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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영화평론_나이트 샤말란의 작품 세계
    ‘시각’의 지배를 거절하는 몸짓: M. 나이트 샤말란의 작품 세계최기민“사람을 그렇게 보는 건 실례야.”“슬픈가 보려고요, 뒤에선 안 보여요.아빠가 보는 걸 난 못보고, 난 보는데 아빤 못 봐요.둘 다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미처 생각을 안 해봤지만.. 그래서 카메라가 있는데, 찍어볼래?”“왜 우린 뭐든 반 밖에 모르죠?”“ 무슨 소리니?”“앞만 보고 뒤를 못 보니까 반밖에 모르잖아요.”- 영화 에서1. 들어가며샤말란의 영화 세계에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공포’와 동시에 나에게만 보이는 세계로 인해 세계와 분리된 혹은 격리된 자아가 겪는 ‘슬픔’의 두 축이 있다. 이 두 축의 기저에는 세계를 보이는 것으로 해석하는‘망막 중심의 눈’의 인식 태도가 깔려 있다. 특히 서스펜스의 해소가 지나간 이후까지 남아 있는 슬픔의 정서는 보다 더 강하게 전 작품에서 베어 나오는데, 세계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된 슬픔이자 자기에 대한 자기소외로 특징되는 비개인성(impersonality)의 슬픔이다. 또한 개인의 구체적 일화가 부재하고, 비밀의 고백이 부재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심리에 대한 관심이 부재하는 텅 빈 자아에 대한 슬픔이기도 하다. 이 글은 이 슬픔의 정조가 영화 속에서 해소되는 과정을 주목하고‘시각’(vision)을 단초로 이 작동 방식을 짚어 보고자 한다. 그의 영화에서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감상자로 하여금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의심하게 함으로서 인식의 독점적 권위를 누리고 있는 ‘눈’(eyes)과 ‘본다’(see)의 행위를 의심하게 한다. 그리하여 시각을 포함한 여타 다른 몸의 지각을 깨울 것을 다양한 영화적 장치를 통해 요청한다. 시각에 대한 인식의 전환 이후 극 중 인물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극적으로 재편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그녀)의 인식의 틀이 확장되는 결과는 주체가 비개인성으로 인한 자아-절멸의 사태로부터 회복되는 지점에까지 이른다. 세계와 자연에 가위 눌리던 영화 속 개인들은 마치 중세인들 이는 ‘신은 태초에 말씀으로 존재 하였다’는 교리에 근거한 청각 중심의 인식과 또 인쇄술의 미발달로 인해 눈을 필요로 하는 독서 혹은 예술 전통의 부재 때문이었다. 따라서 중세인들은 시간의 인식도 교회의 종소리를 통한 청각과 모래시계와 같은 중력의 힘에 의지한 체험으로 이해했으며 따라서 중세 전의 기하학으로 재편된 헬레니즘 세계관과 중세 이후의 시각에 기초한 합리와 이성의 세계관과는 다르게 자연과 세계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 점은 의 주인공 아이비를 통해 뚜렷하게 재현된다. 아이비는 시각을 잃은 채로 설정되지만 시각에서 가장 자유로운 인물로 완성된다. 의 마을은 20세기 속의 17세기이며, 위성으로도-지리학적 도구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이 상징적인 중세의 재편을 통해 샤말란은 공간과 시간의 정적을 존중하는 태도를 누렸던 중세인들의 다양한 감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시계가 발명되기 이전의 중세인들이 시간을 듣고 감지했던 것처럼 망막의 사건이 아닌 자연의 법칙에 의한 시간관과 자연관을 회복시키고자 한다. 인식기관으로서 시각을 배제할 수 있었던 샤말란의 중세의 모티브가 중요한 것은 이 규칙이 근대를 통해 깨어졌기 때문이다. 즉 근대가 도래하고 시간은 자연의 여러 지각에 의존하지 않는 기술적인 시간을 구현했고 시간을 확인함에 있어서 단지 시각만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자연은 원근법에 의한 공간의 분할과 공간 개념의 변화로 좌표화 되었고 따라서 자연은 대상으로 개인은 주체로 ‘본다’ 라는 행위를 기준으로 관찰하는 눈과 관찰 당하는 대상으로 분리되는 것이다. 샤말란 영화의 인물들이 세계의 일반 법칙에 예외적인 존재가 될 때 이들은 한 주체로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시선으로부터 관찰되는 시각의 ‘대상’이 된다. 세계의 고아가 된 주체의 슬픔은 그 때문이다.다양한 지각의 놀이그리하여 샤말란의 영화에서는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아우르며 자유자재로 ‘유희’(play)하는 상상력과도 같은 지각의 놀이들이 제시되며 따라서 인물들은 청각이나 촉각과에서 몸짓을 이용하고 말로 이어지는 장면은 마치 흥겨운 놀이판과도 같은 쾌감을 불러 일으킨다. 청각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지각으로 샤말란의 영화에서 자주 사용된다. 에서 합의된 언어의 형태를 지니지 않은 소리의 흐름이 눈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즉 주파수이다. 외계인의 침입을 피해 그레이엄의 가족이 대피했던 지하실에서 그들은 오래된 라디오 방송의 파동과 파장으로 바깥 상황을 보며 이 주파수로 애초에 무전기를 통해 초자연적 사건의 낌새를 눈치채기도 했다.2. 주체의 회복에 따른 세계의 재편과 화해따라서 눈이 거부되었을 때 세계는 다르게 재편되고 재생성된다. 영화 에서 정신과 의사인 말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결말이 대표적인 장면으로, 콜이 말한“죽은 자들은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본다”는 것을 비로소 상기하는 것이다. 말콤은 그리하여 자신의 시각을 포기하고 자기 존재를 대면하게 되며 사태 자체로 돌아가게 된다. 즉 대화를 거부하는 매몰찬 아내로만 생각했던 것에서 사랑하는 남편을 여의고 결혼식 비디오를 보다 잠이 드는 순정의 아내로 세계가 재편되는 것이다.특히 카메라 또한 인물의 세계에서 사물들의 세계로 종종 시선을 옮기곤 하는데 이는 사물을 인물 보다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서스펜스의 목적도 달성하지만, 무엇보다 침묵이 존재하는 시간에 주변부의 작은 사물들을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 가는 듯이 담아내면서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는 인물들의 집과 전경들, 또한 수직으로 거리를 내려다 보거나 방 안의 사건을 알기 위해 방 안으로 성급히 뛰어 들어가기 보다는 문을 응시할 뿐인 카메라의 관조의 눈이기도 하다. 푸코에 따르면 스펙터클이 단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집중, 즉 전체주의를 상징하는데, 샤말란의 느린 관조의 눈으로서의 카메라는 조용히 사물들을 응시한다. 즉 도시의 거리, 자연이 인간의 구획물에 불과한 인공품이 아니라 제자리에 있어 온전한 소박한 질서를 가진 대상으로 구현된다.세계와 사물의 질서가 재편되는 대목은 의 결말에서 보가 놓아둔 물잔들의 의미가 드러나자 주변 사장을 유지시키기 위한 불안정한 인물설정이었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에서 영화 극작가로 등장한 해리는 “누가 그렇게 오만할 수 있단 말이요” 라는 대사로 암시되듯 일률적인 영화 도식 속에서 자신의 삶의 사태를 건지지 못한 채 우스꽝스럽게 죽는다.특히 슈퍼 히어로의 장르를 변주한 에서 샤말란은 개인과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부서지도록’ 된 몸과 ‘부서지지 않도록’된 몸으로 연결되는 두 주인공의 신체를 통해 드러낸다. 슈퍼 히어로 시리즈의 선과 악 그리고 사건의 인과 관계는 너무나 선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인데 악당은 언제나 위기를 일으키고 영웅은 위기를 해소한다. 하지만 샤말란은 비개인성에 함몰되어 주체를 회복하지 못하는 데이빗을 엘리야로 하여금 귀환하게 하며, 엘리야가 계획한 열차 사고를 포함한 모든 끔찍한 사고들의 원인을 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게 설정하여 인과관계의 선명한 화살표를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게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데이빗은 비로소 엘리야가 그토록 자신의 신체 상태에 몰두했는지 그 연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진실과 대면하게 된다. 데이빗의 자신에 대한 체념과 자기 방치에의 비개인성이 엘리야를 거쳐 회복되지만,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는 과정은 지나간 자기 방치의 대가가 그토록 잔인하며 참혹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세계의 비극에 개인의 침묵을 ‘연결’시키는 것으로도 읽힌다. 그래서 이 ‘연결’이 회복된 주체가 세계와의 화해를 하게 되는 당위이기도 하다. 이 연결은 특히 데이빗이 영웅으로서 구해낸 두 명의 아이가 물에 빠진 데이빗을 건져주는 장면을 통해 의미가 풍부해지는데, 주체의 회복이 독단적 회복이 아닌 타자와의 ‘연결’을 창조해 낸다는 진정한 생명력의 회복임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의 현실적·정신적 무력함을 일종의 운명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빈곤하고 왜소한 주체”가 존재 이유를 세계와의 ‘연결’ 속에서 밝혀내는 것이다. 그리고 연결에 의해 회복된 주체는 다시 세계 눈’이 된다.‘두렵다’와 ‘두려워하지 말라’는 대사가 그의 영화에서 끊임 없이 반복되는 것은 이처럼 자아가 대면할 재편된 세계를 경험하며 드러나는 본질적인 자아로 회복될 것을 포기하지 말고 이 대면에 치열해지라는 뜻일 것이다. 지각의 해체와 확장을 통해 갖게 되는 이 대면의 긴장에서 발생하는 공포와 불안은 따라서 내면에서 올라오는 감정의 운동일 것이며 이 운동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샤말란의 영화가 끊임없이 ‘믿을 것’을 요청하는 것은 유일신의 예정된 주사위 놀이로의 수동적 순응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정신의 운동에 대한 확신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은 ‘존재하는 부재’(식스 센스), ‘(영웅이 아닌-혹은 영웅으로서의) 나의 목적’(언브레이커블), ‘신에 대한 믿음’(싸인), ‘사랑’(빌리지) 그리고 ‘동경’(레이디 인 더 워터)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정신의 운동, 정신의 놀이일 것이다.3. 나가며샤말란의 영화들은 영화 표현의 소재에서 주변부의 감각을 충분히 활용한다는 점에서 탈근대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은 매우 유기적이고 전체적인 망 안에서 하나의 목적론적인 서사구조를 가진다는 점에서 그렇지 않기도 하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복귀하며 회귀하는 요청과 운동을 끊임없이 하지만 돌아가는 장소는 마치 애초부터 지시되어 있었던 장소로 보이며 따라서 원래의 그 장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고 있다. 그는 고전적인 연출로 드러나는 회복의 형식과 우화와도 같은 단순한 네러티브를 안이하게 교차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우화적인 네러티브는 자기 방어적인 유머라거나 비꼬기 등의 블랙 유머뿐 아니라 희극의 요소가 차단되어 있으며, 감독이 누린 주변부의 문화적 향유에 대한 진지한 유희는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 유희가 하나의 담론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자기 모순적인 예민한 자의식이 드러나기도 한다. 특히 근작에서 샤말란은 영화를 하나의 법정으로 만들고 그를 변호하고 있다.8
    인문/어학| 2007.06.18| 8페이지| 5,000원| 조회(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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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재미술관 관람 평. 평가A좋아요
    바이런 김(Byron Kim)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한 뉴욕의 화가 바이런 김은 모노크롬 회화를 주로 다루어 왔던 작가이다. 특히 극단적인 단색 추상화에서 숭고함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는 그는 어떤 의미에서 서구 모더니즘의 연장선 상에 서 있는 형식주의자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암시하는 내용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거나, 사회적 맥락과 교차된 감정적 .지적 잔여물이다.이번 전시에서 그가 그려내고 있는 이미지는 한국의 하늘, 특히 제목이 암시하듯이 윤 동주의 가 그려낸 하늘의 이미지이다. 작가는 하늘, 바람, 별이라는 소재로 일제 강점의 정치적 현실을 초월적으로 그러낸 윤 동주의 시상이 추상적 시각언어로 피부색, 어린 시절의 기억, 정치적 이벤트 같은 특정 주제를 그려낸 자신의 방식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음을 주목해 보았다. 따라서 서구 모더니즘의 정점으로서의 모노크롬 형식을 빌어 윤동주의 시상의 중심에 있던 하늘의 모티브를 한국 고유의 병풍 위에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작가가 경험한 고유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다.민 연 희 (Yunhee Min)L.A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 연희의 작품은 개인과 주변 공간의 관계, 특히 표면과 색채가 건축적인 공간과 조우하는 지점에서 이 관계가 중재되는 방식을 다룬다. 특히 창문이나 벽에 빨강, 노랑과 같은 원색적 색채를 칠함으로서 이 경계적 공간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자극하는 그녀의 일련의 작업은 내부와 외부,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 사적인 공간과 개방된 공간 사이의 모순적 공간에 대한 언급이다. 박물관이나 백화점과 같은 공공건물에 부착된 윈도우 작품에서 그 동안 우리가 부정적 공간으로 생각해 왔던 벽이나 창에 칠해진 색채는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이 경계적 공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새롭게 부각시킨다. 버려졌던 공간은 이제 하나의 볼거리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그녀의 이번 작업 또한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나일론 천을 미술관의 외벽 창문에 설치하는 것이다. 이는 색채가 파생시키는 공간의당기는 효과에 의해 관람자들의 장소에 대한 개념을 미묘히 혼란시키기 위함이다. 투명한 유리 표면을 불투명한 면으로 변형시킴으로서 그녀는 관람객들이 작품과 일체가 됨과 동시에 격리되는 이중적인 경험을 하도록 효과적으로 유도하고 있다.서도호(DoHo Suh)서도호는 공간개념, 특히 특정 공간의 유동성에 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뉴욕의 조각가로 현재 가장 촉망 받는 작가중의 한 사람이다. P.S.1전시중 뉴욕타임즈에 리뷰와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문화적 횡단과 이동이라는 작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은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적인 공간의 구조와 이러한 공간이 가지는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하도록 유도한다. 공간은 유동적인 것이며, 전이(Displacement)라는 움직임을 통해 경험되어 질 수 있다는 인식이 그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간개념이다.작가가 이번에 주목해 보았던 공간은 너와 나를 연결시켜주고, 안과 밖을 이어주는 경계적 공간인 '다리'이다. 이 11m짜리의 거대한 다리는 전시장 입구와 내부에 걸쳐 설치되어 있어서 우리를 모호한 경험 속으로 이끈다. 관람객은 작품을 통과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 공간의 세계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서로간의 경계를 관통할 수 있는 연계성, 그리고 공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가능성이 그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작품이 전시장의 외부인지 내부인지, 혹은 단순한 입구인지 아니면 하나의 예술품인지 모호한 경계설정에 의아해 하면서 우리는 차단과 단절의 느낌없이 순식간에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경험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권소원(Sowon Kwon)바이런 김과 함께 이번 광주 비엔날레에 참여한 권소원은 공간과 젠더(gender)의 의미를 탐구하는 작가이다. 전통적으로 실외보다는 실내에서 생활해왔던 여성에게 공간, 특히 실내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중요하다. 그러나 권 소원이 제시하는 여성이 머무르는 공간은 어딘가 맞지않고 기묘하게 바뀌어 있다. 여성의 몸은 규칙적이고 정확하게 규격화되어 있그 여성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은 여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며 격리되어 존재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여성이 자리하고 있는 공간이 현재의 그녀와 다른 코드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이번에 전시되는 도 그러한 공간과 규격화된 여성성의 관계를 다룬다. 우리 앞에 투사되는 여성의 실루엣은 다양한 여성 체조선수들의 신체 모습으로부터 추출된 이미지이다.일부러 희미하게 제작된 윤곽선 때문에 그려지는 대상들은 실체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희미한 형체를 둘러싼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선 드로잉은 인체를 규격화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공간과 여성의 신체는 서로 어긋나 있으며 서로 통제와 통제불능의 구조로 얽혀있다. 이렇게 공간과 여성의 상호간의 억압관계를 통해 작가는 매우 개인적인 자신만의 평균적 여성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캐롤 김은 아이덴티티와 외모, 혹은 머리카락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가이다. 그녀가 머리카락에 집착하게 된 것은 그녀가 살아온 메인(Maine)주의 포틀랜드(Portland)라는 환경으로부터 기인한다. 이 포틀랜드는 동양인이 극히 드문 지역으로 검은 머리의 그녀는 언제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는 일 년여의 기간에 걸쳐 지인(知人)들을 초대하여 자신을 남과 구별시켜주는 요소였던 머리카락을 자르도록 하는 헤어컷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 일련의 작업을 통하여 그녀는 머리를 자르기 전과 후, 그리고 머리를 자르는 과정 중의 자신의 아이덴티티의 차이에 관하여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본다. 이 각각의 헤어컷은 서로 구별되는 새로운 스타일인 동시에 그녀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변화되고, 재건되는 공간이다.이번 전시에서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친숙한 장소라 할 수 있는 화장실에 모니터를 설치하여 자신의 작업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화장실 거울을 바라보며 여느 때처럼 자신의 외모를 확인하면서 이 작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남들 모르게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는 장소에서 우리는 작가의 아이덴티티가 변모하는 과정을 바라보와 정체성에 관한 새로운 의미에 접하게 된다.김 수진은 여행이라는 이동의 메타포와 그 속에 내재할 수 밖에 없는 장소성/비장소성의 개념을 통해 문화적인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가이다. 그녀는 지구촌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들을 사진이나 필름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미지들은 매혹적인 대상으로서의 장소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그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장소와 저 장소, 낯선 공간과 익숙한 공간, 현재와 과거 사이의 중간 지점으로 정지된 순간이다. 따라서 그녀는 여기저기를 이동하면서 그 장소에 위치하면서도 머무르지 않는 느낌,장소성과 비장소성에 초점을 맞춘다.또한 공간이 갖는 문화적 정체성은 이민 2세대로서의 그녀의 경험,부유하는 현대사회의 특성과 맞물려서 그녀의 작품처럼 모호한 것이 된다.이번 전시에서도 김 수진은 장소에 대한 특정한 언급을 배제한 여행에서의 사진 이미지로 고착되지 않은 문화, 유동적인 현대사회 속에서 새로와진 정체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보여준다. 작가에게 있어 '고향'이나 '뿌리'는 더 이상 하나의 장소와 연계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배열된 일련의 여행사진이 갖는 유사성과 차이점은 낯설은 것과 익숙한 것, 그리고 그것의 경험과 기억, 더 나아가 여행의 의미 자체를 규정지어 주는 지표가 된다. 이 사진시리즈와 더불어 그녀는 비행기 루트를 상징하는 설치작품을 더불어 선보이는데 이는 작가의 떠돌아다닌 발자취이자 부유하는 움직임, 이동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국내에도 제법 알려진 조각가 마이클 주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영역, 그리고 타자(他者)를 정의하고 분간해내기 위해, 이러한 자아의 확장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온 작가이다. 그는 본래의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해 부단히 스스로의 육체성을 확장시키고, 그 육체성이 뿌리를 두고 있는 토양과 문화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마이클 주의 작품은 종족과 문화가 오버랩하는 대륙을 언급하면서 '종족'이 아니라 '문화'를 통에 대하여 말한다.작가는 단순히 외양이 다르게 보이는 미국인으로 자신을 분류하려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본래 지니고 있던 것,문화와 인종으로 돌아가야함을 극단적으로 역설한다. 참고로 마이클 주는 2000년 휘트니 비엔날레에도 참여하였다.이번 전시에서 그가 그려내는 이미지 또한 '형상(figuration)'과 '초상(portraiture)'이라는 육체성에 기반하고 있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장난감의 얼굴로 표현된 '자아'에 대한 서구적 개념은 '무아'적 개념의 부처의 신체형상과 결합되어 있다. 말하자면 서구 대중문화의 도상과 전형화된 동양적 도상과의 어색한 결합을 통하여 양자간의 육체성과 문화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빽빽하게 전시장을 채울 이 작품은 일견 진시황묘(墓)의 토용이나 사원의 군신상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값싼 재료로 정형화된 모습을 통하여 과거의 신성한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열망하는 현대사회의 인공물로서 제작된 집단 초상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대량생산이 용이한 재료를 써서 이루어 낸 반복된 이미지는 현대사회에서 새로와진 정체성에 대한 작가의 언급인 것이다.LA의 조각가인 신경미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을 이용해서 벽지 작업을 하는 작가이다.사람들은 유명인사들, 패션, 영화나 연속극의 세계가 매력에 찬 이상적인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열광한다. 대통령이나 교황같은 지극히 공적인 인물들까지도 하나의 스펙타클(spectacle)이 되는 현대사회에서 매스 미디어가 제공하는 진실은 이렇게 스펙타클을 보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게 된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 문제의 핵심이나 진실을 잊혀진다.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시각적인 패턴으로 우리의 기억의 잔상에 남게 된다. 신 경미의 벽지작업은 이렇게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스 미디어 속의 우리 시대의 이미지들을 다룬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이제 그 공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사적인 공간을 장식하는 벽지로서 색채와 구성의 패턴으로 존재하.
    예체능| 2000.12.03| 5페이지| 무료| 조회(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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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국제 아트페스티벌 관람평. 평가B괜찮아요
    미술관을 많이 다녀보지는 못했지만 '경주선재미술관' 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그래서『KOREAERICAKOREA』전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 좋아하면서 보았다. 신문으로 기사를 접했을 때 정말 보고 싶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꼭 미국 이민2세대나 1.5세대가 아닐지라도 충분히 '미국적 경험'으로 성장해왔거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전시였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미국적 경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세대이고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이 존중받는 시대(비록,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나아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에 살고 있는 까닭에 그 개성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대체 나는 어느 나라의 토양 위에 살고 있는 걸까?!'라는 물음에 직면하기 때문에 이 전시가 정말 절실했었다. 이 전시와 함께 며칠을 같이 즐기고 놀면서 각각의 작가들이 자아와 사회, 고향과 고국 등에 대해 골똘하는 그 과정을 공감하기도 하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과정은 때로 파괴적이라고 느낄만큼 불안하고 긴장된 것이기도 하였고, 때로는 유머스럽고 여유롭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그들이 많은 것을 부정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전체적으로 무척 긍정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것은 무척 가슴 뭉클한 기분이였다.바이런 김(Byron Kim)의 작품은 정말 순수하고 따듯한 것이었다. 단순한 것이었지만, 이해하기 쉬웠고 그가 윤동주의 「서시」에서 받은 숭고함을 나는 그의 작품에서 느꼈다. 그가 사회적 현실에서 어떠한 투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우연히 윤동주의 서시를 접하고 감명을 받고 구원을 구하는 마음만은 정치적인 것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바이런 김이라는 작가는 전혀 정치적인 작품을 하지 않는 작가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말에서 유추해 볼 때 그는 윤동주라는 선배예술가에게서 힘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윤동주가 초월적인 언어(하늘, 바람, 별)를 통하여 정치적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듯이, 나 또한 초월적인 시각언어를 사용하여 특정 주제(…정치적 이벤트…)를 그려낸다. "-바이런 김.붓으로 하늘을 담아낸 그의 작품에서, 붓을 통해 윤동주의 시상 중심인 하늘의 모티브와 함께 그것을 드러낸 세련된 현대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병풍 위의 세련된 모더니즘적인 작품. 잘은 모르지만, 작가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골똘했던 진지한 흔적이 보였다.그리고 무척 인상깊었고,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청록교」가 있었는데, 이 작품의 작가는 서도호(DoHo Suh)이다. 그는 공간개념, 특히 특정 공간의 유동성에 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뉴욕의 조각가로 현재 가장 촉망받는 작가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청록교 역시 두 공간 사이를 넘나드는 '다리'인데 이 작품을 본 후 설명을 읽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마도 ‘문화적 횡단과 이동’이라는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 그에게 계속 그러한 주제로 탐구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그는 그런 탐구에 대해 ‘공간은 이동이 가능하고 유동적이다’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청록교는 공간의 연결 뿐 아니라 나와 너의 연결ㆍ안과 밖의 연결까지도 넘나드는 '다리'인 것 같다. 이 거대한 다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무언가 '관계에로의 노력'을 하는 하는 것 같은 무수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을 보고 위의 생각을 한 것이다. 작가의 말을 보니 그는 '개인과 집단, 그리고 익명성 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개인과 다수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가능성 또한 그가 보여주려고 의도하는 것이라 말한다.소통의 도구는 사하라 사막에서 알래스카의 이방인의 얼굴을 생생히 볼 수 있을만큼 고도화되고 진보함에도 불구하고, 점점 그 컨텐츠가 되어야 할 소통은 퇴보해 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공간과 문화의 연동성과 유동성 그리고 다수와 소수의 소통까지 새로운 채널이 많이생기고 그 채널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이런 작품들이 많이 있는 이상 그다지 삭막할 것 같지도 않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긍정적인 내면의 힘을 품고있는 것 같아서 생각해볼수록 기분이 좋아진다.그리고 권소원(Sowon Kwon)의 「평균여성」은 위의 그런 공간성과는 조금 다른 '여성이라는 젠더(gender)의 의미도 같이 있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여성의 실루엣은 다양한 여성 체조선수들의 신체 모습으로부터 추출된 이미지이다. 일부러 희미하게 제작된 윤곽선 때문에 그려지는 대상들은 실체가 없어 보인다. 체조선수의 주변 공간과 여성의 신체는 서로 어긋나 있다. 아마도 현실에서의 여성 공간과 자아가 일치하지 않는 모순점을 꼬집은 듯 하다. 하지만 기묘하고 신선하고 실험적이라는 생각 외에는 이해를 잘 할 수가 없다. :-)“캐롤 김은 아이덴티티와 외모, 혹은 머리카락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가이다.”라는 문장을 읽고 또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그녀의 머리카락 상태(?)를 보면서 적지않게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외모로부터 저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을 실행으로 옮긴 '실천성'이 그 하나고, 아이덴티티와 머리카락이라는 도저히 관계맺기 힘든 소재들을 엮어놓은 '기발함'이 또 하나의 이유이다. 자세히 글을 마저 읽어보니 그녀가 이렇게 머리카락에 집착하게 된 것은 그녀가 살아온 메인(Maine)주의 포틀랜드(Portland)라는 환경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한다. 이 포틀랜드는 동양인이 극히 드문 지역으로 검은 머리의 그녀는 언제나 눈에 띄는 존재여서 그녀는 일 년여의 기간에 걸쳐 지인(知人)들을 초대하여 자신을 남과 구별시켜주는 요소였던 머리카락을 자르도록 하는 헤어컷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단다. 이 일련의 작업을 통하여 그녀는 머리를 자르기 전과 후, 그리고 머리를 자르는 과정 중의 자신의 아이덴티티의 차이에 관하여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게 되었고 이 각각의 헤어컷은 서로 구별되는 새로운 스타일인 동시에 그녀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변화되고, 재건되는 공간으로 탈바꿈 된다고 한다. 정말, 퍼포먼스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서 본 작품들과 달리 조금은 삐툴삐툴, 삐죽삐죽 더 치열하다는 느낌도 들었고. 머리카락을 실험하지 않아도 한결 부드러워진 '고민'을 하는 '여유'가 이 작가에게 찾아오면 그 때는 어떤 방식으로 대화를 시도할지 정말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코리아와 아메리카 그 둘의 공간과 젠더의 차이 말고도 '외양'의 차이에 대해서 탐구한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였다.이번 전시에서 가장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김 수진은 여행이라는 이동의 메타포와 그 속에 내재할 수 밖에 없는 ‘장소성/비장소성’의 개념을 통해 문화적인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가라고 한다. 오히려 넘나들기를 자유롭게 자처하면서(지구촌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들을 사진으로 남겨 작품으로 출품하였다. 그 사진들은 달력사진에서나 보듯 아름답고 매혹적인 대상으로서의 장소는 아닌 것 같다. 왜냐면, 그녀는 여기저기를 이동하면서 그 장소에 위치하면서도 머무르지 않는 느낌 어딘지도 모르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장소에 관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장소성이 모호한 것은 그녀가 이민2세대로서 미국에 살고 있는 경험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장소에 대한 특정한 언급을 배제한, 여행에서의 사진 이미지로 고착되지 않은, 자신이 머무른 순간순간의 정지된 이미지만을 보여준다. 이것을 '혼란'이라는 개념보다는 '유동적'이고 '유려'하다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싶다. 작가에게 있어 '고향'이나 '뿌리'는 더 이상 하나의 장소와 연계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사진시리즈와 더불어 그녀는 비행기 루트를 상징하는 설치작품을 더불어 보여주는데 이는 작가의 여행 그 일련의 루트와 발자국들을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비행」이라는 작품이 가장 인상깊고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었다.그리고 어딘진 모르지만 들어본 적이 있는 ‘마이클 주’를 보고 아는 이름이 나와서 기뻐하며 보았다. 마티스나 렘브란트같은 대가들의 이름은 많이 들을 수 있지만, 현대미술로 오면 도통 알 수가 없어 나의 무식함에 체념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아는 이름이 있으니 더욱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작품 또한 친근하고 그 꼬집는 메시지를 이해하기 쉬워 기분이 좋아졌다. 신체는 동양적인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지만 머리는 제각각 다양한 아이콘으로 조합해놓았는데, 이것은 아마도 동양적인 외모와 바탕위에 정체불명의 미국적인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기이한 모습을 꼬집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작가는 단순히 외양이 다르게 보이는 미국인으로 자신을 분류하려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본래 지니고 있던 것, 문화와 인종으로 돌아가야함을 극단적으로 역설한다고 한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으로서 그 문화에의「동화」아니면 「거부」의 극단적인 상태가 아니라 문화와 인종적인 것을 기반으로 「재창조」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예체능| 2000.12.03| 4페이지| 무료| 조회(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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