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현재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정도로 인터넷은 급속도로 우리 생활에 파고들었고, 또한 그 만큼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인터넷 유해론에 관해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인터넷이 무엇인가를 간략히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나 역시 인터넷이 무엇이냐?, 인터넷은 언제 생겼냐? 등의 질문을 받는다면 시원한 대답을 할 자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필수적으로 여기면서도 아직도 인터넷에 관해서는 아는 부분보다는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이 때문이다.인터넷을 간단히 정의하자면 “네트워크의 네트워크(a network of network)”라고 할 수 있다. 즉, 인터넷이란 전세계에 퍼져 있는 컴퓨터간에 정보를 공유하기 위하여 컴퓨터와 통신망을 연결해놓은 최대의 컴퓨터 네트워크로 보는 것이다.그러면 인터넷은 언제 생겼을까? (개인적으로는 군대를 전역하니까 사람들이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더라. 당시 전방에는 컴퓨터 보급률이 저조하였다.)인터넷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나타나 발전해온 것은 아니다. 인류문명이 발전해 온 역사가 있듯이 인터넷도 나름대로의 탄생과 발전의 역사가 존재한다.인터넷은 냉전체제속에서 핵 위협을 극복하면서 군사 지휘통제체계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대안으로 탄생되었다. 전시에 대응하려는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통신망 구조가 자유와 평등의 공간을 제공하면서 미래 사회와 기업의 모습을 변모시킬 것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터넷으로 그 속성이 바뀌어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당시 ARPANET을 만들었던 많은 과학자들은 미래 사회의 총아로 불리는 인터넷의 현재와 같은 변화를 예측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인터넷의 용도다음으로 우리 삶에 있어서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인터넷이 용도에 관하여 간략히 이야기해보자.현재 인터넷은 크게 정보 검색, 전자 우편, 자료 전송, 광고, 홍보, 상업적 이용, 게임, 채팅 등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고, 약간 더 세부적으로 말한다면 온라인 도서관, 대법원 판례, 상품 검색, 길 찾기, 개인 E-Mail, 기관 홍보, 가상대학, TV, 잡지, 주식투자(홈 트레이딩의 활성화도 인터넷 덕분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음), 신문 광고, 상품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효과적인 광고, 전자화폐 등을 이용한 새로운 경제 활동 발생, 네트워크 게임, 웹 게임(상세한 게임에 관하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음), 채팅 등의 용도가 있다.필자 개인적으로도 인터넷을 이용하면서 물론 e-mail은 사용하고 있고, 자료 검색, 신문, 모의·실전 주식투자, 가상대학, 상품구입, 도서 검색, 지도 검색 등의 많은 용도로서 사용을 하고 있다. 필자 역시(물론 필자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서버 다운이나 기타 문제의 발생으로 이러한 인터넷을 사용하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상당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만큼 인터넷은 유용하고, 편하면서도 이제는 없어서는 안될 만큼 필수적이다..과연 인터넷은 유해한가?먼저 짧게 말하자면 인터넷의 유해한 점을 찾는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물론 유익한 점 또한 그 만큼 많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대표적인 몇 가지 부분에 관해서만 서술하도록 하겠다.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처음 인터넷이 탄생된 동기와는 다르게 인터넷이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다. 현재 진행되어지는 인터넷 유해론에 관한 토론내용을 처음부터 읽어본다면 글을 쓸 틈이 없다는 것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인터넷의 유해한 점도 많고, 유익한 점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물론 이전까지 알거나, 생각하지도 못했던 점들도 무수히 많다는 점도...)어느 학우는 인터넷이 장·단점과 결론이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이해가 가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장·단점들 또한 역으로 생각해 본다면 단점이 될 수 있고, 장점이 될 수도 있는 점들이다.인터넷의 유해성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분이 포르노 사이트라는 생각은 공감할 것이다. (물론 필자도 처음 인터넷을 접할 때는 이 부분에 대해 대단한(?) 관심도를 나타낸 적이 있다.) 더군다나 이러한 사이트는 그 정도가 한없이 높아지고,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나이를 한두살 더 먹으면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관심도는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고등 학교 시절에 포르노 비디오를 많이 접하다가도(물론 당시에 인터넷의 보급이 없었지만 그러한 부분에 관해서는 접할 사람들은 다들 접했다고 본다.) 대학에 들어온 뒤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게 되지 않는가? 물론 뒤늦게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지만....그러나 이 세상에 쓸모 없는 것은 없는 것 같다. 포르노사이트가 없었다면 인터넷 발전속도는 더뎠을지 모른다. 양방향 대화방식, 최신정보로 바꾸는 업데이트는 포르노사이트업자들이 발전시킨 것이다. 스트립쇼를 보여주려고 개발한 원거리회의기술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기반(base)기술이 되어 아이가 유치원에서 잘 지내나 알게 해 준다. 날씨변화가 궁금한 스키장에서도 크게 활용될 전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포르노사이트는 미래에도 여전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미디어의 역사는 포르노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포르노는 언제나 주변미디어로 밀려났다. 인쇄기의 발명은 음란서적을, 사진기의 출현은 춘화를, 비디오의 등장은 성인비디오를 몰고 왔는데 지금은 인터넷의 차례일 뿐으로, 인터넷사용자가 학부모로까지 확산되자 포르노차단프로그램이 개발됐다.예를 들어 검색어「섹스」를 입력하면 『검색결과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라고 답하는 심마니 검색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듯 우리사회는 포르노사이트를 여과해내고 있다.그리고 인터넷으로 인하여 온라인 게임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고 현재 무수한 게임들이 게이머들을 중독화 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 또한 동전의 양면이 아닐까 한다.물론 이러한 게임들이 개인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온다고도 하지만, 오히려 반대인 양상도 있다고 본다. 고속도로가 생겨서 전국이 1일 생활권이 되었듯이 온라인 게임의 발전으로 우리나라 또는 세계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게임 상에서 한국인이 가장 매너가 나쁘게 평가되고 있는 점은 아쉽기도 하지만...) 전략시뮬레이션이나, 롤플레잉 게임 등의 결합으로 장시간을 요구하는 게임 등이 많고, 그로 인하여 흔히 말하는 인생이 허접이 되어 가는 사람들도 많기는 하지만, 어느 문화를 보더라도 긍정적인 면만이 있는 것은 아님을 볼 때 이 부분 또한 우리가 과감히 수용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부분 자료검색을 해 보았을 것이고, 자료검색 시 인터넷을 필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 또한 많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하여 도서관으로 가는 사람들이 줄어든다고도 한다. 인터넷에 많은 자료가 있는 점과, 그로 인해 오프라인 도서관 이용률이 줄어든 점은 역시 인터넷의 장·단점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을 사용할 때 인터넷을 항해한다는 사람들이 많은 정도로 인터넷상에서는 무수한 정보가 있다. 또한 그로 인하여 인터넷에서 구한 정보의 질을 우려하는 사람들 또한 많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상업적이거나 국가기관의 의무적인 직무로서 하는 것이라면, 좀더 나은 정보를 생산하도록 규정하는 것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비상업적으로 단순히 봉사의 차원에서 웹문서를 만들어서 홈페이지에 올리는 식의 지식생산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정보의 질을 문제삼아 비판하는 것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명백한 오류의 지식이나 지식의 쓰레기를 올리는 것은 문제되어야 하겠지만, 정보의 질이 약간 낮더라도 그것은 봉사의 차원에서 생산된 것이라면 억제될 필요는 없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지식과 정보소비자가 각자 자신에 맞는 단계의 정보를 선택한다면 그리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의 가치Arthur Maass와 Paul Ylvisaker는 지방정부의 본래 가치를 자유, 평등, 그리고 복지라고 정의하였다. Montesquieu에 따르면 지리적 공간에 기초한 분권으로서 군주의 권한을 약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지방정부는 자유를 신장시키고, 시민들이 공공 정책에 참여할 기회를 광범하게 제공한다는 정치적 의미에서 평들을 신장시키며, 사회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복지를 증진시킨다.하지만 여러 이유에서 Maass의 주장이 폐기되고 자유, 참여, 효율성이라는 Dupre의 3가지 가치가 지방정부의 가치로 수용된다.그렇다면, 지방정부의 가치로 수용되는 Dupre의 이런 3가지 가치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자유근대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침해하든, 이것이 루이 15세 때의 프랑스의 그것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Dupre는 자유를 지방정부에 주어진 가치에 동의하였다.자유의 가치를 분석해 보아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인데, 이들은 지방정부를 자유시장과 정치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본다. 지방정부는 자유 시장만큼 과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민간 기업에 의해 서비스가 제공될 수 없다면 중앙정부는 잠재적으로나 본질적으로 자유에 대한 위협이므로, 지방정부가 차선이라는 것이다.참여참여를 지방정부의 가치로 주장하는 출발점은 지역 공동체가 제일이라는 주장에 근거한다.국가는 인간이 창조한 것이나 지방정부는 자연의 창조물이다.지방정부의 참여 가치가 자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지방정부 가치로서 참여에 따른 3가지 측면에 대해 더 언급해보자.첫째는 정치 교육자로서 지방정부의 역할이다. 자치 정부를 통해 인간을 문명화하는 수단으로 지방정부가 기능한다. 이것은 정치 사회화와 연결된다. 이 문제는 지방정부가 교육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수를 교육하느냐의 문제이다.다음으로, 지방정부의 참여 가치는 민주주의의 훈련장으로서의 역할이다. 지방정부는 최고 의회를 위한 유치원이며, 의회의 모든 업무를 위한 자질 함양의 학교이다.
이 글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한 역자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프롤로그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이드는 동양학이란 것에 대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지배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자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이 서양의 식민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보고있다.난 전반적으로 이 글을 읽고 난 후 약간은 상기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서양에서는 동양을 매우 후진적, 퇴행적, 비문명적, 미개적 야만적, 정체적으로 보고 있다. 동양이 이런 명칭으로 불리는 민족과 결부되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틀 속에 고정되어 버렸다는 것이 사이드의 비판이다. 서양에서는 동양을 위와 같이 보는 것은(아주 간단하고 알기 쉬운 예를 들면 우리가 유일하게 그들이 먹지 않는 개를 먹는 것) 기준의 차이에 따른 결과일지 모르지만 무조건 자기들식이 아니면 옳지 않다는 방식, 그리고 그런 그들의 방식을 따라가려는 우리들의 모습이 더욱 안타깝다. 아마도 서구지배층 모방의 학습화에 따른 결과일지도 모른다.진정 우리가 알고, 가지고 있는 중요한 것은 제쳐두고 서양인들이 수박겉함기 식으로 수집한 우리에 대한 어설픈 지식을 배우려하는 모습이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진정한 진리 탐구가 아닌 형식에 급급한 허구를 좇는 것이 아닐까한다. 진정 우리가 읽고 보아야 할 문학, 예술 등은 쓰레기 취급을 하고 우리에게 별로 도움도 안되고 필요성을 느낄 수도 없는(물론 우리의 것보다 우월한 것도 아니다.) 서양의 문학, 예술을 읽고, 보고, 외우고 더군다나 우리들의 지혜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삼는 이러한 현실들을 보면 가슴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나는 물론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역자의 옮기는 글만 보면서도 이제껏 거꾸로 돌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새삼 느낄 수가 있었다. 레포트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나이지만-더군다나 이런 레포트라면 더더욱-이번 레포트를 내주신 교수님이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진다. 이건 레포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동안 옳지 않게 일반화되어가던 나의 머리-정확히 말하면 가슴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를 정화 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맞을까?머슴의 자식이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었다고(물론 예전의 우리의 신분계급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 비유로 봐주길 바란다.) 같이 고생하던 사람들을 더 학대하듯이 별로 자신 있게 내세울게 없는 이들이 우리의 것을 모두 훔쳐다가 자기들의 우월한 문화며 능력이라 뽐내고 있는 모습, 더군다나 우리나라 안에선 보지도 않으면서 굳이 먼 외국까지 나아가서 우리의 것을 찾아보는-굳이 그런곳까지 가서 봐야 유식한 줄 알고 교양 있는 줄 아는 소수의 속이 빈 사람들도 지나칠 수 없는 현실이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우리를 욕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눈앞의 보이는 재미나 유익에만 급급한 사람들-한국을 더럽다고 욕하는 일본 노래나 팝송에 미치거나, 동양을 야만 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타잔 영화를 보면서 박수를 치는 경우 등-을 보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답답하기 그지없다. 물론 나역시 예외는 아니었다-어릴 적, 지금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재미도 없는 토요명화를 보기 위해 잠을 쫓으면서 광고시간을 버티며 기다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한곳이 비어버린 것 같다.누워서 침뱉는 경우로 보일지 모르나 잘못된 것은 자신의 흠이 되더라도 감추지 말고 스스로 질타를 해서라도 고치는 게 옳지 않을까?한국영화 보호를 위해 쿼터제를 실시하고 있다. 영화인들은 쿼터제를 유지하기 위해 삭발을 하는-물론 삭발 그 자체는 전혀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되는 형식적인 것일 수 있다.- 등의 여러 노력을 보였다. 반면에 쿼터제를 없애기 위해 미국 영화계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한국 영화를 단 한편도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한국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한국영화의 목줄이 될 수도 있는 쿼터제 철폐를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설득을 위해서라도 한국에 대해서, 한국영화에 대해서 알아보고 와야하지 않을까? 아무리 나이 많은 어른도 갓난애한테 배울게 있다. 헐리웃 영화가 상업성에선 한국영화보다 우수할지는 모르지만 예술성에 대해서도 무조건 우수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사람은 우릴 무조건 열등하다고 보고 정말 우수한(?) 자기들이 한만디 하면 모든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