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분제도 - 양천제의 확립과 반상(班常)관계의 전면화고려와 마찬가지로 조선 초에는 관직을 중심으로 하여 문무 양반으로 편제하였는데, 관품 체계가 더욱 정비되고 관직의 고하에 따른 차별이 크게 줄어들었다. 14세기 후반부터 전국에 퍼져 있던 유향품관에게는 관직은 주지 않고 품계만을 주거나 생원(生員)·진사(進士)와 같은 관직과 상관없는 자격을 주어 지배층으로 편제하였다. 그리하여 관직을 가지지 않은 지배층이 폭넓게 존재하는 지배층의 확대 속에서 지배층과 관직의 연관이 느슨해졌다. 한편으로 조선 초에는 노비가 아닌 자는 모두 양인으로 간주하였으며, 양·천을 가릴 수 없는 자도 양인으로 편성하는 양인확대정책을 실시하였다. 또 양인에게는 법령상 관직진출권이 허용되었고, 신역부과 체계가 마련되면서 천역을 세습하는 부류도 줄어들게 되었다. 따라서 노비만을 천역으로 간주하는 양천제가 확립되었다.그러나 양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은 과거를 위해 교육을 받을 만한 사회경제적 여건을 갖추지 못했으며, 서반직(무관)으로 진출하는 통로인 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 등을 뽑는 시험도 재산이 넉넉한 양인이어야 볼 수 있도록 제한되었다. 그리하여 양인 안에서 관직을 중심으로 한 계층 사이의 차별은 지속되었다.중소지주 이상의 지배계급은 정규 관직을 독점하였고, 또 생원·진사 등의 지위를 얻어 양반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하였다. 향리 등은 관직에 진출할 기회가 제한되어 상층 농민과 별 차이가 없었다. 대부분의 농민과 수공업자, 상인 등이 하위 계층을 이루었다. 그리고 특수한 국역을 담당하여 흔히 '신량역천(身良役賤)'으로 불린 간척의 무리[干尺之徒]는 양인의 최하층이었다. 백정, 광대, 무당, 창기(唱妓) 등에 대한 사회의 대우는 천인과 다를 바 없었으나 법적으로는 양인으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법제적으로는 노비만 천인이었으며 양인과 노비의 혼인은 법으로 금지되었다.한편 양반과 상민 사이에 중인이 있었으며, 상민 안에서도 양인과 천인의 구별은 존재하였다. 양반과 상민 사이의 대립이 심해지험으로 바뀌고, 직전법(職田法)의 시행으로 사전의 영대 점유가 부정된 데다 직접 수조가 차단되어 관수관급(官收官給)으로 바뀌었다. 수조권은 지배층만이 아니라 지방의 국가기관에도 분급되어 각 기관이 독자적으로 수조하였는데, 1445년 국용전제(國用田制)가 시행되어 국가가 직접 수조하는 것으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통일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는 수조권을 매개로 한 농민지배가 약화되고 토지소유권이 안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그러나 지주층은 탈점, 매득, 개간 등으로 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갔다. 농민의 토지 상실도 심각해져, 16세기전반 중종 때에는 "백성은 토지를 가진 자가 없으며, 토지를 가진 자는 오직 부상대고(富商大賈)나 사족(士族)뿐"이라 할 지경에 이르렀다. 16세기 이후에는 지주와 전호의 관계가 신분적인 주종관계에서 경제적 관계가 부각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주경영이 활발해짐에 따라 유통경제도 발달하였다. 그들은 지대로 받은 미곡을 장시(場市)를 통해 처분하거나 방납(防納)·사행(使行)무역에 참여하여 축적된 잉여를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지주제가 발달함에 따라 농민층은 단위면적당 소출을 증대시키려고 노력하거나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참여함으로써 문제를 타개하려 하였다. 18세기 이후에는 토지의 상품화가 진전되어 토지매매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부농이나 상인 출신의 지주가 늘어나는 한편 양반 작인이나 임노동자가 출현하였다. 지대의 형태도 타조제(打租制)에서 도조제(賭租制)로 변환되어갔으며 일부지역에서는 화폐지대도 등장하였다. 이처럼 조선후기에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바탕으로 농촌사회가 급속히 분화되는 가운데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던 사화는 근본적으로 동요되었다.▶ 수취제도조선 초에 양인과 천인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전체 양인에 대해 법제적으로 동등한 의무와 권리를 부여한 것은 국가의 기반을 확대하여 지배층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현실적인 필요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지배층들은 여러 의무를 회피하였고, 국역가 중심을 이루는데 반하여, 단원 김홍도의 화풍은 바르고 아담하며 품위가 있고 간결한 궁정취미와 그에 알맞은 섬세한 필목이 지배적이다.이러한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총석정도」가 있다. 김홍도는 산수·신선·화분 등을 모두 잘 그렸으며, 특히 수법이 유명하지만 풍속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풍속화의 대표작인 「풍속화첩」에는 밭가는 광경, 추수하는 모양, 대장간의 풍경 등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상풍속이 주로 그림의 소재가 되었는데, 특히 「무악」과 「씨름」이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그리고 18세기 말에 성리학적 명분론이 크게 풀리어 느슨해지고 척족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말기의 향락적인 분위기가 널리 퍼짐에 따라 이를 반영하여 국화풍의 그림을 그린 혜원 신윤복(1758~?)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풍속화에 당시의 그러한 분위기를 반영하여 자신의 풍속화에 여속도를 그리면서 사대부가의 점잖은 여인네에서부터 민간의 아낙네까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인들의 행태(하는 짓과 몸가짐, 행동하는 모양)와 기방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정을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았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매우 은근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대개가 춘의(春意 : 남녀간의 정욕)를 나타내어 선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척족 귀족들의 향락적인 분위기를 비판하여 청조문인화풍(淸朝文人畵風)이 새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18세기말 청조고증학을 수용한 북학을 바탕으로 하여 진행된 개혁 운동은 진경문화가 종말을 고하고 표암 강세황(1713~1771)으로부터 청조문인화풍의 화풍이 나타났다. 이후 위항도인 박제가(1750~1805)·신위(1769~1845)를 거치면서, 청조고증학을 조선에 정착시킨 주사 김정희(1786~1856)에 이르러 새로운 화풍인 청조문인화풍이 확립됨으로써 순조 이후부터는 극도로 관념화된 감필체(減筆體)의 문인화풍이 화단을 주도하게 되었다. 김정희의 대표작인 「세한도」에 나타난 것처럼 진경산수가 아닌 고차원의 이념적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김정희는 사대부와 화원을 가리지 않고 제자러한 추사체는 중국 서예계에도 충격을 주어 추사보다 어린 중국 서예가들이 다투어 이를 추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자하 신위(1769~1845)·눌인 조광진(1772~1840)·이재 권돈인(1783~1859)·이당 조면호(1803~1887)·위당 신헌(1810~1888)·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등 명문 출신들과 이상적(1804~1865)·오경석(1831~1879)·김준석(1831~1915) 등 중인인 헌역관(漢譯官)들이 추사체를 배우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문학1. 조선전기의 문학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학문과 문장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을 문장론의 원칙으로 삼았으므로 기본적으로 학자이자 문인이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왕조에서는 도(道, 학문)와 문(文, 文章 내지 詞章)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도문일치론 이 송의 문학사조를 그대로 반영되어 주도적인 문학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학문이론은 현실적으로 쉽게 실현된 것은 아니어서 도학파(道學派)와 사장파(詞章派)의 대립으로 사화를 초래하기도 하며 조선 후기까지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학문의 주류였던 한문학은 학풍 및 학파에 따라 일정 정도 다른 사조를 띠게 되었다.건국 초 정도전(1337~1398)과 권근(1352~1409)은 관학풍을 조성하였고 권근의 제자대에 이르러 권우(1363~1419)·변계량(1369~1430·맹사성(1360~1438)·허조(1369~1439) 등은 사장 중심의 관학풍(官學風)을 권근의 제자로서 정몽주(1337~1392)에게 배웠다는 길재(1353~1419)는 영남 지방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양성하여 사학풍(私學風)을 조성함으로써 이대(二大) 조류를 형성하였다. 전자가 그 문사(文詞)에 대한 조예로서 국초 문화에 공헌한 반면에, 후자는 정몽주의 적통(嫡統)이라는 자부심을 키우면서 의리지학(義理之學)으로서의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양대 조류는 세종대에 집현전에서 성리학 연구를 하면서 점차 도문일치론으로 진전되어 갔다』등의 군담(軍談) 소설 등의 국문 소설이 대거 등장하였으며, 허난설헌(1563~1589)·이옥봉(?~?)·의유당 김씨 등의 규방문학(閨房文學)과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계축일기(癸丑日記)』·혜경궁 홍씨(1735~1815)의 『한중록(閑中錄)』등 의 궁중문학 작품들이 있었다.3 가사(歌辭) : 문학에서는 국문의 가사 문학이 송강 정철(1536~1593)에 의해 절정에 달하였으며, 「송강가사(松江歌辭)」·박인로(1561~1642)의 「노계가(盧溪歌)」·김인겸(1707~?)의「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등이 그 대표작이다.4 시조(時調) :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국문학 부류로 자리잡은 시조는 후기에 들어와 정치 현상보다는 인간의 애환을 담은 사설시조가 출현하였다. 18세기 사설시조는 서리 출신의 김천택과 김수장(1690~?)에 의해서 『청구영언(靑丘永言)』·『해동가요(海東歌謠)』로 편집되었다. 한글로 된 시가나 소설은 주로 불우한 하층양반이나 서얼·서리 혹은 평민층에서 창작되고 애독되었으며 내용이나 표현 기법으로 보아 이 시기에 서민 문학이 대두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또한 18세기는 진경문화로 일컬어지는 조선문화가 한창 번성한 시기였지만 19세기로 올수록 조선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성리학은 점차 퇴조하여 시대사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가면서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그 대체이념으로 부상한 북학사상은 상공업 중심으로 변모하는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새로운 시대사상이었다. 정조는 높은 학자적 소양을 갖춘 군주로서 그 자신이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방대한 문집을 남겼으며 규장각을 중심으로 문화정책을 시행해 나가면서 북학사상을 수용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신사상으로서의 북학은 철학·역사인식 등 모든 면에서 탈(脫)성리학적이었고 그것은 문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주도하여 그러한 움직임을 견제할 정도로 북학파들에 의해 성리학적 고문체(古文體)를 탈피하는 문체가 등장하였다.1 소설(小說) : 조선전기의 국문소설들이 성리학적 이념을 있다.
개인차 연구의 배경과 연구 방법개인차에 대한 양적 연구의 발전인간의 개인차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학문분야는 여러 분야가 있다. 그러나 보다 과학적으로 이를 분석하고 접근하는 연구를 집중적으로 시도한 것은 역시 심리학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개인차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수량적으로 표시해보려고 시도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 현상을 수량으로 표시한다는 생각은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수치로 표시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1. 1816년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의 관측기록을 점검하고 있던 한 천문학자는 1796년에 어떤 젊은 조수 한 명이 기록을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파면된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이 기록 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세밀히 조사해 본 결과, 그 젊은 조수가 파면된 이유는 상급자에 비 하여 늘 조금씩 관측시간을 더디게 기록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천문학자는 의심을 품고 조사를 진행한 결과, 인간은 시각적인 자극에 대한 지각속도에 있어서 개인차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까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2. 벨지움의 Quetelet3. 19세기 영국의 Francis Galton은 인간의 개인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 결과, 개인차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유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연구를 위하여 인간의 정신적인 특성을 과학적으로 측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런던에 실험실을 차려놓고 많은 시민의 신체적인 구조와 특성을 측정하였으며, 그 측정을 위하여 여러 가지 측정방법과 도구를 창안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측 정 방법과 도구는 후에 개인차 연구를 위하여 큰 방법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다.4. Wundt실험실에 있었던 미국인 James M. Cattell은 인산의 개인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 구를 계속하였으며 그것이 후에 미국의 정신측정운동으로 발전하게이다.Cattell에 의하여 주도된 정신측정운동의 초기 심리학자들은 연구의 초점을 지능 측정에 두 어왔다. 그들은 인간의 감각, 지각, 판별력, 반응속도, 등을 정확히 측정하면 그것은 통합해서 한 개인의 지적 능력을 대변하는 지수로 표현할 수 있다는 가정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심리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론에 의하면 정신기능이란 여러 개의 감각적인 경험 단위로 구성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의 이와 같 은 가설은 적중되지 못하였으며 마침내 그들의 생각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이게 되 었다. 정신측정의 초기 연구는 인간의 정신적인 현상을 양적으로 표시해 보려는 시도에 있어서 는 성공하였으나 그 결과는 특기할 만한 것이 못된다.5. 정신측정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기를 마련한 사람은 역시 프랑스의 Alfred Binet이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요청을 받아 정신박약아를 식별해 낼 수 있는 측정도구를 제작하게 되었다. 의 사인 Simon의 협력을 얻어 처음으로 1905년에 Binet-simon 지능검사 로 알려져 있는 최초의 지능측정 기구를 발표하게 된 것이다. Binet의 기본가정에 대해서 심리학자들은 어떻게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척도로써 표시할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왔으나, Binet는 1908년에 Binet-Simon검사의 개정판을 발표하여 이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동시에 그는 정신연령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후에 여러 연구에 의하여 보충되고 그것이 생 활연령과의 비례를 나타내는 IQ로 표시됨으로써 오늘날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지능검사의 근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6.Binet의 초기 연구는 미국에 와서 1916년에 Terman으로 하여금 Stanford-Binet 지능검사 를 완성하게 하였으며, 그것은 1936년에 다시 개정되고, 1960년에 재개정되어 오늘날까지도 미국에서 가장 타당성과 신뢰성이 높은 지능검사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개인차의 범위신체아니라 동작기능, 감각기능, 지각기능에 있어서 개인차가 현저하다는 것도 알려진 일이다. 이를테면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의 감각기능의 예민성에 있어서 개인에 따라 차이가 대단히 심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기억력이나 판단력 또는 문제해결력 등에 있어서도 차이가 대단히 크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것이다.개인차가 현저한 인간의 심리적 특성을 크게 분류1 능력적인 면에서 있어서의 개인차2 지각과정에 있어서의 개인차3 퍼스낼리티에 있어서의 개인차4 태도와 가치관에 있어서의 개인차5 인지양식에 있어서의 개인차개인차의 범위 성질에 관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심리적 개인차를 상호비교 했을 때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한 Wechsler(1952)는 각 특성의 개인차간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그러나 이론에 대하서 많은 심리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첫째의 의문 인간의 심리적인 특성을 측정하는 척도에는 절대 영점이 없기 때문에 여러 특성 을 동일한 수준에서 비교하여 비율을 산출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둘째의 의문 정신측정에서 사용되는 척도단위의 의미가 각각 다르다는 점에서 제기된다.셋째의 의문 심리측정에서 나타나는 점수의 의미는 개인에 따라서 또는 상황에 따라서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결론적으로 말하여 개인차의 범위는 어느 정도 밝혀졌으나 그 개인차간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결론을 내릴 만한 단계에 있지는 못하다.개인차 연구의 접근방법1 집단간의 차이에 관한 연구집단간의 차이의 비교연구방법의 문제점1)어떻게 표집을 잘 하느냐하는 문제2)어떤 특성을 측정하기 위한 척도가 특정한 집단에게는 유리하거나 불리할 경우가 있다는 점3)인위적으로 집단을 편성했을 때에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다른 여러 가지 요인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이와 같은 문제가 있으므로 현재까지 이루어진 집단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연구 결과에 대하여 먼저 그 연 것이다. 또한 집단간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는 문제가 되는 여러 가지 난점을 극복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고려해야 될 것이다.2 상관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접근방법신뢰도계수를 산출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법1)자기 상관의 방법 ☞척도에 포함되어 있는 문항을 일정한 방법으로 양분하여 양쪽에서 나타 난 점수간의 상관계수 간의 상관계수를 산출하는 방법2)동형 신뢰도계수 ☞어떤 검사와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그 내용이 비슷하다고 인정되는 다른 검사와의 상관계수를 산출하는 방법3)안정신뢰도계수 ☞일정한 시간을 두고 한 검사를 반복하였을 때 얼마나 안정된 점수를 나타 내는가를 알아보는 방법상관적인 방법은 척도의 신뢰성을 측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 아니라, 척도 자체가 무엇을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하는가를 나타내기 위한 이른바 타당도를 검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어떤 척도의 타당도를 검증하기 위하여 비교될 수 있는 다른 준거척도를 선정하고 그 군거척도와의 상관계수를 산출함으로써 타당성을 산출한다.3 발전적인 접근 방법Bayey의 연구는 그 주제가 지능의 발달을 추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연구의 부차적인 결과는 개인차를 시간적인 측면에 따라서 나타내주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발달적인 방법은 비록 장점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실제 연구에 적용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많은 난점과 곤란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우선 장기간에 걸쳐 일정한 대상을 추적하는 연구이니 만큼 대상의 수를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난점이 있으며 또 지정된 대상에게 주어지는 모든 환경적인 조건을 가급적이면 통제해야 하는데 그 통제가 용이하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연구이기 때문에 많은 연구비와 노력이 소비된다.어린이에게 실시한 검사와 10년 또는 20년 후에 성인이 된 대상에게 실시하는 척도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두 방법을 따르게 되는 수도 있다.개인차 연구의 특수문제무엇보다도 원인과 결과를 분리시켜야 할 문제가 있다. 상관적인 방법이나 집단간의 차이에 관한 연구 방법이나 간에 그것은 개인간에 나타나는 차이에 관한 원인을 말해 주지는 못한다. 지금까지의 연구 경험으로 보아 연구자가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은 어떤 상관적인 증거를 가지고 바로 그것이 어떤 원인이라고 결론짓는 논리적인 비약을 회피해야 한다는 것이다.다른 하나의 특수한 문제는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을 구별하는 문제이다. 개인차를 나타내는 원인은 한 요인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어떤 경우에는 한 요인이 간접적으로만 작용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개인차 연구에 있어서 또 하나의 특수한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적인 영향을 어떻게 통제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비단 개인차 연구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교육과 심리학 분야의 모든 실험연구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이다.이와 같은 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른바 무선화의 방법을 사용해서 두 집단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사전에 검증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무선화의 방법을 적절히 활용하면, 우리가 실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많은 외적 요인을 통제할 수 있다는 증거가 제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개인차 연구에 있어서는 무선화의 원리를 보다 광범위하게 활용하여 실험 방안을 짜야 할 것이다.개인차 연구의 전망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된 개인차 연구는 1960년대경 그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사용되어 온 전통적인 연구 방법을 가지고서는 그 한계를 극복 할 수 없다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과거 수년간 교육과 심리학의 연구에서 개인차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새로운 개념과 경향이 진전되고 있다.1. Bruner(1962)가 사용하고 있는 전략(strategies)이라는 개념은 개인차 연구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이다. 특히 어린이들의 지적 발달을 설명함에 있어서 대단히 유용한 개념이다. Bruner는 어린이들의 문제해결력을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