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와 여성현대는 대중 매체 범람의 시대이다. 현대인이라면 노동과 수면 다음으로 대중 매체의 수용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신문, TV, 라디오, 영화, 비디오, 대중가요, 잡지, 만화, 그리고 광고. 이중에서 특히 광고는 수용자의 의사에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제공되어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광고는 선택이 불가능한 매체이다.신문이나 잡지를 펼 때, TV를 켤 때, 심지어는 길을 지나다닐 때에도 우리는 쏟아져나오는 광고의 폭격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광고는 대중의 의식 속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파고들 수 있으며 수용자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여보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무의식적, 무비판적 수용이 가능해진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광고를 연구하는 방법이나 그 수용에 있어 다른 매체들과는 달리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할 필요성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광고의 독특한 성질 때문이다.광고는 시대와 더불어 생산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그 시대를 반영한다. 또한 새로운 개념과 유행어들을 창출해내어 그러한 메시지나 이미지를 광고의 수용자들에게 심어주기도 한다. 광고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기본적인 사회 통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때로 그것을 깨는 것으로써 광고의 효과를 높이고자 꾀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광고가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여성의 문제에 있어서. 여성 문제와 관련한 본격적인 광고 연구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이 분야의 연구를 최초로 시작한 사람은 미국의 Betrry Friedan으로 그녀가 1963년 출판한 '여성의 매력'은 여권 운동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Friedan은 일반적인 여성 잡지에 그려지고 있는 여성의 모습에 흥미를 가지고 여성 잡지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묘사되는 양상과 목표, 이상, 생활 양식 등을 조사하였던 것이다. (「성표현 광고와 규제」, 나남, p. 17 )이 연구 결과를 필두로 하여 그때까지 간과되어왔던 광고에서의 성별 스테레오 타입화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광고는 남성과 여성을 분리하여 그 역할을 고정시키고 여성을 대상화하는 데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이 글에서는 광고가 그려내고 있는 왜곡된 여성의 이미지를 4가지로 분류하여 이야기하기로 한다.1. 가정만을 지키는 여성들많은 광고에서 여성들은 가정을 위해 충실히 봉사하는 주부로 출연한다. 그들의 최대 목표는 가정의 청결, 남편의 건강과 출세, 자녀의 교육이다. 결벽증에 걸린 듯 끊임없이 쓸고 닦아내는 여성들에게 구원처럼 나타난 강력한 세제와 비누, 방향제, 청소기. 어떻게 하면 지치고 피로한 남편들을 위로해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너무도 건강한 ― 집에서 놀고 먹기 때문에 ― 아내들에게 희소식을 들려주는 정력제, 피로회복제, 드링크. 아이의 성적은 엄마의 성적임을 강요하는 학습지, 학원, 영양식. 주부들은 쉴 새 없이 집안을 뛰어다닌다. 간혹 집안일을 도와주는 남편이 등장하나 그들은 단지 공처가이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도와주고 있는 것일 뿐이다.또한 여성들은 모두 한없이 남편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들이며, 집안일 밖에 모르는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이다. 이러한 희생적인 모습을 묘사하며 여성을 아내라는 이름, 어머니라는 이름, 주부라는 이름 아래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평범한 엄마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평범한 치즈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치즈 한 장에도 엄마의 철학이 담겨있어야 합니다.식구들 건강까지 챙기는 깐깐한 새애기 ― 사랑해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늘 가족의 입맛과 건강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 ―작은 후추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사랑스런 아기의 피부병, 엄마는 애가 탑니다.위의 치즈 광고는 양육의 모든 책임은 엄마라고 규정하고 있는 듯 하다. 아이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키우는 것이지, 어느 한 쪽에 전담시킬 수 없다. 다른 것들 역시 수퍼우먼 컴플렉스를 부추기는 광고 문구이다. 가족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여성은 사는 것이 힘들다. 물론 이전 시대의 여성들이 대개는 전업주부였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주부들의 과장된 희생주의적인 모습과 여자는 안, 남자는 밖이라는 성 역할을 강조하여 보여줌으로써 현모양처가 될 것을, 그리고 여성과 남성의 안팎분리라는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있다.여성들이 주부나 어머니로서만의 역할에 100% 만족하고 있지 않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변화에 민감하다는 광고가 이를 외면한다면 좀 더 다른 문제를 시사한다. 여성들에게 주부 혹은 어머니로서의 만족을 강조함으로써 더 많은 가정 용품을 소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관념은 상품 제조 업체들이 상술로써 조작, 강화시킨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광고에 의해 여성에 대한 전통적 관념이 강화되고 재창조되어 현대적인 여성의 위상 정립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2. 의존적 모습의 여성들광고 속에 나타난 여성들은 항상 보조적인 위치에 서있다.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두어 걸음 물러서서 그림자처럼 감싸주는 아내―어느날 문득 돌아보면 거기, 내 진실한 친구가 있구나.느낄수록 소중한 그대 하나뿐인 내 사람내곁엔 늘 아내가 있고 …과연 아내는 남편과 나란히 설 수 없는 것인가? 아내가 여자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남편을 꼼꼼하게 챙겨주고 늘 남편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감싸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내가 동등한 관계이기 보다는 수직적인 관계이다. 위에서처럼 대개의 광고에서 중심적인 카피는 남성의 굵고 중후한 목소리이다. 그리고 있다면 가벼운 여성의 목소리가 뒤이어 나와 상품에 대한 주변적인 설명을 해준다. 또한 여성이 무엇을 살 것인가 결정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을 때 남성이 등장해 친절하게 모든 결정을 도와준다. 광고에 등장하고 있는 여성의 자세에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늘 어딘가에 기대고 있으며 좀 더 귀엽고 깜찍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남성의 경우에는 의지적이고 강한 모습으로 굳건하게 서있다.이러한 모습은 남성의 이미지로 규정지어진 힘, 근육, 자립심, 자신감과 여성의 이미지로 규정지어진 나약함, 연약함, 귀여움, 순종적이며 수동적인 모습 등을 강조한 데서 나오는 결과이다. 이것 역시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논리에 광고가 굴복했으며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러한 논리의 고착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3.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들광고가 많은 이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는 부분중 하나가 바로 지나친 성적 표현이다. 담배나 수르 자동차 옆에 서 있는 반라의 여성들. 그들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상품 장식물로서 광고에 등장하고 있다. 현대인은 하루에만도 수 백 가지의 광고를 본다고 한다. 그러나 그 중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광고는 6∼7개에 불과하다. 결국 광고가 기대는 것은 말초신경이다. 성적 표현의 광고들은 소비자의 ' 눈길끌기 '에 급급한 광고의 몸부림이다. 광고인들의 말초신경 자극에 대한 맹목적 믿음 덕분에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눈웃음으로 반기는 여성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광고들은 광고된 상품의 사용을 통해 구매자에게 성적 보상이 돌아갈 것임을 암시한다.여성의 벗은 뒷모습을 보여주는 광고가 있다. 여성을 성 상품화 시킨 전형적인 광고이다. 벗은 앞모습을 보여주기 보다 뒷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러한 광고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Reid 와 Solye는 광고의 시각적 요소와 문자요소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일반의 통념과는 사뭇 다른 결과를 발표했다.(「성표현 광고와 규제」, 나남, p. 163 ) 그들의 연구에 의하면 장식적이고 성적인 여자모델이 등장하는 광고라 할지라도 광고 인지도가 향상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시각적인 흥미로써 광고를 볼 뿐이지 그 광고를 기억한다든지 상품을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광고를 보는 이들은 시각적인 자극만을 받아들일 뿐, 광고문안이나 상품을 유의깊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직접적인 상품 판매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또한 Patzer의 연구에서는 성적 표현의 광고에 대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성적 표현의 광고는 남성들에게는 미약하나마 영향을 끼치나 여성들에게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의 경우 상품과 여성모델의 성적매력이 조화된 경우에는 상품의 특색을 평가하는 데 좋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에는 정보제공이 빈약하고 혼란스러우며 저질스럽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성표현 광고와 규제」, 나남, p. 166 )여기에서 잠시 광고의 선정성에 대한 법적 규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창작동화에 나타난 고장관념과 차별의 문제스웨덴에서는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읽어주는 동화의 표지그림이 사회적으로 요란한 시비거리가 되었다. 아동문학에도 그 사회의 남녀평등 의식이 반영되어있다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어머니 역할 이라고는 종래의 고정관념을 지속시키는 그림들이 동화의 표지에 버젓이 실린 것은 터무니 없는 짓" 이라고 스웨덴 사람들은 흥분해있다. 스웨덴 문화.교육계의 이러한 논란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비로소 아동문학의 분야에도 남녀의 성에 따른 역할의 차별이 미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자행되어 왔고 또 그런 오류들은 생각보다 상당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사회가 복잡, 다양해지고 가치관이 크게 변해가도 초보적인 단계의 권선징악으로 일단락이 내려지는 동화의 구성과 주제에는 큰 변함이 없다. 이러한 구태의연성은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동화속의 묘사에는 한층 두드러진다. 동화속에 나타나는 성에 따른 역할과 성격은 전통적인 유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동화에 대하여 보이는 관심은 동화책의 색조, 편집, 글의 조악성에 관한 사소한 문제에 그치고 있다. 동화의 내용이나 주제, 또는 그것이 제시하고자 하는 의미가 어린이들의 사고와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전래동화에서 남녀의 역할과 성격에 대한 차별적인 묘사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당시 사회상황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해가능하다. 그러나 창작동화 역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여기서는 창작동화에 나타난 성차별적인 의식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 1978년부터 1985년 사이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동화작품 18편을 모은 '춤추는 눈사람' 이라는 책으로 연구한 자료를 가지고 이야기하겠다.동화의 세계에서도 주인공은 남자다. 이 책에 실린 18편의 동화중 주인공이 남자인 경우가 10편, 여자인 경우가 4편, 성별이 불분명하거나 주인공이 따로 없는 경우가 4편으로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남자의 경우 집배원 아저씨, 신기료 할아버지, 시인 아저씨 등의 다양한 어른들이 절반이고 어린이가 절반이었으나, 여자의 경우에는 어른이 하나도 없었다. 여자 어른은 온갖 종류의 집안일을 하는 엄마로서 등장인물이 될 뿐 동화의 세계에서도 제외되고 있다.주변인물도 남자인 경우가 훨씬 많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현실에서는 거의 여자인 초등학교 선생님마저 동화에서는 남자로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남자로 밝혀져 있는 경우도 있고 성별이 명시되지 않았으나 '아니올시다'식의 전형적인 남자의 말투를 씀으로서 남자임이 암시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주인공이나 주변인물로 나오는 몇 안되는 여자아이들 중 에 눈먼 소녀가 둘, 부모가 모두 벙어리거나 말이 어둔해서 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가 하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몇 되지도 않는 여자아이들이 이러한 역할을 도맡고 있는 것은 지나쳐버릴 수 없는 점이다. 동화의 세계에서 여자는 수적으로 열세일 뿐 아니라 불리한 장애조건까지 지니고 있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동화에 나오는 아이들의 성격과 행동묘사를 보면 기존의 보수적 성 역할 고정관념이 완전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춤추는 눈사람'에서는 시골마을의 분교 아이들이 보낸 단풍잎 편지가 삼천리 방방곡곡의 아이들에게 배달되어 그 아이들의 답장을 써 보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글에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대응되는 문구를 비교해 보면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이 사회 어른들의 고정관념이 확연히 드러난다.듬직한 이름의 바우는 활발하게 뛰어나오고 고운 이름의 옥이는 수줍게 방긋 웃으며 대문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집배원 아저씨가 이름을 확인하면 바우는 자신있게 '네, 그래요'라고 대답하고, 옥이는 공손하게 '제가 옥이여요'라고 대답한다. 단풍잎 편지를 주자 바우는 '야, 이렇게 고운 단풍잎도 있군요'하고 서슴없이 받는데, 옥이는 '어마, 참 곱기도 해라. 정말 저에게 주시는거예요'하고 자신없는 듯이 되묻는다. 받은 후에 바우는 의젓하게 꾸벅 절을 하고 옥이는 우선 볼우물이 옴폭 깊어지도록 미소부터 지은 후, 애교있게 아저씨에게 손을 흔든다. 그리고 바우는 씩씩하게 껑충껑충 집안으로 뛰어들어가고, 옥이는 귀엽게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들어간다. 바우는 진지하고 어른스럽게 온종일 책상 앞에서 앉아서 답장을 쓰고 옥이는 어린애처럼 방바닥에 엎드려 발로 장난질치며 편지를 쓴다.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동화의 내용을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보다 훨씬 더 이분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남자는 씩씩하게 여자는 귀엽게라는 식으로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동이 묘사되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어느 작품에서 남자는 힘껏 달리고 여자가 사뿐사뿐 걷고 남자는 고함을 치고 여자가 조잘대고 남자가 씨익 웃고 여자가 쌩긋 웃는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런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아이들 중에 씩씩한 남자아이가 어느 한 동화작품의 주인공으로, 귀여운 여자아이가 또한 동화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가지고 왈가불가하는 것은 작가의 자유를 침해하는 몰상식한 평이 될 것이다.그러나 동화책 한권을 통틀어보아도 그 반대의 경우가 전혀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며 이에 대해서는 동화작가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반대의 경우가 없이 보수적인 성역할만이 일관성있게 묘사되고 있다는 것은 동화작가들이 이러한 성역할을 아무런 비판의식없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동화의 주제를 살펴보아도 남자아이가 주인공인 경우와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경우는 판이하게 다르다. 남자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화의 경우에는 죄없이 잡혀서 죽임을 당할 뻔한 애견을 위험을 뚫고 구해내는 과정에서 겁많던 소년이 용감한 소년으로 변해가는 이야기, 할머니가 아끼시던 맷돌을 돈 3만원 받고 도시 사람들에게 팔아버리는 아버지, 어머니에 항거하여 할머니 무덤으로 바치러 가는 이야기, 밭에서 파낸 금동불상을 집안에 숨겨두려고 하는 아버지에게 항의하여 결국 군청에 신고하게 되는 정의로운 소년의 이야기, 실수로 아버지가 아끼시던 오골계를 죽이고 그 사실을 감추느라 괴로워하다가 결국 모든 걸 실토하고 당당해지는 아이의 이야기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여자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네 개의 동화를 보면, 하느님의 호주머니에 무엇이 들었을까를 궁금히 여기어 물어보며 다니는 몽상적인 소녀이야기, 죽은 강아지를 돈 받고 판 엄마가 미워서 무작정 집을 나온 아이의 이야기, 아이들이 같이 놀아주지 않아서 따돌림을 당하던 불쌍한 아이가 남들에게 착한 마음으로 봉사함으로써 친구를 얻는 이야기, 엄마 등에 업혀 이야기를 들으며 할머니댁에 가는 아이의 이야기 등이 담겨있다.남자아이의 경우 불의를 보고 고민하다가 그것이 불의임을 깨닫고 그에 항거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묘사된 반면, 여자아이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상황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감정에 휩쓸려 그 상황으로부터 도피하거나 또는 상황에 지고 들어감으로써 문제를 해소하려 하는 것으로 묘사된 것이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여러 동화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예쁜 소녀'에 대한 집착이다.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용모묘사가 거의 없으나 여자이아의 경우에는 예쁜 아이, 예쁜 얼굴, 예쁜 옷...등이 쉴새없이 강조되고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아이들은 턱 아래 바짝 다가와 뽀얀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미나의 주머니에는 예쁜 머리빗이 들어있었다."판돈으로 우리 선이 예쁜 코트 사줄게""내 얼굴이 얼마나 고운가 다른 꽃들과 비교해 보고 싶어.""예쁜 옷.""샘이는 엄마말을 잘 들으니까. 얼굴도 예쁘고 이도 닦고 또 잘 놀기도 하고, 앞으로 착해져야 해."이처럼 온통 예뻐야 하는 여자아이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남자아이에 대해서는 용모 묘사가 거의 없다. 책 한권을 통하여 단지 한군데서 다음과 같은 묘사를 볼 수 있다.
Ⅰ. 서론신화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던 일, 특히, 우주, 인간, 사물(문화)와 같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 존재의 시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공통적인 특징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기원에 관한 신성한 이야기로, 이것은 단순한 태고에 있었던 사실을 서술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재에 있어서 자연, 문물, 인간의 행동까지도 규제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화는 현실적 존재인 우주, 인간, 동식물, 특정의 인간행위, 자연현상, , 제도 등이 어떻게 출현하였는가를 이야기하는 창조의 설화인 것이다.) 두산세계백과사전전세계적으로 신화는 아직도 실제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야기로 믿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화가 갖고 있는 힘-인간의 행동에 대한 규제력-은 아직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가 말하는 초자연적 존재의 행위와 그 성스러운 힘의 표현이 인간의 모든 중요행동의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신화가 진실이건 아니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일 수도 있고, 거짓된 설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신화가 너무나 강력히 인간을 규제한다는 점, 특히, 종교와 마찬가지로 관념론에 근거하여 지배이데올로기를 구축하고 민중들을 그 불평등하고, 근거없는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게 하는데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신화와 종교는 서로 깊숙히 침투되어 있고, 인간의 태고적 삶에 대한 진술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태고적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고 이를 신이나 왕에 대한 절대믿음으로 승화시켜 현실에 엄연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이었던 것이다.따라서 신화는 단지 하나의 성스러운 이야기, 태초의 신비적 이야기로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생활에서 어떠한 힘을 행사하였고, 행사했던 힘이 얼마나 부정적이었으며 지배이데올로기를 강력히 구축하는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이를 파악하기 위해 신화속에서의 관념론적 근거들을 조사하고, 관념론이 가진 한계점된 표상(허위의식)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해를 사회성원 전체의 보편적인 이해인 것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가 계급의 이데올로기는 환성적 공동성인데 이것에 비해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는 참다운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 테리 이글턴즉, 신화를 하나의 문학적 요소, 문화적 요소라고 보았을 때, 신화도 분명히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있을 것이다. 결국 신화도 문화의 한 구성요소로서,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면서 대중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신화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지금까지 그러항 문화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신화의 문화구성요소로서의 이데올로기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신화가 안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알튀세는 사람들이 자신을 주체로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란 일련의 뚜렷한 신조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광범위하고 무의식적인 것인데, 사람이 사회와의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매개항이자 사람과 사회구조를 묶어주고 일관된 목적의식과 정체감을 사람에게 부여한다. 그런데 이러한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은 라캉이 말한 상상적 단계라는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그의 이론에서 개인이 사회 전체와 맺고 있는 관계는 라캉 이론에서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 맺는 관계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인간 주체는 대상과 동일시를 통해 만족스럽게 통합된 자아의 이미지를 얻는다. 또한 두 경우 모두 그 이미지가 주체의 실제 상황을 이상화시키기 때문에 이때 얻은 이미지는 그릇된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암시하는 만큼 아이가 실제 통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또한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생각하는 만큼 일관되게 자율적이며 자생적인 주체는 아니다. 자신에게 투영된 스스로의 이미지에 마음을 뺏겨서 스스로를 이미지에 종속시키게 되기 때문인데, 이러한 '종속'을 통하여 사람들은 주체로 탄생하는 것이다.) , 알튀세르그러므로 이데올로기관주의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문화이데올로기는 단지 지배에 종속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저항, 그리고 피지배와 지배이데올로기의 동의, 타협을 바탕으로 한 헤게모니의 창출로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 권유철하지만 위의 이론들은 한계가 있다, 그것은 그 이론의 바탕이 현 자본주의 사회를 기반으로 한 이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중들의 문화적 수용의 주체성이 어느정도 확보되고, 다양한 문화적 충돌이 일어나는 공간에서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이다.신화가 탄생하여 전승될 시기의 문화적 주체성은 분명히 현재보다 현저히 낮았고, 갈등적인 요소도 적었다.) 철저한 계급관계에 기반한 사회였으므로 그러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권력조차 없었다.따라서 신화는 위에서 말한 알튀세르의 이론처럼 신화의 신성한 성격, 국가의 신성성을 드러내는 성격과 그 문화적 요소의 대중성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스스로 복종시키게 했던 지배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문화적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화자체가 갖고 있는 언어상의 민중성과 내용적인 기원성, 신비성, 주술성, 그리고 사실성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었으며 이를 통해서 문화적 지배이데올로기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배계급은 항상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기 위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대중적으로 장악하려고 하고, 피지배계급은 사회의 현실의 원인이 되는 내부적 모순을 들추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피지배계층이 본격적으로 사회의 계급투쟁의 주체로서 나설 수있게 된 시기는 19세기이고, 이는 신화가 탄생하여 유포될 시기엔 피지배계급은 그 어떠한 헤게모니도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결국 그 당시의 이데올로기는 그자체로 지배계급적 성격을 띄고 있었던 것이다.2. 신화속에 나타난 관념론관념론이란 철학의 근본원리가 인간에서 출발하지 않고 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고대 철학적 이념이다. 따라서 인간은 신이라는 절대이념의 종속하에 놓여있고, 세계는 신의 섭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도 수없이 나타난다. 특히 이는 건국신화에서 잘 나타나는데, 단군신화, 주몽신화, 혁거세신화 등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이 가운데 단군신화는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성립을 설명하는 것으로 다른 건국신화들의 전거(典據)가 되었다.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하늘에서 인간계로 내려와 곰이 사람으로 변신한 웅녀(熊女)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단군(檀君)이다. 단군은 조선을 세우고 1,500년 동안 다스린 뒤 산신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들 신화의 특징은 우선 국가의 시조가 민중과는 틀린 신성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고, 어려서 고생하다가 결국 성공하게 되는 영웅적인 인물이 등장하고, 이러한 시조의 성격이 국가와 구성원의 신성성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즉, 이는 국가의 시조가 존재자체가 신성하고 성스러우므로 보통의 인간과는 분리시킴으로써, 국가의 왕은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공식화하고 있고 이를 통해 왕에 대한 절대숭배를 유도하고 있다. 또한 국가와 구성원의 신성성으로 연결됨으로써 그러한 지배이데올로기에 자연스럽게 순응토록 하는 것이다. 많은 사극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왕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인 신적인 존재로 표현되고, 떠받들여지고 있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왕이라는 국가의 시조 자체가 신성한 존재이고 이러한 피를 물려받은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인 것이다. 또 왕에 대한 순응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기 위한 제반 문화생활 또한 강력히 규제 받았다. 예를 들어 뉴기니의 카이족은 아직도 그들의 생활양식을 절대로 바꾸지 않고 있는데 이는 신화상의 조상인 넴이 행동한데로 행동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제례의식 등 수많은 우리 주위의 문화가 바로 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스러운 의식을 통해 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그 신화의 태초존재인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이것이 확대된 것이 바로 이러한 의식들인 것이다.신화속에서의 신에 대한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신화는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신들에 살고 있는 낯익은 세계가 그 자체안에 존재의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내재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신념, 존재의 근거들은 이 세계를 넘어선 어떤 곳에 존재한다는 믿음이 내재되어 있고, 그러한 세계의 어떠한 신비한 힘에 의해 우리세계는 항상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더불어 신화는 우리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는 인식, 그러한 힘에 의해 우리는 종속되어 있고, 그 힘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믿음을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신화는 인간을 신에 대한 종속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신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을 은연중에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결국 이러한 신을 전지전능하고 인간을 지배, 종속하고 있는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민중들에게 운명론적 인식을 뿌리박게 하고 이를 통해 종교적 신앙을 도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종교와 왕권은 깊숙하게 결부되어 있고 종교적 신앙은 자연히 왕권에 대한 숭배로 드러나게 된다. 민심이 흉흉할 때 종교를 유포시켜 민중들을 정치적인 관심에서 멀어지도록 하는 방법이나, 그 종교의 교리를 이용하여 왕권유지에 기여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종교를 들여오는 경우 등 근대 이전 왕권이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것들은 바로 이러한 예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이러한 신화속의 관념론적 요소는 결국 사람들을 숙명론에 길들이게 하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이념적으로 막음으로써, 종교나 왕권에 대한 절대적 권위에 반할 수 없게 만들고 수많은 사회적 모순들(계급적 모순)을 당연시 여기게 했던 것이다.3. 관념론과 지배이데올로기의 연관성우리는 이러한 신화와 종교의 철학적 원리의 근간이 관념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철학은 근대 맑스의 출현 이전까지 관념론이 중심이었으며 그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계급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관념론 중심의 철학은 인간을 숙명론자로 만들어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스스로 개척할 수 있게 하는 주체성을 상실케하였고 신과 왕권에 대것이다.
현 여성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 우리 사회의 여성의 권위신장은 단지 칙칙한 과거에 비해서 좀 나아졌을 뿐이다. 여성인권운동은 현 우리 사회속에서 크게 두가지의 벽에 부딪히고 있다. 바로 남성과 여성이다. 가부장적 제도하에서 자라온 남성은 현대에 많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달라졌다고 하긴 어렵다. 수십년동안 자라왔던 환경속에서 남성우월주의적 가치관은 당연히 내면화되는 것이 사실이고 이를 깨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사회속에서 여성은 철저히 순종적으로 마치 사회에서 여성다움이라는 기준을 법으로 만든 것처럼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고 있으며 이런 과정속에서 여성은 남성의 사회적 우위에 종속적으로 포함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어려운 현실속에서 여성운동가들은 더욱 과감히 다양한 시각으로 여성학을 고찰하고 있으며 많은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인정한다.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여성이 어떻게 하여 사회적 종속성에 편입되는가,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철저한 연구를 바탕에 둔 학문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아직도 수많은 남성과 여성은 여성운동을 마치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로 몰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며 과도한 혁명가처럼 몰아부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마돈나의 이중적 의미 라는 이 책은 지금까지의 여성학과는 뚜렷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마돈나의 이중적 의미 에서 가장 큰 논점은 바로 여성이 사회속에서 어떻게 종속되어 가는가의 연구를 통한 여성과 이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고찰방법과는 달리 여성의 사회종속과정을 매우 여러면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우선 기억기술작업을 도입하여 여성의 사회적 종속화 과정을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연구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도 역시 다양하게 색다른 주제로 실시되었는데 기존의 성적인 부분인 여성의 신체부분 중 특정한 부위를 통한 연구가 아니라 어느정도 전체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슬레이브걸 프로젝트, 다리프로젝트, 육체프로젝트, 헤어프로젝트, 그리고 여자체조에 대한 것까지 연구를 확장시켰으며 개개인의 기억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 그런 분석을 통해 한 여성이 어떠한 경험을 통해 어떻게 사회적으로 주체가 아닌 종속자로 구속되어 가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 과정을 섹슈얼라이제이션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적 대상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 섹슈얼라이제이션은 여성의 사회적 종속과정에서 하나의 기준을 만들어놓으며 이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여성은 평생토록 쫑겨다닌다. 따라서 저자는 이 섹슈얼라이제이션으로 만들어진 여성과 남성의 불합리한 관계를 깨뜨려야 하고 여성과 사회가 다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기억 기술작업의 프로젝트를 읽으면서 많은 부분을 쉽게 공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라면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주위의 환경이 바로 여성을 성적대상화되도록 억압하고 강요하고 있지만 그 과정은 전혀 섹슈얼하지는 않다. 오히려 철저한 위선으로 도덕성을 이야기하며 예의를 강조하면서 아주 은밀한 과정으로 종속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아버지는 항상 남자인 내가 집에 늦게 들어왔을 땐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다가 여동생이 늦으면 그날은 집안이 매우 시끄러워진다. 한번 생각을 해보자. 왜 여자는 늦게 들어오면 안되고 남자는 암묵적인 용서가 되는 것일까? 아버지는 밤거리가 무서워 위험한데 왜 늦게 들어오냐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나는 알았다. 그 안에는 분명히 섹슈얼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이 밤늦게 들어오는 것은 분명히 sexuall라는 단어와 깊은 연관을 가지며 궁극적으로 아버지가 두려워하신 것도 바로 이 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은 무엇이 틀린가? 이것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의 이중적인 사회적 인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남성의 성관계는 암묵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 라는 식으로 넘어가며 여성에겐 순결 이라는 창살로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말고도 여성은 이 책에서도 서술하듯이 다리의 모양, 머리모양까지 강요를 받지만 그 진정한 이유는 항상 은폐되어 있으며 섹슈얼한 의미를 사회적인 도덕성으로 철저히 가리며 여성은 자연스럽게, 자신도 모르게 이 사회에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들어서며 그래야만 비로소 사회적 정체성.안정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성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끊임없이 가꾸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어떤 저서보다도 다른 이론과의 접목을 활발히 시도하고 있다. 우선 다른 여성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여성학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시도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와 미셸푸코의 이론이 접목되었으며 카톨릭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이론인 보틸랴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고 권력이라는 이데올로기와 여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따라서 이 책은 기존의 여성학을 국가, 권력, 종교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은 바로 푸코의 담론의 형성 이다.즉, 섹슈얼리티란 오로지 담론속에서만 존재하며, 담론을 매개로 할 때 섹슈얼리티는 안정적인 것이 아니며 사회적 조건에 걸맞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담론이란 단지 언어적 실천뿐만 아니라 행동적 실천을 모두 의미한다.궁극적으로 여기에선 기억이라는 수단을 집단적으로 동원하며 섹슈얼리티의 새로운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미셀푸코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섹슈얼리티를 그 영역이 정해진 것으로 보는 기존의 관점을 철저히 부정한다. 그런 변화하는 섹슈얼리티를 권력이 활용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럼으로써 섹슈얼리티는 재생산되며 이것이 현 우리의 삶을 형태화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정상인가 비정상인가를 분류하는 것도 바로 담론화되고 권력에 의해 이용되는 섹슈얼리티의 문제인 것이다. 기존의 철학적 이론의 비판적 분석과 도입을 통해 이 책은 여성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섹슈얼리티로부터의 해방, 권력으로부터의 해방-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여성학이 궁극적인 뚜렷한 방도를 제시하지 못하고 방법적인 면에서 협소함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녔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새로운 관점이 분명하다.
현 사회에서 여성운동은 매우 다양한 각도로 일어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단지 이전에 남성으로부터 좀 더 주체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의식에서 이제는 사회의 전반적인 면에서 총체적으로 사고하면서 여성학의 폭이 확장되어 가고 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수많은 여성학 책이 꽉 채우고 있는 광경을 보면, 그와는 반대로 남성학에 대한 책이 별로 없는 것을 보면 여성 스스로 여성에 대해, 그리고 여성을 옭아매고 있는 총체적인 사회에 대한 연구가 방대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은 과연 남성에 대해 스스로 얼마나 연구를 진행했는가 의문이 든다. 이것은 남성이 게을러서가 아닐 것이다. 이는 남성이 스스로 연구할 필요를 못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들이 사회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현 남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은 자신의 이성인 여성에 대해서도 너무나 모르며 더군다나 사회적으로 성에 대해 정확히 바라보는 관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남성은 그런 분위기속에서 자연스럽게 남성우월주의적인 가부장적 가치관을 자신에게 내면화시키고 성인이 되어서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철저히 이중성을 갖게 된다. 그런 과정속에서 남성은 gender라는 의미가 아닌, sex라는 의미로 성을 상징화하고 아름다운 성을 도태시킨다.그래서 이 책은 참으로 반가운 책이었다. 남성... 어떻게 보면 남성이란 그 규정을 정확히 할 수 없는게 사실이다. 과연 남성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하라고 하면 정확히 하지 못하거나 단지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이 전분일 것이다. 씩씩하고 힘이 세고 당당하고 활발하고 적극적이고... 그런 이미지들하지만 이 책은 남성성에 대하여 철저히 고찰하고 있다. 다양한 이론을 예를 들면서 남성이란 무엇인가, 남성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남성은 어떻게 남성성을 획득하는가, 조화로운 남성이란 무엇인가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우선 이 책은 남성의 분화에 대해서, 남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큰 틀로 세 가지를 규정하고 있다. 우선 남성이란 어머니로부터의 분화인 것이다. 남성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자마자 철저히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그럼으로써 남성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여성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은 어머니로부터의 투쟁을 시도해야 하며 분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마마보이도 그런 어머니의 영향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영향이 만약 없다면 아이는 정서적으로 결함이 있는 성인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즉, 이 말은 어머니로부터 양육을 받고 보호를 받는 시기가 지나면 당연히 어머니로부터 분화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밀고 있다. 따라서 남성은 남성이 되기 위해 Y염색체를 얻기 위한 싸움, 그리고 어머니로부터의 싸움을 강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그리고 남성이 되기 위한 또 다른 조건은 바로 여성으로부터의 분화, 즉, 여성이 아닌 것이다. 남성성은 분명히 여성을 두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여성이 없인, 성에 대한 이원확 없인 남성을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남성은 그런 상대적 개념속에서 여성과 다른 성이 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의 개념에 반대되어야 한다는 억압속에서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성이란 여성성에 대한 반발이며 변할 수 밖에 없고 현 상황속에서 여성성이 크,게 변하고 있는 지금 남성은 기존의 남성성에 큰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에 대한 여성의 위협적인 공격속에서 남성은 또 다른 시련을 맞이하고 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성을 정의한 것은 남성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동성애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갖는가에 대해서도 고찰해야 한다. 이말은 동성애자는 남성이 아니라는 가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동성애자는 남성이 아닌것일까? 동성애자는 선천적으로 남성이면서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분명히 남성이다. 그렇다고 해도 동성에 대한 성적 방향성을 여성같다고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성애자도 분명히 남성이며 스스로 여자라고 정의하지는 않는다. 즉, 남성으로써 동성을 좋아할 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은 동성애자를 다른 하나의 성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를 하나의 성으로 규정한다면 남성을 동성애자가 아닌 성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 우리 사회는 동성애자는 하나의 당당한 성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성으로 규정하자면(남자동성애자들) 결국 남성이라는 규정밖엔 없는 것이다. 즉, 동성애자를 단지 남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여성적이라는 말은 성의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내 생각엔 잘못된 사고인 것 같다. 따라서 동성애자-남녀 모두 포함하여-는 이 사회에서 따른 하나의 독립적인 성으로 규정해야만 하며 사회적으로 그 성이 인정받아야 한다. 그 가정하에 남성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자는 오랜 기간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아직도 전혀 동성애자를 인정하지 않고, 멸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의 이원화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이다. 성의 이원화를 통해서 우리 사회는 여성과 남성의 수많은 억압이 존재하며 또 다른 성-무성, 중성, 동성애자-을 억압하는 것이다. 사회적 소수인 그들은 단지 사회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그리고 어려서부터 철저히 성의 이원화를 배우기 때문에 그 외의 성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어 그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다. 당연히 성은 남성과 여성밖엔 없는 것으로 정의하여 그 소수-과연 소수인가-를 철저히 배척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공포-호모포비아-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데올로기적인 공세이다. 에이즈의 이유를 동성애자로 몰아부치거나 한 국가, 사회가 어려울 때마다 동성애자를 억압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이 책에선 마지막으로 조화로운 남성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선 남녀모두 양성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중성성과 혼돈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양육과정에서 배제되어 왔던 남성이 모성적 부성애 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양육에 참여해야 하고 그래야 아들이 구체적인 남성모델을 눈앞에서 접하며 바람직하게 성장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중성성과 양성성이 구별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즉, 양성성을 고수하는 이유는 바로 남녀의 성차이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과연 남녀의 성역할을 구분지어야 하는가? 남녀의 성역할을 뚜렷하게 구분짓는 것, 그리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남성중심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현 남성의 기득권적 위치에서 남성은 그 성 역할을 계속 구분짓기를 원하는 것이다. 남성성을 여성성과 반대로 차이를 두면서 정의하지만 그것은 본질적 문제이지 역할적 문제는 아닌 것이다. 현재 성역할에 차이를 두는 것은 현 존재하는 수많은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그대로 두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양성성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실제로 태어날 때 성차란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 성차란 것은 도달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관념, 또는 오랜 세월을 통해 억압기제로 작용해 왔을 뿐이다. 즉, 여성, 남성은 태어나자 마자 성역할의 차이가 본질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우리 사회의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어떤 남성상을 필요로 하며 어떤 여성상을 필요로 하는지에 따라서 철저히 만들어지고 그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성역할이 구분되어지며 그것이 바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규정짓는다. 그리고 이를 일탈하는 행동은 철저히 억압하는 것이다. 오늘 날 남성성이 위협받고 있는 것은 바로 여성의 끊임없는 사회적 도전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양성성은 납득이 안가는 개념일 뿐이다. 다만 이 양성성은 남성을 양육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과도기적으로 필요한 설명으로는 효과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