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왜곡문제 연구경영학과 4학년 김지은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왜곡문제 연구1234서론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중국의 동북공정5서론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우리의 연구6우리의 대응방안결론서론1. 연구배경 동북공정 프로젝트 추진으로 인한 역사왜곡 우리의 주권을 위협하며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음 동북공정의 핵심사안인 고구려사 왜곡 문제 우리의 대응방안 연구 2. 연구방법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관한 배경과 그 핵심내용을 파악 고구려사 왜곡에 관한 우리나라의 연구대응과정 파악 우리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장기적인 대안을 제시 고구려사에 대한 사료 연구와 각종 논문 연구중국의 동북공정동북공정의 개념 중국 동북 지역의 역사와 현황에 관한 대형 학술 과제로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 (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 즉, 우리말로 '동북 변강(국경지역)의 역사와 그에 따라 파생되는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중국 지도동북3성 지도길림성흑룡강성요녕성중국의 동북공정2. 동북공정의 배경 1)공세론 한국의 학계 언론계 인사들의 대부분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공격적인 프로젝트로 파악하는데 이것이 공세론 세계질서를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시킬 의도 동북아와 아시아의 맹주추구 세계적 패권국으로서의 부상 한민족의 중국문화권 편입시도 북한정권 붕괴 중국단독 관리 실현 연해주 진출 세계문화유산 등재 위한 전략적 활용 목적중국의 동북공정2. 동북공정의 배경 2)방어론 동북공정의 목적이 현 동북아 질서의 현상유지나 중국내부 질서의 유지와 결부되어 있다고 보는 주장 그러나 동북공정은 정치적인 성격인정 첫째, 소수민족문제의 해결 둘째, 중국 동북아 지역의 안정유지 목적 세 번째, 간도영유권 분쟁소지의 예방중국의 동북공정2. 동북공정의 배경 3)반성론 중국의 역사편제에 대한 한국측의 이해부족과 중국을 자극하는 한국측의 행태와 관련하여 동북공정이 발생하였다고 보는 시각 중국의 국사편제에 대한 몰이해와 한국의 팽창주의적 몰이해, 조선족 문제로 중국정부 자극들을 예로 들고 있다.중국의 동북공정3. 동북공정의 내용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 민족사 연구,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 연구, 중-조(中-朝) 관계사연구, 고려와 원과의 관계, 조선 초기 북방개척등의 국경문제 간도문제, 고구려사 문제, 발해사문제, 등을 그 연구 내용으로 삼고 있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고구려사 연구”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고구려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 변화 1)전근대 -삼국지, 위서, 송서, 양서, 주서, 남서, 등 거의 모든 중국사서들이 고구려를 이역열전이나 동이에서 다루었음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이라 서술 (주몽의 뒤를 이어 왕건이 군장이 되었다고 서술) 이는 송, 명 시대까지 계승 -따라서, 고구려가 위치했던 지금의 중국의 동북 3성 지역에대한 관심이나 연구가 없었음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고구려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 변화 2)1980년대 -중국의 개방개혁이 시작됨 -중국 변강의 중요성부각 - 중국변강의 본격적 연구 시작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파악 하는 견해가 생겨남 3)1990년대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귀속 시키려는 논문의 본격적 발표 -동북공정 실시이후 “고구려사는 중국사이다”라는 관점만 존재중국의 고구려사 왜곡2.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논리 1)고구려사 귀속 문제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에 속한다고 주장 !!한국의 반론!! 중국의 고대 역사서들에서 고구려,백제, 신라를 삼국이라 언급 중국에서 발견된 고지도가 고구려를 외국으로 표기하고 있음 서구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고지도 역시 남만주 일대를 조선의 영토라고 표기하고 있음동진단지리도 (東震旦地理圖)중국의 고구려사 왜곡2.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논리 2)고구려의 독립성 “한(漢)나라로 부터 당(唐)나라 때까지 고구려에 대한 중국 각 왕조의 관리 방식은 달랐지만 중국의 통치자들은 고구려의 활동 지역을 중국의 전통적인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다. ”라고 주장 !!한국의 반론!! 고구려에서는 중국의 황제만이 주관할 수 있는 제천대회 행해짐 삼국지에 따라면 손권은 고구려로 사신 파견 =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님, 동북아시아의 제국 이었음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중국에 대한 방비를 대비한 것임중국의 고구려사 왜곡2.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논리 3)중국과 고구려간 조공, 책봉 성격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가 중원왕조에 신속된 존재이며 건국 이후 시종일관 중원 왕조와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며, 사료의 조공, 책봉관계를 그 논거로 제시 !!한국의 반론!! 책봉과 조공은 중국 내부의 정치질서로서 책봉이란 중국의 황제가 주변국가의 군장에게 특별한 관작과 물품을 하사함으 로써 그의 지위를 공인하여 신속시키는 형식이긴 하지만 이는 국가간의 하나의 외교방식이었다.중국의 고구려사 왜곡2.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논리 4)수당과 고구려간의 전쟁의 성격 중국은 고구려와 수,당나라 간의 전쟁을 이민족 정복전쟁이 아 닌 통일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국의 반론!! 고구려와 수,당조는 대립적인 관계였으며 이 전쟁은 당시의 동북아 국제질서의 재편을 위한 전쟁이었음 수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멸망하였고 동아시아의 역학관계가 복잡하게 진행되었음전성기 고구려 지도수, 고구려 지도중국의 고구려사 왜곡2.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논리 5)고구려와 고려와의 관계 중국은 왕건이 세운 고려는 고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와 전혀 상 관이 없으며 당나라의 통일 전쟁으로 이미 고구려사가 중국에 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자처 하며 고구려사를 빼앗아 갔다고 주장. 또, 고구려는 고씨가 왕을 일어간 고씨고려이고 고려는 왕씨 고려 이므로 고구려를 계승하려면 왕건이 고씨 여야한다고 주장 !!한국의 반론!! 왜 국가를 왕족 관계로만 보느냐 구오대사, 신오대사, 송사 등의 중국 역사서들은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이라 보고있다.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우리의 연구1.비판론 중국의 주장에 대한 반박 2.대안론 민족주의 역사학의 해체 만주지역의 배타적인 역사 점유 탈피 아시아 공동체 주의 중국과의 역사 공유 3.자성론 분단지향 역사학 탈피 반도중심사관으로부터 만주 중심사관으로 단군 이전 사 연구 필요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우리의 대응방안국가국민역사학계민간지원 통한 간접대응 민,관 협조통한 대응책 모색 역사교육의 강화사이버공간 시민단체중국의 주장에 대한 즉각적 반박만 할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심도 깊은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가 요구됨결론-정부, 국민, 학계의 공동대응이 요구됨 -만주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역사 연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자주권 수호 -단기적인 대응이 아닌 정부와 학계를 중심으로 한 장기대응이 요구됨{nameOfApplication=Show}
1. 거울에 비친 유럽 서평거울에 비친 유럽이라는 책은 조셉 폰타나가 지은 것으로서 기존의 거대담론을 지향하던 유럽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수정주의적인 관점으로 쓰여 진 책이다. 조셉 폰타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유럽’하면 떠오르는 것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의 책에서는 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9개의 거울이 등장하고 있다. 야만, 기독교, 봉건제, 악마, 촌뜨기, 미개, 진보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며 스스로 만족하였고 유럽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럽의 정체성을 드러냈던 이러한 요소들 속에는 타자의 억압을 통한 자기합리화라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자신의 단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알리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나의 단점이 드러나는 것에 대하여 극도로 경계하는 사람 중에 한사람이다. 그 때문인지 나의 가족, 크게 나아가서는 나의 나라의 단점이 드러나는 것은 곧 나의 부끄러움이므로 나의 영역에 대한 비판을 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그러나 조셉 폰타나는 자신이 속한 유럽의 역사에 대하여 기존의 어떤 책보다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 폰타나는 유럽인들이 스스로 만든 그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유럽문명은 아니 전 세계는 극심한 파괴와 혼돈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나는 이러한 비판들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는데 무엇 때문에 자신의 역사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 결과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됐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유럽은 폰타나가 말하는 모순적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타자를 한없이 깔아뭉개는 모습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의 사랑의 모습, 정치, 경제에 앞선 선진국들이 있으며, 사상과 철학이 발달한 전통을 사랑하는 모습을 띄고 있었다. 물론 유럽에 이러한 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럽의 문물을 동경하고 있는 오리엔트문명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유럽적인 것이 곧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들었을 때에는 아, 이것이 그런 내용이었구나 하는 깨닫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게으른 탓에 수업을 그냥 들어가면 내 무지를 탓하는 한숨만이 나올 뿐이었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승자중심의 역사관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좀 더 다양한 시각을 인정 할 줄 아는 유함을 배운 것 같아서 참 즐거웠다. 앞서 말한 것처럼 폰타나가 선정한 거울을 통해 유럽을 비추어 볼 때에는 통쾌한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점점 수업을 즐기고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각 장들을 살펴보고자 한다.첫 장 야만의 거울에서는 실제 야만의 거울을 통하여 유럽이 스스로를 어떻게 비추어 보았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고자 한다. 유럽하면 뭔가 독특하고, 특별하고, 전통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러한 점들이 유럽을 더욱 동경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특별함은 고전고대의 그리스, 로마로 이어져 오는 문화의 특별함과 우수성에서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다른 문화의 기원처럼 여겨졌으며 그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문화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것은 이후 18세기말, 19세기 초에 유럽인들에게 계승되어 제국주의라는 또 다른 우월성으로 이어진 듯하다. 그러나 1장 야만에 거울에서는 이러한 것들 즉, 지극히 유럽적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폰타나는 그리스, 로마로 이어졌던 유럽적인 문화는 그 기원부터가 상당히 혼혈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럽최초의 정착자들은 아무런 특별한 점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이들은 다른 곳에서 흘러온 유이민들 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 전에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시각이어서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었는데 폰타나의 이러한 의견은 다른 장들을 읽을 때에도 공통적으로 찾아 볼 수 있었다. 어쨌든, 폰타나가 말하는 유럽이 우월하다고 하는 것은 유럽이외의 것을 ‘야만’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갔던 ‘타자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이것은 결국 자신과 다른 상이함을 열등함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이 아는 것은 거의 드물었다. 그 문자도 그리스인의 단독 발명품이 아닌 동부지중해의 교차지점에서 일련의 문화적 상호작용에 의해 생긴 것이었다. 즉 그리스인들은 발달단계의 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담당자였을 뿐이었다. 이렇듯 그리스인들이 만들어낸 야만의 개념은 단지 그들의 타자화의 희생물이었을 뿐 그리스 문화 이외의 것이 열등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제국을 건설한 로마인들에 의해 이 야만의 개념이 계승되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 제국과 제국 밖의 야만이라는 이원화된 모습으로 자신들을 규정해 나갔다.2장 기독교의 거울에서는 유럽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기독교’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특히 이 장에 관심이 있었다. 기독교는 전통을 강조하고 이단을 배격하는 교리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교리상의 특징은 다른 종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기독교만이 참된 진리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정통은 기독교이고 다른 종교 일테면 이슬람교, 불교와 같은 종교의 존재를 때로는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하며 이단에 대해서는 불쾌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나의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 교리가 상당히 전통적이며 처음부터 이러한 교리가 확고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때문에 유럽에서는 기도교를 공인했고 적극적으로 전파되었으며 이후 중세를 떠받드는 유럽의 정신적인 기둥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이 생각들은 기독교의 거울을 읽으면서 상당한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왜냐하면 폰타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이 두 가지 생각에 대해 여지없이 비판을 가하면서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폰타나는 초기기독교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따라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함께 존재했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는 공인된 이후에도 로마화되지 못한 농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미신이나 다른 종류의 종교들을 믿고 있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작하였다. 이교도와 분열론 자들을 소외시키고 처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쉽게 기독교화 되지 못하였으며 소수파들은 메소포타미아나, 페르시아, 중앙아시아와 같은 곳으로 도망하여 기독교의 또 다른 줄기를 전하였다.결국 기독교의 권력화는 유럽의 다양성을 축소시키고 기독교라는 문화 영역 안에 모든 것을 축소시켰다. 이들이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를 무시하고 지나치게 ‘기독교’ ‘이단’ 등의 논리로 단순화한 유럽은 다양한 견해의 공존을 점차 잃어버리게 되었다.3장 봉건제의 거울에서는 중세시대의 모습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중세는 암흑의 시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곧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대단절이 되었으며 중세가 끝남과 함께 르네상스등과 함께 회복되었다는 식의 역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폰타나는 이를 비판하고 있으며 ‘중세시대와 로마제국간의 단절은 없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중세시대는 도시의 성장과 농촌의 발전이 보조를 함께 하면서 국내 시장의 초기 발전을 가져오고,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확실하게 해주는 중단되지 않은 발전의 과정에 있는 시기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일테면 라인계곡에서 영국에 이르는 지역에는 북해 문화권이 형성되었으며 스칸디나비아 민족들의 교역활동도 더욱 활발해 진 것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시기에 유럽대륙의 인구는 두 배 내지 세 배로 늘어났고 작물들의 이북으로의 확산으로 도시가 발달하였다. 이러한 인구증가와 농업생산력의 증가는 교역의 증대를 낳았다. 또 이시기는 문화적인 혁신의 시기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혁명들은 새로운 봉건제의 등장으로 인해 농업생산력의 발전되었고 그 결과 농업생산량이 증대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중세의 봉건제는 중앙집권적인 모습이 철저히 분권화 되는 모습을 가진 시기였다. 이 시기에 고대왕국들과는 달리 다양한 공간들 각각에서 상호 연결을 통해 지역 주민들 간의 결속이 이루어졌으며 상호의존하고 있었다.4장 악마의 거울도 기독교의 거울에서의 종교적인 측면이 많이 비슷하다. 1000년의 대 발전 시기는 사회인은 페스트였다. 페스트는 시칠리아 섬에 상륙, 이탈리아를 거쳐 유럽전역에 퍼져나갔다. 페스트로 인해서 유럽인구의 1/3이 죽어나갔으며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도시에서는 그 피해가 더욱 컸다. 그동안 전통적인 시각에서는 페스트를 봉건사회가 해체, 붕괴되기 시작한 모든 것의 기원으로 보는데 집착하여 다른 현상들을 간과하여 왔다. 즉, 페스트로 인한 인구의 감소는 노동력을 더욱 감소시켰으며 그 결과 영주들은 농민들을 더욱 못살게 굴었고 그 결과 농민반란이 일어 났다. 그래서 농노제를 폐지하고 화폐지대를 사용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농노들은 기존의 봉건영주로부터의 속박에서 그나마 자유로워 졌으며 농민의 교역은 봉건제의 해체를 다져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폰타나는 이러한 시각을 비판하고 있다. 한 사회의 붕괴의 원인을 단지 페스트라는 단순한 원인을 가지고 찾는 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원인을 중세 사회의 발전과정 속에서 찾고자 하고 있다. 폰타나는 13세기를 시작으로 봉건제의 내적 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8세기에서 9세기 이후 지속적인 인구증가가 있었고 농법개량으로 인해 이포제가 삼포제로, 농경에의 말의 이용, 나무쟁기에서 철쟁기로의 변화등의 기술혁신이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결과 경작지의 증가와 생산물의 증가를 가져왔고 이는 인구증가를 감당할 만한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별 문데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점차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중세봉건제에서 기술개발이 원천적으로 없었고 토지는 증가하는 것이 아니므로 생산력이 그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경작지를 늘리면서 목초지, 방목지가 크게 줄었고, 이는 토지 비옥도를 떨어뜨려 토지의 생산성이 더욱 악화되었다. 따라서 그 내부적 위기는 이미 극에 달해 있었으며 페스트는 이러한 내적위기 속에서 그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위기의 봉건제 사회에서 페스트로 그 붕괴는 더욱 심화 되었고 영주는 조세를 화폐로 바꾸면서 경제, 사회, 문화, 정치적인 모든 관.
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왜곡문제 연구Ⅰ. 서론1. 연구배경2. 연구방법Ⅱ.중국의 동북공정1. 동북공정의 개념2. 동북공정의 배경1)공세론2)방어론3)반성론3. 동북공정의 내용Ⅲ.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1. 고구려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 변화1) 전근대2) 1980년대3) 1990년대2.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내용1) 고구려사의 귀속문제2) 고구려의 독립성3) 중국과 고구려간 조공?책봉성격4) 고구려 영역과 평양천도 문제5) 수당과 고구려간의 70년 전쟁의 성격6) 고구려 붕괴 후 그 유민 거취 문제7) 고구려와 고려와의 관계Ⅳ.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우리의 연구1. 비판론1) 고구려사의 귀속문제2) 고구려의 독립성3) 중국과 고구려간 조공?책봉성격4) 고구려 영역과 평양천도 문제5) 수당과 고구려간의 70년 전쟁의 성격6) 고구려 붕괴 후 그 유민 거취 문제7) 고구려와 고려와의 관계2. 대안론3. 자성론Ⅴ. 우리의 대응방안1. 국가2. 국민3. 역사학계Ⅵ. 결론Ⅰ. 서론1. 연구배경최근 일본의 역사왜곡에 이어 중국의 동국공정과정에서 나타난 역사왜곡으로 우리 국민들은 분노하였다. 우리나라의 강력한 이의제기로 인하여 우선은 정치, 외교적인 문제로 까지 확대하지 않기로 하고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문제를 매듭지었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단순히 학술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학자는 없다. 우리나라 학자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중국의 동북공적은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관주도하에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으며 간도문제, 발해문제, 고구려 문제, 조선과의 관계 등을 체계적이고 심도 있게 연구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란 무엇이며 어떠한 배경으로 동북공정이 실시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 사안이 되고 있는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서 우리가 역사 왜곡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우리나라의 대응 연구를 살펴본 뒤 역사왜곡에 대한 우리의 대응방안에 대하여 논의 하고자 한다.2. 연구방법이다. 여섯 번째, 세계문화유산 등재 위한 전략적 활용 등을 목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2)방어론방어론은 동북공정의 목적이 현 동북아 질서의 현상유지나 중국내부 질서의 유지와 결부되어 있다고 보는 주장이다. 즉 동북공정의 목적이 단순한 방어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이 정치적 프로젝트라는 것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방어론 자들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소수민족문제의 해결이다. 중국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이다. 이 중 조선족은 동북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도 한국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한반도가 재통일되면 중국 주변에 최초의 부유한 국가의 출현하는 것이며 이는 중국 내의 소수민족, 특히 조선족의 이탈을 야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동북공정 논리를 주입해 조선족들의 민족정체성 혼란을 예방하고 중화민족 논리를 재확립하고 강화해 만주에서 소수민족 문제의 돌출을 막으려고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중국 동북아 지역의 안정유지 목적이다. 남북통일 후 북한의 난민들이 만주지역으로 대거 유입해 동북지역을 한민족의 근거지로 삼을까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안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간도영유권 분쟁소지의 예방이다. 중국과 일본 간에 비밀리에 체결된 간도협약에 대해 한국의 통일정부가 문제를 제기할 것에 대비하는 데 동북공정의 목적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미 19세기말 10여 차례의 간도 영유권 분쟁이 발생하였었고 여전히 이 지역에 대한 분쟁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3)반성론일반적으로 동북공정은 중국 팽창주의의 발현이자 고구려사의 왜곡이라는 시각이 한국 학계와 언론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극히 소수에서는 중국의 역사편제에 대한 한국의 이해부족과 중국을 자극하는 한국의 행태와 관련하여 동북공정이 발생하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들은 중국의 국사편제에 대한 한국의 이해부족과 중국을 자극하었던 중국, 러시아,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모두 자국의 역사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2) 고구려의 독립성고구려는 중국의 고대 소수 민족 정권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하여 고대 민족 관계사를 파악하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은 自古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였으므로, 현재의 중국 영토를 기준으로 그 안에서 벌어진 모든 민족의 역사는 중국사에 속한다고 하는 이론이다. ‘고위금용(古爲今用)’, 즉 현재가 과거를 이해하는 기준이란 관점에서 현대중국의 역사범위를 합리화하는 역사해석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얼마 전까지의 ‘일사양용(一史兩用)’ 입장에서 고구려사를 한국사와 중국사 양쪽에 연결된다고 인정하던 입장을 뒤집는 것으로서 고구려사 전체를 중국사로 파악하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 화이관에 입각한 ‘중화와 오랑캐’의 대립적 관점을 수정하고 북방고대종족 및 고조선 역사까지도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 가장 최근의 연구결과는 리더샨(李德山)의 로, 한국학계의 단군조선-고조선-예맥, 부여-고구려-발해로 연결되는 역사계승인식은 비 학술적 연구 결과이며 비역사적 연구 결과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동북고민족은 중원내지의 민족구성의 일원으로서 중국민족이며 중국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또 당시 화하족(華夏, 한족)이 동북지역으로 진입, 혈연 문화적으로 동이족과 통혼, 교류해 점차 연결됐다고 주장하며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이용해 동북지역 확장을 설명한다. 특히 단군신화를 화하, 한(漢)문화의 영향에 의한 신화라고 주장, 중국문화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중국에 속하였다는 것이다.3) 중국과 고구려간 조공?책봉성격고구려와 중국 중원왕조는 조공과 책봉을 하는 정치적인 예속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는 중국 지방에 할거한 지방정권으로서 현토군의 일개 현후급 국가로 출발한 뒤 현토군과 요동군에 있다. 거기에는조선민족은 옛날부터 조선반도에 거주했다. 기원 전후 조선 반도의 북부를 통치한 것은 고구려 노예국가였다. 그 후 반도의 서남과 동남부에 백제 신라의 두 노예제국가가 출현했다. 이후 수백년동안 반도에는 삼국이 정립하였다. 봉건관계는 이 삼국에서 발전하였다. 676년 신라가 조선반도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라고 서술하였다. 고구려는 한반도의 북부지방만을 통치한 국가로 서술하여 고구려의 판도를 한반도에 가두어 놓은 것이다. 심지어는 한반도의 북부를 중국의 영토로 표기한 책도 있다. 화동사범대학에서 발행한 중국역사의 서한강역도와 삼국정립형세도가 그것이다. 두 지도 모두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西漢이나 魏와 같은 색으로 칠하고 남부는 다른 색으로 칠하면서 아무런 표기도 하지 않았다. 이는 명백히 삼국을 부인하는 처사라고 할 수 있다.중국은 이처럼 모호하게 고구려사를 점차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대적인 고구려사 서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60년대 세계통사에서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고구려를 모두 조선의 고대국가로 간주했지만 1978년의 세계고대중세기사에서는 고구려가 중국에서 흥기하여 두 나라의 국경에 걸쳐 존재한 민족 중의 하나임을 언급하였고, 1985년과 1990년에 간행한 세계중세기사와 세계상고중고사등의 고교교재에서는 집안을 중심으로 요동과 압록강 유역에서 건립된 고대정권으로 간주하며 표현을 매우 간소화 시켰고 조선의 역사라는 업급을 피하였다.)지금까지의 서술을 통해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끈질기고도 점진적으로,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진행해 왔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과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1950년대에는 중국과 조선의 우위를 중심에 두고 서술하였지만 개혁개방이후 연구를 강화하여 고구려 민족과 정권의 귀속문제에 대하여 일치된 견해를 내어놓게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서술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사실상 밝힌 상태이다. ) 새로운 연구 성과를 교과서에 반영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자 북쪽 사회가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회에서는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기록은 중국의 경우 제후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고 오직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입장에서 볼 때 제후국이 아닌 다른 독자적인 정치체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천의례를 지낸 고구려와 주여 그리고 예와 마한은 중국과는 다른 천하관을 가진 독립 국가였다는 것이 중국인이 남긴 당시의 기록을 통해 입증되는 것이다. ) 셋째, 삼국지에 따르면 손권은 고구려로 사신을 보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닐 뿐만 아니라 중국변방의 소수민족도 아닌 동북아시아의 제국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중국에 대한 방비를 견고히 하기 위한 양국간의 국경이었다. 중국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만리장성 이남을 자기의 역사 영역으로 하고 있다.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북방에는 이민족이, 남쪽에는 한족이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에는 천리장성이 있어 중국과 경계를 하고 당나라의 침입을 막고자 하였다. 천리장성은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의 사이를 구별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사이의 경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다섯째,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대 고구려가 영락과 연가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중원의 조공국이 아니라 중원 왕조에 대응하는 동방의 패자임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3) 중국과 고구려간 조공?책봉성격중국의 고구려 귀속 논거의 대표적인 견해가 고구려가 중원왕조의 신속국이라는 것이다.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가 처음부터 중원왕조에 신속된 존재이며 건국이후 시종일관 중원왕조와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며 사료의 조공, 책봉관계를 그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조공, 책봉관계란 정치적인 신속을 전제로 경제적 종속과 연호의 차용등 의례적인 행위가 수반되는 항속적인 관계를 이름 하는데 실제 그 이상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보다 빈번하여 외교관계의 형식에 지나.
Ⅰ.한국전쟁발발의 배경과 전개과정1. 한국전쟁의 배경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우리나라 상황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적 약속과 신탁통치 논의<< 카이로 회담>><그림 카이로회담>제2차 세계대전 중의 연합국 수뇌회담으로 대일항전과 전후 처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검토한 최초의 회담으로 1943년 11월 22∼26일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미국대통령 F.D. 루즈벨트, 영국총리 W.L.S. 처칠, 중국총통 장제스[蔣介石]가 참석하여 대(對)일본전쟁 수행 협력과 전후의 영토에 대하여 의논하여 27일 <카이로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은 태평양상 일본령 제도의 박탈, 일본이 중국에서 빼앗은 전영토 반환, 한국의 독립과 연합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까지 협력하여 싸울 것 등을 표명하였다. 카이로선언은 45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도 확인, 일본의 항복에 관한 기본방침이 되었다. 이 회담(제 1 차카이로회담)은 미·영·소 3국의 수뇌회담인 테헤란회담에 앞서 열린 것이며, 테헤란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카이로에서 12월 3∼6일 미·영 수뇌와 터키대통령 I. 이뇌뉘와의 회담(제 2 차 카이로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미·영은 연합군측에 가담, 참전할 것을 터키에 권유하였으나 터키는 중립을 지켰다. - 1945년 2월 얄타회담: 신탁통치 논의<그림 얄타회담-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얄타회담>>제2차 세계대전 말기 1945년 2월 4일∼11일 미국의 F.D. 루스벨트, 영국의 W. 처칠, 소련의 I. 스탈린 등 3개국 수뇌가 크림반도 얄타에서 전후처리의 기본 방침에 대하여 협의한 회담으로 정식명칭은 크림회담이다. 최종일에 합의한 사항은 ① 3개국 수뇌의 코뮈니케 ② 크림회담의 의사에 관한 의정서(얄타협정) ③ 독일배상에 관한 의정서 ④ 소련의 대일참전에 관한 협정(얄타비밀협정)의 4가지로 종합되었다. 그 가운데 ① 과 ③ 은 ② 의 얄타협정의 중요항목을 특별히 3개국 수뇌가 확인한 것으로 실질적으로는 ② 와 ④ 가 중심이다. 우선 ② 얄타협정의 합의사항은 ㉠ 세계기구(국제연합)의 설립회의의 개최일과 개최지 결정 ㉡ 소련 외에 우크라이나·백러시아 각 공화국이 별개로 세계기구에 가입하고, 소련은 실질적으로 3표의 표결권을 가지는 것 ㉢ 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승인 ㉣ 신탁통치제도의 창설 ㉤ 해방유럽선언 ㉥ 독일분할점령의 결정 및 프랑스의 독일점령참가 ㉦ 독일로부터의 배상징수와 배상위원회 설치
일제하 민족계 綿工業 硏究김지은Ⅰ. 서론세계에서 유래가 없다는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던 핵심 산업 중에 하나였던 섬유산업의 뿌리의 형성은 일제하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적 섬유공업의 시작과 그 근간은 이미 이 시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일제의 공업화 정책으로 인하여 지금의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편적인 통계적 수치에 근거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의 가장 큰 오류는 바로 경제적인 수치와 통계만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근대화의 척도를 가늠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 또한 이러한 오류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일제의 요구에 따른 한국의 경제구조 재편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그 근거가 부족하다. 일본의 계획 하에서 진행된 한국경제의 발전 계획은 철저히 일본에 의존하고 일본의 경제와 연결되어 있는 종속적인 형태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제는 기형적 모습을 띄게 되었는데 가장 전형적인 예를 바로 일제하 면방직 공업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의 경제개편은 철저히 일본의 경제의 보조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일본은 1880년대 중엽 면방직공업의 기계제 공업의 성립으로부터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방적업의 근대화, 대규모화는 원사의 수입과 해외 판매망의 제약 등의 한계에 직면하였다. 이에 일본은 한국을 그들의 식민지로 확보하여 원료공급지로 삼고 일본 면산업의 근대화에 필요한 면화를 자급 받는데 이용하였다. 또한 면화를 수입하여 면직물을 제조한 뒤 다시 한국에 내다파는 상품시장으로서 한국을 이용하였다.) 이렇듯 한국의 산업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자발적인 근대화의 수순을 밟을 수 없었다.그간 일제하의 면방직공업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연구범위 면에서 면공업 또는 섬유공업 전반에 관한 산업분석에 그치거나 개별기업만을 세세히 다루어 큰 경제흐름과는 동떨어진 경,73713,44528,66854,55386,02458,71356,18743,70536,30136,30023,97026,03319,11817,70111,33461,75572,00978,420108,480145,43626,70739,44847,78672,25497,358*1920년도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2쪽~15쪽에서 작성Ⅲ. 일제시기 한국의 綿工業1. 일제하 한국의 면공업면직물이 소비자들에게 이르기 까지는 일정한 단계를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단계에 따라 면공업은 여러 업종으로 분화된다. 이들의 업종은 대체로 면화재배, 면사, 방적, 방직, 면직물판매업 등으로 구분된다. 보통 산업의 발달 과정을 보면 이러한 각 단계의 과정들이 고루 발전하는 것이 정상이다.그러나 한국 조면업의 근대화는 일본의 원료 공급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한국은 면공업의 단계가 골고루 발달되지 못하였다. 한국은 일본에서 사용할 면사의 원료인 면화를 주로 생산하였으므로 면화재배 산업이 발달하였으며 면공업의 나머지 생산 단계에서는 발전이 저조하였다.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수입한 면화를 자국 내의 방적공장에서 면사로 재가공하여 한국에 역수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한국에서 생산된 면화는 국내의 조면공장에서 1차 가공하여 내수용으로 소비되거나 일본에 수출되었는데 조면의 수출 추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1920년 현재 조면의 수출량은 6백62만 6천 斤으로) 동년 국내 실면생산량의 25.2%를 점한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이 비율은 감소하여 1930년대에는 조면수출량이 1천 7백 63만 9천 斤으로) 동년의 실면 생산고의 10.5%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면의 수출량은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면방직 수요가 증가한 때문이다. 이 기간 중 면화생산고는 매년 증가한 반면 조면의 수출 비중이 줄고 있는 것은 이 무렵 국내 면방직이 확대되고 이에 따라 원료인 조면의 국내 수요가 증가한 때문으로 추정된다.또한 동기간에 면직물의 수입은 꾸준히 증가하여 1930년에는 조면시에 조선인 자본의 산업화 저지에 따른 한국인의 불만을 무마하고 한국인의 생활을 일정수준으로 안정시켜 식민통치를 원활히 하고자 했던 고도로 계산된 방법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회사령을 필두로 한 일제의 식민지 억압정책에 대응하여 조선인 자본가와 노동자가 합심하였던 것은 이후 3.1운동의 경제적 토대로 작용하기도 하였다.한편 1920년대에 들어서야 1910년대의 공장의 양적 팽창과 전근대적 생산방식과정에 숙련된 노동력을 이용하는 구조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본격적인 자본의 축적구조가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야 자본과 기계의 확산이 두드러지면서 1910년대의 과도적 생산구조를 지양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본격화 되는 것이다.1920년대에 설립된 업체들의 민족별 현황을 보면 일본인에 의하여 설립된 회사는 총 6개 업체 이며 한일 공동경영회사는 단 1개 업체이다. 반면에 한국인에 의하여 설립된 회사는 총 37개 업체로서 전체기업수의 85.4%를 점하여 1910년대의 77.46%를 능가하고 있다.한편 이 업체들의 설립년도 별 추이를 보면 1920년에서 22년까지 3년간에 전체업체의 58.1%인 26개 업체가 집중적으로 출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앞서 살펴본 3.1운동이 초래한 민족의식의 고취였다. 비록 3.1운동은 한민족의 독립열망을 표출하는 것으로 종료되었으나 1920년대 전반기에 전국각지로 파급되었는데 이와 같은 민족의식이 다수의 토착자본가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둘째, 1920년에 그간 한국 내에서 기업설립을 극도로 규제하던 회사령이 철폐되었다는 점이다. 회사령의 철폐결과 회사설립이 비교적 자유로워 민족계 기업설립운동을 촉진하였던 것이다. 셋째, 이 시기 이후 일본 자본의 한국진출 규모가 종래보다 확대되면서 한국의 상권침탈이 극심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항하여 기존의 한국 상인들은 자기들의 생존권 수호차원에서 일본 자본의 침투를 적극적으로 방어해야만 했다.設立年度別 推移(단위: 업체 수)제조업상업총계조면업방직업계조면업에 진출한 기업체들의 특징을 보면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기업체 수가 일본에 의해 수적으로 적다는 점과 자본 면에서도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이상과 같이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조면업에 대한 진출이 활발해지는데 그 와중에서 민족계 자본의 진출도 두드러지고 있다. 이로서 국내의 면공업은 종래 방직, 방적중심에서 조면업으로 저변 확대됨으로써 면방직업의 일관화 대량생산화는 한층 진작되었다.둘째, 방적 및 방직 부문이다. 1920년대까지 한국 면방직산업의 근대화의 중심은 방직업이었다. 조선방직, 경성방직, 동양염직 등 비교적 큰 규모의 제조업체는 물론 중소기업체들까지 전부 방직업에 특화, 일본 등으로 부터 면사를 수입하여 직조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는 방직시설의 확대와 함께 방적시설의 확충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이 시기까지 면 방적업부문의 확충은 방직업체들이 원료인 면사의 직접생산방식으로 수직적 계열화하고 있다.이 시기에는 1936년 이후 일본 독점자본에 의한 기업설립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일본 독점자본들은 방직부문보다는 주로 방적부문에 대한 투자를 획책하였다. 이들에 의하여 설립된 공장들은 규모면에서 볼 때 그간 한국 면직물 시장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장악하던 조선방직, 경성방직 등의 규모보다도 월등 한 것이었다.)한편 이 기간 중 경성방직도 지속적으로 생산규모를 확대하는데 그러한 예는 다음과 같다. 1933년 4월에는 직기 224대를 설치하고, 1936년 6월에는 방기 21,600추의 방적공장을 신설하였다. 그간 경성방직에서는 원사를 100%수입해야 했으므로 원사를 자체 생산하는 조선방직에 비해 불리한 입장이었다. 차제에 경성방직에서는 조선방직의 한국인 방적기술자들을 스카웃하고 일본 농전직기에 직기 224대, 방기 21,600추를 발주, 공장을 완공하였던 것이다.) 이로서 경성방직은 근대적인 방적공장도 확보하게 되었다. 경성방직 또한 이 시기 이후부터 종래 제직중심에서 조면, 방적 등 일관화가 완료된다.더구나 이 시기에 이르러 종래 일본인들이 독점하923년 4월에 첫 제품을 시장에 선보였다.이 회사를 창립한 발기인 중 중요한 인사로서는 박영효, 김기중, 김경중, 이일우, 장춘재, 이성준, 변광호, 등이다. 박영효는 초대 사장으로 피선되었다. 박영효는 한말의 중신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박영효는 실질적인 사장은 아니었으며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쉽게 받을 수 있도록 사장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다른 구성원들의 내력을 보면, 김경중은 김성수의 생부이고 김기중은 양부로서 이 두 형제는 당시 호남의 명문이며 구한말에 전라도 동복과 진산의 두 고을에서 현감을 지낸 사람들이다. 형 김기중은 당시 이미 신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 1908년에는 향리 출포에 사립 영신학교를 창립하여 자녀교육에 힘썼다. 뿐만아니라, 그는 한말에 호남학회, 자강회에도 관계한 바 있어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뜻을 두었다. 김경중도 1907년 조선선사 17권을 편저한 바 있는 선각자였다. 최준은 경주지방의 대지주로서 1919년 5월에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창립하고 그 취제역 사장에 취임한 바 있다. 이 백산무역회사는 자본금 백만원으로 창립되었고 당시로서는 상당히 규모가 큰 회사였으며, 부산에 본점, 원산에 지점을 두고 대일 무역에 종사했다. 최준은 또 1920년대에 설립된 고려요업주식회사에도 투자하고 있었다.)박용희는 서강에서 물산객주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파주 출신의 대지주 박성일의 친자로서, 일찍부터 경성직뉴회사의 지배인을 역임했으며 김성수가 중앙학원을 인수할 때에도 적극 협력하였다. 조설현은 영암의 대지주였으며, 1920년에 설립되는 조일석렴주식회사 설립에도 참가하였다. 그는 1925~1927년간에 해동은행의 정무 취제역을 역임하였다. 이밖에, 장두현, 장춘재는 서울 출신의 실업가였고, 이일우는 영남의 대지주, 은행가였으며 이성준은 황해도 봉산의 호상이었다. 변광호는 군산 출신의 실업가였으며 경성직뉴회사의 전무 취제역으로 있었다.)이와 같이 경방의 창립 발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지방의 대지주로 유력자였으며, 또 일찍부터 근대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