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론중국의 역사는 대부분을 차지하는 통일기와 군소집단으로 갈라져 패권을 다투던 분열기로 나누어진다. 분열기에도 여러 시기가 있지만 중국의 역사상 희유(稀有)의 획기적 전환기이자 격심한 변동기는 분명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였다. 춘추전국시대는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문무(文武)의 인재(人才)들이 쏟아져 나와 수많은 고사(古事)를 남기며 천하를 다투던 시기로 엄밀하게 구분하면 춘추(春秋)시대와 전국(戰國)시대로 나뉜다. 춘추시대에는 주(周)왕실이 힘을 잃어 이를 대신해서 패권을 차지해 천하를 호령하던 다섯 패자가 있었는데 이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하고 전국시대에 서로 패권을 다투던 7개의 국가를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한다. 여기서는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의 업적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Ⅱ.본론⑴춘추오패(春秋五覇)춘추오패란 춘추시대에 다섯 명의 패자(覇者))를 일컫는 말로 혹자는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晉文公), 초장왕(楚莊王), 송양공(宋襄公), 진목공(秦穆公)을 꼽고 혹자는 송양공과 진목공대신 오왕(吳王) 합려(闔廬),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들기도 한다.그러나 송양공은 세력을 얻자마자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이야기로 유명한 홍수(泓水)전투에서 초(楚)나라에 대패하여 금세 세력을 잃어 버렸고 진목공의 경우도 서쪽에 치우쳐 있으면서 춘추시대가 끝날 때까지 동진(東進)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중원지역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오왕 합려와 월왕 구천을 넣는 것이 대체로 무리가 없는 것 같다. 여기서는 춘추오패의 업적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1. 제환공(齊桓公)의 패업(?業)제(齊)는 서주(西周)왕조의 창업공신 가운데 한 사람인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산동성 임치(臨淄)에 봉해졌던 제후국이다. 14대 양공(襄公)이 죽자 후위계승(後位繼承)을 둘러싼 분쟁으로 한때 혼란에 휩싸였지만 환공이 후위를 잇고 자신과 후위를 다투던 공자규(公子糾)의 신하였던 관중(官仲))을 재상으로 삼아 국정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체적이 내용은 우선 국도)로 남양(南陽)을 하사 받아 중원으로 통하는 요충지를 확보하였고, 북진하려던 초(楚)나라에 대항하여 제(齊),진(秦),송(宋)과 함께 성복(城?)에서 크게 싸워 이겼다. 돌아오는 길에 천토(踐土)에서 동맹제후와 회맹을 개최하였다. 이 회맹에서는 주양왕이 배석하였기 때문에 초(楚)의 포로 1천명, 말 400필, 전차등을 천자에게 헌납(獻納)하였다. 양왕은 문공에게 대로(大路)의 의복(衣服)[금색의 의복], 붉은색의 궁시(弓矢), 호분(虎賁) 300명을 주어 패자[여기서는 후백(侯伯)이란 칭호를 내렸음]으로 인정하고 사방을 다스려 잘못을 바로잡도록 명령하였다. 문공은 제후와 함께 왕실을 도우며 서로 싸우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진(晉)은 원래 2군(軍)이었으나 성복전투 승리이후 3군(軍)을 운영하였고 후에 다시 3행(行)이라는 보병군단(步兵軍團)을 두어 사실상 6군을 운영하였다. 진문공은 오랜 유랑생활로 왕위에 8년밖에 있지 못했지만 그의 패업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하지만 후에 공신 가문들의 권력투쟁으로 전국(戰國)시대에는 한(韓)?위(魏)?조(趙)로 갈라지게 된다.3.초장왕(楚莊王)의 패업초나라는 한수 이남에 위치하여 남방의 이민족으로 일컬어져 왔다. 서주 초기 선조 웅역이 주성왕으로부터 자작위를 봉받았으나 초국은 여전히 주공실에 불복하였다. 봉건의 법도 지키지 않았다. 춘추초기 주왕실이 쇠약해지자 초 웅통은 스스로 칭왕하여 초무왕이 되었는데 이 때가 기원전 740년이었다. 춘추초기 초나라가 강성해 세력을 떨치자 초나라는 중원의 큰 골칫거리였고 존왕양이를 내세워 초국을 견제하는 것이 중원의 주요목표였다. 초장왕은 성(性)은 웅(熊)이고 이름은 여(旅 혹은 侶)이다. 재위기간은 기원전 614~591년으로 24년이고 「삼년불비우불명(三年不飛又不鳴)」「정(鼎)의 경중(輕重)을 묻다」의 고사로 유명하다. 중원에 패자가 비어있는 동안 남방의 초가 국력을 키워 중원을 넘보게 되었다. 장왕은 즉위 후 「누구든 간언하는 자는 처형하겠다」라 공표한 후 삼년간 정사를 보지손무(孫武)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군비를 정비시켰다. 그 결과 오(吳)는 점점 부강해 졌고 마침내 B. C 508년에는 초(楚)를 여장(予章)에서 격파하고 다시 소읍(巢邑)에서 패퇴시켰다. 결국 오나라는 초의 수도 영(?)을 함락하고 오자서는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살해한 초평왕(楚平王)의 무덤을 파해쳐 그 시신을 300번이나 채찍으로 쳐 원한을 풀었다. 진(秦)의 도움으로 초(楚)는 나라를 찾았지만 합려가 계속 쳐들어와 수도를 북쪽의 약(?)으로 옮기게 된다. 하지만 합려는 월왕(越王) 구천(句踐) 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원수 갚음을 부탁하였다. 이에 부차는 와신(臥薪)하며 복수의 의지를 불태워 결국 구천을 사로잡아 원수를 갚는다. 월에서 바친 서시(西施)를 총애하게 되어 월(越)에대한 경계를 늦추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북방진출을 노려 노(魯)나라를 정벌하여 반속국(半屬國)으로 만들어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제(齊)를 애능(艾陵)에서 대파하여 화약을 맺는 등 세력을 확장한다. 이에 위기를 느낀 진정공(晉定公)은 회맹을 주제 하는데 여기서 부차는 맹주가 된다. 하지만 월(越)에대한 견제를 소홀하게 하고 충신 오자서등을 믿지 않아 후에 구천에게 패하게 된다.5.월왕(越王) 구천(句踐)의 패업월왕 구천은 오왕 합려를 죽이나 후에 합려의 아들 부차에게 패(敗)하여 사로잡히게 된다. 그 밑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간신히 월(越)에 돌아온 구천은 상담(嘗膽)하며 복수를 결심하고 명재상 범려(??))의 지혜를 빌려 마침내 오를 공격하여 부차를 자결하게 만들며 양자강 하류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구천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북진정책을 펼쳐 산동과 한남 동부의 제후들을 제압하였고 제(齊)?진(晉)등의 제후와 서주(徐州)에서 회맹하여 주원왕(周元王)으로부터 패자로 인정되었다. 월은 오(吳)에 대신하여 한때 중원의 여러 제후국을 제압하는 듯 보였지만 구천이 죽자 월의 최전성기도 막을 내리고 만다.⑵ 전국칠웅(戰國七雄)춘추시대 후반 진(晉)의 세력을 잡고있던 육경(六 경대부(卿大夫)에게 정사를 맡기던 방침을 철회하고 적극적인 국내게혁과 대외전쟁을 펼쳤다. 추기(鄒忌)를 재상에 임용하여 법률준수와 간신축출등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또한 제(齊)의 근거지였던 임치(臨淄)는 대단히 번성하였는데 도성의 직문(稷門)근처에 학사를 만들어 여러 제후국의 학자를 높은 봉록으로 초빙하여 자유로운 연구와 토론을 시켰다.) 또한 B. C 314년 내란이 일어난 연(燕)을 치는데 초(楚)와 조(趙)가 본토를 침공해와 하북을 완전하게 제압하지는 못한다 선왕(宣王)사후에 국가가 쇠퇴하게 된다3.연소왕(燕昭王)연(燕)이 제(齊)의 공격을 받고 소왕(昭王)은 여러 제후국에 원조를 호소하였다. 이에 연(燕)의 장군 악의(樂毅))가 총지휘를 맡은 한(韓)?위(魏)?조(趙)?초(楚)?진(秦)의 연합군이 제(齊)를 공격하여 수도인 임치를 함락하고 제는 몇 개의 성만 유지하는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소왕이 죽은 뒤 혜왕(惠王)은 악의를 믿지 않아 그의 군권을 빼앗게 되고 악의가 실각한 뒤에 제(齊)의 반격으로 연합군은 패하게 된다. 따라서 연(燕)도 국가가 쇠퇴하게 되었다.4.초회왕(楚懷王)초나라 회왕은 한마디로 탐욕스럽고 멍청한 군주이다.장의의 계책으로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려 하자 제는 초와 합종을 맺었다. 이에 장의가 초의 정황을 살피기 위해 초나라로 가자 초회왕은 그를 융숭히 대접하고 제(齊)와 합종을 깰 경우 진 영토 600리와 진(秦)공주를 시집보내겠다는 말에 넘어가 제와 맹약을 깼다. 후에 장의가 6리를 주겠다고 초회왕을 우롱하자 초회왕은 분개하여 측근을 진언을 무시하고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땅까지 빼앗겼다. 진혜왕은 초에게서 빼앗은 땅을 초의 다른 영토와 교환하자고 하자 초회왕은 장의만 보내주면 땅을 그냥 바치겠다고 하였다. 이에 장의가 초나라 신하와 미리 내통한 후 초나라로 가 초회왕의 총희 정수(鄭袖)의 질투심을 이용하여 초왕을 설득함으로서 초왕은 장의를 살려 주었을 뿐 아니라 정성을 다해 예우해 주었다. 후에 초회왕은 타국에일어나 패권을 다투었으나 그 양상은 달랐다 춘추시대에는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이른바 존왕양이(存王攘夷)에 의해 주(周)왕실을 존중하는 등 낭만적인 경향이 두드러졌던 시대였던 반면 전국시대는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던 주(周)왕실에 대한 충성과 의무는 사라진 채 부국강병을 통해 국력을 길러 다른 나라를 병탄(倂呑)하여 패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이른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참고문헌중국사연구실, 『중국역사』(상권), 도서출판 신서원, 1994박인수, 『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출판사 석필, 2001진순신(陳舜臣), 『패자(覇者)』, 솔출판사, 2002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강좌중국사 Ⅰ』, 지식산업사, 1989서연달 외,『중국통사』, 도서출판 청년사, 1989전악성著 신승하譯, 『중국통사』(상), 우종사, 1981목차Ⅰ. 서론Ⅱ. 본론⑴ 춘추오패(春秋五覇)1.제환공(齊桓公)의 패업(?業)2.진문공(晉文公)의 패업3.초장왕(楚莊王)의 패업4.오왕(吳王) 합려(闔廬)의 패업5.월왕(越王) 구천(句踐)의 패업⑵ 전국칠웅(戰國七雄)1.위문후(魏文侯)2.제위왕(齊威王)3.연소왕(燕昭王)4.초회왕(楚懷王)5.한소후(韓昭侯)6.조무령왕(趙武靈王)7.진시황(秦始皇)Ⅲ. 결론) 춘추시대(春秋時代)에 통치 능력을 상실한 주왕실(周王室)로부터 실력을 위임받아 제후(諸侯)를 통솔하고 천하(당시에는 세계)를 평화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제후(諸侯)이다. 필수요건은 뛰어난 정치력과 군사력이다. 그러나 중국적 세계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람들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난 신뢰를 얻을 정도의 인격(人格), 즉 덕(德)을 갖춘 인물만이 패자가 될 수 있었다.)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재상(宰相). 본명은 관이오 자는 중(仲) 가난했던 소년시절부터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던 포숙아(鮑叔牙)와의 깊은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여 유명하다. 환공(桓公)이 즉위할 무렵 환공의 이복동생인 규(糾)의 편에 섰다가 패전하여 노(魯)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포숙아의 세웠다
Ⅰ. 서론삼국지연의에서 여포(呂布)가 원술(袁術)과의 동맹을 위해 딸을 시집보내려하는 대목에서 여포의 모사(謀士)인 진궁(陳宮)이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 예로부터 혼인은 정해서 혼례를 올릴 때까지는 각기 정한 시기가 있습니다. 천자(天子)는 1년이요, 제후(諸侯)는 반년이며 대부(大夫)는 석 달이요, 서민(庶民)은 한 달입니다. 이말은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유교적 논리가 엿보이는 말이다. 그렇지만 실상은 유교적 논리만 적용된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여포도 자신의 양부의 첩을 빼앗기 위해 양부를 죽였고, 중국사회가 일부일처를 칼같이 지킨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비슷하게 종교적 논리로 사회가 지배당했고 인간 관계가 수직적 이었던 중세의 유럽 또한 그러했을까? 여기서는 서양중세의 성의식과 결혼에 대한 종교, 세습권력의 차이를 알아보고 어떤식으로 차이를 극복하였는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서양의 중세는 성과 결혼에 대한 윤리적?제도적 기본틀이 교회의 이념과 세속윤리가 충돌?타협하는 가운데 형성되었고, 그것은 그후 부분적 수정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19세기말까지, 부분적으로는 20세기 중반까지 근대사회의 결혼과 성문화의 윤리적 토대가 되었다. 이 점에서 중세의 결혼과 성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당시뿐만 아니라 후대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시기의 결혼과 성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성과 결혼에 관한 교회이데올로기와 이에 맞선 세속현실 사이의, 사제적인것과 비공시적인것들 사이의 길항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기독교는 본시 성에 관한 한 부정적 태도를 지닌 종교인데다, 특히 1100년경을 전후한 시기에는 교회개혁주의자들의 엄격한 성이데올로기와 세속사회의 느슨한 성문화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일어났기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이데올로기와 세속현실의 사호관계를 고려하지 않고는 이 시기의 결혼과 성문화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① 성과 결혼에 대한 교회의 이념과 윤리교회가 초기기독교 사회에서부터 성과 결혼에 대해 엄격주게끔 만들어졌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즉, 결혼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4.그렇다 하더라도 결혼이 불평등을 없애지는 못한다. 여자는 열등하고 약한 존재이다. 남자는 여자로 인해 죄를 짓고 낙원으로부터 쫒겨났으며, 그 때부터 두 사람은 불완전한 교합을 하게끔, 수치 없이는 사랑할 수 없게끔 되었다. 또한 추가적 징계로, 여자는 남자의 지배를 받으며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예수의 가르침도 이 최초의 텍스트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현실사회의 변화에 대응하여 점차 성규범을 정련하고, 체계화하였으며 이것의 실천장치를 제도화 했다. 초대교회와 로마제국 말기, 중세 초(5~10세기)까지만 해도, 로마교회는 그 자체의 권위와 보편성을 확보하지 못한 관계로 성과 결혼에 대해 1천년 이후에 비해 정교하고 통일된 성윤리와 이를 실천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못했다. 다만 로마제국 말기 성 제롬, 성 아우구스티누스등 교부철학자들이 성의 본성과 그에 대한 처방을 이론적 차원에서 논의하였고, 이것이 후대에 성윤리의 정교화와 제도화의 전거로 이용되었다. 11세기 초 기독교사회는 당시의 연대기작가들이 기록했듯이, 예수의 강생과 수난 이후 1천년이 세계의 종말을 맞지않은 가운데 지나가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부플었다. 그것은 언젠가 도래하게될 예수의 재림에 대비하여 지상사회에서 악을 일소하고 정화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10세기말과 11세기초에 경쟁적으로 등장한 수도원이데올로기, 평화운동, 이단운동, 3위계론 등과 같은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은 그 주체는 달랐지만 모두가 이러한 정화운동의 서로 다른 표현이었고, 교황측에서 주도한 교회개혁운동은 수도원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이러한 정화운동의 절정이었다. 또한 교회는 교회개혁과정에서 정교하면서도 포괄적인 성과 결혼의 윤리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교회법의 형태로 제도화했다. 1140년경에 그라티아누스(Gratianus)가 편찬한 『교령집』은 그동안 산만하게 논의 되었던것을 실천할 수 있는 일련의 법적?제도적 장치를 규정하여 주었다. 교회가 성과 결혼의 규범을 형성하는데 으뜸가는 전거로 이용한 것은 주로 성경의 창세기편과 복음서들이다. 이승에서의 성과 저승에서의 구원 사이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교회가 끊임없이 제기한 문제점 중의 하나였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답의 전거가 된다.남자는 여자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음행이 성행하고 있으니 남자는 각각 자기 아내를 가지고 여자는 각각 자기 남편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남편은 아내에세 남편으로서 할 일을 다하고 아내도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아내로서 할 일을 다하십시오. 아내는 자기 몸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고 오직 남편에게 맡겨야 하며, 남편 또한 자기 몸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내에게 맡겨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서로 합의하에 잠시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은 무방합니다. 그러나 자제하는 힘이 없어서 사탄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니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말은 명령이 아니라 충고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나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하느님께 받은 은총의 선물이 각각 다르므로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삽니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과부들에게는 나처럼 그대로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고린도전서 7:2~10)바울은 한편으로는 동정을 지키는 것이 더 낫다 하여 성을 낮게 평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더 낫다 하여 성을 관용한다. 그리하여 그는 선/악의 2원적 모델 대신에 동정/결혼/음행의 3원적 등급을 제시하여 합법적인 성의 영역을 부부간의 성에 한정시킨다. 그러나 그의 3원적 모델에서 결혼이 구원과 양립 가능한지 악과 양립 가능한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이러한 불확실성이 을 빚었던 것은 바로 교회가 평신도들에게 혼인을 허용하면서도 이러한 동정모델에 바탕을둔 엄격한 원칙을 이들에게도 적용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평신도에게 허용된 결혼은 죄악과 타락의 원인으로서의 성의 합법적인 유일한 배출구 였지만 , 이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한 극단에는 부부간의 성관계를 악(악)의 선용으로 긍정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그라티아누스에서부터, 다른 극단에는 그것을 악으로 규정한 피에르 다미앵(Pirrer Damien)이며 후구치오(Huguccio)등과 같은 엄격주의자들과 이단운동에 이르기까지 그중간에 다양한 견해들이 경합했다.이러한 다양한 견해들은 결혼의 성사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결혼성립이론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결혼 당사자의 `동의`를 중시하는 `동의론`과 신랑신부의 `신방치레`를 중시하는 `성교론`으로 대변될 수 있다. 9세기 랭스의 대주교 엘크마르는 처음으로 로마적 전통과 중세초 게르만적인 세속사회의 관행을 수용하여 부모의 동의와 신방치레 특히 후자를 결혼성립의 필수요소로 인정하였고 12세기 중엽 그라티아누스는 결혼당사자의 동의와 신방치레, 특히 후자를 결혼성립의 필수조건으로 제시하였다. 반면에 피에르 롱바르는 약혼식과 결혼식에서 당사자의 동의를 결혼성립의 핵심요소로 요구했다그후 교황 알렉산더 3세와 인노켄티우스 3세는 기본적으로 엄격주의적 입장에서 `동의론`을 결혼성립의 핵심적 요소로, 여기에다 결혼의 안정성을 부여하기 위해 `성교론`을 부차적 요소로 공인했으며 이것이 차후 교회의 공식적 입장이 되었다. 이로부터 결혼의 성사화화 부부간의 엄격한 성윤리의 토대가 도출되면서, 다른한편 으로는 세속의 성풍속과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내포하게 되었다.결혼의 성사화는 기본적으로 동의론에 입각하여 성립된다 혼배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신랑)와 교회(신부)의 영적 결합에서 신랑의 생동적 힘에 의해 신부를 빛(신)을 향해 들어올리는 행위에 비유한 것으로서, 사제가 개입하여 남녀간의 육체적 결합을 영적인 신적 질서 속에 위치시키고, 신의집』이후 종교법은 이러한 윤리를 법전화하면서, 그것은 단순히 윤리적?신화적 이론차원의 도덕규범을 넘어 `실정법적`성격을 띠게 되었다. 특히 1215년 제 4차 라테란공의회이후 모든 신자의 연례 고해성사의 의무화, 속어 대중설교의 보편화, 사법절차의 합리화는 교회의 성규범을 평신도들의 일상생활에 침투케 하고 그 위반자를 규제아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하였다②귀족사회의 가족구조와 결혼세속 귀족사회의 성과 결혼문화는 가문의 영광과 이것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되는 가산의 보호를 위한 가문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후자는 가족구조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1세기초는 귀족사회의 부계와 모계의 혈통과 재산을 인정하는 수평적 양계제였다. 이것은 기원후 100년경 타키투스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기술했듯이 고전기 로마시대와는 반대로 신랑이 신부에게 결혼지참금을 지불하는 원시 게르만사회전통의 잔재로 추측되는바, `신부재산`은 신랑이 신부와 분담하거나 전부 부담했으며 결혼후에도 아내가 자기 몫에 대한 전권을 행사했다. 또한 중세초의 사회는 아들은 물론이려니와 딸도 상속에서 배제하지 않는 분할상속제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였고, 이것이 부분적으로는 카롤링제국을 와해시키고 성주가 한 지역의 실제적 지배권을 장악하는 성주령시대를 개막케 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그러나 왕조 개창 초기부터 강력한 주변 제후세력들에 포위되어 언제라도 생존을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었던 카페 왕실은 애초부터 선왕의 생존시에 `세자`를 지명하고 그에게 통치의 견습을 하게 하는등 장자상속제를 택했으며, 11세기 중반부터는 일반 귀족사회에서도 수직적인 남계 중심의 가족제도를 채택하였다. 이와 동시에 가장에게 가문의 인적?물적 지배권이 집중되고, 아내는 물론 장자 이외의 아들도 가문의 영광과 가산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가문전략의 희생물이 되었다.물론 이러한 새로운 가족제도가 형성되는 데는 다른 여러 요인들도 작용했다. 카롤링제국이 붕괴하고 난 다음 전쟁과 약탈이 유례없을 정도로 폭발한 1000년경에는 성의 건립이 증가하고,
Ⅰ.서론공식적으로 13억의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 세계의 모든 국가를 통틀어 중국보다 영토의 면적이 큰나라는 있지만 이만한 인구를 가진 나라는 없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이렇게 인구가 많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인구의 증가에는 자연재해(自然災害), 기아(飢餓), 전쟁(戰爭)등 많은 저해요소가 있고 중국 또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인구는 증가하게 되어 지금의 인구에 이르게 된다. 특히 중국의 명(明)?청(淸)시대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여기에서는 이시기에 중국의 인구증가의 원인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 그리고 폐해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1.인구변동의 추이역사시대 중국의 공식적인 인구통계가 등장한 것은 서한(西漢) 원시(元始) 2년)으로 당시 인구가 약 5900만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비슷한 인구 수치가 정부의 공식 기록에 의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원대(元代) 지원(至元) 18년)인데, 당시의 인구도 약 5900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공식적 인구 변화를 따지자면 중국은 한대(漢代)부터 원대(元代)까지 전체인구가 늘지 않았고 명대(明代)의 기록을 보더라도 6000만 명 수준을 유지한 것으로 보아 공식적 기록은 별로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인구가 처음 1억을 넘어선 것은 북송(北宋) 말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몽고의 정복과 지배 아래에서 다시 줄어들었다.위의 표를 보면 명초에연도인구(단위:백만명)경작면적(백만무(畝))1인당 경작지(무(畝))12*************08140065~80370(±70)5.11600160500(±100)3.*************75(±25)950(±100)3.51850430(±25)1210(±50)2.819345031470(±50)2.91953583(±15)1678(±25)2.9(1400년) 6500만 명에서 8000만 명 정도였던 인구가 1850년에는 4억 3000만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450년 동안 약 여섯배나 늘어난 수치였다. 통해 역병에 의한 사망자수가 약간 줄었을 것이 틀림없다. 또, 아메리카 대륙을 원산지로 하는 작물(옥수수, 감자, 땅콩)의 도입으로 식량 공급량이 늘어나면서 좀더 많은 성인이 다음 세대까지 생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구 증가를 설명하려는 이런 시도은 요점에서 벗어난 것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15세기부터 19세기 중반에 걸쳐 유럽의 인구도 중국의 인구 변동과 거의 같은 속도로 오르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17세기의 인구 감소도 양쪽 모두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이런 사실에 당혹해 하면서 동시성이 문제 라고 했다. 덧붙이자면 러시아의 인구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18세기 동안 두 배나 증가했다. 이처럼 지구상의 몇몇 지역에서 인구가 동시에 증가하고 있는 것은 인구 급등의 원인이 한 나라에서만 적용될 수 있는 특유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브로델은 한 가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했는데, 인구가 급등한 원인으로 기상을 들 수 있다고 했다. 지구의 기상이 장기간 변동하고 있다는 것은 기후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컨대 적세(洪績世)의 빙하기가 끝난 것은 겨우 1만 년 정도밖에 안된다. 14세기 동안 북반구는 다시 냉각되어 혹한의 겨울이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됐고, 대서양의 빙산이 증가하여 바이킹은 북아메리카로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1450년경 이후의 기상 변동이 인간에게 특별히 친화적이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를 브로델은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변화의 폭이 아주 적을지라도 장기적인 기상 변동이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그의 가설은 틀림없이 옳았다. 일리노이 대학의 파커(Geoffrey N. Parker)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여름 동안 평균기온이 섭씨 1도 내려가면 식물의 성장기간은 3주 내지 4주간 감소하고, 곡물이 성숙할 수 있는 고도의 한계는 약 150미터 내려가게 된다. 오 늘날에도 수확기의 성숙기간이 하루 감소할 농법을 더 집약적으로 적용하고 그중 가장 우수한 기술을 전국에 보급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관계방법이 더 널리 이용돼 관개된 경지면적은 1400년 1억 3000만 무(畝, 1무는 6아르 정도))에서 1900년에는 3억 5000만무(畝)로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비료의 투입도 증산을 위한 전통적인 방법 중하나였다. 비료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된 이유는 비료의 유익한 효과를 농민이 더 잘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구가 증가하고 돼지등의 가축이 증가하여 인분이나 하비(下肥)가 더 많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량품종의 확산도 수확량을 늘리는데 일조했다. 오늘날 품종의 개량, 즉 가뭄이나 병에 강하고 여러 가지 토양이나 기후조건에 잘 자라며 단기간에 성숙하는 품종의 개량은 연구실에서 관리하는 시험, 교배, 변종의 선택 등을 통해 과학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전통사회에서는 자연이 변종을 만들어냈으며, 농민이 경작지에서 직감적으로 새로운 변종을 찾아내어 시험해보고, 만약 성공하였다면 다른 사람에게 심도록 권했다. 새로운 품종은 미개간 지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일년에 두 번 수확하는 조생종)의 발견은 큰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작물들도 국내의 식량 공급량을 증가시키는데 일조했다. 신대륙에서 들어온 작물은 옥수수, 고구마, 담배와 17세기에 들여온 감자였다. 이러한 작물들은 재래작물을 심을 수 없는 땅에도 심을수 있어 경작면적과 식량의 공급을 늘려주었다.3. 이주: 팽창하는 제국1400년 이후 4세기동안 중국에서 증가되 식량 공급량 중에서 반 정도는 전통적인 농업기술을 집약적으로 활용하고 외래 작물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나머지 반은 새로이 경지를 개간한 데 따른 것이다. 1400년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사이에 중국의 경지면적은 거의 네 배정도 늘어났다(앞의 표 참조). 이미 인구밀도가 높아진 지역에서는 구릉위로 올라가거나 습지의 물을 빼거나 간척지를 만들어서 경지를 늘렸다. 그러나에 절정에 달했다. 이주민은 처음에 세 방향으로 흘러 들어갔다. 가장 큰 이동은 서쪽으로의 이동으로 강서, 호북, 호남, 사천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더 나아가 운남, 귀주, 광서 등 남서쪽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는 북서로 향하여 한수(漢水)를 따라 호북의 북부에서 섬서(陝西)의 남부를 거쳐 감숙(甘肅)으로 들어갔다. 앞의 두 가지 이동보다 작은 규모는 동으로 향하여 광동과 특히 복건(福建)에서 대만으로 건너갔다. 19세기 후반에 이주 흐름의 방향이 바뀌었다. 개발도상에 있던 서부와 북서부는 1800년경부터 인구가 너무 증가하여 압력을 받았다. 그 대신 농민등은 좀더 나은 경제적 환경을 찾아 만주(滿洲)나 해외로 향하거나 또는 동부로 되돌아갔다. 양자강 하류지역(안휘(安徽), 강소(江蘇)남부, 절강(浙江)과 강서의 북부 등)은 태평천국의 난(1851~1864) 및 염군(捻軍)의 반란(1853~1868))으로 엄청난 파괴를 당했다. 그 결과 일부 지역은 실제로 인구가 감소했으며 한때 비옥했던 토지는 황폐해지고 잡초로 뒤덮였다. 토지를 갈망하는 농민에게 이 지역은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이주민이 하남, 호남, 강소 북부 등 이전의 개발도상지역에서 동부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렇게 동부의 인구가 증가하자 잉여인구는 만주쪽으로의 진출을 모색한다. 청조의 고국인 만주는 처음에 한족이민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1860년부터 1907년까지 청조는 이주에 대한 금령을 서서히 완화했다. 청조가 정책을 바꾼 이유는 갈수록 만주지역을 노리고 있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 지역에 중국인을 많이 이주시킴으로써 영토에 대한 중국의 우선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1902년 만주를 관통하는 철도가 생김으로 이주를 촉진시켰고 만주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등의 해외이주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4. 인구증가에 따라 생긴 요인들의 악영향①수전?호전)의 개발인구압력에 직면한 중국 농민들은 집약적인 농법을 선택하였고, 이용 가능한 토지를 최대한 활용해 경작 면적을 넓히는 것으로 대응했다.천을 따라 소규모 경작지를 형성하는 것과 비교적 접근이 쉬운 산지를 개간해 이 지역에서 널리 경작되던 옥수수 등을 심는 것으로 나뉜다) 그리고 개발의 목적은 많은 이익을 노리기보다는 생계를 영위하기 위한 이른바 생계형 개발이 대부분 이었다. 산기슭 수전개발은 매우 단순한 형태가 많았으며, 특히 산간의 시냇물을 이용해 수리 시설을 만들었기 때문에 자연조건의 제약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산간 지역의 단순한 수리시설도 환경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즉 산지가 개발되어 평지로 변하고 하천이 경작지로 개발되자 일부 산악 지역에서는 비가 오면 산간의 계곡은 물론 성안에까지 물이 들어오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한편 옥수수의 경작은 대부분 화전을 이용했다. 화전은 특별한 기술이나 자본이 없어도 되었으므로 대다수 산간 이주민들이 이 경작법을 널리 선택했다. 특히 따로 비료를 주지 않아도 즉시 경작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비옥한 토지로 변하는 장점이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개간된 산지가 비가 오거나 4~5년이 지난 다음에는 지력이 약해져 더 이상 경작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었으며, 새로운 지역에서 같은 방법으로 경작을 했다. 이처럼 일정 기간을 두고 산간 지역 곳곳에서 산발적인 개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정기간이 지나면 산지 전체가 황폐해지는 일이 잦았다. 산악지역의 개발로 당시 가장 빈번하게 지적된 문제점은 이 지역의 산림 자원이 크게 감소했다는 것이다.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다량의 벌목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였다. 벌목은 명대 황궁 축조등의 국가의 수요와 산악의 개발로 인하여 나무나 숯을 이용하던 연료 이용이 석탄의 개발로 이어지게 된다. 아울러 주요 임산물 역시 급속하게 감소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목이로 목이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약 4년 동안 목이의 균을 배양해야 하고 균을 배양하려면 나무를 잘라 마디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산악이 개발되면서 나무가 사라지게 되자 목이균을 배양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나무의 감소.
Ⅰ.서론연암 박지원에 대하여 알아보면 본관 반남(潘南),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李德懋)?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한 것을 보면 그저 고리타분한 선비정도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미숙씨가 쓴 책을 읽고나니 이러한 통념적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여기서는 열하일기를 통하여 연암 박지원이란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Ⅱ.본론저자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지은 것을 여행견문록이라고 보기보다는 유목민의 일기쯤으로 보고 있다. 이는 박지원이 청나라로 파견된 사신들과 같이 다니면서 단지 여러 가지를 보고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심리까지 묘사해 놓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열하일기를 통해서 박지원이란 사람을 알아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렇다면 열하일기가 어떤 것인지 먼저 알아보자. 1권 이다. 서문은 필자미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은 압록강에서 랴오양[遼陽]까지 15일간(1780.6.24~7.9)의 기록이다. 2권 인데,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까지 5일간의 기록이 담겨있다. 3권 인데, 광녕(新廣寧)에서 산하이관까지 9일간의 기록이다. 4권 :산하이관에서 연경까지 11일간의 기록으로, 여기 수록된 한문 고대소설 은 연암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작품의 하나이다. 5권 :연경에서 열하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열하에 대하여 소상히 기록하였고, 그곳을 떠날 때의 아쉬운 심경을 그렸다. 6권 :열하에 있는 태학(太學)에서 6일간 지낸 기록으로 당시 중국의 명망 있는 학자들과 더불어 나눈 한 ?중 두 나라 문물제도에 관한 논평 및 지동설(地動說) ?달세계 등에 관한 토론이다. 7권 :구베이커우[古北口] 밖의 기문이담(奇聞異談)을 적은 것으로, 반양(盤羊)에서 천불사(千佛寺)에 이르는 60여 종의 이야기이다. 8권 :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6일간의 기록으로, 대개 교량 ?도로 ?방호(防湖) ?방하(防河) ?탁타(駝:庭園師) ?선제(船制) 등에 관한 논평이다. 9권 :주로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으로 《연암집(燕巖集)》에서는 이를 라 한다. 10권 :이본(異本)에 따라서는 로 된 것도 있다. 島池) ?점포(店鋪) ?기물(器物) 등에 관한 기록이다. 12권 :순천부학(順天府學)으로부터 조선관(朝鮮館)에 이르기까지 역람한 기록이다. 13권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20개의 명소(名所)를 두루 구경한 기록이다. 14권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6일간 머물며, 그곳 학자들과 응수한 기록이다. 15권 :황교와 서학자(西學者)의 지옥(地獄)에 관한 논평이다. 끝에는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는 가운데 특히 몽골과 아라사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16권 :청나라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의 자세한 견문록이다. 여기서 특히 청나라의 친선정책(親鮮政策)의 연유를 밝혔다. 17권 :청 황제의 반선(班禪)에 대한 정책을 논하고, 또 황교(黃敎)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18권 19권 :찰습륜포란 티베트어(語)로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 이라는 뜻으로, 열하에 있을 때의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20권 :음악에 관하여 중국 학자들과 서로의 견해를 피력한 기록이다. 21권:당시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한 기록이다. 북학(北學)에 대한 예리한 이론을 펼쳤다. 22권 :중국 학자 윤가전(尹嘉銓)과 더불어 전날 태학(太學)에서 미진하였던 토론을 계속한 기록이다. 즉, 중에서 미흡하였던 이야기인 월세계 ?지전(地轉) ?역법(曆法) ?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술이다. 23권 :동란재(銅蘭齋)에 머물 때 쓴 수필이다. 주로 가사 ?향시(鄕試) ?서적 ?언해(諺解) ?양금(洋琴) 등에 대하여 쓴 것이다. 24권 :열하산장에서의 여러 가지 견문기이다. 특히 등은 가장 비장하고 기괴하게 묘사되었다. 25권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아래서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한 소감을 적은 이야기이다. 26권 :열하의 피서 산장에서 지낸 기록이다. 주로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이다. 이상의 26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열하일기의 빠져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스개 소리를 찾아다니는 것에 기인하고 있다. 이후 박지원은 과거를 포기하고 여러 친구들과 유람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이는 체제와 제도가 부과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윤리와 능동적인 관계를 구성함으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마음껏 발산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북벌론 에서 북학으로 사상사의 중심을 변환하여 고문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체적 실험을 감행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고 필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하여 박지원은 당대 천재였지만 보통의 차가운 느낌의 천재와는 다른 따뜻한 성품의 천재가 된다. 작가는 박지원을 동양의 돈키호테로 보는데 박지원이 말한 필에 시종 두명을 데리고 청나라 사신단과 함께 다니면서 잠행을 통해 이질적인 것들과 접촉하려는 열망이 비슷하다고 보았다. 거기서 나타나는 박지원의 농은 정말 어처구니없기까지 하다. 밥을 일찍 먹고 일찍 자야겠다며 나와 뜰을 서성이다 일행에게 엉뚱한 거짓말을 하여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린 후 하인에게 둘러댈 말을 정해놓고 잠행을 하는데 이에 대하여 작가는 코믹 첩보물의 한 장면 같다는 표현을 쓴다. 박지원은 잠행을 통해 갈 길이 바빠서 한눈팔 틈이 없는 사신단 몰래 여러 친구들을 만나거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해 나간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연경(북경)에 도착하니 황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에 가 있었다. 그 때문에 연경에서 험난한 열하로의 여정이 시작되는데 이때 열하로 가지 않았다면 열하일기가 이렇게 주목받지 못했을 거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박지원의 유머러스한 모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투전판에서 왕따를 당하고 거기에다가 아름다운 여인네라고 생각하고 슬쩍 접근했는데 나이 쉰이 넘어 보이는 노인네 이었다는 대목이다. 생각해보라 왕따당한것도 서러운데 꼬셔보려고 접근했던 여인이 노인네 이었다니, 그 와중에도 노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피는 박지원이라니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보고 작가는 호모 루덴스(Homo Rudens)라는 용어를 쓴다. 드러내 보인다. 불타는 질투심과 호기심, 우쭐거림, 머쓱함 등, 그 생동하는 파노라마는 이 열하일기에 강력한 색채를 부여한다. 이 유쾌한 유머들은 어떤 대상과도 접속할 수 있는 유목적 능력, 혹은 자신을 언제든 비울 수 있는 무심한 능동성 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비어 있음으로 해서 어떤 이질적인 것과도 접속할 수 있었고, 그 접속을 통해 홈패인 공간 을 매끄러운 공간 으로 변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매끄러운 공간에서는 중세적 엄숙주의와 매너리즘이 전복되면, 그 균열의 틈새로 전혀 예기치 못한 일들이 솟구친다. 그 순간, 18세기 조선을 지배했던 통념들은 무력하게 허물어진다. 무엇보다 박지원의 유머에는 언제나 패러독스가 수반된다. 주지하듯이 패러독스, 곧 역설은 통념의 두 측면인 양식과 상식에 대립한다. 봉상스, 그것은 한쪽으로만 나 있는 방향이며, 그에 만족하도록 하는 한, 질서의 요구를 표현한다. 그에 반해 역설은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는 두 방향 혹은 알아보기 힘들게 된 동일성의 무의미로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패러독스란 봉상스의 둑이 무너진 틈을 타고 범람하는 앎의 새로운 경지이다. 무의미의 사이 혹은 이미의 전도, 그것이 바로 패러독스다. 봉상스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에 의한 알음알이 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울음을 단지 슬픔에만 귀속하는 것이 울음의 잠재력을 위축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인간의 지식은 한없이 비루해진다. 이목에 좌우되어 대상의 본래 면목을 보지 못하는 사유의 한계, 그것을 격파하고자 하는 것이 연암의 진정한 의도이다. 보는 것의 위태로움. 그것은 결국 자신의 눈을 앎의 유일한 창으로 믿는데서 오는 것이다. 감각을 앎의 유린한 원천으로 삼을 때 삶은 얼마나 위태롭고 천박해질 것인가. 박지원은 요술대행진 을 기록한 「환희기」의 뒤에 붙인 후지(後識)에서 눈이란 그 밝은 것을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오늘 요술을 구경하는데도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해서 속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는 자가 제 다.
Ⅰ.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낙양가람기』는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중국 북위(北魏)의 수도 낙양을 무대로 양현지(楊衒之))가 쓴 책으로 가사협(賈思?)의 『제민요술(齊民要術)』, 역도원(?道元)의 『수경주(水經注)』와 함께 북위 시대 삼대 걸작으로 꼽히며 전 5권)으로 되어있다. 『낙양가람기』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북위 왕조가 평성[平城;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다퉁시(大同市)]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결정한 493년부터 도읍을 업[?; 지금의 하베이성(河北省) 린짱현(臨?縣)]으로 옮기게 되는 534년까지의 40여 년이다.① 편찬동기와 의의영희(永熙, 532~534)연간에 어려움이 많아서 수도를 업(?)으로 옮기자. 낙양에 있던 많은 승려들도 함께 옮겨갔다. 무정(武定) 5년 정묘년(丁卯年, 547)에 나는 공무로 낙양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중략)...이를 통해 맥수(麥秀)의 한탄)이 단지 은허(殷墟)에서 생겨난 것만은 아니며, 서리(黍離)의 슬픔)이 주(周)나라의 멸망에 대한 애절한 아픔을 노래한 것임을 알았다. 낙양 안팎으로는 천여 개의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텅 비어 종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는다.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 이 사실을 글로 남긴다.『낙양가람기』 서(序).양현지가 『낙양가람기』의 서(序)에서 밝히듯 그는 547년에 공무로 폐허가된 낙양을 둘러보고 북위의 수도 낙양의 이야기가 후세에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낙양의 사찰에 대한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다. 당시 북위는 황제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불교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사찰을 통해서 그 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인도 불교를 탈피하고 중국의 독자적인 불교가 확립되기 시작하는 북위 불교의 화려하고 역동적인 모습과 함께 역사적 자료가 많지 않은 5세기말에서 6세기초의 중국의 사회상을 살필 수 있다. 즉 북위 왕조의 권력 다툼과 한족(漢族)과 비한족계의 대립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에서부터부생의 악행은 제멋대로 쓰여졌으니, 사관(史官)들이란 모두 이런 부류이다.『낙양가람기』 권2 「건양리동(建陽里東)」이 이야기는 호사가(好事家)들이 은자(隱者) 조일(趙逸)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인데 양현지는 이렇게 조일이란 진(晋)나라의 은자를 등장시켜 지금까지 사관(史官)들의 역사 기록은 실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긴 자에 의한 왜곡된 역사만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승자의 논리로 취사선택(取捨選擇)된 역사 서술을 비판하면서 화려한 불사가 건립되었던 북위 왕조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일어났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적겠다는 엄정한 역사 의식을 표명하고 있다. 『낙양가람기』를 통해 북위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양현지는 정통 왕조로서의 북위를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남조의 제(齊)나라를 위제(僞齊)라고 표현한 반면 북위를 황위(皇魏)라고 하였다. 또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내용의 하나는 불사(佛事)에 관한 것이다. 본문에는 탑?불상?사원 등이 화려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묘사는 마치 화려했던 낙양을 찬미하는 듯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화려함 뒤에 감춰진 백성들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나라의 재앙(災殃)을 초래하는 지배 계급의 부패(腐敗)와 타락(墮落)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으로 분열되어 있던 장기간의 혼란시대를 거치면서 백성들은 궁핍해졌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으나 황실(皇室)과 왕공(王公)들은 이런 백성들을 구제하지 않고 오히려 불사 건립에 힘을 쏟았다. 거대한 불탑과 석불은 곧 백성들의 피와 땀이었던 것임을 양현지는 이렇게 표현한다.내가 죽었을 때 다섯 명의 비구니들과 함께 심문을 받고 있었다. 한 비구는 보명사(寶明寺)의 지성(智聖)으로 좌선과 고행을 했기 때문에 천당에 올라왔다...(중략)... 한 사람의 비구는 선림사(禪林寺)의 도홍(道弘)이었다. 스스로 나는 네사람을 시주하도록 교화하였으며 『일체경(一切經)』)을 찍어내고 인중금상(人中金象)) 열 구를 만들었습니다 라고 하였 심한 것이다.『낙양가람기』 권4 「선충사(宣忠寺)」에서 그의 생각의 단면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양현지는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가르침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다.양원신(楊元愼)은 사람됨이 맑고 고상하였다. 어릴 때부터 높은 뜻을 지녀 뜻한 바대로 자유로웠으며 시세에 구속되지 않아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사랑하며 수풀과 계곡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다. 모둔 문장에 박식하여 청담(淸談)은 신의 경지에 들었고 잠깐 동안의 응대에도 따를자가 없었다. 『노자』와 『장자』를 읽어 그 오묘한 이치에 대해서도 잘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벼슬살이를 원아히 않아서 중산대부(中散大夫)가 되었어도 언제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여 한가롭게 지내려고 하였다. ...(중략)... 이주조가 낙양에 들어오자 원신은 화음은사(華陰隱士) 왕등(王騰)과 더불어 상락산(上洛山)에서 주유(周遊)하였다.『낙양가람기』 권2 「경녕사(景寧寺)」휘황찬란했던 낙양이 폐허가 되어 버린 것을 보고 양현지가 느낀 것은 인생의 무상함이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사람들의 권세와 부가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버리는 것을 수없이 경험한 양현지에게는 오히려 시세에 구속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은자의 풍모를 부러워했던 것이다.③ 체제와 문체의 특성『낙양가람기』는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城)의 안쪽(內)부터 시작하여 성동(城東)?성남(城南)?성서(城西)?성북(城北)의 순으로 끝을 맺고 있다. 각 권에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절들이 소개되고 있다. 각 사찰은 대체적으로 절의 명친, 세운 사람, 위치, 주변의 건물과 풍경, 절에 대한 설명, 그 절과 관련된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 전해지는 이야기 등의 순서로 짜임세 있게 서술되어있다. 또한 『낙양가람기』는 그 문장이 매우 아름답다. 4자(字) 또는 6자(字)의 구절이 문장의 기조를 이루며, 간결한 언어로 된 댓구에 일정한 운율을 갖추고 있다. 당시 남?북조 새대는 변문(騈文)과 산문(散文))이 병행하는 시기였다. 이 책에도 사탑(寺塔)과 원림(園林)을 묘인의 손에 의한 독창적인 저술이다.② 책명(冊名)『사기(史記)』가운데에 ‘사기(史記)’라는 용어가 사용되나 이는 일반적인 고사(古事)를 지칭한 것이여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책의 원래 이름은 아니다. 양한대(兩漢代)에는 주로 『태사공기(太史公記)』 또는 『태사공서(太史公書)』로 칭하여졌으며,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태사공 백삼십편(太史公 百三十篇)』으로 소개되었다. 『사기(史記)』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한말 순열의 『한기(漢紀)』에서부터인데, 이는 『태사공기(太史公記)』의 약칭이라 할 것이다. 위진시대에 이러한 명칭이 유포되다가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 에 와서 『사기(史記)』라는 책이름이 널리 쓰여지게 되었다.③ 참고자료『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나 『사기(史記)』본문 중에 나타나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 진(秦)이전의 사료는 『육경(六經)』?『논어(論語)』?『맹자(孟子)』?『국어(國語)』?『좌전(左傳)』?『전국책(戰國策)』?『세본(世本)』?『첩기(諜記)』와 선진제서(先秦諸書)가 있고, 진한대(秦潢代)의 사료는 『진기(秦紀)』?『초한춘추(礎漢春秋)』 및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書)과 당안(?案)등이 이용되었으며, 사마천 자신이 직접 방문 수집한 것도 있다. 『사기(史記)』의 내용 중 1권부터 12권까지는 제왕의 사적을 기록한 본기(本紀)로, 「오제본기(五帝本紀)」부터 「무제본기(武帝本紀)」까지 각 1권씩 12권으로 되어 있다. 본기에 대하여는 후대 학자들의 해석과 평가가 각각 다른데, 일반적으로 『사기(史記)』의 본기에 대하여 서백(西伯))?장양(莊襄) 이상은 「주진세가(周秦世家)」에 넣어야 하고, 항우(項羽)는 제후였으므로 본기에 넣을 수 없다고 지적되고 있다. 13권부터 22권까지는 표(表)로 되어 있다. 표는 『사기』전체의 강령으로 연대가 오래된 것은 세표(世表)로, 연대가 가까운 것은 년표(年表) 혹은 월표(月表)로 되어 있다. 23권부터 30권까지는 8항목의 서(書)(예(禮)?악(樂)?율(律)?역(曆)?천관(天官)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단순히 외국을 소개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대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역사의 발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서술하기 위한 방편에서였다. 즉, 『사기』의 외국전(外國傳) 기술은 서역지방의 사정을 서술한 「대완열전(大宛列傳)」을 제외하면 외국민족의 시원이나 내부사정에 대한 상태서술은 소략하고 대체로 중국과 직접 관련이 있는 부분만을 기술한 당대 중국인의 현실적 관심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고병익(高柄翊) , 「중국정사의 외국열전」pp.7~9)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기』의 외국열전은 주변민족이 동시대의 자체기록을 갖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이용할 때 그것이 중국인의 화이론적인 역사의식에 투영된 결과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④ 체제와 주(注)『사기(史記)』는 기전체(紀傳體)) 사서의 시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 구성과 서술이 탁월하여 높이 평가되어 이후 중국의 역대정사가 모두 이 기전체를 따르고 있다. 따라서 『사기(史記)』는 후인들이 많이 연구하고 주를 달았는데, 남조(南朝) 송(宋)의 배인(裵姻)의 『사기집해(史記集解)』, 당(唐)의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당(唐)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이 대표적인 것으로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라 불리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간본은 인수본(仁濤本) 이십오사(二十五史) 소주(所收) 「북송인종경우감본(北宋仁宗景祐監本)」이고, 북경대학고적간행사영인의 「남송소여초항주각본(南宋紹與初杭州刻本)」을 서두로 하여 많은 단각집해본이 만들어 졌다. 「집해(集解)」?「색은(索隱)」 합각본으로서 「채몽필간본(蔡夢弼刊本)」 및 정가당문고장(靜嘉堂文庫藏)의 「형희경병간본(?熙耿秉刊本)」등이 인각되었다. 이와 같이 「집해」혹은 「집해」?「색은」합각본은 현재에도 잔존되어 있지만, 「단각정의(單刻正義)」, 혹은 「집해(集解)」와 「정의(正義)」, 혹은 「색은(索隱)」과 「정의(正義)」의 합각본은 볼 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