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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의 혼이 담긴 고분벽화 평가A좋아요
    Ⅰ. 서론작년 말. 중국 집안시의 고구려 고분 삼실총과 장천1호분의 벽화가 도굴되었다고 한다. 이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인의 삶과 꿈이 담겨져 있는 대서사시이며, 고구려인들의 기상과 힘을 생생히 느낄 수 있고 또 1500여년이 지난 오늘날 고구려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게 해주는 1급 사료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세계 학계로부터 예술성과 학문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세계문화유산 등록이 추진되고 있을 정도의 중요한 유적이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북한과 중국에 있는 고분벽화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이 일어났다는 점에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우리는 이 벽화들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 조상들의 생활모습을 알아보았으면 하는 점에서 이것을 채택하게 되었다.Ⅱ. 본론1. 고구려 고분벽화의 유형변천고구려 벽화의 발전단계는 인물풍속도, 인물풍속과 사신도, 사신도 이 3가지 발전 단계로 분류하기도 하고 더 세분화하여 인물풍속도 고분, 인물 풍속 및 사신도 고분, 장식 무늬 고분, 장식무늬와 사신도 고분, 사신도 고분으로 분류한다. 이 곳에서는 3가지 단계로 설명하고자 한다.전기에 해당하는 4~5세기의 인물풍속도 고분벽화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천장에는 해와 달 및 별을 그려서 천체를 표시하고, 각 벽에는 주인의 실내생활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실생활을 묘사한 장면과 각종건물을 그렸다. 그들은 여러 가지 사건을 즉흥적으로 나열하듯이 제한된 벽면에 복잡하고 다양하게 벽화를 그렸으며, 하나의 벽면에 상하좌우에 상호연관 되지 않은 장면들이 나타나고 있다. 인물을 그릴 때는 신분상의 차이를 반영하여 주인은 크게 그리고 기타 인물은 작게 그렸다. 또 벽화는 이상과 같은 일련의 제한성을 갖고 있으나, 모든 장면이 힘차게 움직여서 생동감이 있다.5~6세기 벽화 고분은 중기로 보는 인물 풍속과 사신도 고분은 인물 풍속도와 함께 사신도가 있는 고분이다. 이 고분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 고분의 것에 비해 더욱 복잡하다. 천장에는 해·달·별과 비천(飛天)·신선·사신 등을 그렸고, 또에 사신도(四神圖)도 그렸다. 인물풍속 및 사신도 고분은 여러 가지 종교적인 신앙을 반영하여 인물풍속도 고분보다 복잡한 관념세계를 반영하고 있다.후기에 해당하는 6~7세기의 고분벽화는 사신도 위주이다. 사신도 고분의 벽화내용은 인물풍속 및 사신도 고분의 것과 비교할 때 현저하게 구별되는데 중요한 차이는 현실벽면에서 인물풍속도가 완전히 제거되고 사신도가 전 벽면을 차지한다는 것이다.2. 고구려의 신화·종교1) 신화고구려 건국신화는 북방계신화로서 天父地母형이라는 구조를 지닌다. 이것은 자신이 하늘의 자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하늘의 뜻에 의해서 건국을 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서 국가 성립의 타당성을 높이는데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건국신화의 내용은 어떠하며 이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있을까?(1)천신의 자손일연의 『삼국유사』(권1, 북부여)에 인용한 「고기」에 보면 해모수와 관련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이 천신 자신이 왕이 되어 나라를 건립하고 자신은 차차 인간의 세계와 멀어지고 인간의 세계를 담당하는 것은 그 아들들에게 물려진다는 것으로 이것은 북방계 신화의 대표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천재가 흘승공성에 내려와서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컬었으며 국호를 북부여라하고 자칭 해모수라 이름하였다. 아들을 낳아 부루라하고 해로 성을 삼았다. 왕은 후에 상제의 명으로 도읍을 동부여로 옮기고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도읍을 졸본주에 정하여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다."이 이야기와 관련, 6세기 고구려 무덤벽화에는 천제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장면이 보이는데 용이 아니라 큰 새를 타고 있는데 이것은 새를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고구려인의 의식과 관련지어볼 수 있다. 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에게 하늘을 나는 새는 신과 사람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전령으로 의미되어져 왔다. 덕흥리 고분벽화에는 신령한 새와 짐승이 모두 앞방천장 궁륭부에 별자리 및 선인, 옥녀들과 함께 표현되고 있다.볼 수 있다.(2)건국신화와 음양오행설"위를 즐거워하지 않으므로 황룡을 내려보내서 왕을 맞아오게 하였다. 왕을 홀본의 동쪽언덕에서 황룡이 업고 하늘로 올라갔다. -광개토 대왕비문주몽의 최후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황룡에 관한 것으로 황룡은 5신 가운데 중앙을 지키는 신으로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주몽과 황룡은 비가 세워지던 5세기 초 고구려에 유포되고 있던 天地를 주재하는 천제의 아들이 세운 나라,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에 있는 나라로서의 高句麗觀성립의 바탕을 이루는 중심개념이다."3년 봄 3월에 황룡이 골령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이 푸르고 붉었다 - 『삼국사기』「高句麗本紀」(시조 동명성왕3년조)주몽 재위년간의 여러 가지 상서 기사가운데 가장 먼저 나타나며 그 시기가 건국기 고구려의 가장 큰 위협 세력이었던 송양국을 제압한 이후 지역패자로서의 고구려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대내외적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려는 시점이다. 이러한 점과 관련 황룡의 출현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2) 종교(1) 불교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연꽃은 불교 성립 이전부터 이집트, 인도, 중국 등지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불교에서는 연꽃을 교리를 이해하기 위한 비유의 도구와 불교 교리의 구성요소로 원용한다. 즉 연꽃은 번뇌를 벗은 수도자의 모습에 비유될 수 있고 빛과 생명의 상징, 근원 즉 여래를 상징할 수 있다.4세기의 연꽃은 고구려 초기 고분벽화에 속하는 안악 3호분 및 태성리 1호분 에서부터 나타나며 그 형태는 평면연꽃, 측면연꽃, 연봉우리가 무덤 칸의 천장과 벽, 기둥에 고르게 표현되어 있어 이미 이시기에 연꽃 표현이 어느 정도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일 수 있다.5세기의 연꽃은 크게 집안계열 고분벽화와 평양계열 고분벽화로 나누어진다. 집안계열 고분벽화의 특징은 자연계의 연꽃을 염두에 두어 실제적으로 표현되어 평양계열 고분벽화와 달리 장식적 문양화의 경향이 크지 않다. 이와 달리 평양계열 고분벽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연꽃늬의 빈번한 출연이 일어났다.6,7세기의 연꽃도 집안계열과 평양계열로 나뉜다. 집안계열 고분벽화의 특징은 집안계열의 5세기씩 연꽃 표현 방식의 후퇴되었고, 평양 계열 고분벽화의 영향 강화되었다. 그리고 인동문과 결합된 연꽃이 주류를 이루었고, 벽화고분에서의 연꽃의 비중이 저하되었다. 한편, 평양계열 고분벽화의 특징은 인동연꽃 표현방식의 일반화되었고, 중국 남북조 양식의 영향과 인동당초문화 경향을 받게 되었다.고분 벽화에서 나타나는 연꽃은 꽃의 형태는 현실세계의 피어나는 꽃을 본뜬 것이지만 그 자체는 현세보다는 내세의 존재로서의 의미를 강하게 담은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즉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연꽃은 '내세에 존재하는 하늘연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2) 사신 신앙사신은 동쪽의 청룡, 남쪽의 주작, 서쪽의 백호, 북쪽의 현무로 , 사방을 상징하고 수호하는 방위신을 말한다. 사신의 개념은 동서남북 사방의 성좌를 상징하면서 각각 용, 주작, 호랑이, 거북과 뱀이 뒤엉킨 현무 등의 동물에 연결시키고 거기에 오행의 색, 즉 푸른색, 붉은색, 흰색, 검정색을 배치하면서 등장하였다. 사신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 봄·여름·가을·겨울의 네 계절, 하늘 사방의 28별자리와 관련 있는 상상 속의 존재이다.사신도의 형상은 시대에 따라 양식상의 차이는 보이지만, 청룡은 본래가 상상의 동물로서 몸에는 뱀의 비늘로 문양을 넣고 머리에 뿔이 한두 개 돋아 있고 불을 내뿜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백호는 호랑이 얼굴에 몸에는 호피문(虎皮文)이 표현되며 날개가 달려 있고, 혀를 내밀어 위용을 나타내었다. 주작은 봉황의 모습과 유사하다. 현무는 거북과 뱀으로 표현되는데, 뱀이 거북을 휘어 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3. 고구려인의 삶1) 건물고구려의 고분벽화를 통해서 고구려의 다양한 건축 양식과 구조를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지붕의 독특함과 다양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서는 우진각지붕, 맞배지붕, 팔각지붕 등 여러 가지 형식의 지붕이 그려져 있다. 둘째, 고구려 앞 칸은 안뜰로, 북쪽회랑은 뒤뜰로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부엌, 육교, 외양간, 마구간, 방앗간, 차고, 우물 등을 그린 동쪽 곁칸은 경리용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던 구획으로 볼 수 있다. 이때까지 살펴본 벽화 고분에 그려진 건물 모습과 살림묘사는 죽어서도 현실세계에서와 같은 생활을 한다는 미신적 관념에서 주인공의 생존 당신의 사정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분벽화의 건축회화들은 당대 건축의 본래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2)옷과 꾸임새(1) 옷고구려의 남자와 여자의 기본 옷차림은 저고리와 바지였다.(여자의 경우 치마도 입었다.) 저고리에는 또한 팔 소매의 통이 좁은 것과 넓은 것, 선이 단조로운 것과 화려한 것 등의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신분상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저고리나 바지의 색상은 흰색·검정색·붉은색·자주색·청색·녹색·황색 등으로 다양하며, 형형색색의 바탕 위에는 구름·기하점 등 각종 무늬가 놓여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외출을 할 때 겉옷으로서 두루마기 내지 덧저고리를 걸쳤다. 이들 겉옷도 저고리와 바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민들이 입는 것은 통이 좁고 소박하며 지배계급들은 통이 넓고 화려하다.(2) 모자와 신발모자는 본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장식적인 효과에 신분 표시적인 기능을 했다. 남자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건(巾)은 수건과 같은 형태의 천으로 머리를 싸고 뒤에서 묶는 방식의 초보적인 모자를 가리킨다. 절풍(折風)은 삼각형으로 된, 전후 평면의 마름모꼴모자이다. 대개는 서민들이나, 일부 하급관리들이 사용하였다. 조우관(鳥羽冠)은 절풍에 아름다운 새의 깃털이나 짐승의 꼬리털을 삽입하여 멋을 낸 모자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귀족들이 사용했다. 책( )은 문무(文武)관의 의례용 모자로 주로 사용되었다. 앞부분이 모자테보다 한 단이 높고, 앞부분보다 더 높은 뒷부분이 두 가닥으로 갈라지면서 앞으로 구부러진 형태의 책과 뒤 운두가 뾰족하게 솟은 책의 두 종류가 있다. 뒤 운두가 솟은 책은 주로 무사들이 썼다.
    인문/어학| 2002.05.17| 5페이지| 1,000원| 조회(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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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잃어버린 영토발해와 역사찾기
    서론발해는 698년도에 건국이 되어 926년도 거의 230년을 지탱한 나라이다. 하지만 발해는 자신들이 직접 남긴 역사서가 없는 관계로『구당서』나『신당서』등의 외국열전에 실린 간략한 소개가 전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발해사를 보는 시각은 모두 다르다. 중국은 56개의 소수민족으로 말미암아 현재 중국의 영토에 포함된 지역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에 귀속된다는 일종의 원칙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발해사를 자국의 소수민족사로 인식했으며, 러시아 역시 소수 민족사로 발해사를 평가하고 있다. 남·북한 역시 발해사를 자국사로 인식하고 일본에서는 발해의 그 당시 상황으로 인하여 발해를 조공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에서도 발해사는 정치적인 영향이 아주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함부로 발해사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해관계 속에서 우리 조에서는 발해를 고구려를 잇는 우리나라의 역사로 인식, 그 전제 하에서 발해 건국 세력의 종족 계통에 대해서 발해의 건국과 발전, 그리고 발해의 대외관계, 발해의 멸망과 멸망원인에 대해서 발표를 하겠습니다.1. 발해 건국세력의 종족계통 (한규철교수 학설 중심으로)1) 발해사 연구의 문제점발해사 연구의 핵심 쟁점은 발해문화와 민족의 계승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남북한은 발해사를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사로 보면서, 신라와 발해가 양립하였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라 부른다. 이와 같은 주장은 『구당서(舊唐書)』에 대조영 등이 '고려별종(高(句)麗別種)'이란 부분과 발굴유적에서 발해문화가 고구려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데 연유한다. 그러나 한국의 일반적 정설로 되어 있는 발해의 이원적 주민구성론으로 다수의 말갈을 인정하는 교과서적 견해와, 말갈이 범칭이며 타칭으로 발해말갈인은 예맥족의 후손이자 고구려의 후손으로 보아야 한다는 한규철선생의 견해(1988)가 대립되어 있다.2) 종족계통상에서의 발해인발해의 주민은 지배층이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이 고구려계와 다른 말갈인들이었다고 하는 견해가 반영하고 있는 종족계통은 숙에 보이는 바와 같이, 경주가 신라의 다른 이름으로 쓰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사실을 고구려에 미루어 보면, 고구려사람 하면 평양 중심이었지 않았을까 한다. 이러한 왕조중심적 차별의식은 결국 『삼국사기』가 말갈을 B.C년간부터 10세기까지 삼국의 변방주민들로 등장시켰던 것이이라고 주장한다.요컨대, 발해건국의 주체가 되었던 속말인(속말말갈)과 백산인(흑수말갈) 등의 종족적 계통은 고구려인과 같은 예맥계였으며, 이들을 말갈로 기록하였던 것은 중국인들의 만주주민들에 대한 비칭이자, 고구려 피지배주민들을 도성중심의 고구려인과 구별하여 기록하였던 결과였다.3) 언어계통 상에서의 발해인발해의 언어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증거는 없다. 다만, 발해인들은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고, 문자 및 전적[書記]도 상당히 있다『구당서』"고 전하고, "그 나라 사람들은 왕을 일컬어 '가독부(可毒夫), 또는 '성왕(聖王)', 또는 '기하(基下)'라하고, 명(命)은 '효(敎)'라하며, 왕의 아버지는 '노왕(老王)', 어머니는 '태비(太妃)', 아내는 '귀비(貴妃)', 장자는 '부왕(副王)', 다른 아들들은 '왕자(王子)'라 한다 -『신당서』-"라고 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그리고 발해유적 발굴과정에서 400여개의 '문자기와'가 발견되었고, 그 중에서 150여개의 문자와 부호가 발견된 것으로 조사·보고되고 있다. 이 중에서 몇 종의 '수이자(殊異字)'는 발해가 한자를 기초로 하여 만든 글자라 하고, 이를 '발해문자'를 인정하였다. 발해적 문자기와 출토와『구당서』등의 기록은, 발해 언어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즉, 이것은 발해가 결코 한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근거이기도 하다.4) 문화계통 상에서의 발해인발해가 지배층 세력이 고구려계였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강서큰무덤, 진파리1호무덤, 통구사신무덤 등과 발해의 정혜공주묘를 비롯한 육정산 고분군과 삼령둔 및 북대 고분 등 고분축조 및 성곽 축성방법 등에서는 비교적 고구려의 고유성이 년, 거란족 출신인 이진충(李盡忠)이 그의 처남 손만영(孫萬榮)은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반항하면서, 결국 조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하는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 고구려 왕족의 혈통인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말갈족의 수장이라고 하는 걸사비우(乞四比羽)가 각각 그들의 세력을 이끌고 반란에 참가하였다.당의 측천무후는 이러한 반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군사를 보내어 진압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란의 중심이었던 이진충은 사망하였지만, 당나라는 반기를 든 무리들을 진압하기 위해 거란족 출신의 장군인 이해고(李偕固)를 대장군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 이해고는 걸사비우의 말갈족을 물리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내륙 깊숙이 들어가 지리적 이점을 안고 저항하는 걸걸중상에게는 크게 패하여 겨우 도망쳐갈 수밖에 없었다. 당의 원정군을 물리치고 의기충천한 반란군은 천연의 요새인 동모산(東牟山) 기슭의 분지를 도읍지로 하여 새나라 진(震)을 세운 것이다. 건국자는 걸걸중상의 장남인 대조영(大祚榮)으로 알려져 있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흥을 외치며 점차 지배지역을 넓혀 나갔다.발해의 초기 근거지는 정확히 동모산의 동쪽 기슭으로, 현재의 길림성 돈화현 근처였다. 이곳은 당나라의 군사력이 미치기 힘든 천연의 요새였는데, 이 곳을 근거지로 하여 719년에는 옛 고구려 땅의 북반부를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시대에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터전이었던 요동지방과, 평양을 포함한 반도 북서부 지방은 지배권에 넣지 못하였다. 발해의 국명이 '진(震)'에서 '발해(渤海)'로 바뀐 것은 발해(渤海)라는 용어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에 싸인 바다의 명칭으로서, 이것을 국호로 택하게 된 것은 당나라와의 외교적 타협 결과였다. 이는 당나라가 대조영을 '좌해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左駭衛員外大將軍 渤海郡王)'으로 책봉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대조영이 책봉 과정에서 주어진 내키지 않는 칭호를 감수한 것도 따지고 보면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동지역을 되찾고자 하는 의욕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3.였던 것 같다. 문왕의 시호가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었는데 대흥(大興)과 보역(寶曆)은 문왕대의 연호였고, 금륜성법(金輪聖法)은 불교적 의미를 띤 것으로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념을 상징한다. 이로써 문왕은 정복군주로서 천하에 정법(正法)을 시행하는 이상적인 군주임을 자임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불교를 독실히 신봉하였음과 함께 당시 발해의 불교계 또한 왕의 권위를 높이고 이를 신성화하는 데 충실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8세기 후반 관료조직이 확충되고 왕권이 강화되자, 이를 바탕으로 문왕은 황제를 뜻하는 황상(皇上)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771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는 일본은 구생관계(舅甥關係)라 하였고 스스로 천손(天孫)이라 칭하였다. 당시 발해의 중앙관제·지방제도·수도의 도시 구획 등은 일단 외형상 당의 그것을 방불케 하는 매우 세련된 면모를 갖추었다. 신개척지에서 기존의 전통과 제도적 유산의 제약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면서 새로이 국가를 건설해 나갔기 때문에, 당의 문물제도를 모방하는 작업을 보다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4. 발해의 대외적 팽창발해국 창건 이후의 동방의 복잡한 정세는 발해국으로 하여금 국가의 유지, 공고화를 위하여 대외적으로 많은 관심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그것은 당시 동방에 대한 침략의도를 버리지 않고 있던 당나라의 대외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발해의 고왕 대조영은 벌써 건국 첫해인 698년에 멀리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도모할 것을 제의하였으며, 돌궐은 이에 적극 찬성하였다. 이리하여 북방의 발해·돌궐·거란·해·습 등은 당나라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밑에서 당나라는 발해를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던 종래의 정책을 일시 완화하고 그를 회유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발해 고왕도 당나라 제의를 받아들이고 자기의 둘째 아들 문예를 답례사절로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그 후 문예는 이른바 '숙위'라는 이름으로 일정한 기간 당나라의 수도 장안(오늘의 서안)에 머물러 있게 되었고 발해·당 두 나라사 문왕시대의 3경 외에 다시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와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를 더하여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이름으로 전국을 통치하게 되어 이 선왕시대의 재위 10년에 이른바 '해동성국(海東盛國)'을 이룩하였던 것이다.5.발해의 대외관계1) 일본과의 외교군사적 목적으로서의 외교727년 가을에 파견된 사찰단은 영원장군(寧遠將軍) 고인의(高仁義)를 우두머리로 한 2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8명만 에도에 도착한다. 왜 발해는 일본에 사찰단을 파견했을까? 그 이유는 727년에 무예왕이 흑수부족(黑水部族)까지 그 지배 하에 두려고 하다가 그에 반대하는 아우 문예(門藝)와 싸워, 그것이 흑수부족과 손을 잡은 당과의 대립 항쟁으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에 발해와 그 국경을 접하고 있는 흑수부족, 당, 신라의 모든 것과 대립관계에 빠져 국제적으로 고립될 뻔한 무렵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 영원장군의 신분을 가진 대장 이하 줄줄이 문관으로 구성된 사적을 멀리 일본에 파견해서 국제적으로 고립된 위기에 처한 발해가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책략으로 일본과 군사동맹적 제휴를 맺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최초의 발해사절 8인은 귀국할 방도를 잃은 사절단이었다. 왜냐하면 데와국이라는 낯선 땅에 상륙했을 때 대사 이하 16인이 에죠에게 피살되었는데 이 16인 중에는 항해 요원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며 또 배는 잃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동해를 건너온 작은 배의 손상이 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조정에서 그들을 발해로 보내기 위한 호송사로서 히키다아송무시마로를 임명하여 발해 사찰단을 보냈다. 이와 같이 발해사절의 귀국에 있어 일본이 송사를 붙여 주었는데, 그 후 헤이안시대 전기까지는 거의 상례가 되어 보내오고 보내주고의 교류가 진행되어 그 동안 발해에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한 것이 16회, 일본에서 그들을 보내준 송사와 특별히 파견한 견사(遣使)를 포함해서 15회, 거의 동등한 상호 외교 관계가 진행되었다.경제적 목적으로서의 외교전환쇼무천왕의 퇴위 후 후지와라나카마로( 原하였다.
    인문/어학| 2002.05.17| 11페이지| 1,000원| 조회(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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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진보사관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고 그리고 현재도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변화하는 역사속에서 진보의 문제는 대두될 수 밖에 없다. 그럼, 18세기의 계몽사상가와 19세기 중엽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과 같이하여 '역사는 진보한다.'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진보 사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주장과 입장을 같이 할 수 있을까.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문제는 역사에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항상 적인 연관 관계 속에서 진행되며, 따라서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다 하더라도 미래를 계획하려는 현재적 노력을 위해 소외시 하여서 안되는 문제이다. 그럼, 역사관의 진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인간역사의 진보는 두가지 방식으로 도래한다. 하나는 외적인 형태로 대개 물리적이고 경제적인 것이다. 또 하나는 외적인 성질을 촉진하는 물리적 경제적인 힘 이외에 사람들을 보다 인간답게 하려는 내적인 제조건이다. 외적인 힘과 내적인 힘 또는 경제적인 제조건과 도덕법칙의 관계 속에는 끊임없이 어떤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진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상의 혁신과 이에 수반하여 일어난 사회 ·경제 구조상의 변혁인 산업혁명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 ·경제적 발전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무한한 진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14년 오스트리아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제 1차대전은 발발하기에 그로 인한 파괴와 유혈은 유럽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놓았고, 파시즘과 심각한 경제공황을 대두시켰다.산업혁명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의 진보라고 보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제 1차 대전이후의 사회 ·경제적 변화는 진보라고 보기엔 어렵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1차대전으로 인해 역사는 다시 한걸음 물러선 것으로 볼 수도 있다.수학사상의 측면에서 보면 주미의 마야문명은 기원전에 이미 인도보다도 최소한 5백년 빨리 영의 관념을 발견했고, 다양한 마취약을 사용하여 의학상의 발견에 있어서도 유럽은 물론 지구상의 어떠한 문명보다도 앞서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그 역사는 어떤 사회집단이 이룬 하나의 명확한 진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마야문명이 15, 6세기경에 스페인의 무력침략에 끝까지 저항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만다. 다른 사회집단의 갑작스런 공격 앞에 그 진보라는 것은 무(無)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이러한 단적인 예를 보아 인류역사의 '일직선적인 진보'라는 확신은 무너진다. 역사를 진보사관으로만 보아서는 무리라는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진보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에 있어서도 서서히이기는 하지만 소위 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 해도, 지구상의 대다수 발전도상국에 있어서 그 성장이라는 것은 왜곡되어 있고, 인간사회에 마땅히 있어야 할 진보의 형태로부터 상당히 괴리되어 있다. 그것은 선진국에 있어서 성장의 왜곡을 갖가지의 형태로 반영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하지만 19세기 계몽사가들을 계기로 이제까지 역사의 진보관에 관해 많은 사서들과 주장들이 있어왔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사고하려는 합리주의, 역사가 계속적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론, 그리고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역사 발전의 중심 주체를 상정하려는 태도들은 근대에까지 이어져 진보사관은 근대시기의 산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인문/어학| 2002.05.17| 2페이지| 1,000원| 조회(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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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령왕릉을 통해서 본 웅진시대의 백제 평가A좋아요
    Ⅰ.서론1970년 6월 29일 공주의 송산리에 분포한 일단의 고분들에 대한 배수로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무령왕릉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고, 역사학사상 전례가 없는 대발견이었다. 왕릉의 입구를 메우고 있는 밀폐석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놓여있던 첫머리에 새겨진‘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란 글귀가 쓰여져 있는 지석을 발견하면서 이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임이 밝혀지게 되었다.우리 역사 속에서 희미하게 존재하던 무령왕의 뚜렷한 모습의 실체가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모자를 쓰고 신발을 신고, 칼을 차고, 쓰던 물건을 고스란히 가지고서 1,500여 년 전의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완전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이 무령왕의 발견은 세기적인 발견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때 발굴된 무령왕릉을 통하여 서기 500년경의 백제의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북으로는 고구려의 남하에 대처하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다투며 남중국과 왜를 오고가던 국제적인 해상강국 백제. 우리는 그 당시의 백제의 모습을 보려하는 것입니다.Ⅱ. 본론1.무령왕릉(武寧王陵)1)무령왕릉의 발견경위1971년 7월 5일은 백제사 연구의 커다란 획기(劃期)를 가르는 중대한 사건인 무령왕릉이 발견된 날이다.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무덤 자체가 지니고 있는 역사(歷史). 고고(考古), 미술사(美術史)적 측면에서의 신자료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고, 백제사(百濟史)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져다주었다. 무려 1500여 년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무령왕릉의 발견은 그 발견경위부터가 상당한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며칠전인 1971년 6월 29일에는 5호 돌방 무덤(石室墳)과 6호 벽돌 무덤(塼築墳)의 보수작업이 실시되고 있었다. 이미 이 고분군에 대해서는 1927년도에 실시된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성격이 밝혀진 상태에 있었으므로 보수작업에 임하는 조사원들은 백제 고분의 발견, 즉 무령왕릉과 같은 중요한 고분의 묘제라는 점을 알 수 있으며, 백제 웅진 시기에만 전축분이 축조되었다는 사실은 이 묘제의 존속기간이 매우 짧았음을 말해준다.2. 지석을 통해본 무령왕1) 무령왕동성왕이 제위 만년에 학정을 일삼다가 백가에게 살해된 상황에서, 501년 11월 무령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백가를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 당시 왕은 40세의 불혹의 나이였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은 키가 큰 미남형이었고, 인품이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그를 따랐다고 전하고 있다.무령왕은 고질적인 문제였던 귀족들의 반란을 잠재우고자 22담로제를 실시하여 강력한 왕권을 회복하는 등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던 정국을 수습하고,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고구려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여 백제국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신라 및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의 화친에도 힘썼다. 512년 4월과 521년 11월 두 차례에 걸쳐 왕은 양에 사신을 보내어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두 번째의 사행 때 양의 고조는 왕에게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란 관작(官爵)을 주었다. 양과의 교섭은 단순히 외교적인 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양을 통 해 중국의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문화적인 면에 보다 큰 의의가 있었다. 신라와의 화 친정책은 고구려의 남침에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실제적인 면이 강했다. 무령왕은 521년 양에 사신을 보낼 때 신라 법흥왕이 보내는 사신을 백제 사신과 동행하게 하는 등 우호의 뜻을 나타냈다.무령왕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기반 확충과 민생문제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예로,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왕은 510년 정월에 명을 내려서 제방을 완고하게 하고 동시에 내외의 유식자(遊食者)를 귀농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업적을 통해 무령왕은 다시금 백제를 강력한 왕권국가로 재건하는데 성공하게 된다.2) 지석을 통해본 무령왕백제의 많은 고분들은 안타깝게도 그 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이 없었는데, 1971년 백제사 연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발굴이 있었다. 비로소 한 기의 고분이 그 이름을 찾게 되었는데 명문이 적힌 지석의 발오를 때 그의 나이가 40세였다는 점등을 생각해 본다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이 아니라 왕위에 오르지 못한 곤지왕자의 둘째 아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곤지왕자의 맏아들이 동성왕이었으므로 동성왕과 무령왕은 부자(父子) 사이가 아니라 형제 사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이 지석에는 중국 황제의 죽음에만 사용했던 붕(崩)자를 쓰고 있다. 중국과 교류하면서 책봉까지 받고 있던 백제에서 왕의 죽음에 붕(崩)자를 사용한 것은 자주성의 표현으로서 중국에 대해 책봉관계로 종속된 사이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이밖에도 지석을 통해서 백제가 어떤 달력을 사용했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고, 백제 왕실의 장례가 어떠했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왕비의 지석에서 중요한 것은 앞면의 내용이다. 그러면 왕비 지석의 앞면은 무엇을 기록했는지 알아보자.「돈 1만 문(文) 이상 1건(件) 을사년(525) 8월 12일에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백제 사마왕(斯麻王)은 상기의 금액으로써 토왕(土王)·토백(土伯)·토부모(土父母) 및 천상과 지하의 고위 관리에게 보고하고, 신지(申地 : 서남서 방향)의 토지를 사서 무덤을 쓴다. 따라서 증서를 작성하여 밝히니 율령에 따르지 않겠는가.」왕비의 지석은 왕이 죽었을 당시에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왕에 관한 사건 한가지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묘지를 쓰면서 모든 신에게 고하고 땅을 사니 그 지역은 신성불가침한 무령왕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왕비 지석의 내용은 토지신과의 계약을 담은 의례적인 의미로서의 매지권(買地券)또는 이를 통해 귀신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명권(冥券)의 의미를 가진 것이기도 하다.3.출토유물을 통해 본 웅진시대 대외관계 (중국·왜의 관계를 중심으로)무령왕릉에서 수많은 유물 중에는 유난히 중국에서 건너온 수입물품들이 많은데전(塼, 벽돌)돌로 축조된 무령왕릉 역시 백제 고유의 묘제가 아닌 남조묘제(南朝墓制)로부터 영향을 받아 축조된 고분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무령왕과 왕비의 관에 사용된 관재(棺材)는 수종에 대한 사신을 양(梁)에 보내고 있다. 그리고 21년에는 다시 양에 조공하고 있는데 이때에 양에서도 이르기를「이에 앞서 고구려에 패한 바 되어 여러 해 동안 쇠약해 있더니 이에 이르러 글월을 보내어..... 처음으로 우호를 통하였는데 다시 강국이 되었다.」(삼국사기 권26, 무녕왕 21년)무령왕대의 이러한 대중외교에서 나타나는 자료들은 백제가 고구려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잃고 웅진 천도를 단행한 후의 정국불안이나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외적인 대중관계에 국한한다 하더라도 웅진 천도 후 고구려 제해권 장악에 의한 대중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확고한 제해권의 재 확보에 따른 정상적인 대중관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령왕의 이러한 업적으로서 백제는 고구려가 차지하는 대중관계에서의 국제적 지위에 대항하여 대등한 국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중국과의 교류는 선진문물의 수용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고구려의 세력확장을 견제하고자 하는데 주요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한편 왜(倭)와의 관계는 고구려에 의한 백제의 한성함락 이후 고조된 고구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서로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무령왕대에 이르러 백제의 정국안정으로 왜와의 외교적 접촉도 활발히 추진하게 되었다. 백제 문화의 동류(東流)가 활발히 이루어져서, 의 기록에 의하면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이때를 전후하여 왜에 건너가 수준 높은 백제의 학술을 전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제는 당시 전통적인 우방관계에 있던 왜로부터 주로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지원을 받았다.2)출토유물을 통해 알 수 있는 대외관계▶왜(倭)⑴목관(木棺)무령왕릉에서는 화려한 장식의 목관2개가 출토되었는데, 목관으로 사용된 관재(棺材)의 수종(樹種)을 감식한 결과 침엽수계통의 금송(金松)으로 판명되었다. 금송은 일본 남부의 고지대에서만 제한적으로 자생하는 일본 특산품이다. 내구성이 뛰어난 금송은 일본 내에서도 지배계층들이 가장 선호하던 관재였기 때문히 증대되어 이를 기반으로 금속용기 들이 제작, 사용되는데 대부분이 권위의 상징물로 지배자나 귀족 등 제한된 계층만이 사용하던 고급용기였다. 특히 금, 은, 금동 제품들은 귀금속인 관계로 발(鉢), 완( )이나 잔(盞)과 같은 작은 용기류를 만드는데 널리쓰였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금속용기류는 모두 황동(黃銅)을 원료로 주조된 것들이다. 특히 발은 무령왕릉과 거의 같은 시기의 가야 무덤에서 종종 출토되며, 신라의 왕릉급무덤과 일본의 지배자 무덤에서 나오고 있어 무령왕대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문물교류의 국제성을 보여주고 있다.⑸숟가락과 젓가락삼국시대에 이르러 제작, 사용된 것이며 이전시기에는 주로 나무로 만들었다. 무령왕릉의 숟가락과 같은 형태는 비슷한 시기의 일본의 무덤에서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물교류의 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중국 하북(河北)정현(定縣)출토의 북위(北魏)석함 에서도 역시 비슷한 출토예가 있다.▶중국⑴석수(石獸)응회암으로 만든 석수는 뭉뚝한 입을 벌리고 있고 코는 크지만 콧구멍이 없다. 높은 콧등날 이 등뒤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그 좌우에 눈과 귀가 부착되어 있다. 등에는 네 개의 융기9隆起)가 있고 머리 위 융기 상면의 패어진 홈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철제 뿔이 꽂혀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로 날개모양의 갈기가 도안처럼 부조되었다. 네 개의 짧은 다리가 있으며 발톱이 표현되어 있는데 뚜렷하지는 않다. 이 석수는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인데, 진묘수는 기괴한 신수를 표현한 공상적인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귀를 쫓아 사자(死者)를 수호한다는 중국의 묘장풍습에서 나온 것이다.⑵오수전(五銖錢)오수전은 지석 위에 꾸러미로 놓여 있었으며, 돈에는 오수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왕비의 지석 뒷면에는 이 돈으로 토지신에게서 무덤터를 산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렇게 토지신 에게 무덤터를 사기 위해 실제 유통되는 돈을 무덤 안에 넣는 것은 남조(南朝)에서 유행하였던 풍습으로 도교사상이 가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인문/어학| 2002.05.17| 9페이지| 1,000원| 조회(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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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가야의 성립과 발전
    서론>>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과 함께 무려 600년이라는 독자적인 역사를 영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삼국시대"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우리의 고대사를 삼국만의 시대로 인식하여 가야사를 소홀히 한다면 600년 동안이나 가야인으로서 자신들의 삶을 일구어 왔던 고대 경남인들의 역사는 어디에서, 누가 찾아줄 것인가? 뿐만 아니라 북쪽의 만주에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라는 한민족의 또다른 고대국가가 무려 천년 이상이나 존재하였다. 고구려·백제·신라만이 우리의 고대사는 아닌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우리 역사를 연구하였던 신채호 선생은 일찍이 삼국시대가 아니라 부여나 가야 모두 포함하는 '열국시대(列國時代)' 라고 부를 것을 강조하였다 한다. 이처럼 가야 600년의 역사 중 김해 금관가야에 집중되어 있는 눈을 잠시 돌려 근래에 들어 고분군의 많은 발견으로 주요시되고 있는 『대가야』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멸망에 이르기까지를 살펴보고자 한다.본론>>1. 대가야의 건국과 변천1) 대가야가 맹주로 떠오르기까지대가야(大加耶)는 삼국사기 지리 고령군조(地理 高靈郡條)에 기록되기를 "대가야국은 시조 이진아시왕으로 부터 도설지왕까지 무릇 16대, 520년에 이르렀다"라고 한다.삼한 때까지 반로국(半路國)으로 불린 고령 지역의 정치세력은 주변 지역과 동일한 문화기반 위에 있었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령의 세력은 야로면 일대의 철광을 개발하고 힘을 키워 가야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서기 40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내려온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가 가야를 공격하였는데,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 하류의 가야세력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고 이를 틈타 대가야(고령가야)가 가야의 맹주로 서게 된 것이다.2) 개국신화가야의 건국설화를 보면 두 종류가 있는데 이는 각기 김해와 고령지방에 전하고 있다. 김해에 전하는 수로왕 신화는 가락국기조에 수록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천강신화(天降神話)의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고령에 전하는 대가야 시조신화는 ≪동국여지승소망을 이뤄 주겠다는 계시를 내렸다. 하늘신 '이비하'가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가야산 상공에 나타났고 여신도 잠자리 날개 같은 옷깃을 나부끼며 이비하를 맞이하여 뭉게구름에 신방을 꾸미고 실구름으로 얽어서 가야산 높은 봉우리 상공에서 만난 둘은 드디어 부부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옥동자를 둘 낳았는데 형은 이비하를 닮아 해같이 둥그스름하고 불그레했으며 아우는 여신을 닮아 갸름하고 흰 편이었다. 형은 '주일'이라 불렀고 아우는 '청예'라 했다. 형 "내질주일"이 자라서 대가야국의 첫 임금 「이진아시왕」이 되었고 아우 '뇌칠정예'는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야 사람들은 가야산 여신을 높여 '정견모주'라 우러르게 되었다한다.″여기서의 말투로 보아 이 설화는 수로 신화보다 늦은 시기에 성립된 것이고 가야산신 정견모주의 존재로 보아 대가야의 주체가 토착적 성격이 짙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로와의 형제관계가 나타나 있으므로 이 설화는 고려지방의 토착세력의 성장을 보아 대가야의 정통임을 표방하며 김해 방면의 집단을 대신하여 가야연맹의 주도적 존재로 대두하는 것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2. 대가야의 성립과 발전1)정치가야 제국의 정치신분제도에 관한 내용을 전하는 사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몇몇 자료를 통해서 단편적이나마 가야국의 중앙정치조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대가야의 신분구조는 왕-한기층-양인층-노비층으로 파악해 볼 수 있는데, 의 몇몇 기록이 6세기 갸야지역의 정치신분제의 일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530년대에 남가라(김해가야), 훼국, 탁순의 3가야국이 신라에게 멸망당하자 백제 성왕이 주도가 되어 왜국과 위 3가야의 대표가 모여서 멸망한 3가야국을 부흥시킬 방책을 의논한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다. 하나는 긴메이 2년(541)에 기록된 것인데 여기에서 한기, 상수위, 차한기, 하한기 들의 관명이 보인다. 또 다른 자료는 긴메이 5년(544)에 기록된 것으로 군, 한기, 하한기, 상수위, 이수위 가 나타나고 있다. 이들 사료를 종 있다. 이에 대해 한기층이 분화되어 있었던 사실을 당시 가야제국 지배층의 계층분화 현상으로 파악하면서 당시의 가야 제국은 계급조직을 갖는 지배계층이 등장할 정도의 국가형태를 형성하였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가야는 이러한 지배계층의 분화뿐만 아니라 피지배계층도 양인과 노비로 구분되어 있었다. 긴메이기 5년조의 사료에 의하면 대가야의 양인들은 자유민으로서 농경에 종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며 게이타이기 8년조의 사료에 의하면 반파(半破)라는 대가야의 세력권 안에 있는 주요 정치집단이 자탄, 대사, 이열비, 마수비 등의 지역에 성을 축조하는데 동원된 자들도 대체로 양인계층이었을 것이고 이외에 토기제작자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기술자들의 사회적 신분도 양인신분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노비층은 최하위의 신분으로서 비자유민이었다. 이들은 본래 촌의 구성원들이었지만 계급분화가 진행되면서 비자유민으로 탈락한 자들이었다. 이외에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혀 노비로 된 자, 또 죄를 지어 그 형벌로써 노비로 전락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산동 44호분에 배치되어있는 32개의 순장곽 중에 물건과 같이 취급되었던 순장자들도 아마 대가야의 노비신분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2) 경제가야의 역사를 볼 때 김해와 함안,동래 등 낙동강 하루 지역이 사람들이 살기 좋은 자연·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일찍부터 문화가 개화.발전 되었다. 그것은 노예소유자사회 내에서 봉건적 관계의 싹의 상징인 철기문화가 보다 일찍 발생한 것을 가지고서도 알 수 있다.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국이 6가야의 맹주로 등장하게 된 것도 일정한 사회·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시기(4세기말경) 대가야는 6가야를 이루는 한개의 소국에 불과하였다. 4세기 이전시기의 고령은 발굴조사가 잘 진행되지 못한 것도 있으나 지산동 고분군의 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렇다할 괄목할 만한 유적,유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고려가야가 4세기 이전에는 6가야 속에서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이 빨갛게 익거나 혹은 철광석이 녹아 엉킹것 등이 사방에 뒹굴고 있다. 500여평에 달하는 대규모 야장터(지금의 대장간)가 있었다는 것은 대가야의 철생산 능력과 수준이 그만큼 높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곧, 대가야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직접적 반영인 것이다.3) 대외관계① 일본가야는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했다는 특성을 바탕으로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특히 금관가야(김해가야)가 가야연맹의 초기 맹주로써 일본과 외교를 이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대가야의 외교관계가 아닌 가야 전반의 외교관계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하고자 한다. 그럼 먼저 가야가 규슈 지역에 진출하기에 앞서 쓰시마(對馬島)에 그 거점을 마련했음을 설화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쓰시마는 육안으로도 보일 뿐 아니라 지정학적으로도 한반도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청동문화, 고분문화 등이 건너갈 때 제1 경유지로 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쓰시마의 가나쿠라 성지에는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가라에서 옹(甕)이 흘러와서 그 옹이 이르기를 "가라가 보이는 곳에 놓아달라." 고 하여 거기에 모셔두었다.』는 것이다. 그 옹은 1923년에 오카자키가 조사한 바 있는데 대게 헤이안시대 때의 스에키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가라'는 가야를 칭하는 말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 밖에도 바다 저쪽에서 낭자가 빈 선박을 타고 흘러왔으며, 그것을 주운 자는 번영했다. 는 내용의 설화도 있다. 이것은 그곳 특정 가문과 연계되는데 그 중에서도 '우나쓰라' 라고 하는 집락에서는 확실히 한국의 왕녀가 들어왔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녀에게 취가한 자는 금을 지참하게 되어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여인을 가야의 지배계층의 후예로 보고 있다.설화를 이렇게 놓고 본다면 당시 쓰시마로 이주해온 가야인들은 원주민보다 높은 경제력과 선진문화를 향유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 규슈지역 진출에 앞서 쓰시마를 거점으로 확보했으며 이곳을 발판삼아 규슈와의 문화적 교류와 자유로운 민족이동이 확실시되고 있으며 또 나라 지방 초기 고총고분과 가야고분이 비슷한 점에서도 가야 문화권이 규슈의 후쿠오카 현 지방에서 구마모토 지방으로 확장되었고 야마구치 현을 거쳐 나라 현, 오사카 부, 즉 일본의 중심지역에 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4세기경 일본 전기 고분의 내부구조가 수혈식 석실이고 그 입지 조건이 구릉의 능선선단(능선선단)인 것 등은 가야 묘제의 특징과 같은 것으로 그 지배세력의 출자를 짐작케 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가야의 소국세력이 야요이 시대 중기이후부터 규슈지방에서 활약했으며 야마토 국가 형성시에도 지배계층의 한 분야에서 야마토 문화 형성의 일익을 담당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3세기 이후에 가야지방으로부터 철제와 철제무기가 공급되었고 그 무렵에는 새로운 인적 이동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예상된다.위와 같이 가야는 일본에 철기 문화를 비롯하여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전달하여 그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교량의 역할을 했으며 일본 정권 창출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예상할 수 있다. 후기에는 대가야도 자체적인 외교 활동을 벌여 5세기 중엽에는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낸 일이 전해지고 있음을 통해 가야가 그저 신라에 영합되어버린 약소국이 아니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외교를 벌여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② 삼국400년 전투로 금관가야의 세력이 약해지는데 반해 고령의 대가야는 경상도 내륙 산간지방의 농업에 유리한 입지조건과 제철(製鐵)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중심지로 떠올랐다.이렇게 대가야가 부상할 즈음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결성하였는데, 이때 두 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전략상 가야의 협조를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국제관계 속에서 대가야는 국제무대에 다시 등장하였다.《남제서》에, 479년 가라국왕(可羅國王) 하지(荷知)가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작호(爵號)를 받았다는 자료가 전한다. 하지는 중국기록에 보이는 유일한 가야인으로서 이 무렵에 대가야가 중국과 하였다.
    인문/어학| 2002.05.17| 6페이지| 1,000원| 조회(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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