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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품론] 김소월, 이광수의 작품론 평가B괜찮아요
    이광수(李光洙 ; 1892 ~ 1950, 평북 정주 출생)이광수는 근대 교육을 받은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역사, 문화적 전통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인물이다. 이러한 사상적 근거에서 봉건군주제의 비판이 가능했고, 그 인습적 잔재를 씻어내고 새로운 인간주의 사상을 논파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그는 이러한 주제를 보통 사람에게 알리고 펴는 방법으로는 한글로 쓴 소설의 양식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고, 에서는 근대 과학을 익히는 신교육과 자율적 연애를 통하여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주제를 다루었고, 에서는 일제에 항거하며 지주와 소작인의 예속관계에서 벗어나 자력갱생하는 근대적 농민의식을 크게 고무하는 주제를 다루었다.그런데 민족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실제적 운동의 진상은 허구의 과정을 통해 적지 않게 추상화되고 또 관념화됨으로써 작품에 제시된 사상과 독자 사이의 관계에는 어떤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후기 역사소설을 통한 접근은 초기의 관념적 계몽소설보다는 독자에게 좀 더 밀착된 감동을 제공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일찍이 이광수는 (동아일보, 1926)와 (동아일보, 1926)를 발표하여 역사소설 분야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적지않은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역사적 인물에 관한 작가의 재해석의 창의성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역사 자체의 객관적 사료와 과학적 고증을 전제로 하지 않을 때, 실현된 역사의 왜곡, 과장, 감상화하여 진실과 거리가 먼 흥미의 가치만을 드러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광복 후 그는 반민특위법(反民特委法)에 저촉되어 얼마 동안 자기에 대한 회한에 잠기었던 것 같다. 그는 이 기간 동안 , 등을 써 일제치하에서의 자신의 행적과 생각을 밝히고 있다. 물론 작가의 자기 변명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행적은 일제라는 시대 전체의 부도덕한 군사적 강압에 처한 소극적 지식인으로서의 보편적 과정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 이광수는 이러한 반성적 7세의 나이로 여수영에 부임한다. 이때 이순신은 흩어진 병선을 모아 배를 보수하는 한편, 비웃음을 무릅쓰고 거북선까지 건조하여 완성한다. 비웃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거북선은 성능에서 놀라움을 보였고, 여기서 작가는 개량에 수훈을 세운 두 조선공을 ‘귀동이’와 ‘달쇠’로 설정하여 업적을 기린다. 한편, 이 때 일본은 명과의 조공길을 핑계로 전쟁을 선포한다.(2) 경보여기서는 급보에 접하는 이야기부터 펼쳐진다.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어 18일 경상 우수사의 관에 동래성이 무너지고 잇달아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순신은 휘하의 해군을 4월 29일에 여수 본영에 집결할 것을 명한다.(3) 부산, 동래 싸움4월 12일에 일본함대는 부산진 앞 바다에 이르렀다. 부산진을 지키는 첨절제사는 이에 결전태세에 돌입하나, 기습 공격을 당해 성은 수라장이 되고 많은 병사가 도망한다. 경상 좌수영에 위급함을 전했으나 좌수사 박홍은 형세만 관망하고 병사 4만이 있어도 출전하지 않자, 군관 오억년(吳億年)이 도망가는 박홍의 등에 화살을 쏘았다. 여기서 작가는 양반들의 무책임함을 서술하고 있다. 또, 백성의 조정에 대한 신뢰와 조정의 백성에 대한 지배 논리 사이의 간극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묘사하는 모습을 보인다.(4) 달아나는 사람들동래성이 떨어지자 왜군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서울을 향해 진격하게 된다. 이에 조정은 급히 각 지역을 수비케 했으나 정규 군사가 없었으므로 각 지역의 장정을 당장에 소집한 오합지졸이었다. 여기서 조정은 작가에 의해 비판적 시각으로 기술되고 있다.(5) 상주와 충주의 싸움순변사는 상주에서 급히 백성을 모아 조련하지만, 이미 왜군이 선산에 들어왔음을 고하는 백성이 민심을 교란한다 하여 목을 치고, 다음날 왜병의 습격을 받게 되자, 혼자만 도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역시 작가는 백성의 진실한 협력을 권위로써 짓밟고 오직 개인의 목숨만 구하는 당시의 조선 관료를 비판하고 있다.(6)몽진4월 29일 탄금작전에서 신립이 패한 급보가 들어오고, 왕에게 몽진8) 출발이순신은 출병의 명을 받고 5월 4일 여수본영을 떠난다. 여기서 작가는 출정 장면을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9) 옥포 승전구원병이 삼천에 도착한 소식을 들은 후에야 원균은 어부의 복색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이광수는 두 장군의 모습을 재현하면서도, 그들의 역사적 평가에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강하게 실어 보여준다. 그리고 이순신은 이 전쟁에서 크게 이긴다.(10) 당포 승전옥포의 전승을 올린 이순신은 교만함을 경계하도록 하며 전비를 갖춘다. 여기서 작가는 이순신의 신중한 모습에 주목한다. 사천 싸움에서 이순신은 적을 유인하여 크게 이기지만, 이 싸움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는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원균은 물에 뜬 왜병의 시체를 거두어 자신의 전공을 삼는 등의 행동을 하지만, 이순신은 이를 묵인하여 두 장군의 응전 자세를 대비시킴으로써 그 가치가 드러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광수는 이렇게 해전마다 승리하는 이순신에게서 적이 육지로 도망하여 백성을 괴롭힘을 알고 반드시 바다로 유인하여 대적하는 전략을 쓰는 사실을 그의 인도주의적 애국정신과 연결해 서술하고 있다.(11) 쫓기는 길이광수는 여기서 왕의 몽진을 묘사하면서 이에 대한 백성들의 비판을 싣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작가는 선조를 책임없고 판단력이 부족한 군왕으로 그린다. 하지만, 좀 더 항전의식이 있고 애국정신이 투철한 일반 백성들, 민병장들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한계를 보이는데, 이순신이 중심인물이긴 하지만 일반 백성들의 구국 의지를 외면한 것은 다소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12) 한산도 큰 싸움왕은 명나라 원병만을 기다리며 곧 압록강을 건너야 할 위기에 처하지만, 이와 달리 이순신은 다시 한산도에서 크게 승리하고 왜의 보급로를 완전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적병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주는 인도적 교양을 갖춘 인물로 작가에 의해 묘사된다.(13) 안골포 싸움여기서도 원균의 군사들이 싸울 생각은 않고 익사한 적병의 목을 베는 데만 탐심함 휴전론을 제기한 사실에서 그 황당함을 비판한다. 이 때 왜의 계교에 의해 이순신은 처벌을 받게 되고, 이에 백성들은 군중시위까지 하지만 조정은 신경쓰지 않는다. 이 사이 이순신의 자리를 이은 원균은 정유재란에서 병력을 모두 잃고, 이순신은 백의종군하게 되는데, 조정 외의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을 존경하여 충청도 정혜사 승려가 이순신을 위해 짚신 한 켤레를 삼아 가지고 찾았으나 이미 길 떠난 뒤라 순천까지 따라와 신을 바치는 감격스러운 이야기가 있다.(16) 칠천도 대패전칠천도에서 불리함을 알고 진을 옮기려고 하였으나 원균이 듣지 않고 있다가 대패한다.(17) 남원 함락정유재란의 원군으로 온 명군은 남원에서 극심한 민폐를 끼치며 부녀자들을 겁간하였다. 이 때 왜군이 쳐들어오자 명군은 도망가고 충청도는 모두 왜에 의해 짓밟힌다.(18) 벽파정조정에서는 왜의 대거 재침과 원균이 패망했다는 급보를 접하고 이순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임명하고, 9월 16일 12척으로 왜군 함대 133척을 막아 왜장이 전사하는 전과를 올린다.(19) 죽기까지11월 19일 노량바다에서 이순신은 500여 척의 왜함대와 대적하여 200여 척을 격파하고, 작전 중 전사한다.이광수의 은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당대 양반관료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일제시대 한국의 모범적 인간상을 탐색하고 형상화할 그 자신의 내적 요망에 의하여 이순신, 원효 등의 전형적 인물을 다소 이상화된 시각에서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는 이순신을 그의 민족주의 사상을 구현한 이상적 인물로 택하여 형상화에 성공하였고, 그가 썼던 , 등과는 달리 이순신의 희생적 애국정신을 중심으로 작품을 써 기왕의 관념적 계몽주의를 적지 않게 탈피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1930년대 사실주의 소설의 한 가닥을 이루고 있다 하겠다.- 참고문헌이광수, 『이광수전집』 12권, 삼중당, 1962신동욱, 같은 책, 1994권영민, 『한국현대문학비평사』 3권, 단국대 출판부, 1982김소월(金素月 ; 1902 ~ 1935, 평 율격으로 노래했기 때문인데 이는 서정민요의 중요한 특징으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시가 형상화시킨 ‘사랑의 한’은 표층적 의미 그대로 단지 이성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식민지 치하의 어두운 민족 정서와 허무의식을 사랑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그는 1920년에 , ,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고 이어서 , , 등을 발표하였는데 모두 오산중학 재학시절에 쓴 작품이다. 상경하여 배재고보에 편입한 후 대표작 , 등 8편을 발표하였다. 22년에 , , , 떠나는 임의 앞날을 산화(散花)로 축복하는 불후의 명시 , 소설 , 산문시 , 등을 발표하여 중앙 문단의 각광을 받았다. 23년에 설움과 애한(哀恨)의 민요적 정서가 깃든 를 비롯하여 , 등을 발표하였고, 김동인(金東仁), 김찬영(金贊永), 임장화(林長和) 등과 동인으로 활동하여 자연과 인간의 영원한 거리를 보여준 를 비롯하여 , 등을 발표하였다. 25년에 처가인 구산군(龜山郡) 서산면(西山面)으로 이주하여 , , 등을 발표하였다.진달래 꽃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히 보내 드리우리다.영변(寧邊)에 약산(藥山)진달래꽃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삽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1922년 잡지 『개벽』)김소월의 은 사랑하는 님과의 이별, 혹은 사별로 인한 한을 주된 정서로 하고 있다. 여기서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던 님이 사랑이 식어 떠난다면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다고 한다. 게다가 곱기로 이름난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을 한 아름 따다가 님이 가시는 걸음마다 뿌리겠다고 한다. 여기서 진달래꽃은 화자의 마음속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재이다. ‘진달래꽃’은 흔히 두견화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견새가 한 맺힌 절규를 하면서 흘리는 핏방울이 진달래꽃으로 피어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지금 화자의 마음속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사랑하는 님이 떠나갈 때 붙잡거나 매달리지 않고, 죽어도 눈것이다.
    인문/어학| 2004.10.08| 8페이지| 1,000원| 조회(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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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교제도] 학교 급식제도에 대하여
    Ⅰ. 들어가며5월 초 처음 교생 실습을 시작할 때 그렇게 막막하게만 보였던 많은 일들이 이제는 일상에 가까워지고, 다시 며칠만 지나면 그동안 정들었던 아이들의 얼굴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에 벌써부터 가슴 한 구석이 시큰하다. 공연히 지도성 이론을 들이밀어 보자면 ‘과업 지향형’보다는 ‘인간관계에 중심을 두는’ 교사가 되고 싶었던가. 덩치는 벌써 나보다 한참 크면서도 마냥 까불기만 하는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택한 것이 매일 두 명 씩을 정해 점심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한 달을 꼬박 반 아이들과 함께 급식을 타 먹을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학교 급식행정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사실, 학부모의 도시락 준비에 대한 부담을 해소하고 성장기 학생의 건강을 정부에서 책임지겠다는 취지 하에 1992년부터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점진적으로 실시된 학교 급식은 그 실제가 어찌되었건 아래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노무현 정부의 공약으로 2003년부터 중, 고등학교에서도 전면 시행되고 있다. 그리고 내가 교생실습을 했던 능인중학교)의 경우는 2000년부터 학교 급식을 실시하고 있었다.(2003년 12월 31일 현재)이제 여기에서는 실제로 한 달 간 학생들과 함께 줄서고, 함께 먹으며 학교 급식에 대해 느꼈던 바를 바탕으로 급식의 몇 가지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그 첫 번째는 학교 급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행정 및 경영의 문제이다. 이것은 뒤이어 다룰 학교 급식의 식단 문제와도 한편으로는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한편, 학교 급식의 식단 문제에 대해서는 내 전공 분야가 아닌 영양소 분석을 통한 접근보다는 학교 역시 전체 사회 속에 위치해 있는 한 요소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덧붙여 이 글 내용의 대부분은 내가 실제로 경험하면서 느꼈던 부분과 능인 중, 고등학교에 재직 중이신 현직 선생님 몇 분께 자문을 구해서 알게 된 것들임을 밝혀둔다.Ⅱ. 학교 급식 행정의 구조적 문제원래 유치원을 중심으로 일부 이루어지던 급식이 결식아동 문제를 해결하고 올바른 식습관을 길러준다는 취지 하에 학교로 처음 도입되던 1992년에는 학교 직영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 시작 단계였던 학교 급식 시장에 선뜻 나설만한 업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현재도 초등학교의 경우 급식이 학교 직영으로 운영되는 곳이 거의 100%에 가깝다. 하지만, 1996년 ‘개정 학교 급식법’이 발현되면서 중, 고등학교의 경우 위탁 급식을 하는 곳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사실, 이는 ‘학교에 민간 투자를 확대해 교육의 경쟁력을 키운다’는 나름의 타당성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고 비용의 경제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도 거두었지만, 문제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급식 역시 교육의 일부여야 한다는 점에 있다.그렇다면 위탁 업체로는 왜 교육적인 측면을 제대로 반영하기 어려울까? 이는 학교 급식 위탁 업체와 학교, 나아가서는 교육인적자원부의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쉽게 이해가 된다. 먼저, 학교 급식 운영에는 다양하고 전문적인 지식과 관리기술 필요한데 이를 교육부의 지시가 있다고 해서 단기간에 모든 학교가 갖춘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학교 급식은 요리사만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위생, 영양, 식품, 시설 ? 설비, 재무, 인사관리 등 여러 요소가 연결되어 상호 작용하는 교육 행정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학교 측에서는 급식 전문 업체를 선정해 위탁한다면 직접 운영에 따른 모든 노력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시설은 지역 교육청에서 지원하여 지어주므로 학교 측에서는 위탁 업체에 대해 교내 시설 대여료까지 징수할 수 있어 부수입까지 생기게 된다. 시설은 어차피 교육청에서 지어준 것인데다가 관리 역시 지역 교육청의 몫이므로 학교 측에서는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단지 어떤 업체를 정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만 하면 된다. 교육감의 입장에서 보면, 학교 자율로 위탁 업체를 선정하게 함으로써 만약 급식과 관련해서 문제가 생겼을 경우 대부분의 책임을 학교로 떠넘길 수 있어 나쁘지 않다. 그리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 믿지만, 이 때 입찰 과정에서 벌어지는 급식 위탁 업체들의 로비 역시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학교 급식 시장은 언뜻 보기에는 아이들의 푼돈을 받아 쥐는 것 같아도 그 규모 면에서 결코 작지 않은 시장이기 때문이다. 한 학년 당 학생 수를 400명 정도로 볼 때 한 학교를 맡게 된다면 교직원까지 합쳐서 무려 1300명 정도의 고정 고객이 방학 2~3달을 제외한 거의 매일 한 끼 씩을 찾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더구나 이 고정 고객은 쉽게 줄지도 늘지도 않아서 처음 몇 달 동안만 식재료의 수급과 조리사, 영양사를 잘 관리한다면 이후부터는 하루 준비한 양이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당일에 해결되므로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때문에 수많은 업체들이 과도하게 가격을 내려 입찰하거나 학교장 등 관계자에게 로비를 시도하는 것이 사실이다.이 결과 파생되는 문제는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 사실, 능인 중학교의 경우 재작년부터 학교 직영으로 급식을 운영하고 있어 위탁업체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여타 학교들보다 상황이 나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식사의 질은 생각보다 많이 떨어졌고, 이것이 내가 학교 급식을 주제로 글을 쓰게 된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처음 교실에서 학생 둘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을 때 물었던 말이 ‘맛있니?’라는 것이었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이 ‘꼭 군대 적 생각나는 점심식사를 하고 왔다’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들이 한 달에 납부하는 급식비는 보통 40,000원)으로, 계산해 보면 한 끼 당 2,000원 꼴이 책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또 인건비와 몇몇 교직원, 집안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한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무료 식사를 제외한다면 순수한 식재료비 만으로는 1,700원이 채 못 된다. 하지만, 이것이 위탁업체에 의해 운영되는 다른 학교들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심각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장기로 이루어지는 위탁업체와 학교 측 간의 계약은 시설의 감가상각비용을 포함한 시설비, 인건비를 모두 부담하고도 이윤을 남겨야 하는 위탁업체의 비교육적인 운영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다고 학부모의 반발과 다른 업체들과의 경쟁을 고려할 때, 급식의 질을 높인다고 무작정 가격을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이는 결국 2003년 한 해 전국 43개교에서 4,130명의 식중독 환자 발생이라는 파행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 모든 것이 학교 급식 행정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하였던 것이다.Ⅲ. 학교 급식의 식단 문제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음식의 질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떠한 식단으로 구성되느냐의 문제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직 완전히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서양식의 육류 중심 식단 구성이 사람의 몸을 산성화하고 정신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쳐 아이들을 난폭하게 만든다는 연구까지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5월 16일 KBS 1에서 방영된 프로그램에 따르면, 실제로 광주의 한 중학교에서 친환경 유기농산물 중심으로 이루어진 식단으로 바꾸고 난 후 아이들의 급식에 대한 반응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그럼 ‘별첨’의 식단을 보자. 자세히 보면 한 달 내 거의 하루도 육류가 빠져 있는 날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들 중 반 정도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햄, 돈까스 등의 인스턴트식품이다. 그리고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러한 식단 구성에서의 인스턴트식품 편중 비율은 위탁으로 운영되던 재작년 이전의 경우 더욱 높았다고 한다. 아이들의 입맛이 예전과 달리 많이 서구화되면서 반찬 구성에서 변화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역시도 학교 급식은 교육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무시한 생각으로 보인다. 아이들에게 우리 농산물을 먹이는 것도 자칫 공허한 구호가 될 수 있는 나라 사랑을 정부가 직접 보여주는 길이 될 수 있다.물론, 값이 싼 수입 농산물을 놔두고 우리 농산물을, 그것도 아이들을 위해서 친환경 유기농산물을 먹이자고 하는 것은 경제의 논리에 따르자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일 수 있다. 또 WTO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논지를 펼 수도 있다. 그러나 WTO를 적극 옹호, 아니 주도하는 미국의 경우 정부가 지원하는 품목 뿐 아니라 학교가 자체 조달하는 모든 급식재료까지도 미국산 농산물 및 가공식품만을 사용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며, 영양관리와 식생활 교육에도 크게 신경 쓰고 있다. 급식 업무는 무조건 학교가 비영리로 직접 운영하며, 학교 안에서는 패스트푸드와 탄산음료 등을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판매하지 못한다. 청소년의 올바른 식습관 형성을 위해 강력한 규제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여 학교 인근 소농과 연계한 급식협력 시범사업을 1997년부터 시행하여, 학교-농민-지자체간 협력 강화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적극 도모하고 있다고 한다.가까운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정부 투자기관인 ?일본체육?학교건강센터?는 WTO 정부조달협정의 적용을 받고 있는데, 쌀 ? 밀가루 ? 쇠고기 ? 과실류 등을 협동조합(연합회)로부터 직접 조달 ? 공급한다. 협동조합을 통해 정부투자기관이 조달한 농산물은 WTO협정의 “내국인대우 조항”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은 1976년 쌀밥급식 시작 이후 정부미 ? 자주유통미를 할인 공급하면서, 2차대전 직후부터 지속되던 수입 탈지분유의 국고보조를 중단시켰다. 학교급식을 통해 국내농산물 수급균형을 달성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인 것이다.
    교육학| 2004.09.24| 4페이지| 1,000원| 조회(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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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행정 및 경영] 대안 학교의 재정실태 개선방안 연구
    1. 대안교육의 개념2. 대안학교의 재정 실태 및 개선방안2. 1. 대안학교의 존재의의와 재정지원의 필요성2. 2. 대안학교의 재정실태2. 3. 재정 지원 개선 방안3. 결론1. 대안교육의 개념1990대 한국교육에서 새로이 대두된 변화의 하나로 대안교육의 등장을 지적할 수 있다.) 기존의 학교교육과는 다른 다양한 교육 실천이 확산되어 가고 있고 점차 형태도 자리잡혀가고 있지만 아직 대안교육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명확하게 합의된 개념 정의는 부재하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일단 대안(代案)의 사전적 개념을 살펴봄으로 그 개념 정의에 접근해 볼 수 있겠다.사전적 의미에서 대안(代案)은 “기존의 방안을 대신할 만한 더 좋은 방안”,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대신할 다른 것”을 말한다. 한편, 정책학에서는 현재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원 가능하거나 동원된 여러 정책 수단을 뜻하고 있다.즉, 이 ‘대안’이라는 용어를 고려해서 대안교육을 이해한다면, 기존 교육과는 다른 교육으로서 현재의 학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되고 있는 다양한 교육 방법을 ‘대안교육’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학자들도 대안학교의 개념을 정의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Cooper(1994)는 대안학교를 “표준적인 공립학교들이 제공하는 전통적인 것과는 다른 경험을 추구하는 아동과 학부모들을 위하여 특별한 교수법과 프로그램, 활동, 여건 등을 제공할 수 있도록 고안된 학교” 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기존의 교육과 다르게 교육하는 학교를 대안학교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Smith(1974, 1976)의 경우, “대안적인 학교란 표준화를 지향한 획일적인 체제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다양한 형태의 학교를 말한다”고 정의하였고 학생과 부모, 교사의 자유로운 선택 가능성, 참여와 헌신에 의한 유지, 포괄적인 목적과 목표의 설정, 학교 운영의 유연성, 학생 수 200명 안쪽의 작은 규모와 그로 인한 탈 관료적 성격 등을 미국에서 1960년대 이후 등장한 대안학교들의 특징으로 들고 있다.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을 때 교사의 55.7%가 ‘정부를 포함한 교육 관청의 계속적인 재정 지원’이라고 응답하고 있다. 또한 강대중(2002)에서는 대안 학교의 설립 및 재정 부담, 운영 등에 대한 지원 방안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대안학교의 재정에 관련된 문제들이 불거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대안학교는 학생수가 적어서 재정의 자체 조달이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청에서 운영비와 인건비 전액을 지원해주지 않는 학교의 경우는 적은 학생수의 등록금으로는 학교 운영이 힘들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재정이 외부에의 지원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형태를 띄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정이 투명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의혹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둘째, 대안학교는 재정적으로 넉넉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뜻있는 사람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교 당시에 싼 값에 사들인 학교 부지와 건물이 나중에 시설 미비 및 노후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 일례로, 세인 고등학교의 경우 폐교 부지 및 건물을 사들여서 개교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새 건물 증축을 하려고 하지만 이것이 쉽게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대안학교 학생들이 가장 불만족스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안학교 교사들에게 물었을 때 38.7%가 ‘대안학교 시설의 미비’ 라고 응답한 것에서도 학교 시설이 불만족스러운 상태인 것을 알 수 있다.셋째, 대안학교는 관료주의적인 공립기관의 업무 처리 때문에 비관료주의적인 것을 지향하는 대안학교는 국가의 행정적 배려를 받기에 어려울 수 있다는 점 또한 지적해 볼 수 있겠다. 공교육 기관의 경우 교육부와 교육청이 그 재정을 주관하고 있고 대안 학교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해당 지역 교육청에서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중앙 교육 부서에서는 관료적 폐해가 발생하고 있고 국가의 행정적 외곽에 존재하기 십상인 대안학교의 경우에는 각종 혜택들에서 제외될 소지가 있다고 예측해 볼 수 밝힐 수 없다는 학교 측 입장에 고개가 갸우뚱해 질 수밖에 없었다. ‘재정’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민감한 부분인 듯했다.교육청 관련 자료에서도 11개 대안학교(특성화고등학교)에 지원하는 지원금 총액만 공개되어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느 학교에 어느 용도로 지원이 얼마만큼 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았다. 이는 교육실습 기간에 알게 된 바와 같이 학교의 위상과 교장 선생님의 능력이 교육청의 지원 여부에 큰 영향을 미쳤던 점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학교별 지원 규모가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교육청 입장에서는 공평하게 배분했더라도 모든 고등학교의 사정을 고려할 수는 없기 때문에 지원 규모는 항상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치여서, 어찌 보면 공개하지 않는 것이 현실적으로 당연시될 수 있을 것 같다.▲ 세인 고등학교 행정 부서 이병만 선생님, 수학 교과 송인석 선생님 인터뷰(조세진)세진) 재정은 어떠한 루트로 얼마만큼 지원받고 있습니까?세인학교) 전북 교육청을 통하여 다른 사립 고등학교만큼 받고 있습니다. 운영비와 인건비 100% 전북 교육청을 통하여 받고 있습니다.세진) 등록금은 얼만큼 받고 있습니까?세인학교) 분기별로 198000원씩 받고 있습니다.세진) 그렇다면 교사 월급도 일반 학교들과 동일하게 지급받고 있나요?세인학교) 네, 그렇습니다. 이전에는 교사 월급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자원봉사 차원에서 근무했었지만, 교육청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되면서부터 호봉제로, 일반 학교들과 동일하게 지급받고 있습니다.세진) 시설비도 충분히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인가요?세인학교) 시설은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학교 부지 및 강의실은 폐교를 매입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빔 프로젝터의 경우에는 한 대도 없는 등, 시설이 많이 열악한 상태입니다. 시설 지원이 많이 필요한 상태입니다.세진) 교사 분들이 십일조처럼 학교 운영비를 위해 투자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는데요.세인학교) 그렇지는 않고요, 교사 월 재정은 다른 공, 사립학교와 똑같습니다. 즉, 먼저 교육부에 명목을 분명히 하여 신청하고, 주로 교장의 재량 여하에 따라 순위가 정해져 예산이 배당되는 거죠.주현) 소위 말하는 ‘예산을 얼마 따 낸다’는 거네요.간디학교) 네, 맞습니다.주현) 그 과정에서 혹시 대안학교에 대해 주어지는 불이익 혹은 특혜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까? 지금은 예전과 달리 간디학교처럼 일부 대안학교는 특성화 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제도권 교육 속에 따로 편입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간디학교) 특성화 고등학교라고 해서 주어지는 특별한 재정지원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아직은 학교의 인지도도 떨어지고, 대안학교의 출발 자체가 제도 교육에 대한 일종의 반발 같은 것이었던 만큼 교육부의 입장에서 우리 학교에 더 많은 재정을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일지 모릅니다.주현) 그럼 교육청에서 주어지는 지원금은 제대로 나오나요?간디학교) 액수로 따진다면 더 적겠죠. 일단 학교의 규모가 적은데다가 학생을 모집할 때 역시 전국에 있는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지방 교육청에서 별로 의무를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주현) 네, 그렇군요. 재정 면에서 어려움이 많으시겠네요. 근무하는 교사 역시 열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면 힘들 것 같고요. 그렇다면 그 부족한 재정은 어떤 방식으로 보충되고 있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간디학교) 사실은 이렇습니다.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후원회를 조직하고 있는데요, 일반인들이 한 구좌씩을 개설해 주는 겁니다. 그리고 학부모들 역시 각 분기마다 등록금 외에 20만원 정도를 다른 명목으로 내고 있습니다. 교사들의 월급 일부분 역시 학교 재정에 보태기 위해 다시 내놓고 있는 실정입니다.이상이 인터뷰 과정에서 들을 수 있었던 내용이다. 그런데 만약 교육청으로부터 주어지는 재정 지원이 그렇게 부족한 실정이라면 학생들이 부담해야 하는 돈 역시 적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들 학교는 그 위치적 특성상 기숙사 체제로 운영되니 그 부담은 더하지 않을까중학교 졸업자, 이용비용: 기숙사 200,000(월), 수업료 정규학교와 동일한빛고등학교061-383-8340517-920전남 담양군 대전면 행성리 11비용: 기숙사 230,000(월), 수업료 200,350(1기분)경주화랑고등학교054-771-2355780-890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학리 333비용: 기숙사 250.000 수업료 214.200간디계절학교(숲속마을작은학교)055-973-1049 /9989666-960경남 산청군 신안면 외송리 122간디농장초등학교3-6학년생(40여명씩2회) 초등학생계절학교:7박8일(200.000), 중학교1-3학년생(20여명)간디학교055-973-1049 /8124666-960경남 산청군 신안면 외송리 122중1 및 고1이 될 나이의 남녀 청소년 각 20명 이하 비용: 기숙사 190.000(월) 수업료 150.000(월)거창고등학교055-944-3755670-800경남 거창군 거창읍 중앙리 387예비고등학교 비용: 매년 변동 수업료 정규학교와 동일원경고등학교055-933-2019678-830경남 합천군 적중면 황정리 292중학교 졸업자 및 졸업 예정자, 중도탈락자(편입가능) 비용: 190.000(월) 수업료사실, 등록금의 규모는 각 학교마다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렇게 등록금만으로는 시설을 증축한다거나 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다. 인건비 외 앞서의 표에서도 보았던 것처럼 운영비와 시설비로 들어가는 돈이 결코 적지 않은데, 그것이 요즘처럼 너도 나도 멀티미디어 교육을 마땅히 지향해야 할 길로 부르짖는 현실에서는 더욱 문제가 된다. 한 예로 아래의 표에서 보듯 앞서 보았던 성지고등학교의 경우 대안 교실을 운영하기 위해 구입한 기자재의 종류 또한 적지 않다.[표 9] 성지고등학교의 대안 교실 운영 관련 기자재 구비그렇다면 이런 시설 면에 대해 소위 대안학교의 졸업생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래는 이와 관련한 거창고등학교 졸업생과의 인터뷰이다. 사실, 거창고등학교는 넓은 의미에서의 대안학교로 우리가 다루었던 분있다.
    교육학| 2004.06.18| 21페이지| 1,500원| 조회(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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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연명의 <귀거래사> 평가A좋아요
    도연명의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97101-006 김주현{도연명이 거나하게 취해 귀가하는 장면. ▲ 들어가며 - 陶淵明의 生涯언어를 배제한 문학이 있을 수 없듯 삶을 배제한 문학 역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문학을 언어의 예술이라 규정하더라도 삶의 반영 이라는 명제 역시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선 그의 작품활동이 어떠한 환경 여건하에 있었는가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 짧은 보고서의 시작을 열까 한다.도연명은 동진(東晋)시대에 태어났는데, 이 시기는 왕실과 사족들의 세력이 약화되고 차츰 군벌들이 대두하기 시작한 때였으며 특히 그의 나이 30세 이후에는 군벌세력에 의해 사회가 좌우되던 시기였다. 이것이 그의 나이 40세 즈음에 이르게 되면 군벌들의 손에 왕이 유폐(幽閉)되거나 시살(弑殺)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그들 군벌들 서로도 엎치락 뒤치락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외부로부터의 이민족의 침략과 내부에서의 농민봉기 등이 끊이질 않아 백성들의 생활은 말 그대로 도탄(塗炭)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던 때였다.{) 이병한, 陶淵明 五言詩 硏究 - 主題思想과 意想, 1989, p.10바로 이 때 그는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평택현의 현령(縣令)을 사임한 후 다시는 관계에 나가지 않았는데, 그 퇴관 성명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여기서 다룰 귀거래사(歸去來辭) 이다. 그는 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향리에서 민간인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활로부터 그대로 뽑아올려진 마음의 이야기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것과 같은 귀족생활의 여유 있는 유희문학(遊戱文學)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양(梁)나라 종영(鍾嶸)의 시품(詩品) 에서 “고금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종(宗)”이라 평가까지 받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한편, 도연명이 생존했던 시대는 사상적으로 儒·佛·道 三家의 융합시기에 해당된다. 그는 이러한 시대적·사상적 조류 속에서 모든 영향을 약간의 편차를 두고 받으면서 묵가(墨家)의 사상도 수용하고 있는데, 유가적 요소로는 낙천지명(樂天知名)과방장관, 현리. 한서에는 녹봉 육백석 이상을 장리라 했다., 脫然有懷{) 脫然有懷(탈연유해) : 자기도 선뜻 나서서 벼슬할 생각을 가졌다. 脫然은 서슴치 않고., 求之靡途. 會有四方之事, 諸侯以惠愛德, 家叔{) 家叔(가숙) : 설이 두 가지가 있어 도홍(陶弘)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도기(陶 )라는 설을 따랐다.以余貧苦, 遂見用於小邑{) 小邑(소읍) : 작은 현, 즉 평택으로 알려져 있다..친고다권여위장리, 탈연유회, 구지미도. 회유사방지사, 제후이혜애덕, 가숙이여빈고, 수견용어소읍.친척이나 벗들이 모두 나에게 벼슬을 하라고 권했으며, 나도 서슴지 않고 그렇게 하고자 벼슬을 구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 변이 자주 일어나 사방에서 일을 할 자리가 났고, 또 실권을 잡은 제후들은 남에게 혜택과 인애를 베풀어 민덕을 얻고자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의 숙부가 가난으로 고생하는 나를 위해 길을 터서 마침내 조그만 고을에 벼슬을 얻어 주었다.於時風波未淨{) 風波未淨(풍파미정) : 밖으로는 오호(五胡)가 북에서 난동했고 안으로는 환현(桓玄)과 유유(劉裕)가 무력적 쿠데타를 일으켰던 시기이다., 心憚遠役, 彭澤去家百里, 公田之利, 足以爲酒, 故便求之.어시풍파미정, 심탄원역, 팽택거가백리, 공전지리, 족이위주, 고변구지.당시는 아직도 세상이 평온하지 못하였으므로, 멀리 가서 벼슬을 하기에는 마음이 꺼림직했다. 허나 평택은 집에서 백 리의 거리였고 공전의 수확이 족히 술을 빚어 마실 만 하였으므로, 평택령을 승낙했다.及少日, 眷然{) 眷然(권연) : 몹시, 열심히有歸與之情, 何則, 質性自然, 非矯勵所得, 飢凍雖切, 違己交病.급소일, 권연유귀여지정, 하즉, 질성자연, 비교려소득, 기동수절, 위기교병.그러나 (벼슬을 한지) 며칠이 못 되어서 즉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유인즉, 나의 본성과 성품이 자연을 닮게 태어났으니, 억지로 교정하거나 독려해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비록 굶주림과 추위에 절박하게 몰렸다 할지라도 내 자신을 어기1세 때이다.歲十一月也.{) 도연명이 80여일만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온 까닭은 단지 누이동생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상관인 독우(督郵 : 감찰관)가 순시를 오면서 도연명에게 의관속대하고 나와 맞으라고 했다. 이에 도연명은 나는 쌀 다섯 말 때문에 촌뜨기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 고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중추지동, 재관팔십여일, 인사순심, 명편왈귀거래혜, 을사세십일월야.음력 8월에서 겨울까지 벼슬에 있은 지 80여일이었으니, 뜻밖의 일로 해서 나의 마음을 좇았던 것이다. 그리고 을사년 11월, 한편의 글을 지어 라 이름지었다.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귀거래혜, 전원장무호불귀.돌아가자, 전원이 장차 황폐해지려 하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는가?旣自以心爲形後, 奚而獨悲. 개자이심위형후, 해추창이독비.이미 내 마음 몸을 위해 제껴 두었거늘, 무엇 때문에 실망하여 홀로 슬퍼하는가?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오이왕지불간, 지래자지가추.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고, 장래의 일은 올바로 좇을 수 있음을 알았으니,寔迷途其未遠, 覺今是而昨非. 식미도기미원, 각금시이작비.실로 길 잘못 들어 멀어지지 않고, 지금이 옳고 지난날 틀렸음을 깨달았네.舟搖搖以輕 , 風飄飄而吹衣. 주요요이경양, 풍표표이취의.조각배 흔들흔들 가벼이 출렁이고, 바람은 펄펄 옷깃을 날리네.問征夫以前路, 恨晨光之熹微. 문정부이전로, 항신광지희미.길가는 사람에게 갈 길 물어가며, 새벽빛 밝지 않아 (앞길을 내다보지 못함이) 아쉬워하네.乃瞻衡宇, 載欣載奔. 내첨형우, 재흔재분.멀리 집을 바라보고는 기쁨에 달려가니業歡迎, 稚子候門. 동업환영, 치자후문.하인들이 반겨 맞아주고 어린 자식들 문앞에 기다리고 있네.三徑{) 前漢의 장후(蔣)가 松徑, 竹徑, 菊徑의 세 길을 만들었음. 후에 은사의 거처를 三徑이라고 함就荒, 松菊猶存. 삼경취황, 송국유존.뜰엔 풀이 우거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옛과 같이 있구나.幼入室, 有酒盈. 휴유입실, 유주영준.아이들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니 술통, 復駕言兮焉求. 세여아이상위, 복가언혜언구.세상과 나와는 서로 등지자. 다시 수레 몰고 나가 무엇을 구하겠는가.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열친척지정화, 악금서이소우.친척들의 정다운 얘기 기쁘고, 금과 책 즐기니 시름이 사라지네.農人告余而春兮, 將有事乎西疇. 농인고여이춘혜, 장유사호서주농군들이 내게 봄 온 것 일러주니, 장차 서쪽 밭에 나가 일이나 해야겠구나.或命巾車, 或棹孤舟. 혹명건차, 혹도고주.혹은 수레를 타고, 혹은 또 배를 저어旣窈窕以尋壑, 亦崎嶇而經丘. 기요조이심학, 역기구이경구.깊은 골짜기를 찾아가기도 하고, 또는 높고 낮은 언덕 오르기도 하네.木欣欣而向榮, 泉涓涓而始流. 목흔흔이향영, 천연연이시류나무들 싱싱하니 즐거운 듯 뻗어나 자라고 샘물은 졸졸 흐르기 시작하는구나.善萬物之得時, 感吾生之行休. 선만물지득시, 감오생지행휴.만물이 때를 만나 변화함을 부러워하며, 내 삶이 종점으로 감을 느끼네.已矣乎, 寓形宇內復幾時. 이의호, 우형우내부기시.아서라, 천지간에 어리석은 몸뚱이 담을 날 다시 얼마나 되리.曷不委心任去留, 胡爲乎遑遑欲何之. 갈불위심임거류, 호위호황황욕하지.어찌 섭리에 마음을 맡기고 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겁지겁 바라고 욕심낼 것이 뭐가 있겠는가.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부귀비오원, 제향불가기.부귀도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오, 천제가 사는 천국도 기대하지 않는다네.懷良辰以孤征, 或植杖而耘 . 회량신이고정, 혹식장이운자.좋은 철 즐기며 혼자 나서서 거닐고, 때로 지팡이를 세워놓고 풀 뽑기 김매기 하고,登東 以舒嘯, 臨淸流而賦詩. 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동쪽 언덕에 올라 긴 휘파람 불어보고, 맑은 시냇물에 이르러 시를 지어본다.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요승화이귀진, 락부천명부해의.모름지기 자연 변화 따르다 목숨 다할 것이니, 주어진 운명 즐기는데 더 무얼 의심하랴.▲ 도연명의 문학세계 - 한국의 시가와 비교하여도연명(陶淵明)은 중국 문학사에 있어 전원생활을 주요 소재로 대량의 작품을 창작한 최고의 시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의 어휘의 구사가 정치(精緻)하고 주도면밀하다. 이는 마치 솜씨 좋은 장인이 도끼를 쓸 때 인위적으로 베고 판 흔적을 볼 수 없음과 같다. 라고 했던 견해를 참고해도 좋을 것이다.{) 東坡曰, 淵明時初看若散緩, 熟看有奇句. 如曰,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所寓得基妙, 造語精到. 似大匠運斤, 不見斧鑿之痕. 시의 함축미란 뜻은 바로 이런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그러한 도연명의 시는 우리나라의 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 시적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자연애와 자연귀의는 유교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또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시의 주제사상을 결정짓는 담론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시어 속에 녹아있는 언어와 문자행위가 가치관, 세계관의 차이까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말만 하더라도 새끼 개 라고 하는 것과 개 새끼 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우리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외국인들에게 이 두 말은 그저 순서만 바꾼 같은 뜻의 문자 자체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문자는 중국의 것을 빌려 썼다고 할지라도 이중적으로 말만은 우리 고유의 것이었기에 거기서 나타나는 차이 역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언어와 문자가 일원화되는 개화기 이후의 우리 시에서도 그제껏 중국의 그것과는 또 다르게 형성되어 온 우리네 전원귀향의 시에서 보이는 원형이 그대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뜨락을 속세 밖에 마련하고서 園從塵外卜집은 물가를 향하여 지었도다 家向水邊成정취를 느끼니 홀로 사는 것이 즐겁고 有趣孤棲樂구함이 없으니 만사가 홀가분하구나 無求萬事輕五侯池館이 빼어나다고 하지만 五侯池館勝이 한가롭고 맑음에 어찌 비하리 爭比此閒淸 (退溪)이 한 수의 시는 객관적 서경이 구체적이지 못하여, 오직 제 1, 2구에서 그 정황만을 묘사하였지만 퇴계가 거처하는 곳의 閒淸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퇴계는 개관적 서경으로서의 맑은 물소리를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인문/어학| 2001.10.04| 6페이지| 1,000원| 조회(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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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운형에 대해서
    1.소년 시절과 그의 수학(修學)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은 1886년 음력 4월 22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출생했을 때 그의 가문의 경제적 가세는 이미 상당히 기울어져 있었으나, 신분은 이 지방 일대 최고 지위의 양반 가문이었다. 이 집안은 이 지방에 9대에 걸쳐 살면서 유학과 유교를 시봉해 왔었으나 19세기 중엽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 의 시대를 만나 역사의 큰 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하였다.몇가지 측기할 만한 사항을 적어 보면 먼저 여운형의 중부 여승현이 이찍 동학에 입도하여 간부가 된 관계로 여운형의 조부형제와 부친 형제가 모두 한 때 동학도가 되었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여운형이 9세때인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운동이 일러나고 동학농민군이 패전한 후에는 여운형의 가문은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어 충청북도 단양의 시골로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많은 고초를 겪게 되었다.여운형은 조부의 슬하에서 6세부터 14세까지 한문 공부를 하다가 여운형의 부친의 반대를 무릎쓰고 15세가 되는 1900년에 배재학당에 입학, 신학문 공부를 하게 되었다. 배재학당에서 1년을 공부한 뒤 여운형은 그 곳의 각종 요구가 싫어서 민영환이 설립한 사립흥화학교에 진학하였으며 또 다시 1년 뒤 관립우체학교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 5조약' 체결 강요와 국권침탈이 있자, 졸업 1개월을 앞두고 여운형은 일제 지배하의 통신원 관리가 될 수 없다 하며 이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 무렵 여운형은 아내, 조부, 모친과 사별했다.2. 신민회 계통의 애국 계몽 활동여운형은 1906(21세)년부터 국권회복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국권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상동교회에 나가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이 때 여운형은 1907년 4월 초에 창립된 신민회에 가입했으며, 신민회 청년 회원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고 판단되어지고 있다. 여운형이 신민회 회원으로서 구한말에 전개한 애국계묫운동의 주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1) 1907년 향리 양평에 국채보상 단연동맹지회를 설립하고, 매일 장터를 찾아다니며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자는 계몽강연을 하였다. 여운형 자신도 이 때 담배를 끊어 평생 단연하였다.(2) 1907년 양평 향리에 사립 기독 관동학교를 설립하여 그 교장이 되어 신교육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3) 1910년 초 강원도 강릉의 애국청년들의 요청을 받고 강릉에 초당의숙을 설립, 신교 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4) 의병 운동에 대해서는 의병장 이강년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으며, 이강년이 여운형 에게 왕래하였다.3. 중국에의 망명과 신한청년단의 독립운동여운형은 강릉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중에 1910년 8월 일제의 '병탄' 비보를 듣고 국외에서 독립운동읠 하려고 중국에 망명하여 1924년(29세) 남경으로 가서 금릉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여운형은 1917년(32세) 금릉대학을 졸업하자, 즉시 상해로 가서 생계를 위해 미국인 목사 피치가 경영하는 『협화서국』이라고 하는 기독교서적 출판,판매공사의 위탁 판매부 주임으로 일하였다. 이 시기에 여운형은 상해에 거류하는 동포로 조직된 교민장의 단장의 일도 보았고, 한국청년들의 중국 내 입학 알선과 구미유학의 도항 절차에도 진력 협조하였다.여운형이 협화서국에서 일하고 있을 때인 1928년 7월 초에 장탁수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에 들려 여운형을 방문하였다. 두 사람은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한 결과 불가피하게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는 독립운동에 청년조직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합의에 도달하고 의기 투합하여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김철, 선우혁, 한진교,조동호 등과 협의한 결과 모두 이를 찬성했으므로 위의 6인이 모여 1918년 11월에는 당원이 약 20명으로 중가하였다. 이 작은 청년 단체가 여운형의 기민한 활동으로 3·1운동 봉기를 비롯하여 우리 민족 독립운동에 매우 큰 공헌을 하게 된 것이다.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여운형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된 크레인을 방문하여 한국민족도 파리 평화 회담에 대표를 파견하고 싶으니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여 호의적 반응을 얻어 한국민족 채표로서 김규식을 파견했다. 이러한 사실은 국내의 애국자국민들과 재일본 유학생들에게 밀사를 통하여 통보되었고, 한국인들은 신한청년당의 파견 대표 김규식의 주장이 한국 민족 전체의 의사임을 전세계에 천명하는 일을 포함하여 3·1운동을 일으킨 것이다.신한 청년당은 또한 3·1운동 봉기와 관련하여 국내에 장덕수를 파견하여 자금을 구해 왔으며, 두 번째 파견 때 장덕수는 인천에서 일제에게 체포당하게 되었다. 신한청년당은 이어서 국내에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 백남규 등을 파견하였다.한편 여운형 자신은 당시 독립 운동의 중심지로 되어 있었던 만주와 노령 지역을 찾아가 독립 운동을 대폭 고취시켰으며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 사령관 가이다 장군을 찾아가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였다. 또 일제 강점과 식민지 통치를 규탄하고 한국 독립을 역설하는 선전물을 영문으로 지어 영국, 미국, 캐나다 삼국 사령관을 찾아가서 외교,선전 활동을 했으며, 한국 독립을 역설하는 수만 장의 전단을 만들어 연합군 중에 배포하였다. 여운형은 이와 같이 만주, 노령 지역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고 포염을 출발하여 1919년 3월 6일경 하얼빈 여관에서 국내의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3월 15일경 봉촌에 이르러 국내 3·1운동의 전국적 봉기의 소식을 재확인하였다.여운형의 이러한 신한 청년당 활동은 3·1운동 봉기에 하나의 진원으로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여운형의 활동은 만주, 노령 지방의 독립운동을 비약적으로 고양시키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공헌을 한 것이었다. 이것만 가지고도 한국민족 독립사에서 여운형의 업적은 영원불멸의 빛나는 것이라고 누구나 말하지 낳을 수 없게 될 것이다.4. 여운형과 상해 임시정부여운형은 만주,노령으로부터 상해로 돌아오자 4월 10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처음에는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독립 사무소'를 차리고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보격적으로 논의하였고 여운형은 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임시정부가 차장제를 폐지하고 위원제를 채택했을 때는 외무부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한창호가 미국으로부터 상해로 와서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를 발족시킬 때부터는 여운형은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한국의 완전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동경에 다녀온 여운형은 국민대표회의에서 활동하였으며, 현 임시정부의 확대 개편 강화를 주장하는 '개조파'의 맹장으로서 활동하였다.5. 동경행 이후의 여운형의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여운형이 동경에 가서 독립운동 선전활동을 하고 돌아온 후 건국동맹창립 직전인 1940년까지의 중요한 몇가지 항묘만 들면 다음과 같다.1919년 7월 26일 상해 대한인거류민단의 단장에 선출되어 상해 거주 한인의 단결과 독립운동과 권익을 위해 활동하였다. 이듬해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에게 일제의 학정을 설명하는 다수의 문 서들을 전달하고 외교활동을 전개하여 그 문서들의 내용이 미국 신문들에 소개되고 미국 의원들 에 의해 미의회 속기록에 게재되게 하였다. 또 1921년 3월 상해서 조동호, 김규식 등과 함께 중 국인 친우들을 묶어 중한호조서를 조직 한·중 친선과 한국독립에 대한 많은 원조활동을 하였으 며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 3 인터내셔널 주최의)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에 신한청 년당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 독립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애한 원조를 약속받 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2년 11월 김구, 이유필, 조상섭, 최석순, 오영선, 조동호 등과 함께 한국 노병회를 창립하여 독립 전쟁을 일으켜 일본 제국주의와 결전을 시작하려고 하였고 1924년 중국 구민당에 가입하여 손문의 남방혁명군을 도와 활동하였다. 한편 1929년 6월 장개석으로부터 아시아민족대회개최와 영자신문 발간 의뢰를 받기도 하였으며 1930년에는 일제의 경성지방병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32년 7월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1933년 3월 「조선중앙일보」사장에 취임하였는데 1936년 8월 13일 베를린 올림픽대회 손기정 선수의 승리 사진을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말소하여, 이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당하고 여운형도 사장직에서 사임하였다. 그 후 1940년 2월 소위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체류하면서, 유학생 및 한국인 기독교 청년들고 접촉하여 한국 독립에 대한 정세 분석을 하였다.
    인문/어학| 2001.05.23| 4페이지| 1,000원| 조회(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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