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서 행방불명된 2살배기 여자아이가 사흘만에 이웃 주부에 의해 살해돼 암장됐으며, 사건 배경에는 유치원 때부터 시작되는 지나친 교육열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와카야마 하루나란 여자아이는 22일 오전 엄마를 따라 동네유치원에 다니는 오빠를 마중하러 갔다가 사라졌다. 경찰은 아이를 찾는 전단을 뿌리고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였으나 25일 경찰에 자수한 용의자는 뜻밖에도 이웃집 주부였다. 용의자와 피해자의 집은 겨우 200m 정도 거리밖에 안되고, 모두 5살짜리 남자아이와 2살배기 여자아이를 두고 있었으며 남자아이들은 같은 유치원에 다녔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자주 만나 이야기하는 사이였다. 사고가 난 날 용의자는 미리 준비한 검은 가방을 들고 2살배기 딸아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갔다. 하루나의 엄마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하루나를 근처 공중변소로 데리고 가 목을 졸라 죽인 다음 가방에 넣고는 자신의 딸아이를 데리고 태연하게 걸어서 집으로 갔다. 그는 실종아이 찾기 학부모 모임에도 참석했으나 사건 이틀 뒤 불교승려인 남편에게 사실을 털어놨고 남편의 간곡한 권유로 자수했다. 아직 살해동기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용의자는 경찰서에서 "엄마끼리의 심적 불화 때문에 아이를 죽이려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변에서는 최근 피해자 집의 2살배기는 유명 유치원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용의자 집의 딸은 탈락했고 남자아이들을 명문 소학교에 보내는 문제로 말다툼했다는 점 등을 들어 교육문제로 인한 불화가 직접적인 살해동기가 된 것으로 추측한다. 문제의 유치원이 있는 도쿄 분쿄구 지역은 교육열이 높은 학군으로 유명하다. 명문유치원에서 명문대학까지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일본 교육현실 속에서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학부모들의 비뚤어진 교육열이 남의 자식을 죽이고 만 것으로 보인다.한겨레신문 99.11.27위의 기사는 한겨레신문에 실린 살인 부른 교육열 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은 마치 한 어머니의 정신적인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현대의 교육열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이 사건이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이란 것인데 과연 우리나라도 이런 끔찍한 일이 발생할 수 도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요즘 우리네의 학부모들은 어린 자식들의 유치원 입학부터 상당한 신경전을 벌인다고 한다. 어떤 곳은 대학입시 못지 않은 경쟁률을 보인다고 한다. 과연 우리나라의 교육개혁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겠지만 역시 나도 우리나라의 교육개혁을 위해서는 먼저 대학을 개혁해야 교육개혁이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사회개혁은 교육개혁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교육개혁은 대학개혁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든 교육문제의 종착역이 결국 대학입시 병폐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럼 대학입시병의 근원적인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김대중 정부 이후 많은 혁신적인 교육개혁안들이 제안되고 실행되었다. 과거 어느 정부보다도 시대적 변화흐름에 맞춘 개혁의 의지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은 혼란스럽다는 생각들이 지배적이다.결국 모든 문제와 원인은 안재오 교수님의 말씀처럼 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대학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서열화에 있다. 대학의 서열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교육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처방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서열화는 정책적인 의도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진 사회병이기 때문에 의지만 있다면 되돌려 놓는 것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그러나, 방법이 문제다. 국가는 서울대학교가 국립대학이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타대학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재정을 쏟아 붓고 있다. 그러나, 그 돈은 무슨 돈인가? 다름 아닌 국민의 세금이다. 국민의 세금은 모든 국민에게 공정하게 돌아가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면 국공립대학을 제외한 사립대학의 학생들은 다른 나라 사람인가? 국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자본주의적 현대사회에서 돈의 흐름이 곧 모든 문제의 흐름을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쉽게 납득할 것이다. 정부의 공정한 자원배분이 필요하고, 공정한 세금관리가 필요하다. 학생 1인당 표준교육비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표준교육비란 학생1인당 소요되는 똑같은 비용을 말한다. 대한민국의 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원 받을 수 있는 똑같은 교육비를 표준교육비라고 한다. 즉, 표준교육비의 지원정책으로 대학의 조건을 동등화하자는 것이다. 즉, 표준교육비의 지원정책으로 대학의 조건을 동등화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립대학은 전체예산의 2/3를 중앙정부가 부담, 나머지 1/3은 본인이 부담하고, 공립(시립과 도립)대학은 중앙정부가 1/3을, 지자체가 1/3을, 본인이 1/3을 부담하고, 사립대학은 중앙정부가 1/3을, 재단과 동문회 등이 1/3을, 본인이1/3을 부담하는 비중으로 편성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 교육개혁, 이렇게 , 박판영(한신대학원장/민주개혁국민연합공동대표)결국, 공공 교육투자는 획기적으로 증가되어야 하고, 방대한 사교육비는 어떻게든지 공공화 되어야 한다.교육은 돈만 있으면 잘 될 수 있다 는 생각도 잘못이지만, 교육은 돈이 없어도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다 는 생각도 위험천만이다. GNP 대비 4% 미만의 한국의 공공 교육 투자 수준은 후진국을 제외한 나라들 중, 선진국들의 그것과 비교해서 최하위 수준을 맴돌고 있다.많은 논자들은 공교육비는 최소 GNP 5% 수준으로는 끌어올려야 하고, 정부 예산 중 약 20%인 문교예산은 25%까지는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말할 나위 없이 빈한한 공공 교육투자는 빈약한 교육 시설, 설비, 운영비로 이어져 교육 운영에 심한 제약조건이 되고 있다.이에 반해 사교육비는 GNP의 7%∼8%로 추정되고 있다. 더구나 그 사교육비 중 약 반은 거의 비교육적인 낭비라고도 볼 수 있는 과외비 , 참고서비 등 입시준비용 비용으로 추산되는 것은 더 기이한 한국적 현상이다.사교육비의 비대는 교육누수 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즉 교육이 과외 , 입시학원, 외국어학원, 미술학원, 음악학원, 속셈학원으로 그리고 참고서, 연습장으로 새나가고 정작 학교의 교육환경과 교육 자체는 메말라간다. 뿐만 아니라 사교육비의 비중의 비대는 부모의 부귀에 따라 아이들의 교육의 기회와 질이 크게 좌우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교육기회의 불평등과 각종 교육차를 빚어내는 데 직결되다. 적어도 자라나는 아이들은 부모의 빈부에 관계없이 풍족한 교육 환경에서 풍족한 교육적 배려를 받으면서 자랄 수 있어야 한다.한국의 독특한 공교육비 빈곤과 사교육비 비대의 교육 투자 구조는 어떻게든지 시정되어야 하다. 공교육 투자 빈곤이 사교육비 비대를 유발하고, 사교육비 비대가 공교육비 빈곤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되는 악순환은 이제 제거되어야 한다.학교가 그것이 놓여있는 사회로부터 있을 수도 없고 고립되어 있어도 안 된다. 그러나 자라나는 연약한 세대는 동대문 시장 한복판에 팽개쳐 놓은 아이처럼, 모진 현실의 세파를 그대로 막바로 받아서는 제대로 자라날 수가 없다. 학교는 우선 재정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명백히 학교가 돈을 벌어 쓸 수는 없다. 공공투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또한 학교는 정치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즉 학교는 정치도구화 되는 것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이것은 말은 쉽지만, 실제에서는 마구 범칙되게 있는 규율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경험해 왔다. 온갖 구실로 합리화된 정권의 구미에 맞게 교육과정, 교과서 내용이 돌변하고, 정치교수 로 몰려 강단을 떠나고, 행사에 학생들이 마구 동원되었다.반면에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서 대학들이 운동권적인 이념의 상징적인 선전장, 행동장이 되어 대학이 어수선하고 학사마저 자주 마비되는 현상도 언젠가는 청산되어야 할 학원 정치도구화의 예이다.그럼 한국의 초중등 교육은 어떠한가? 한국의 영아, 유아 교육은 보다 광범한 공공적 관심을 받아야 하며, 초등학교는 따뜻하고 재미있는 곳이라야 하고, 중고등학교는 입시준비의 학습의 고달픔에서 벗어나서 삶과 문화를 폭넓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하며, 대학은 학구의 수월함과 표준과 규율을 찾아야 한다.
한국 교육의 여러 가지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학벌주의 교육풍토이다. 정치계, 경제계, 문화계 어디하나라도 학벌이 위력을 떨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학벌주의가 인식된 우리나라 사회가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차이를 학력과 학벌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환원시키고 단순한 차이를 불평등한 서열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획일화된 서열에 따라 부와 권력을 너무도 불평등하게 분배한다. 그 결과 우리사회에서 교육은 인간성을 도야하고 자기의 개성과 소질을 계발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차별과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어버렸다.이 땅에 사는 우리들 대다수는 청소년기는 학교에서 공부 못한다고 무시당하며 산다. 내가 남들보다 달리기를 못한다 하여 차별 받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처럼 내가 남들보다 공부를 못한다 하여 차별 받는 것 역시 부당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학교는 단지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학생을 차별한다. 오직 시험성적만이 최고의 가치로 숭배되는 학교에서 인간의 보다 중요한 미덕과 상상력 그리고 다양한 소질들은 꽃을 피울 수가 없다.그렇게 부당한 차별을 견디고 자라서 사회에 나오면 우리는 다시 학벌이 나쁘다하여 평생을 차별과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 것은 이 땅에서 한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 잣대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부와 권력은 극소수의 상류대학 출신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다. 입법 사법 행정을 통틀어 모든 공직과 경제계, 언론계, 학계 그리고 문화계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권력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극소수의 학벌문중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그런 우리 사회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 그리고 대학을 나왔더라도 이른바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나 차별과 무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런 차별의식은 어느덧 우리의 무의식 속에도 스며들어 우리는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나면 그의 학벌을 알아야 그가 누군지 안다고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학벌이 좋으면 우리는 그가 모든 면에서 쓸모 있는 사람일 것이라 판단하고 그렇지 않으면 보잘 것 없는 사람일 것이라 단정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한 나라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일과 기능이 필요하고 그에 따라 다양한 재능과 소질이 요구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학벌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함으로써 쓸모 없는 시험선수만을 양성할 뿐 사회를 위해 진정으로 요구되는 소질과 재능을 구조적으로 억압함으로써 나라의 힘을 스스로 쇠약하게 만들고 있다.그러다보니 우리는 고등학교 때까지 서로 학벌 좋은 대학을 가겠다며 인생의 기로가 달린 단 한번의 수능시험을 잘 치루기 위해 입시 경쟁을 하고 쓸모 없는 문제집 풀이만 반복하고 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이기거나 져서 대학에 들어온 지금도 이른바 명문대 소속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재수나 편입을 생각하는 등 학벌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하지만 학벌사회가 야기하는 가장 심각한 비극은 학벌서열로 인해 교육이 돌이킬 수 없이 황폐화된다는 데 있다. 서열화 된 학벌순위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일상화된 까닭에 학생들은 일찍부터 남보다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입시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우리 교육의 목표가 되고, 학생들이 우정을 가꾸면서 미래의 꿈을 키워야 할 학교는 살벌한 생존경쟁의 경기장이 되어버린다.입시경쟁은 무척이나 비효율적이다. 입시경쟁은 모든 학생들을 한 가지 평가방식을 통해 서열화함으로써 개인의 학문적 개성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사교육비를 투자하고 밤을 꼬박 새어가며 엄청난 양의 문제집을 암기하지만 학생들은 결국엔 어느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무지한 상태로 대학에 들어오게 된다. 많은 학생들이 단지 일류대학의 간판을 얻기 위해 재능도 없고 취미도 없는 학과에 들어가는 나라의 대학이 경쟁력을 가질 수는 없다.그렇다면 잘못된 한국교육을 고쳐나가기 위한 방법. 그 중에서도 학벌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 것인가.일단은 대학이 평준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예전 중·고등학교 평준화처럼 국가가 추첨을 통해 대학에 학생을 배정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대학들 사이에 학생 수준이나 교육여건 상의 차이를 실질적으로 줄여나감으로써 고정된 서열을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하루 빨리 대학들이 실질적으로 평준화될 수 있도록 대안들을 개발하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또한 교육의 공공성문제도 있다. 단순히 대학들 사이의 자유경쟁이나 국립대학의 민영화를 통해 학벌을 타파한다는 식의 접근방식은 탈피해야 하며 대학서열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대학들 사이의 자유경쟁이나 국립대학의 민영화는 교육을 시장경쟁에 내맡김으로써 학벌서열을 조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지금 한국대학들의 가장 큰 내부적 문제는 대학 내의 의사결정이 전혀 공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특히 대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립대학은 거의 모두가 사적 소유물로 간주되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의 살림이 대학 구성원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칙적으로 교육은 시장에 맡겨질 것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첫 번째 임무이다. 교육은 교사와 교수 그리고 학생들의 능동적인 참여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톰슨 (Joseph John Thomson, 1856~1940)전자를 발견함(1897)으로써 원자구조에 대한 지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공헌했다. 190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1908년 기사작위를 받았다.음극관의 발견음극관은 현대의 두 가지 아주 뛰어난 기술인 텔레비전과 컴퓨터 스크린의 기초이다. 하지만 19세기에는 원래 실험 기구였다. 금속 전극이 꽂힌 유리관이 기본 형태인데, 그 안을 진공 상태로 만들고 특별한 기체를 주입한다. 전극에 전압이 충분한 전지를 연결하면 음극선이 관의 반대편 끝에 부딪히며 빛을 내거나 형광을 발한다. 그 선은 광선이 아니라 전자의 흐름이다. 전자는 맨 처음 발견된 원자 구성 입자이다. 1897년 조지프 존 톰슨(Joseph John Thomson)이 발견했으며, 이는 20세기 원자론의 발달에 결정적인 첫걸음이었다.교육과 초기 경력조지프 존 톰슨은 1856년 12월 18일 영국 멘체스터 교외의 치섬힐에서 났다. 그의 아버지조지프 톰슨은 맨체스터 근교에서 서적을 판매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에마 스윈들스였다. 겨우 14세에 지금은 빅토리아대학교가 된 맨체스터의 오웬스 칼리지에 들어갔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과 달리 오웬스 칼리지는 몇몇 실험 물리학 강좌를 개설했는데, 톰슨에게는 행운이었다. 1876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았으며 여생을 케임브리지에 머물렀다. 1880년 수학학사학위를 받은 후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실험 연구를 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전자기학 이론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J.C. 맥스웰이 설명한 것처럼 전기와 자기는 상호관련이 있고, 둘 중 한쪽에 양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다른 한쪽에는 이에 상응하는 변화가 일어났다.톰슨의 업적은 과학자 사회에서 곧 인정되어 1884년 런던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캐번디시 연구소의 물리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물리학의 역사에 있어 중대한 시점에서 물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전기·자기·열역학에서의 위대한 발견 이후 1880년대의 많은 물리학자들은 소진된 광산처럼 물리학이 끝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0년경 이러한 생각은 구식 보수주의자들만의 것이 되었고, 1914년경 새로운 물리학이 이미 존재하여 대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질문을 제기했다. 새로운 물리학은 그것에 몰두할 만큼 운이 좋고 무한한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아마도 이 변화에 관련되어 있던 위대한 과학자들은 5명을 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같은 이름을 꼽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톰슨을 다섯 손가락 안에 포함시킬 것이다.전자의 발견톰슨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일련의 연구를 통해 1897년 모든 물질은 그 원천이 무엇이든 같은 종류의 입자들을 포함하고 있고 이 입자는 원자보다 훨씬 더 가볍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연구는 1896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강연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중단된 적이 없었다. 그는 이 입자를 미립자라 불렀지만 지금은 전자로 불리고 있다. 그의 발견은 음극선의 본질에 대한 오랜 논쟁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음극선은 대부분 공기나 다른 기체를 빼낸 용기를 통해 전류를 흘려줄 때 일어난다. 당시 독일의 거의 모든 물리학자들은 이 가시광선이 에테르(당시 모든 공간에 충만해 있다고 믿어지던 무게 없는 물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정상 광선이나 최근에 발견된 X선과는 다른 것이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의 물리학자들은 가시광선이 전하를 띤 입자라고 믿었다. 톰슨은 개량된 진공기법을 이용해 가시광선이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 광선은 방전이 일어나고 있는 기체의 종류나 또는 도체로 사용된 금속의 종류에 상관없이 같은 입자, 즉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미립자가 모든 종류의 물질 속에 존재한다는 톰슨의 결론은 이후 3년 동안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때 그는 같은 특성이 있는 미립자가 다른 방법, 예를 들어 고온의 금속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자의 크기와 수에 비추어볼 때 '깎아내었다'는 말이 더 적절한 말이지만 톰슨은 처음으로 '원자를 쪼갠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원자는 많은 전자를 포함하지만 그 총 질량은 원자의 1/1,000에도 미치지 못한다.19세기말에 이르러 대부분의 과학 분야에서는 톰슨의 광범위한 발견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1903년 예일대학교의 실리만 강좌를 통해 자연 현상에서 원자구성입자들의 형태에 대한 그의 견해를 상세히 설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을 때, 그는 빛의 불연속 이론을 제안했다. 그의 가설은 아인슈타인의 후기 광자 이론을 예시한 것이었다. 1906년 기체의 전기 전도율에 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08년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909년 영국과학진흥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1912년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톰슨은 연구 자체에만 몰두하는 과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과학자로서 유용한 많은 연구 결과를 내는 동시에 캐번디시 연구소의 매우 성공적인 관리자이기도 했다(이곳에서 R.E. 패짓을 만났으며 그들은 1890년 결혼했음). 그는 연구계획을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교나 칼리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상태에서 주로 학생들이 낸 수업료를 연구소 건물을 2채 더 짓는 데 출자했다. 왕립학회가 영국의 모든 대학교와 과학분야를 지원하는데 쓰는 약체 정부보조금의 일부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캐번디시 연구소는 다른 어떤 정부보조금도 받지 못했고 자선단체나 산업체로부터의 기부금도 없었다. 헌신적인 한 부원의 기증으로 톰슨의 양극선 연구에 필수적인 작은 액체-공기 기계를 구입할 수 있었는데, 그의 양극선 연구는 최근 발견된 원자핵에 대한 지식을 크게 증대시켰다. 물리학에 있어서의 그의 업적은 자신이 이룩한 연구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크게 자극시켰다는 데 있다. 1895~ 1914년에 일군의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서 왔고 그 밑에서 연구한 뒤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서 교수가 되었다. 그의 제자들 중 7명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톰슨은 가르치는 의무를 매우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정규적으로 오전에 초급반 강의를, 오후에 대학원 강의를 했다. 그는 가르치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질 기본 개념을 재고하게 해주기 때문에 연구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코 새로운 연구분야에 참여하려는 사람에게 기존의 연구결과를 읽고 시작할 것을 권하지 않았다. 먼저 자신의 개념을 명확하게 한 후에 기존의 연구들을 읽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에 변화를 줄만큼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의 연구보고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캐번디시 연구소는 이미 물리학자의 성지였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물리학자의 메카였다. 때로는 많은 조수를 필요로 하는 서투른 실험가였다는 것이 톰슨의 결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하지만 톰슨은 기구를 설계하고 개량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A. E. E. 메켄지는 톰슨이 성공한 것은 근본문제를 명쾌하게 인식하고, 가설을 정립하며, 실험 테스트를 계획하고, 수하에 일하는 팀을 이끌고 모든 각도에서 공동의 공격을 지휘하는 능력 때문이었다. 고 썼다.
호킹, 스티븐 (Stephen William Hawking; 1942~ )우주론을 양자역학과 결합하기 위해 앞장서서 노력한 사람이 스티븐 호킹이다. 호킹의 업적은 확증 절차가 남아 있지만, 우주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최근에 이루어진 많은 중요한 논의들을 이끌어 왔다. 1960년대에 호킹은 우주에는 분명히 시초가 존재한다는 논증을 제시했으며, 우주 멀리 '블랙 홀(black hole)'로 알려진 붕괴된 항성의 본질을 밝혀 내고자 했다. 필시 가장 중요한 수훈은 우주의 '빅 뱅(Big Bang)' 이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촉발하고, 최근에 우주의 기원과 관련하여 '무경계 조건(no boundary condition)'을 정교화한 일이다."우주의 경계 조건은 우주가 어떤 경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킹은 무경계 조건을 이렇게 설명하였다."이것은 우주가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주가 작동하거나 시작하는 데에 외부의 다른 존재가 개입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죠. 물리 법칙은 어느 장소에서나 성립하고, 우주의 행동을 결정합니다."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과 마찬가지로 호킹은 종종 언론의 찬사를 받았으며, 많은 대중들은 그를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도록 길들여졌다. 그가 받은 최고의 축복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고통 덕분이다. 20대 초반 이래 호킹은 신체적으로 불구가 되는 퇴행성 질환인 근위축성 측식 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을 앓았다.호킹은 1942년 1월 8일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열대성 질병을 전공한 의사이자 연구 생물학자인 프랭크 호킹(Frank Hawking)과 이사벨 호킹(Isobel Hawking)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가 둘 다 중산층 가문 출신이고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다. 2차 대전 이후 아버지는 국립 의료 개발 연구소의 기생충학과 학과장에 임명되었다. 스티븐은 열세 살 때부터 세인트올번 학교를 다녔는데, 우수했지만 탁월하지는 않은 학생으로 학급에서 중간쯤이었고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10대에 자신이 물리학이나 수학 서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나중에 "내가 물리학을 연구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리학이 가장 기본적인 학문이기 때문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열일곱 살때인 1959년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해서 2년간 공부한 다음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옮겼다. 호킹은 천문학을 전공할 생각은 있었지만 천문학의 관찰적인 측면에는 '감명을 받지 못했으며' 학부생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공부만을 했다.1963년 초에 호킹은 척추와 골수, 대뇌 피질이 돌이킬 수 없이 퇴화하여 결국 신체의 마비로까지 이어지는 ALS 진단을 받았다. 유일한 위안은 그 병이 고통이 없으며 지력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낙담하다가 신체의 퇴화가 안정되고 더 이상 일찍 죽을 것 같지 않게 되자, 호킹은 비록 휠체어에 의존하고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의기소침함을 극복하고 자기 길을 계속 가기로 결심했다. 1966년 「팽창하는 우주의 성질」이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곤빌 앤드 케이스 칼리지의 응용 수학과와 이론 천문학 연구소 교수로 재직했다.과학 연구를 시작하면서부터 호킹은 우주론의 기본 문제들과 씨름했다. 1960년대 중반 호킹은 '특이점(singularity)' 개념을 검토하던 저명한 수학자이자 이론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 1931- )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나온 특이점 개념은 원래 단일한 지점으로 집중되는 '팽창하는 우주' 개념을 낳았다. 사실상 여기서 물리학의 법칙이 무너진다. 아인슈타인은 특이점이 상대성의 결과임을 알았지만, 또한 특이점이 순수하게 이론적인 실재라고 생각했다. 호킹은 특이점 모델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펜로즈와 함께 작업하면서 그것이 시간 개념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밝힘으로써 첫번째 중요한 이론적 발견을 했다. 호킹은 후에 "중요한 문제는 시초가 있는가 없는가이다"라고 적었다. "로저 펜로즈와 나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정확하다면 시초는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결과에 대한 초기 주장은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 나타나 있으며 뒤에 펜로즈에 의해 다듬어졌다. 호킹과 펜로즈의 특이점 정리는 1970년에 발표되었다.대체로 우주에 대한 이론적 규명은 관측 천문학을 향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관측 천문학은 전보다 훨씬 성능 좋은 기구들을 써서 설명하기 어려운 자료를 상당량 축적해 오고 있었다. 만약 특이점이 존재한다면 분명 연료를 모두 태우고 붕괴한 항성들 - '블랙 홀'은 1967년 존 휠러(John Archibald Wheeler)가 제시한 용어이다. - 의 선회부에서 발견되어야 했다. 블랙 홀은 1961년에 발견된 점과 같은 '퀘이사(quasar)'과 몇 년 후에 발견된 '맥동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맥동성의 존재는 몹시 당황스러운 일이어서 처음에는 '작은 초록 인간들(Little Green Men)'에서 따서 LGM이라는 머리글자를 붙였다). 1970년에는 인공위성의 망원경을 통해 천체에서 백조자리 X-1 같은 특이한 중력의 중심지를 비롯해 X-선의 근원지를 발견했다. 이것이 블랙 홀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증명할 도리는 없었지만, 특이한 활동 상황의 증거는 매혹적인 것이었다.호킹의 블랙 홀 연구는 1970년대 중반에 활기를 띠었다. 블랙 홀의 표면이 줄어들 수 없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열역학의 개념으로 어떤 계의 무질서를 가리키는 엔트로피와 관련이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처음에 호킹은 단지 비유로만 생각했지만, 휠러의 대학원 학생 중 하나인 베켄슈타인(Jacob Bekenstein)이 그 관련이 실제적이고 또 측정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며 그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다. 호킹은 처음에 동의하지 않다가 뒤에 마음을 바꿨다. 또 1974년 블랙 홀이 온도를 지니고 있으며 방사선을 방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학적으로 설명된 이러한 생각은 베켄슈타인에게는 안되었지만 호킹 방사(Hawking radiation)로 알려졌다. 이 발견을 가리켜 그리빈(John Gribbin)은 "호킹 개인에게는 물론이고 과거 50년 동안의 물리학 역사상 위대한 업적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적었다. 처음에는 너무 급작스럽고 놀라운 생각이어서 단호하게 거부당했다. 그러나 양자 이론과 열역학적 관련성을 이용해 블랙 홀과 같은 중력 하수구를 설명하려 한 호킹의 연구는 흥미를 불러일으켰으며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었다. 파겔스(Heinz Pagels)는 "이러한 매혹적인 이론의 발전과 더불어 블랙 홀은 '수학적 호기심'에서 이론 천체물리학의 중심으로 이동했다"고 썼다.1979년 호킹은 케임브리지 대학 루카시안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론 물리학에 끝은 보이는가?'라는 제목의 취임 연설에서 그는 세기말 이전에 통일적인 이론이 등장할지도 모른다고 점쳤다. 한편 그는 이론 물리학의 생명력이 컴퓨터 기술의 지수적 발전 때문에 제약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예견은 아마도 실현되지 않겠지만, 이 중대한 시기에 호킹은 '새로운 아인슈타인'이라 불리면서 대대적인 추종과 명성을 얻었다. 그는 많은 상을 탔고, BBC 방송에 소개되었으며,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라는 베스트셀러를 내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주연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기도 했다.
공용어인 한족의 중국어도 지방에 따른 사투리가 많으나, 베이징 관화(官話)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지니고 살고 있다. 1949년 중국공산당 정부수립후1) 현대북경어의 발음을 표준어로 삼고2) 북방어를 그 기초 방언으로 하며3) 전형적인 현대의 구어로 쓰여진 작품을 그 문법적 규범으로 하는 3가지 원칙아래 [보통어]라는 이름의 표준어를 제정하였다.1. 중국어의 특성1) 구조적 특성중국어는 고립어로서 서방의 굴절어와는 명백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어음학적특징으로 중국어는 다른 언어의 음운체계에 비해 성조라는 요소가 하나 더 있으며 이 성조 때문에 음악적인 리듬감을 가지고 있다. 이밖에 중국어의 문법적 특징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명사가 단 복수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둘째, 동사 역시 단 복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셋째, 성별변화가 없다. 즉 남성 여성명사 등의 구별이 없다.넷째, 대명사에도 격의 변화가 없다. 즉 주격이니 소유격이니 하는 구별이 없다.다섯째, 조동사의 종류나 활용이 미미해, 세밀하고 정확한 묘사가 어렵다.여섯째, 시태가 없다.일곱째, 관사가 없다.여덟째, 일반적으로 주어를 생략하고 말한다.아홉째, 단어의 형태변화가 거의 없다.이상에서 보듯이 중국어의 구성은 다른 언어에 비해 간단 소박하다. 이로써 간소화경향은 결과적으로 사유에 있어 세밀성을 배제하고 모호한 진술이나 묘사로 기울게 하였으며 미세한 부분을 크게 따지지 않는 언어문화를 형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종합적인 사고나 처리 등에 있어서는 남다른 안목을 갖게 한 것은 사실이다. 대륙적 기질 이라는 말도 아마 이런데서 유래된 것 일 것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작은 것으로 사물을 보는 중국인의 언어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이름의 연월일표시이다. 즉 성의 먼저이고 이름이 나중인데 이는 '성'쪽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며, 일자표시도 년, 월, 일, 시 순서로 표시해 서방의 적은 것에서 큰 것으로 관찰하는 방식과 명백한 차이를 보인다. 기본적으로 중국어는 이러한 부르고 있으며 화교들은 화어로, 우리나라와 일본은 중국어라 부른다. 그러나 중국은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아서 지역별로 많은 방언이 있다. 예로부터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사람들이 만나면 중국인끼리의 대화에도 통역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통역을 필요로 할 정도의 방언으로 일곱 개의 방언이 있다. 보통화의 모태가 되는 북방방언, 상해어로 대표되는 오방언, 상방언(호남어), 공방언, 객가방언, 민방언(복건어), 오방언(광동어)이 이들이다. 나머지는 여기서 파생되는 방언이 있는데, 거의 위의 일곱개 방언에서 지방적 특성이 가미된 차방언 이다.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북경에서 듣는 발음이 정확한 표준어인 보통화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즉 북경어는 북경사투리에 가까운 것으로 혀를 심하게 말고 분명한 연속음을 갖고 잇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표준어인 보통화를 말하려고 노력해야 한다.2. 중국과 대만의 어문정책중국어를 표시하는 문자는 한자이다. 한자는 상형을 기초로 여러 가지 조합을 통해 형성된 뜻글자이다. 따라서 표음문자인 영어의 알파벳과는 달리 한 글자 한글자가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언어체계를 일반 국민에게 여하히 널리 보급할 것인가 하는 것이 역대 지도자들의 공통된 과제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고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바로 1919.5.4 시기의 백화문운동(입에서 나오는 데로 쓰기)이다. 중국도 이러한 필요에 따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수립 후 새로운 어문정책을 수립했다. 그러나 대만은 중국어의 원류를 자처하면서 기존의 어문정책을 고수하고 있다.1) 중국의 어문정책언문일치체 언어의 제창이 공식화되기 이전까지 중국어는 문언문과 백화문이라는 두 언어 영역으로 구분되어 왔다. 민족과 지역에 따른 복잡한 언어현상이 뒤섞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후 언어문자정책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소수민족의 언어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당면한 문제는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원활치 못하여 복잡한 한자를 익히기가 쉽지 연구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중국어는 1978년부터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한어병음방안에 의해 표기되고 있다. 문자개혁과 한자병음화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표준언어의 보급에 어문정책의 핵심이 두어졌다. 이와 함께 추진된 글자간소화체제는 1964년의 [간화자총표]를 기준으로 운용되고 있다. 그러나 쓰고 익히기 쉬운 규범한자의 보급을 목적으로 전개된 간화작업은 나름대로 성과를 얻었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그 문제는첫째로 간자화이후 자수가 많아졌고둘째로 단지 하나 내지 두세 획을 줄이기 위해 새로운 간화자를 익혀야되는 경우가 많으며 반대로 간화 되어야 할 자는 그대로 있는 불균형현상도 나타났다.셋째로 간화의 원칙이 일관되지 못한 경우가 있고넷째로 동음대체의 경우 지역에 따라 달리 읽는 자까지 포함하여 생기는 혼란 등을 문제로 들 수 있다.다섯째로 잘 쓰지 않는 자를 간화시킨 경우가 있으며마지막으로 착별자나 유사글자의 혼동이 심화되는 경우 등이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결국 이러한 모순은 번체자(정체자)를 알고 간체자를 익히는 경우에는 심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번체자를 모르고 간체자를 익힐 경우는 상당한 혼란을 가져온다.2) 대만의 어문정책대만에는 현재 민남어, 객가어, 고산족어등 3대 방언이 있다. 그리고 49년 국민당의 입성 시에는 일본통치의 영향으로 일본어의 사용이 많았다. 중화민국을 계승한다는 국민당은 정통성확보 차원에서 일본어와 방언의 사용을 강력하게 금지시키고 국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1987년 장경국총통 때까지 오늘날 대만의 언어상황은 국어의 사용이 일반적이고 방언의 사용은 특수한 상황으로 전이되었으나, 대만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이 사회중심이 되고, 정부가 대만화를 추진하면서 최근에는 전통어인 민남어의 사용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문자는 정체자(번체자)를 쓰고 표음부호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표기법에서 대만은 1918년 '독음통일회'가 제정한 주음부호로 표기하면서 1867년 영국외교관 웨이드가 만든 웨이드식과 예일식 표기법 등을 보조을 긋고 정자의 사용을 문화보존의 차원에서 이해하여 주도적인 자리를 부여하고 있다.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컴퓨터사용상의 문제는 기술적 문제에 불과하며, 한자는 매우 고도화된 문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방언의 사용에 대해서는 이미 국어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단, 민남방언의 영향으로 국어의 발음상 약간이 문제는 있기는 하지만(f와h, n과L, zh와,z, ch와csh와s) 이로 인해 본토와의 언어소통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휘에서도 본토와 차이가 있지만 대만은 민족공동어를 중시해 왔기 때문에 역시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대만정부의 대만화정책 지향에 따라 과거 공식석상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민남어의 사용이 공식화되는 추세이다. 이는 중국정부의 강압적인 통일정책에 감정적 불안감을 갖고 있는 대만인 들이 더욱 의식적으로 민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3. 중국인의 언어문화1) 전통적 언어문화중국은 유교의 도덕을 사회가치체계로 삼고 있다. 이러한 전통관념은 중국어에 잘 투영되어 있다. 이에 따라 화목을 중시하는 조어가 많다. 이는 중국과 같이 여러 민족이 얽혀 있고 지역적인 고립성이나 특색이 뚜렷한 나라는 안정이나 민족 간의 단결을 위해서 평화적인 안정이 절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신분을 중시해온 특성에 비추어 존칭과 비존칭의 구분이 뚜렷했으며 등급별 신분을 표현하는 특정어휘들이 많다. 이밖에도 사회의 변천에 따라 은유적인 표현들이 많이 발달해 있다. 예를 들면 전국시대는 각 국가 간의 패권다툼이 횡행하던 시대이다. 이에 따라 사회분위기도 크게 변화하게 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춘추시대의 예를 숭상하지 않았으며 전통도 더 이상 중시하지 않게 되었다. 오직 공리와 실용을 목적으로 하는 각종언어의 유희들이 생겨나, 과장과 비유를 담고 잇는 의미 있는 비방 등이 많이 나타났다. [전국책]에 많이 나타나는 민간우화,'호가호위'[화사첨족''어웅득리'등은 모두 현실적 비유를 담고있는 의미 있는 그 예이다. 봉건폐쇄사회의 영향으로 남녀간의 애정표현이 함축적으로 다루어지는 것도 한 예라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구의 언어표현에는 전통적인 민족문화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전달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문화심리, 제도, 심미관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특정한 연상작용도 하는 것이다. 최근 중국언어학계가 언어와 사유의 변증관계를 민족문화와 연결시켜 언어의 민족적 특성을 연구하는 소위 '국속어의학'이라는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점을 주의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언어표현의 진의 파악에 문화적 요소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정확한 언어의 사용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2) 현대중국의 변화과거 수천 년을 동방의 문화대국으로 지내왔던 중국에 있어 1840년 아편전쟁이래 백년의 시기는 굴욕의 시기인 동시에 자각의 시기이기도 하다. 중국인들은 서양무기에 자존심을 짓밟히며 자기들 이외에 또 다른 '천하'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차에 1949년 '중국사회주의혁명'의 성공은 중국에게 또 다른 기회와 시련을 제공하였다. 사회주의의 도입이라는 비중국 전통적 요소에 따른 언어문화의 변천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여기서는 가장 특정적인 것 몇 가지를 사회 문화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1) 문화대혁명 시기의 변화문화대혁명 은 현재 중국의 이론계 에서도 암흑의 시대'로 규정할 만큼 모든 것이 철저히 파괴된 일대동란이었다. 엄청난 변화를 겪은 이 문화혁명 시기에도 몇 가지 뚜렷한 언어표현의 변화가 발생하였다. 우선 사회적인 조류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언어선택도 획일화되는 심리적 경향이 나타났다. 즉 당시를 지배하던 극좌 이데올로기에 따라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혁명'이란 단어가 세 마디에 한번씩 나올 정도만큼 보편적이었다. 전화기를 들면 '투사비수(개인주의와 싸우고 수정주의를 비판하다)라는 말을 첫마디로 대화를 시작하였다고 하니 사회의식문화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둘째, 단어의 사용에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 '홍, 위, 위동(모택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