關雎(관저) - 물수리關關雎鳩(관관저구) 꾸우꾸우 물수리在河之洲(재하지주) 모래 섬에 있네窈窕淑女(요조숙녀) 정숙한 아가씨君子好逑(군자호구) 군자의 좋은 짝이네參差荇菜(참치행채) 물위의 마름나물左右流之(좌우류지) 이리저리 따랐네窈窕淑女(요조숙녀) 정숙한 아가씨寤寐求之(오매구지) 자나깨나 찾았네求之不得(구지불득) 찾아봐도 못 만나寤寐思服(오매사복) 자나깨나 그렸네悠哉悠哉(유재유재) 언제나 만날까輾轉反側(전전반측) 잠 이루지 못했네參差荇菜(참치행채) 물위의 마름나물左右采之(좌우채지) 이리저리 따왔네窈窕淑女(요조숙녀) 정숙한 아가씨琴瑟友之(금슬우지) 금슬 타며 친했네參差荇菜(참치행채) 물위의 마름나물左右芼之(좌우모지) 이리저리 삶았네窈窕淑女(요조숙녀) 정숙한 아가씨鐘鼓樂之(종고락지) 종고 울리며 즐겼네*關關(관관): 새 소리의 의성어. 발음으로 봐서 뭔가 카랑카랑 쇠소리가 섞인 소리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적절한 의성어를 못찾아 '꾸우꾸우'라 번역하였음.*雎鳩(저구): 물새 이름. 암수 사이에 매우 다정하면서도 분별이 있는 새라고 함.*參差(참치):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여 가지런하지 아니한 모양.*荇(행): 마름. 정식 학명은 '노랑어리연꽃'이라고 함.*流(류): 물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며 마름을 쫓음.*思服(사복): 생각하고 그리워하다.*采(채): 나물을 따다.*友之(우지): 요조숙녀와 친하게 지내다. 가까워지다. 사랑하는 사이가 되다.*芼(모): 삶아서 올리다.*樂之(락지): 요조숙녀와 즐겁게 지내다.▣ 將進酒君不見 黃河之水天上來군불견 황하지수천상래君不見 高堂明鏡悲白髮군불견 고당명경비백발人生得意須盡歡인생득의수진환天生我材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烹羊宰牛且爲樂팽양재우차위락岑夫子 丹丘生잠부자 단구생與君歌一曲여군가일곡鐘鼓饌玉不足貴종고찬옥부족귀古來聖賢皆寂寞고래성현개적막陳王昔時宴平樂진왕석시연평락主人何爲言少錢주인하위언소전五花馬오화마呼兒將出換美酒호아장출환미주李白奔流到海不復回분류도해불부회朝如靑絲暮成雪조여청사모성설莫使金樽空對月막사금준공대월千金散盡還復來천금산진환부래會須一飮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進酒君莫停진주군막정請君爲我傾耳聽청군위아경이청但願長醉不用醒단원장취불용성惟有飮者留其名유유음자류기명斗酒十千恣歡謔두주십천자환학徑須沽取對君酌경수고취대군작千金천금구與爾同銷萬古愁여이동소만고수▶장진주(將進酒) : 악부(樂府)의 제목으로 권주(勸酒)를 의미한다.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개탄(慨歎)하고 술을 마셔 이 우수(憂愁)를 잊고자 한 주선(酒仙) 이백의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판본에 따라 글자가 약간씩 다르다.▶ 군불견(君不見) :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이미 봤다는 뜻. ▶ 천상래(天上來) : 하늘에서 내려옴, 황하의 근원은 곤륜산(崑崙山)에서 발원되었음을 이름. ▶ 분류(奔流) : 세차게 흘러 내리다. 콸콸 흘러내림. ▶ 고당(高堂) : 높고 멋진 건물, 부귀한 집. ▶ 청사(靑絲) : 푸른 실, 검은 머리를 청사에 비유했다. ▶ 금준(金樽) : 황금으로 만든 술동이. ▶ 아재(我材) : 나의 재능, 제 먹을 것을 다 타고 남. ▶ 팽양재우(烹羊宰牛) : 양고기를 삶고 소를 잡음, 宰는 잡을 재. ▶ 회수(會須) : 모름지기, 응당. ▶ 잠부자(岑夫子) : 잠참(岑參), 당대의 시인, 夫子는 선생 뜻. ▶ 단구생(丹丘生) : 도사인 원단구(元丹丘), 生도 선생의 뜻. ▶ 여군(與君) : 그대를 위해서, 與는 위하다. ▶ 종고(鐘鼓) : 종과 북, 아름다운 음악. ▶ 찬옥(饌玉) : 구슬같이 귀한 재료로 만든 진귀한 음식. ▶ 성현(聖賢) : 성인과 현인, 一本에는 '賢達'로 되어 있다. ▶ 적막(寂寞) : 죽고 나면 형체도 없이 고요하고 쓸쓸함. ▶ 진왕(陳王) : 위(魏)의 조조(曹操)의 세째 아들 조식(曹植)으로 시문에 뛰어났으며 진왕에 봉해졌다. 그의 시 [명도(名都)]편에 '돌아와 평락에 잔치하고 좋은 술 만 말(歸來宴平樂 美酒斗十千)'이란 구가 있다. 十千은 일만(一萬). ▶ 평락(平樂) : 평락관(觀), 낙양(洛陽) 서문에 있는 도교의 사찰. ▶ 자환학(恣歡謔) : 마음대로 즐기며 농을 함. ▶ 경(徑) : 곧, 즉시. ▶ 고(沽) : 술을 사다. ▶ 오화마(五花馬) : 말의 털빛이 오색으로 된 좋은 말. ▶ 천금구(千金구) : 값이 천금이나 나가는 털옷. 맹상군(孟嘗君)이 호백구(狐白구)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도 아까워하지 말고 술과 바꿔 먹자는 뜻. ▶ 이(爾) : 너, 그대. 소(銷)는 녹일 소, 소(消)와 통함.(해석)그대는 보지 않았는가?황하의 강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콸콸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 돌아가지 못함을그대는 보지 않았는가?멋진 저택에서 거울에 비친 백발을 슬퍼함을 아침에 푸른 실 같은 머리카락이 흰 눈처럼 되었다네인생에 뜻을 얻었으면 모름지기 즐기기를 다할지니금 술동이를 부질없이 달빛 아래 두지 말라하늘이 나를 낼 적엔 재능이 반드시 쓸 곳이 있을지니천금의 돈도 다 쓰고 나면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다양을 삶고 소를 잡아 또한 즐겨보세모로매 한 번 마심에 삼백 잔은 마시세잠선생, 단구 선생술을 들어 그대는 멈추지 말게그대들을 위해서 노래 한 곡 할테니청컨대 그대들은 나를 위해 귀를 기울여 달라좋은 음악도 좋은 음식도 족히 귀할 것이 못되니다만 원하는 것은 길이 취해 깨지 않는 것이라네예로부터 성인이나 현인은 모두 쓸쓸하였으나오직 술마시는 자만이 그 이름을 남겼다네진왕은 옛날 평락관에서 잔치할 적에한 말에 만 냥하는 술도 실컷 마시며 즐겼다네주인은 어찌해서 돈이 없다 하는가?즉시 술을 사다가 그대들에게 권하겠네오색빛 나는 말과 천금이나 되는 갖옷도아이를 불러 나가서 술과 바꾸어 오게 해서그대와 더불어 함께 영원한 이 근심을 녹여보리라▣ 偶成(우성)- 朱熹주희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학난성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 주희(朱熹: 1130-1200)는 남송(南宋) 때의 학자, 자는 원회(元晦), 호는 중회(仲晦) 또는 회암(晦菴), 학문이나 인격이 공자 이후 제일인자로 일컬어져 朱子로 불리우며, 宋나라 때의 이학(理學)을 집대성하여 유교에 철학적 기초를 세웠다. 저서에 {朱子大全}이 있다.▶우성(偶成) : 우연히 짓는다는 뜻, 즉흥시. 주자의 이 시는 학문을 권장하는 시로 예로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 일촌(一寸) : 지극히 작음, ▶ 광음(光陰) : 세월, 시간. ▶ 지당(池塘) : 못가의 둑, ▶ 추성(秋聲) : 가을 소리, 나뭇잎 따위가 바람에 불려 소리가 나는 것. 못가 봄 풀의 꿈이 채 깨기도 전에 벌써 섬돌 앞의 오동잎은 가을 소리를 낸다. 곧 봄인가 싶더니 어느덧 가을이라는 뜻의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말한다.(해석)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아주 짧은 시간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못 가의 봄 풀은 꿈에서 채 깨어나지도 않았는데섬뜰 앞 오동나무 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내네.도연명 ▣ 飮酒陶淵明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此中有眞意치중유진의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欲辨已忘言욕변이망언▶ 도연명 陶淵明 [365~427] : 자(字) 연명 또는 원량(元亮). 이름 잠(潛). 문 앞에 버드나무 5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장시성[江西省] 주장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출생.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晋)의 명장 도간(陶侃)이며, 외조부는 당시의 명사 맹가(孟嘉)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이 그렇게 풍족하지 못한 소지주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좨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鎭軍參軍) ·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펑쩌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사임한 후 재차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의 퇴관성명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사전(史傳)에는 상관의 순시 때에 출영(出迎)을 거절하고, “나는 5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고 적혀 있다. 향리의 전원에 퇴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하여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그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