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현대 예술에 들어오면 예술은 더 이상 무언가의 가상이기를 포기한다. 보드리야르는 ‘내파’란 개념을 도입하며 실제와 가상 사이에 구분이 없다고 단정 짓고 말았다. 이 가상의 포기는 형태와 색체의 해방을 가져오고 고전주의자들이 수없이 고민해온 대상을 재현할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대상과 얼마나 닮게 재현하느냐가 아니다. 작품 자체가 지닌 아름다움이다. 칸딘스키는 점, 선, 면이 회화의 세 가지라고 말했다. 다빈치는 점, 선, 면에다가 체를 하나 더 얘기했다. 칸딘스키는 왜 체를 빼버렸을까… 그것은 더 이상 점, 선, 면이 모여서 구체적인 형태를 이룰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상을 재현하려고 했던 고전적 회화는 재현 대상을 가리키는 일종의 ‘기호’였던 것이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은 논리적으로 일상적 사물과 구별되지 않고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된다. 여기서 현대예술의 오브제가 시작된다.우리는 뒤샹의 작품을 보기전에 다다이즘의 맥락을 잠시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다다이즘은 아방가르드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적인 예술 운동이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인습 반대와 고전주의자들의 예술론을 비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제도로서의 예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다다이즘은 어떤 다른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 보다도 무정부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경향을 훨씬 더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다다이즘을 이끄는데 핵심적 역할을 맡은 트리스탄 차라는 “입체파는 미술 유파이고 미래파는 정치적 운동이었지만 다다는 일종의 정신 상태였다”고 밝힌다.다다이즘은 부르주아 사회와 함께 이 사회의 산물이라고 할 부르주아 예술 파괴를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었다. 20세기 초엽의 사회적 ? 역사적 위기 상황에 걸맞게 다다이즘은 예술적 무정부주의나 허무주의를 표방함으로써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를 역설하였다. 극단적으로 회의주의의 입장을 보이는 다다이즘은 심지어 다다 자체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런 다다이즘 예술 운동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뒤샹이었다.뒤샹이 변기에 어떤 손질도 하지 않고 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사건은 미술사에서 대단히 유명한 일화이다. 이 작품은 두 가지 의문을 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과연 미술작품이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품게 했다는 점이다. 이런 미술 가치의 물음은 보드리야르에서 구체화 되는데 그는 뒤샹과 더불어 “평범한 것이 예술이 되고, 또한 예술은 이제 다른 무대, 즉 환상의 무대를 만들어 내는 대신 실제를 빼앗는 것에 집착한다” 고 주장한다. 사실 대부분의 현대 예술은 기존 예술의 미적가치를 버리고 평범한 것에 또 다른 가치를 뒤집어 씌운다. 여기서 평범함은 고전주의 회화에선 철저히 외면당해 왔던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모더니즘 그중에서도 다다이즘에 이르러 예술적 작품으로 탈바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뒤샹에게 품게 되는 과연 미술 작품이란 무엇인가? 라는 이러한 의문은 작품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예술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시장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옴으로써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는 지극히 모순 된 상황과 마주치게 했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점은 자본주의가 지닌 한계에 다다른 뒤샹의 지독한 냉소주의와 신랄한 비판정신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또 한 가지, 뒤샹의 작품은 더 이상 손으로 그리거나 직접 물건을 만드는 수공적인 작업에서 미술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졌다는 그의 충고가 담겨 있다. 그는 생활의 기성품을 선택하여 새로운 예술 가치를 씌우면서 원래 그것의 실용적인 의미가 소실되도록 했다. 그리고 그 물체에 대해 또 다른 사고를 만들어 낸 것이다. 뒤샹이 이렇게 사물을 선택하여 새로운 위치에 놓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지는 변형(transformation)을 의미하며, 이러한 행위는 오브제가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예술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행위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기성품 작품은 오직 예술가가 만들었으며 예술가의 서명이 적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예술 작품으로 간주할 뿐 그 밖의 점에서는 다른 일상생활의 대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L.H.O.O.Q.』이것은 두 가지의 차원에서 해석되어 질 수 있다. 먼저, 오브제는 물리적인 위치의 전환을 겪는다. 즉, 화장실에 있어야 할 변기가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는 문맥에서의 전환이다. 또한 이것은 그와 동시에 논리적인(심리적인)위치에서의 전환이 된다. 싸인을 하고 이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그 사물 자체는 의미의 전환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뒤샹은 ‘표현되지 않은 것이라도 의도된 것’으로써 레디메이드가 갖는 결정적인 의미를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즐긴다는 기계적 도식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뒤샹은 “을 통해 화가란 아이디어를 다루는 사람이고 그 아이디어를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는 철학자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시각은 미술작품은 영구불변하고 기념비적인 특성이라는 가치의 중요성보다 대중들과 만나면서 생기는 교감이나 소통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모더니즘이 지닌 장점인 독자의 탄생과도 일맥상통한다.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시사하는 바는 정신적 의미나 철학적 교의에서 보다 예술이 예술이라는 아이러니를 던져 주었다는 점일 것이다.변기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재현하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해 뒤샹은 이렇게 반문한다.“그렇다면 변기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은 무엇인가?” 뒤샹에 의하면 그것은 변기를 잘 그린 그림도,변기를 찍은 사진도 아닌 변기 그 자체다. 그래서 가게에서 파는 기성품을 그대로 전시회에 출품했다는 것이다.마지막으로 변기를 손수 그리거나 만들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 뒤샹은 “창조의 의미가 반드시 만드는 것에만 있는가? 제시할 수 있는 발견도 창조 아닌가?”고 반문한다. 뒤샹의 변기가 함축한 것은 '예술은 더 이상 풍경이나 인물을 손으로 재현하는 테크닉이 아니다'라는 메시지였다. 그것은 예술가의 정신, 그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뒤샹은 예술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었다.??손으로 만드는 수공적 기술이 아닌 선택하는 정신적 행위가 예술의 가장 본질이라는 뒤샹의 이론은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는 1913년 미술가의 역할에 대하여 “물질을 교묘하게 치장하는 데 있지 않고 미의 고찰을 위한 선택에 있다”는 정의를 내렸다. 이것이야말로 개념미술의 근본적인 미학이다.『자전거 바퀴』,이제까지 그의 예술 세계를 살펴봤다면 과연 이런 예술 작품은 가치가 있을까? 가치가 있다면 우리는 현대 예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브르통의 관점에서 뒤샹을 본다면 그는 한번도 예술을 한 적이 없게 된다. 그는 어떤 창조적인 역할도 새로운 기법도 만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예술로서 승화가 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앞에서 보드리야르를 언급한바 있지만 그는 뒤샹을 ‘초미학’의 선구로 높이 평가한다.여기서 초미학이란 오늘날 “다른 가치들처럼 미적 가치도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현대 예술은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진실과 허위를 해석하는 도덕적 담론으로서의 미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뒤샹에 대해 “커다란 전환은 뒤샹과 함께 시작됩니다. 레디메이드의 사건은 주체성의 중단을 가리키는데, 이때 예술의 행위는 대상이 예술품으로 전환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술은 따라서 거의 마술적인 조작에 불과합니다. 즉 대상은 자체의 평범한 속에서 세계 전체를 레디메이드로 만드는 미학 속으로 이동합니다. 뒤샹의 행위 자체는 극히 적지만, 그로부터 세계의 모든 평범함은 미학이 되고, 거꾸로 모든 미학은 평범한 것으로 된다. 다시 말하면 평범한 것과 미학의 이 두 영역사이에서, 전통적 의미에서의 미학을 실제로 끝장내는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오래된 미적 가치에 향수를 갖고 있지 않는 보드리야르에게 뒤샹은 반가운 존재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