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파술에 대하여.... - 기술교육과 200002352 박희정산파술이란 간단히 말해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만을 해서 학생에게 스스로 상기시켜 알아내게 하는 방법이다. 최근 한국교육에서는 열린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학생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창의력을 앞세우는 교육이 중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산파술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산파술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것으로 영혼 불멸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영혼은 불멸이고 그래서 육체가 죽게 되면 영혼과 육체는 분리된다. 그리고 영혼은 새롭게 태어나는 아기의 육체와 만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전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심신 이원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는 지식을 얻는 것은 전생에 있었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산파술을 상기설이라고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교사의 위치가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 도와주는 산파와 같이 학생이 지식을 얻을 때 도와주는 즉, 영혼의 산파와 같다고 주장했다. 전생의 기억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질문을 하고 학생은 질문을 통해 전생의 기억을 상기해 지식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산파술을 주장한 그의 이론에 기본 사상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영혼은 불멸하고 그렇기 때문에 전생의 기억을 찾아낸다는 것이 지식은 얻는다는 것은 매우 모순된 주장이다. 그럼 맨 처음의 영혼은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학생에게 단순한 주입이 아닌 스스로 문제의 답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 현재 한국 교육은 교사는 단순히 지식을 주입시키기만 하고 학생은 단순히 암기만 하는 교육만 행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학생들은 암기에서는 뛰어날지 모르나 창의력이 매우 부족하다. 또한 누군가 주입시켜주는 교사가 없어지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 산파술에서 지식을 얻게 해 주는 방법으로 주장이 된 '질문'이 이런 상황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해결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학생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학생은 문제에 대해 좀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고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게 하며 관심을 갖게 할 수 있다.하지만 이렇게 학생에게 질문만을 던진다면 시간은 많이 걸릴 것이다. 혹은 알아내지 못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한국 교육 현실에서는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면 살아남지 못한다. 한국은 인구밀집도가 매우 높은 나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앞서나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만은 던지고 학생이 그것에 대한 대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만큼 여유가 없다. 다시 말해, 학생에게 질문만을 던지는 것도, 또 주입만 하는 것도 어느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다. 이 두 가지 방법을 절충하는 것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적절히 절충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가령 덧셈밖에 할지 모르는 학생에게 나눗셈을 하라고 하면 할 수 있는 학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최소한 곱셈을 가르쳐 주거나, 한 자리 수의 나눗셈의 원리를 설명해 주고 두 자리 이상의 나눗셈을 질문으로 던졌을 때 시간이 오래 걸려도 풀 수 있는 것이다. 즉, 가장 기초적인 지식이 어느 정도 깔려 있어야 학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기본 원리를 알아야 만이 시간도 훨씬 단축되고 효과도 클 것이다.앞으로 3년 후 교사가 된다면 무족건적인 질문보다는 한가지 방법을 알려준 후에 다른 방법을 찾게 시키겠다. 예를 들면, 수학 문제를 풀 때 한가지 풀이 방법을 알려준 후 "다른 방법으로 풀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 는 식으로 질문을 하겠다. 혹은 "왜 이렇게 풀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써 원리를 스스로 생각해 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질문을 하겠다. 단순히 외우는 것이 아닌 원리 자체를 스스로 생각해서 이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유도하겠다. 하지만 이것 모두 기초적인 지식이 없다면 매우 불가능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기초라고 생각되는 밑바닥에 깔린 지식은 학생에게 가르쳐 줘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학생은 좀 더 이해 할 수 있는 시간이 단축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라는 자신감이 들어 쉽사리 흥미를 잃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또한, 산파술에 내재된 생각 가운데 눈여겨볼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모든 사람은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모든 사람의 영혼은 전생에 수많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지식이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교사가 도와 주기만 한다면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켜 훌륭한 지식을 지닌 뛰어난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에 내재되어 있는 영혼에 대한 철학적인 논리 자체를 믿지 않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의 능력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현재 한국 교육에 비춰보면, 단순히 공부를 잘하고 수학문제 한 문제 더 맞추는 학생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런 학생들만이 능력 있는 학생이라 믿는다. 그 이외의 학생들은 모두다 낙오자로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학생들은 IQ가 높은 학생은 많아도 EQ가 발달한 학생이 많지 않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모든 학생들의 능력을 인정해 주고, 각자 나름대로의 소질을 개발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모두다 획일화 된 교육이 아닌 학생 한 명, 한 명을 위한 교육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보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재능을 개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등생이 아니면 소외되는 현실도 조금이나마 개선될 수 있다.
-"연구실 밖으로 나온 심리학"을 읽고-Ⅰ.序文"연구실 밖으로 나온 심리학"이란 제목이 표방하듯 본서는 심리학의 개론(槪論)형식을 넘지 않는 한에서 에세이의 형식을 빌어 심리학의 연구 분야를 설명하고 있다. 우선 잠시나마 심리학의 일말이라도 구경할 기회를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심리학이란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설명을 하려는 형식을 지니고 있다. 또한 심리학이란 윤리이면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한 철학이다. 이는 곧 심리학이 인문과학인 동시에 사회과학이라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객(客)이 아닌 주(主)라는 점을 언제나 주제로 삼는다면 그 사람들의 복수(複數)인 사회 역시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일 것이다. 또한 사람과 사회는 하나의 부분인 동시에 또한 고유성을 지닌 각 개체의 틀이기도 하다. 그래서 심리학은 주관적이 될 수도, 객관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므로 그 결과의 유추는 항시 주관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일찍이 현상학의 거두(巨頭)인 훗설) E. Husserl(1859-1938)이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선험적(先驗的)인 주관을 통해 객체를, 세계를, 상대를 인식한다'고. 그 과정을 풀이하고 분석하는 분야가 심리학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생활에 있어 그 주(主)인 인간이 주관을 가지고 사고하는, 그래서 문제가 되는 실상의 문제가 바로 심리학의 본질인 듯 싶다.그래서 추측은 가능하지만 정답이 100%일수 없는 학문, 그것이 인문과학의 특징이자 동시에 사회과학인 심리학의 특징이라면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비약도 유추도 할 수 있는 인간적인 학문, 그것은 단지 심리학의 이론에만 국한되어서도 아니될 것이며, 소위 심리학이라 일컬어지는 정신분석, 성격검사만이 전부가 아닌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싶다.인간 한 사람의 주관적 경험, 성격을 분석하고 객관화된 틀 안에서 해석하는 심리학도 결국은 추상적인 학(學)의 틀을 가지지만, 그래도 심리학을 일반 순수 심리학자이거나 상식 심리학자 개개인의 틀을 뛰어넘어 개개인의 본성에 부합된다면 그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Ⅱ. 本文우선 심리학은 개인을 대상으로 그 전개를 펼쳐 사회의 각 분야에 이르기까지 해석을 달리 혹은 동일하게 할 수 있다. 본서는 개인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사회의 각 현상을 단편적으로 에쎄이로서 풀어나가고 혹은 흥미있게 작자의 생각을 유도해 나가고 있다. 개인의, 이는 우리 자신과 본인까지도 그 영역에 둔다는, 즉 개인심리의 각 일화를 또는 주제를 쉽게 접할 수 있는 메스컴과 사회일화에서 찾아 심리학적인 측면으로 관찰한다.첫째, 개인의 심리상태는 각각의 경우 상이하기도 하겠지만 일반적인 생활 방식이 같고 같은 환경, 교육 상태를 가진 경우 하나의 전제와 관찰을 유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요즈음 우리의 주변에 관찰되는 늦깎이 배낭족의 경우는 뒤늦은 자아발견으로 자아실현이라는 한 주제에 부합될지는 모르나, 사회통념상 기반성립의-이는 경제와 사회적 지위를 말한다, 위치에 있을 때, 파랑새 증후군을 보이는 경우에 우리는 개인의 심리와 더불어 사회의 개념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지존파의 경우, 일반적인 사회통념상 지존파 개개인의 심리파괴를 유추할 것이다. 개인의 분석은 사회의 배경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일면 사회에 따른 이상과 정상의 차이이다. 이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바도 없지 않으나, 일찍이 칸트) I. Kant(1724-1804) : 순수이성비판, 범주적 명령가 주장하였던 '순수이성', 즉 보편화된 기준에 비추어진 바도 없진 않다. 지존파의 무차별 살해기도는 사회통념상에 비추어 보나 인간본연의 개념성립으로 보나 심리 또는 인간자체의 파괴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개인의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심리학의 주된 목적이고, 그 과정설명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보다 나은 형식의 질(質)로 영위하자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사람을 보자. 그는 세금을 잘 내고 노동자의 임금을 정당히 지불해야 한다는 이론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임금착취와 세금포탈로 부를 쌓고 있다. 이는 공격적인 충동을 유발하고 더불어 인간 본연의 이성을 망각하게 하는데 충분하다. 이 딜레마를 풀이하여 과학적인 전개로 심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심리학이고, 사회의 일원들이 형성한 이 조류를 밝히는 것이 사회심리학이라 하고자 한다.둘째, 그러면 사회조류를 형성하는 각 개인들이 벌이는 일들에 관해 분석함은 심리학의 주류인가? 라는 질문이다. 각 개인들이 형성한 사고의 귀인(歸仁)은 사회이고 그 결과도 사회라는 틀이고 장(場)이다. 지존파들이 한 행위는 비록 그들 자신이 결정한 행위이고 그 심리상태이기는 하나 그들이 그 결과를 우선 사회에 베품? 으로서 사회의 다른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과정에서 사회전체의 심리상태가 동요하게 된다. 또 그 원인을 일으키는 심리를 만든 요소도 역시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제공하였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또 각 사회의 결합과 갈등도 이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독도관계만 해도 그렇다. 각 개인이 포함된 사회의 생활영역이 침범되는 과정에서 심리적 장(場)) psychological field-心理的 場이 또한 피해받기 때문이다. 각 개인의 심리적 장이 침범받기 때문이다. 또한 그 귀인을 내부로 돌리기보다 외부의 이질적인 사회로 돌릴경우-이는 가끔씩 고의로 조장되기도 한다, 이는 이기적 편향) self-serving bias을 양산한다. 이른바 성공에 대한 경험을 내면화시켜 자존심을 높이고, 실패에 대한 경험을 외부로 돌려 자존심을 혹은 사회의 고취심을 위한 자기방어적인 몸부림이다. 이러한 이기심은 한 현상을 표면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한 자동차 광고에서 한 스님이 말하는 바가 시사함이 크다. '모든 것은 안의 문제다...', 모든 것은 이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경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것이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그래서 모든 사람과 구성원들은 조직을 형성하고 자기성취를 꿈꾼다. 그리고 우월추구를 하며, 가끔은 지나쳐 착각 속에 빠져 공포를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 개인의 노력으로 조금이라도 바꿔질 수 있다면 그 또한 어찌 지혜로운 심리유도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 개인의 심리가 정상이든 이상이든 그것을 가늠하는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또 한 사람의 유일한 인격으로서 우리는 그 과정에 매달려 일각(一角)의 전체를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심리학에서 말하는 개인과 사회를 포함하는, 그러나 다른 분야는 사랑과 성이다. 프로이트) G. Frued는 우리 인간의 이성을 관장하는 하나의 또 다른 나의 실제가 무의식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무의식의 대부분은 성(性)과 직결된다고 보았다. 그 이론이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성이 평소에 우리에게 작용하는 바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하여 사랑과 성이 동일시 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성에 따른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격발달에 따르면 우리는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복기, 성기기의 과정을 거쳐 성격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유아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통해 쾌를 경험하고, 그 후 배설의 쾌와 절제를 통해, 남근을 만지작거리고 혹은 여아들은 남근을 선망하며 유아의 과정을 거치고 그 과정에서 얻은 감정과 얻은 쾌를 통해 성격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을 정상적으로 겪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성격이상이 다르다 본다. 일반적인, 보편적인 상황을 경험하지 않고선 보편적인 사회에, 또 성생활에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니까.하지만 사랑은 성이라는 생물성격보다는 더욱 고도화된 어떤 면에서는 단순화된 인간의 행위이다. 자신의 다른 하나를 만들어 가는, 어떤 면에서는 사랑하는 상대방의 이상을 통해 자신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라 본인은 주관적인 견해를 가진다. 우리가 필경 '사랑=성'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랑 성'이란 견해를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사회 대부분 구성원의 생각이라면 더욱 명확해 진다. 또 그것은 개인심리 주관의 성격일 수도 있다. 여하튼 이성(異性)이 만나 서로의 견해와 기억을 공유한다면 그것처럼 어렵고 복잡한 일이 있겠는가 말이다. 이성의 결합에는 성이란 도구가, 도는 성결합이란 도구가 쓰이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말했던 '성기기'의 의미와 부합되진 않더라도 그 부분의 어느 정도는 견해를 같이 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는 의문점이 있다. 인간이란 심리 작용의 소산이라고 본다면, 그 육체 또한 인간의 부분일까라는 점이다. 그러면 성이란 인간의 일부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사랑이 인간의 고등심리작용이라 하면 그 사랑은 인간의 욕구 중 어느 단계에서 실현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다.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인지되지 않은 불평형 상태를 사랑의 기억이라 본다면 이루어진 사랑은 불완성 상태인 성을 양산시키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사랑의 전부가 성은 아니라 생각한다. 또한 성은 단지 성 자체만으로 우리 사회의 어떤 현상과 조류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랑과 성은 '사랑 성'이 아닌 서로 다른 부분집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의 유도는 이론이 아닌 경험으로, 때론 추상적으로 유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정상적인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알고 성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가금씩 빗나간 사랑과 성의 사건이 사회 곳곳에서 보도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회조류를, 또 사회구성원 대부분의 심리과정에서 거부됨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인간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있어 인격의 일부로 혹은 전제로, 배경으로 인간의 심리유도에 섬세한 불완전을 통해 자이가르닉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