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序論러시아 문학사는 물론이거니와 세계문학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두 작가, 도스토예프스키(Michailovitch Dostoevsky, 1821-1881)와 고골(Gogol Nikolai Vasilevich, 1809-1852). 두 작가 모두 그 문학적 천재성으로 인해 희대의 작가로, 또한 영원한 문학적 위인으로 추대 받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학적 천재성말고도 두 작가에게는 그보다 더 숙명적인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그들 문학자체의 공통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동시대의 문인들과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면서 "우리는 모두 고골의 에서 나왔다"라고 하며, 자신이 고골의 문학적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었음을 강하게 시인하였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처녀작 은 고골의 와 비교하였을 때, 빼째르부르크라는 공간이나 주인공이 처해진 상황 등 매우 비슷한 설정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고골의 문학적 특징을 그대로 재연한 것은 아니다. 그만의 문학적 세계가 고골의 문학적 세계와 만나 한층 풍요롭고 다채로운 소설이 탄생한 것이고, 그러한 측면에서 고골의 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과정이 될 것이다.필자는 그것을 비교함에 있어 첫 번째로 ; 두 소설의 공통된 배경인 빼째르부르그라는 공간의 특이성과 상징성은 무엇인지, 당시 지식들에게 있어 빼째르부르그는 어떤 함축적 의미를 가진 공간이었는지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 아까끼예비치와 제부쉬낀이라는 주인공들이 가진 공통적 특징-낮은 관등, 처량한 생활-과 다른 점들을 중심으로 두 소설을 비교·분석 할 것이다.Ⅱ. 本論1.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 - "자연파"의 문학적 특징: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비교에 들어가기 앞서, 필자는 우선 러시아 문학사조 중 하나인 '자연파'의 연원·발전과 문학적 특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 이유는,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로 불리는 19세기, 낭만주의가 리얼리즘으로 변하는 중요한 이행단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작가가 바로 고골이다. 고골의 출연과 더불어 러시아 소설은 세계문학사에서 새로운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고 당대의 문인 벨린스키는 '러시아 문학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러시아 문단은 고골과 벨린스키를 중심으로 자연파를 형성하면서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간다.자연파란 일반적으로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작가군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이 자연파에 대한 평가는 종종 엇갈렸는데 저명한 비평가 F.I.불가린은 을 검토하고 어느 잡지의 비평란에서 자연파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자연파는 '이상세계'보다는 대도시의 '저속함'을 묘사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며, 하층계급의 인간만을 묘사하는 것이 바로 자연파의 주된 특징이다."며 고골과 같은 작가들을 야유하였다. 반면에 벨린스키는 이것을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자연적인 유파"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였다. 어쨌든 자연파의 존재는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의 과도기에 놓여있으면서, 리얼리즘이 정착할 때까지를 대표하는 문예운동이라 하겠다.② 자연파의 서술양식지연파에 나타나는 주요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인공을 격하시킨다. 즉 주인공을 끌어내려 비천하게 만드는 것이다. 교육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하류층에 속한 주인공들-예를 들면 하급관리, 수공업자와 하층민 등-의 어색하고 어눌한 언어를 통해 바닥생활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로, 인간비하와 멸시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인간을 동물이나 식물에 비유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가장 추악한 면을 과감히 폭로하고 그것을 야유하거나 비웃는다. 셋째로, 현실의 밑바닥을 과장한다. 현실의 더러운 면들만을 고의로 강조하고 이것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넷째로, 인간의 생리적 현상을 강조한다. 일상생활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행위(보통 인간들의 습관적인 행동)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현실을 보다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자연파 작가들은 먹거나 마시거나 담배피우거나리 지적했듯이 두 소설은 자연파의 몇 가지 특징들을 유감없이 따르고 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하층관리의 삶을 여과 없이 사실적이고 비극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배경이 빼째르부르크라는 점은, 보다 나중에 발표된 도스토예프스키의이 고골의 영향(특히)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두 작품의 몇 가지 공통점 중에서도 특히 '빼째르부르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의 인간성과 상황'을 중심으로 두 소설에 관해 논의해보도록 하겠다.① 소설 속 빼째르부르크의 이미지 - 환상과 허위로 얼룩진…자연파 작가들이 보는 빼째르부르크의 이미지는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더 가깝다. 빼째르부르크는 뾰뜨르대제의 서구화정책 이후에 인위적,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이다. '유렵을 향해 열린 창'이라는 모토로 만들어진 이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이전과 비교해 새롭지만 그 새로움 속에 '가치의 혼란'을 느끼게 하며, 모스크바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전통과 성스러움에 비해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도시. 그것이 바로 빼째르부르크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다. 러시아의 작가들은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의 빼째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여 환상과 허위, 세속과 탐욕의 텍스트를 매우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고골의 경우 에서 택한 공간에 어울리는 시간은 대개가 밤이다. 더 이상의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시간, 날짜나 계절, 연도 등은 그의 작품에 통용되지 않는다. 고골은 흔히 앞뒤가 맞지 않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의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겨울에 외투가 다 해어졌음을 발견하고 재봉사를 찾아갔다가 외투를 새로 맞추기로 한다. 새 외투를 장만하기 위해 그는 놀라운 근검절약 정신을 발휘하는데 이렇게 돈을 다 마련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고 화자는 말한다. 그 돈으로 옷감을 산 뻬뜨로비치는 2주일 걸려 외투를 만든다. 그리고 곧이어 뻬뜨로비치가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에게 외투를 가져다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와 함께 다음과 같은 서술이 이어진다. "이 때처럼 마침 외투가 필요할 인 중에 하나이다. 고골은 자연현상 즉 빼째르부르크의 기후를 또다른 사실적 코드로 사용하고 있다. 그 도시의 불순한 기후는 러시아 문학작품에서 추위, 안개, 눈보라, 바람 그리고 홍수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역동인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특히 에서 혹한이라는 자연현상은 소설이 시작할 때 지배적이던 단조롭고 정태적인 일상을 무참하게 깨뜨리는 초자연적 힘이다. 혹한이라는 설정은 아까끼예비치에게 최대의 강적이며 궁극적으로 그를 불행으로 몰아가는 직접적 요인인 것이다. 이러한 빼째르부르크라는 도시의 악마적인 추위는 개인은 불행속에 빠뜨리는 현실인 동시에 믿을 수 없는 환상이다.또한 도스토예프스키가 바라보는 빼째르부르크의 이미지도 고골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하기 이전까지 그는 낭만적 몽상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콘스탄틴 오촘스키 저/김현택 역, 책세상동떨어진 대륙이나 먼 과거, 이국적이고 영웅적인 것들이 완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었고, 신비로운 것들에 매혹 당했었다. 하지만 그는 곧 '현실보다 환상적인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은 바로 빼째르부르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바라보는 빼째르부르크 또한 환상과 신비라는 이미지인 것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러한 환상의 이미지 내면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게되는데, 환상과 허위의 도시에서 묵묵하고 정직하며 상관에게 순종하는 어느 9등관 소녀의 보잘 것 없고 가련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소설 속 주인공인 제부쉬킨과 바렌카의 이야기이다.빼째르부르크에 사는 두 소설 속의 주인공의 "가난함"이라는 공통점 또한 작가가 바라보는 빼째르부르크의 부정적 이미지를 배가시키고 있다. 아까끼와 마까르는 싫든 좋든간에 자신의 일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그들의 생활은 궁핍하기만 하다. 특히 에서 따뜻한 외투를 사고자 하는 아까끼의 처지는 가난한 생활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이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무일한 상황에서까지 나타나고 있는데, 예를들어, 제부시킨이 상관에게 불려가는 장면은 아까끼가 상관에게 질책 받는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에서 제부시킨이 자신의 외모를 거울을 통해보는 장면에서 '다 떨어진 제복', '실에 매달려 있다가 갑자기 떨어져나간 단추를 줍는 행동'같은 것들이 흡사 의 아까끼를 연상시키게 하는 대목이다.주인공들의 외모나 상황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나가는 이야기구조 또한 매우 흡사하다. 에서 아까끼예비치는 그가 간절히 소망하는 '외투의 소유'와 더불어 새로운 인생을 맞고 있었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그는 외투를 빼앗기고 급기야는 참을 수 없는 충격으로 사망하고 만다. 의 제부시킨 역시 바렌카에 대한 사랑이 시작됨과 더불어 재탄생하게 된다. 제부시킨에게 있어 바렌카는 아까끼의 외투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그의 비극 역시 바렌카를 뺏기고 참을 수 없는 고뇌로 재기불능에 빠진다.또한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느끼는 당혹감의 모티브나 그것을 표현하는 문체에서 조차 그들의 공통점을 여지없이 드러난다. 에서 아까끼는 그의 망토를 수선하기를 완전히 거부했던 뻬뜨로비치가 왔다간 후 망연한 상태에 빠지는 장면. 그리고 에서 제부시킨이 돈을 빌리려는 희망을 안고 마르꼬프에게 가고 있는 도중 망연한 느낌을 받는 장면은 매우 흡사하다.과 는 이미 그 시대의 문학적 전형이 되어버린 '빼째르부르크의 가난한 하급관리'를 다루는데 있어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으며, 중의 몇몇 텍스트는 외투의 그것을 그대로 따온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마까르 제부시킨은 과연 제2의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우선, "아니다"이다. 두 소설속 주인공이 왜 똑같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제부시킨 역시 아끼끼예비치와 마찬가지로 소외당하고 직장에서 하는 일 이라고는 정서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아까끼와 비교해 보았을 때 전혀 다른 존재이다.적어도 제부시낀에게는 인간적 감말한다.
♠ 들어가며모든 인간의 평등한 대우와 지위를 추구하는 사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에서의 혁명으로 그 첫 번째 실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주의 정권은 2차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동유럽에서 독일까지 뿌리내리게 되고, 소련을 주축으로 하는 거대한 사회주의 블록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8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공산주의 정권이 연쇄적으로 퇴출되고, 이러한 공산주의 실험은 소련이 90년, 동구권이 50년이 채 되지 않아 막을 내린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분석이 뒤따를 수 있겠지만 우선 소비에트 체제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와 각국의 고유한 환경에 따른 변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이 보고서에서는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세부적인 것들을 순차적으로 살펴보면서 공산주의 정권의 퇴출과정과 원인을 알아 볼 것이다.♠ 소비에트 체제의 구조적 결함 - 정치적경제적 측면에서1) 경제적 측면 : 소비에트 경제체제란 기본적으로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를 반대하며, 국가경제를 상부(국가)로부터의 명령과 계획에 의해 운영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생산물의 종류와 양, 심지어 가격까지 국가가 계획하며 통제하는 엄격한 명령경제체제는 그 운영에 있어 심각한 몇 가지 문제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a. 국가계획의 불완전성공산당조직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정치국에서 선택한 산출물 등의 ‘문서’를 국가계획위원회(Gosplan)에서는 ‘수치’로 변형시켜 생산단위(기업 등)들에게 할당하였고, 국가계획위원회의 이러한 “계획목표설정기능”은 사회주의 명령경제 체제에서의 핵심기능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생산목표를 설정하는 데에 있어 생산능력의 파악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방대한 양의 정보수집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획생산목표 설정에 차질을 빚기도 했고, 그로 인한 경제적 비효율을 낳았다.b. 연성예산제약 (soft-budget constraint)의 폐해경성예산제약(‘비용’과 ‘예산’에 있어 엄격한 원칙을 지키는 것)에 반대하는 개념으로서 효율성이 떨어지는 기업이더라도 보조금이나 예산을 집행해줌으로써 자원의 낭비를 초래한다. 따라서 이러한 폐해는 소비에트 경제체제하에서 기업의 생산성을 정체후퇴시키고 자원의 효율적 사용과 배분을 방해함으로써 부족의 경제를 낳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c. 본인-대리인 문제위로부터 내려온 계획과 목표를 실천하는 대리인의 경우, 계획입안자보다 그 분야에 대하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시자의 눈을 피해 자기안위를 취하였고, 때로는 자신의 능력을 숨기기도 하면서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대리인은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할 필요가 없이 당국으로부터 내려온 목표치만 달성하면 되었기 때문에, 이 대리인 문제는 소비에트에서 경제적 비효율을 낳은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d. 인센티브의 부재인센티브의 부재에서 나타난 비효율성도 소비에트 경제의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자유경제하에서는 경제활동이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본축적이익추구를 위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개인의 경제활동에 있어 가장 직접적이고도 커다란 동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비에트경제에서는 재산의 소유가 국가였기 때문에, 경제활동에 있어 그 동기가 매우 희박했다. 기업의 책임자는 위로부터 내려온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그것의 질과 효율성은 고려하지 않았고, 기업활동도 개인의 이윤추구가 아닌,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행해졌으므로 이윤동기부여가 절대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센티브체계의 개선을 통한 이윤동기의 극대화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은 당국의 주요과제이기도 했다. 또한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다양화되어 가는 경제를 재빠르게 수용하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융통성과 개혁성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국가주도의 계획경제체제에서 “명령”은 시장의 “가격”을 대체한다. 하지만 명령은 가격에 준하는 정보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계획당국의 대리인은 기회주의적 계획안을 일삼았다. 그리고 해가 갈수록 방대해지는 정보량은 중앙계획위원회의 능력을 벗어나고 있었고, 그러한 정보의 처리에 따른 알맞은 계획의 입안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요와 공급을 무시한 행정적 가격통제”와 “연성예산제약으로 인한 기형적인 기업운영” 등은 소비에트 경제가 정치논리로서 지배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고, 자원의 낭비와 비효율은 소비에트 경제의 풀리지 않는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2) 정치적 측면 : 소비에트의 정치를 가장 적절하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공산당 독재”일 것이다. 소비에트의 헌법은 공산당의 절대적인 지위와 권력을 보장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국가는 공산당 일당 독재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정치적인 자유는 원천적으로 차단되었고, 정치적인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은 국가 전반에 관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였으나, 그 폐쇄성으로 인해 지배효율성은 현저히 낮았다. 또한 그 절대적 권위와 영향력으로 인해 당은 곧 국가였으며, 당은 국가를 대체했다. 하지만 혁명이후 오랜 시간 동안 최고의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당은, 계급에 대한 부정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이념과는 동떨어지게 또 다른 특권층으로 자리 잡게 되고 권력은 결국 부패하게 된다. 한 예로, 충원명부라는 뜻을 가진 노멘클라투라는 정부요직의 자리에 배치되고 이들은 소련사회를 움직이는 지배엘리트로 자리 잡게 된다. 결국에 소련사회는 충원명부를 통해 공산당이 국가를 움직이는 형태의 기형적인 지배문화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들 노멘클라투라는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편 경제적인 부까지 거머쥐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일반 시민들의 불만과 원성을 산다. 날이 갈수록 국민들의 당에 대한 신뢰도는 낮아졌으며,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레닌주의도 정당성을 잃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다. 소비에트 정치체제 하에서의 공산당은 1당 독재의 체제적 특징을 등에 업고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동시에 부패와 비효율의 온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즉, 이러한 상태에서 당은 인민대중을 지배하는 국가권력체계로 변질되었고, 당과 대중과의 융합으로서만 유지될 수 있었던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은 원래의 성격이 왜곡된 채 당과 국가관료층의 지배체제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당과 국가 융합 체제는 대중의 존재를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대중을 단지 위로부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단순한 동원대상으로 전락시켰고, 당의 작업을 관념화시킴으로써 대중 속이 아닌 대중 위에 군림하는 당으로 변질시켰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비에트체제는 정치적경제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으며 그것은 사회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에서 더욱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레닌, 스탈린, 흐루시초프를 지나 브레즈네프까지 소련에서는 소비에트체제의 정치경제적 모순들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누적되어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발달된 사회주의’를 소련사회에 만들고자 했던 정치지도자가 바로 고르바초프이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로 대변되는 그의 정치경제사회의 개혁정책을 실행하였고, 그의 충격적인 실험과 더불어 소련의 공산주의는 급속한 몰락에 이르게 된다.♠ 소련사회를 붕괴로 이끌었던 몇 가지 요인1) 지도자의 성향 : 고르바초프 - 발달된 사회주의를 꿈꿨던 공산주의자어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80년 적은 나이에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고, 안드로포프가 집권하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며, 1985년 3월 체르넨코의 사망으로 당서기장에 선출된다. 그는 장기구조적인 소련경제의 위기를 극복하고 만연된 사회적 병리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80년대 초반부터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등의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우선, 고르바초프는 과거 스탈린 때의 잔인한 인권탄압과 각 구성공화국들의 민족자립운동, 자결권 등을 탄압했던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자신의 개혁의 정당성에 대한 국민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고자 했다. 또한 그는 극도로 폐쇄적이고 전제적이었던 공산당체제를 민주화시키고자, 당내에 선거를 도입하는 등의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조치들을 취하게 된다. 소련 공산당의 절대 권력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조항을 폐지시키며 다당제로의 개혁을 취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효율성을 확대하고자 국가의 개인에 대한 보호를 상대적으로 축소시키고, 국영기업에 대한 보조금을 삭제하며, 일정정도에 한해서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는 현실 속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중앙정부 권력이 지나치게 악화되었으며, 기득권세력의 반발이 잇따랐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과 개방의 물결은 소련 국내에서의 개혁과 개방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질서에도 큰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그가 추구했던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일련의 개혁과정은 원래 ‘재건’이라는 의미로 허약했던 소련의 사회주의를 다시 건설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가 추구했던 노선 자체의 문제, 즉,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수립은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였다. 또한 그는 개혁의 방향은 정확히 인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일관된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보수파와 급진개혁파 사이에서 두 세력과 번갈아 제휴하면서 상호 견제하게 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여 개혁자로서의 이미지를 훼손시키며, 결국은 보수파와 급진개혁파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 개혁을 위한 확실한 지지기반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결국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는 소연방을 해체시킨 가장 직접적인 촉매제가 된 셈이었다.
◎ 들어가며루마니아의 악명 높은 독재자 차우세스쿠는 30년에 가까운 긴 시간동안 루마니아를 통치했으나, 그가 서기장 자리에서 쫓겨나고 처형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타 동유럽 국가에서처럼 사회적으로 잘 조직되어 있었던 민중지식인세력도 없었고, 시민의식이 성장해 있던 것도 아니었다. 헝가리계 목사 한 명을 체포하기 위한 시도가 차우세스쿠의 처형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듯 루마니아에서의 공산당 몰락은 매우 우발적이며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났다는 특징을 가진다.그 후 이어진 루마니아의 민주화 과정도 동유럽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어진다. 공산세력이 정치권에서 퇴출되기는 커녕 좌파정권의 집권이 오랜 시간 이어지고, 시민들의 민주적 정치의식이 성장하지 못한 채 엘리트를 중심으로 한 정치가 계속 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루마니아의 민주화과정은 순조롭고 바람직한 형태라고는 볼 수 없게끔 하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이번 보고서에서는 루마니아의 민주화과정을 순차적으로 살펴보고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1990년, 첫 번째 총선과 일리에스쿠의 독주차우세스쿠 정권이 붕괴되자 전 외무부장관이었던 코르넬리우스 마네스쿠를 수반으로 하는 루마니아 구국위원회는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헌법개정 및 자유총선 실시를 골자로 하는 시국안을 발표한다. 루마니아의 새로운 민주주의적 정치체제1) 헌법 및 정부형태 : 1991.12.8. 자유 민주주의 신헌법 채택신헌법상 국가수반은 대통령, 주권의 최고 대표기관은 의회(상.하 양원), 최고 행정기관은 각료회의, 최고 사법기관은 대법원2) 대통령 : 국가수반으로서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되며 제1차 투표에서 등록된 유권자 과반수 이상의 표를 획득하면 대통령으로 당선(임기4년)3) 의회 : 국민의 의사와 주권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상.하 양원으로 구성(임기4년)4) 행정부(각료 회의) : 헌법상 최고행정집행기관인 각료회의는 총리, 각 부처 장관 등으로 구성, 총리는 의회 동의하에 대통령이 임명하며 수상과 내각은 의회에 책임을 짐.5) 사법부 : 사법부는 대법원, 각급 재판소, 검찰청으로 구성6) 정당제도 : 신헌법에서 복수 정당제 채택 혁명직후 『정당과 사회조직의 등록 및 활동에 관한 포고령』이 시행된 이후 루마니아에서는 비슷한 정강과 정책을 표방하는 150여개 정당이 난립하면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 반복, 정당 설립요건을 점차 강화하고 있는 추세임.또한 89년 12월 26일 루마니아 구국위원회는 전공산장 구국위원회 서기였던 이온 일리에스쿠를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고 1990년 1월 공산당의 해체와 함께 공산당 정치국원을 전원 투옥시킨 가운데 신정부의 정국운용계획을 발표하였다. 90년 5월 20일에는 루마니아 최초의 다당제 선거가 실시되어 일리에스쿠 임시정부 대통령이 이끄는 민족구국전선이 상원 하원 의석수의 2/3(66%)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고, 대통령 선거에서도 일리에스쿠 대통령이 총투표수의 86%를 득표하여 대총령에 당선되었다. 이에 루마니아에서는 공산당이 퇴진하고도, 또다시 좌파가 집권하게되는 특이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90년 선거를 통해 헝가리 민주동맹, 민족자유당 등의 우파 야당세력이 정치권에 등장하게 된 것은 나름의 소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표1) 1990년 루마니아 총선 결과 (자료출처 : 대외정책연구원 )정당성향총선 결과 의석수 분포하원상원합계민족구국전선(루마니아 사회민주당)좌파(여)26392355헝가리 민주동맹중도우파291241민족자유당우파29938환경운동중도우파12113민족농민당중도우파12113루마니아 통일당민족주의9211민주토지당민족주의9-9환경주의당민족주의819기타24125합계395119514그러나 총선 이후에도 야당세력들은 정부내에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비난을 가했다. 특히 91년 6월 13일 루마니아 정부가 사위대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광부들을 부쿠레슈티로 동원, 시위대와 유형충돌을 한 사건은 루마니아의 민주화 과정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야당세력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대서방 관계에까지 악영향을 끼침으로서 불안정한 정국은 계속되었다. 로만내각은 퇴진하였고 스톨라얀 신임수상이 이끄는 내각이 구성되었다. 또한 92년 지방선거에서 정치적 타격을 받은 이후 집권당이 심하게 분열을 하게 되고, 2년동안의 나쁜 경제실정과 유혈시위 등의 영향으 받아 구국전선의 인기는 하락국면을 맞게 된다. 이에 집권당은 일리에스쿠 현대통령의 지지파와 로만당수(前수상)의 지지파로 갈리게 되고, 일리에스쿠 지지세력이 탈당하여 신당을 구성한다. 일리에스쿠 중심의 신당(루마니아 사회민주당:PSDR)은 여전히 사회민주주의를 고수하는 중도좌파임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스톨라얀을 중심으로 그 동안 부진했던 경제개혁을 추진한다.◎ 두 번째 총선과 일리에스쿠의 재선루마니아는 92년 9월 27일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실시한다. 이번 선거는 일리에스쿠 정권의 점진적 개혁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구 공산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는 집권세력에 대한 진퇴를 결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좌파세력인 일리에스쿠가 61.43%, 우파세력인 콘스탄티네쿠스가 37.2%를 차지함으로 대통령에 재당선되게 된다.표2) 1992년 루마니아 총선결과정당성향총선 결과 의석분포상원하원합계루마니아사회민주당(구 민족구국전선)좌파11749166민주회의중도우파8234116루마니아 통일당중도좌파431861헝가리 민주동맹민족주의301444루마니아당중도우파271239사회노동당민족주의16622민주농민당12517합계32714347092년 선거에서도 역시 90년 총선과 마찬가지로 일리에스쿠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1990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일리에스쿠는 85%라는 경이적인 지지를 얻어 당선된 바 있으나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85%를 훨씬 밑도는 수준의 지지를 얻는데 그침으로써 많은 지지세력을 상실했다. 이는 일리에스쿠의 정치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또한 좌파정권을 표방하는 일리에스쿠의 재집권은 루마니아의 경제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었다. 공업 및 농업의 감소추세, 높은 인플레이션, 실업증가, 신규투자부진 등 국내의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개혁의지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IMF 등의 국제금융기관의 금융지원 및 서방세계의 도움이 필요했으나 일리에스쿠의 재집권은 그것을 어렵게 했다. 반공산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동유럽의 급진개혁과는 매우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정치 대 변동 이후 계속되는 루마니아의 악화된 경제사정은 국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집권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루마니아 민주화 전개중 세 번째로 실시된 96년 총선에서 드디어 우파정당이 선전하는 결과로 표출되었다.◎ 96년 총선과 정권교체총 27개 정당이 참여한 총선결과 15개 중도우파 정당들이 연합한 민주회의가 사회민주당을 제치고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정당성향정당별 의석분포상원하원합계민주회의중도우파53122175사회민주당좌파4191132사회민주동맹중도우파235376헝가리민주동맹중도우파112536대루마니아당민족주의81927민족통일당민족주의71825합계143328471표3) 96년 총선결과이렇듯 총선에서 최대야당인 민주회의가 제1당으로 부상하고 대통령선거에서도 승리로까지 몰아갈 수 있었던 것은 1989년 공산정권 붕괴이후 집권당(사회민주당)의 만연한 부패와 경제개혁의 실패 및 이로 인한 경제사정 악화로 국민들의 불만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95년 말 32%였던 인플레이션이 1996년 말 45.3%를 기록함으로써 정부가 목표했던 20%를 훨씬 초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IMF마저 루마니아에 대한 차관공급을 동결함으로써 루마니아의 경제사정은 악화된다. 이쯤 새로 당선된 콘스탄티네쿠스 대통령은 경제개혁에 대한 남다른 의지를 표시한바 있다. 시장원리에 입각한 그의 개혁안에 만족한 IMF와 IBRD도 97년 차관 제공의사를 밝혔다.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6년이 지나서야 루마니아에서는 우파정권이 성립되었다. 이는 여타의 동구라파가 좌익정권으로 회기하는 양상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1. 러시아 정교와 이꼰-러시아정교는 과거 또는 현대 러시아인들의 삶 자체에 있어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다.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인들의 사상, 생활, 문화예술 등에 있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또한 이 보고서에서 살펴보려는 성상화(이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므로 러시아 정교에 관한 간단한 언급이 필요할 것이다.① 러시아 정교의 도입980년 고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공은 키예프를 점령한 이후 키예프대공이라는 전제군주의 자리에 오른다. 블라디미르공은 초기에는 이교를 장려하여 민족의 통일을 도모하였지만 이후 러시아 루시를 국가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보다 보편적인 종교를 찾게 되었는데, 당시 유행하고 있던 동방정교, 로마 카톨릭교, 이슬람교, 유태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당시 아랍인들은 이슬람교를, 러시아 동쪽에 있는 하자르인들은 유대교를, 그리스인들은 동방정교를, 프랑크인과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로마카톨릭을 믿고 있었다.블라디미르가 이 많은 종교가운데 동방정교를 수용한 것은 무엇보다도 키예프인들의 현세지향적이며 신인동격체인 민간신앙의 전통이 그리스정교와 가장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러시아정교회는 처음부터 전통적인 민간 신앙의 기반에서 받아들어 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정교회는 국민들의 큰 저항이 없이 슬라브인들의 통합을 촉진시키는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정교가 처음부터 키예프 국가의 필요와 기존의 민간신앙 전통 위에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러시아정교는 현세 지향적인 민족신앙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② 러시아 정교의 교리러시아 정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보편주의, 상호의존성, 겸손,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평등의식과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단일한 공동체 의식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러시아인들 모두를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여기려는 러시아인의 성향은 자기희생을 통한 집단의 유지와 각각 개인의 독특한 가치의 조화에 대한 동방기독교적 확신것은 인민이라는 집단 앞에 강제로 위계화되는 것이다. 결국 개인화의 억압, 그리고 전체로서의 사회적 이익의 상징화 등이 러시아에서 전체주의적 체제를 가져 왔으며 이것은 러시아 정교의 기본 교리와도 연결되는 것이다.2. 러시아 성상화 - 성상화의 의미 및 특징신학적인 의미 없이 단지 장식용으로만 사용하던 서구 기독교와는 달리 동방정교의 성상화는 그림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 상상화는 단순히 종교에 봉사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통합적인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즉 러시아의 성상화들은 기독교성(Christianity), 즉 인간으로서의 신의 구현,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에 못 박힌 고뇌, 죽음과 지옥으로 떨어짐, 예수의 부활, 죄많은 인간에 대한 대속(구원) 설교를 통한 12사도의 전도, 성자들의 생과 투쟁, 순교, 예수의 생애,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의 죄씻음과 순례 등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하고 있다.러시아의 성상화는 12세기부터 비롯되는데 키예프의 동굴 수도원에 있던 성 알리피(St. Alipy)가 러시아 성상화의 원조라고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15세기에 들어와 성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바로 성상화가 러시아적 혼의 상징이며 러시아인들의 일상 생활과 민간 문화의 통합된 부분으로 간주되었다.러시아의 성상화 가운데에서 가장 대중적인 주제는 헌신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성모 마리아였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그리스도를 안고 내려다보고 있는 성상화는 러시아의 모든 성상화 가운데서 가장 숭배되는 그림이며, 러시아의 어머니라는 이미지, 즉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이미지를 통해 민족적 통일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성모 성상화는 중세 러시아에는 신앙과 전투, 예술과 군대 사이의 밀접한 협력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보골류프스키(Andrew Bogoliubsky)는 성모 성상화를 도시의 방어를 고취시키기 위해 1395년에 모스크바에 가져오기도 하였으며 '카잔의 성모'라숙이며 세 번 성호를 긋는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주인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고 인사를 한다.3. More Details in ① 이콘 제작의 지역별 화파들비잔틴의 이콘 제작 기술은 비잔틴 제국의 선교가 이루어진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다. 따라서 러시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그리스, 아토스, 루마니아, 폴란드 등에 전해져서 각 민족 고유의 독창력과 그에 상응하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발전되어 여러 화파를 발생시켰다.러시아의 모든 문화적 성과 중에서 이콘 만큼이나 러시아적 국민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없다. 모자이크, 또는 나무화판위에 눈부신 색깔로 그려진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자, 천사등은 종교적 정열이 일상생활의 일부였던 이 나라 국민의 신앙심을 그대로 표현해 놓았다. 이콘은 황제의 궁전에서부터 천한 농부의 보잘 것 없는 오두막집에까지도 모셔져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키에프의 블라지미르가 989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을 때 사제들과 함께 초청되어 새로운 교회의 건축과 장식을 담당하였던 비잔틴의 그리스인들에게서 이콘의 제작 기술을 배웠으나 곧 러시아 특유의 민족적 양식을 지닌 이콘들이 출현하게 되어, 슬라브 의상을 입은 생기 넘치는 상이 딱딱한 비잔틴 양식의 그림들을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콘의 깊은 종교성만은 상실되지 않았다. 따라서 완성된 이콘은 사제들에 의해서 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물감이나 붓까지도 엄숙한 축성을 받았으며 이콘 제작자 자신들도 신적인 영감에 싸여 일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1) 키에프 시대의 화파들988년 러시아의 다섯 번째 군주이며 키에프의 군주의 불라지미르(스칸디나비아 노르만 영주, 루릭 가문 출신. 성녀 올가의 손자)는 비잔틴 의식에 따라 세례를 받았고 이를 계기로 러시아 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블라지미르는 새로 건축되는 교회들을 위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건축업자, 모자이크 제조자, 이콘 화가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돕기 위해 러시아인들을 고용하여 여러 가의 침입에 의해 러시아의 수많은 도시들은 비잔틴과 발칸반도 제국과의 문화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었고, 따라서 비잔틴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민족적 특성이 강조되어 지엽적인 독자성을 형성함으로써 완전히 창작품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옛 비잔틴의 관점을 여전히 느낄 수 있었으나 엄격했던 인물묘사는 보다 가볍고 역동적인 요소와 혼합되었고, 색채도 새로운 다양성과 생동감을 얻고 있으며, 얼굴의 표정들도 보다 자연적이며 민족적 유형의 얼굴들로 전환되었다. 또 복잡하고 추상적인 상징주의를 피하고 설명이 필요없는 단순하고 쉽고, 빠르게 이해할수 있는 주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즉 이지방에서 특히 존경을 받던 농경, 목축, 상업교역을 보호하고 성인을 많이 그렸다. 예를 들면 화재를 막고자 옛날 갈멜산에서 불을 불러내린 엘리아 예언자를 진홍의 배경에 반신상으로 그리기도 했고, 금요일이 교역시장의 장날이었기 때문에 성녀 파라스케비(성 금요일을 의인화한 성녀로 그 이름 자체가 금요일이라는 의미이다)를 그렸고, 목축이나 마부의 보호자로 성 라우루스나 성 풀로루스를 그렸다. 이와 같이 비잔틴의 영향에서 벗어나 러시아의 독자적 이콘을 제작하려 하였던 것이다.12세기에는 키에프와 노브고로드 외에도 여러지방에 새로운 화파들이 생겨나고 발전하였는데 블라지미르와 수즈달, 야로슬라브, 프츠코프등이 그 중심지였다. 이들을 북러시아 화파라 부른다. 이러한 최초의 독창적인 러시아 성화 화파는 13세기 말에 수즈달에서 등장하여 14세기에 꽃을 피웠으며 15세기 초에 모스크바 화파와 합해졌다.. 블라지미르, 수즈달 화파이 화파의 절정은 1250년 경이며, 이 시기에 볼가 강 북쪽 지역에서는 데에시스 이콘들이 큰 인기를 끌어 자주 그려졌다. 그러나 블라지미르 시는 1238년과 100여년 후 타타르인에 의해 파괴되어 오늘날 순수한 이콘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블라지미르의 성화상은 비잔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귀족적이고 정교하며 우아함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부드러운 색상으로 그려졌다는 특징을 리고 사람을 많이 그려넣는 묘사가 전형적이다.② 이콘의 미학적 특징들1) 기하학적 구조이콘의 기하학적인 구조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비례'의 측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이콘들은 세워진 형태에서 2:5나 1:3의 비율을 갖추고 있으며 3:4나 4:5의 비례는 정확한 각도를 그려야 되는 거룩한 삼각형(3:4:5)으로 그렸다. 선과 호는 색이 있는 가루나 숮이 묻은 실과 끈을 이용하여 그렸다. 끈은 표면 위에 매달아 당기면서 곧은 선을 그렸다. 이렇게 하여 황금 비례를 그려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판자의 다양한 표면구조는 화가들이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일치해야 했다. 그러므로 화가들은 세밀한 부분의 주제뿐 아니라 배열 역시 중요한 요소임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성모나 예언자들의 성화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은 이등변 삼각형인데 전체적으로 이 구도는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있다. 이콘에서 사용되고 있는 미학적 구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후광이다. 그러므로 전체 작품의 기하학적 구도를 잡기 위하여 제일 먼저 후광의 크기와 위치를 결정해야 했다. 후광과 인물 얼굴의 비례적 관계는 각 시대마다 달랐다. 그러나 보통 후광의 반경은 구도의 1/6이나 1/5가 되고 후광과 머리 사이의 관계는 고정되지는 않았으나 보통 1:2, 2:3, 3:5로 하였으며 두 개의 원의 중앙은 전체 성화의 대칭축의 교차점에 위치하게 하였다. 15세기에 들어오면서 후광이 있는 성화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는데 이 때에는 텅 빈 공간을 줄여 성화의 인물이 보는 사람에게 좀더 가깝게 느껴지도록 하기 위하여 후광과 인물의 구조를 확장하기도 하였다.또한 이콘의 높이나 기본적인 비율을 계획할 때에는 각 사람들의 균형있는 배치를 중요시하였으며 많은 움직임이 요구되는 성인들의 생활 묘사 역시 이런 구조에 의해서 구성되어야 했다. 서 있는 성인들의 이콘은 세 개의 사각형의 구조에 의해 그렸는데 그 크기는 보통 1:2, 2:3, 2:5의 비율을 가지고 세워졌으며 가있다.
전교조, 尹부총리 형사 고발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시행지침에 반발해 윤덕홍 교육부총리를 2일 형사고발하고, 전교조 서울지부가 이날 오후 거리집회에 나서기로 하는 등 NEIS 파문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전교조는 이날 오전 법률적 근거도 없이 NEIS 시행을 교사들에게 강요했다는 이유로 윤부총리 등 교육부 관료 4명을 직권남용과 강요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2003. 6. 2 굳데이尹부총리 7일만에 번복…NEIS 전면시행교육인적자원부는 1일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논란과 관련해 고교 2학년 이하도 당초의 방침을 7일 만에 바꿔 NEIS를 쓸 수 있도록 허용해 사실상 NEIS의 전면 시행을 결정했다.이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합의 파기라며 집단 연가 투쟁을 예고하고 나섰다.윤덕홍(尹德弘) 교육부총리는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갖고 “NEIS의 교무·학사, 보건, 진학·입학의 3개 영역 등 인권침해 소지가 현저한 항목을 우선 삭제해 시행할 계획”이라며 “고교 3년생은 원래대로 NEIS를 전면 시행하고 고교 2년생 이하의 경우도 3개 영역은 수기를 원칙으로 하되 학교 사정에 따라 NEIS, 학교종합정보관리시스템(CS), 단독컴퓨터(SA) 중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교육부는 이달 중 법률, 정보, 교육 전문가로 정보화위원회를 구성해 NEIS 시행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며 교원단체 등 이해 당사자는 배제하고 위원 추천만 받기로 했다.윤 부총리는 “이번 결정은 합의 파기가 아니며 전교조의 연가 투쟁은 불법행위”라며 “결자해지(結者解之) 정신으로 문제를 풀겠다”고 퇴진 요구를 거부했다.전교조는 “사실상 NEIS로의 복귀이자 전교조와의 합의를 파기하고 국가인권위의 권고를 무시한 것”이라며 “9∼11일 1000명 규모의 선봉대가 징계를 각오하고 상경투쟁을 한 뒤 20일 전 조합원 연가집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는 이날 제주 제주시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NEIS를 계속 시행할 수 있도록 미뤄 교육현장이 소용돌이에 빠질 것”이라면서도 협조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한국교원노동조합은 “교육부가 최종 결정을 일선 학교에 미뤄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며 윤 부총리의 퇴진을 거듭 요구했다.2003. 6. 1. 동아일보Ⅰ. 서론NEIS 시행여부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문제제기지난 해 말, 교육부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ational Education Information System, 이하 NEIS)를 각 시도 학교에 적용하도록 조치하였고 이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및 여러 시민 사회단체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한 해를 넘기고 올 2003년 3월, 교육부는 이러한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NEIS를 강행했다.전교조는 더욱 강력하게 NEIS의 시행을 반대하며, 파업을 통한 투쟁을 불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민주노총까지 가세해 범국민 운동을 벌일 것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NEIS를 둘러싸고 전교조 교사와 교감간에 폭행사건이 일어나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렸으며, 윤덕홍 교육부총리는 NEIS의 시행에 관해 말을 번복함으로써 교원단체들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교원단체들은 하나같이 윤부총리에게 퇴진 압력을 넣고 있는 상황이다.지난 해 말부터 올해까지 NEIS의 시행을 둘러싼 교단의 갈등은 연일 탑뉴스가 되어 신문1면을 장식했는데, 이는 필자를 비롯해 이 땅의 교사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오히려 예비교사들에게는 '교육'과 '교육행정' 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각자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NEIS 시행 혹은 철폐를 주장하는 단체들 사이에서, 교육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정리해보고,NEIS가 가지는 교육적·행정적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헛된 논리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입장을 세워보는 것이 진정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개인 인권의 보호'라는 명분으로 NEIS를 반대하는 단체들과, '교육행 서로 충돌하였을 때, 어느 가치를 우선시 하고 지향하느냐는 '참여와 토론의 시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필자는 이 보고서에서 '교육'에 대한 개인적인 신념 바탕으로 NEIS 시행에 관한 소견을 전개해 나가도록 하겠다.Ⅱ. 본론1. 일선 교육행정 - 어떻게 변해 왔는가.필자가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가, 1988년이었다. 불과 15년 전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세월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정보사회가 도래했다. 선생님께서 예쁜 글씨로 손수 작성해 주셨던 꼬깃꼬깃한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서부터, 반듯하게 입력되어져서 출력한 생활기록부까지 모두 내 서랍 속에 있는 걸 보면, 교단에서도 정보사회를 향한 꽤 많은 변화가 있었나보다. 그 내용을 추려보자면 다음과 같다.1. 수기 생활기록부 : 교사들이 직접 기록부양식에 펜으로 인적사항부터 성적 등 모든 사항을 입력했던 상태.2. SA (Stand Alone) : 학교에 컴퓨터가 보급되면서부터 담임교사 컴퓨터에 생활기록부의 모든 내용을 입력하고 입력된 자료들을 디스겟 등과 같은 저장매체를 이용, 메인 컴퓨터에 자료를 축적해 처리하던 시스템 (네트워크가 구성되기 전 단계)3. CS (Client & Server) : 네트워크가 구성되면서 개별 학교마다 서버를 두고 생할기록부의 내용을 입력하고, 그 외의 학사업무(출결처리, 상담내용, 전출입처리 등)를 처리하던 방식.4. NEIS (교육정보화시스템) : CS와 마찬가지로 생활기록부를 비롯하여 전반적인 학사업무를 처리하는 시스템. 인터넷뱅킹을 하듯이 인증절차를 거친 사람들(주로 교사)이 인증서를 설치하고 아이디를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학사업무를 처리하고 관리는 전산에 관한 전문 관리자들이 각 시,도 교육청에 서버 및 전산센터를 두고 작업을 하는 시스템.위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선의 교육행정은 점차 통합적, 중앙집중적으로 변하고 있다. 자율과 자치를 존중하는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앙집중화 되는 현상. 이것이 바로 정보사회가 가지고, 교육부 스스로가 전자정부 실현의 한 분야라고 밝힌 만큼 '교육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거는 기대가 크다.교육부에 따르면, '국민과 학부모를 위한 서비스 질이 향상된다' '자녀의 학교생활을 더 잘 알 수 있다.' '선생님들의 잡무는 줄고 교육의 질은 향상된다.' '일하는 방식이 달라져 업무가 효율적으로 처리된다.' 등 NEIS가 교육현장의 효율성을 높여주고, 편리함을 가져다 준다고 말하고 있다.효율성!!! 이는 행정 및 경영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치이다. 현대산업사회가 도래하고 자본주의가 꽃을 피움에 따라 '투입에 대한 산출의 비율'을 뜻하는 효율성은 사회 전반에서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어졌고, 기업이나 정부의 활동에 있어서 경제성이나 효율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잣대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중앙집권적, 통합적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은 분명 반길만한 제도임에 틀림없다.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교육'에 관련된 정책을 경제적 잣대로만 평가할 수 는 없다는 것이다.2. NEIS - 인권이 위험하다NEIS 논란의 중심, 그것은 단연 학생의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한 개개인의 인권침해 가능성유무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금융관련 업무는 거의 대부분이 전산화 되었다. 기업활동의 효율성과 편의는 높아졌지만,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된 것이 바로 개인정보의 유출이다. 주민등록번호 등의 개인정보를 유출하기도 하고, 음지로부터 제공 받기도해서 발생하는 범죄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많아지고 있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기술이 발달한 만큼 범죄자들은 고도로 지능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여기서, 그 개인 정보가 더욱 상세하고 깊이 있는 것이라면 어떤 사회문제가 발생할까.정보는 고유한 상대성을 지닌다. '알려고 하는 자'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알리지 않으려 하는 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때, 자신의 정보를 알리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기정보에 대한 지배력은 알려고 하는 자의 욕구에 상응하는 정당성을 지닌다. 이것이 바로 정보인권이다. 정보주한다. 뿐만 아니라 정보활용의 주체가 국가와 같은 거대 권력일 때에는 개인의 존재와 권리, 인권은 위험선상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아동과 청소년은 개인정보에 대한 인식이 미약하다. 개인정보의 수집과정에서 아동 또는 청소년의 경우 자신의 정보가 어떠한 경로로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를 확인하고 검증하는 정보지배력이 성인보다 미약하다 할 수 있다. 고등한 사고를 하기에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가 바로 아동·청소년기이기 때문에, 성인은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아동·청소년들로부터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일은 명백하게 기본권의 침해이며, 더 나아가서 인권의 침해라 할 수 있다.그리고 만에 하나 이것이 외부로 유출된다면, 정보주체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남용될 수 있다는 것이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정보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개인정보유출과 관련된 문제는 더욱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다. 기업활동에 있어서의 개인정보도 외부로 유출되지 않게 온갖 기술력을 동원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된 사회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NEIS의 전면도입은 다시 한번 재고해봐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3. 교육정보 - 보호받아야 한다.필자가 중·고등학교 때, 학기 초가 되면 어김없이 학생환경조사라는 것을 했다. 여기에는 개인의 주소와 전화번호 등은 물론이고 아버지, 어머니의 직업, 집안 경제사정, 친한 친구, 본인의 장래 희망, 학급 담임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말 등등 여러 가지 항목들이 있었다. 때로는 선생님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들도 있었는데, 그래도 솔직하게 하나하나 답변했던 기억이 난다. 담임선생님은 그러한 자료를 묶어서, 선생님 책상 깊숙이 보관하고 계셨다가 상담을 할 때면 조심스레 펴보시곤 하셨다. 그런데도 필자는 그 '조사표'를 선생님이 아닌 다른 누가 볼까 조바심 내곤 했던 것 같다. 만약 그때 선생님이 나의 정보를 하나하나 NEIS상에 입력하신다는 걸 알았다면,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