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균형에서 안정적 균형으로Ⅰ. 서 - 'Global Saving Glut'과 ‘BOK 효과’1.1 美 경상수지 적자, ‘global saving clut' 그리고 'BOK 효과'「韓銀 한마디에 전 세계 금융시장 요동」), 이것은 다름 아닌 2005년 2월 23일 어느 뉴스의 헤드라인이다. 한은이 투자 대상 통화를 다변화하겠다는 한마디가 한국은행이 미국 국채 및 달러화의 매각에 나설 것이라는 해석과 함께 곁들여지며 주요국 외환시장에서 달러화가 폭락세를 나타냈고, 그 후 이것을 ‘BOK 효과‘라 부르고 있다. 한편,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 지명된 B. Bernanke는 2005년 3월 한 강연에서 ‘Global Saving Glut’이라는 말로 아시아 국가 및 중동 산유국들의 과잉 저축을 지칭했고, 이는 최근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유명한 신조어가 되었다.‘Global Saving Glut’과 ‘BOK 효과’ 이 둘은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2001년에서 2004년까지의 누적액이 약 2조 달러)인 엄청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불균형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개념 혹은 현상이다. 우선, 둘의 의미를 살펴보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의 원인을 미국의 과잉 소비 및 방만한 재정운영에서 찾기 보다는 국제적 과잉 저축, 즉 ‘Global Saving Glut’에서 찾는다는 데서 ‘Global Saving Glut’의 의의가 있다. 그리고 ‘BOK 효과’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에 대응하여 그것을 고스란히 보존한다고 볼 수 있는 한국 및 일본, 중국 등의 'Global Saving Glut'의 대상 국가의 중앙은행들이 달러 강세 유지의 버팀목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상이었다.경상수지 적자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경상수지 적자는 그에 동반되는 대외 부채 증가로 인해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경상수지 적자는 개별 소비자의 경우처럼 나라경제도 총소비의 기간간 평활화(intertemporal consump해결책으로 제기되고 있다.위의 논의에 비추어 아래에서는 ①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의 원인과 그 영향에 대한 분석과 그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질 것이고, ② B. Bernanke의 견해처럼 그것이 ‘saving glut'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면 미 경상수지 적자 누적을 지탱하고 있고 그것의 원인이 되는 ‘saving glut'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도 필요할 것이다. ③ 끝으로, ‘saving glut'이 해소되고 채무자로서의 미국의 지위가 위협받는다면 그것이 미치는 세계 경제의 충격에 대비한 원만한 해결책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Ⅱ. The Great Thrift Shift2.1 논의의 개관 - 아티클의 개략적 주제미국 외의 국가의 초과 저축이 미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the Great Thrift Shift'라고 부른다. 'the Great Thrift Shift'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위에서 제시한 물음에 대한 고찰을 위해 이하에서는 9가지 토픽에 관한 분석이 제시될 것이다. 그 대략적 논의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ⅰ) 왜 저축은 유럽을 제외한 미국으로만 집중되는지에 대한 분석이다.ⅱ) 그렇다면 美 경상수지 적자가 달러 약세의 위협 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ⅲ) 만약 지속된다면 그 불균형이 미치는 영향과 그 비용에 대한 논의가 제시된다.ⅳ) 그리고 그 비용과 영향에 대하여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미국 입장에서의 대책 및 행동에대한 논의가 뒤따른다.ⅴ) 한편, 경상수지 적자의 원인으로 지적된 저축과잉(‘the Great thrift shift')의 현상적 원인과그것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와 함께,ⅵ) 저축과 투자에 관한 이론적 논의로부터 저축과잉의 실질적 원인을 되짚어 본다.ⅶ) 그리고 구체적 고찰로서 가장 큰 대부자인 ‘일본’, 최근 가장 큰 저축과잉 국가 중 하나인‘중국’, 마지막으로 ‘그 외 동아시아 국가 및 산유국’의 초과저축 지속 가능성 논의가 이어질것이다.즉 주어진 아티클에서의 논의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에 대한 원인 및 영 있는 유럽의 인구구조와 ② 케인즈적 총수요관리 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정책입안자들, 그리고 ③ 소비에 우호적이지 못한 금융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역사적으로 봤을 때 미국과 유럽은 저축성향에 있어 과거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주식시장의 거품 붕괴와 함께 2000년 이후에, 유럽은 불황에 빠졌고 미국은 정부지출과 소비에 의해 그 성장세를 지탱했다. 그 결과 유럽과 미국의 저축률 격차는 커지게 되었다.즉 유럽은 'Old Europe'으로 지칭되는 인구구조와 노동력이 풍부하고 경제개혁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개혁의 지체와 불확실성은 저축을 늘리고 있다. 또한 준칙에 의한 정책 운영은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제약하고 있다. 이에는 ‘Ricardian'적인 소비자가 한 역할을 하고 있다.유럽은 현재 낮은 성장, 높은 저축의 균형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균형을 이탈하려는 조짐도 보이지만 설득력은 낮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조만간 미국으로 향하는 잉여 저축이 유럽으로 이동할 것으로 볼 수 없다.ⅱ) Forever free ; 경상수지 적자의 지속가능성미국은 계속적인 대부자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그것은 미 연방관리들에 의해 지속불가능한(unsustainable) 불균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낙관론적 견해를 펴는 이들은 ① 생산성이 높고 효율적인 미국 경제의 신호이고 ② 미국의 총 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비판은 ① 해외투자가 채권, 국채로 집중되는 점과 ② 부동산 등의 부의 유동성이 낮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시각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에 대한 재고를 요구한다.한편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누적은 달러약세의 위험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더 높은 이자율에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saving glut'과 아시아 중앙은행의 환율 관리를 위한 통제는 미국의 낮은 이자율을 유지시킨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는 달러 약세가 지속될 것이고, 달러 약세에 의한 손실, 그리고 중국의 인플레 위협은 미국의 이자율 상승 산의 의존한 경제 활력으로 미국경제를 약화시키고 있다.‘saving glut'이 미치는 영향은 도식적으로 살펴보면 저축과잉이 미국을 제외한 국가의 이자율을 낮추고 이는 자본 유입을 가속화하여 달러 강세를 유지시킨다. 또한 이러한 자본의 유입은 주택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자본이득 증가에 따른 소비증가를 초래하고, 저축을 약화시킨다. 또한 최근 미국의 공공재정은 흑자에서 적자로 전환되며 악화되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경상수지 적자의 비용이 사소하다 할지 모르지만, 미국이 내수 위주의 생산에 집중할수록 산업구조의 왜곡은 심해진다. 또한 낮은 이자율의 지속은 주택시장의 과열은 지속되고 있다.‘saving glut' 외에 미국 내에서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찾으면 미래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관심부족과 정치가들의 위기에 대한 의식 부재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saving glut'이 사라진다면 미국경제에 미칠 부담을 인식해야 하고, 그것이 심지어 보호주의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ⅳ) Rebalancing act ; ‘saving glut'의 해소에 예상에 따른 미국의 역할유럽과 중국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누적에 대해 재정적자를 감축을 통해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B. Bernanke의 견해에서 볼 수 있듯 중국의 저평가된 통화에 그 원인을 돌리고, 재정적자가 경상수지에 미치는 영향이 과장되어 있음을 주장한다.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주장은 현 상황이 ‘saving glut'의 이동과 미국의 행동에서 기인했음을 간과하고 있다. 즉 미국의 강한 소비 성향과 재정정책 및 통화정책이 ‘saving glut'과 맞아 떨어진 결과이다. 한편, 이러한 현 상황이 한계에 도달해 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리고 현 상황은 유입 자본이 주로 소비와 주택부분에 쓰이기 때문에 장기적 성장을 유도하지 못하고, 대출자들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saving glut'은 단기적으로 중국의 저축과잉 및 고유가로 인한 산유국들의 경상수지 흑자로 인해 더 빠르게 증가할 미국 내적으로도 절약의 사회적 분위기가 요구되고, ④ 주택구매에 우호적 세금체계를 개편하여 투자를 유도해야 할 것이다.미국은 생산성이 높기 때문에 투자만 된다면 현재의 부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현재의 다급한 상황에 대한 인식과 보호주의로의 전환은 재정적 타격 우려가 있다는 점을 주지하여야 한다.ⅴ) The great thrift shift ; ‘saving glut'의 원인과 지속 가능성‘saving glut'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미국인의 낭비보다는 외국에서 기인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현재 많은 부채와 낮은 이자율을 동반한 경기 호황에서 극단적 달러 약세라는 상황은 발생하기 힘들어 보인다.‘saving glut'의 원인을 분석하면, 중국을 제외한 국가에서의 저축감소보다 빠른 투자의 감소로 볼 수도 있다. 또한 경제적 구조의 차이와 정책입안자들의 투자 촉진책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 이후로는 ① 중국의 저축 증가와 ② 고유가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saving glut'은 계속 유지될 수 없고, 동시에 미국의 해외 차입 또한 계속될 수 없다. 이에 대해 첫 번째 견해는 ‘saving glut'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진단, 일본과 유럽의 투자가 되살아나 ‘saving glut'이 줄어들 것이고, 이는 달러 약세, 이자율 상승을 초래하여 미국의 경착륙을 이끌 것이라 주장한다. 또 다른 두 번째 견해는 인구구조의 변화는 ‘saving glut'을 유지시킬 것이고,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산업 보호 필요로 달러 강세는 유지될 것이라고 한다.‘saving glut'이 계속 될 수 없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친 경상수지 적자로 인한 미국 경제의 체질 약화에 대해 미국 정책입안자들은 책임을 지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ⅵ) Anatomy of thrift ; ‘saving glut'에 영향을 주는 저축과 투자 결정 요인 분석저축과 투자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우선 저축은 ① 모딜리아니의 생애주기가설(Life Cye
과 목 :담당교수 :학 번 :소 속 :이 름 :Ⅰ. 관료제적 조직 구조로 이루어진 정부베버(Weber)에 의해 창시된 관료제론은 조직을 사회관계의 특수한 형태로 간주했다. 즉, 조직운영에 필요한 명령을 구성원들이 수행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일종의 권위의 계층제(hierarchy ofauthority)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관료제라는 조직구조는 정형화되었고,전통적 조직이론인 관료제론은 정부 조직에 있어서 능률성과 합리성을 담보하는 조직 구조로써 현대까지도 그 존재 가치를 지닌다.그러나 지식정보 사회의 도래는 전통적 관료제론이 한계를 인식하게 만들었다. 즉, 관료제론에기초한 정부의 조직 구조 및 행태 면에서도 한계가 노정되는 실정에 있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지식정보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정부 조직구조와 정부 조직행태의 변화가 요구되는 현실에 서 있다.아래에서는 ‘故김선일씨 피살사건’의 사실관계를 기초로 전형적 관료제 조직구조의 한계를 여실히드러낸 외교통상부의 사례를 통해 관료제의 한계와 지식정보 사회에서의 한계극복을 위한 작은실마리를 도출할 수 있다.Ⅱ. ‘故김선일씨 피살사건’을 통해 본 정부 관료제에 대한 행정 사례... 감사원은 특히 AP통신 서울지국으로부터 김씨 실종 문의 전화를 받았던 외교부 정우진 외무관에 대해서는 "상부에 보고하거나 영사과.중동과에 확인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지나쳤다"면서 징계를 요구했다. ...* 출처 : ‘감사원 ‘김선일사건’ 감사결과 최종 발표’, ‘04. 9.25, 중앙일보1. 상향식 정보 공유의 한계 : ... 본부나 현지 공관에 아랍권에 정통한 전문가가 거의 전무했고, 이라크에 파견된 5명의 외교관 중 아랍어를 구사할 수 있는 외교관은 단 한명뿐이었을 정도로 이라크에 대해 소홀했다. 그나마 현지에 급파한 정부 고위 협상단 단장도 아랍권에 대해 경험이 전무한 장재룡 대사를 보냈다. ... 전문성을 살리지 않는 잦은 순환근무체제와 전문가 영입을 가로막는 경직된 채용 방식은 아랍권과 같은 특정 지역 전문가 양성에 실패했다.* 출처 : ‘‘김선일 후폭풍’이 몰아친다’, ‘04. 7. 7, 뉴스위크2. 전문성의 결여 : 3. 사례를 통한 정부 조직 구조로써의 관료제의 한계를 통해 집권화된 의사결정 체계 하에서 상향적 정보 공유의 한계를 도출해 낼 수 있다.관료제의 대표적 조직구조는 ‘역삼각형’의 형태의 계층구조이다. 상층의 의사결정권자들이 조직의하층부의 하급자들을 위시한 조직 내의 모든 사무를 관할한다. 이 과정에서 일사불란한 조직을 위해하향적인 명령과 수임관계가 조성되고, 조직은 고도로 집권화된 형태를 보인다. 그러므로 소수의의사결정권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정보의 집권화가 발생하고, 정보의 과부하 현상을 가져온다.외교통상부의 사례에 있어서도 이러한 사정은 여실히 드러난다. AP통신 서울지국으로부터 김씨의실종 정보를 전해들은 외교부 실무 관료의 묵살은 그 한사람의 경험 부족과 부주의로 볼 수도 있지만, 집권적 조직구조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상층부에 정보의 집중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원래의 정보는 상향적 정보 전달에서 필연적으로 각 단계별로 양적 축소가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정보 보고 체계의 한 단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에서는 관료제 하에서의 직무 전문화 실패사례를 볼 수 있다. 정부의 조직 구성은 현재과도기적 변화의 와중에 있지만 아직까지는 순환보직제도, 다양한 관료 임용 루트의 결여 등을근거로 판단하자면 전문가(Specialist)로 이루어진 조직구조보다는 일반적 행정가(Generalist) 위주의조직 구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물론 일반적 행정가 위주의 행정조직이 직무, 부서간의 용이한조정과 구성원의 직무의 단조로움, 스트레스로 인한 부정적 직무태도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현대 사회가 지식정보 사회이고, 전세계와 개방된 사회라고 할 때 전문성이 결여된 정부 조직은외부의 변화와 충격에 대한 대응성에 있어 취약한 모습을 보일 것이 명약관화하다.위 에 있어서도 국제적 화두가 되어 있는 이라크 전쟁이라는 사안에 대해 정부 내에서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서인 외교통상부와 그 전쟁 지역 내 이라크 대사관에 조차 지역 전문가가 부재했다는 사실은 관료제 내에서의 전문성 결여라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준다. 또한 사건의결과를 막론하고 ‘테러단체와 한 차례의 교섭도 이루어진 기록이 없다’는 보도는 외교통상부내전문성 부재의 다른 단면을 보여준다.Ⅲ. 행정사례를 통해 본 관료제의 한계 극복 방안대통령 직속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와 행정자치부는 13일 그동안 행자부 장관이 갖고 있던 공무원 임용·채용권과 조직·정원 운영권 등을 각 부처 장관에게 대폭 위임·이관하고,규제적 성격의 권한 40여건도 부처에 넘기는 등의 내용을 담은 ‘정부인사 및 조직관리 자율성 확대방안’을 발표했다.
러시아와 타타르의 멍에1. 서 론몽골세계제국몽골은 대략 12세기에서 15세기 경까지 거대제국을 형성 유라시아 지역에서 유례없던 지배자로서 위치를 점했다. 세계사에 있어 굳이 시대구분을 하자면 몽골의 유라시아 지배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행해졌고, 변동의 한 가운데서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스기야마 마사아키’의 ‘몽골세계제국’은 칭기스칸에 의한 몽골 제국의 성립에서부터 명의 성립과 대원이 몽골 고원으로 패퇴할 때까지의 그 발전과 쇠퇴의 과정을 조망하고 있다. 몽골이라는 존재가 세계사적으로 유라시아 전체를 지배한 거대 제국으로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그 치세의 지리적 경계가 엄청났던 만큼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언어로 남겨진 다양한 당대 사료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통해 일목요연한 역사서술을 해낸다는 것 자체가 큰 의의를 지니는 작업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기야마 마사야키의 이 저작이 더욱더 존재의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타타르의 멍에 vs 팍스 몽골리카몽골의 유라시아 지배는 유라시아 전체에 있어 큰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일례로 전례 없이 유라시아 전역이 교역 통상권이 되어, 동서 문명의 교류와 혼합을 이루어 냈다. ‘팍스 몽골리카’로 대변되는 이데올로기가 유라시아 전체를 지배하며, 그야말로 몽골이라는 대제국을 통한 평화와 융성 물론, 제국 내에 산발적으로 정치적 혼란은 존재했다.을 구가한 것이다. 하지만 평화와 융성의 이면에 도사린 흔적을 고려한다면, 몽골의 유라시아 지배를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역사 전개에 있어서 몽골의 유라시아 지배가 부정적으로 작용한 면을 덮어둘 수 없고, 또한 그러한 태도는 역사 이해에 있어서도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없다. 몽골이 정복 과정 중 남긴 부정적인 영향으로 대표되는 것이 러시아의 ‘타타르의 멍에’이다. 러시아에게 몽골은 동방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정복자였고, 그들에 의한 살육과 압제는 러시아 근대사 전개에 전환점이 되었고, 몽골의 지배를 벗어난 뒤에도 그 지배의 잔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기는 듯한 태도를 통해 역사 서술에 있어 균형감을 상실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작자의 견해가 기존 시각과 다른 시각에서 사료를 통해, 참신한 견해를 도출하였다는 데에서는 충분히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 와중에 전술한 균형감 상실로 인해 한쪽으로 치우친 역사 재해석 위험의 우려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몽골세계제국’에서의 작자의 사료 해석과 기존 사료 해석의 비교 분석을 통하여 과연 러시아에 있어 ‘타타르의 멍에’의 본질을 되짚어 볼 수 있고, 작자의 견해를 통해 보다 발전적인 역사 인식의 방법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2. 본 론몽골의 지배 전 후 러시아의 일반적 역사 개관작자가 타타르의 멍에에 대해 서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역사적인 시기는 ‘바투 원정’을 통한 킵차크 칸국이라 불리는 ‘조치 울루스’의 성립과 발전 시기이다. 좀 더 객관적으로 작자의 견해를 바라보기 위해 우선 일반적인 전후 역사에 대한 대략적 이해가 필요하다.몽골이 러시아를 복속시키기 이전 러시아는 ‘올레그’가 공후가 된 882년부터 약 350년간 10~12개의 공국들의 연합형태를 이루었고, 그 중 ‘키예프 루시’를 중심으로하는 ‘키예프 루시의 시대’였다. 이 시기 키예프 루시는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이고, 그리스 정교의 영향으로 키릴 문자의 개발, 교육의 보급, 건축과 예술의 발전 등을 이루었다. 하지만 키예르 루시를 가장 발전 시켰다고 평가되는 아로슬라프 대공의 사후 후계 다툼을 통해 혼란을 겪고, 그것을 수습한 모노마흐 사후 키예프 루시 체제는 해체의 길을 걷는다. 몽고족은 이러듯 쇠락과 해체의 길에 들어선 러시아를 침입한 것이다. 1223년 칭기스칸의 서방 원정 중 처음으로 러시아는 ‘칼가강의 전투’에서 몽골과 충돌했다. 그후 1227년 우구데이칸 시절 바투의 서방원정을 통해 본격적인 러시아 공격이 이루어졌고, 키예프 공국의 수도 키예프가 함락되고, 바투는 1240년 이 지역에 조치 울루스를 성립시켰고, 그 후 약 240년간 몽 상의 항복을 하지 않는 도시만 피해를 입었다고 서술한다. 일반적 견해에 대해서는 몽골군의 파괴를 과대선전한 ‘공포전략’ 일환이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작자는 러시아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알렉산드르 넵스키를 몽골에 굴종하고, 아첨했던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로 지목한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몽골에 의한 러시아의 압제와 파괴를 의미하는 ‘타타르의 멍에’를 러시아 자신에 의한 ‘루시 여러 귀족들의 멍에’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스기야마 마사야키, 전게서, pp.86~88즉 작자는 첫째로, 몽골에 의한 러시아의 파괴에 대한 기존 견해를 다른 시각에서 파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와중의 공포전략이라고 평하고 있고, 다음으로 몽골 지배 하에서 러시아 지배층의 독립 의지가 결여되어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일반적 역사 서술에서의 몽골의 러시아 정복과 지배에 대한 견해러시아에 대한 몽골의 정복과 지배에 관한 작자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작자는 자신의 견해가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름을 피력한다. 작자의 견해를 재고해 보기 위해 우선 일반적으로 역사에서 평하는 당시 사실에 대한 평가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우선, 몽골의 러시아 파괴에 대한 기존 역사 서술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엄청나게 잔혹한 파괴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예로 우선, 러시아의 랴잔이나 꼬젤스크 등 몇몇 도시는 인구가 전멸하다시피 했다고 전한다. 김형주, 「문화로 본 러시아」, 두리, 1997, p.73그리고 다른 서술에서는, 1240년 키예프 함락이후, 1246년에 이 곳을 방문한 교황청의 한 외교관의 기록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 되어있었고, 겨우 200채 정도의 초라한 집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나마 그 거주자들은 몽고인의 노예로 비참하게 살고 있었다고 서술하는 부분도 보인다. 김학준, 전게서, p.31또 유사한 서술로, 몽골군대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세력에게는 정말 잔인한 군대였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항복하지 않는 주민들을 몰살해 버렸다고 하며, 키예프 함락 당시 상황에 전게서, p.72또한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이러한 저항이 거의 불가능했던 첫 번째 시기에 바투에게 가서 외교적 활동을 벌임으로서 칸국과 러시아가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고, 반발이 가시화되던 두 번째 시기에 있어서는 모스크바 대공 드리뜨리 돈쓰꼬이가 몽골과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몽골에 대한 반발이 본격화되고, 이전 시기에 비해 보다 다양한 관계를 모색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전투로 말미암아 러시아의 독립에 대한 열기가 한층 고조되기 시작하였다고 서술한다. 김형주, 전게서, pp.75~76예로 들 수 있는 두 번째 서술은 우선,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몽골의 정치적 우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약탈과 살육을 피했고, 몽골의 침공을 외교적으로 잘 막아냈다고 말하고, 그 결과로 모스크바 공국이 성립, 발전되고 후일 몽골의 지배를 벗어나게 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한다. 또한 모스크바 공국 3대 공후 ‘이반 다닐로비치’를 서술하며, 모든 러시아의 공물과 세금을 거두어 바치게 하는 권한을 받은 그의 정책이 반민족적이지 않고, 그의 교묘한 현실적 정책이 당시 러시아를 파괴적인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한다. 그리고 드미뜨리 돈스꼬이의 몽골에 대한 승전은 단결을 통해 외부 침략자들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점을 강조한다. 김학준, 전게서, pp.35~37또 다른 세 번째 서술은 몽골인들에게 저항을 시작한 것은 민중들이었으나 후에 지배층이 저항에 합류함으로써 진정으로 위력을 발휘했다고 하며, 러시아 군주들의 몽골에 대한 굴종의 자세를 그들에게 안주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자존심의 깊은 상처를 받고 그들을 증오하면서도 몽골의 강력한 군주권을 부러워하며 현실적으로 그들과 같은 대세력을 이루고자 하였던 군주들의 야심의 이율배반성에서 비롯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박한제/김호동/한정숙/최갑수, 전게서, pp.113~115몽골의 러시아 정복과 지배를 그리는 고대 러시아 문학고대 러시아 문학작품을 통해 또 다른 시각에서 당시 몽골의 러시 칼로 베어 죽이고, 주교와 성직자들을 불태워 죽였고, 교회와 수도원을 불태워 버렸다고 말하고, 그 광경을 “도시 안에 살아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죽음의 잔을 마셨다.”라고 표현한다. 김문황, 「고대 러시아 문학사」,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3, p.123두 번째로, ‘블라지미르 공국의 세라삐온의 설교문’은 러시아 영토에 닥친 재난과 러시아 민족이 당하는 고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작품 내의 첫 번째 설교에서 “그들은 우리의 땅을 유린했고 우리의 도시들을 점령했고, 우리의 성스런 교회들을 파괴했고, 우리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였고,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들을 능욕했다”라는 서술을 통해 몽골의 침입으로 발생한 끔찍한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다. 세 번째 설교는 몽골에 의해 러시아가 당하는 불행과 고난을 묘사한다. “근 40년 동안 모진 고통과 고문, 그리고 버거운 조세가 부과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자비한 민족을, 잔인한 민족을, 그리고 아름다운 젊은이, 어린아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민족을 보내셨다.”라고 말한다. 김문황, 전게서, pp.129~130다음으로 몽골의 지배기 당시의 러시아 군주들을 그리고 있는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Повесть о житии Алексндра Невского(알렉산드르 넵스키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로, 이 이야기는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업적을 높이 칭송함으로써, 작가는 외부의 침입자를 격퇴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 그리고 타민족에게조차 경외심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독자에게 상기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고, 그것은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단순히 몽골에 굴종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김문황, 전게서, p.136두 번째로 ‘드미뜨리 돈스꼬이’ 대공의 꿀리꼬보에서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다. ‘드미뜨리 이바노비치 대공과 마마이와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에서 작가는 드미뜨리 대공이 ‘러시9
한반도의 실크로드에서 역할 재설정1. 서 론실크로드100여년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F. von Richthofen)은 자신의 저서 ‘중국(China)’에서 실크로드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 후 현재까지도 실크로드라는 말은 유행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일반적인 실크로드(Silk Road)는 단순히 경제 교역을 위한 이동의 루트로서 이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실크로드가 지니는 실제적 의의가 경제 교역을 위한 상인들의 이동로의 개념에 한정된다면 실크로드가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의미가 크게 퇴색된다. 그래서 실크로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실크로드를 인류문명의 교류가 이루어진 통로를 범칭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실크로드는 크게 3개의 지선으로 구성된다. 가장 오래된 지선으로 육로로서 초원길과 오아시길과 바닷길이다. 초원길은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동서교류 통로를 지칭한다. 초원길은 북유럽 발트해 남안에서 시작하여, 카스피해와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화북지방에 이른 후 중국 동북지방을 거쳐 한반도까지 이어진다. 다음으로 오아시스길은 중앙아시아의 사막지역을 중심으로 산재하는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이루어졌다. 이 통로는 서유럽의 로마에서 장안을 거쳐 그 동단으로 한반도까지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바닷길은 해상에서 동서교류와 교역이 진행된 통로를 말하고, 지중해에서 홍해와 아라비아해를 커져 인도양과 태평양까지 이른다. 정수일, 「씰크로드학」, 창작과 비평사, 2001, p.42, 46, 52실크로드와 한국신라 원성왕릉으로 전하는 경주의 ‘괘릉’에는 좌우 각 두 구의 인물조각상이 입구 신도에 도열해 있다. 특이할 점은 이 두 석상이 이란계 무인석상과 위구르계 문인석상이라는 사실이다. 위의 서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 한반도는 동서 문명의 교류의 장인 실크로드의 동단(東端)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속적 사고에서 실크로드라는 관념은 특히, 서역 혹은 유럽과 우리의 전통 왕조들과의 연관성을 쉽게더불어 세계사 속에서 우리 역사의 위치를 더듬어 볼 수 있게 될 때 한 차원 높은 역사적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2. 본 론실크로드와 신라실크로드와 한반도와의 관계를 고찰함에 있어서 우선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 교류가 이루어 졌다면, 그 문명 교류의 일반적 원인, 즉 일반적 배경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명 교류는 흔히 전쟁이나 사신의 왕래 같은 정치적 배경, 상인들의 이동에 따른 경제적 배경 혹은 민족의 대이동과 같은 민족적 배경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아시스길을 통한 문명교류가 특히 활발했던 시기인 7~9세기 한반도가 당면한 시대상황은 문명 교류 이면의 사회문화적 배경의 역할을 다른 시대보다 뚜렷이 보여줄 수 있다. 당시 중국은 수나라에 이어 건국한 당나라가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 세계적 제국으로 성장해 가던 시기였다. 당은 외래 문명에 대해 개방적인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당과의 사신과 상인 유학생을 통한 교류가 빈번했던 실크로드 동단에 위치한 신라에 까지도 그 영향은 충분히 미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교류 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8세기 초 당의 ‘장회태자묘 벽화’의 ‘빈객도’를 들 수 있다. ‘빈객도’는 신라 사신이 다른 나라에서 온 객사를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와 같은 만남은 신라 사신으로 하여금 실크로드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좋은 기회였을 것고, 타문명과 신라와의 접촉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이다.문명교류의 흔적들당제국의 국제적 성격은 실크로드 동단에 위치한 신라에게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 교류의 배경이 되었고, 신라의 사회문화의 여러 부분에서 당의 영향에 그치지 않고, 실크로드상의 여러 가지 문명의 성격에 영향을 받은 문명 교류의 흔적의 결과가 나타난다.신라에서 문명교류의 흔적을 첫번째로 인쇄술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신라 로 인쇄되고 탑 속에 봉납되었다는 것을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이 보여준다. 그리고 신라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 알 수 있는 신라의 뛰어난 목판인쇄술은 중국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고, 1880년 이집트 파윰(Fayum)의 아르시나(Arsinae) 유적지에서 중국 신강 투르판 지역에서 발견된 회골문 인쇄품과 유사한 아랍어문 인쇄품의 출토가 보여주듯이, 정수일, 상게서, p.284후대 13~14세기 몽골세력의 서점과 마르크 폴로나 서양의 선교사 같은 잦은 유럽인의 중국 내왕은 신라를 선두로 발달했던 인쇄기술의 서전의 환경과 여건이 되었던 것이고, 그것을 배경으로 신라의 인쇄술은 실크로드를 통해 더욱 발전해가며 서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신라의 문명교류의 두 번째 흔적으로 무덤양식을 꼽을 수 있다. 천마총으로 대표되는 신라의 고분은 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매우 보기 드문 양식인데, 중국이나 고구려, 백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고분유형이다. 하지만 신라의 고분 양식과 비슷한 양식의 고분 유형이 북아시아, 카자흐스탄에 산재한 사카족의 유적에서 발견된다. 이들 사카족의 고분 양식은 과거 남러시아에 근거지를 두었던 스키타이의 고분 축조법을 계승하였고, 사카족 이후 영토를 계승한 흉노에 의해 계승된다. 요시미즈 츠네오, 「로마문화 왕국, 신라」,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2, p.107이러한 고분 양식이 실크로드 동단의 신라에서 독자적으로 시간적 차이를 두고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를 증명해 준다. 한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서천하여 4, 5세기 남러시아 지역을 거점으로 했던 북흉노가 사카족의 고분 축조방식을 계승하게 되고 이것이 실크로드의 3대 지선 중 북아시아를 거치는 초원길을 통하여 신라로 다른 문명과 함께 전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즉 돌무지 덧널무덤이라는 신라 특유의 고분 축조 양식은 신라의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 교류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사실 중 하나이다.다음으로 문명 교류 흔적은 신라의 ‘유리’를 들 수 있다. 고대 착화됨에 따라 국내에서도 생산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충분히 문명교류의 결과이고 그 성격에서 발전적 문명교류의 면이 나타난다.예술적 측면에 있어서 문명교류는 지역적 범위를 매우 광범히 하게 하여 나타난다. 그 중 실크로드를 통한 동, 서양 예술 분야의 교류에서 가장 오래되고 넓게 나타나는 것은 연화문이다. 이 연화문은 인도와 중국, 한국, 일본을 비롯한 불교문명권과 이집트를 비롯한 고대 오리엔트 문명권, 그리고 그리스-로마 문명권 등 광대한 지역에서 공예품과 건축에 사실적인 묘사와 도식화된 문양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정수일, 상게서, p.364고대 이집트가 그 시원으로 여겨지는 연화문은 신성한 생명력을 가져다 주는 꽃이라는 상징성 정수일, 상게서, p.363으로 인해 불교의 교리와 문합되어 인도를 거져 중국, 한반도와 일본에 까지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불교와 함께 전파된 연화문은 와당이나 불상, 벽화의 장식 문양으로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조각 부문에서 나타나는 간다라 양식의 영향을 받은 신라의 불상 양식도 신라가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의 영향을 받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또한 인적 교류의 측면도 신라와 실크로드라는 관계에 있어 문명교류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신라의 인적 교류 현상을 대표하는 인물이 신라 고승인 혜초이다. 혜초는 8C초 당나라로 건너가 천축과 서역지역을 순방하고 당으로 돌아온다. 그가 남긴 저서인 ‘왕오천축국전’은 천국과 서역의 순방기이다. 중국의 돈황 천불동에서 발견된 이 여행기는 그가 인도 및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편답하면서 그가 목격하고 경험한 그 지역의 역사, 문화, 정치, 풍속, 물산, 종교 등을 사실적으로 기술한다. 이 기술은 당시 한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의 상호 이해와 교류를 도모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고, 그 주체가 출신이 신라인이었다는 데서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신라인으로써 혜초라는 인물은 실크로드를 통한 중앙아시와 지방과 한 문명권의 문명교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 동안 빈번했던 견당사 파견과 위의 혜초의 예에서 볼 수 있던 고승의 입당활동, 도당숙위학생의 유학은 신라에 자극을 주고 신라가 문명교류에 있어서 적극적일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활동이 신라의 실크로드의 당사자로의 설정을 보다 명확하게 만든다.역사적으로 살펴본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의 흔적물론 실크로드의 당사자 설정이 한반도 왕조 중 신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신라를 그 시초로 설정할 수 있고, 또한 신라에서 유난히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성격은 한반도 각 왕조들에게도 시간대를 달리하며 나타나고 있다. 우선, ‘하회탈’로 대표되는 한국의 가면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기본 유형이 만들어진 것은 고려시대이다. 하회탈의 일부에서 보이는 서역계통의 이국인적 골상의 풍취는 누구나가 목격했을 것이고, 그 이질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와 고려와의 연관성에 대한 암시를 던져준다. 또한 조선의 ‘칠정산’을 통해서도 그 연관성을 추정해 볼 수있다. 칠정산은 조선초기에 우리나라의 독자의 달력을 만든 것인데,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어있다. 내편은 서울을 표준으로 작성한 달력이고, 외편은 이슬람력(회회력)을 이해하기 위해 개정, 증보하여 번역해 놓은 것이다.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01, p.274칠정산 외편이 이슬람력의 기본원리나 특성을 그대로 수용하여 만든 ‘조선의 이슬람력’이라는 사실은 우리 고유의 역법을 창시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이슬람 문화를 참고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당시 이슬람과의 문명 교류의 존재를 입증한다.실크로드의 존재 의의이처럼 문명교류는 한반도 역사에 있어 신라 시대 이후로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문명교류에 있어 실크로드의 존재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실크로드라는 관념의 존재 자체가 바로 문명 교류와 동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때 실크로드의 존재 의의가 보다 분명해진다. 실크로드는 그 자체가 문명.
「역사」와 「사기」 분석을 통한역사 이해의 한계 극복과 발전적 인식1. 들어가며유목민유목민은 목초지를 찾아 가축을 방목하며, 초원이나 사막지대에서 이동생활을 하는 민족으로, 그들의 역사는 몽골제국을 제외하고는 흔히 대중에게 인식될 수 있을 만큼 전면에 부상하는 시기는 그야말로 미미하고, 당연한 귀결로 유목역사를 세계사에 있어서 주류 역사에 종속적인 부분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유목민의 역할에 좀 더 비중을 두고 그것을 역사 진행에 있어서 또 하나의 주류 역사로 보는 시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유목 역사는 현재 주류 세계사의 주인공인 농경문화의 역사와 함께 상호작용하며 인류 문명 발전에 있어서 큰 역할을 담당한 농경 중심의 역사에 대응되는 또 하나의 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역사의 재인식농경민 중심의 주류적 시각에서 유목민의 역사를 대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들이 담당했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축으로서의 역할을 망각하게 된다. E. H. Carr는‘역사의 사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코 순수한 것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없다. 역사의 사실은 언제나 기록자의 마음을 통해 굴절된다’ E. H. Carr, 「역사란 무엇인가」, 범우사, 1988, p.41고 그의 저서에서 말한다. 즉, 우리가 믿고 있는 사실로서의 역사는 역사가의 주관을 거친 한 단계 굴절된 역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가 주로 사서에서 대하게 되는 유목민의 역사라는 것은 그들과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농경민족의 사가가 그의 주관을 통해 ‘사실’로서의 굴절된 유목민 역사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헤로도투스의 「역사」와 사마천의 「사기」에는 농경민족 역사가에 의해 이루어진 유목민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있다. 위의 두 사서에 있어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역사가의 주관을 통한 ‘굴절’이라는 테마를 통해 그 ‘사실’을 재고해 봄으로써 두 사서의 유목민에 대한 서술의 특징을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굴절’된 시각을 통한 역사 서술 무슨 의미를 지니는 지에 대해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2. 본 론「역사」의 유목민 - 스키타이「역사」 제 4권에서 헤로도투스는 다리우스대제의 스키타이 원정을 서술한다. 이 역사적 사실의 서술 와중에 그는 은연중 농경민족이 가지고 있던 유목민족에 대한 태도 및 시각을 내비친다. 우선 서술의 몇몇 부분을 통해 스키타이인의 잔인성이 과장되어 나타나고 있다. 「역사」의 스키타이의 풍속과 관습 중 전쟁과 싸움에 대한 관습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서술이 보인다.‘스키타이인은 최초로 쓰러뜨린 적의 피를 마신다. .... 스키타이인은 수급의 가죽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벗겨 내고 있다. ... 술잔으로 사용한다. 그들은 가까운 혈족의 두개골도 이렇게 다루는 경우가 있다.’ 헤로도투스, 「역사」, 범우사, 1988, p.304~p.305이어서 다음과 같은 서술을 통해 스키타이를 호전적으로 인식하는 헤로도투스의 태도가 간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왕이시여, 저는 이 민족이 다루기 어렵다는 걸 진작부터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었읍니다만, 이 땅에 와서 그들이 우리를 우롱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 소문이 사실임을 아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上揭書, p.331또한 조상설화의 서술에서 스키타이의 조상을 ‘사녀(蛇女)’ 上揭書, p.283사이의 자식으로 전하며, 스키타이족에 대하여 그 민족의 시초를 온전치 못한 것으로 묘사하는 왜곡된 시각을 보여준다. 더하여, 조상설화에 대한 서술에서는 ‘사녀’의 이야기가 그리스인의 이야기라는 점을 주지시키는 점에서 그리스인의 스키타이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존재를 확증해준다.다음으로 뒤의 서술과 같이 스키타이족이 외국, 특히 그리스의 문화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폐쇄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음을 강조한다.‘이집트인과 마찬가지로 스키타이인도 외국의 풍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히 꺼린다. 특히 그리스의 풍습을 꺼리는데...’ 上揭書, p.308이 서술은 외국문화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특히 당시 가장 선진화되었다고 여겨지는 그리스 문화를 배척하는 태도를 통해 안에 서술된 스키타이족에 대한 역사가 주관에 의해 ‘굴절’된 역사적 사실의 예이고, 이러한 특징은 중국 전한 시대에 사마천이 지은 사서인 「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사기」의 유목민 - 흉노사마천은 「사기」 ‘흉노열전’에서 한나라와 흉노와의 충돌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데, 그 서술의 와중에 농경민족 역사가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는 유목민족인 흉노를 통해 「역사」에서 본 것과 같은 관점에서 그 서술 시각을 분석해 볼 수 있다. 사마천은 흉노의 역사와 한나라와의 충돌과정을 서술함에 있어, 그들의 폐륜적이며 잔인하고 호전적인 모습을 부각시킨다.‘... 두만은 이렇게 하여 훌륭한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묵특은 이어서 계모와 이복 형제 및 복종하지 않는 중신들을 모조리 죽였다.’ 사마천, 「사기3」, 서해문집, 1996, p.191‘... 흉노 사나이들은 모두 활을 잘 쏘고, 전시에는 모두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싸움터로 나갔다’ 上揭書, p.189‘...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용감히 싸우며, 특히 적을 유인해서 일망타진하는 전법에 능했다.’ 上揭書, p.198위의 서술에서와 같이 사마천은 흉노라는 나라의 패륜적인 성립과정과 한나라를 끊임없는 약탈하는 약탈자로서의 흉노를 잔인성과 호전성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마천은 흉노에 대해 자신들(농경민)과는 다른 습성과 천성을 지닌 족속으로서 흉노를 인식함으로 그 인식이 서술에 있어서 과장되게 부정적으로 묘사된 왜곡된 흉노의 모습으로 사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역사」와 「사기」 서술의 공통점위에서 분석된 「역사」와 「사기」의 인용들은 각각 스키타이, 흉노에 대한 특징적 서술의 일부이다. 스키타이와 흉노로 대표되는 유목민을 바라보는 농경민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와 사마천은 유목민이라는 대상의 역사 서술에 있어 유사점을 보여준다. 우선 볼 수 있는 것은, 두 역사가는 자신들의 문화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매우 호전적이고 잔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호전성과 잔인함을 지닌 유목민족은 그들의 존재 자체유목민은 부정적 인식 대상일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유목민족에 대한 농경민족의 인식을 감히 일반화해 본다면, 즉 과거 다른 지역, 다른 시대의 농경민 역사가들은 그들을 위협하는 존재인 유목민에 대해 부정적으로 왜곡된 시각을 바탕으로 사서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곡의 존재를 확인한 다음 우리는 이 왜곡이 일어나야 만했던 이유를 고찰해 봄은 한층 더 역사적 서술에 한 발작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다.역사가의 서술헤로도투스와 사마천의 서술에서 공통적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은 유목민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그 서술이 왜곡과 과장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의 서술은 당대의 공통된 기초적 사실을 원료로 하여 이뤄진다. 하지만 그 기초적 사실은 역사가의 굴절된 시각을 통해 재구성과정을 거치고 역사는 그 재구성과정을 반영하여 지금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우선 역사가의 왜곡된 서술이 시대적으로 갖는 의미로써 우선 당시 헤로도투스와 사마천의 현재 사실의 왜곡을 통한 역사의 서술이 그것이 이루어진 당대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고찰 해 볼 수 있다. 당시 농경민들이 유목민을 맹수로 치부할 정도로 그들이 오직 약탈만 일삼고, 전투만을 즐기는 민족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목민들에게도 그들만의 정주공간에서 그들의 양식과 문화 속에서 생활해 왔을 것이고, 그러한 생활 중 식량 공급을 위한 수렵활동을 통해 용맹성이 더해 졌을 것이다. 하지만 농경민의 역사서술 속의 유목민의 모습은 이런 면이 생략된 채로 오로지 그들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통해 동시대인들에게 왜곡된 정보를 전파함으로써 일반 백성들을 역사가의 왜곡의 의도대로 유목민을 금수로 치부해 버리는 사회적 통념을 생성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이 단지 그들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하나의 이유인 동시에 역사가의 서술이 당시의 동시대에서 지니는 존재 의의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두 번째로 서술 당시에 왜곡된 서술의 존재 의의로 정치적 이데올로기 면에서 접 표현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되는 요소인 농경문화의 우월성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줄 수 있다. 그 예로「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흉노는 끊임없이 한나라의 변방에 침입하여 인적, 물적 피해를 준다. 이러한 침입은 한나라에게 있어 흉노라는 족속에게 무력에 있어서 굴복하는 보여주지만, 흉노를 폄하하는 역사 서술을 통해 그 동시대인에게는 그들의 굴복이 단순히 짐승같은 야만족의 무력을 통한 침입으로 야기된 것이라고 자위하며 짐승과는 격이 다른 존재로 자신들을 차별화하며 자신들의 지배 체제 유지가 더 수월했을 것이고, 역사서를 통한 기록을 통해 후대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의 굴복은 태생적으로 야만적인 금수의 침입으로 야기되었던 것뿐이라고 후대인들을 설득시키고 현재 자신들의 처지를 합리화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이와 같은 이치로 유목민에 대한 ‘왜곡’된 역사 서술은 백성들로 하여금 농경문화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을 고양시킴으로써 유목민에 대한 굴복의 시기 와중에도 자신들의 차별된 자의식 유지를 위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동시대인들에 대해서 E. H. Carr가 언급한 역사의 이중적 기능 중 ‘현재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기능’ E. H. Carr, 「역사란 무엇인가」, 범우사, 1988, p.83을 헤로도투스와 사마천의 역사서술에도 적용해 볼 수 있는 것이다.유목민에 대한 차별적 우월감이라는 자의식의 유지는 앞에서 언급한 이데올로기 유지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지만, 또한 유목민과 구별되는 자신을 인식하게 만들고, 야만적이고 호전적이라고 간주하는 유목문화에 대한 적대감 형성을 통해, 농경민 특유의 자의식 유지를 통하여 고유한 문화 수호와 역사에 비춰지는 유목민의 모습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서의 그와는 다르게 농경민의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모습을 구성원 각자에게 각인시켜 나름의 자의식의 함양과 동시에,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발전 방향 제시의 역할까지 할 수 있다. 결국 역사가의 의도적 역사의 왜곡 서술은 당대와 후대를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