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그 ( Edvard Hagerup Grieg : 1843 ∼ 1907 )음악의 사조는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바뀌어 간다. 19세기 초, 낭만주의 음악이 한창 꽃 필 무렵 일각에서 새로운 음악의 사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국민주의 음악이 러시아를 중심으로 일어나 작곡가들 사이에 민족적 의식이 강조되는 작품을 쓰자는 운동이 싹터 점차 퍼져 나갔다. 특히 러시아 5인조( 보로딘, 퀴, 무소르크스키, 발라키레프, 림스키코르사코프 )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 음악 운동이 전 세계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민족적 자각을 일깨웠다. 그래서 그리그를 위시하여 드보르자크, 스메타나, 시벨리우스 등은 국민주의 음악정신을 가장 직접적으로 음악에 표현하였다. 이들은 작곡가란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 보았다. 그래서 자기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 민족음악 속에서 민족적 정서를 개발하고 발전하여 작품 속에 표현함으로써 독특한 색채의 민족음악을 작곡해야 된다고 외쳤다. 그리그는 이와 같은 작곡가들의 선봉에서 활약한 노르웨이 음악의 대표적 작곡가이다. 그는 노르웨이음악의 미래가 전통민속음악의 재창조에 있다고 믿었고 그러한 믿음이 그를 노르웨이 최고의 작곡가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그의 활기 넘치는 리듬과 신선한 화성법은 그가 영감을 얻은 민속춤곡과 서정적인 민요의 정서를 잘 포착한 것이었다. 그리그는 간단한 구성법을 사용하여 선율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 좋은 예가 입센의 동명 희곡에 음악을 붙인 부수음악 에서 몇 곡을 편곡해놓은 모음곡 제1번과 제2번이다. 그러나 보다 더 강렬한 노르웨이의 토속성은역시 그의 피아노음악에서 울려나온다. 에 녹아흐르는 노르웨이의 풍광이 그것을 잘 대변해준다. 시대 배경 에서는 외세에 신음하던 노르웨이가 독립을 쟁취해가는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리그의 국민주의음악은 독립을 향해 나아가던 당시 노르웨이의 민족적 자부심에 불을 붙여주었다. 진정한 노르웨이의 민족적 자부심에 불을 붙여주었다. 진정한 노르웨이작곡가가 되 어려서부터 교양이 높은 수준급의 피아니스트인 인자한 어머니로부터 음악적 기초와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그는 어린 시절 음악가가 되려는 생각을 전혀 갖지 않았다. 그저 시인이나 예언자 같은 몽상가가 되고싶어 관심을 갖고 있었다. 물론 이 당시도 그리그에겐 음악적 소질이 번쩍이고 있었다. 이것은 피아노나 작곡 분야에 놀라울 정도의 실력을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12세 때 그 자신이 변주곡을 작곡하여 발표하였는데, 이 때 그의 재능을 발견한 올레 불 (Ole Bull 1810 ∼1880)이란 선생은 그리그를 음악가로 키울 것을 그의 모친에게 부탁하고 승낙을 얻어 내었다. 그래서 그리그 나이 15세 되던 해 독일의 라이프치히 음악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 학교는 유명한 작곡가 멘델스존이 세운 학교로 저명한 교수와 뛰어난 음악가를 많이 배출한 명문으로 그리그는 이 학교에서 4년 동안 작곡법, 관현악법, 피아노, 음악이론, 역사 등 많은 것을 배우게 되어 그리그 생애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오는 중대한 시기가 되었다. 그는 독일에서 공부하는 동안 새로운 많은 음악을 접하고, 조국 노르웨이 음악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귀국하면 민족음악의 발전에 기여할 결심을 하며 그는 많은 청년 작곡가들과의 교우 관계를 넓혔다. 그는 특히 쇼팽을 존경하고 그의 음악에 심취했는데 하루는 모셸레스라는 선생이 쇼팽 음악에 대한 보수적 해설과 판에 박은 듯한 혹평을 하자 분통이 터진 나머지 1862년 고향 베르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는 고향에 돌아오자 또래의 청년 작곡가 노르드라크(Nordraak)와 친교를 갖게 되어 온화하고 여성적인 아름다움보다 남성적인 장엄함과 힘찬 저력에서만이 참다운 노르웨이의 음악 정신을 구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같이 하고 그의 작품에 결정적인 방향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청년 작곡가로서 그리그는 노르웨이의 국민음악 발전에 기수로써 활발한 활동을 한다.그는 그 후 코펜하겐에 오이테르페 협회를 창설하여 노르웨이의 민속음악을 정리하고 작곡의 초청으로 로마를 방문하여 그와 교우를 맺었다. 그 때 그의 No.1을 들은 리스트는 뜨거운 격려의 찬사를 해주어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지위와 실력을 높이 인정받아 더욱 창작에 몰두하게 되었다. 24세의 그가 노르웨이 음악협회의 지휘자가 된 것은 우연의 일이 아니었다. 그 다음 해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a단조에 이미 대가적 품격을 완전히 갖추게 되어, 차이코프스키로 하여금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게 하고 있다.「매력의 선율이 아름다움을 장식하고 풍성한 음악적 상상의 세계가 추호의 모방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 멜로디는 사랑과 정열이 담겨져 있고 화성은 생동하는 생명력이 넘치지 않는가. 리듬의 변화는 독창성의 극치로 아름다움도 경탄할 만하다. 모든 점에서 참신하고 흥미로운 음악이다. 」라고 그리그의 음악과 인간을 사랑했던 차이코프스키는 적고 있다.이렇듯 그의 음악은 북구적 서정이 독특한 개성으로 표현되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설득력을 지닌 직선적인 음악을 만들어 내었다.1867년은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한 해였다. 그가 가난한 생활 가운데도 늘 행복한 꿈을 꾸며 정신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정신적으로 감싸주는 사촌 누이동생 니나(Nina)가 있었기 때문이다. 니나는 뛰어난 성악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그리그의 작품을 자기의 연주회 때마다 불러 널리 소개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도 후원하여 주었다.그리그는 그녀에게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니나를 위하여 많은 우수한 가곡을 작곡하였다. 그리하여 둘은 마침내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이 시작된다. 그리그는 그의 아내 니나가 선물한 그랜드 피아노로 새로운 작품에 의욕을 불태워 No.2, 과 가곡 , 등을 연달아 작곡하였다.이즈음 그에게 대작을 완성할 수 있는 기쁜 청탁이 날아들었다.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극작가 입센이 연극 운동을 하다가 산더미 같은 빚을 지고 국외로 탈출해 있던 중, 북극의 전설에서 창조한 미래를 몽상하는 청년 「페르 귄트(Peer Gynt)」를 완성하여 극음악의 작곡가를 물색하던곧바로 착수하여 그 이듬해 여름. 대작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솔베이그의 애절한 사랑의 노래가 담겨진 이 곡은 행진곡, 무곡, 독창곡, 등 무려 23편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미롭고 애수가 깃든 노르웨이 민족 정서가 정교한 수법으로 담겨진 대작이다. 이 23곡의 음악 가운데 8곡을 추려 4곡씩 모아 2개의 모음곡을 만들었다 그 후 그의 작품은 더욱 세련되고 예술성이 깊어져 갔으며 영국의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받고 아카데미 회원에 추대되었으며, 정부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을 수 있어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한 때 건강이 나빠 고생하였으나 점차 회복되어 창작에 정열을 쏟을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독일 낭만파에 가깝지만 향토색을 강하게 나타내었으며 그가 말했듯이 나는 스칸디나비아 음악의 대표자가 아니다. 조국 노르웨이 음악의 대표자이다. 라고 외칠 만큼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의 음악을 창조하려는 노르웨이의 대표적 국민주의 음악가로, 음악사에 영원히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1907년 9월4일 그리그는 고향 베르겐에서 영원히 잠들었는데 그의 장례에는 정부에서 국장으로 예우하였으며 많은 음악과와 문인, 노르웨이 국민이 애도하였다.◐ 그리그의 작품에 배경이 된 노르웨이 ◑북유럽의 노르웨이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눈 덮인 산과 북극해의 검푸른 파도는 꿈과 환상을 일깨우며 짧은 여름 동안 피는 꽃은 색과 향기가 너무도 강렬하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원색을 좋아하고 향토적인 상쾌함과 산뜻함을 즐긴다. 낮이 짧고 밤이 길어 사람들은 자연히 꿈을 많이 군다. 그래서 재미있는 동화의 이야기가 많다. 유명한 동화 작가인 입센도 바로 노르웨이의 사람이다.◐희곡『페르귄트』의 줄거리◑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기는 했으나 그가 어렸을 적에 그의 부친이 재산을 낭비한 까닭에 지금은 홀어머니 오제와 함께 빈한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페르귄트는 부지런히 노르웨이 민간 전승실화의 주인공을 소재로 한 이 곡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페르귄둔해서 페르귄트의 이러한 망나니 행세를 더욱 부채질하는 격이 되었고 마침내는 동네 사람들로부터도 멸시를 받게 되었다.막이 오르면 화려한 마을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다. 이때 페르귄트도 나타나는데 그는 솔베이지라는 순정의 여인이 있음에도 화려한 신부복으로 성장한 잉그리드를 보게되자 망상에 사로잡힌 그는 잉그리드를 납치하여 산으로 도주한다. 산으로 도망친 이들은 동굴속에서 몸을 숨기고 살았다. 그러나 변덕이 심한 페르귄트는 벌써 잉그리드에게 권태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날 밤 잉글리드와 다투고 나온 페르귄트는 혼자서 깊은 산중을 헤매인다. 이때 녹색 옷을 입은 마왕의 딸을 만난다. 페르귄트를 좋아하게 된 마왕의 딸은 그를 마왕의 궁전으로 유인하며 이곳에서 괴상한 춤을 추며 결혼하자고 졸라댄다. 그러나 페르귄트는 벌써 여기서도 염증을 느끼고 이상한 음악과 춤을 비웃으며 결혼을 거절한다. 마왕의 부하들이 격노하여 페르귄트를 죽이려고 덤벼들 때 마을의 교회당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제까지 있던 호화로운 궁전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마왕의 무리들도 자취를 감춘다.고향의 오막살이 솔베이지의 곁으로 돌아온 페르귄트. 그러나 자기를 사랑해주던 오제가 쓸쓸히 세상을 떠나자 그는 다시 방랑의 길로 오른다.바다로 나선 그는 마침내 큰 부자가 되어 모로코에 도착하나 이곳에서 사기꾼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빈털털이가 된다. 아라비아로 건너간 그는 이곳에서 엉뚱하게도 예언자 노릇을 하여 또다시 큰 부자가 된다. 여기서 그는 추장의 딸 아니트라의 춤에 홀려 또다시 무일푼이 된다. 이번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금광으로 벼락부자가 되어 막대한 재물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노르웨이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여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가난뱅이가 되어 돌아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젊고 패기에 만만한 망나니로서가 아니고 흰 머리에 수염이 희끗한 노인이 되어 힘없이 귀향한 것이다.그러나 고향에서는 역시 백발이 성성한 솔베이지가 오직 그를 생각하며 기나긴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