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사회사상담당교수 : 김철운 교수2001년 6월 5일제출과제 : 이경숙씨에 대한 비판학과 : 생환대 원예과학과학번 : 8630011성명 : 문 석완I. 서론이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 "曲學阿世(곡학아세)"라는 것이다. "학문을 이지러지게하여 세상을 속여서 어지럽힌다"는 뜻의 흔히 쓰는 한자성어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경숙씨는 학문을 이지러지게 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세상을 속여서 어지럽히는데는 실패한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니 오히려 세상을 웃겨서 떠들썩하게 했다는 것이 옳다고 본다. 굳이 말을 만들라면 "曲學笑世(곡학소세)"라고 해야 제대로 표현 할 수 있을 것 같다.일단 그녀가 쓴 글 즉, 기고문의 내용들을 살피고 그녀의 번역들을 살피기 이전에 먼저 어째서 이러한 반향이 일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먼저 두 가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첫째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이 가져다 준 작은 소동이라고 보고 싶다. 그녀는 자신의 글 "노자를 웃긴 남자"를 인터넷에서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연재가 성공작이 되기 위해서는 "클릭 수" 즉 그 문서에 마우스를 갖다 댄 사람의 수가 많으냐 적으냐가 그 글의 성공의 잣대가 된다. 아마도 그녀의 글들의 "클릭 수"는 엄청 났을 것이다. 그러니 책으로 나와서도 베스트 셀러가 되지 않겠는가. 그녀의 온라인에서의 성공과 또한 오프 라인에서의 성공은 사실상 정통으로 동양학을 한 사람과 그것에 이전부터 맛을 들여 깊이 잠겨져 있었던 나 같은 이에게는 상당히 슬픈 느낌을 전해준다. 예를 들면 과연 이 시대의 누가 고려대 철학과의 동양철학 모교수의 노자나 논어 등의 저서를 그렇게 많이 사겠는가? 그녀가 비판하고 있는 김용옥 교수의 이전 저작 "절차탁마대기만성"은 사실상 굉장히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쓰여졌고, 그의 개인이야기들이 또한 상당 부분 나와서 재미있는데도 불구하고 몇 천권 찍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심지어는 86년 그 책이 출판 될 당시 그에게 수를 들였을까? 나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훔쳐보기 심리"라고 말하려 한다. 이제까지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 특히 동양학에 대해 관심은 있으되 그 학문의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사람들-약간의 노력과 조금의 금전으로도 충분히 그 세계에 대해 알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우스를 클릭하는 것 이상의 수고를 하기 싫어한다-에게 고전의 세계에 대해 그녀가 원하는 작은 구멍을 뚫어 주고 그 구멍의 세계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훔쳐보기가 가진 양대 즐거움 즉 "사태의 왜곡"과 "은밀한 즐거움"을 대중에게 선사한 것이다. 훔쳐보기가 가진 사태의 왜곡은 심각하다. 어떤 사태를 열려진 문으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훔쳐보기는 가져다 준다. 예를 들면 화장실에서 누군가 볼일을 볼 때 그것의 본래적 의미는 '어떤 이가 급한 일을 해결하고 있다'이다. 그러나 훔쳐보기로 보면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어떤 이의 은밀한 곳이 노출되어 있다' 쯤으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의미는 그것을 들여다 보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그 왜곡된 의미대로의 상상과 함께 상당히 색다른 즐거움-이러한 것이 대부분 부정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중앙일보에 쓴 글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이경숙, [동양학 읽기] 2. 동양학 다시 시작해야 한다., 중앙일보, 2001년 3월 19일(10판) 18면. 여기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쓴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을 읽은 독자들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하는 점은 인터넷이나 보내온 메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독자들이 보내 온 편지에서 가장 많았던 것이 쇼크를 받았다는 고백이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그런 충격을 받은 이유는 달랐지만, 내가 그 글을 쓸 때 기대했었던 바의 충격이 가해졌다는 점에서 나의 `음모` 가 약간은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뭐냐. 도올 김용옥씨의 고전 강의 의 생각을 말해 보겠다. 그 다음으로 그녀가 도올이 잘못 번역하였다고 한 기사 부분을 발췌하고 그 장의 전문을 싣고 도올의 해석과 나 자신의 해석을 쓴 다음 그녀의 학문하는 태도의 어리석음에 대해 밝혀 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으로써 좋은 고전 읽기를 위해서 피해야 할 태도들을 이씨의 예를 들어서 정리하고 이 보고서를 마치려 한다.) 사실상 어떤 것이 올바른 길인가 하는 것에 대해 본론의 내용을 하나 더 쓰고 피할 것과 바람직한 것을 함께 결론으로 맺는 것이 좋겠지만, 보고서의 분량과 성격상 그것을 다 하기 위해서는 한편의 논문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다만 이씨의 경우에서 타산지석만이라도 삼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큰 배움이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II. 홍광훈 교수의 이경숙 비판) 홍광훈, `이경숙·김용옥 동양학 논란`을 보고…, 중앙일보, 2001년 4월 16일 14面(10版)....(생략) 홍광훈교수(서울여대 중문과)가 김용옥 교수와 이경숙씨의 저서. 강연. 기고 등에 나타난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보내왔다. 洪교수는 기고에서 특히 이경숙씨의 한문독법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김용옥씨에 이어 최근 이경숙씨의 등장으로 동양학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높아진 것 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공이 일단 인정된다. 특히 이씨는 김씨에 대한 무모할 정도의 저돌적 `도전`으로 언론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의 도전은 동양고전 읽기가 김씨와 같은 화려한 학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평범한 `아줌마` 도 동양고전을 `옥편 한 권 들고 읽어나갈 수 있다` 는 사실은 확실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씨의 말대로 그 `음모` 는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이씨의 `음모` 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글에는 그 소양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기상천외한 해석법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논어 첫 장을 비롯하여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 나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무 문제가 되지 않는 구절도 엉뚱하게 번역해 놓았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정반대로 해석해 놓았다. 시(視)와 청(聽), 견(見)과 문(聞)의 의미도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언어는 약속이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통용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이씨는 한문이라는 언어를 이해하는 고금의 모든 사람들 사이의 약속을 비웃으며 자기 혼자만의 `암호해독법` 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씨의 말대로 외국 명문대를 나와야 한문고전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한문도 문리를 모르면 옥편만 가지고 해석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일반인이 동양학에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번역본을 읽고 그 내용을 잘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이씨가 과연 자신이 말한 `음모` 이외의 다른 음모가 없다면 지금이라도 `허사사전` 등을 벗하여 한문의 문리를 터득한 다음 동양학 글 쓰기에 나서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바란다. ...(생략)여기서 홍교수는 그녀의 고전 읽기의 방법론이 무모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고전이 열려진 책이어야 한다지만, 이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또한 일정한 해석학적 틀이 없이 읽혀지는 고전은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기 위해 쓰여지는 증거본문(proof text)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III. 전호근 교수의 이경숙 비판) 전호근, [도올·이경숙 동양학 논란을 보고], 중앙일보, 2001년 4월 30일 15面(10版)논어를 둘러싼 최근의 열기는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는 일대사건이다. ...(생략) 이씨는 논어의 제1장에 나오는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 속에 노여움을 품지 않음)` 을 대단히 기발하게 번역했다. `사람이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더라도 화내지 않는다` 는 뜻으로 본 것이다. 굳이 오역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만약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나왔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군자가 아닐 뿐더러 그 사람이 제정신인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역을 했다는 데고루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진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논어 위정편)` . 지금이야말로 논어의 지혜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전교수는 여기서 그녀의 학문적 독단성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심지어는 공자가 해석을 붙여도 아니라고 할 판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보이기 위해 다른 의견들을 공박할 때는 다른 사람의 책들을 충분히 참고 한 후에 그런 의견들에 대해 타당함과 부당함을 조목 조목 밝히고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정한 후에 자신의 독창적인 의견을 내는 것이 참된 학문하는 태도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IV. 도덕경 15장 孰能濁以靜之徐淸 해석나는 이경숙씨의 이 부분에 대해서 심한 반발감을 느끼게 되었다. 먼저 그녀의 해석의 어리석음을 알아보기 위해 스스로 그 뜻을 살폈다. 그리고 노자와 21세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도올의 것이 약간의 어색함이 있지만 원의를 더 잘 살린 것이었고, 그녀의 것은 거기다 번역해 넣으면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는 이상한 것이 되고 만다. 둘째는 번역과 해석의 문제이다. 도대체 그녀는 번역과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어디서 배웠을까? 아마도 이런 어리석음이 정통 동양학자들이 그녀의 글들을 외면하는 요인이 아닐까 여겨진다. 현대의 모든 학자들은 번역은 해석학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번역된 어떤 책은 원저자의 책도 되지만 그것을 해석해서 번역하는 번역가의 것이기도 하게 된다. 이경숙씨는 번역을 아주 우스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문제로 삼은 도덕경 15장을 다른 도구 없이 문맥에서만 보아도 그녀의 해석이 틀리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녀의 글의 전문을 한번 읽어보자) 이경숙, [동양학 읽기] 3. 고전을 다시 읽자, 중앙일보, 2001년 3월 26일 14면(10판)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 해서 번역 자체를 원문과 다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덕경 15장에 나오는 `숙능탁이정지서청(孰能濁以靜之徐淸)` 이란 문장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이 문장을 문법에 맞게 우리말로 옮기면 `누가 능히 고요함으로써 탁한 것을 천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