리 사회에는 끊임없이 이념세력간의 분열과 다툼이 있어 왔다.'보수(保守)'는 어휘적으로 목적어를 가지는 말이다. 곧 지킬 대상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진보(進步)'는 지킬 그 무엇이 없으므로 앞으로 나가자는 입장이다. 게임에서 지고 있는 사람은 판을 다시 짜서 새로 시작하자고 하고 싶은 법이다. 물론 가진 것도 없으면서 그저 보수인 우스꽝스런 사람이 있기도 하다. '보수'의 기득권과 그에서 나오는 여유를 동경하는 것인지 실제로 보수적이라는 말을 자랑처럼 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보수와 진보의 개념은 이미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성향 혹은 입장 차이를 나타내는 말로서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특정의 이념적 성향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문제의 제기국민을 정치적 성향에 따라 분류할 때 집권 여부에 따라 與와 野로, 이념에 따라 좌파와 우파로 설명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우리사회 일각에서「보수」와 「진보」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심각한 문제가 빚져지고 있다. 뒤에서 상세히 기술하겠거니와, 「보수」와 「진보」라는 호칭은 이를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도 없고 대칭 개념도 아니며 또 국어사전적 의미나 정치학적 용어에 비추어봐도 그 같이 이분법적으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소위 「보수」라고 불리는 세력들은 보수라 불리기를 원치 않으며, 상대를 「진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한편 소위 진보를 자칭하는 세력들은 보수라는 호칭으로 상대방을 매도하는 일면 자기들의 정체를 감추고 나가서 미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진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보수」와 「진보」는 자칭 진보세력들이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선전선동적인 차원에서자들이 그 같은 용어전술의 문제성을 간파하지 못한 채 대선과 관련된 내용을 분석하면서 보수와 진보라는 호칭을 마구 사용하고 있어 문제성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와 진보의 사전적 의미우선 먼저 보수와 진보의 사전적 의미부터 알아보겠다.진ː보(進步)[명사][하다형 자동사][되다형 자동사] 사물의 내용이나 정도가 차츰차츰 나아지거나 나아가는 일. (비슷한말)향상(向上). ↔퇴보.보ː수(保守)[명사][하다형 타동사] 오랜 습관·제도·방법 등을 소중히 여겨 그대로 지킴. ↔혁신.사전적 정의는 위와 같다. 우린 흔히 진보와 보수를 같은 높이에 놓고 서로 대립하는 또는 서로 반대의 의미로 쓰고 있다. 그러나 진보의 반대말은 퇴보이고, 보수의 반대말은 혁신인 것이다. 그렇담 퇴보와 혁신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퇴ː보(退步)[퇴―/퉤―][명사][하다형 자동사]1.뒤로 물러섬. 뒷걸음.2.(지략·기능 따위가) 이제까지의 상태보다 뒤떨어지거나 못하게 됨. 각보(却步). ↔진보.혁신(革新)[―씬][명사][하다형 타동사][되다형 자동사] 제도나 방법, 조직이나 풍습 따위를 고치거나 버리고 새롭게 함.바로 이것이 퇴보와 혁신의 사전적 의미이다. 우린 여태까지 진보의 의미에다 혁신의 의미를 넣어서 써왔다. 그래서 진보는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진보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진보는 말 뜻 그대로 차츰차츰 나아지거나 나아가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우린 보수의 의미도 잘못 써왔다. 보수의 의미에 퇴보의 의미를 넣어서 써왔던 것이다. 보수란 말 그대로 오랜 습관·제도·방법 등을 소중히 여겨 그대로 지키는 것을 말한다. 소중히 여긴 다는 것은 그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남대문이나 동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다른 빌딩을 짓지 않는 것은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텔레비전이나 신문, 또는 인터넷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면 아무 말이나 막하는 것 같다. 그 말속에 담겨진 그 뜻을 생각지 않고, 남들이 쓴다고 해서게 될 개연성이 높다. 이에 반해 진보는 진취적, 발전적이라는 매우 긍정적 인식이 가능하다. 이러한 여건을 교묘히 이용해 보수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매도하여 악으로 인식하게 하고 반면 자신은 선으로 부상한 세력이 암약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간 자유를 수호하고자 피 흘려온 세력들 즉 소위 보수로 매도된 세력들은 그들이 중요시하며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무시당한 채 퇴행적이고 부정적인 것에 집착·고수하자고 하는 세력인양 인식되어 버렸다.◈ 보수적 진보와 좌파적 진보여기에서 보수적 진보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보수적 진보는 개인의 자유와 생명을 최우선시하고, 그런 만큼 정부의 간섭이 없는 시장경제의 창달을 주장하는 이념이다. 미국에서는 시카고대학이 보수적 진보의 선봉이며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당시에 미국의 산업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은 보수적 진보에는 항상 ‘극단’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 극단이란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는 견해와 매우 다른 견해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그러나 극단이란 어떤 사상이나 이념의 위치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라, 이러한 견해를 견지하는 사람들을 미치광이 취급하면서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기 위해 동원되는 단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리레오가 주장했던 지동설은 대다수가 천동설을 믿고 있던 당시에는 분명히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동설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옳고 그름은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대다수 사람들의 견해와 매우 다르다고 해서 논의에서 제외하지 말고 경청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보수나 진보라는 용어가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 사용되고 있는 만큼 한 개인이나 집단의 이념적 성향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정책에 관한 견해를 살펴보면 그 이념적 성향이 잘 드러납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사람들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 통제가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생활을 억압할 가능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회피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좌파의 재기전술위에서 검토한 보수의 특성에 비추어 보면, 보수란 퇴행을 뜻함이 아니고 변화와 발전을 도모하되 자연, 역사, 관습 그리고 현실을 중요시하고 이를 근거로 급진이 아니라 점진적인 방안을 선호한다. 그렇다면 "점차로 발달함"이라고 정의되는 진보란 곧 보수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 가는 방식을 말한다 할 것이다. 따라서 진보가 보수의 대칭어가 될 수 없다. 보수의 대칭어는 "급진"이나 "혁명"이라야 맞다. 이러함에도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가 대칭어로 사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보수란 퇴행적이고 심지어 퇴폐적인 상징어로 각인되기에 이르렀고 반면 진보는 진취적이고 발전적인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되게되었는바 그 경위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해방이후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사상을 지닌 세력들은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파업과 폭동을 일 삼았고 마침내는 도처에서 무력폭동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지난 반세기동안 이들은 더불어 담론할 대상이 아니고 오직 타도해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빨갱이"라 불리었다. 그럼으로 한국사회에서 발붙일 자리가 없는 것을 잘 아는 좌파들은 스스로는 진보라고 위장하고 상대방은 보수라고 매도하는 전술을 구사하며 재기를 시도해 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정체가 폭로되어 성토를 받게 되면 "또 색깔론이냐!"라고 격렬히 반발했다. 이 같은 좌파의 전술은 적중했고 그 결과로 오늘과 같은 이념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전 인민이 영양실조에 처하는 궁핍을 무릅쓰고 자원을 쏟아부어 남한에 혁명기지를 건설하고 이를 지렛대로 남한을 적화하려는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이 도사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그리하여 이제 우리사회에는 여러 분파의 좌파세력들이 혼재된 가운데 상호 협력하고 때로 견제하면서 최종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라는 호칭 하에서는 이념논쟁이 불가하기 때문에 파정권이라고 얘기하고 싶다"며 차기 정권을 좌파정권으로 규정했다. 이어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제 지식인들이 논의할 때가 됐다. 정권에 대한 언론이나 지식인들의 논의가 이루어진 뒤에 우리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를 간과해버리고 자꾸만 우리를 보혁(갈등)으로 몰고 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했다.서 대표의 이 같은 발언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이념적 정의를 통해 한나라당과의 건전한 이념대결을 벌이자는 제안으로 풀이되고 있다. 참으로 시의 적절하고 올바른 제안이다. 올바른 이념대결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좌·우파가 공존하면서 대결을 벌인다면 나라가 한 단계 성숙하는데 큰 활력소가 된다. 이제 우리 사회는 좌파는 무조건 악이라는 극단적 색깔론식 태도에서 벗어나 반폭력적 좌파는 그 존재를 인정하고 동반자라는 성숙한 시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좌파도 보수와 진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위장전술만을 구사할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정체를 밝히고 나서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대북정책과 보수와 진보라는 틀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좌파로서 무산계급독재를 위한 혁명을 신봉하는 세력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에 협력하며 그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친북 혹은 연북(聯北) 세력이 이에 해당된다. 좌파로서 진정 개혁적이고 소위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면, 북한군사독재와 혁명적 호전성 그리고 인권탄압을 보고 침묵할 수 없기 때문에 반북좌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전술 속에 진보를 자칭하며 자주와 민족을 앞세우고 통일을 외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북한정권의 정책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음은 심히 우려된다. 이런 세력은 진보는 물론 좌파도 아니며 민족주의자 일 수도 없다. 그러나 이들은 보수와 진보 운운하면서 계속해서 우리사회의 분열을 조장해 갈 것이 명확하다.대북정책과 통일문제를 「보수」와 「진보」라는 호칭과 연관시킨 사고는 모순과 문제성이 한 차원 더 중복된다. 우선 위에서 검토해 거이다.
◈대한제국의 성립대한제국은 우리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존재했던 제국이다. 고구려·백제·신라 그리고 고려도 자신들의 왕을 황제라 불렀지만 순전히 국내에서만 불리워졌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전세계에서 고종과 순종을 황제로 불렀듯이 국내-외로 인정을 받았다. 흔히 사람들은 이 大韓帝國을 조선의 개화기로 편입시키는데 이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이다. 조선은 이미 1897년에 없어졌으며 새로이 대한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비록 제국으로 선포했어도 원래 목적이었던 자주 독립은 일제에 의해 성립될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나라를 조선에 편입시키는 것은 안될 일이다. 즉, 고종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조선의 마지막 국왕이었으며 순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영친왕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라고 해야지 만 맞는 일이다.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이날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에서 원구단으로 나아가는 길가에는 축기를 들고 환호하는 군중들이 늘어섰으며 원구단 주위도 인파로 메워진 가운데 고종은 천지에 올리는 제사를 지낸 후 황제의 자리인 금의상좌에 올랐다.고종은 이어 13일 자신이 황제위에 오른 것과 국호를 새로 대한제국으로 정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조서를 내리고 14일에는 이 같은 사실을 한양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관과 영사관에 통보했다. 고종의 황제 즉위는 왕실과 조정, 국민의 삼자일치로 추진됐다.대한제국이 수립된 후 1904년 노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한반도는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 속에서 열강의 내정간섭이 중단된 상태가 유지됐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같은 주변정세를 배경으로 비교적 활발한 근대화 개혁 작업을 추진해 갔다. 광무개혁 이라 불리는 대한제국 시기의 개혁은 경제-기술면에 집중됐고,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민권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택했다. 내각의 폐지와 의정부 부활, 지방관제 복원 등 갑오개혁을 뒤엎는 조치가 잇달아 내려졌다.대한제국의 정치적 성격2월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겼고, 곧 조선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내외에 알리고자 칭제건원(稱帝建元:왕을 황제로 높여 부르고 독자 연호를 제정하는 것)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연호를 광무로 바꾸고, 1897년 10월에 국민들의 호응 속에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 때 나라 이름도 대한제국으로 고쳐 국내외에 선포했다.일본은 을미사변으로 악화된 반일감정을 무마하고 우리 나라 정부의 환심을 사려고 대한제국을 가장 먼저 승인했다. 러시아와 프랑스도 축하 공문을 보내오고, 영국, 독일, 미국 등의 서구 열강도 대한제국을 승인했다. 조선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하던 청도 1899년 대한제국을 승인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통상조약을 체결했다.(2) 정치대한제국의 정치체제는 전제군주제로,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이 모두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하도록 했다.*정치기구 대한제국의 정치기구는 황제 아래 의정부, 궁내부, 원수부가 있고, 의정부 아래에는 내각이 있었다. 내각은 내부, 외부, 탁지부, 법부, 학부, 군부, 농상공부로 나누어 국정을 담당했다. 국가의 사무는 군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궁내부가 중심이 되어 처리했다. 갑오개혁 때 설치한 궁내부는 처음에는 궁중 사무 기구였지만, 대한국 국제를 반포한 이후 의정부보다 그 기능과 역할이 더 커졌고 전제군주권을 실현하는 기구로 바뀌었다. 즉 탁지부 소관의 왕실 재산과 각종 재원을 궁내부로 넘겨 독자적으로 운영했으며, 궁내부 소속 내장원에는 장원과, 수륙과, 종목과, 삼정과, 공세과, 기록과, 전생과, 봉세과 등의 부서를 설치하영 국정의 일부를 담당했다.*군사제도 군부 외에 황제 직속의 최고 군통수기관으로 원수부를 황궁 안에 새로 설치했다. 원수부는 국방, 용병(用兵), 군사 명령을 총괄했고 군부, 중앙군, 지방군을 지휘하고 감독했다. 중앙에는 서울의 방비와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 시위대, 호위대를 새로 편성했으며, 이 밖에도 육군 헌병, 포병, 공병, 군악대 등을 설치했다. 지방에는 전국에 모두 6개 연대의 진위대를 조직했도원을 설치하여 경인선과 경부선의 철도 사무를 맡게 했고, 서북철도국을 설치하여 경의선과 경부선의 철도 부설을 계획했다. 전국의 주요 광산을 궁내부로 이속시켜 내장원에서 직접 관리했으며, 외국 자본의 침투를 막고 외국인 인부를 쓰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우고 광무학교를 세워 광업 기술자를 양성했다. 그러나 국가 재정이 부족하고, 일본을 비롯한 열강이 집요하게 방해하여 이와 같은 정책을 제대로 추진 할 수 없었다.(4) 사회·교육외국 자본이 아닌 정부 재정으로 통신.교통 시설을 전국에 확충해 나갔으며, 서울, 인천, 개성, 평양 등에 전화를 개설했다. 종합병원인 광제원을 설치했고, 구휼기관인 혜민원을 세웠다. 정부의 관리들은 단발하고 양복을 입었다.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가진 상공인을 키우는 실업교육을 강조하여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국내에 상공학교와 광무학교 같은 공립 실업학교를 많이 세웠다. 당시 지방에 세워진 사립학교도 대부분 실업교육을 실시했다.◈ 제국의 성격아관파천으로 을미개혁이 중지되었을뿐만 아니라 내각제도를 폐지하고 의정부 제도를 부활하는 등 한때 복고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나 일본의 적극적인 간섭이 없었던 광무년간(光武年間) 즉 대체로 대한제국이 성립한 때부터 노일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약 10년 사이에 소위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펴면서 경제적·기술적인 면에서 정부는 정부는 정부대로 민간은 민간대로 어느 정도의 새로운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정부쪽에서는 전등·전차·전화·전신 사업을 처음 시작했는가하면 철도 부설에도 적극성을 띠었다. 또한 근대적인 기술 교육에도 주력하여 기예학교(技藝學校)·의학교(醫學敎)·상공학교(商工學校)·外國語學校를 비롯하여 모범양잠소(模範養蠶所)·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 등을 설립하여 근대적인 기술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그리고 미국인 기술자를 고용하고 서양적인 기술을 이용한 양전(量田)을 실시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근대적인 소유권 증서로서의 지계(地契)제도를 채택했다.정부의 이같은 정책에 따라 민간에서도 근대적인 생권을 제한하려는 일이었던 데 반발하여 대한국 국제는 왕권을 절대화하는 방향을 취하게 된 것이다.대한제국이 성립될 무렵에는 독립협회의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이다. 따라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적인 정치세력은 국제관계를 내다보면서 왕을 황제로 바꿈으로써 나라의 국제적인 지위를 높이는 한편 상당한 한계성을 가지면서도 입헌군주제적인 정체를 수립해 나가려 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집권 세력은 황제 칭호를 쓰고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어 국제적인 지위를 높이는 점에 있어서는 진보 세력과 목적을 같이 했지만 국내 정치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보수적인 정권을 그대로 유지하려 했고 이를 위해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하게 된 것이다.요컨대 광무개혁은 기술적·경제적·교육제도적인 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여 갑오개혁을 이어갔지만 정치적인면에 있어서는 국민주권체제와 거리가 먼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 점에서 왕권을 견제하려 했던 갑오개혁에서 후퇴했다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 대한제국의 성격이 드러난다 할 것이다.◈대한제국의 멸망1886년 2월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일본의 침략적 내정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단행되었다. [註1] 이후 친러파(親露派)의 지배하에 있던 내각은 의정부제(議政府制)를 복구하여 갑오경장(甲午更張) 당시 확립한 내각제도와 국왕의 전제권에 대한 제한조치를 풀어 전제군주제로 부활시겼다. 그러나 정부의 정치명령과 인사조치는 러시아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특히 재정, 군사면에서의 러시아의 간섭은 노골화되었다. 여기에 구미 열강도 조선에서의 이권 획득에 있어서 기회균등을 내세워 미 · 영 · 불 · 일 등 각국이 다같이 광산 · 철도 · 삼림 · 어장 등의 이권을 침탈하는데 급급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일단 견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새로 나타난 러시아의 침략기도를 다시 막아야 할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열강국들의 이권 침탈을 긴급히 저지해야만 되었다. 게다가 이때 일본마저도 제 3차 러일협정 밖의 서구 열강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한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이었다.[註2] 그와 함께 아관파천(俄館播遷) 직후부터 있었던 국왕의 환궁 요청도 자주 독립에 대한 국민적 자각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는 예인 것이다. 국왕이 궁궐을 버리고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옮긴 것이 비록 불가피만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주권국가(主權國家)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당시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은 아관파천 이후 처음으로 고종께 알현한 자리에서 "대궐로 돌아가옵시오 이 나라는 폐하(陛下)의 땅이요, 이 백성은 폐하의 백성입니다. 이 땅과 이 백성을 저버려서는 아니 되옵니다…… 빨리 대궐로 돌아 가옵시오. 한 나라의 임금으로 계시지 않고 남의 나라 공사관에 계신다면 체면이 손상될 뿐 아니라, 남의 나라 사람들이 웃을 것이 옵니다." 라고 진언하였다.[註3]이 일례로도 여론은 국왕이 하루속히 환궁하여 자위력을 갖추고 자주독립권을 확립하여 주기를 바랐었다.이러한 여론은 마침내 파천한지 약 1년만인 1897년 2월 실현되었다. 국왕은 자주적 수구파(守舊派)와 개혁파의 주선으로 경운궁(慶運宮)으로 환어(還御)한 것이다. 국왕이 환어하는 날,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가는 길 사이에는 친위대 병정과 순검(巡檢)들이 늘어섰고, 배재학당(培材學堂) 학생들이 독립신문사 건너편에 정제(整齊)하게 늘어서서 갓을 벗고 만세를 불렀으며, 학생들은 어가가 지나는 길에 꽃을 뿌렸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국가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는 국민적 감정을 여실히 설명 해주는 사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성립시키는데 있어 중요한 기반이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청일전쟁 이후 청의 후퇴와 1896년 이후 열강 간의 세력균형이 대한제국 성립의 외적요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1896년부터 크게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民族主義)-자주 독립의 의지-가 그 내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라고 하겠다.국왕을 황제로 존칭하려는 움직임은 일찍부터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고종 자신
이유식이란 이유기(離乳期)의 유아에게 먹이는 젖 이외의 음식을 말한다. 유아기 초기에는 모유(母乳)나 분유만으로 필요한 영양을 얻을 수 있으나 생후 6개월 정도가 되면 모유나 분유만으로는 충분한 영양공급이 어려워진다. 이때쯤이면 아기에게 연하고 소화가 잘 되는 반고형(半固形) 상태의 음식을 주어 부족한 영양을 보충하고, 고형식(固形食)에 익숙해지도록 훈련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 때 주어지는 음식을 말한다.시작하는 시기는 아기의 건강과 발달 상태에 따라 다르며 처음 이유식을 줄 때는 영양섭취보다는 새로운 음식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주고, 젖을 주기 전 공복 상태에서 주는 것이 좋다. 아기의 소화기능이 비교적 활발한 오전 10시경에 주기 시작하여 이어 오후 2시, 오후 6시 순으로 준다.이유기는 두뇌 및 신체 발달이 활발한 시기이므로 특히 질 좋은 단백질 공급이 중요한데, 달걀·흰살생선·두부·간·치즈 등 소화가 잘 되는 것을 비롯하여 곡류 및 콩류·채소·과일 등을 월령(月齡)에 따라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 좋다.◈ 이유식은 왜 필요할까①젖을 떼기 위한 모유 대체식‘이유(離乳)’는 ‘젖을 뗀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젖을 떼기 위해 모유를 대신하여 주는 모든 음식을 ‘이유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조제분유 역시 엄마가 젖을 떼기 위해 아기에게 주는 모유 대체식이므로 이유식이 될 수 있다.조제분유를 모유 대체식 이라고 하면, 모유나 조제분유를 떼기 위해 숟가락을 이용하여 주기 시작하는 반유동식, 반고형식은 이유식이라 할 수 있다.②입을 열고, 씹고 삼키는 훈련을 위한 음식반사적으로 빠는 동작을 기본으로 하는 지금까지의 섭취방법에서 벗어나 숟가락을 이용하여 입을 열고, 씹고, 삼키는 동작까지 훈련시켜 주는 음식을 이유식이라고 한다. 우유도 아기가 스스로 입을 열어 먹고 삼키는 방법을 익힐 수 있도록 젖병에 넣지 않고 컵에 넣어 준다면 이유식이 될 수 있다.아기가 젖을 빠는 동작 대신 숟가락으로 음식을 먹고, 씹고, 삼키면서 새로운 맛에 적응해 가는 것은 마치 초등학생이 고등학교 과정을 익히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이를 해내기 위해서는 꾸준한 훈련이 필요하며 이유식은 이러한 훈련에 적합한 음식이다.③장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이유식생후 4개월 경에 이르면 아기의 소화능력은 어른에 가까울 정도로 발달한다. 곡류 등으로 만들어주는 이유식은 발달된 아기의 장 기능을 활성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소화 기능에 문제가 없는 수술환자도 수일 간의 금식 후에는 쉬고 있던 장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유동식 음식부터 섭취하는 것처럼, 새로운 음식을 접하는 아기의 소화장관이 이들을 무리 없이 잘 소화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이유식을 통한 단계적인 적응이 필요한다.④이유식은 영양보충식이유기가 시작되면서 성장발육이 더욱 왕성해지는 아기는 더 이상 수분이 많은 모유나 분유만으로는 아기가 필요로 하는 영양소와 칼로리를 충분하게 공급할 수 없다. 수분이 적고 영양소와 칼로리가 농축된 음식을 주어 필요한 영양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생후 4개월쯤 되면 모유에도 부족하고 저장되어 있던 상태에서 점차 고갈되는 철분을 이유식으로 보충해 주어야 한다. 아기의 순조로운 성장발육을 위한 탄수화물도 곡류에서부터 나오는 전분 등을 함께 주어 원활한 단백질 대사를 유도해야 한다.모유에는 철분이 매우 소량밖에 함유되어 있지 않다. 또 태어나면서 아기가 저장해 가지고 있던 철분도 고갈되어 간다. 그래서 생후 4개월쯤이 되면 아기에게 이유식을 통해 철분을 꼭 보충해 주어야 한다. 아기의 순조로운 성장발육을 위해 단백질도 곡류, 전분 등과 함께 주어 원활한 단백질 대사를 유도해야 한다◈ 이유식은 어떻게 시작하나첫 이유식 식품은 모유와 맛이 아주 유사한 것 이면서 아기에게 알레르기를 가장 적게 유발하는 식품이어야 한다. 그리고 아기가 쉽게 잘 소화시킬 수 있는 식품이고, 더불어 맛까지 좋은 식품이면 금상첨화이다.영양적인 면은 모유(분유)를 통해서 주된 영양을 공급 받고 있으니까 아직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이유식의 시작은 우리의 주식인 곡류로 시작한다.먼저 불린 쌀로 만든 쌀미음을 준비해서 아기 숟가락에 살짝 묻혀 아기의 입술에 대어 본다.그럼 아기는 혀로 새로운 맛을 처음 대하면서 느끼는 신기함과 만족감에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럼 아기 숟가락으로 입안 중간에 이유식을 떠 넣어 주면 된다. 그런데, 아기가 혀로 모두 밀어내거나 뱉어내는 경우는 아직 준비가 될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이유식을 시작하라는 것이다.그런데 아기는 이유식을 처음부터 잘 받아먹지 않는다. 대부분 입 옆으로, 앞으로 줄줄 흘려 버는데 아직은 아기가 언제 입을 꼬옥 다물어야 입안에 있는 것이 흘러내리지 않게 되는 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금방 아기는 엄마의 마음을 알아채고 스스로 기술을 터득해서 잘 받아먹게 된다. 그리고는 입 앞쪽에서 뒤쪽으로 잘 이동시켜 꿀꺽 삼킨다.아기가 이유식에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을 주면 아주 능숙하게 잘 받아먹는다.◈ 이유식 시작 시기①이유 시작은 체중이 출생의 2배가 되는 때이유식 시작 시기는 대개 생후 4~6개월로, 아기의 상태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보편적으로는 체중이 출생시의 약 2배가 되는 시기로 본다.이유식이 너무 빠르면 장염, 식품 알레르기, 소화불량 등을 일으킬 수 있고, 이유가 너무 늦으면 아기들이 더 이상 새로운 식습관이나 새로운 음식 먹는 것을 거부하게 되어 고형식에 적응해 가기가 어려워진다.②숟가락 사용과 새로운 음식 경험이 중요이유식 초기의 이유 목적은 영양보충이 아니라, 숟가락을 통해 먹는 훈련과 새로운 음식을 경험하는 데 있다. 따라서 먹는 양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아기에게 떠 먹이는 것에 실패했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해서도 안 된다. 이유 초기에 보이는 아기의 밀어내기반사는 자꾸 반복하여 떠먹이다 보면 늦어도 1~2주 이내에 자연히 없어지기 때문이다.③느긋한 마음으로 시작해야이유식이 꼭 필요해지는 시기는 생후 6개월 이후. 초기 1~2개월 동안은 아기가 이유식을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느긋하게 마음을 먹어도 된다. 서두르거나 조바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④독립적 성향의 발달아기가 점차 반사적인 성향에서 벗어나 보다 더 독립적이고 탐구적이며 모방을 잘하는 성향으로 발달해 감에 따라 이를 충족시켜 주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독립적인 식사행동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며 이 시점이 바로 이유기인 생후 4개월경이다.생후 6개월 이후가 되면 아기는 배가 고플 때 입을 벌리면서 끄덕이는 의사표현을 할 수 있고, 배가 부를 때는 고개를 뒤로 젖히거나 돌리면서 거부의 표현도 할 수 있게 된다. 아기는 또 컵으로 먹는 것과 스스로 먹는 것, 식사시간이 되면 먹고 싶다는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이러한 단계에 이르면 이유식을 통해 낯선 식품을 접하면서 다양한 맛과 행동을 표현하고, 어른이 먹는 음식 단계를 서서히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단계별 이유식① 생후 2~4개월(준비기)과즙에서 점차 야채 수프로 옮겨가며 젖 이외의 새로운 음식을 경험하게 한다. 수프는 한 가지 야채만을 사용해서 묽게 끓이며, 소금이나 설탕 간을 하지 말고 채소 자체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② 생후 5개월(초기)본격적으로 이유식을 시작하는 시기로, 죽처럼 묽게 조리한다. 소화가 잘 되는 곡물이나 달걀노른자·야채·두부의 순으로 주고 차츰 치즈·쇠간 등 단백질 종류를 늘려간다. 젖도 함께 먹이는 시기이므로 양에 구애받지 않는다. 야채는 부드럽게 익혀 잘게 썰거나 다져서 사용한다.③ 생후 6~8개월(중기)혀로 으깰 수 있을 정도로 잘게 썰어 조리해 준다. 횟수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로 늘리고, 오후는 오전보다 3분의 1 정도 양을 줄인다. 한 가지 재료보다는 두세 가지 재료를 함께 섞어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고기는 잘 다지고 야채는 부드럽게 익혀 사용한다.④ 생후 9~12개월(후기)부드러운 고형식을 먹을 수 있는 시기이므로 잇몸으로 씹을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서 하루 세 차례 정해진 시간에 준다. 활동량이 많아지므로 달걀·생선 등의 단백질 식품과 야채 등의 비타민 식품, 밥·빵 등의 탄수화물 식품을 골고루 준다.
*전위주위란?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유럽의 예술과 문학에서는 전위주위(註:前衛藝術 , Avat-Garde(불어), Vanguardismo(스페인어) 시대의 첨단에 선 비정통적이고 실험적인 예술)로 일컬어지는 근본적인 변혁을 말한다.아방가르드란 원래 군대 용어로서 말뜻은 "최전방 부대"라는 뜻이다. 예술 분야에서는 19세기 중엽부터 사용되었는데, 급격한 진보적 성향을 일컫는 말이다. 단지 이런 언어적 의미로 이 용어가 사용되는 일이 많이 있다.*전위주의(=아방가르드)의 기원 및 전개아방가르드가 예술분야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910년대 이후이다. 여기에는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래주의가 속한다. 이 예술 사조들은 반 예술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권위적이고 고착 적인 예술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들 아방가르드는 음악분야에서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1950-70년대의 아방가르드 운동. 2차 세계 대전 직후 아도르노의 아방가르드 옹호와 함께 예술적 아방가르드는 활력을 얻는다. 그리고 20세기 음악 안에서도 아방가르드와 그렇지 않은 음악을 엄격하게 구분하기도 있다. 즉 케이지의 음악, 우연음악, 알레아 음악, 전자음악 등 기존의 작곡 양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음악을 아방가르드로 분류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기존 음악관습과 큰 차이를 보이면서도 아방가르드로 분류되지 않는 것들은 쇤베르크와 비엔나악파, 음렬음악, 음색작곡 등이다. 이는 주로 모더니즘의 일종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기존의 음악을 벗어난다는 의도에 따르면 이 음악도 아방가르드일 수가 있고 또 그런 식으로 오히려 더 많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1950년대 이후 아방가르드 음악가로 간주된 1920-30년대에 출생한 불레즈(프랑스), 슈톡하우젠(독일), 노노(이태리)와 같은 사람은 넓은 의미의 아방가르드 개념에 따라 분류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트라빈스키 같은 비교적 보수적인 작곡가도 아방가르드 작곡가로 분류하는 일이 없지 않다.*전위주의 예술의 특징서구문화와 서구예술의 전통적 토대와의 의도적이고 근본적인 결별이란 의미를 내포하는 전위주의라는 포괄적인 개념아래 큐비즘, 미래파, 표현주의, 다다이즘(註: Dadaism 20세기 초기의 예술·문학상의 전위주의. 제 1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 일어난 반이성주의적 예술운동. 일체의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전통적인 예술형식의 파괴를 주장함. 후에 초현실주의에 흡수됨), 초현실주의, 순수주의 등 당대의 제반 문학풍조가 결합된다. 일에 착수한 전위주의 예술가들은 자기 자신들을 기성질서에서 소외된 사람들로 자처하고 그 질서에 항거하여 그들 자신의 자율성을 주장했다. 그들의 목표는 전통적 독자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부르주아 문화의 규범과 경건심에 도전하는데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미학의 정립은 예술에 있어서 비합리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예술의 독립성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일체의 전통규범을 타파하고 예술적인 구조와 표현방법들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열의는 형식상의 과감성으로 나타났으며 문학에서는 메타포가 문학활동의 가장 중심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 사실을 고려하여 당대의 탁월한 비평가였던 기예르모 델 라 또레(Guillermo de la Torre)는 일찍이(1930) 새로운 미학의 양상을 국제주의, 탈중심주의, 반전통주의란 개념으로 특징짓고 있다.이러한 예술에 있어 새로운 흐름은 스페인에 있어서는 극단주의를 통해 구체화된다. 이 극단주의는 1919년에 나타나 곧 사라졌으나 연대기적 한계를 초월하는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중남미 대륙에서는 우이도브로(註: Vicente Huidobro(1893-1948) 초기 전위주의자들 중 가장 대표적 인물. 새로운 것과 세련된 것의 창조에 관심을 보인 최초의 인물이라 할 정도로 정력적으로 전위주의에 참여했다. 많은 중남미 모데르니스따들을 공격하며 자신이 창조주의의 창조자라고 천명하였다)의해 주도된 창조주의를 필두로 빠른 속도로 자신의 다양한 이즘들을 제공하고 발전시켰다. 단시간 내에 과격하고 충격적으로 전개된 중남미 전위주의에 대한 적확한 고찰은 불가능하지만 모데르니스모의 흔적을 일소하고 새로운 감수성의 시대를 열었음에 틀림없다. 이 새로운 감수성은 후기 전위주의에까지 이르는 광대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된다.우이도브로에 의해 시작된 창조주의에 이어 전개된 중남미의 전위주의 시의 시대는 1930년대였으며 그 특징은 당대의 모든 문학에서 감지되는 공통의 것이었다. 유희의 정신과 어휘의 비일관성, 독창성에 대한 열정, 새로움과 그에 따른 놀라움이 특징이었으며, 내용 면에서는 반서정주의, 반일화주의, 반수사주의가 두드러졌는데, 여기에는 구시대의 주제인 줄거리의 논리적 전개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들어 있다. 도시, 기계, 공장, 비행기에 더하여 혁명적 이데올로기의 모티브인 노동자, 사회체제 부정,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복권이라는 새로운 소재가 시로 유입된다. 전위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혁명의식의 미학적 표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예술을 은폐해 왔던 엄숙함의 가면을 일그러뜨리기를 갈망하는 움직임으로 유머와 쾌활함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이는 형식적인 규범이나 언어에서 요구되는 논리성에 대한 절대적 무관심을 반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지에 대한 거의 절대적이고 종교적인 예찬으로, 이것이 서정성에서 수사학적인 순수실험으로 극단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결국 심상과 은유 사이의 전통적 구별이 무의미해지고, 이러한 반항적 요소의 결과로서 시의 한계와 윤곽이 철저히 파괴되고 시는 하나의 이미지의 총화로 귀결되었다. 은유의 마술적인 힘은 중남미의 많은 시인들로 하여금 항상 심상과 시적 진실, 표현과 전달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균형을 무시하도록 했다. 새로운 현실을 창출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전위주의의 교만은 이러한 기본적 공리를 잊게 한 것이다. 중남미에서 전위주의의 극단적인 도그마를 가장 성공적으로 구체화시킨 예를 라는 말로 대변되는 중남미의 가장 일관성 있는 전위주의의 표명인 창조주의를 정착시킨 우이도브로와 두 번째 시집인 에서 당대의 모든 대담한 혁신을 두려움 없이 전개한 세사르 바예호세사르(註:Cesar Vallejo(1892-1938) 지역주의적 색채나 지방색이 두드러지게 배어 있지 않으면서도 중남미적인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만들어낸 중남미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사람. 네루다가 풍부한 리듬감을 표현했다면 바예호의 시에서는 이러한 부드러운 시의 리듬을 과감하게 파괴한 언어구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의 시는 전통에 저항하고, 언어를 탈구시키며, 옛 신화들을 파괴한다)를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