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軍政과 分斷國家의 형성1. 美軍進駐의 意味1) 38선의 劃定問題1945년 미군은 9월 8일에야 선편을 이용, 인천에 상륙하고 다음날 서울로 입성하였다. 38선을 경계로 한 이와 같은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는 결국 남북한의 두개의 정부를 탄생시킨뒤에야 철수하였다. 우선 38선이 획정된 과정과 시기에 관해 크게 두가지 주장이 대립되고 있다. 하나는 얄타 밀약설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적 편의주의설이다. 이 중 군사적 편의주의설은 많은 자료들이 뒷받침하고 있어 많은 연구자들의 지지를 획득하고 있다. 이런 군사적 편의주의설에서 당시 미소간에는 한국에 대한 연합국 공동의 신탁통치가 합의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나라의 군대가 진주하느냐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어떤 특수한 정치적 목적에 의해 38선 분할의 동기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얄타 밀약설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은 아직도 불완전하게 제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38선 획정에 대한 논의가 아직도 끝나지 않음을 나타내며 보다 확실한 사실은 38선 획정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군사적 편의주의설에 의한 것이든 얄타밀약설에 의한 것이든, 미국은 한반도가 일국에 지배되어서는 안된다는 루즈벨트의 대한관(對韓觀)을 반영하여 소련의 배타적인 영향력 행사를 경계하기 위해 38선을 획정했을때 이미 분단의 가능성을 상정했다고 할 수 있다2)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해방후 한국학생운동사 를 쓴 이재오는 미군은 해방군으로서가 아니라 점령군으로서 진주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미군 상륙의 목적은 우리 민족을 민주주의 제도하에 있게 하고 국민의 질서 유지를 도모하는데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민주주의 제도하에 있게하고 도모하는 주체는 미군인 것이다. 그렇지만 9월 8일 인천에 도착한 미군은 해방군으로 환영을 받고 있었다. 당시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한반도에 실시된 미소 군정은 두개의 손님으로 간주되었고, 이들이 해방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빨리 철수할 수 했던 것이다.그러나 많은 지도자들이 미군을 해방군으로 취급함으로써 해방군의 역할을 수행하기 기대했지만 미군은 스스로를 점령군으로 인식함으로써 본래의 목적과 정책 수행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 대장은 포고 제 1호를 발표함으로써 미군정 실시를 선포하였고 이들이 내건 목표는 한국을 민주주의적 통일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북한 지역에서도 이미 진주하고 있던 소련군이 9월 하순부터 민정부를 설치하고 있었다. 결국 한반도의 운명은 38선의 양쪽에 진주한 미소 양군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해방이란 세계체제의 변화에 불과했으며 하나의 기회였던 것이다.미군 진주의 우선적 목적은 한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 우호적이며 미국식의 대의제 민주제도를 갖는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국내에서 좌익세력이 득세할 수 없도록 억압할 필요성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신탁통치를 통하여 친미적인 통일정부를 세울 수 없는 경우에는 남한에서만이라도 반소친미적이며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를 세운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2. 美軍政과 韓國의 政治勢力과의 관계1) 美軍政에 융합된 정치세력들韓民黨: 해방이 되었을때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해방에 대비한 조직을 갖고 있지 못했다. 다만 어느정도의 명성과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을 보호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필요성은 건준이 득세하게 되면서 더욱 절실해졌지만 조직적인노력들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다. 미군 진주의 소식은 우익측 인사들에게는 더 이상 건준에 연연할 필요없이 그들 자신의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각 정당과 정치단체는 한국민주당으로 합쳐지게 되었는데 그 결성 인물들은 모두 언론계 출신이나 과거 일제와 협력했다고 지목되는 사람, 자본가층, 미국,일본에서 해외유학을 한 지식계층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협력자를 다수 포함하고 일제정부 아래서 일했던 고급관료들이나 경찰들을 받아들이고 보호해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렇지만 한민당은 미군정을 자신들의 후원자로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고 미군정은 한민당을 한국에서 찾을 수 있는 자신들의 많지 않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밀월관계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한민당의 많은 인사들이 지주 혹은 자본가로서 종래의 사회경제적 관계가 온존되기를 희망했으며 강력하게 반공을 지향했다고 하는 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李承晩 : 미군정이 이승만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한민당과의 밀월관계에서 파생된 문제 때문이다. 미군정은 자신들의 행동에 민족주의적 정통성을 부여해 줄 수 있는 친일하지 않은 민족주의적 우익 인사를 찾아내야 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에따라 미군정은 이승만과 임정세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36년간 식민통치하에서 신음하는 민중과 사실상 연락이나 유대관계가 전혀 없었고 따라서 일반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도 이승만이 갑자기 영웅으로 추대되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행운이라고 아니할 수는 없다. 그의 행운은 치밀한 정세판단과 계산의 뒷받침 속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민당 인사들은 이승만에게 충분한 정치자금과 필요한 조직활동을 제공하였는데, 이들은 특히 미군정내의 집행기관을 통해 이승만 지지활동을 전개하였다. 한민당과 이승만과의 밀월관계는 제헌국회 성립때까지 계속되었고 이 연합세력이 미군정의 원조하에 단정을 수립시킨 국가형성 세력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2) 배제된 정치세력들金九와 韓獨黨: 11월 23일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부주석 김규식과 함께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김구와 임정은 독촉이나 인공과의 합작을 모두 거부한채 임정의 법통을 고수하면서 임정 주도에 의한 과도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누구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의 공식적인 대한정책은 식민통치였기때문이다. 그러던 중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소식이 전해지자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세력은 전투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미군정 기구들을 임정이 접수 심각한 갈등상태가 전개되었다. 즉 김구의 반탁론은 반외세에 기초한 것으로 임정을 승인하고 미소양군은 즉시 철수하라는 내용의 것이었다. 미소공위의 결렬로 한국문제가 유엔에 넘겨지자 김구는 다시 새로운 문제를 맞게 되었는데, 새로운 문제는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한다는 단정론이었다. 단정론이 제기되자 두개의 한국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면서, 유엔한국위원단을 비난하고 남북협상의 길을 택하여 단선에 불참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때 김구의 반탁운동은 의도와 결과 사이에 심한 괴리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金奎植과 民族自由聯盟: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자유연맹은 암살된 여운형이 없는 좌우합작위원회가 중도파 정당 및 사회단체들을 망라하여 만든 것으로 그 전반적인 성격은 온건우익세력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의 강령에는 특별한 경제적 사회적 변형 의지를 담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는 단정론에 반대하여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나서게 된다여운亨과 朝鮮人民黨: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의 평가와 배제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현실주의자들의 단정 논리가 우세할 때 여운형은 배제의 대상에 속하고 있었으나, 이상주의자들 또는 국제주의자들의 논리속에 여운형은 융합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런 상이한 평가는 미군정의 정책의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결국 미군정의 입장에서 볼때, 여운형은 달갑지는 않지만 결코 방치해 버릴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미군정은 항상 여운형을 우익 또는 중간 우익세력과 연합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를 미군정의 행정고문으로도 임명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미군정과 여운형의 관계는 미군정의 이익이 관철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미군정은 여운형을 좌우합작 위원회에 끌어들임으로써 효과적으로 좌익 세력을 고립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여운형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미군정의 단정 추진을 보다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朝鮮共産黨과 南勞黨: 미군정 초기 공산주의들과 군정과의 갈등은 조선공화당과 미군정과의 갈등으로서 보다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군정과 인공과의 보다 근본적인 갈등 원인은 인공이 조선공산당을 포함한 좌익 세력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인식 때문이었다. 미군정에게는 좌익세력의 득세도 그렇지만 좌익세력에 의한 국가기구의 장악은 더욱 더 참을 수 없는 사실이었고, 반드시 해결되지 않으면 안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소공위의 장래가 불투명해지고 공산당이 좌경중간파에서 분립되자 미군정청 당국은 이것을 불순단체라 하고 분쇄하기 시작하였다. 미군정의 강경정책에 대해 조선공산당 역시 대결적인 자세로 나오게 되는데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이 이어서 전개되었고 이어 남로당이 만들어졌다. 1946년 5월 이후에는 미군정은 부분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인정하고 있다 할지라도 결국은 공산주의들의 배제를 위해 꾸준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남한의 비공산계 세력을 동원하였다. 또한 이에 맞서 공산주의들도 폭력저항으로 대항했음을 볼 수 있다.2. 미군정의 정책1) 국가강제기구의 창설군부의 창설: 난립한 군사단체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통일적으로 조직된 군부로 형성되어 가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면 군대의 창설과정이 미군정에 의해 주도되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군대는 그 창설과정에서부터 반좌익 군사활동에 동원되고 있으며 또한 이를 통해 성장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정 지도자들은 인민위원회와 좌익측 군사단체인 국군준비대가 계속적으로 미군정에 공격을 가해올 것이라고 파악했으며 따라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경찰병력만 가지고는 모자라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11월 13일에는 군정법령 제 285호를 통해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육군과 해군을 두었다. 미군정 당국의 군대창설 의지는 확고한 것이었고 군대창설을 조속하게 준비하고 있었다.1946년 1월 15일 미군정은 모든 사설군사단체를 해산하고 이와 동시에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공식 발족시켰다. 한국 군부의 형성과정이 초기 미군정에서부터 준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미군정은 소련에 대항하고 남한에 좌익세력을 .
1. 식민지와 동양학재일 한국인 2세 강상중 교수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란 책은 일본에서 재일이라는 타자속에서 자신의 경험과 이론이 어울려 나온 책이다. 이 책은 타자로서 일본의 근대화를 비판하는 것은 타자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조명이었던 것이다. 강상중 교수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접한후 더 이상 서구와 중동의 지식들의 대화가 아니라 직접 우리의 문제로 전개되기 때문에 더 큰 조명을 받고 있다. 특히 4장은 그러하다. 솔직하게 적나라하게 전개되는 자신들의 모습에서, 나아가 식민지시대의 오리엔탈리즘적 지식과 권력의 문제를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나 일본 문화론 비판으로 연결시킨 능력이 더욱 돋보이는 책이다.전후 일본의 지배 엘리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변자와 상징적 인물이었던 요시다 시게루는 식민지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충만되어 있었던 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강경한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계획적으로 고취시킨 첫 세대이고 패전후 붕괴되지 않은 보수세력의 중심이었다. 또한 그의 풍부한 제국 경영의 경험이 일본주의와 국체 중심의 근대화에 관심을 갖게 했던 것이다.주한공사 재임 당시 조선의 왕비 암살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미우라 고토오는 카큐슈우인 총장으로 재임시 동양사학이란 과목을 개설했다. 이는 식민지 제국의 지리적 폭력이 지적 지배와 문화적 헤게모니라는 필터를 통해 여과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동양사학의 개척자인 시라토니 쿠라키치와의 만남은 과학적 식민이란 기획을 지원하는 유력한 학문적 담론의 준비를 말하며 실로 강력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제도들과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담론의 긴밀한 결합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런 학문적인 담론의 제도화는 식민지주의의 힘의 편제형태가 담론 권위를 획득해 감을 의미하고 여기서 동양학이 비롯되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역사를 본뜬 듯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의 지적 지배는 아시아를 자국 본위의 규율=훈련 질서의 분류체계 속에 가둬 넣으려 했던 것이다. 또한 아시아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면서 힘과 정체성을 획득하고 타자인 서양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서 동양학의 필요성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동양의 연구는 동양인이 솔선해서 맡아야 한다라고 할때 동양인은 당연히 일본인을 대신해서 쓰는 말이고 타자인 서양인에게 알린다는 이 굴절된 오리엔탈리즘 구도속에서 동양학은 그 존재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그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이룩하면서 동시에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객관적인 범주에서 벗어나고 나아가 동일성을 유지하려면 아시아에 대해 오리엔탈리즘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려는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는 지식의 형태가 동양학이었다.2. 동양의 발견과 역사의 창조만주사변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동양학도 팽창하게 된다. 만주, 만선의 심상지리속에는 그 구체적인 민족이나 주민은 존재하지 않았고 만선의 역사와 일본의 관계를 확정하고 일본 국민의 정체성과 그 역사적 사명을 밝히려는 시라토니의 기획은 아무런 저항없이 수용되었다. 이는 쇠락하고 있는 동양이라는 지정학적 영역은 동양 중에서 가장 강성한 일본속으로 흡수당하여 일본사의 한 가지로서만 존재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동양을 둘러싼 시라토리의 담론이 동일성과 차이의 굴절된 관계를 바탕으로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에게 타자란 구미를 가리키며 역사와의 대화는 그들 사이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으로 토로하는데 만주사변 이후 구미와의 대화도 단절되어 일본의 이야기만이 독백처럼 맴돌고 있다는 모순이 동양학에 내재되어 있었다.고토오는 국제관계의 경색과 일본 국내의 혼란된 세태를 주시하면서 자아를 잊어버리고 서양의 모방적 문명에 심취하여 일본 민족 본연의 진정한 자아를 돌보지 않았기에 현재 일본이 곤경에 처한다고 했다. 즉 자기 도취적 민족적 정체성이 그 곤경을 부채질 한다는 것이다.동양사란 용어는 근대 일본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서의 일본의 위치에 대한 일본의 관점이 가진 가장 애매한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동양이란 범주자체가 차이와 동일성을 어떻게 유화시킬 것인가 하는 비서구 사회의 공통된 고뇌속에서 창출된 상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공간속에서 일본의 역사의 기원을 찾고 또한 서양과의 대등한 대화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서양의 기원인 오리엔트를 자신의 과거의 기반으로 삼으면서 동양을 서양과의 비교와 경합의 장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근대적이고 동양적인 국민으로서 자신들의 감각을 만들어 내고자 했던 것이다. 4. 동일성과 차이 속에 일본시라토니는 일본 민족의 이념을 역사적인 이념 즉 천황제에 기초해서 자리매김하면서 일본에 특수한 정체성을 보증할 방도를 발견하려고 했다. 그것이 보편적인 정신의 현현으로서 역사적 존재인 천황제를 초자연적 실체인 것처럼 절대적인 귀의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진보를 가져오는 궁극적인 원천이었던 것이다. 즉 유교의 근본주의 중에서 우리의 국체에 일치되지 않는 것은 교묘하게 피하면서 수용했던 것처럼 서양의 문화도 틀림없이 같은 방식으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수용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동양의 일부이면서 동양문화와 서양 문화를 혼합시켜 서양과 동일한 진보를 걸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고 이걸 위해서라도 바로 일본의 기원을 아시아의 과거 역사와 밝히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그동안의 연구와 달리 시라토니는 그 독자적인 역사-지리적 동태론에 의해서 일본의 동양을 세계사의 무대로 끌어올리고 동양을 일본과 서양의 매개적인 존재로 인식하면서 그 과거의 일반적인 틀을 아시아속에서 제공했던 것이다.그리고 그런 갈망은 결국 최종적으로 아무도 듣지 않는 스스로의 독백속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대화를 나눌 타자가 없는 세계 속에서 자기 동일성을 반복한 것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조선과 만주와 일본의 밀접한 유연관계를 밝히기 보다는 조선을 국민적인 형태를 결여한 단순한 지리적인 영역으로만 존속하게 되고 조선이나 지나의 쇠퇴와 원인을 밝히면서 동시에 계통적으로 일본이 동양의 여러나라들과 다르다는 것을 실증하려고 했다. 시라토니가 볼때 지나가 쇠퇴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북과 남의 북적과 한민족의 대립과 상극이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고 지나나 조선의 민족이나 국가가 문명의 진보에서 뒤쳐져 정체와 쇠퇴를 거듭하게 된 것은 필연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일본은 대립의 양쪽 세력을 포괄하는 이상적인 문화를 형성시켜 왔다고 자신있게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일본의 이와 같은 독자적인 이원론의 통합을 역사적으로 초역사적인 국민적 본성인 천황제를 바탕으로 이루어 낸 것으로 과거의 이상속에서 일본의 기원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타자가 없는 공허한 동일성의 원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 청소년 비행의 정의12세 이상 20세 미만의, 소년에서 청년으로 접어드는 미성년의 젊은이가 형벌 법령특별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했거나 사회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일, 또는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장래 이에 저촉되는 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모든 행위를 가리켜 청소년 비행이라고 한다.2. 청소년 비행의 발생배경1)가정적 요인가정은 기초집단으로 인간의 지능, 성격, 신체, 정서 형성의 근간이 된다.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적 대가족제도의 ‘공동사회’가 소가족과 핵가족의 과정을 거쳐 ‘이익사회’로 변화되었으며, 이러한 가족제도와 주택문화의 변화에서도 청소년 사회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가져왔다. 부부가 모두 맞벌이를 하면서 가정은 점점 고유의 가정교육 기능을 상실하고 고독하고 불행한 가정과 정서적으로 불안한 가정으로 전락되어 청소년들은 불안한 가정보다는 가정 외에서 자신들의 즐겁고 새로운 생활경험을 찾으면서, 그런 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초보적인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외에도 결손가정, 가정교육에 무관심한 가정, 대화 없는 명령?경계?금지 위주의 가정, 방임?과잉보호 또는 지나친 기대를 하는 가정, 빈곤가정 등을 들 수 있다.2) 학교적 요인현대 사회에서는 지나친 입시위주의 학교 교육으로 인해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아닌, 성적순으로 매겨지는 인간관계, 대화가 없는 학교, 이러한 상황에서의 학생은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고 학교에 가기를 꺼려하며, 학교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지각 및 조퇴가 많아지는 등 학교 학급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 문제학생의 낙인을 받게 되어 비행의 첫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3) 사회적 요인청소년 비행이 사회의 산업화?공업화로 인한 사회구조의 급진적 변화에 기인한다는 주장으로 도시사회화는 최근의 청소년 비행의 양적 증가는 물론 질적 변화의 촉진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들로 사회계층에서 오는 부모의 무기력과 빈곤, 교육에서의 소외, 직업 및 생활수준의 격차에서 오는 심리적 열등감 등이 있다. 지역사회 문제에서오는 요인으로는 불량주택지?빈민가 등을 들 수 있으며 사회변동의 요인으로는 인구이동?주민의 이질성?연대의식의 결여?개인 및 가정의 고립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3. 청소년 비행의 유형 및 사례1) 강도청소년의 절도 행위는 작게는 학교주변에서 동료학생의 돈을 갈취하는 것에서부터 또래아이들과 조직을 결성하여 큰 범죄를 저지르는 등의 광범위한 형태로 존재한다. 최근에는 청소년들에게 오토바이가 인기를 끌면서 차량, 오토바이 등의 전문털이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사례 : 지난 9일 오전 11시께 북구 태전동 M주점 앞에 세워져 있던 대림 125㏄ 오토바이를 훔친 박모군(15.J공고 1년)은 훔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 가로수를 들이받는 사고를 내는 바람에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에서 박군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이 멋있게 보여 한번 타보고 싶은 호기심으로 오토바이를 훔치게 됐다"고 말했다.2) 약물복용최근 일부 연예인들 사이에서 향정신성 약물 복용이 증가하면서 대중매체를 통해 청소년들이 약물과 직접, 간접적으로 접촉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청소년들은 대부분 호기심 때문에 접착제, 본드, 신나 등을 흡입하고, 입시 등 에 대한 압박감으로 유해 약물에 손을 대기도 한다. 이러한 마약류, 환각류 뿐만 아니라 주류, 담배 등도 청소년 유해 약물이고, 지나친 음주와 흡연도 약물중독으로 본다.?사례: 중학교 1학년생인 최모군은 담배를 피우다 친구들과 함께 본드를 흡입하기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진학후 본드 흡입은 끊이지 않았고, 친구 2명과 본드흡입후 지나가는 행인에게 폭력을 가하여 경찰에게 체포, 소년원에 구금되었다. 최군은 본드없이 살 수 없다고 했으며 본드를 흡입하면 자기 손끝에서 레이져 광선이 뻗어나가 그림을 그린다는 등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3) 성 문제청소년의 성 범죄는 청소년이 가해자가 된 성폭행, 자신의 성을 파는 원조교제 등의 유형으로 존재하고, 범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성이 개방화되고 있는 사회 속에 방치되면서 순결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사례 : 18살인 지수는 돈이 필요하던 차에 또래 친구의 소개로 원조교제를 시작하게 되었고, 뒤늦게 후회를 했을 때는 이미 몸과 마음이 망가진 상태였고, 아직 어린 나이에 낙태수술도 경험하게 되었다. 지수는 주위의 눈총에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성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4) 가출청소년들의 가출은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공부나 대인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가족보다 밖에서 또래 친구들과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해서 스스로 나가는 가출과 부모의 학대나 이혼 등으로 청소년을 정신적으로 떠밀어내는 두 가지 양상으로 존재한다.*사례 : 여름 어느 날 늦은 밤에 가출한 12세의 박극태군은 배가 고파 친구 2명과 함께 불이 꺼진 슈퍼 안에 들어가기 위해 라이터를 키는 순간 슈퍼 안에 있던 주인이 유리창을 내리쳐 도망갔으나, 유리 파편이 박군의 오른쪽 눈 속으로 들어갔다. 부모님과 큰 병원으로 가야했지만 가출한 관계로 계속 방치해 둔 경과 실명하고 말았다.5) 인터넷 중독인터넷 온라인 게임이 급증하면서 약물 중독 못지 않게 인터넷에 중독된 청소년이 늘고 있다. 특히 정신적인 결함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아이가 인터넷에 빠지면 그 중독성의 강도는 더 높아 헤어 나올 수 없다고 한다. 청소년들이 인터넷 게임에 중독 되면 게임을 하기위해 학교에 가지 않게 되고 현실과 게임을 혼동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사례 : 고교 2년생인 성모군은 2002년 10월 17일 청주시의 한 PC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컴퓨터 앞에서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하였다. 사인은 분명치 않으나 과로사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4. 청소년 비행에 관련한 대중매체1) 인스턴트 식품과 청소년 비행한국청소년연구소 이사장인 박명윤 박사팀이 청소년들을 면접 조사한「비행청소년의 식생활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비행 청소년들은 일반 청소년들에 비해 인스턴트 식품을 훨씬 많이 먹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잘못된 식생활 습관이 주요한 원인은 안되겠지만 청소년 비행의 한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청소년들은 신체저항력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식품 첨가물과 방부제 등이 다량 함유된 식품을 장기간 과도하게 섭취하면 주의력이 흩어지고 욕구 불만이 쌓여 폭력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며 『당분이 많은 음식을 자주 먹어도 혈당치의 급격한 상승과 하강을 반복시켜 초조감을 유발, 난폭성이 나타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2) 피어싱과 청소년 비행미국 로체스트 대학의 소아과 의사인 티모시 로버트 박사에 따르면 구멍을 뚫은 10대 여성의 경우 구멍을 뚫지 않은 여성보다 흡연, 학교 결석, 성행위 등에 두 배로 더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피어싱이 직접적으로 위험한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청소년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번 조사는 적지 않은 중요성을 지닌다.
세계화의 덫1. 서 론세계화의 덫이란 책의 저자는 한스 피터 마르틴과 하랄드 슈만이란 법학자 및 공학자들이다. 그들은 10년 전부터 경제의 세계화, 환경, 정치등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함께 많은 글을 쓰고 있다. 그들은 이 책을 통해 세계화의 과정속에서 일어나는 전반적인 문제와 그 현상들을 날카롭게 비판, 지적하였다. 그리고 좀 더 냉정한 자세에서 이들의 관점이 벗어나지 않는 모습도 간간히 눈에 띈다. 하지만 이들의 책속에는 편협한 시각도 눈에 보인다. 예를 들어 4장의 늑대의 법칙에서 이들은 인도인들을 순진무구하다고 표현했다. 이 순진무구하다는 것이 그리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말은 인도인들이 우매하고 세계화의 길에 동참하기엔 아직 능력이 역부족이란 느낌마저 내포해있는 듯 하다. 그렇지만 저자들은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세계화의 물결이란 흐름을 파악하지는 않았고 그들 나름대로의 관점을 논리적으로 기술한 점이 인상적이었다.그렇다면 그들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하는 세계화란 어떤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 전에 세계화(Globalization) 란 말이 무엇일까? 이 세계화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논하기 보다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기묘한 관계와 흐름을 파악하고 그 과정과 결과에서 나타난 의미를 찾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세계화의 과정속에 보이지 않는 힘의 원리가 작용함으로써 그 질서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 이런 위기는 전쟁이나 지구생태계 완전 파괴등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세계는- 일부 세계 질서를 개편하고 있는- 이런 위기에 대한 논의와 대책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하게 된다.그럼 본론에서는 세계화의 덫이 무엇을 말하는지 크게 정치,사회적 면과 경제적 면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자.2. 본 론1) 세계화의 덫 - 정치, 사회적 측면흔히 20 대 80의 사회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전세계 인구중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할수 있다는 말이다. 이 20%의 인구는 어떤 사람들인가? 그럼 나머지 80%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20의 인구는 흔히 잘 사는 사람들, 특권층을 의미한다. 그리고 80은 20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다. 이런 개념이 세계 경영자들 사이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세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특권 이익층을 옹호하려는 그런 주장인 셈이다. 바로 그 특권 이익층이 세계 경영자들을 뜻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시장 자본주의는 급속히 성장하여 아무런 장애도 없는 상태에 이른다. 결국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게 되고 국가는 질서유지에 큰 힘이 되질 못한다. 또한 하층민이 아닌 중산층의 위기감은 국가에 대한 불만으로 쌓이게 되고 결국 국가는 전쟁이란 돌파구를 찾게 된다.그럼 세계는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가? 이제 지구촌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모두 똑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한 위성이 지구 곳곳에 전파를 쏘아올리고 전자매체를 통해 전세계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달리 했던 구소련에서도 코카 콜라를 즐겨 먹게 되었고 거대한 매스미디어의 힘으로 미국의 헐리우드나 CNN등이 전세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상업주의적 이미지 공세로 인해 옛날처럼 사람들은 자기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소속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지구촌은 세계화란 이름아래 각 고유의 문화를 파괴하면서까지 상업주의에 물들어가는 것이다.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해 지구는 점점 좁아지게 되었고 거의 일일 영역권에 들어갔다. 때문에 세계의 도시들은 더욱 긴밀히 연결되고 발전되게 된다. 즉 도시의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현재 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은 거대 도시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태국, 싱가폴, 홍콩, 중국의 상하이등 이들 도시는 서구 여러 도시와 함께 이제 범지구적 경쟁 무대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제 세계화, 지구화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져서 감히 그 어느 누구도 따라갈수 없다. 이 지구화는 미국의 경제학자 에드워드 리트윅이 말하는 범지구적 하나의 경제 대양을 말한다. 즉 세계가 이제 하나의 시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시장일지라도 현실에서는 지구 전역에서 경제적 평준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표면상으로는 평화적인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실질적으로 하나의 시장,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들의 후진국에 대한 투자가 적어들고 많은 세계 시민들이 집권층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래서 19세기나 20세기초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국가와 국가간 대립과 마찰이 아니라 각 나라안의 각 지역과 집단의 대립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젠 어떤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다양한 문명들 사이에 생겨나는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문제들이 우리의 미래를 규정할 기준이 되는 것이다.그리고 또하나의 큰 문제인 환경문제는 우리에게 쉽게 잊혀진다. 자동차의 급증으로 인한 대기오염과 생태계 변화로 인해 지구가 썩어가고 있다. 자연 파괴를 바탕으로 한 고도 물질 문명의 발달은 지구촌의 한계라는 인류의 위기를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구 밀도가 높은 신흥 개발 도상국에서의 환경오염은 심각히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런 위기가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촌은 각각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기에 자연은 그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다.미국등을 위시한 선진국들은 세계화의 흐름에 있어서 독자적 노선을 자주 걷는다. 가난한국가에 대한 심각성보다는 자국의 이익만을 바라는 태도를 보면서 과연 이런 선진국들도 주변 여러나라들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지 모르겠다. 세계화는 몇몇에 의해서만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2) 세계화의 덫 - 경제적 측면미국의 실리콘 벨리는 10년전에 인도로부터 낮은 임금으로 전문가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또한 미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 기업들에서도 인도의 자회사에게 그들의 행정 처리를 맡기기 시작했다. 스위스 항공의 대변인 크룸머를 통해 우리는 왜 인도의 인력이 수요가 많은 지 알 수 있다. 스위스인 한명의 비용이면 인도인을 세명을 고용할 수 있다. 즉 인도의 노동자들은 높은 영어의 수준과 더불어 인건비가 절감되는 효과가 있었다. 즉 비용 문제로 인해 세계는 각처에 자신들의 자회사를 설립하고 그곳을 바탕으로 경제력을 넓혀 가는 것이다. 개인적 의견일지 모르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지구촌은 하나의 경제권을 갖고 하나의 시장을 갖는다. 따라서 경제적 마찰과 갈등은 계속되며 통합을 앞당기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그러나 이런 고도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산업 분야에서 고용은 심각한 가치 하락과 합리화의 끝없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일자리의 급격한 소멸은 세계경제의 경기 상승과 상관없이 아니, 경기 상승에도 불구하고, 얼마전까지 평생고용을 약속했던 업종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공공서비스 부문에서도 이런 위협을 받고 있다. 국제적 선도기업의 생산성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독일과 유럽 기업에서는 앞으로 심각한 실업이 예상된다. 독일과 유럽연합은 현재의 국제경쟁하에서 배고픈 늑대들에게 기름진 먹이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1948년 미국과 서유럽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을 체결했는데 이로써 참가국들은 처음으로 공동의 국제무역체제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 후 진행된 협상 결과로 GATT 회원국간에는 관세를 낮추어 왔다. 이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한 후 각 국은 관세 장벽을 낮추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역 장벽들, 예컨데 국가의 독점이나 기술법규들과 같은 장애물들을 허물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도시로 본 중세 유럽1. 서 론도시로 본 중세 유럽 의 저자는 1907년에 태어나 자아르브뤼켄 대학과 본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에디트 엔넨이란 학자이다. 그는 중세 유럽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앤그렛 심스와 프리드리히 프린츠 교수의 선행연구에 큰 덕을 입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겸손함을 보이며 중세 성기 프랑스 도시체제의 역사 연구에 임했다. 또한 그가 만난 많은 사람들과의 대화와 토론이 바로 저무는 중세에 관한 장을 다시 한번 증보케 한 원동력이라 강조한다.그렇다면 중세의 도시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흔히 교회, 첨탑, 성, 기사등을 연상하면 중세 유럽을 떠올린다. 기독교 신상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던 1,000년 우리는 흔히 이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만큼 중세는 가치절하되어 있으며 중세를 암흑의 시대, 낭만의 시대라고 보는 것은 금물이다. 중세에는 삶의 처절한 고통과 더불어 내일을 여는 약동하는 힘이 꿈틀대고 있었다. 또한 그것들의 중심지가 바로 도시였던 것이다. 중세의 도시는 자유의 공간이었다. 특수한 도시법, 시참사회에 의한 자치, 상업과 제조업의 분업경제는 이 자유공간의 핵심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도시주민은 상인이었다. 그들은 도시의 부를 유지시키는 부의 근원이었다. 이들은 부에 걸맞는 사회적 자유와 지위를 원했으며 자취쟁취가 그들의 목표였다. 중세 도시는 그 자체로서는 존립할 수 없었다. 언제나 주변세계와의 연계속에서 존재했다. 중세도시의 기틀은 인구의 증가와 농업생산성의 증대였다. 그리고 중세도시의 존속은 농촌인구의 흡수로 인해 가능해졌다. 비록 성벽에 갇혀 있는 공간이었지만 도시는 경제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심지어 문화적으로도 주변세계와 함께 호흡했다.중세도시, 이는 그리 간단한 사회가 아니다. 중세 성기 발전의 총제적 결과물이자 근대사회의 모태가 된 도시는 우리에게 낯설다. 그것은 강한 국가권력이 형성되지 못한 중세사회에서 생겨난 특이한 현상이다. 조선사회에서 자치를 누리던 공간이 있었는가? 우리 역사에 중세도시에 비길 만한 현상은 살고 있었다. 우리는 유럽 중세도시의 시장경제와 교환경제를 농업경제의 배후에서 그리고 그것과의 상호 영향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앞서와 같이 힘든 경작 상황에서 개간에 힘쓴 농민에게는 혜택이 보장되었다. 인구증가로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유출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중세 전기간을 통틀어 도시는 농촌에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의 증가를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었고 도시와 농촌간의 경제적 교환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숫적으로 적은 상부계층, 즉 귀족과 교회의 사치품 수요가 교역의 주축을 이루던 시대는 지나갔다. 보다 자유롭고 보다 편안한 삶, 보다 안전한 삶을 위해 도시는 농촌주민의 이주를 유혹했다. 그런 경향은 너무나 심해서 토지영주들은 무력으로 혹은 환심을 사서 이농을 저지하려고 노력했다.2) 중세도시와 시장보다 심도 있는 도시와 농촌간의 교역은 시장취락자들의 증대를 가져왔다. 10세기 독일제국에서는 시장법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10∼11세기에 걸쳐 관대한 왕의 시장정책은 라인강, 도나우강, 엘베강 사이에 있는 지역에서 특별한 형태의 시장 을 창출해냈다. 이 특별한 시장은 관세 및 화폐와 결합되면서 시장교역을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공납을 내야 하는 것으로 만들었으나, 다른 한편으론 그를 위해 시장교역을 감시하고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시장방문자들과 시장지역은 왕의 보호를 받았다. 시장특권과 결합되면서 한정된 관할 구역이 왕의 명령에 의거하여 특별한 법률 아래 놓이게 되었던 사실은 후대의 도시법을 위한 물질적이고, 행정구역에 적합한 전제요건을 창출했다. 오토 왕조 시대에 이미 막데부르크에서는 상인들 자신이 시장특허장의 수령장들이었다. 그것은 곧 시장생활이 일방적인 지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장원영주에게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시장의 영업은 키비타스 혹은 포르투스에서 상인과 시장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수공업자들은 도시로 이주했고 도시의 인구는 그들에 의해서 충당되었다. 장원영주적인 수공업대경영에서 여성노동이레타 섬 정복, 그리고 1015∼1016년 피사와 제노아에 의한 사르디니아 섬의 정복으로 이탈리아인의 교역로가 활짝 열리게 되었을 때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다. 신흥도시인 베네치아는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성공적으로 교역상관을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해상교역의 성황으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와 비잔틴의 통치자들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동맹상대자가 되었다. 베네치아는 당시의 세계도시이자 유례없는 세련미가 넘치고 예술과 공예수공업의 본거지인 비잔틴, 발칸 반도의 슬라브 세계, 그리고 서방세계 사이를 중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베네치아는 992년 비잔틴의 통치자들로부터 교역을 위한 중대한 완화조치들을 받아낼 수 있었다. 1082년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비잔틴이 위기에 빠졌을 때는 비잔틴의 황제로부터 황금칙서를 쟁취했다. 이 황금칙서와 더불어 베네치아의 1차 도약의 시기는 막을 내렸다.아팔피는 동방교역에서 제 2의 자리로 부각되었다. 베네치아처럼 아말피는 비잔틴 제국에 속해 있으면서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향후했다. 아말피인들은 나폴리에서 눈부신 활동을 했고 콘스탄티노플, 안티옥, 예루살렘, 이집트에 그들의 정주지들을 마련했으며 모슬렘 지배하의 스페인과도 교역관계를 유지했다. 바위산으로 배후지와 차단되어 있는 이 작은 도시로 보자면 그것은 놀라우면서도 정력적인 팽창이었다. 그러나 노르만의 정복으로 도시의 발전은 일단 급격히 기세가 꺽였고 콘스탄티노플의 정주지는 베네치아인들에게 통합되었다.아풀리엔(Apulien) 지방은 가장 오래전부터 사라센인들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다. 비잔틴은 거점도시인 바라를 소유하는데 안간힘을 썼으며 그리하여 바리는 가혹한 통치로 주민들을 괴롭혔던 비잔틴 총독이 거처하는 도시가 되었다. 아풀리엔의 해안도시들은 분명히 성지순례를 위해 애용되는 순례자 항구이자 교역지를 겸하고 있었다.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로마는 중요한 소비의 중심지였다. 당시에 소비의 가장 큰 주체는 교황청의 궁정이었다. 또한 교황청은 기독교인의 위대한 순례성지 가운데 하나였다. 흔히 은 교역특권을 향후했다.남프랑스와 스페인의 시장은 9세기에 사라센인들의 위협 아래 시달렸다. 838년 마르세이유가 함락되었고, 바르셀로나가 852년과 958년에 점령당했으며 880년대에는 히에레스와 프레후스 부근의 프락시네툼 사이에 정주하고 있던 스페인의 사라센인들에 의해서 이곳은 물론이고 배후지까지 약탈되었다. 973년 비로소 아를르의 백작 빌헬름이 프락시네툼을 점령하여 파괴할 수 있었다. 11세기에 경제 생활이 다시 전개되었다. 11세기 상업의 부활은 의마할 바 없이 번성하는 도시의 경제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는 11세기의 교역이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성황을 이루었던 원거리 교역과는 전혀 다르게 도시의 수출영업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런 발전은 다음 수세기에 걸쳐 계속되고 교역과 수공업은 이제 어디서나 도시적인 직업이 되었다. 도시와 농촌간의 분업이 진행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도시의 시장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를 경제생활의 중심지로 만드는 요소는 이제 원거리교역이 아닌 시장이었던 것이다.4) 도시의 성장: 지형적 이원성오토 제국의 혼란스런 형태에 얽매어 있지 않고 오히려 근대적인 지배구조의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지역에서나, 혹은 고대로부터 유래하는 지배조직을 넘겨받은 지역에서는 지배적인 요소들이 꾸준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지배자의 거주지와 슈티프트의 결합은 도시왕궁의 경우를 보면 고위 귀족은 열심히 왕의 모범을 좇는데 여념이 없었다. 플란더른의 백작과 네덜란드 남부의 다른 영주들과 유사하게 콘라드의 추종자들은 란(Lahn) 강 계곡에 위치한 림부르크, 봐일브르크, 뵈츨라에 슈티프트를 포함하는 그들의 성을 축조했다. 이런 지배적인 요소들의 복합체에서 도시가 생겨났다.로마 성벽안에 있는 주교좌와 그 앞에 생겨났던 거대한 시장시설을 갖춘 상인취락의 이원성이 엿보인다. 그러한 이원성은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트리어에서 누벽으로 에워싸인 대성당 면책특권지대와 그 앞에 형성된 시장취락에서도 이원성을 는 직물도시이기도 했다. 나아가 샤르트르에는 매우 우수한 대성당학교가 있다. 수도원들은 여전히 학문생활과 예술생활의 중요한 중심이었다. 네덜란드에 있는 성트론트 수도원처럼 경우에 따라서 수도원들이 도시발전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도시는 언제나 종교적 의례의 중심지였다. 정말이지 로마의 유산도 이 도시에서 존속했다. 이제 도시 역시 수도원이나 성과 경쟁하면서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5) 성벽 축조10세기부터 도시는 성벽을 건설함으로써 중세도시의 전형적 외형을 갖추었다. 물론 성벽은 낭만적인 아라비아의 당초문을 새겨놓은 그런 담이 아니라, 평화를 갈구하며 투쟁했지만 결국에는 획득하지 못했던 그런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보호벽이었다. 노르만, 헝가리, 사라센의 침입이 있었을 때 재건된 로마성벽이나 영주의 성이 피난처로서의 구실을 충분히 했다면, 이제는 이것들로는 수없이 많아진 인구를 가진 성벽 밖에 위치한 성곽외시를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12세기의 부르쥬, 프아티에, 디종에서는 상인취락을 도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혹은 취락의 성장에 대처하기 위하여 로바성벽들이 확장되었다.우선적으로 알프스 이북에서는 특별히 지배자의 거처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들이 석조로 지어졌다. 성, 불가침 성역, 거대한 의례건축물, 비교적 규모가 작은 교회가 이에 속했다. 또한 대체로 도시에서 지체가 높은 사람ㄷ르이 주거하는 공간이었던 석조건축물의 보급은 도시계층의 주거에 따른 위계화를 명백하게 반영하였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지중해 지역의 고대 후기적인 문화에서 유래하였던 첨탑 가옥과 회당식 가옥을 향후하기에 이르렀다. 알프스 이북의 도시는 수많은 첨탑 가옥들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반면에 프랑스의 부르군트, 르와르 강일대에는 시민적인 목조건축물이 많이 보였다. 지배계층의 주거양식 형성면에서는 첨탑가옥보다 회당식 가옥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회당식 가옥은 또한 서유럽과 중유럽의 시민과 심지어는 농민의 주택건축에 보다 더 큰 영향을 끼쳤다.도시를 둘러싸는 석조성벽이 축조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