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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명학 평가B괜찮아요
    양명학(陽明學)중국 명나라 중기에 태어난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이 이룩한 신유가철학(新儒家哲學). 송대에 확립된 정주이학(程朱理學)과는 대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육상산(陸象山)의 철학과 함께 심학(心學)으로도 불린다. 왕양명은 초기에 이학(理學)을 공부하다가 주자(朱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 회의를 느끼고 육상산의 설을 이어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창하고 나왔다. 즉 원리와 원리 실현의 소재[氣]를 엄격히 구별하여, 마음은 기이고 마음이 갖춘 도덕성 등의 이치는 이(理)라고 한 주자의 견해에 대하여, 만물일체와 불교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입장에서 마음이 곧 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객관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이룩하는 이론적 방법으로도 대학의 격물치지를 해석한 주자의 입장에 반대하고, 외재사물(外在事物)을 문제삼으려면 이미 마음이 발동해야 하므로 물(物)을 마음이 발동하여 이룩한 사(事)로 해석하고, 밖에 있는 이치의 파악 이전에 파악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良知)를 이룩하여 사물을 바르게 하는 방법?막?양명은 확정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인식과 실천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었으며 《전습록(傳習錄)》 권2에 의하면 “앎의 진정한 독실처(篤實處)가 곧 행(行)이요, 행함의 명각정찰처(明覺精察處)가 곧 앎이니,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 제출된 것이다. 양명학은 중국에서는 귀적파(歸寂派)·수정파(修正派)·현성파(現成派)로 삼분(三分)되어 발전되었다. 양명학이 한국에 도입된 시기는 17세기 무렵이나, 왕수인의 《전습록(傳習錄)》이 들어온 것은 중종 16년(1521) 이전으로 왕수인이 살아 있을 때이다. 그러나 그때 지식인들은 정주(程朱)의 사상계통에 치우쳐서 이와 다른 사상은 사도(邪道)로서 백안시(白眼視)하여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정제두(鄭齊斗) 등에 의해서 연학이 들어온 초기에는 그 내용이 유교사상에 대항하는 것이라 하여 이황(李滉)을 비롯하여 박세채(朴世采)·한원진(韓元震) 등에게 계속 배척을 받았다. 그 뒤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 등에!의하여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허균(許筠)·이수광 등으로 이어져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이요가 라고 주장한 것을 선조가 재상 유성룡(柳成龍)에게 언급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장유·최명길 등은 본격적으로 양명학을 수용하였고, 이것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유교철학으로서 정립시킨 것은 정제두이다. 그가 양명학에 경도(傾倒)된 이유는 는 확고한 근거에 따른 것으로, ① 주자학의 이원적 상응논리(相應論理)에 의거하지 않고 상즉논리(相卽論理)에 근본하는 일원론 ② 심즉리에 바탕하여 양지(良知)는 천리(天理)요, 천리는 양지라는 양지론(良知論)의 전개 ③ 주희(朱熹)의 이(理)를 물리(物理) 혹은 헛된 조리(條理)라고 반대하며 양명학의 이는 생리(生理)·생도(生道)·생기(生氣)라고 한 삶의 이치 등을 내세웠다. 정제두가 만든 에는 더욱 보수성이 두드러졌는데, 정주학적 허위는 비판하였으나 사상적 혁명성은 없었다. 하곡학파의 !문류(門流)에는 정통파로 통하는 이재(李材)가 있었으며, 또 양득중(梁得中)의 양지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절충설이 대두되었고, 정제두의 연고지인 강화에서는 그의 자손과 이광사(李匡師)·심육·이종휘(李鍾徽) 등이 양지사관(良知史觀)에 입각하여 역사를 파악하였을 뿐 아니라, 정음(正音)·서예(書藝)·시문(詩文)을 발전시켜 강화학파(江華學派)로서 200여 년 동안 이어졌다.이미 강화학파에서 이상학(李象學)·신작(申綽) 등이 실학을 연구하였고, 이건방(李建芳)·이충익(李忠翊) 등의 진가(眞假)추구는 실사구시의 이론적 뒷받침을 하였다.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홍대용(洪大容) 등 이른바 북학파(北學派) 또는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중심인물들도 양명학에 의하여 사상적 무장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저서에 라고 한 것과 사민평등관에 입각한 교육이념 등 도처에 양명사 사관이 신채호(申采浩)에 미친 사상적 주체성, 김택영(金澤榮)·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송진우(宋鎭禹) 등 독립운동가?“?미친 영향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김택영이 성의(誠意)가 격물치지에 앞선다고 주장하였고, 박은식이 《왕양명선생실기》와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펴내고, 정인보가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저술하여 조선혼을 환기시킨 내용 등은 양명학의 치양지의 사상이 한국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강화학파와 정제두□ 양명학(陽明學)양명학은 중국 명나라의 왕수인이 주창한 유가철학의 한 학파이다. 토지 겸병의 심화로 인한 농민봉기, 환관에 의한 전제정치, 황실과 번왕간의 충돌 등 명대 중기의 제반 사회적 위기 속에 관학인 정주학(程朱學)은 이미 규제력을 잃었다. 정주학이 당시 위기를 극복하는데 무력함을 느꼈던 사상가가 왕수인(1472∼1528년)이다. 왕수인은 주희와 육구연의 문제점을 지양하는 가운데 그의 사상체계를 형성하였다.양명학의 골자는 심즉리설(心卽理說), 치양지설(致良知說),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다. '지행합일'은 양명학의 골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지에 치중하는 주자학의 학문방법을 비난한 것이다. 양명학에서 지와 행은 하나의 체계로 함께 발전하며, 지는 행의 시작이요, 행은 지의 완성인 것이다.□ 조선의 양명학 전래조선의 양명학 전래는 왕수인의 {전습록}이 전해진 1521년경으로 볼 수 있다. 이황(李滉), 박세채(朴世采)와 한원진(韓元震)등에게 계속 배척을 받다가 남언경(南彦經)과 이요(李瑤)등에 의하여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허균(許均)과 이수광(李 光) 등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이후 장유(張維), 최명길(崔鳴吉) 등에 의하여 수용되어 정제두(鄭劑斗)에 의하여 강화학파가 성립되었다. 그로부터 이종휘(李鍾徽), 이광사(李匡師), 이충익(李忠翊), 정동유(鄭東愈), 이건창(李建昌), 이건방(李建芳), 박은식(朴殷植), 정인보(鄭寅普) 등으로 계승·발전되었다.조선에천명할 때 그의 자손과 이광서(李匡師), 이광려(李匡呂), 손서 이광명(李匡明), 다른 손서 신대우(申大羽) 등의 종형제와 심육(沈 ), 윤순(尹淳), 이진병(李震炳) 등이 모여들어 하나의 학파가 형성되었고 200년간 계속되었다. 정제두는 당시의 학자가 주자학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으로써 영달하는 데 이용하고 파당을 짓은 데 이용하였으므로 저서 {존신(存言)}에서 "오늘날에 와서 주희를 말하는 이는 주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희에 기탁하는 것이고, 주희에 기탁한 것이 아니라 주희를 부회(附會)하는 것으로 자기 생각을 성취하는 데 주희를 끼고 위엄을 짓고 그 사계(私計)를 이루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정제두는 주자학자들의 학문이 학문하는 것이 아니라 영달과 공리로 흐르는 데 반성을 촉구하였다. 역사학에 있어서는 이종휘가 양지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파악하였다. 그들은 왕수인의 양지학·심학을 기초로 하여 史學과 正音·書藝·時文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양지·정서·의지를 통일한 것이었고, 참된 것을 구하고 헛된 것을 버리는 양지학이지만 정치관으로 나타날 때에는 眞과 假라는 논리에 의거하여 노당(老黨)의 가대의(假大義) 배격을 특색으로 하였다. 그들은 모든 학문에서 양지를 심볼화하고 이미 비인간화한 사회에 도전하면서 실학파와 제휴하였는데, 특히 실학파 중에서도 북학파는 양명학을 받아들인 자취가 뚜렸하다. 그들의 학문경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첫째, 주체적인 양지사관은 이종휘로부터 이광사의 큰아들인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과 이광명의 아들 이충익(李忠翊)의 {군자지과(君子之過)}와 이면백(李勉伯)의 {감서}·{해동돈사(海東惇史)}, 그의 아들 이시원(李是遠) 의 {국조문헌(國祖文獻)}과 그것을 토대로 한 이건창의 {당의통략(黨議通略)}등의 업적이 빛나고 있다. 신채호가 이종휘의 사관을 "노예사상으로부터 주체적 사관을 수립하였다."고 한 것처럼 그들은 홀로 아는 양지사관에 근거하고 공평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이다.둘째. 우리나라의 언어인 계승하고 정동우와 유희가 더욱 발전시켰다.셋째, 백하의 서예는 이광사에 이르러 원교체로 창조되고, 이등익, 이충익과 특히 정문승의 서화는 산수화에 뛰어나{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소개되어 있다.넷째, 이광려, 이충익, 이건창은 모두 이지의 영향을 받은 공안파의 성령문학에 기본을 두고 있다. 신대우의 {이참봉문집서(李參奉文集書)}에 의하면 이광려의 글은 성령을 발휘하였다고 하였으며, 이충익의 {이참봉집서}에 의하면 문장됨이 선배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시세(時勢)에 구애되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도 바로 공안파의 문장론의 기본이었다. 이충익은 {답한생서(答韓生書)}에서 성령문학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또 글은 반드시 혜식(慧識)을 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혜식은 양지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할 수 있다.다섯째, 강화의 양명학은 실학과 제휴하였다. 이상학(李象學)은 정약용을 연구하였고, 신작(申綽)은 정약용과 교우하였으며, 정문승은 농서에, 정후일은 수학연구에 조예가 깊었다. 이들은 양지를 심볼화하여 문학·언어연구·서예·시화에서 혹은 실학에서 그것을 구체화하였다. 이건방은 그의 {원론(原論)}에서 "그 참된 것을 구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어떻게 그임을 아는가? 그가 성현의 도에 합당하지 못함을 아는 것이다. 무엇으로 그것이 성현의 도에 합당하지 않음을 아는가? 사람의 정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양지의 발휘인 일진무가를 말하였는데, 이충익도 {가설(假說)}에서 이미 진가론(眞假論)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강화학파에서 일관된 논리였다. 그리고 이건방은 송시열에 대하여 비난하기를 그는 주희의 권위를 빙자하여 오늘 한 사람을 죽이고서 이것을 대의라 하고, 내일 또 한 사람을 죽이고서 이것을 대의라고 하는 것은 도리어 주희의 죄인이요, 춘추(春秋)의 죄인이라고 공격하였다.강화학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무력함을 자각하여 실용적인 실학과 함께 역동적인 양명학이 일부 학자에 의해 연구되었던 것이다. 특히,진(眞)과 가(었다.
    인문/어학| 2001.12.06| 5페이지| 1,000원| 조회(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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