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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국어 선어말어미 평가A좋아요
    중세국어의 선어말어미서 론중세국어의 어미도 현대국어와 같이 어미를 선어말어미와 어말어미로 나눌 수 있다. (1)은 동사의 활용이다. 활용은 어간에 어미가 붙어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는 현상을 말한다.(1) 가. 죽다나. 보힝다니이다어미 가운데는 (가)와 같이 단순한 것도 있고 (나)와 같이 복잡한 것도 있다. (가)의 '죽다'는 어간 '보-'에 '-힝-, -다-, -니-, -이-, -다-'의 다섯 개의 어미가 붙어있다. 이 가운데서 '-다-'와 같이 다음에 다른 어미가 오지 않아도 단어를 완성시키는 형태소를 "폐쇄형태소"라 하고 '-힝-, -다-, -니-, -이-'와 같이 다른 형태소가 오지 않으면 단어를 완성할 수 없는 형태소를 "개방형태소"라 한다. 단어의 끝에 오는 폐쇄형태소를 "어말어미"라 하고 이에 앞서 형태소를 "선어말어미"라고 한다.선어말어미는 기능에 따라 보통 경어법, 시상법, 의도법으로 나뉘어진다. 이 어미들 외에 감동법을 설정하기도 한다.본 론1. 분리적 선어말어미와 교착적 선어말어미중세국어의 선어말어미도 다른 어미와 자유롭게 결합되는 분리적 선어말어미와 그렇지 않은 교착적 선어말어미는 "문장구성소"라 말할 수 있다. (나)에서 '-힝-'은 대부분의 어미와 결합되므로 분리적 선어말어미에 속하고 '-다-, -니-, -이-'는 제한된 어미와 결합되므로 교착적 어미에 속하는 것이다.밑에서 논할 '-싶-'과 '-시-'는 분리적 선어말어미에 속하고 그외에 논하는 모든 선어말어미는 제한된 어미와 결합하므로 교착적 어미에 속한다.2. 경어법 선어말어미1) 겸양법 선어말어미 '-싶-'겸양법의 형태소 '-싶-'계가 사용될 수 있는 조건은 客語>主語, 客語>話者, 客語>聽者 등의 위상이 성립해야 사용될 수 있다.(2) 그지 업서 몬내 혜힝힝 功과 德괘 (月釋字)부처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에 보통의 공덕이 아닌고로 話者
    인문/어학| 2001.07.29| 9페이지| 1,000원| 조회(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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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 국어 표기법 평가A좋아요
    中世國語 表記法에 대하여서론일반적으로 中世國語란 訓民正音이 창제된 15세기 중반에서 15세기 후반 壬辰倭亂 때까지의 한국어를 가리킨다. 한국어의 역사구분에 관해서는 학자에 따라 상당히 차이가 나지만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인 고려시대를 전기 중세국어 , 창제된 후인 조선시대 전반을 후기 중세국어 라고 부르는 일이 많다.우선 전기 중세국어의 표기법과 훈민정음 창제, 그리고 후기 중세국어의 표기법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근대국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16세기 국어의 표기법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한다.본론1. 전기 중세 국어 (고려~훈민정음 창제)1)한자차용표기한자의 음이나 훈을 빌려서 국어를 표기한 것을 국어의 漢字借用表記, 즉 借字表記라고 한다. 대체로 의미부는 한자의 훈을 취하고 형태부는 음을 취하여 특히 곡용이나 활용에 나타나는 조사나 어미를 표기하였다.(1) 이두이두란 말은 광의의 이두와 협의의 이두의 두 개념으로 쓰인다. 광의의 이두는 협의의 이두는 물론, 향찰, 구결, 고유명사표기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니 차자표기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이다. 이두가 이러한 개념으로 쓰인 것은 이 명칭이 생겨난 초기부터엿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 고 한 것이나. 훈민정음 정인지 서문에서 설총이 이두를 처음 만들었다. 고 한 것은 이두를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설총이 우리말로 구경을 읽었다. 고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도 설총이 우리말로 중국과 우리의 민간에서 사용하는 물명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육경문학을 훈해하였다. 고 하였다. 이는 설총이 그의 학문을 차자표기로 기록함을써 그 발달에 크게 공헌하였던 것을 말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고 하였으니 이두와 차자 표기를 같은 것으로 본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고려시대 이후는 한문이 교양인들이 쓰는 문어임에 대하여 이두는 이서들을 중심으로 하여 민간에서 쓰이는 문어였으므로 이와같이 쓰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두를 이와같이 차자표기의 대명사와국어의 문장의 구조를 반영하고 조사와 어미 등 문법형태소가 표기되기는 했지만, 다양한 문법형태소 특히 문말 어미가 극도로 단순하게 표기되거나 아예 삭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랜 동안 사용된 이유는 첫째, 실용상으로 이두는 吏胥들과 관계 있다. 둘째, 한문의 후광을 입었다. 셋째, 한글로 된 문서는 법적인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다.(2) 구결口訣이란 용어는 입곁 이 차자표기이다. 곁 은 訣이란 차자표기이며 곁 으로도 쓰인다. 곁 또는 곁 은 사물의 본질에 부수하는 부차적 성질을 뜻하고 입 또는 읊다 의 중세국어 잎다 와 관련이 있는 말로 보인다. 이러한 어원이 말하는 바와 같이 구결은 한문 원문을 읽을 때 구절 사이사이에 들어가서 문맥을 밝혀주는 국어의 문법형태들이다.구결은 한문이 원전에 토를 단다는 일정한 한계가 있으므로 다른 자료와 쉽게 구별이 된다. 이는 한문을 정확하고 쉽게 해독하기 위하여 발달한 것인데 크게 釋讀口訣과 音讀口訣로 나뉜다. 석독구결은 한문을 우리말로 해석하여 읽는 방법에 吐로써 표시한 것이다. 현존 자료는 12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지는 舊譯仁王輕釋讀口訣이 最古의 것이다. 이러한 구결은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미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데, 설총이 訓解六經하였다는 것도 바로 이런 석독구결이었을 것이다. 이 구결이 이두표기법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향찰표기법의 모태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니, 차자표기법을 논함에 있어서는 빼놓을수 없는 것이다. 음독구결은 한문을 음독하면서 그 구독처에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를 넣어서 읽는 것이다.ⅰ. 한자 차용 구결 예국어의 문법 형태소인 토를 한자를 차용하여 쓰되 그 한자의 뜻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음만을 선택하여 사용한다.天地之間萬物之中厓 唯人伊 最貴爲尼 所貴乎人者隱 以其有五倫也羅:구결표기애 이 하니 는 (지)라ⅱ. 구결의 약자표기厓(애) → , 伊(이) → , 尼(니) → 匕隱(은) → , 羅(라) → 꿇 , 臥(와) → 卜(3) 향찰향찰이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것이므로 한자의 문자 체계에 의지하게 된다. 한자의 문자 체계가 복잡한 것에 비례하여 차자표시의 문자 체계도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한자를 빌어오는 과정에서 차자 표기법 나름의 문자 체게가 형성되어 왔다.이 문자체계의 원리는 크게 두가지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다.그 하나는 한문의 학습방법에서 얻어진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한자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원리이다.한문의 학습은 원문을 음독한 다음 우리말로 새기는 두 과정을 밟고 있다. 이러한 방법이 언제부터 발생한 것인지는 분명하게 밝힐 수가 없지만, 한문이 이 땅에 들어온 초기부터였을 것이다. 외국어의 학습, 특히 文語의 학습은 이 두 과정을 취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삼국시대차자표기자료들을 보면 당시 이 방법으로 한문을 학습하였던 것으로 믿어지는 증거가 았다. 한문을 새기는 방법이 체계화되면 한자에 제한된 범위에서의 訓을 부여하게 된다. 天 에 대하여 하다 , 地 에 대하여 % 와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한자를 音으로 읽는 방법과 訓으로 읽는 방법이 성립되어 이 音과 訓이 차자표기법의 문자 체계를 이루는 첫 원리가 된다.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방법은 표음문자인 한자의 뜻을 가려서 이용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뜻을 버리고 표음자로만 이용하느냐의 둘로 나뉜다. 전자를 讀 의 원리라하고 후자를 假 의 원리라고 한다. 讀 이란 漢字가 본래 表記文字이므로 이를 읽으면 자연 그 뜻도 살려서 읽게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고 假 란 한자가 表意 文字이지만, 그 表意性을 버리고 表音性만 빌어서 쓴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2. 후기 중세국어 (훈민정음 창제 ~ 임진왜란)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자생활은 사대부인 양반층의 한문과 중인층의 이두로 이원체계였다. 즉, 일상적 대화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였지만, 글로 표현할 때에는 양반과 중인층이 다른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한자가 매우 배우기 힘든 문자이기 때문에 각각 병서하면 전탁의 ㄲ,ㄸ,ㅃ,ㅉ,ㅆ 가 만들어진다는 사실도 언급되어 있다.2)중성중성글자 11자는 다음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ㆍ, ㅡ,ㅣ,ㅗ,ㅏ,ㅓ,ㅜ,ㅛ,ㅑ,ㅠ,ㅕ중성 11자 가운데서 ㆍ,ㅡ,ㅣ,ㅗ,ㅏ,ㅓ,ㅜ 의 7자는 단모음이지만, 나머지는 부음 y 를 앞세운 중모음이지만 그런 차이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훈민정음 창제시 이 11자 모두를 단모음으로 출발한 데서 비롯된 오류라고 할 수 있다.3) 종성終聲復用初聲종성은 특별한 글자를 만들지 않고 다시 초성을 가져다 쓴다는 규정만 있을 뿐이다.4)성조중세어 문헌을 보면 한글 옆에 "·"이나 ":"이 찍혀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방점"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성조"를 나타낸 것이다. "성조"라고 해도 중국어 성조와 다르고, 일본어 높낮이 액센트와 같은 것이다. 점이 없음을 평성이라고 하며 낮은 소리, 한 점은 거성이며 높은 소리, 두 점은 상성으로 낮다가 높아지는 소리를 나타냈다. 다시 말해, 중세어는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소리의 높낮이로 의미를 구별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 "성조" 즉 액센트도 대부분의 방언에서는 사라지고, 지금은 경상도와 함경도 방언에만 남아 있다.5)표기법(1) 원리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실제로 이 문자로 기록된 15,16세기의 중세국어 문헌들을 살펴보면 매우 엄격한 정서법이 수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곧, 중세국어 표기법의 원리는 다음 2가지이었다.ⅰ. 중세국어 표기법의 일차적인 원리는 음소적이었다.ⅱ. 중세국어 표기법의 이차적인 원리는 음절적이었다.ⅰ의 원리는 중세국어의 각 음소를 충실히 표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형태음소론적 교체가 표기법에 반영되었다. 이 원리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종성표기이다.예) 돗기, 돗 , 돗 , 돗도, 돗과(2)팔종성법「訓民正音」例義에서 종성은 새로 글자를 만들지 아니하고 초성을 다시 쓰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제자(制字)상의 원리이겠으나 표기법의 측면에서 보면 초성에 글자를 그대로 다시 쓰는 것은 모두 초성이 종성에 착되었던 것임을 알게 한다.8종성법은 국어의 음운 법칙에 충실한 표기였다.국어에는 받침소리규칙(중화 현상)이 있어서 당시에 받침(종성)에서 소리가 8개(현대 국어에서는 7개)로 제한되는 특징이 있었던 것으로, 이러한 음운 현상이 표기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기저음운(기본 형태소의 받침 소리)을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변이음(變異音)을 표기하는 음소주의적 표기법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3) 연철(連綴)훈민정음은 음소문자이면서도 음절 단위로 모아쓰도록 했고, 한 음절도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이들이 모두 합해져야 이루어지는 ( 初中終三聲 合而成音 ) 것으로 보았다.여기서 종성(終聲, 받침)의 표기 문제가 나타난다.종성은 새로 글자를 만들지 아니하고 초성을 다시 쓰되( 終聲復用初聲 ) 한 음절로 모아쓸 때에는 초성과 중성의 아래에 ( 終聲在初中之下 )쓰도록 했다.그런데 국어는 발음상에서 뒤 음절이 모음으로 시작되는 것이 따라오는 경우 앞절의 종성이 뒤 음절의 초성으로 발음되는 연음(連音, 닿소리 이어나기)현상이 있다.이 때 다음과 같이 종성을 받침으로 적을 것인가, 아니면 다음 음절의 첫소리로 적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가) (나)사람이 사람을 : 사라미 사라믈먹어 먹을 : 머거 머글위에서 (가)와 같이 받침으로 적으면, 실질 형태소인 사람, 먹- 등이 그 형태가 고정되고 문법 형태소인 조사 -이,-을 과 어미 -이,-을 등이 시각적으로 분리 표기되어 읽기 에서 이해가 빠르고 표기 방식도 질서정연하게 된다.그러나 각 형태소의 기본형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문자의 쓰기 단계에서 어려움이 있다.이것은 최소의 유의미적 단위인 형태소별로 음절에서 구분하여 표기하는 끊어 적기(分綴)방식이다.한편 (나)와 같이 사라미, 사라믈, 머거ㅡ 머글 처럼 실질 형태소와 문법 형태소를 구분하지 않고, 발음 그대로 앞 음절의 종성을 다음 음절의 초성으로 적으면 쓰기 는 쉬우나 형태가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해에는 불편이 따른다.
    인문/어학| 2001.06.22| 8페이지| 1,000원| 조회(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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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
    1. 제 1, 2차 아편전쟁기에 나타난 불평등조약을 통해 열강의 중국침략의 특징을 논하시오.전쟁의 결과 맺어진 남경조약으로 영국은 엄청난 배상금과 아울러 홍콩을 할양받고 상 해, 광주를 포함한 5개항을 개항시켰다. 또 중국의 수출입관세는 영국과 상의하여 결정하기로 하였다. 남경조약을 보완하는 추가조약에서 영국인의 범죄는 재판권이 영국인에게 있다 는 치외법권을 보장받았다. 남경조약과 3개의 추가조약 및 미국, 프랑스와 맺은 유사한 조약으로 중국은 불평등한 조약체제에 편입되었다.관세협정권을 영국에 부여함으로써 중국이 관세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재판권과 최혜국 대우를 인정한 것은 불평등조약의 전형적인 내용이었다. 중국은 이로써 자국의 자본가를 보호할 수 있는 보호관세정책을 쓸 수 없게 되었고 중국내의 외국인 범죄를 중국법에 따라 재판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이 어떤 외국에 새로운 조약상의 특권을 부여하게 되면 다른 외국은 곧바로 최혜국대우의 조항에 따라 동일한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이 밖에 통상항구에 외국이 군함을 파견하거나 순시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둠으로써 외국 군함이 중국 영해에 자유로이 들어오게 되었고 5개항구에 외국인이 땅을 빌려 영원히 거주 할 수 있게 규정함으로써 조계*제도의 기초를 만들었다. 개항장에서의 자유로운 포교와 교회설립 규정은 이후 교회가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 아편무역에 대해 이후 일체 중국이 간섭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해주었다. 이 모든 조약상의 규정은 결국 중국에 대한 외국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발판을 제공하였고 이후 중국은 반식민지적인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전쟁의 패배와 맞물려 시작된 중국의 근대는 이리하여 반식민지적인 상황으로부터의 탈피와 그를 위한 부국강병이라는 목표를 과제로 부여받게 되었다.4개국과 맺어진 천진조약의 주요내용은 외국공사의 북경주재, 양자강 유역과 북부지역 및 기타지역의 10개항 개항, 내지에서의 여행, 통상, 포교 자유, 영사재판권 확대, 양자강 및 통상항에의 군함진입권포격을 받고 대파되었다. 영국은 중국이 조약을 파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외국공사의 북경주재가 곧 영불함대의 진입권을 부여한 것은 아니므로 조약파기 당사자는 중국이 아니라 영국이었다. 미국은 청조 의 요구대로 북당에서 비준서를 교환하였다.그러나 1860년 영불연합군은 대고에서의 패전에 설욕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였고 10월 13일에는 북경을 함락하기에 이르렀다. 수도인 북경이 바다를 건너온 외국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사실은 중국인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황제를 포함한 관리들로부터 일반민들까지 피난행렬이 줄을 짓고 연합군의 끊임없는 약탈, 방화 등의 만행과 중국 패잔병, 토비들의 약탈까지 겹쳐 치안부재의 혼란상황이 연출되었다. 결국 청조는 치욕적인 북경함락을 당한 후 북경조약을 체결하였다.북경조약은 천진조약의 내용을 인정한 위에 다음의 내용을 덧붙였다. 즉 천진을 개항장으로 추가하고 중국인 노동자(쿨리)의 이민을 허가하며 구룡반도 남쪽의 구룡사(九龍司)를 영국에 할양하고 과거에 몰수한 카톨릭교회당을 상환하며 각 성의 토지를 임대하거나 구매하여 교회를 건립할 수 있게 하고 배상금을 증액한다는 것이었다.청조가 그토록 꺼려 하던 외국공사의 북경주재가 확고한 사실로 굳어져 북경에는 공사관 이 설립되었다. 또 1861년에는 외국과의 외교를 전담할 관청으로 총리아문(總理衙門)이 설치되었다. 개항장이 16개로 늘어나고 내지여행권, 내해항행권이 보장되면서 중국은 서양의 상품시장, 원료시장으로 화하였다. 외국상품에 대한 내지통관세의 경감은 중국 민족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예컨대 이후 면제품이 대량으로 들어와 중국산 면포, 면사를 대신하게 되면서 중국면업에 큰 타격이 되었다.외국선교사가 자유로이 교회를 설립할 수 있게 한 결과 중국인 신자가 증가하면서 한편으로 중국인의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 외국 군함이 중국 연해는 물론이고 내륙하천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중국의 주권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아편전쟁과 난징조약을 비롯한 일련의 불평등 조약의 체결로 중국사회에는은 경제도 점차 세계자본주의 시장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아편전쟁 후부터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적 사회로 변화되어 갔다. 또한 계층간 갈등의 양상에도 변화가 있었으며 봉건사회의 지배계층과피지배계층인민중사이의모순과갈등외에외국자본주의와 중화민족 사이의 모순과 갈등이 추가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인들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해야하고 외국자본주의의 침략에도 반대해야하는 두 가지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여러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중국주재 공사를 통하여 직접 청왕조 조정에 압력을 가하였고 중국의 내정과 외교까지도 조정하고 간섭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해안 지역 7개성과 장강중류에 이르기까지 많은 상업도시들이 개방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침략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청왕조의 반민족적 세력은 외국세력과 결탁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자신들의 세력을 부식하는데 사용하였다. 2차 아편전쟁이후 중국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주권을 잃게되었으며 식민지화의 정도는 한층 높아졌다.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상황에서 탈피하려는 반(反)제국주의 운동이 중국근대 사의 주요과제로 등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중화제국의 수도였던 북경을 함락시킨 서양의 힘,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중국사회를 개혁하려는 기운도 가속화하여 결국 양무개혁운동의 계기가 마련되었다.2. 태평천국운동의 이념과 그 의의에 대해 논하시오.태평천국의 광범위한 확장과 세력 유지는 과연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당연히 민중적 집단화를 이룩하게 한 민중적 성격일 것이다. 배상제회의 평등사상, 즉 기독교적 평등사상과 전통 중국의 대동사상이 결합하여 경제적 평등사상으로 발전한 것과 재산 공유의 가족공동체적 성격은 민중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당시 참가자대다수는 지주, 관료, 상인, 고리대업자에게 핍박과 착취를 당하던 힘없는 민중으로 구성되었으며 태평군은 신사지주, 부상, 고리대의 재산을 몰수하고 징수한 미곡, 금전, 의류 등을 민중에게 분배하여 겁부제빈을 실현하였다. 또한 분야에 미치는 농민의 이상사회의 청사진을 묘사한 것으로 초기 태평천국의 성격과 급속한 민중의 지지를 분석할 수 있는 중요한 문건이다. 천조전무제도 의 핵심은 토지정책을 근간으로 한 일련의 경제정책이며, 그 중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천하의 토지는 천하의 사람이 함께 경작한다는 원칙에 따라 지주제를 폐지하고, 토지생산력에 따라 토지의 등급을 이등분하여 가구수의 과다에 따라 토지를 평등분배한다. 둘째, 인민의 농업노동 이외에 양잠, 길쌈, 재봉, 가축 사육, 목공일 등을 의무화함으로써 농업과 수공업이 결합된 자급자족적 경제체제를 도모하였다. 셋째, 25가를 하나의 경제적 자급단체로 설정하여 여기서 생산된 산물은 필수 소비량을 제외하고 모두 국고에 납입하며, 필요 물자는 국고로부터 일률 지급하는 평등분배원칙을 확립하였다. 넷째, 늙은 홀아비와 과부, 자식없는 노인과 고아, 그리고 병약자나 신체 불구자 등 노동능력 상실자는 모두 국고로부터 공양하고, 풍작지역에서 흉작 지역을 돕는 등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하였다. 이상이 천조전무제도 가 설정한 이상사회라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주례에서 이상화한 대동사회, 즉 토지 공유를 원칙하에 정전법(구등분)과 병농일치의 사회조직을 갖고 있는 대동사회를 좀더 구체화한 사회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지주제에 대한 부정은 봉건적 토지제도에 대한 부정이며, 농민적 토지 소유의 보장은 반봉건적 토지제도가 천하의 토지를 고르게 경작하는 원칙에만 머무르고 근대적 의미의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를 내포하였다. 토지제도는 그것을 집행할 관직이나 관리가 없고, 구체적인 실현방안, 즉 전의 등급에 따른 결전 급의 비율과 1인당 결전의 크기, 분전과 급전을 위한 토지와 인구 조사에 관한 규정의 미비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천조전무제도 는 핵심적 제도인 토제제도의 구체적인 실현방안의 결여라는 모순과 농민의 염원이 실현 불가능한 공상적 농촌공동체사회 건설을 지향했다는 한계 때문에 천저전무제도는 전반적으로 실현되지 못했으나 토지의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상제는 유일신으로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고 무소불능의 권능을 가지며, 모든 인류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홍수전은 중국의 전통적인 인격신 상제를 기독교의 다른 모든 우상을 엄하게 부정하는 유일신으로 생각함으로써 서양의 신 여호와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신, 신부, 혼부, 신부화혁라는 용어를 통해 '신은 인간 정신의 아버지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신이 모든 인간의 아버지이며 개인은 각자의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성립시키려고 노력했다.홍수전은 삼위일체설을 인정하면서 전통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을 변형하게 된다. 즉 천부, 천형 예수, 천왕 홍수전을 상정함로써 예수는 신의 독생자가 아닌 장자가 되어 신성이 부정됨으로써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의 의미는 상실되는 것이다. 천하 만민의 아버지로서 유일신 관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적 선민의식이 중화사상을 통해 나타나고 중국은 천명을 받은 신국이 건설되는 세계의 중심으로서 세계 각국보다 우월한 종주권을 지닌다고 보았다.태평사상에 대한 종교적 영향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기독교가 정치적 집결력으로 이용되어졌으며 형제애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의미하는 형제는 혈연관계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들'을 의미한다. 홍수전은 이를 바탕으로 '천은 아버지라 불리우고 천하는 일가이며, 천하의 남자는 모두 형제, 천하의 여자는 자매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배상제회에서의 종교적 형제에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태평천국은 그들의 신에 대한 생각을 기독교로부터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다분히 전통사상적 기반위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신이 인간처럼 육체와 아내를 지니며, 신의 성격이 근엄, 자애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전통적이 중국인의 자세였다. 홍수전은 예수의 신성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의 존재를 높임으로써 신격화시키고 인민들로부터 순종을 요구하였다.홍수전은 사교적 불교, 도교를 격렬히 비난하고 그 행위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였다.이처럼 홍수전은 전통적인 사고를 통해 그들의 종교를 소개하였고 성경.
    인문/어학| 2001.06.22| 5페이지| 1,000원| 조회(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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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0일 수요일
AI 챗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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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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