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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문화사] 동양문화사필기
    ?문화권- 한자, 유교, 불교?정치- 율령체제?세계관- 정치적, 문화적 관점이 같이 들어있다*한자* ; 우수한 문화는 전파되는 속성이 있다.Ⅰ.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대부분의 문화가 중국에서 발생하여 퍼짐.((경로))① 조공사절- 중국에 정기적으로 사절을 보냄.-공식수행원: 일반관리-비공식 수행원: 승려, 유학생, 상인 ex)견당사-당으로 파견되는 사절단“유학승”들이 대부분의 문화를 전파시키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② 이주민- 대규모의 이주민들.-삼국시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전파-기자조선: 중국에서 한반도로 문화전파③ 무역업자, 상인- 무역 상인들의 접촉⇒**중국에서 다른 나라로 문화적 전파가 이루어 졌다.1. 한자문화권으로서의 동아시아⑴ 한자의 발생과 발전① 갑골 문자 이전시기 ; ‘부호’ 존재.ⅰ신석기 시대 (기원전 3000~4000년 전)섬서성 지역의 앙소문화 (반파 유적지 서안에 있음) ⇒신석기 문화반파 유적지- 토기가 많다. 대부분의 토기에 문양이 있고, 색깔이 있는 것도 있다.이 문양들은 도자기의 일련번호 또는 소유관계 문제 표시 등을 표현 했겠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부호가 중 요한 것은 이 시대에도 문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ⅱ 청동기 문화 시대 (기원전 1600년 전)이리두 문화 → 청동기 문화옥공예품.초기 형태의 문자가 발생했음을 암시해 주는 부호가 있었다.② 갑골문자 ; 최초의 한자 (기원전 1400년전)2000자 정도는 해독 가능, 현재의 한자와 유사하다.ⅰ의의- 글자로써 체계가 확실히 있었다.아주 오래전부터 문자생활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왕의영 ; 용골이라는 약재 에 글자 있었음. (갑골문자의 존재 최초 확인)ⅱ‘갑골’의 의미- 거북이 등뼈에 새겼다. (나무 또는 다른 종류의 뼈로 새겼음.)실제적으로는 소의 뼈나 말의 뼈에도 새겼었다.→통틀어‘갑골’이라칭함.ⅲ갑골에 새긴 이유- 점을 치기 위해서⇒**이 시기는 제사장이 정치적 통치까지 한 “신정국가” 체제③ 한자의 통일과 발전ⅰ전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강한 나라를만들고자 하였다. ⇒ “비공”ⅱ20C 강유위의 공교운동1930년대 신생활 운동으로, 이전의 전통을 새롭게 하여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존공”ⅲ1960~1970년대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중국의 전통문화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려 하였다.⇒ “비림비공”ⅳ1980년대공자를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 “존공” (현재까지 이어짐)⇒**중국은 공자에 대한 존경과 비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⑵ 유교의 동아시아 전파① 한국ⅰ삼국시대4C 고구려 ; 태학 (유교교육기관)백제 ; 오경박사⇒**삼국시대에 유학이 들어왔으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정치이념 등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미 불교가 퍼져있었기 때문에 사회저변에 깊숙 히 들어오진 못하였다.ⅱ조선시대유교가 지배 이데올로기로써 작용, 이 이념으로 지배, 통치한 가장 전형적인 유교 사회였다.② 일본「일본서기」에 5C초 ‘왕인’ 이라는 백제 유학자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귀족층에 게 유학을 소개했다는 기록이 있다.⇒**성리학을 수용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문학으로써 문화적 영향을 끼쳤을 뿐, 지 배이념이 되진 못했다. 유교이념이 들어온 이래, 모든 사람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었고, 사대부가 지켜야할 도리였다. (일본이 유교사회였는지에 대한 논쟁점)⑶ 유교사회의 특징① 가족윤리의 사회적 확대 (가장 기본적 특징)ⅰ효- 백행의 근본이라 하여, 기본적으로 절대성을 가지고 있다.유교사회는 가족이 기본이 되는 사회, 즉, 사회의 기본단위가 ‘가족’인 사회 였 다. 따라서 아들을 낳아 가계를 잇고, 부모를 봉양하는 가족주의가 발달하였다.ⅱ충- 효가 확대된 것이 충이다. 만백성의 어버이인 임금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다.이것은 원래 절대적 원리가 아니나, 유교사회에서는 절대성을 가진다.⇒**왜곡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② 덕치의 강조덕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이루려는 사회였다.유가에서는 ‘도덕우선론’을 내세웠고, 법가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라하여, 두 파가 대립되었었는데, 결과적으론 유가의 원리로 대부분 화장을 하고, 승려가 관장, 유패를 모셨 다. (유교사회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여, 당연히 매장하였고, 화장의 개념이 없 었다.)⑤ 억상 관념의 유무막부에서는 상업을 장려하고 천대하지 않았다. 이것은 경제적 이유 때문인데, 재정 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상인을 우대한 것이다. 따라서 억상에 대한 관념자체가 없 었다. 재정부분에 있어 상인들이 지배층의 후원자 역할을 한 것이고, 따라서 利에 대한 관념만 존재, 억상에 대한 관념은 없었다.⇒**근대 사회로 발전하는데, 큰 바탕이 되었다.⇒**일본은 한국, 중국의 사회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유교라는 것으로써 한 덩어리로 통합된 사회 판단하기는 어렵다.3. 불교의 전파한?중?일 삼국이 모두 수용하였다.⑴ 중국- 후한(2C) 말기 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위진남북조 시대에 불교가 가장 발달하였다. 대중적, 중생교화를 추구하는 대승불교가 발달하였다. 서역인에 의 한 실크로드를 통해 수용되어, 인도의 불교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한 다. 불교는 포용력이 강하여, 다른 문화와 융합이 잘되었고, 당시 지배체제인 유 교와 큰 대립 없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도교적 요소, 샤머니즘 적인 요소 등이 융합되어 있다.⑵ 한국- 고구려, 백제 4C신라 6C(528) : 이차돈의 순교로서 불교가 공인되었다.불교를 적극 수용한 이유는 백성을 통합, 왕에 충성토록 하는 민간통합을 위해 서였고, 또한 고등 종교가 부재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불교에 토속적, 샤머니즘 적 영향이 있다.⑶ 일본- 백제로부터, 6C에 전해 들어온다. 야마토 시대 불교 수용을 두고, 옹호한 ‘소가’ 와 배척한 ‘모노노베’의 가문 대립에서 ‘소가’가 승리하여,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정치권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정치적으로도 수용되었다.Ⅱ. 동아시아 율령체제의 형성1. 중국 당대에 율령체제의 성립과 성격⑴ 율령체제동아시아 각국에 전파되는 율령체제는 정치적, 제도적 측면에서, 통치 시스템이 확립 된 고대국가재의 중화주의라 함은 세계의 강대국으로써 군림하겠다는 의지의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⑵ 중국인의 세계관중원(강유역)이라는 잉여생산이 크고, 살기 좋은 곳에서 살면서 중국인들은 문화적 우 월의식인 ‘중화주의’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의식 속에서 현실의 동아시 아를 규정하여 더욱 중화주의를 공고히 하였다.① 화이론(화이사상)중화주의를 통해, ‘중화’ 와 ‘이적’을 구분한 화이관을 가지게 되었다. ‘화’와 ‘이’의 구 별은 문화(특히 유교문화)의 유무로써 판단되었다.② 오원적 세계관‘중국’ 그리고 ‘동이’, ‘북적’, ‘서융’, ‘남만’ 이라는 5원을 설정하였다.⑶ 중국 ‘국가’의 역대 대외정책 및 대외관계① 한대ⅰ염철논쟁- 중앙집권강화를 위해 한무제가 소금과 철의 전매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이 를 계속시행코자 하는 법가와 백성을 위해 폐지하자는 유가의 논쟁이 있 었다. 결국 유가 입장이 승리 하는데, 이는 한무제의 해외확대 정책의 포 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가는 황제의 힘이 중원안에서 충분히 충만해 야함을 강조하였고, 대외적인 것은 그 후 여력이 생기면 고려하자는 입 장이었기 때문이다. 염철논쟁의 결과로 유가의 논리가 기반이 되어, 중국 의 기본 정책은 “기미정책”이 된다. 이것은 일종의 간접지배방식으로 실 질적으로는 독립적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차등적인 관계를 설정한 것이다. (제국의 안보와 위엄을 지키면서)ⅱ이념- 화이론ⅲ제도- 책봉조공제도 : 과거 봉건제의 형식을 대외관계에 적용시켰으나, 각 봉건영주 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자, 상하관계를 가져야 했다.⇒**독립적이면서, 차등적인 대외관계 정채이었다.ⅳ제도의 적용- 동심원구조 : 중심에 천조(중국)가 있고, 자치는 하되 천조의 법률과 제 도가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몽고, 티베트 등의 내번, 독립 적인 국가로써 독자적인 법률과 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천조에 조공 사절을 보내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 는 조선, 베트남 등의 외번, 그 외 중국과는 관계가 없지 만 관념적, 잠재적인 지역으로 외의달리, 18C초 그 이후 선교사들은 중국의 전통문화를 인정하지 않아, 반기독교 성향의 전례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중국 문화와 기독교 교리간 충돌 과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수회 추방, 기독교 선교 전면금지 등 서학이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② 전례 문제가 나타난 배경ⅰ유럽- 유럽의 자기중심주의(우월주의)는 유럽 내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성향을 고조 시켰고, 따라서 중국 문화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것이 성직자에게도 영 향을 끼친 것이다.ⅱ중국 내- 기독교 세력의 확대를 환영하지 않았던 세력이 존재하였다. 주로 기득권 세 력이 새로운 기독교 세력의 대두를 원치 않았고, 실제로도 중국 전통적 사 고방식과 기독교 교리간 괴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외 제사무제, 선교 이외의 다른 정치적 목적의 존재의심, 피지배계층에 우호적이란 특성 때문 등으로 반대하게 된 것이다.3. 서학의 의의 및 특징⇒**⑴ 중국인들은, 문화에서는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자기중심주의가 있었기 때문에, 서 학 이용에 있어, 실용적인 면(과학, 기술), 물질적인 면에 치중하였다.⑵ 반 기독교 성향의 전례(선례)를 남김.이것은 반 제국주의, 반 기독교로 인식 되었다.Ⅲ. 조선의 서학1. 정의17C초 연행사(조공사절단)를 통해 들여온「한역서학서」를 바탕으로, 기독교 교리와 유럽근대과학기술을 배우고 연구하는 것이다. 청구문명이라 불렸다.2. 수용 및 전개⑴ 수용 경로① 연행사를 통해 들여온「한역서학서」② 이광정, 정두원, 소현세자, 허균 등에 의해 소개됨.③ 홍군포, 자명종, 안경 등을 들여옴.⑵ 전개① 17C 호기심에서 시작했다.② 18C 실학적 맥락에서, 서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③ 조선후기 여러 문제점의 대두(사회적 배경)안에서의 전개ⅰ사회관제의 모습- 신분제, 적서차별 문제ⅱ성리학 자체적으로 교조적이 됨- 생기가 없고, 변화가 없었다.ⅲ대외적 배경- 명청 교체기의 유동적 상황이었다.⇒**매우 혼란했던 시기에 전개되었던 것이다.④ 서학에 대한 3가지 입장(태도)으로 전개다.
    학교| 2003.01.07| 20페이지| 2,000원| 조회(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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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문화사] 동아시아 담론의 의의와 한계
    동아시아 담론의 의의와 한계Ⅰ. 서론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이론 중에는 ‘소통행위이론’ 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이전의 근대적인 것(modernity)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극복하고, 의식철학으로부터 언어철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강조하는 한편, 인간 이성의 인지적이고 도구적인 측면을 보다 포괄적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일부로 여기는 새로운 시각, 즉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대안이란 인류의 여러 위기들이 이성의 도구화로 인해 나타난 것으로 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의사소통적 이성의 발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단절적 관계에서 벗어나, 주체와 주체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의사소통적 이성은, 바로 ‘말, 토론, 합의, 담화, 담론’ 등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권력논리, 화폐논리가 만연된 도구적 이성 영역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대화 가능성’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매개체로서의 언어 행위(계몽, 비판 등)를 통해 모더니티의 극복을 말한 하버마스의 이론처럼, 최근 우리가 ‘동아시아’ 라는 것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고민하고, 또한 동아시아의 여러 영역을 담론 하는 것은, 어쩌면 당면한 현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첫 걸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담론들을 서로 연구, 비판하고,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볼 수 있는 성숙된 시각으로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동아시아 담론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경제적 성취, 1980년대 초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포스트모더니즘, 동아시아라는 하나의 단위로서 인식하는 이유 등 여러 측면에서 고려되어 왔다. 이것은 동아시아 국가들 자체에서 행해지기도 하며, 서양에서는 새로운 대안으로써, 모색의 한 측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담론의 진정한 의미와 담론들의 한계점, 그리고 동아시아적인 것을 고정관념화 하고, 비합리적으로 잘못된 시각을 보이는 서양(특히 미국, 1980년대 초,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서구 자본주의 세계와는 사회구조적으로 달랐던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그것이 자본주의 논리를 더욱 확고하게 하는데, 특히 이 때 동아시아 지역의 자본주의적 경제 성취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즉,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인간관계와 같은 ‘동아시아적인 특수성’으로서 자본주의를 논하려 하는 것을 말한다.)후자의 맥락에서 보자면, 서구적 근대(이성, 합리의 정신)의 비판 등장, 즉,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근대를 극복한 새로운 인간세상을 만들자는 주의가 나타나는데, 근대에 대한 반성은 ‘천인합일(天人合一)’ 정신, 조화를 중시하는 ‘덕(德)사상’과 같은 동양 전통으로써, 해결하려는 경향의 확산을 말하는 것이다. 서구 중심주의와 이성 중심주의에 의해 동양에 대한 부당한 평가절하와 같은 것,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인, 서구적 잣대로써 우리 자신을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에 관한 극복의 방향을 설정하고자 하는 것이다.2. 동아시아 담론의 현주소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두 맥락이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라는 틀을 두고 수많은 담론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 시점에서, 현재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는 국내 학계의 동아시아 담론들을 살펴보고, 동아시아 담론의 현주소를 점검해 보도록 하겠다.1) 현실적 배경 및 ‘동아시아’의 개념위에서 간단히 살펴보았지만, 동아시아 담론의 현실적 배경은 특히 경제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패전국 일본의 고도성장과 동아시아의 높은 경제성장에 대한 물음에 기인한다. 거기에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정치적 요인) 외에, 아시아 국가들이 더 이상 서구 문명이 무한성장의 확실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자각 속에 자기문화를 바라보게 되면서(유교문화 등), 그 문화의 전체적인 통합개념으로서 동아시아에 주목하게 된 것)이 또 하나의 문화적 요인으로서의 현실적 배경이 된 것이라 생각한다.그렇다면, ‘동아시아’ 적인 것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그것의 보편성과 권’이라는 문화적 보편성이 동아시아 전부를 포괄할 수는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2) ‘동아시아’에 관한 왜곡된 논리서양에서 말하는 ‘동양주의’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한다고 한다.) 즉, 서양에서는 동양에 대해 고정관념과 편견이 지배적이다. 예를 들어, 20세기 중국의 동아시아 인식과 실천을 일본의 그것과 함께 ‘동양주의’라는 틀로 묶어 일괄적으로 패권주의 처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유럽인과 서구인들의 이기적,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동아시아의 성공을 마치 그들이 이끈 것처럼 해석하거나, 그들의 의도(음모?)가 부당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게 한다. 이중적 논리의 잣대로 동아시아, 또는 제 3세계의 저개발 국가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음모와 책임회피를 오히려 더욱 드러내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들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됨을 말하려는 것이다.3) 동아시아론의 연구연구대상을 한?중?일 등 개별적인 국가로 하는 것이 아닌, 동아시아라는 한 단위로 이루어진 대상을 연구한다는 것은 전자와는 다른 넓은 시야로 봐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때, 좀 더 발전적인 연구 성과를 얻을 수 있고, 또한 부족한 연구에 대해서는 반성 할 수도 있는 여지가 생긴다. 우선 가장 많이 축적된 연구내용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동아시아론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을 그 출발점으로 보고, 식민지배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 중요하였다.) 게다가 일본의 동아시아에 대한 일종의 우월감은 그들의 근대화론에 그대로 적용시키면서, 그들의 우수성만을 피력하는데, 물론 이것이 객관적이지 못한, 일본 동아시아론의 한계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또 순수한 학문적 입장에서 볼 때는, 그 기여도란 여간한 것이 아니란 생각도 든다. 중국의 경우는 그들의 문화?사상적 우수성에 관한 우월감으로 인해, 동아시아에 대한 인식을 무시해버리고, 그것을 위시한 패권주의로 치닫을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지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그들의 진정한 은 근대화 혹은 서구화의 성공적 수행이 낳은, 자부심의 언어적 표현일 것이고, 이 점은 동아시아 담론의 기폭제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유교 자본주의론’ 이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 학계에서는 말한다.“유교와 자본주의의 조화는 유교적 유산이 없었다면 동아시아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는 주장을 넘어 이제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유교자본주 의의 균형자는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이 될 수 없다. 유교적 질서에서 권력을 감시해온 ‘언론’ 과 지식인이다.”)“동아시아 모델을 유교자본주의로 파악할 때, 그 ‘유교’의 성격을 세심히 따져야 한다. 이는 왕도론에 입각한 공자시대의 원시유교가 아니라 한(漢)제국의 국가이데올로기로 채택된 경학 시대의 유교, 즉 부국강병의 패도론에 바탕을 둔 법가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중앙집권적 관료 제 기구에 적응하는 데 성공한 시대의 변질된 유교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패도론적 대국주의에 입각한 동아시아 모델을 왕도론적 소국주의의 재평가를 통해 근본적으로 교정하 는 작업을 제안하고 싶다.”)서구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한 아시아 신흥공업국의 성장 원인을, 그들이 ‘유교문화권’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에 착안하여, ‘사후약방문’의 식으로 유교가 그것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하고, 실제적으로 그 내재적 발전가능성은 배제해버리는 판단을 한다. 이러한 서구의 자기중심적 관점은 당연히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동아시아 담론에서 말하는 유교 자본주의의 모습은 전통과 현대를 매개로 한, 서구와는 다른 좀 더 적극적인 개념이다. 유교의 긍정적 가치를 자본주의에 내재시켜, 자본주의의 폐단을 줄이고, 나아가서는 유교 가치의 극대화를 통한 근본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이 점에 관해서 전폭적인 지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문제에 소급함으로, ‘유교자본주의’ 라는 단정적 표현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속성을 파악하지 못한 언어라 할 수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심의 세계가 지속되기 위해서 그들의 연대 중요성을 드러내려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스스로가 또한 그러한 연대를 만들어 나가야 하고, 특히 유교적 가치의 부정적 측면을 서구의 긍정적 가치개념(자유, 평등 등)과 접목시켜, 좁게는 유교적 자본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 넓게는 세계와 나란할 수 있는 동아시아론이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3. 비판적 고찰동아시아 담론이 다루고 있는 여러 주제들을 다뤄보면서, 이것을 전체적인 트리로 상정하여 이미지화 하고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동아시아 자본주의 발달의 기본적인 동력을 서구에 대한 종속적인 형태에서 찾아내려 하는 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의문이 많이 남는 것은, 유교라는 형이상학적 요소를 자본주의라는 형이하학적 요소와 결합시키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유교적 가치에서 찾아낼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적용시켜, 현대 자본주의의 폐단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는 제3의 대안으로써 설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것의 기본적인 특성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그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 유교라는 문화적 요소는 조금 부족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학계의 여러 동아시아론자들이, 유교의 도덕적 윤리관을 가장 중요시하여, 근대성의 문제, 자본주의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그렇다고 무의미하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리고 백원담 교수가 언급했듯이, 오히려 유교의 문화적 결함이 아시아의 경제위기 원인이 되기도 한 것을 보면, 문화적 요소가 완전히 결합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님도 알 수 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해결의 실마리를 문화적 요소에서만 찾으려 하면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동아시아 국가들, 특히 한?중?일의 연대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경제단위로 활동하는 세계적인 추세 속에서 반드시 이뤄져야 할 과제이며, 바로 이것이 세계 자본주의 문명에 대항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
    인문/어학| 2003.01.06| 8페이지| 1,500원| 조회(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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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직행동론]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평가A+최고예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과연 나는 정상인인가...?’ 가장 먼저 이러한 물음이 떠오른다.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인간을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의 이분법적인 흑백논리 자체도 문제지만, 이렇게 가치의 상대성을 가지는 질문에 있어서는 명확한 기준을 내세우거나, 정확히 일반화하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나 자신은 언제나 정상이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정상일수도, 비정상일수도 있다. 이렇게 상대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이고, 객관화 시켜버린다. 그 의미는 끊임없이 어긋나고, 바뀌고,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차연(difference)’ 이 존재하는데, 우리 주변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더 넓게 세계적으로도 특히 ‘비정상’이라는 것을 규정시켜버리고, 그런 사회적 실재를 지속적으로 창조해 오면서, ‘정상’이라는 기득권을 상층부에 두게 된다. 기득권 세력, 사회 통념적, 묵시적으로 인정되는 그 지배적인 권력이 마침내 비정상을 규정하는 것에서 나아가, 비정상을 규율과 통제로써, 규제하는 것에 까지 이른다. 이제 비정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판단한 후, 사회 통합을 위해서, 실질적으로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따로 격리시켜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주변화 되고, 소외당하는 이들이 생겨나도록 만든, 그 ‘특징적 권리’ 는 어느 누구도 명시적으로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묵시적으로, 상징적으로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기존의 인간이 만들어낸 실질적이자, ‘허구적인 것’ 들은 더욱 공고히 고정화되어,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비판적인 능력을 상실하도록 하며, 또한 그 지배적 힘을 고수하기 위하여, 철저히 의도된 권력지배체계를 만들게 된다. 특히 열등하고, 병리적이라 치부된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게 치부하는 것을 더 이상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지는 말자.) 공식적 영역으로서의 권력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세계에서, 예외적으로 취급되고 있는 그 ‘또 다른 공간’은 뚫을 수 없을 정도로 구조화된 감시체계와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규제에 관한 일탈행동을 처벌하는 체계로 시스템화 되어있다.그런데, 이러한 수직적 통제가 이루어지는 규율의 세계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충분히 역사성을 가지고 있고, 기존의 것보다, 발전된 역사로써 표현되어 진다. 여기서, 발전된 역사라는 것은, ‘처벌’의 발전 역사와 거의 의미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는데, ‘발전’에 내포된 숨은 의미는, 그 의미를 알려고 하면 할 수록, 더욱 반어적인 것이 되게 됨을 느끼게 된다. 발전되었다는 것 자체도 그 기준을 달리 하면, 발전적이 아닐 수 있는 것인데, 거기에다 과연 진정한 발전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권력의 은폐적인 속성이 작용한 결과이며, 또한 지속적으로 권력을 내재화 시키려는 지배의도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염두 해 두어야 하겠다. 그리고 그 의도의 근본적인 목적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이며, 앞으로 극복해야할 근대의 소산임을 알고, 권력의 중심과 핵심을 파악하여 그 대안 점을 찾아보는 것이, 이제부터서는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정신병자의 수용소라 일컬어지는 정신병원이란 곳이 있다. 이 곳은 극도로 폐쇄적인 공간임을 우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정신병원을 말할 때, 눈살을 찌푸리고, 부정적인 인식을 하는 것은, 극히 자기중심적인 해석체계이자, 사회통념적인 이해체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누구나 인정하는 하나의 정상적인 개념을 먼저 설정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병리적이라고 쉽게 판단해버리는 도구적 이성의 결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심화와 주변화의 끊임없는 작용으로 주변적인 것의 소외가 발생하고, 그것이 사회통합적인 측면에서 충분한 저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되어지는 때, 정신병원과 같은 ‘또 다른 공간’을 설정하게 됨으로써, 자신이 살고 있는 긍정의 세계에 반대개념으로써 판단된 묵시적 합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또 다른 공간에 대한 관리와 처리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한 폐쇄적 공간만 설정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감시와 또한 처벌의 체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영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에서는 흰색으로 말끔히 포장된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몇몇 등장인물들의 특징적인 행동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진정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를 찾아내는 엔딩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우선,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사실 그들이 정신병원에 있는 것 자체가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하겠지만, 여기에서는 그 정신병원이란 곳이 상대적인 개념에 있어, 정상적인 공간으로 볼 때, 그들은 이 안에서 만큼은 정상적일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극히 개별성이 뚜렷한 정신병자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정상화시킨 다는 것은 다소 억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미 정신병원에 모인 환자들은 더 이상 한 개인으로서 존재하지도 않고, 이제는 단지 그들이 불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규제하는 것이 필요할 뿐인 것이다. 능동성의 차단으로 그들은 더욱 무기력해지고, 수동성이 고착화되어 간다. 결국 이 정신병원은 통제수단을 이용하여 순응하는 자만을 양산함과 동시에, 그러한 수동성을 이용하여, 지속적인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규율과 훈육을 통한 순종적인 신체를 만들어 내는 이 시스템의 내부에는 결국 권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권력은 좀 더 용이하게 행사되기 위해, 계획되고, 구조화된다.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에서 나오는 병원 내부 공간을 보면, 그것의 구조가 효과적인 감시를 수행하기에 적합하도록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병원 2층에는 더욱 강도 높은 감시체계가 있다. 감옥과 같은, 독방의 감금이 이루어지고, 독방들도 더욱 세분되어있으며, 각 독방의 감시는 훨씬 더 강력하고, 따라서 순종적인 신체를 빠른 시일에 생산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개인 모두를 통제하는 감시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그 감시는 모르게 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권력을 유지, 집중을 위해 좋기 때문에, 그것은 은폐되는 속성까지 가지고 있다.‘지식은 권력 발생의 원천’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지식으로 인하여, 위에서 본 것처럼, 권력을 집중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병원에서 행하는 정신의학은 바로 권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의학에서 치료방법을 구하고, 정신의학을 통해, 정신병자들의 상태를 판단, 관리, 처리 한다. 처방과 함께 다시 관찰하여, 그 결과를 조사하고, 이렇게,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환자를 수동적으로 치료하는 것이다. 의사의 처방에 따르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 외의 능동적 행위를 한다고 해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결국 그 의도를 은폐시키면서, 순종적인 신체를 점차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순종적인 신체는 지식의 총체인, 일반적인 문화에서 요구되는 여러 가지(관습, 언어 등)를 체제 순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개인들이 내재화되도록 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것 또한 실재 형성에 있어, 스스로 순응되게 하는 일종의 은폐적인 권력행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영화에서 나타난 정신병원 환자들에 대한 지배는, 일상생활을 통제하고 있는 규율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 짜여진 빈틈없는 시간표를 작성하여, 그것을 하나의 오차도 없이 실행하도록 한다. 그 시간표에 어긋나는 행동은 철저히 규제되고, 감시자가 현저하게 부당한 행위를 하였다고 판단되는 행동은 규제됨과 동시에, 처벌이 이루어진다. 다시는 그러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이것은 근대 이전의 공개 처벌을 통한 ‘일벌백계(一罰百戒)’ 라는 역사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여기에서의 처벌은 은밀하고도, 고도로 집적된 과학적 기술로써, 행하여진다. 영화에서 나타난 단적인 예로, 처벌과정에 있어, 우연적으로 식물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의도적으로 식물인간을 만들어 버리는 것을 보았을 때, 이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에서 환자 개인은 철저히 무시된 채, 지배 권력을 위해서는 생명까지 거리낌 없이 위협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영화에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제도적인 된 이러한 상황을, 좀 더 호전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의 출현으로, 새롭고, 어쩌면 신선하기까지 한,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병원의 감시-처벌의 체계, 지배구조는 쉽게 바뀌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반동인물로 낙인 되면, 권력자는 추악한 모습을 숨긴 채로, 그에게 가차 없이 처벌을 가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수동적 구조를 내재화 시킨 정신병원 환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었다는 것이다. 환자 개인들이 정신병원에 들어 온 것은 사회화 과정에서 어떤 욕구 충족이 현저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러한 욕구 불만족이 분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사회적으로 규정된 또 다른 ‘그들만의 세계’로 방치된 것인데, 이러한 개인들이 변화 가능성을 점차 깨달아 가면서, 욕구의 충족을 조금씩 느끼게 되고, 근본적인 치료를 위한 행동도 하기에 이르는 것을 보면, 그 의미가 충분히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행동의 과정에 있어서, 자신의 순종적 구조를(수동적 구조와 동일시 된 상태)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고, 또한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3.01.06| 6페이지| 2,000원| 조회(1,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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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직행동론] 모던타임즈 평가A좋아요
    『모던 타임즈』우리는 항상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나 자신과의 대화이든, 다른 상대방과의 이야기이든지 간에, 삶의 의미를 묻고 싶을 때, 빠지지 않는 화두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답게 사는 것을 논하는 자체는 후에 말하더라도, 지금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 ‘답다’ 라는 말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답다’라는 것은 항상 어떠한 고정관념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다. ‘그것은 너 다운 생각이 아니야’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은 그저 웃으며 받아들이는, 인식적인 한계성을 갖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에 대한 타인의 특정 지움을 꺼려하는, 전자보다는 보다 넓은 인식의 한계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인식에는 한계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우리는 각자의 인식의 틀 안에서 사고하고, 행위 한다. 그런데, ‘인식’ 이라는 말에는 어떤 폐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인식하는 순간, 그 틀 안에서 모든 사물을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는 것을 또한 ‘언어행위’로 입밖에 나오게 하면서, 우리는 의도했던 바와는 다르게 말을 하거나, 설사 정말 나의 생각이 제대로 표현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 또한 내 안의 인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함에 따라, 생각에 순수한 개방성을 불어넣어 주기 어려운 경우가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도 지식이라는 것을 쌓아오고 있는 데, 그 지식이 이러한 인식의 틀을 더욱 공고히 하게 하는, 이른 바 지식의 지배를 받으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화되는 과정 속에서 습득되는 지식은 우리에게 그에 따른 지배와, ‘권력 행사’를 하는 것이다.권력 행사? 도대체 누가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인가. 권력은 권력 자체로만은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개인과 개인, 주체와 주체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 우리 내 사회에서 어떤 보이지 않는 ‘관계’라는 것이 주어지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는 것이만을 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일 수 도 있고(예를 들어 법, 관습 등),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정치, 경제의 권력논리, 화폐논리 일 수도 있다. 너와 나를 규정짓기도 전에, 나와 권력의 규율에 우선적으로 지배받게 되는 것, 따라서 우리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과 같은 체제 안에 내재화되는 것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끝없는 딜레마를 제공해 주는 필요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전 근대 시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그 발달의 역사는 항상 ‘법’ 이라는 것과 연관되어져 왔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인데, ‘법’이 인간 사회의 병폐라 할 수 있는 ‘범죄’를 다스리고, 그것을 처벌하는 과정에 이르기 까지, 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할 때, 실제로 그것은 인간 사회의 ‘정화’를 가져오기 보다는 인간 사회에 또 다른 범죄를 양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이중성을 가진 권력체제가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숨어있는 이면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처음 필자가 말했던, 인간답게 사는 삶을, 좀 더 넓은 사고로써, 고찰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모던 타임즈』라는 영화를 보고, 이 영화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를 생각해 보았다. 몇몇의 단어들, 자본주의, 대 공장 체제, 감시, 기계화, 정신병, 그리고 ‘행복’ 등 이렇게 떠오르는 말만 보아도, 정말 많은 생각들의 교차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딱딱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러한 소재를 희극적으로 표현한 찰리 채플린의 역설이, 사고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시켜준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영화의 장면 장면이 지금까지도 모두 생생한 만큼,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확실하고, 극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우선,「모던 타임즈」에서 풍자하고 있는 근대의 전체적인 문제는 한마디로, ‘산업화에 따른 노동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19C 말~ 20C 초, 자동공정기계에 의한 생산의 비약적인 발전에 의해, 생산성이 획기적으대 상품생산체제의 탈 숙련 노동을 이용, 노동의 대체가능성을 높여 임금을 하락시킴으로서, 사회적 구매력을 낮추게 된다. 이러한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은, 필연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실업과 파업이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고, 1929년에 미국을 강타하며 시작된, 세계적인 대공황의 이러한 배경만 보아도, 1920년대~ 1970년대 초 까지 작동한 포드 주의에 따른 대량생산체제의 역기능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포드 주의는, 대공황과 같은 악순환의 고리에 따른 결과를 선순환으로 바꿔주는 의미에서, 임금을 올려주는 정책을 시행하고, 중산층의 꿈을 키울 수 있는 내구 소비재를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대량, 표준적으로 생산하여, 결국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규정적 체제로써, 노동소외를 일으킨 전형적인 대량생산체제였고, 창조적, 노동적 능력이 완전히 단절된 축적체제였다.「모던 타임즈」에서 후에 소비의 적극적 창출이 이루어지고, 끝없이 욕망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가려는 전환기적 모습과 노동자 대투쟁의 장면은, 오히려 그것이 포드 주의가 작동될 수 있었던 토대였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그런데, 거슬러 올라가 좀더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찰리라는 전형적 인물이 실상 영토에서 이탈되어, 매뉴팩쳐에 길들여져야 했던, 겉으로는 자유인 같지만, 실질적으로 자본에 포섭되어 있는 형식적 자유인이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있어,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노동자는 더 환영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필요할 때 쓰고, 불필요하면 버릴 수 있는(토사구팽?) 효율성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규율에 적응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당연히 이러한 자본주의 모델에 아노미성을 띄었고, 이 모델링은 찰리처럼, 정신적으로 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분열적인 모습은 비단 노동자에게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본 또한 필연적인 분열성을 내포하고 있다. 어떠한 고정된 형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있을 것 같다. 이처럼 자본 또한 그 분열적 흐름을 스스로 구축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기계의 흐름에 따라 표준화된 작업만을 하는, 포드 주의의 규격화된 노동...콘베이어 벨트를 통한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주의의 실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실, 기계제 대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모습의 전형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미 이 무성영화에서는 시종일관 판토마임적 요소들로서만 그 행위의 의미를 표출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 숨어있는 뜻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그것을 말로 표현했을 때, 원래 의도하고 자 하는 바를 정확히 형용하거나,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 본래의 뜻을 왜곡 시킬 위험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말하는 사람은 노동자를 감시하는 사장이다. 감시자...바로 권력 주체이다. 이 사장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만약 통제에서 벗어난 행위를 할 경우에는 가차 없이 처벌을 행한다. 공장 노동자 전원은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쉴 새 없이 너트를 조이는 단순작업에만 열중해야 하며, 대형 스크린을 통해 감시하는 공장의 사장은 작업이 조금이라도 늦어지거나 쉬고 있는 노동자를 발견하면 감독관에게 호통을 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바로 ‘감시’와 그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처벌’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이 처벌은 정신을 대상으로 하는 처벌이다. 근대로의 이전과 법의 발달로 인해, 처벌의 역사도 점차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식은 권력의 원천이라는 말을 상기시켜보아, 법을 근거로 한 처벌의 권력을 생각해 보자. 법률은 처벌을 당하는 사람에게 신체적 고통은 경감시켜준 듯 보이지만, 사실상 법률이라는 제도적 제한으로 인해, 처벌 대상자들의 ‘권력’을 제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감시받는 사람들, 특히 어떤 생산 기구에 묶여 계속 감시당하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에게 신체의 주위에서 실재하는 ‘정신’또한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는, 감옥과 같은 폐쇄적 공간에서 지속적인 처벌의 가능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결국 권력의 중심부는 포드 주의적 공장체제에서 나타난 신체에의 권력이라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손, 자본가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손, 의지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찰리의 손은 자본가가 쉽게 관리할 수 있도록 길들여지게 되는 ‘실질적’으로는 자본가의 손이 된다. 푸코는 이를 ‘생체권력’이라고 개념화한 바가 있다. 이러한 생체권력이 작동하는 곳이 과연 공장뿐일까? 의식하지 못하고 살고는 있지만, 가정에서 강요되는 규율들, 예를 들어, 통금시간을 정하고, 반드시 집에서 자야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안부인사 드려야 하는 것 등 가정에서만도 보이지 않는 권력행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학교에서는 시간표에 짜여진 생활을 반드시 지켜야 하고, 군대에서는 군인들이 지켜야할 규율을 가르치며 거기에 따라야 하고, 강제적으로 복종을 강요하여 길들이려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생체권력이 행사되는 현장인 것이다. 이것을 사회에서는 사회화되는 과정으로, 사회 통합을 위시한, 묵시적 규정을 하여 지속적으로 그러한 체계를 구조화시켜, 더욱 지배하기 쉽게 만들어 놓는다.영화 속 찰리 채플린이 보여주는 것은 테일러주의에 근거한 근대적 삶일 것이다. 그를 통제하는 생체권력은 찰리와 같은 근대적 노동자를 양산하는데 필수적이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주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순에 따른 충돌을 막기 위해 폭력과 강제로서 대항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찰리가 정신적 분열을 일으키는 장면은 생체권력의 극한을 보여주는 아주 역설적인 장면이었다. 신체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오직 자본가에 의해 정의된 작업에만 몰두하게 되는 편집증적 모습마저 보이기도 한다. 물론 영화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자 가슴의 단추를 향해 스패너를 들고 달려드는 것이나, 기계에 넣는 기름을 모든 사람의 얼굴에 뿌리는 것 등의 장면을 통해, 기계체제의 인간모욕과 인간종속을 경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으로 인들었다.
    독후감/창작| 2003.01.06| 7페이지| 2,000원| 조회(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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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사관계] ‘21세기 자본주의와 한국사회의 변혁을 읽고’
    여는 글이 책의 첫 장을 넘기기 전, 책 표지에 나와있는 3명의 인물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노사관계론 수업을 들으면서, 몇몇 사회주의 사상가 들에 대한 그들의 이념을 들을 수 있었는데, 텍스트 상으로만 알고 있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정작 그들의 얼굴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궁금해지는 바람에, 외삼촌께 물어보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대학생이라 할 수 있냐며, 꿀밤을 주시더니, 사진 왼쪽으로부터 로자, 맑스, 레닌 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알고 난 후, 이름과 얼굴을 맞춰보면서 다시 한번 사진을 보니, 괜한 생각일까, 이제는 그 모습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압도할만한 카리스마, 그리고 어떤 혁명적 기질을 얼굴에 띄고 있는 듯 했다.이들이 말하는 사상철학은 아주 총체적이고, 거시적이다. 따라서 내가 가진 협소한 지식만으로 그들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을지 조차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들의 이론적 바탕 속에서 전개된, 오세철 교수님의 이 책을 통해 전 보다는 더욱 많은 사실을 알고, 또 그런 지식 위에서 좀 더 성숙된 사고를 실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내가 이 ‘노동사회’를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자본과 충돌하게 될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자본체제에 내재화 된 개인이 되어, 그런 구조화를 더욱 고착화 시켜나가고, 이를 통한 자본증식의 수단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공포심마저 생기게 된다. 이제는 생각의 유연성을 갖추어 그런 공포심을 없애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다양한 대안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진보성, 혁명성을 굳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이 책 속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마저 간과해 버리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 진실을 한 번 되새겨 보고, 그리고 나서, 독자적인 생각의 잣대를 세워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혁명의 본질요즘 들어, 특히나 많이 듣는 단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IMF 관리 제와 함께 진행된 김대중 정부의 정책 기조이기도 하고, 사실상 전 세계적으로 뻗어있는 경제 이데올로기로서, 자본가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고 있는 이즘이다. 자유주의와 자유방임 시장경제가 낳은 전후 세계자본주의의 필연적사실상 세계적 추세를 따지지 않고, 한국만 보더라도, 신자유주의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정권교체와 경제의 역사로써 알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필연적이었다는 뜻위기를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그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다시 위기의 산물인 신자유주의를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참으로 모순적인 순환의 결과이다. 이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우리는 강자의 논리 속에 약소국으로서 수용해 버리고, 노자관계에서 그 이데올로기의 작용은 극에 달한다. 그리고 개인은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한 무한경쟁체제에 돌입하여, 인간적 노동의 근본을 실추시키기에 알맞은 행위를 할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된다. 하지만, 이것이 역설적으로는 사회진보를 꿈꾸는 혁명의 진정한 본질을 실천하기위한 투쟁의 움직임을 더욱 가시화 시킬 것 임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고 변혁이라는 것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노동의 정치를 실현하는 길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체성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자본과 노동 사이에 수많은 형태의 담론이 있었지만, 결국은 변혁을 향한 희망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구조적 문제의 파악과 함께 당당히 주체로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보적 투쟁을 위한 필수 조건인 것이다.3. 투쟁투쟁? 좌파적 냄새가 물신 풍기는 이 말을 언제부터 이렇게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된 것인지 예전의 나를 생각해 본다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맑스주의를 접하면서도,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이데아적으로만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도 나는 나 자신을 좌파니, 우파니, 그렇게 규정하고 싶지 않으며,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적 뒷받침 속에 사고의 유예기를 거치는 갈등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사실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책을 읽으면서, 항상 투쟁의 연속선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투쟁이란 말이 나에게 어색하게 다가올 필요가 없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책에서는 한국의 노동자 정치운동에 대해 밝히면서, 그 본질을 확인하기 위한 저자의 판단과 비평, 그리고 저자의 열망적 고민을 볼 수 있었다. 노동자, 민중연대투쟁이라는 것이 어떻게 정치적인 조직으로 써 거듭날 수 있는 것인가? 장기적으로 자본전선과의 대립에서 살아 남기 위한 구체적인 형태의 정치조직화와 그 노선은 어떠한 것인가? 사실 너무나 다양한 양상이 나타나는 현실에서 모두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협동적 정치세력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은 퇴행적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더욱더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노동자 개개인부터, 현실을 제대로 알고, 경험하여, 지행합일을 실천해야 한다. 자본의 무자비한 칼날에 맞서기 위한 방패가 될 수 있고, 나아가서는 변혁이 될 수 있는 노동자 투쟁의 본질을 우리모두 깨달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굳은 의지가 필요하며, 또한 그것을 출발점으로 조직적 투쟁을 지속적으로 행해야 하고, 실질적으로 자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성숙된 의식으로 뭉쳐져야 한다. 그리고 사실상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노동운동이 무슨 특별한 노선을 선택할 수 있을지조차 회의적일지 모르는 상황 하에서 섣부른 노선 결정보다는,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는 희망적인 노동사회를 위한 대안을 먼저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영/경제| 2002.10.06| 5페이지| 1,000원| 조회(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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