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gina monologues...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여성 성기인 ‘보지의 독백’쯤으로 직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출판사측이 보수적이어선 지, 아니면 책을 들고 다닐 사람의 체면을 배려해서였는지 우리말 직역대신 그냥 ‘vagina monologues’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보지.”“세상에, 내가 그걸 말했네요.”들어가는 말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을 볼 것 같으면 여성 성기를 `씹’ 보지’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욕이자 상소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전적 개념은 접어 두고서라도, 여성에게만 특히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성문화 속에서 이 책 는 `옥문(玉門)’에 대해 너무나 리얼하게 말해 오히려 비현실적일 지경이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보지 라는 단어는 음란어도 상소리도 아닌 단순히 팔꿈치나 손, 갈비뼈처럼 우리 몸의 한 부분을 지칭하는 말이며 결코, 터부시할 것도 부끄러워 할 것도 아닌 대상이라 덧붙였다.분명 이는 여성이 가진 신체의 일부분이며 가시적인 것이지만 가부장제 사회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이, 손이나 팔꿈치를 말하듯 `보지 를 말하고 다닐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누구도 선뜻 그렇게 하진 못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오랫동안 경멸감과 수치심, 어색함으로 다가왔던 이 단어에 대하여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것은 성역할 사회화가 미흡했거나, 주위의 시선에 아랑 곳 하지 않는 ―개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괴상한 사람이라는 핀잔을 듣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하지만 남성의 성기에 관해선 사회는 더 유순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 찍는 백일사진을 비교해 봤을때, 남자 아이는 예외 없이 ‘고추’를 드러내놓고 벌거벗은 모습을 뽐내고 있다. 그 반면, 여자 아이는 레이스 달린 옷으로 성기를 가린채 남아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적 상황에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책의 저자는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가 동등한 자격을 부여 받아야 함을 역설하듯 `보지 라는 단어를 아주 자연스레 말 번 되풀이되고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적잖은 `감성적·정신적 공황’에 빠져들게 만들어 이 글을 읽는 내내 외설과 예술의 양극단에서 고민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무엇인가가 이러한 나의 판단에 자꾸만 제동을 걸었고, 그 무엇인가가 또 다시 나로 하여금 책을 읽게 만들었다. 난감하면서도 흥분되고, 흥분되면서도 진지하고, 진지하면서도 우습고, 우스우면서도 충격적인…. 지금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책 속의 인물들이 나와는 별개라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같은 여성이기에 심적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고, 또한 느껴야 한다는 무의식적 기제가 나에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로 인하여 책을 또 다시 읽어 보게 되었고, 그 결과 냉랭한 의무감에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던 시각에서 점차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이 책 속에는 버자이너에 관한 에피소드가 16편 실려 있었는데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성적 모욕을 당한 저자가, 200여 명의 여성들과 인터뷰를 통해 얻은 생생한 육성들을 글로써 적어 놓은 것이었다. 인터뷰의 화자는 각양각색이었는데 백인과 흑인, 인디언 여성까지 인종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였으며, 직업상으로도 대학 교수에서 홈리스까지, 연령상으로도 10대 소녀부터 70대 노파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화자들은 자신의 버자이너가 체험했던‘침묵의 일기장’속의 비밀들을 한 페이지씩 ‘솔직하게’누설하고 있었다. 난 너무나 솔직한 고백에 외설적이게 느껴지기도 했었지만 재차 읽는 가운데 내 생각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포르노처럼‘보지 드러내기` 그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 행위 자체에 상혼이라든지 ‘피학· 가학적 강박증’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본 후‘내 안의 억압된 성적 정서’들이 환기되고 순화되는 것만 같았다.책 속의 여러 글들 중에서 70대 노파가 혼잣말로“나의 버자이너는 독과 기름으로 오염된 강물이 되었고, 물고기도 수초도 모두 죽어버렸다.은 따뜻한 실소를 자아내게도 하였다.그런데 왜 여성의 성기만이 이렇게 억압을 받는 것일까? 이는 분명 차별적 현실이며 모순적 상황임에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적 상황은 성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여성 성기의 억압적 측면만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한 차원 높여 `여성에 대한 성억압 측면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본다면 더 의미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성은 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공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히 우리사회는 아직도 성을 터부시하고 성과 관련된 공개적인 토론을 기피하는 분위기에 젖어 있다. 성은 주로 생식이나 본능적인 욕구 충족의 문제로만 생각되기도 한다.물론 인간이 성적 본능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성은 동물세계와는 달리 본능대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는 인간의 모든 본능적인 욕구에 일정한 규제를 하듯이 ―성도 물론 예외가 아니므로―성을 규제하는 기본 제도로서 결혼제도를 정착시켰다. 이에 따라 성생활에 관한 윤리와 규범이 설정되었고, 이를 토대로 성문화가 형성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인간사회에서의 성을 성문화가 아닌 성본능의 차원으로만 보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자의 성욕은 여자보다 강해서 억제하기 어렵다 느니 따라서 매춘은 필요악 이라느니 하는 말을 듣게 된다. 때로는 남성의 강제적인 성행위조차도 억제할 수 없는 성충동의 발로인 것처럼 변명하거나 또는 성본능이 강한 남자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넘겨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마치 남성만은 성을 본능대로, 마음대로 충족시켜도 좋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이러한 역설이 나오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우선, 남성에게는 성충동을 보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허용하는 반면에 여성에게는 순결과 정절을 절대적으로 강요하는 이중적 성윤리와 결혼 제도의 전통을 계속적으로 유지해 온 데에 근본이유가 있다. 요컨대 남녀간에 성 규범이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얼마전 EBS 세계의 욕정을 다 충족시키면서 그들을 서로 질시하게 만든다. 트리니는 루이사와 경쟁하기 위해 요조숙녀 티를 벗어 버리고 색정적인 여성의 노릇을 하면서까지 파코를 잡아두려 한다. 그러나 트리니가 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 보일수록 파코는 도리어 무감각해지고 애초에 그녀에 대해 가졌던 순진한 이미지 마저 깨진다고 그녀를 더 멀리 하게 된다.이를 보면서 현대 여성들이 남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여자가 될 것을 강요하는 여성잡지의 선정적인 문구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성산업의 번창으로 가정 밖의 성적 유혹이 커져감에 따라 가정주부 역시 이러한 경쟁의 대열에 끼여야만 가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러한 논리는 나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회의감을 자아내게 했으며 우리 사회의 남녀관계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인가를 절감하게 하는 대목이었다.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이와 같은 성산업의 번창이 또 다른 성억압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향락 문화가 파급되면서 종전부터 내려오던 폐쇄적 전통과 성쾌락주의를 자극하는 현대적 성문화 사이에 더 큰 혼란을 야기시켜 성규범의 아노미 상태로 빠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아노미 상태의 성문화는 남녀간의 성관념을 더욱 혼란시켜 더 큰 억압 기제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이와 같은 역설이 나오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전통 속에서 남녀가 길들여져 온 결과, 남성은 본래부터 성본능이 강하고, 여성은 불감증에 가까울 정도로 성욕이 약한 존재라는 신화가 만들어진 것에 있다. 이 신화는 성차별적인 성규범이 마치 생리적인 차이에서 연유된 것으로 믿게 하여, 모순된 성문화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주입시키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남성의 매춘행위와 외도를 고치기 힘든 `남성적 성형태로 고착시켜 온 것이다.한편, 남녀간의 성은 단순히 두 사람간의 육체적·정신적 교류이기에 앞서 우리 사회에서 조건지어진 남녀간의 관계, 즉 불평등한 관계의 문제를 내포한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불리한 역할과 열등한 지위를 감수해야 하는 남성인 여성은 이러한 소유의 대상이 되는 관계에 길들여진다. 결국 이러한 성에 대한 의식이 여성을 남성의 지배에 자발적으로 순응하게 만들고, 남성에 대한 의존성을 키우는 강한 힘으로 작용하여 여성을 억압하게 된다..한편, 여성은 성을 사랑의 표현이라고 보지만, 남성은 성을 사랑의 유무에 상관 없이 성욕을 표출하고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본다. 남성은 성기 중심적인 성문화에 젖어 있고 여성은 남성 본위의 성관습에 수동적으로 적응해 왔다. 요컨대 여성의 열등한 지위는 남녀간의 애정관계에서 여성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을 부여하며, 그것이 여성으로 하여금 성관계에 있어서 남성보다 더 많은 갈등과 피해를 입게 하였다.현대에 와서 자유 연애가 활발해지고 성자유화의 풍조가 확산되면서 일련의 변화가 있기는 하나, 남녀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여성이 과거보다 성과 사랑의 자유를 보다 많이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남성에 비하면 큰 차이가 있다. 성자유화는 주로 남성의 성쾌락주의를 강화시키고, 남성의 성생활의 자유를 배가한다. 반면에 여성은 성과 사랑에 있어서 종전부터 내려오는 제도적·규범적 구속과 제약을 받기 때문에 설사 자유를 즐긴다 해도 그 대가를 치르게 하는 적지 않은 문제들을 안게 된다. 부부나 애인간의 관계 역시 이러한 남녀간의 현실의 격차 때문에 야기되는 불화가 적지 않다.이렇듯 남녀에게 이중적으로 작용하는 성윤리와 여성에게만 불평등한 역할과 열등한 지위를 감수하게 만드는 남성 중심적 사회 체제, 또한 전통적 성관념과 현대적 성관념이 공존하면서 발생하는 아노미 현상 등이 여성의 성을 억압하여 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여성의 성은, 특히 여성의 성기는 더 더욱 억압을 받았을 것이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자는 가장 억압 받아 왔으면서도 가장 거론하기 힘들었던 여성 성기를 소재로 억압의 탈피를 꾀하고 있었다.그 방법의 일환으로 여성들이 `보지 를 아무 거림낌 없이 말하게 하는 것이다. 즉, `보지 는 우리 신체의 일부분이므로 손이나 팔꿈치를 말하듯 아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