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다.﷽﷽﷽﷽﷽﷽﷽﷽다.﷽﷽﷽﷽﷽﷽﷽﷽다.﷽﷽﷽﷽﷽﷽﷽﷽다.﷽﷽﷽﷽﷽﷽﷽﷽다.﷽﷽﷽﷽﷽﷽﷽﷽ㄹ다.﷽﷽﷽﷽﷽﷽﷽﷽다.﷽﷽﷽﷽﷽﷽﷽﷽다.﷽﷽﷽﷽﷽﷽﷽﷽다.﷽﷽﷽﷽﷽﷽﷽﷽다.﷽﷽﷽﷽﷽﷽﷽﷽9장 새로운 수용소의 탄생우리는 정신분석학사에 자주 등장하는 상상들을 알고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상상은 마침내 광기를 인지하고 오랫동안 감추어져 왔던 광기의 진리에 따라 광기를 취급했던 행복한 시절을 보여준다.“퀘이커교도들(듀크의 묵상의 집)은 신도들이 광기에 걸렸을 경우 각각의 상태에 맞는 치료와 생활의 편의를 확보해 주고자 했다. 이 시설은 감옥이라기보다는 넓은 농장같이 보인다. 창에는 쇠창살도 빗장도 보이지 않는다.”꾸동(정부관계자-의회파)은 피넬(광인 치료시설 의사-공화파)을 향하여 “시민이여, 그대가 저 야수들을 사슬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자 했는가?”라고 다그쳐 물었다. 피넬은 조용히 답변했다.”시민이여, 여기 광인들을 진정시키기 힘든 것은 그들에게 신성한 공기와 자유가 없다는 오직 그 이유 때문입니다.”튜크(퀘이커교도)의 집에서는 열정적인 마음과 혼란된 정신이 서서히 평온을 얻어 갔고, 피넬은 단 한마디, 단 한번의 몸동작으로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동물적인 광포함(꾸동)을 잠재웠다. 뿐만 아니라 광포한 광인과 피에 굶주린 의회파를 구분하게 해주는 지혜에 관한 이야기도 상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상상들은 오늘날에까지 전설로서의 무게를 유지하고 있다.피넬과 듀크의 전설은 신비적인 가치를 전해 준다. 19세기의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가치를 명백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신화의 이면에는 수용소의 세계와 치료법, 그리고 광기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을 조용히 형성해낸 일련의 작용이있다.*튜크 설명튜크와 피넬이 동시대인이었다는 사실과 특히 튜크는 박애주의의 풍조가 유행할 때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튜크의 조치는 해방을 위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매우 다르다.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종교는 전래의 습관,교육,일상생활의 실천에 수 밖에 없다고 협박했다. 발작 후 그와 같은 대화를 반복적으로 가진 후 환자는 4개월이 지났을때는 회복이 되었다.”여기서 두려움이 환자에게 직접적인 효과를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효과는 도구적 수단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가능했다. 한때 도덕적 타락과 비이성을 함께 죄로 만들었던 모호한 죄의식은 변화했다. 광인은 이제 원초적인 이성이 부여된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미쳤다라는 죄의 혐의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자신의 죄는 더이상 아닐지라도 자신의 질병 내부에서는, 그리고 광인 자체로서는 광인은 자신의 내부에 깃든 혼란의 요소와 따라서 자신이 받은 처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죄를 부과하는 것은 이제는 광인과 일반적인 정상인 사이에 관계를 형성하는 양식이 아니다. 오히려 죄의 판결은 개개인의 광인과 간수가 공존하는 구체적인 형태이며, 동시에 광인이 자신의 광기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구체적인 인식의 형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튜크의 작업이 갖는 의미는 재평가되어야 한다. 듀크의 집에서의 광인의 해방, 제약의 폐지, 인간적 환경의 조성은 단지 정당화에 불과했다. 실제 작업은 달랐다. 사실상 튜크가 창출한 수용소에서는 광기에 대한 공공연한 공포는 책임감에 대한 숨막히는 두려움으로 대체되었다. 더이상 두려움은 감옥 밖의 세상을 지배할 수 없었다.두려움은 단지 양심과 의식의 봉인 아래서만 날뛸 수 있었다. 이제 튜크는 광인이 사로잡혀 있던 오래된 공포를 광기 자체의 심장부로 옮겼다. 수용소는 더 이상 광인의 죄를 처벌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수용소는 더 이상의 것을 했는데 그것은 광인의 죄를 구성해낸 것이다. 수용소에서의 죄의 구성은 광인에 대해서는 자기 의식의 형태로 그리고 간수와의 불평등한 관계로 이루어졌으며, 이성의 인간에 대해서는 (자기 속에 있는) 타자(les Autres)에 대한 인식의 형태로, 광인의 존재에 대한 치료적인 개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죄에 의해서 광인은 항상 자아와 타자에게 민감하게 영향탄생했다. 18세기 말엽까지 광인의 세계에 존재한 것은 광인을 감금시킨 추상적인 무형의 권력이었다. 간수조차도 종종 수감자들 사이에서 충원되기도 했다. 그러나 튜크는 오히려 간수와 환자, 즉 이성과 광기 사이에 매개요소를 설정했다….광기를 대면한 간수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간수다. 맨몸으로 광기와 대면한 간수는 이성적 존재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결코 미칠 수 없다는 권위를 부여받았다…수용소를 지배하는 이 새로운 이성에 대해서 광기가 표상하는 것은 절대적인 모순의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미성년의 지위였다. 광기는 이성에 대해서 자율성을 갖지 못한 존재로 보였다…튜크는 미성년의 지위를 광인에게 적용되는 존재양식으로, 지배의 양식을 간수에게 적용되는 존재형태로 규정했다. 묵상의 집에서는 간수와 광인 사이에 가족이란 개념이 매우 강조 되었다. 이 오래된 구조는 공존의 형식으로 변질됨으로써 심리적 주체로서의 광인을 이성적 인간의 권위와 지위에 전적으로 내맡겼다. 왜냐하면 이성적 인간은 광인에게는 성인이라는 구체적 모습, 즉 도달해야 할 목적 또는 권위로 보였기 때문이다. 튜크의 정신에 있어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순수하며 가장 자연적인 형식의 공존(가정)을 흉내낸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했다.*피넬설명피넬은 종교적인 격리를 옹호하지 않았다. 피넬이 옹호한 격리는 튜크가 주장하는 격리와는 대립적인 방향에서 기능했다.“종교는 수용소에서의 삶에서 도덕적 토대가 되어서는 안 되고 단지 순수한 의학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강한 감정상태의 원천, 초월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서 야기된 무서운 상상들을 이용하는 가톨릭교는 종종 광기를 발생시킨다.”종교적 열정과 상상이 제거된 중립적인 수용소란 개념은 오히려 튜크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의 꿈은 정신적 치료에 있어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할 종교적 공동체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피넬의 문제는 종교의 도덕적 내용이 아니라 종교가 가진 희화적 형태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이처럼 라 살패트리에르의 수용소는 종교에 관한 사회적 견해들, 으로써 각각 타인의 광기를 부조리 한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여기서 광인은 자기자신이 왕이라는 정당성과 정신착란에 적합한 확실한 근거를 보장 받는다.가상과 실재 사이의 균열은 객체에서만 인식되도록 되어 있다. 반대로 이런 균열은 주체에서는 완전히 가려져 있다. 여기서 주체는 즉각적인 진리인 동시에 절대적인 판단이 된다.두번째로는 왕이라고 믿는 광인에게 감금상태를 끝내지 못하는 이유와 다른 광인들과 같이 있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부조리함을 인식시켜 망상과 기행을 깨닫게 하였다.광인이 가졌던 주체로서의 굳건한 주권이 광기를 인정함으로써 신화가 벗겨진 대상을 통해 무너진 것이다.피넬의 이 치료방법에서는 광기는 18세기처럼 폭력적으로가 아니라 다른 광인을 통해서 바로 자신을 발견하는 상호 관찰의 시행을 통해서 치료를 가능하게 한다.광기는 끊임없는 자기 관찰 속에 스스로를 감금시킨것이다. 결국 광기는 광인 스스로를 모욕적인 사슬에 얽매이게 된다. 여기서 광인의 자기 인식은 자신이 미친 타인과 같다는 사실로 인해 수치와 연결되고 또한 이미 스스로가 스스로를 조롱했다는 사실 역시 수치와 연결된다. 이것은 도덕성과 관련이 있고 광기를 비이성을 이성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3)지속적인 판단침묵과 마찬가지로 거울의 작용에 의해서 광기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판단하도록 요구받았다. 게다가 그러한 판단은 매순간 외부로 부터의 판단으로 도덕적 과학적 판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구 법정을 통한 판단이다. 비세트르의 한 수감자는 지옥에 대한 공포심에서 야기된 종교와 관련된 금욕적(단식) 정신착란에 고통받고 있었다. 여기서 치료는 지옥의 공포보다 현실적인 공포를 느끼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 지옥의 공포보다 우선하게 하는 수단을 취해서 광인이 죽을 먹게 하였다.*추가적 조치피넬의 수용소는 18세기에 치료방법으로 알려졌던 것들을 이제는 처벌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의료적인 것을 사법적인 것으로, 치료적인 것을 억업적인 것으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변화는 피넬의 초기 박애가 모든 다른 구조들이 이 구조를 참조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비이성의 소리를 듣지 못했고, 또 듣지 못할 것이며. 또한 그 속에서 광기의 기호를 해독해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광기는 고유한 힘으로 우리가 쉽사리 해방이라고 잘못 부르는 그 거대한 도덕적 감금에 저항하기 때문이다.결론광인의 집(madhouse)을 그린 고야는 공허한 공간 속에서 들끓고 있는 육체들, 그리고 살풍경한 벽들 앞의 벌거숭이 앞에서 동시대의 비장한 힘(pathos)과 연결된 무언가를 경험했음에 틀림없다.어떤 의미에서 고야는 광기에 대한 잊혀진 상상들을 재발견한 것이다. 광기는 세계에 도전하고 인간을 해체해 버리는 상상들로까지 발전했다. 광기는 인간의 꿈과 야수의 악몽을 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마지막 구원이다. 광기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이다. 그 이유는 광기가 독일의 서정시에서의 약속(규칙)이기 때문이 아니라 광기가 혼돈과 묵시중에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광기는 시간을 연결시키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하며 어두운 밤의 고리에 세계를 묶어두기도 한다. 고전주의의 비이성에서는 언제나 무와 암흑이 문제였고, 무와 암흑을 증폭시켜서 소리지르고 발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무와 암흑에게 표현의 권리를 부여해서 최초로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하여 무와 어둠이 서구문명을 지배하게 하고, 총체적인 항변을 위시하여 모든 항변을 기존의 서구문명에 대해서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고착된 서구문명에) 그들의 원초적 야만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 문제였다.고야의 단절적 그림과 사드의 언어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공통점은 동시대의 서정시의 진행을 거슬러서 그 원천을 고갈시켜 버림으로써 무와 비이성의 비밀을 재발견하는 운동이다.인간에게 욕망을 일으킨 것은 자연 자신이다. 삶과 죽음의 위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인간에게 욕망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욕망이 보여주는 광기, 미친 살인자, 가장 비이성적인 열정……. 결국 인간의 광기않는다.
Haley Morris Cafiero의Wait Watchers 읽기라캉의 응시이론을 중심으로홍익대학교 대학원 메타디자인학부 사진전공1.머리말2.타자의 시선3.맺는 말1.머리말광학기구와 빛의 정착이라는 개념을 기초한 사진술은 탄생의 역사가 짧다. 또한 예술계로의 완벽한 편입의 역사는 더욱 짧다. 200년이 안 되는 사진의 역사에서 사진술에 예술의 지위를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일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조지 디키(George Dicky)의 예술제도론이 말하는 The art world 에서 인정을 통한 예술로써의 지위 획득이라 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사회 속에서 개인이 만들어낸 단순한 창작물이 예술로써 인정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동의가 필요하다. 또한 그러한 동의는 시대정신(zeitgeist)에 기초하고 있고 시대정신은 당대의 보편적인 ‘어떤 것’이지만 흐르는 물과 같이 유동적이다. 과거 모더니즘 미술과는 다르게 현대 미술은 장르의 통합과 차용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고 모더니즘 시대의 예술과는 다르게 장르의 구분을 통해 설명하기 힘든 예술의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 간 차용 속에서도 모든 예술표현 방법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 현대사진 역시 사진만의 고유한 속성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진의 고유한 속성은 무엇인가? 다른 예술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다양한 속성기준이 있겠지만 1978년 MOMA에서 열린 ‘사진가의 눈’ 전시에서 존 사코우스키는 내면을 비추는 거울과 세상을 바라보는 창으로 작품 스타일을 분류하였으며 1966년 쓰여졌지만 전시 서문으로 사용된 글에서는 사물자체,디테일,프레임,시간성,시점으로 사진의 속성을 설명하였다.이렇듯이 ‘비교적’ 거울과 창으로 이분화 시킬 수 있었던 사진은 이후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1970년대 기록사진과 개념예술이 통합된 뉴 토포그라픽스(new topogr aphics)와 1980년대 이념과 개념예술이 통합된 뉴 웨이브(new wave) 사진 등의 통섭적 표현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사진을 만든다는 것으로 바뀌었고 여러 예술장르가 복잡하게 실행되었다. 하지만 광학장비를 사용한다는 사진술의 특성에서 비롯된 존 사코우스키의 거울과 창의 형식적 구분과 5가지 특성으로 분류한 사진의 속성은 변함없는 사진예술의 근간이 되는 요소이자 언어를 구성하는 기표가 된다. 언어라는 것은 단순한 text에 머물지 않는다. 사진예술 역시 언어화를 거친 시각 예술 언어이다. 언어는 사고를 거쳐서 나타나고 우리의 사고는 인문학을 통해 해석의 가능성을 내보인다. 이러한 과정 속에 작품의 해석에 있어서 공리가 형성된다. 하지만 예술 속에는 언어를 넘어선 무언가가 존재한다. 본 연구에서는 사진예술의 고유한 특징인 시,공간성 그리고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 헤일리 모리에스 카피에로의 작품 Wait Watchers를 정신분석학적 접근과 라캉의 이론을 덧붙여 분석해 보고자 한다.2.타자의 시선헤일리 모리스 카피에로는 대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한 멤피스 예술대학 교수이다. 그녀의 작품Wait Watchers 는 작가의 자화상 시리즈이다.작가는 존 사코우스키가 말한 전통적인 사진 속성을 기반에 충실하면서 다큐멘터리 양식을 통해 사실성을 살린 작업을 하였다. 작가는 뉴욕시의 타임스퀘어 등 사람이 많은 곳에서 주변을 둘러보거나 지도를 보고 앉아있는 등의 관광객이 흔히 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인식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가 세워둔 카메라는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잡아내고 있다. 제목 Wait Watchers는 상당히 다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관찰자들을 기다리는 작가를 의미 하는 것이지만, Wait은 몸무게 Weight를 연상 시킨다. 여기서 Wait Watchers는 몸무게를 주의 깊게 지켜보며 절제하는 사람도 되지만,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과체중인 사람을 바라보는 작품 속 관찰자(행인)를 말하기도 한다. 작가는 비만인 자신을 바라보는 관찰자들을 기다렸다가 촬영하는, 또 다른 관찰자이다. 또한 작품을 보는 관람자는 작가가 선택한 작품 속 시선을 통해 그녀의 거대한 몸과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을 다시 관찰하게 된다. 작가는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평소에도 알게 모르게 자신을 바라보는 편치 않은 시선을 자주 느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헤일리 모리스 카피에로는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오랜 차별의 역사로 인하여 미국인들이 지양하지만 인간 내면에 가지고 있는 ‘편견’과 ‘차별’이라는 관념을 본인의 자화상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에게 이러한 시선은 작품에서만 보여 지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평소 느껴 왔던 시선인 것이다. 작품에서 보여 지는 시선들의 의미를 우리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시선에서 우리는 작가가 느꼈을 편견을 예상할 수 있으며 그러한 편견은 한 인간에게 폭력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타인의 시선은 다시 작가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흥미로운 것은 응시를 하게 되는 각각의 대상들이다. 비만인 작가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프레임 밖에서 자신과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 그리고 작가가 선택한 프레임을 통해 바라보는 작품 관람자가 맞물려 순환하며 응시의 의미를 확장시킨다.지젝은 주체가 윤리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작인 세 가지를 라캉이 명확히 구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이상적 자아’는 주체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내가 되고 싶은 모습, 타인이 그렇게 봐주기를 원하는 모습)다. 자아 이상은 내가 내 자아 이미지 속에 새겨 넣고자 하는 응시의 작인으로, 나를 감시하고 나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도록 촉구하는 대타자이자 내가 따르고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이다. 초자아는 그와 같은 작인의 가혹하고 잔인하며 징벌하는 측면을 가리킨다. 이 세항을 기초 짓는 구조와 원리는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다. 이상적 자아는 상상계로, 라캉이 “소문자 타자”라고 부른 내 자아의 이상화된 분신 이미지다. 자아 이상은 상징계로, 내 상징적 동일화의 지점, 그로부터 나 자신을 관찰(판단)하는 대타자 내부의 지점이다. 초자아는 실재계로, 내게 불가능한 요구들을 퍼 붓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는 내 실패를 조롱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작인이자, 내 ‘죄스러운’ 분투를 억누르고 그 요구들에 응하려 하면 할수록 그 시선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유죄가 되는 그런 작인이다.(1)라캉이 설명한 상징계처럼 그녀는 자신의 주체를 사회 속에서 설정된 시선을 통해 스스로를 타자로 만들어 굴복하였을 것이다. 그녀의 주체는 기표로써 비만인 이라는 사회적 위치로 편입되며 상징화 된다. 그리고 그런 시선의 불편함은 외부에서 발생하였지만 그런 외부의 시선을 자신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치환하였기 때문에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주인공 제니처럼 환골탈퇴 하는 것은 판타지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이러한 주체의 내부에 제거 할 수 없는 틈(빈공간)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가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예술의 영역으로 옮겨 놓았다.“내 모습은 헛되이 나와 만나니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네. 여기서 나는 네 모습을 비출 뿐네가 나를 향해 돌아선다고 해도 내 응시의 벽에서네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네가 꿈꾸던 너 자신의 그림자나는 거울과도 같은 불행한 존재비출 순 있지만 볼 수는 없다네.나의 눈은 마치 거울처럼 덩 비어 있고 마치 거울처럼너의 부재에 홀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네.”(2)라캉이 세미나11에서 인용한 위의 시처럼 헤일리 모리스 카피에로는 타자가 바라보는 시선 속에 자신의 모습을 위치시키지만 그 시선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서 자신과 자신을 바라보는 타자와 그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여 기표화 된 자신을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사진 매체를 통해서 가능해지고 효과적으로 보여 지는데 사진술이라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환상 속에 그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응시란 무엇일까요?우선 주체의 환원이 이뤄지는 장 속에 어떤 균열-이러한 균열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준거, 즉 정신분석으로 하여금 의식의 특권들을 축소시킬 수 있게 해주는 준거를 도입할 필요성을 일깨워주겠지요-이 각인되는 최초의 무화의 지점으로부터 시작해봅시다.(3)주체가 어떤 본질적인 흔들림 속에서 환상에 매달려 있다면, 시관적 관계에서 그 환상이 의존하는 대상은 바로 응시입니다.”(4)헤일리 모리스 카피에로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그녀(A)를 바라보는 타자(B) 다시 응시(C)한다.이것을 도식으로 보자면 A->B->(C=A)와 같이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자화상 속 그녀(A)와 작품 밖 창조자(C)인 그녀는 다르진 않지만 같을 수도 없다. 타자로 있던 그녀가 그녀를 관찰하는 관찰자의 부정적 시선을 다시 관찰하면서 그들의 틈을 드러내어 타자화 되어있던 자신을 주체로서 다시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선 아래 있던 작가는 작품을 통해 타자의 불편한 시선을 드러내어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충족한다. 여기서 카타르시스를 통한 치유 혹은 소외로 부터의 탈피가 시작된다. 또한 그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불편한 시선을 다시 타인들(작품 관람자)에게 노출함으로써 작가에게 집중되었던 불편할 시선을 중의적인 정보로 변환시켜 의미를 사회적으로 확장시킨다. 왜냐하면 작품에서 보여 지는 불편한 시선에서 작품 관람자 역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작품 속 작가의 몸을 바라보는 공공의 시선은 기표화 된 인간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를 타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재단하는 우리를 연상시킨다.또한 정상인이라는 범주에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들이 타인들에게 보냈던 불편한 시선을 상기시키는 작품을 통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응시 하게 만든다.“이때의 응시는 정확히 사르트르가 말하는 응시, 다시 말해 불시에 나를 기습해 수치심에 빠뜨리는 응시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가 가장 강조해 기술한 감정이 바로 수치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나게 되는 이 응시는-사르트르의 텍스트 자체에서 볼 수 있듯이-내가 보고 있는 응시가 아니라 내가 타자의 장에서 상상해낸 응시 입니다.”(5)
공자의 미학 관점에서 바라본 정 반 합 (thesis-antithesis-synthesis)-6명의사진가의 예를 들어-홍익대학교 메타디자인학부(석사) 사진전공동양 미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자의 철학과 서양 미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철학은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서양미학은 이론 사변의 정신에서 시작하여 심미와 예술을 외부 세계의 이지적 인식과 연결했으며 예술을 진리를 탐색하기 위한 부속물로 보았다.하지만 공자의 미학은 개체의 심리 욕구와 감정을 현실 사회의 윤리.도덕 범주 내에 도입시키고, 개체로 하여금 사회 책임이라는 숭고한 의의를 인식하게 하며, 이로부터 자각적으로 그의 정감을 억제하고 발전시키도록 하는 것이였다. 이것은 ‘성어악’과 ‘유어예’라는 개념으로 대변될 수 있으며 “질이 문을 압도하면 야비하고 문이 질을 압도하면 형식에 흐른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을 ‘중용’이라는 틀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진작품에서 질은 작품 속 내용, 문은 작품의 표현과 형식이라는 틀로 치환해 볼 수 있으며 즉 작업에서 표현되는 작가의 정신과 그것을 구현해 내는 방법의 조화가 치우침 없이 잘 어우러져 있는 작가를 공자의 미학에 합당한 작가로 분류하였다. 그에 반대되는 작가군은 작품에 있어 내용과 형식이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군으로 상정하였다.그래서 본 필자는 여기서 공자의 미학에 ‘정’하는 3명의 작가와 ‘반’하는 3명의 작가를 통해 ‘합’을 도출하여 개인적인 작업방향에 도움을 받고자 한다. 하지만 공자의 철학을 바탕으로 나온 미학 개념을 사진예술에 적용하는 방식에는 일부만 동의하며 공자의 미학 개념에 반하는 작가의 작품의 가치도 존중하는 바이다.1.정-마이너 화이트(1908-1976): 여러 동시대 작가들과의 교류 속에서 여러 영향을 받았겠지만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스트레이트 포토과 이퀴벌런트로 대표되는 표현주의 양식에 영감을 얻어 사진의 기계적 특성과 은유적 상징체계를 결합시켰다. 이러한 방식을 found photography라고 칭하였으며 이것은 그의 내면세계를 영상화한 것이며 사진에 보여지는 대상들을 통해 영적인 무엇을 구연해 내고자 하였다. 형식적인 방법으로는 빛과 그림자를 통한 음영과 적외선 필름의 사용을 통해 우리가 평범하게 인식하던 대상들을 초현실적으로 보여지게 함으로써 당시 가장 사실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진예술을 통해 형상을 넘어선 관념을 표현하고자 하였다.ㅋ2.정-안드레아 구르스키(1955): 촬영 대상의 선택과 장면을 그려내는 방식만이 아니라 초대형 프린트로 구현되는 압도적이미지가 안드레아 구르스키 작업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러한 점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거의 그 장면에 빠져들게 하며 마치 예술가가 촬영했던 순간과 같은 경험을 하게 한다. 최근의 구르스키 작품은 인간의 소모나 소비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땅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면서 더욱 날카롭고 비평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고 높고 먼 카메라 시점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사회에 대한 조망을 제공하고 있다. 안드레아 구르스키의 말을 들어보자.”나는 주로 시각적인 측면에서 환경을 경험하는 한 사람으로서, 언제나 주변을 관찰한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대상들에게 질서를 부여하고 그들이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명확한 구조에 대한 애착은 아마 환영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대상의 흔적을 잡아내고 작품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려는 것은 내 욕망의 결과인지도 모른다.”3.정-토마스 데만트(1964): 독일 사진가인 그는 건축 공간의 모형을 먼저 만든 후 그 모형을 사진으로 촬영한다. 그는 대중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사진을 참조해 모형으로 만드는데 이를 통해 보이는 공간은 때로 함축적이고 시연을 가진 역사적인 사실을 내포한다. 하지만 작품에 지극히 일반적인 제목을 붙여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충실한 복사 등 전통적인 사진의 이해를 문제 삼으면서 토마스 데만드는 인공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에 긴장감을 조성한다. 토마스 데만트의 사진은 단순히 사진의 실험적인 면만을 드러내는 것이아니라 냉철하게 분석하고 통제되어 제작되는 오브제와 사진고유의 사실성을 통해 균형잡힌 작업을 만들어 내었다.1.반-리차드 프린스(1949): 주로 신문,잡지 등의 대중매체의 광고 사진이나 다른 사람의 사진작업을 재촬영하고 약간의 변화를 주는 방식으로 작업해왔다. 이러한 방식을 re-photography 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특히 말보로 담배회사의 카우보이 광고 사진을 재촬영한 작품이 유명하다. 하지만 리차드 프린스의 작업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사조 속에서 개념적으로 다가간 작품으로 의의는 있겠으나 남의 것의 도용으로 지속적인 송사에 휘말리고 있으며 본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의 작품에서는 시대를 조망하는 개념과 사진 예술사의 역사적 가치만 존재할 뿐 작품 자체는 빈약할 따름이다. 즉 바탕(내용)이 외향(형식)을 넘어선 편향된 작업이다.2.반-라이언 맥긴리(1977): 파슨스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매우 감각적이고 화려한 작업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누드작업을 주로 해왔다. 벗은 몸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감정을 모티브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그의 작업 속에는 구체적 지향점은 없으며 시각적 즐거음과 뚜렷하지 않지만 독득한 감성이 사진전반에 부유하고 있다. 작가의 말을 들어 보자. “줄곧 내 작품을 순수 예술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서 당신은 어떤 사진을 찍나요? 라고 묻는다면 나체주의와 초상 사진, 빈티지 포르노와 스포츠 사진을 뒤섞은 무엇이라 답할 것 같다.” 하지만 위선이 배제된듯한 이런 가벼움과 자유로움의 가치 역시 존재한다.3.반-어윈 올라프(1959): 네델란드 작가로 사진, 미디어 부분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는 영광을 안으면서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 소재는 인종, 신분, 동성애, 종교, 관습등의 문제들을 소재로 뛰어난 테크닉과 조형적으로 정돈된 이미지를 통해 대중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작업을 보여준다. 하지만 유려한 작품 속의 내용을살펴보면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 소재들에 관한 깊이 있는 접근과 사색을 이끌어 내기 보다는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요소가 더 큰 비중을 차지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공자의 미학사상에서 말하는 군자의 수신은 시의 학습에서 시작하여 최후의 완성은 악에 있다고 하는 부분이나 인격상의 원만함, 성숙함, 완성도를 가리키는 ‘성어악’과 기술의 섭렵를 포함하여 자유와 희열 그리고 놀이, 감상, 오락의 의미가 있는 ‘유어예’는 분명 한 인간으로 또한 예술가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큰 귀감이 되는 사상들이다. 하지만 예술이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설명되는 역사와 시대 속에서 문화를 반영하고 창조한다. 그렇다면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공자가 말한 도에 뜻을 두고 덕에 따라 인에 의거해야 하는 삶의 귀감과 현시대의 다양성 속에서 위선자와 사기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무자기( Hyperlink "http://blog.naver.com/es2922/?Redirect=Log&logNo=70089046369" 毋自欺) 를 통한 현 시대의 메타-중용적 가치관을 정립해 보아야 한다.
the new history of photographychapter 35 ?part2-New Topographics(새로운 지형학)한번 더, 누구든 프랭크 중심의 사진과 감성에 있는 공통분모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풀어보고 싶어 했던 방정식이였다. 위노그랜드는 위지의 거칠고 상스러운 이미지와 프랭크의 음침한 연약함을 합쳤다. 프리들랜더는 프랭크의 음침함과 같은 것을 완전히 반대의 감정과 함께 짝 맞추었다. 좀 더 삶에 대한 담담한 반응의 것은 로버트 아담스의 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프리들랜더의 1976년 사진집 ‘The American Monument‘ 는 그가 발견한 작은 마을의 전쟁기념비를 방문하고 나서 완성한 사진적 순례이다. 사진에 포함된 조밀하고 복잡한 구성은 프랭크에게 영감 받은 1960년대 뉴욕거리사진을 돌아보게 한다. 반면 주제와 차분함의 느낌은 아담스의 “From the Missouri West”(1980)로 전해져 반영된다. 자화상에서 보여 지는 얼굴의 불변의 표정과 같이 사진에서 프리들랜더는 의도적으로 입을 닫는다.(멍청함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침묵함에 대한 문학적 감각과 같다) 이와 같은 특징은 로버트 아담스, 루이스 발츠 그리고 많은 다른 뉴 토포그래퍼들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이미지를 만드는데 있어 어느 정도 판단 유보를 하였고 단조롭게 말했으며 이미지들이 획일적인 느낌을 들게 하였다. 로버트 아담스의 프린트가 표면적으로 보여 지는 것에서 단조로울 이유는 조금도 없으나 잿빛의 흐린 날씨 혹은 해질녘 서향의 태양을 그는 의도적인 풍경으로 찍었다. 이것은 지형의 외관을 동일하게 단순화 시켜 날려버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두 가지 사례의 단조로운 균일성은 암실 테크닉을 꼼꼼하게 지킨 8X10 카메라 네가티브의 결과이다. 그의 작품은 매우 통일된 시각이다. 사진에 찍힌 것들이 마치 따분하고 특색 없는 씬 처럼 그의 작업들의 주제와 보는 방법이 개별적으로 별반 차이 없는 인상을 준다. 이 사진은 인간의 개성으로 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배제시켜 인간의 개입 없이 사진에 정확하게 드러내서 만들었다.아담스 시점의 중점은 빛이 확산되거나 하이라이트의 대부분의 빛이 소멸하여 강조됨이 없는 것이다. 카메라가 놓여 진 장소는 강둑의 맥주캔, 언덕위에 소용돌이치는 산악바이크의 타이어 자국 혹은 다른 자국들, 사람에 의해 훼손된 풍경과 같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는 곳이다. 우리가 우연히 만난 사진의 발자취는 우리를 오래전에 놓여 진 어떤 화석과 예상치 못한 만남을 갖게 한다. 그리고 후에 우리가 무엇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로 발견하여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 그의 사진의 대단함이다.아담스는 공룡과 같이 단지 역사의 국면으로 인류를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인간본성이 크나큰 태고의 것으로 생겨났고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제안한다.아담스의 서부에 대한 시선은 의도적으로, 방법론적으로, 대부분 계획적으로 2차 대전 이전의 다른 아담스(안셀 아담스)에 반대된 것이다.안셀의 산이 슬픔과 환희의 장소라면 로버트는 우리에게 역사 속 억겁의 빙하기에 의해 어디에나 있는 그러저러한 땅의 풍경을 준다. 로버트의 사진은 안셀의 쉽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범신론적인 것을 철저한 불가지론으로 대체한다. 로버트 아담스의 가장 근래에 발간된 작품집 “Summer Nights”는 간결한 균형 혹은 보여 지는 것들의 무효화를 보여 준다. 이것은 서부의 망연자실한 정오의 눈부심과 여름밤에 감쌓인 어둠이다. 비어있고 얼빠진 지형의 연속된 진행 안에 각각의 쇄락하고 황량한 작은 마을 그리고 설명할 필요도 없는 오늘날의 외곽지가 펼쳐진다.아담스 작업 안에 있는 이 최후의 장소에 루이스 발츠 역시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사진은 뉴 토포그라픽 전시에서 아담스와 함께 보여 졌다. 발츠의 사진은 기계들의 무더기, 건설 중인 공공주택 그리고 새롭게 건설되는 쇼핑몰 풍경에 놓여졌다. 아담스 사진의 빛에 대한 완고함은 발츠에게 와서는 실제의 벽으로 변했다. 먼지, 석고보드 혹은 외장재를 발츠의 카메라는 전면에 내세웠다. 발츠의 사진은 단일한 감각 안에 있다. 그것들은 서 켈리포니아, 그가 자란 곳, 문학적으로 이차원적이고 추상적인 곳 이었다. 발츠가 사진 안에서 그린 매끈한 외관에서 보여 지는 순수한 패턴은 종종 완벽한 아름다움 이었다. 또한 사회적 언급이 암시 되었고 덜 위로적 이었고 밀실공포를 느낄 정도의 수준의 폐쇄성을 이미지는 가지고 있었다. 마치 자연 스스로 사람의 존재를 없애버리는 것과 같이. 이 작업은 긴장과 시각적 매력, 그리고 공습적인 역사적 사실성을 감각적인 구성의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강제적으로 보여준다. 발츠의 작업은 미니멀리즘을 내포하고 있다. 비록 아담스의 작업이 그래픽의 격자와 같은 것들을 덜 드러내고 덜 명확하지만 그렇더라도 역시 같은 곳에 있다. 사진가의 시선 안에서 주제와 감정의 반응이 사진이미지를 만들 정도의 필수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감소한다. 이와 같은 시각을 전후 사진에서 찾기 위해서는 침울한 프랭크와 화려한 클라인 그리고 위노그랜드 혹은 메이어로위츠에서 찾아야만 한다. 어떤 점에서 뉴 토포그라픽적인 시선은 독특함이었다. 특히 아담스가 그러했다. 그는 전업사진가가 되기 전에 콜로라도 대학교 영미문학 교수였다. 그는 미적 시각을 발전시켜 왔는데 어니스트 해밍웨이와 같은 미국 문학의 선구자로부터 명확하게 영향을 받았다. 1960년대에 아담스, 발츠, 그리고 다른 이들의 뉴 토포그라피는 구체화 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사진적 미니멀리즘이 존재했다. 그것이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받았든 안 받았든 간에 확실히 선례를 남겼다.해리 캘러핸과 몇 명의 그의 학생 그리고 동료인 라즐로 모홀리 나기에 의해 시카고에 설립된 The Institute of Design에서 형상화 되었다. 미시간 호수가 보이는 빈방에 그의 아내 엘리노어가 누드로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만년의 중반 즈음에 캐이프 코드의 사구와 해변에서 캐러한은 조용하고 능률적으로 사진을 전부 제작했다. 만일 특유의 의기소침함이 없었더라면 뉴 토포그라퍼로써 서부에서 작업했을 것이다. 시카고 루프지역의 거리사진가로 활동하는 동안에 캘러핸은 석양과 그늘의 기울어진 패턴 안에 그의 주제, 홀로 갇혀 있기, 특징에서 분리되기를 통해 종종 명상적인 거리감 속에 머물렀다. 이것은 아담스의 자연 안의 풍경만큼이나 인간들을 왜소하게 했다.캘러핸의 눈에 대비되는 잡초가닥의 작품연구와 같이 그의 엄중한 시각은 아담스 혹은 발츠의 작품들보다 몇몇의 위대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욕적인 모습들은 세속적인 것은 아니었다. 캘러핸의 거리사진의 구상을 켄 조셉슨은 제련하여 만든다. 주목받는 학생이었고 사진에 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던 그의 상황은 매우 뉴 토포그라픽적인 과묵하고 금욕적인 것들을 적절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만약 캘러핸 혹은 다른 Institute of Design의 졸업생이 중서부에 뉴 토포그라퍼의 선구자였다면 아트 싱사바우는 확장된 평평한 파노라마의 지점에서 지질학의 윤곽을 예술적 상태로 나타내었다. 그들은 또한 마크 클렛과 같은 서부의 계승자를 가졌다. 그는 폴라로이드 음/양화 기술을 사용하여 뷰카메라로 남서부의 풍경을 흑백으로 담아냈다. 폐허된 목장, 퇴색된 지형학적 환각의 모습과 같은 미국사막을 활용하였고 그 소재들은 이미지에 우리들이 접근하는 순간에 옅은 은빛을 발했다. 그 결과 뉴 포토그라픽은 불가사이한 시각이었다.
존 듀이- 경험으로써의 예술제 8 장-에너지의 구성1681.It has (동상이나 그림, 혹은 그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단순한 예술품과 예술 작업 사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밀접하게 논의 되어왔습니다. 전 자(예술품: the art products for sale)는 물질적이며 잠재적인 것이고, 후자(예술 작업 : the work of art)은 활동적이고, 경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 예술품(the products)이고 예술품이 하는 일입니다.4.for noting 경험을 드러내지 않거나 수반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외견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사건이나 지적으로 체계화 된 주제라든지, 또는 애정어린 보살핌을 통해 결합된 생각과 감정으로 정성껏 공을 들인 물건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그것의 출발점은 복잡한 상호작용의 시작입니다 ; 마침내 경험된 사물의 특성은 이러한 상호작용의 성질에 의존하는 것입니다.10.When 물체의 구조가 경험 자체로부터 발생되어지는 에너지들과 함께 하는 영향력으로 기꺼이 (그러나 쉽지 않게) 상호작용을 할 때, 그것들의 상호적인 호감과 반감이 집중적으로, 확실하게(그러나 더디지 않게) 개발되어지는 실체(substance-본질적인 것)를 가져오기 위한 강한 욕구(충동)와 긴장이 성취를 위해 함께 작용할 때, 바로 그곳에서 진정한 예술의 행함이 있게 됩니다.p1693.In the previous 앞 장에서 나는 이 궁극적 작업(예술을 한다는) 본질적으로 리듬(율동, 변화)의 존재에 좌우된다는 것을 강조 했습니다 ;내가 지적했듯이, 그것들은 경험과 그에 따른 표현 속에서 형성되는 조건들입니다.그러나 심미적인 경험, 그 실제로서의 예술을 한다는 것은 통찰력(인식, 자각)입니다.오직 이러한 리듬(변화)에 따라, 설령 외부의 소재, 그자체가 예술품으로 구현될지라도, 그것들이 심미적인 물체 그 자체로 경험 속에서 리듬(변화)이 됩니다.그리고 경험되어진 것 속에 있는 이러한 리듬은 외부적인 것 속에 리듬이 있다는 족스러운 곡선을 각각의 곡선들을 엄격한 수학적인 계산에 따라 구성하여 만족스러운 곡선들을 만들려는 시도의 결과와 비슷합니다.한 조사관이 녹음기의 도움으로 가수들의 목소리를 조사하는 것을 맡게 되었습니다. 최고라고 여겨지는 기량이 뛰어난 예술가들의 목소리들은 정확한 지점을 상징하는 선위에 약간 높게 또는 약간 낮게 기록이 되어졌고, 반면에 여전히 훈련을 받고 있는 가수들은 정확한 음정의 기계처럼 정확히 일치하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 조사관은 예술가들은 항상 음악을 가지고 ‘자유를 취한다.“라고 발표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자유“는 기계적이거나 또는 순전히 객관적인 건축물과 예술품 사이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리듬은 끊임없는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34.The greater 다양성이 더 뛰어날수록, 효과가 더 흥미로울수록 제공된 질서는 유지가 됩니다.p1711.THis principle 다시 말하자면 이 원칙은 비록 외부적인 물질의 사용 없이는 얻을 수 없을지라도, 관찰되고 상상되는 외부적인 경험에 의해 측량되어질 수 없는 어떤 것에 있어서 경험의 완성을 향한 축적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10. “...... 바람과 진눈깨비 같은 비,그리고 비바람 치는 모든 일들,단 한 마리의 양과 나무를 뒤흔드는 바람,그리고 오래된 돌 벽에서 나오는 음산한 음악소리,나무와 물소리, 그리고 대단히 뚜렷한 모양으로앞으로 뻗은 이 두 길의 선 위에 있는 엷은 안개.”16.The meaning 바람,비,양,나무,돌 벽, 엷은 안개 의 의미는 표현된 전체 상황에 대한 기능입니다. 그리고 가변적인 것은 그 상황이지 외적인 지속성이 아닙니다. 진눈깨비의, 단 하나의, 휘몰아치는, 음산한, 뚜렷한 이라는 형용사에서도 적용됩니다. 그들의 감각은 만들어지고 있는 개인적인 황량한 경험에 의해 결정되어집니다. 그러한 경험 하나하나는 그 깨달음의 진척에 기여합니다. 반면에, 결국 그 각자는 활력을 주는 요인들로서 구조물 속으로 들어가서 경험에 의해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그때 물체들(움직이은 원초적인 리듬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바로 미국에 있는 북부 흑인들의 리듬이 보통 남부의 리듬보다 더 관습화(전통화)가 된 것처럼...23.살아있는 생명체는 살아감에 있어 질서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참신함도 요구합니다. 혼란스러움은 불쾌하며 따분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감각에 매력을 더해주는 “무질서의 접촉”은 오직 외부적인 기준으로부터 무질서하게 나옵니다. 실재 경험의 관점으로부터 누적되고 쌓인 것들이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한 그것은 강조와 차이를 더합니다. 만일 그것이 무질서로서 경험되어졌다면, 그것은 해결되지 않는 충돌을 낳고, 불쾌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반면에, 일시적인 충돌은 더 활발하고 의기양양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를 모으는 저항의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p1741.Some esthetic 어떤 미적 생산품은 즉각적으로 유행합니다. 그것들은 그 시대의 베스트셀러입니다. 그것들은 쉽고 빠른 호소력을 가집니다. 그것들의 인기는 모조품을 발생시키며, 한동안 연극이나 소설, 노래들 속에서 유행합니다. 그러나 경험 속으로 그들의 빠른 동화는 그것들을 빨리 소모시킵니다. 어떠한 새로운 자극도 그것들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들의 시대-오직 하루-를 가졌을 뿐입니다.25.For experience 바둑판처럼 정렬된 경험은 물리적이고 기하학적으로 받아들여진 물체만큼 규칙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이 움직이면서, 그것은 새롭고 강화된 표면을 붑니다. 그리고 새로운 패턴이 거의 자동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조심스러운 관찰을 보여 줄 것입니다.34.Even 심지어 시계의 똑딱거림도 그것이 들릴 때, 다양하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들리는 것은 변화된 심장박동과 같은 물리적인 사건과 상호작용을 했기 때문입니다.흔히 만들어지는 음악과 건축물에 대한 비교(비유)는 이러한 예술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오히려 구성요소들의 반복에 보다는 축적되어진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은 유기적인 반복의 전형적인 예가 되기 시에 있어서는 운율에 있어서: 조각품에 있어서는 납작하게 하거나 매끄럽게 하도록.... 리듬(변화)를 제한하려 한 것입니다.그러한 모방은 보잔켓(Bosanquet)이 "easy beauty : 손쉬운 아름다움"이라고 말한 것처럼, 항상 그 방향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론에 있어서든, 실제적으로든지 간에 논리적으로 이루어질 때, 어떤 일이 형체가 없이 남겨지든지, 혹은 어떤 일에 임의적으로 부여된 어떤 형체를 만들든지 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Botticelli(보티첼리)의 작품, 과 에서, 아라베스크와 역동적인 패턴으로 있는 선의 매력은 쉽게 느껴집니다.그 매력은, 눈에 보이기보다는 더 무의식적으로, 다른 그림들의 체험에 대한 판단의 기준 속으로, 이 리듬의 국면이 만들어 내는 것 속으로 쉽게 관람객을 끌어 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p1771.What is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번에 더욱 단단하고 더욱 미묘한- 리듬들을 만들어 내는(이루어내는) 면(방법)에 대해서는 무감각함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평면들, 덩어리들,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은 색깔들과의 관계와 같은 것들을 말입니다.7.But 그러나 이 특별한 역동적인 방법(mode)이 ‘유일한 기준’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14.in short 똑같은 예들이, 리듬이 단순한 모양(생김새)속에서 변화와 반복에 제한을 받을 때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본질(물질)과 형태의 분리’의 전형적인 예가 됩니다.22.The same 모든 물질들이 리듬에 의해 해석되어질 때, 그 테마나 “주제”는 “새로운 주제”로 변화합니다.26.In 요약하자면, 우리가 한 물체를 예술품으로 보게 만드는 ‘부분과 전체에 대한 상호간의 해석’은 그 예술품의 모든 구성성분들이 -그림이든, 드라마든, 시든, 또는 건물이든지 그 똑같은 종류의 모든 구성요소들과 함께 리드미컬한(역동적인) 연결이 될 때, 효과가 있습니다.-선과 선, 색과 색, 공간과 공간, 명암과 조명 들이 서로 역동적으로 연결될재촉(압박)들은 스스로 움직이는 바다의 파도처럼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필요에 의해 추진됩니다.24.A pause 음악에 있어서의 멈춤은 텅 빈 공백이 아니고, 다 된 것에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그것이 정의하는 지점에서 멈추는 대신에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충동을 실어 나르는, 리듬이 있는 고요함입니다.30.Normally,일반적으로, 우리가 그것(시,드라마)을 취하는 방법은 우리의 경험 속에 있는 어떤 특정한 부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흥미(관심)의 방향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면(방법)으로만 받아들여지기를 고집하는 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예술품(생산품)들이 있습니다.- (피렌체 학파의 빛, 인상파 화가의 분위기)42.강조하고 정의하는 앞으로 나아감과 멈춤을 통합하는 정확한 균형을 이루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물체로부터 참된 심미적 만족감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너지의 유기체는 그런 경우들에 있어서는 불완전합니다.p1805.The active 행위들과 경험들의,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리듬의 형태학적인 형질로부터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성과는 화가가 심미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서 보통 추한 것을 찾아서 사용하는 것으로 인해 미술에서 분명해집니다.11.The familiar 세익스피어가 비극의 한 가운데에 코믹함을 사용하는 익숙한 예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p181~182작품을 보는데 있어서 연계와 충돌을 통해 감상을 하게 된다는 단락 그리고 그곳에서 리듬이 생성되고 예술을 바라보는 심미적인 체험을 하게 하는 에너지가 생성된다는 내용(주로 시각적인 것)p1828.만일 우리의 세계관이 순간적으로 한번 본 것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세계관도 아니고, 그 안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30.The denial 그림들, 건물들, 동상들에 대한 리듬의 부정(denial), 또는 주장 오직 비유적으로만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주장(the assertion)에 대한 부정은 ‘모든 인식의 고유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