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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 ∼ 1951)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된다. -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중에서말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명제를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명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다. -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중에서철학을 뒤덮고 있는 구름의 전체는 한 방울의 언어 이론에로 응축된다. -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중에서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 - 말로 표현되지 않고 - 표현한 것에 내포되어 있다. - 비트겐슈타인철학은 왜 그렇게 복잡한가? … 철학은 전적으로 단순해야만 한다. 즉 철학은 우리가 어리석게 얽혀놓은 우리 사고의 매듭들을 풀어준다. 이 일을 하기 위해 철학은 이런 매듭들이 복잡한 만큼이나 복잡하게 움직여야 한다. 비록 철학의 결과는 단순하지만 철학의 방법은 단순할 수 없다. 철학의 복잡성은 주제의 복잡성이 아니라 우리가 매듭지어놓은 앎의 복잡성이다. - 비트겐슈타인대답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질문도 또한 말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물음을 물을 수 있다면 답도 또한 가능하다. 어떠한 물음도 물어질 수 없는 그러한 회의주의는 반박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가능한 모든 과학적 질문들이 대답되어진다 하더라도 인생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 어떠한 질문도 없을 때 이것 자체가 대답이 없다. 인생의 해결은 문제 소멸에서 보여진다. - 비트겐슈타인비트겐슈타인의 깊은 비관주의, 내적·정신적 고통의 강도, 자신의 지력을 몰아내는 무자비한 방식, 그리고 사람을 거부하는 무정함과 사랑을 함께 필요로 했던 그를 생각할 때 나는 자꾸 그의 삶은 지독하게 불행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숨을 거둘 무렵, 바고 그 자신이 그것은 멋진 것이었다고 소리쳐 말했다. 나에게 이것은 신비롭고도 감동적인 말로 느껴진다. - [노만 말콤의 회고록] 중에서철학의 이해 라는 교양 강좌를 . 단, 조금 지루해도 졸지 않고 들을 자신이 있으신 분들께^^;;) 그런데 알고 보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많은 현대 철학의 사조 중에 분석철학 이라고 이름 불리워 지는 철학의 한 사조였다. 즉, 우리가 교육철학 시간에도 배웠지만 분석철학은 그것의 비판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철학에 있어서 철학하는 방법을 바꾸어놓은 획기적인 사조였으며 20세기 영미 철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 중요성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도 아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러한 분석철학 의 시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비트겐슈타인. 철학계에 있어서 천재 중에서도 천재로 불리워지는 그이지만, 그의 삶은 어떻게 보면 특이했고 어떻게 보면 자유로웠으며 어떻게 보면 불행했다. 한명의 철학자로써보다는 오히려 한 밴드의 그룹명으로 더 잘 알려진 그의 삶과 사상을 되짚어 보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 ∼ 1951)은 1889년 빈에서 출생했다. 위로 네 명의 형과 누이 셋이 있었는데 그들 중 몇 명은 특히 예술적으로 모차르트 못지 않은 천재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학을 공부하여 철강산업을 일으킨 아버지와의 마찰로 세명의 형이 자살을 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어렸을 때에는 특별한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고 평범한 유소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기술고등학교, 기술전문대학으로 진학한 그는 처음에는 항공공학을 전공하기로 하고 실제로 비행기 엔진의 설계와 실험에 3년을 보내게 된다. 혹자는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계속 비행기를 연구했다면 우리는 라이트형제 대신에 비트겐슈타인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비행기 엔진을 연구하던 도중 공학을 배우게 되고 그 중에서도 수학에 심취하게 된다. 그런데 크게 보면 수학은 논리학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논리학은 철학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 발을 들여놓는다.1)..이 책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분석철학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분석철학의 형성의 발단은 오스트리아 비인학단의 논리실증주의와 흄 이래 경험론의 전통을 이어 받은 케임브리지 학파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분석철학의 형성의 발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언어학파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분석철학은 이상 언어 분석과 일상 언어 분석이라는 두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했고 이상언어분석이 먼저 등장했기 때문이다.그 중 비인학단(비엔나 써클)은 슐리크(M.Schlick), 카르납(R.Carnap), 노이라트(O.Neurath)등 비엔나 대학의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써클로써 논리실증주의를 대표하는 써클이다. 그리고 논리실증주의는 이상언어학파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비엔나 써클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가 마치 그들의 성서처럼 읽혀지고 논의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20년대 후반에는 비트겐슈타인도 이 모임에 조언을 하는 정도로 참여를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논리철학논고 = 비엔나써클 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뿐만 아니라 논리실증주의의 또다른 대표자로 꼽히는 러셀은 위에서도 나왔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었으며, [논리철학논고]의 출판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흄 이래 경험론의 전통을 이어 받은 케임브리지 학파라고 하는 것은 비인학단의 논리적 실증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20, 30년 전 무어, 비트겐슈타인 등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 케임브리지 학파를 형성한 것이라고 한다. 어디 한군데 비트겐슈타인이 빠진 곳이 없다. 그러므로 논리실증주의를 포함한 이상언어학파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영향을 아주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으며, 비트겐슈타인이 이 책을 통해서 제시한 철학적 발상 및 방법을 기초로 해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를 통해서 첫 번째타인은 언어의 의미에 관해서 그림의미론 을 펼치고 있다. 그림의미론이라는 것은 언어는 최소 의미론적 단위인 요소명제들과 그 진리 함수적 복합명제들의 총체라는 것, 요소명제는 가능적이며 원자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태의 그림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좀더 쉽게 말한다면, 언어는 명제들의 총체이며, 명제는 더 이상 분석되어질 수 없는 요소명제 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들 명제는 세계의 그림이며, 그러므로 세계는 요소명제들, 즉 원자적 사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사실을 그리지 않는 명제는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제일 앞에서 인용하였던 논리철학논고의 가장 마지막 말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말은 결코 진부한 표현이 아니다. 논리적 사색을 통한 하나의 결론이며,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존재한다는, 말할 수도 사고할 수도 없는 학설을 담은 형이상학적인 주장이다.이책, 논리철학논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비록 75쪽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어렵다고 한다. 문체가 축약적이고 간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 비트겐슈타인이 이 원고를 프레게와 러셀 두 사람에게 보냈는데, 프레게가 원고를 읽고 써준 답장에서 그는 프레게가 자신의 원고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논리철학논고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논리철학논고를 통해서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저작이 완전무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더 이상 해결해야할 철학적 문제는 남아있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는 철학계를 떠나게 된다.철학계를 떠나서 일단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그가 전쟁중에서 보았던 비인간화에 회의를 느끼고 종교에 심취하게 된 영향이 큰 것 같다. 심지어는 군생활에서 톨스토이의 복음서 를 늘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철학계를 떠나서 그가 선택한 직업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하지만 천재라고 해서 모든 일에 있어서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고, 램지(논리철학논고를 영어로 번역했던 사람)가 지도교수가 되어 비트겐슈타인의 박사학위 심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박사학위를 주는 것이 거의 결정된 사항에서의 심사였기 때문에 면접도 말이 면접이었지 실제적인 면접은 아니었다. 이 때 러셀은 비트겐슈타인과 절교상태였는데 훗날 내 생애에 이렇게 불합리한 일을 해본 적은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암튼, 이렇게 하여 비트겐슈타인은 학생이 아닌 학위를 받은 사람으로써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이듬해부터 비트겐슈타인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강사가 된다. 그의 강의는 굉장히 특이했다고 한다. 우선 그는 학생들이 밀물처럼 혹은 썰물처럼 자신의 강의를 왔다갔다 별 생각 없이 수강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15명 정도의 소인원을 자신의 기숙사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강의 방식 또한 미리 강의안을 준비하는 일 없이 항상 질문하는 식으로 강의를 하고, 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을 짜내서 강의를 했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한채로 오랫동안 있기도 하고, 놀라운 집중력으로 인해 탈진하는 일도 있었다.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강의를 학생들에게 받아적도록 했는데, 오늘날 [청색책과 갈색책]으로 알려진 책이 그 책이다. 이 책은 비공식적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서 케임브리지는 물론 옥스퍼드 대학 등에서도 널리 읽혀지게 되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이 알려지면서 뭔가가 왜곡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아무튼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강의의 내용들은 예전에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주장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 때 그랬던 것처럼 노트에 자신의 생각들을 적어가며 다시 원고를 쓰게 된다. 그리고 훗날 [철학적탐구]로 출판된 원고도 이 시기에 쓴 것이다. 하지만 케임브리지의 경직된 분위기도 그에게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넥타이를 매는 것을 싫어했으며
    인문/어학| 2003.04.06| 7페이지| 1,000원| 조회(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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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김옥균 평가A+최고예요
    {{{{{{{김옥균의 구체적인 연대기1851 충청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에서 출생 아버지는 안동김씨 김병태호는 古愚, 뒤에는 古筠1853(3) 천안군 원대리로 이사, 부친은 서당 훈장1854(4) 천자문 배움1856(6) 종숙 김병기의 양자로 감. 서울로 감1860(10) 김홍집 등을 사귐1861(11) 김병기가 강릉 부사로 부임.1866(16)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옴, 북촌에서 공부. 1870년경부터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감1872(22) 문과에 장원 급제, 성균관 전적이 됨.1874(24) 홍문관 교리가 됨. {기화근사} 저술시작1877(25) 박규수 사망1879(29) {기화근사} 완성, 오경석 사망1881(31) 11월 제1차 일본행. 후쿠자와 등을 만남.1882(32) 귀국 길에 임오군란 소식을 접함.가을에 다시 제2차 일본행(박영효와 함께)1883(33) 3월 일본시찰을 마치고 17만원의 차관을 얻어 귀국. 이조참의에 임명되고 管捕 鯨使겸 東南諸島 개척사도 겸함. 당오전의 폐단을 둘러싸고 묄렌도르프와 갈등6월, 서재필 등의 일본 유학생을 인솔하고 국왕의 위임장을 받아 제3차 일본행10월 호조참판이 됨1884(34) 3월, 3백만원의 차관에 실패하고 귀국.한성순보에 [治道略論]을 발표10.31 박영효 서광범 등과 정변을 모의 11.25 일본공사 다케조에와의 회담에서일본군의 동원 문제를 타결. 12.2 박영효의 집에서 거사 일자를 12월4일(음력 10월 17일) 로 정하고 세부 계획을 확정. 4일 정변을 일으켜 고종을 경우궁을 피신시킴. 5일 {조보} 에 개화당 조각 내용을 발표. 개혁안을 공포. 민비의 환궁 요구로 오후 5시 창덕궁으로 환공. 6일 오후 청병이 내습, 전투가 벌어짐 창덕궁에서 탈출, 다케조에와 인천으로 후퇴. 11.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1885(35) 4월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미국으로 감. 김옥균은 {갑신일록]을 집필.1886(36) 지운영이 암살을 위해 일본에 잠입, 기지로 모면. 일본정부에 의해 오가사와라 섬 으로 추방됨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양반출신 청년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 오경석 유흥기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개항 이후 개화파들은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참여하면서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세력 즉,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실현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정권과 타협아래 청과의 사대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급진개화파는 청에 대한 사대 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고 민씨정권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개화파는 개항 후 전개되는 나라 안팎의 정세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충의계를 통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개혁운동의 수단으로서 당시 서구의 근대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에게 적극 접근하였다. 특히 1880년 이래 조선정부의 해외시찰정책, 즉 일본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의 파견, 청으로의 영신사 파견 등에 박영효 김옥균 등 개화파가 적극 참여함으로써 세계의 정세흐름과 새로운 문명을 직접 확인하고 자각을 넓혀 나갔다. 그런데 민씨정권이 부분적인 개화정책을 실현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의 침탈이 강화되면서, 개화파의 평화적 개혁노력은 벽에 부딪혔다. 1882년 임오군란은 수구적인 민씨정권과 급진개화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급속히 냉각시켰다. 민씨정권의 요청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출병하여 봉기를 진압한 뒤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침략을 획책했고, 민씨정권은 청에 의지하여 정권유지를 꾀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는 큰 10월 19일에는 새정부가 앞으로 단행할 개혁정치의 내용을 담은 14개조로 된 ‘신정강’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1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2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3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4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5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6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7 규장각을 폐지할 것,8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9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할 것,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집행할 것,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이러한 내용을 갖는 정강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그 동안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 발전시켜온 개화사상과 그에 따른 정치적 개혁활동의 총체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명성황후가 청의 위안스카이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10월 19일 오후 3시경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공격하였다. 이때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개화파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본군인을 철수시켰다. 결국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군에게 사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이른바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측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데 대한 책은 치욕에서 벗어나 조선을 세계 각국 가운데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일원이 될 것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심초사하였다. 그는 근대적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도 강력한 현대적 국가가 되어야 함을 절실하게 바랐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고 새로운 기술의 채용에 의하여 정부와 일반 사회의 구투인습을 일변시킬 필요를 확신하였다. 그는 구미의 문명이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열국 간의 경쟁의 노력에 의해 점진 결과로 된 것으로서 수세기나 필요했으나, 일본은 일대간에 그것을 속성하였다고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일본을 모델로 하고자 백방 분주하였다. (閔泰瑗, {甲申政變과 金玉均}, [回顧 甲申政變])] 둘째, 온건 개화파와는 달리 그는 하루라도 빨리, 즉 급진적인 변화를 바랬다. 그것은 셋째, 그가 변화의 모델을 일본으로 삼았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양반지주(안동김씨) 출신의 엘리트였다. 그리하여 그는 위에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는 위에서부터 개혁을 시도하면 민중들은 그에 자연히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급진적으로 위에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던 것이다.(여기에는 그가 민중들의 힘을 너무나 무시했다는 갑신정변의 실패의 원인중 하나가 있다.) 또한, 그동안 조선이 청에 많이 의지해왔던 만큼 그는 청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천천히 개혁을 추진했던 청과는 달리 그는 서양문물을 급진적으로 받아들인데 성공한 일본을 변화의 모델로 삼았다. 넷째, 갑신정변때 발표된 14개의 정강을 살펴보면 그가 지향하였던 그의 시대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1조에서는 청에 대한 사대 관계를 청산하려 했고, 2조에서는 인민 평등권을 확립하며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를 확립하고자 했다. 3조에서는 근대적인 세제를 마련하려 하였으며 11조에서는 군사력의 강화를 추구하려고 하였다. 13조에서는 전제 정치를 지양하고 궁극적으로 입헌 군주제를 확립하려고 하였고 14조에서는 통치기구를 근대화시키고자 하였다. 다섯째,, 주자료는 {갑신일록})3) 古筠기념회, {김옥균전}(상) (1944)전보교결의 책과 대동소이.2. 북한1949년 백남운등, {조선민족해방투쟁사}봉건국가를 근대국가로 건설하려는 최초의 개혁운동이면서도 객관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의 의도대로 이용되었다는 점, 농민과의 연결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그 실패는 필연적이었다고 결론.김석형 등, {조선역사}(1953)개화당이 일제의 무력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킨 것은 일본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에 불과했으며, 개혁내용 자체도 매우 빈약했다.1955년 이나영, [1884년 갑신정변에 관한 연구]갑신정변은 위로부터의 미숙한 부르주아개혁운동이며, 부르주아민족운동의 서막으로서 당시의 뒤떨어진 사회경제상태 가운데서 조선사회 발전의 객관적인 합법칙성에 의거하여 봉건조선을 개변시키려 했던 것에 일정한 긍정적 측면이 있다.1956년 당중앙위원회 직속으로 당 역사연구소를 설립. 여기서 내세운 것은 당성과 역사주의원칙. 당성이란 노동계급과 인민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것이며, 역사주뮈원칙이란 ぢ사회역사 현상들을 그 발생, 발전의 구체적인 조건들과의 연관속에서 고찰하는 것으로서 노동계급의 입장과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っ1958년 3월 김일성의 연설 : ぢ다른 나라에는 모두 부르주아 혁명이 있었는데 왜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그것이 없는가. 중국에는 강유위나 양계초같은 부르주아혁명가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없었는가라는 문제를 역사가들에게 제기합니다.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김옥균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김옥균은 약삭빠른 사람들이 친일파로 규정하여 버렸습니다. 김옥균이 친일파인가 아닌가는 금후 보다 연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동양에서 최초로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걸었습니다. 김옥균은 자본주의일본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개명시키려고 하였던 것인데,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결국 그는 친일파로 규정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함께 토론해볼 여지가 있습니다.1959년 부르주아민족운동에 대한 과학토론회있었다.
    인문/어학| 2003.04.06| 10페이지| 1,000원| 조회(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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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철학] 서양의교육철학
    ★그리스의 인본주의 교육★그리스는 지중해 쪽에 위치한 곳으로, 약 100 여 개의 폴리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두 개의 폴리스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인데 두 나라의 사회정책은 대조적인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흔히 비교대상으로 많이 언급되곤 한다. 그리고 사회정책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교육 또한 각각 뚜렷하면서도 대조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우선 아테네는 인간중심의 창조적인 문화형성을 강조하였다. 비록 노예가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폴리스였지만 그래도 비교적 평등한 국가였으며 인본주의와 자유주의를 강조한 국가였다. 그리하여 교육목적 또한 신체적인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선을 가진 인간(칼로스카가토스) 의 양성에 있었으며 용기를 키우기 위해 체육을, 영혼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기 위해 음악을, 그리고 교양교육으로 3R'S를 가르쳤다. 특히 7∼16세까지의 아이는 교복이라고 하는 노예 가정교사가 교육을 하였다. 그리고 아테네의 여성교육은 현모양처를 키우는 데에 있었다.반면 스파르타는 전쟁 수행을 위한 사회체제를 갖추고 군국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교육 목표도 용감한 군인을 양성하는 데에 있었으며 엄격하고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교육내용은 체육, 체조, 무용, 음악 등이었고 특히 6살에 신체검사를 하여 건강한 아이는 국가에서 집단 교육을 하였으며 아니면 내다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여성교육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튼튼한 아이를 출산하는 여성을 양성하도록 하였다.이 시기의 교육자에는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있다. 소피스트들은 돈을 받고 가르치는 직업 교사로서 웅변술, 변론술을 가르쳤으며 그들의 교육목적은 변화하는 사회에 잘 적응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영원한 진리는 없다고 하여 궤변론자 라고도 불려 졌으며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최근 들어 그들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로 유명하듯이 지행합일을 주장하여 알면율적으로 잘 따라준다면 아테네 식의 교육이 효과가 훨씬 크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주위에 스파르타식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러한 학원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또 그러한 학원에 학생들이 다닌다는 것도 그렇고 스파르타식의 교육이 아주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학생들은 자유롭게 스스로 공부하기를 원하는 선생님의 과목보다는 매를 들어가면서 가르치시는 선생님의 과목을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이 시대는 창의력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억압적인 분위기에서는 절대로 창의적인 생각이 싹트지 않을 것이다. 사실 학생들에 대해서 일일이 파악하고 어떤 학생에게는 스파르타식이 어울리는지, 어떤 학생에게는 아테네 식이 어울리는지를 판단하여 가르치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자칫 편애를 하거나 아이들에게 차별을 둔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을 믿으면서 아테네 식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형성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소피스트의 실용론 등을 적절히 조화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 보다 크다고 본다. 물론 눈으로 봤을 때에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이겠지만 이 넓은 우주에서 아주 조그마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정확히 180도인지는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계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가르치고, 그것을 가르칠 때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의 방법을 통해서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로마의 교육★로마시대의 교육은 시대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왕정시대에는 실생활에 유용한 실용적이고 객관적인 교육에 관심이 있었는데, 로마 전통을 수호하는 가정교육을 중시하였고, 평화시에는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터에서 잘 싸울 수 기교육과 체벌을 금지하였으며 칭찬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이렇듯이 로마시대의 교육 중 가장 큰 특징을 한가지만 뽑아보라고 한다면 실용성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리스 시대에는 소피스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성과 불변의 진리를 강조하는 교육이 좀더 부각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등은 위대하게 평가되는 반면 소피스트들은 사변가 정도로 그들의 업적이 폄하되어 평가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반면 로마의 교육은 소크라테스 등의 사상보다는 소피스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소피스트들이 시대에 잘 적응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웅변술 등을 가르쳤듯이 로마시대에는 실용성을 강조하여 실생활에 필요한 웅변 등을 주로 가르쳤다. 사실 수학이라는 학문은 절대적인 진리에 아주 가까운 이성적인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단지 수학을 학문 그 자체로만 가르쳐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실제로 교육과정들을 보면 수학은 그 학문 자체를 하는 것이 목표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시키고 응용하는 것 또한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대학 수학과정에도 대수학이나 해석학처럼 수학의 진리 자체를 탐구하는 커리큘럼도 있는 반면 이산수학과 같은 응용 커리큘럼도 포함되어 있고 이것은 고등학교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학생들을 가르칠 때 예를 들어 통계나 확률 같은 과목에서는 실생활과 연관시켜 내기를 했을 때 이길 확률 정도는 학생들 스스로 계산할 수 있도록 할 수도 있고, 건축물 같은 조형물에서 쌍곡선이나 포물선의 형태 등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학생들로 하여금 알게 함으로써 수학이란 학문이 실생활과 괴리되어 있지만은 않은, 재미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할 수도 있다. 즉 교육에서 실용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목적이 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킨티니아누스의 사상 중에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보고 체벌을 금지하는 것이나, 개성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 등은 본받을 것이라고기관으로는 문법학교, 궁중학교, 라틴어학교 등이 있었다. 그리고 대학교육도 발달하였다.기독교적 교육사상의 의의는 우선 처음으로 민족적인 제한과 인종적인 편견의 속박에서 교육을 해방시켰고, 남녀 아동에게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교육관을 제시하였으며 도덕적인 교육과 실용적인 교육을 적절히 조화시켰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수도원에서의 금욕적 삶의 태도나 기사도에서의 도덕적인 실천행위, 직업기술교육의 발전, 대학의 성립 등은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중세의 교육은 기독교적 이상과 봉건제적 사회제도 속에서 교회와 봉건 영주들의 계급적 이해관계 때문에 오히려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인간의 가치상실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인간을 위한 학문과 교육이 무시되었고 지적인 탐구정신은 희박해졌다.교육이 사회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은 그리스 시대에서도 살펴보았던 바와 같다. 중세시대의 교육 역시 특수했던 그 시대의 사회제도에 발맞출 수밖에 없었으며 또 그 시대가 조금씩 변화함에 따라 교육 역시 변화하였다. 이 시기의 교육 중에서 가장 배울 것이 있다면 비록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더 타락하고 말았지만 그 시기의 교육의 정신들일 것이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평등교육의 정신이나 덕을 중요시하고 또한 그것의 실천을 중요시했던 정신, 그리고 특수한 직업교육의 정신 등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휴머니즘(르네상스, 인문주의)★신 중심이었던 중세시대는 스콜라 철학, 대학의 발달, 새로운 계급의 대두, 상업의 발달 등으로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때 이탈리아에서는 신중심의 사회에서 인간중심 사회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인문주의인데 인문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중요시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사고와 창의력을 중시하였다.이러한 사회의 변화에 따라 교육 또한 변화하였다. 인간의 가치가 무시되고 신학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었던 중세시대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되살리고 인간 이성의 가치를 그리스·로마의 고전 연구를 통해 재발견하는데 동시에 교회 혁신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대개혁운동을 일으켰다.그리하여 교육은 보다 근대적인 사회로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지적 움직임과 함께 근대교육관 형성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에 나타난 근대 교육관은 크게 여섯 개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최초로 초등의무교육 사상을 제시했다고 평가되는 아동의 취학 의무화 사상, 둘째, 공교육 제도의 기초를 마련하는 주장인 공교육 제도의 확립, 셋째, 풍부한 교육과정의 요구, 넷째, 체벌의 반대, 다섯째, 교직의 중요성 강조, 여섯째, 가정에서의 교육의 중요성 강조들이 바로 그것이다.그리고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신 중심 사상의 흔들리면서 과학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실험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이 중시되는 과학주의가 싹텄다. 그리하여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을 발표하였고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발명하여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고 하며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을 지지하였다. 한편 뉴턴은 미적분을 고안해낸 동시에 물리학을 발전시켰다.★실학주의★과학적 탐구를 활성화시킨 사상적 토대는 인문주의와 실학주의인데 실학주의에 입각한 교육관을 실학주의 교육사상이라고 한다. 특히 인문주의 교육이 형식주의로 치닫게 되고 신대륙의 발견 등 과학이 발전되기 시작하며 과학적 탐구 정신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실학주의가 발전하였다. 실학주의 교육의 특징으로는 실용성을 강조했다는 것,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지식을 다루었다는 것, 고전어 대신에 자국어를 가르쳤다는 것, 다양한 교수방법을 활용하였다는 것 등이 있다.한편, 실학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었는데 실학주의의 어떠한 측면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인문적 실학주의, 사회적 실학주의, 감각적 또는 과학적 실학주의로 각각 발전하였다. 인문적 실학주의는 고전을 통해 현실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고자 했고 사회적 실학주의는 사회생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인 생활을 준비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리하여 풍부한 교양을 지닌 신사를 만드는데 교육목적을 두었는데 이것은 귀족중심이라고 비
    교육학| 2003.04.06| 6페이지| 1,000원| 조회(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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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수론] 소수의성질
    1 . 소수, 합성수, 고합성수Ⅰ.소수(prime number)의 정의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양의 정수 p를 소수(prime number, prime)라고 한다.(ⅰ)p>1(ⅱ)p의 약수는 1,-1,p,-p뿐이다.Ⅱ.합성수(composite number)의 정의a∈Z, a>1a가 소수가 아닐때∃d,e∈Z s.t. a=de 1nⅳ.ⅲ을 이용한 증명증명)소수가 P1,P2,P3,…,Pn 뿐이라고 가정하자.P=max{P1,P2,…,Pn}ⅲ에 의해서 P보다 큰 소수가 존재한다. 이것은 모순.그러므로 소수는 무한히 많다.Ⅱ.짝수인 소수는 2뿐이다.Ⅲ.1은 소수가 아니다.1을 소수로 간주하지 않는 이유는 1을 소수로 취급했을 때, 가령6=2×3=1×2×3=1×1×2×3=1×1×1×2×3=…과 같이 되어 서로 다른 표현으로 소인수분해가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그렇게 되면 소인수 분해의 일의성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니까 1을 소수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소인수분해 의 일의성과 관련이 있다. (일의성이란 유일성과 같은 의미로서 단 하나 존재함을 의미하 는데, 즉 6을 예를 들면 6=2×3이나 6=3×2를 같은 경우로 보듯이 단 하나로 만 소인수분 해가 됨을 뜻한다.)Ⅳ.소수의 보편성우리의 숫자 체계는 10진법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진법에서도 동일한 성질을가진 동일한 소수가 존재한다. 즉,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사용한 60 진법이나 컴퓨터가사용하는 2진법에서도 소수는 존재한다.Ⅴ.소수를 구하는 방법한 소수에서 다음 소수가 나타나는 거리를 미리 예측하는 간결한 방식은 아직 발견되지않고 있다. 현대까지도 소수를 구하는 방법은 아주 오래전에 에라토스테네스가 생각해낸에라토스테네스의 체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 밖에도 소수만을 판별해 주는것은 아니지만 소수를 찾는데 유용한 몇 가지를 기술해보았다.ⅰ.에라토스테네스의 체그리스의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기원275∼기원194 그리스; 에라토스테네스는 별명이베타였는데 기하학에서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1등은 못eudo-prime): 2500년 전 중국의 정수론 학자들은 2^n-2가 n의 배수이면 n은 반드시 소수라고 생각했다. 340이하의 숫자 중 모든 합성수는 이 중국식 테스트에서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합성수 341은 2^341-2를 나누어 떨어뜨린다. 이러한 341과 같은 수를 유사 소수라고 한다. 홀수의 유사소수는 무한히 많고 심지어는 짝수의 유사 소수(161038등)도 무한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유사 소수들은 페르마의 작은 정리 공식에서 a의 다른 값은 대입합으로써 대체로 걸러낼 수 있다. 그러나 a에 어떤 값을 대입하더라도 모두 나누어 떨어지게 하는 합성수 n이 존재한다. 이러한 수를 절대 유사 소수라하는데 가장 작은 절대 유사 소수는 561이며 절대 유사 소수 또한 유사 소수처럼 무한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ⅲ오일러가 내놓은 공식들18세기에 오일러는 n^2+n+17이라는 공식을 내놓았다. 이 공식은 n에 0에서 15까지의 수를넣으면 유효하지만 16을 넣으면 합성수가 나온다. 그래서 오일러는 또 다른 공식인n^2+n+41을 내놓았다. 이것은 n대신 0에서 39까지의 숫자를 넣으면 유효하지만 n에 40을넣으면 합성수가 나와서 소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컴퓨터로 계산을 해 본 결과 오일러의 이 공식(두 번째 공식)이 1천만 이하의 소수를 얻는데는 47.5퍼센트라는 성적을 내고 있음이 밝혀졌지만 물론 소수만을 구하는 공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ⅳ울람의 낙서울람은 어떤 과학 학술대회에서 강연을 듣는 도중 낙서를 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때우고있었다고 한다. 그는 1부터 시계반대방향의 나선형으로 연속적인 정수들을 써나갔는데 소수들이 대각선을 이루며 생겨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17을 정 중앙에 놓고 17에서272까지의 모든 정수를 적어 넣을 경우 왼쪽 맨 아래에서 오른쪽 맨 위까지 대각선을 이루며 뻗어나가는 수는 모두 소수라는 걸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울람의 낙서 역시 소수의패턴과 소수를 발생시키는 공식을 알아내려는 시도일뿐 소수를 구하는 절대적인 것이라소수일 때 메르센느 수는소수임을 알 수 있지만 다섯 번째 소수인 11을 취할 때 메르센느 수는 소수가 아닌 합성수이다. 메르센느는 n이 6번째, 7번째, 8번째 소수를 거듭제곱 지수로 취할 때 거기서 얻어지는 메르센느수는 소수라고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그가 소수라고 주장한 2^67-1은 250여년 동안 그 수가 소수라는게 의문시되지 않았다가1903년 에릭 템플 벨에 의해 193707721×761838257287이라는게 밝혀졌다고 한다.메르센느 수가 모두 소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소수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주큰 정수가 소수인지 아닌지 확인을 할 경우 메르센 수를 많이 계산해 보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 수나 소수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보다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ⅵ.페르마 소수양의 정수 m에 대하여 2^m+1이 소수이면 m=2^n(n≥0)인데 이런 꼴의 소수를 페르마소수라고 한다( 2^2^n+1(n≥0)를 페르마 수라고 한다.).Ⅵ.소수의 발생 빈도0-10사이에는 4개(40%)의 소수가 있고, 0-100사이에는 25개(25%), 0-1000사이에 168개 (16.8%), 0-10000사이에 1,229개(12.3%), 0-100000사이에 9592개(9.5%), 0-1000000사이에는 78,498개(7.8%)의 소수가 있다. 이처럼 소수의 백분율은 점차 감소한다. 그리고 소수가 커 질수록 다음 소수가 나오는 사이는 벌어진다. 즉, 소수가 발생하는 밀도는 자연 로그에 반 비례하는 것이다. 소수정리(가우스가 추측해내고 에어디쉬와 셀버그가 증명한 것)에 의하면 특정수 n근처에 있는 2개의 연속되는 소수의 평균 정리는 n의 자연 로그에 의해서 추정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n=100일 경우 n의 자연로그는 약 4.6이다. 따라서 소수 정리의 예측에 의하면 100근처에 있는 숫자들은 평균 4.6개에 1개 꼴로 소수가 나와야 한다. 가령 75와 125 사이에 있는 숫자 중에 소수는 9개(79,83,89,97,101,103,107rmat F(382447), GF(382447,3), GF(382447,12), GF(382443,6)13 361275*2^361275+1 108761 DS 98 Cullen14e 104917*2^340181-1 102410 g63 9915 302442855*2^336211+1 101219 gf 9816c 2559*2^324001+1 97538 g174 0017 42779*2^322908-1 97210 g23 9918b 506664^16384+1 93467 g0 00 Generalized Fermat19a 498904^16384+1 93357 g0 00 Generalized Fermat20g 220063*2^306335-1 92222 g163 9921 9*2^304607+1 91697 g23 98 Divides GF(304604,6)22 3*2^303093+1 91241 Y 98 .Divides Fermat F(303088); GF(303086,6), GF(303092,10), GF(303088,12) [g0]23b 162192^16384+1 85362 g78 00 Generalized Fermat24 7*2^283034+1 85203 Y 9825c 133858^16384+1 83995 g181 00 Generalized Fermat26e 114024^16384+1 82854 g78 99 Generalized Fermat27 101830^16384+1 82050 g78 99 Generalized Fermat28 27253*2^272347-1 81990 g23 9829b 267763*2^264115-1 79512 g59 0030 67234^16384+1 79096 g0 99 Generalized Fermat31 262419*2^262419+1 79002 DS 98 Cullen32 9183*2^262112+1 78908 gr 9733g 29*2^261031+1 78580 gt 9934c 144817*2^258857-1 77929 g59 0035e 81517*2^28 0068b 7*2^177977-1 53578 gb 0069f 501*2^176392+1 53102 g146 9970 60541*2^176340+1 53089 Y 9771 39781*2^176088+1 53013 Y 9772c 7*2^173489-1 52227 gb 0073 295*2^172802+1 52022 g74 9974d 5*2^172300-1 51869 gb 9975 73*2^171854+1 51736 gt 9876e 65*2^171197+1 51538 gt 9977b 14459*2^171144-1 51524 g189 0078 127*2^170393-1 51296 TG 9979c 99*2^169723+1 51094 g50 0080b 387420488*3^107028+1 51074 g15 0081d 7*2^169085-1 50901 gb 9982 159821*2^168770-1 50811 g59 9983e 65*2^168109+1 50608 gt 9984 48833*2^167897+1 50547 g123 9985b 387420488*3^105899+1 50536 g15 0086 74269*2^167546+1 50442 g123 9987 2*3^105106+1 50149 gb 9988 285*2^165957+1 49961 g57 9889 111253*2^165379-1 49790 g59 9990g 3*2^164987-1 49667 gb 9991 21*2^164901+1 49642 g132 9992 49521*10^49521+1 49526 g157 99 Generalized Cullen93b 1102280^8192+1 49499 g78 00 Generalized Fermat94g 1024528^8192+1 49239 g78 99 Generalized Fermat95 1002774^8192+1 49162 g0 99 Generalized Fermat96c 972060^8192+1 49052 g103 00 Generalized Fermat97d 902156^8ngk)
    자연과학| 2003.04.06| 12페이지| 1,000원| 조회(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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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학교육] 수학근대화운동
    독일의 수학교육 근대화 운동의 성과는 함수개념의 강조 , '공간 개념의 중시 라는 내용면 보다도 그것을 가져다 준 사상적 자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전까지의 자각이 결여된 실천에 바탕을 주어 새로운 비약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Klein은 독일의 수학교육 개선의 시조라고 할 수 있으며 Kline의 동료였던 W.Lietzmann은 독일의 수학교육 근대화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상징하는 세 인물이 Euclid, Heron, Pestalozzi 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들의 교육 사상을 각각 아카데미시즘, 리얼리즘, 휴머니즘이라 부르기도 한다. Euclid의 이론 수학과 Heron의 실천수학을 대등하게 보고 거기에다 Pestalozzi의 교육학에 의해 이들을 포괄하는 것이 독일의 수학교육 근대화 운동의 성격을 특징짓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1)아카데미시즘학문을 통해서 금전이나 실제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학문을 학문으로서 추구하는 것이 훌륭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카데미시즘을 대표하는 사상가인 유클리드는 제자로부터 기하학을 배워서 무엇을 얻는가? 란 물음에 동전을 주어 내쫓았다고 하는데 이런 유클리드의 정신은 많은 수학자에 의해 이어져 오고 있다.이러한 수학교육의 관점은 일반적인 교육적 입장에서 볼 때 훌륭한 것으로 비교적 솔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아카데미시즘이 대중에게 얼마나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수학교육의 목적은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이 있는데 아카데미시즘은 내재적 목적에 치우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아카데미시즘이 오늘날에도 수학교육의 가장 중요한 이념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현대적 아카데미시즘은 고전적 아카데미시즘의 의미와는 다르게 지적 활동을 체험하면서 즐긴다고 하는 말하자면 활동주의적인 아카데미시즘이 표방되고 있다. 특히 아카데미시즘을 활동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실천적으로 전개한 대표적 학자가 Z.P.Dienes 인데 수학이 생활에 실제적으로 그다지 많은 도움을 주지 않는 과목임을 인정하면서, 아동들이 수학을 아름다운 구조로서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우리는 오늘날 수학을 입학시험의 선별수단으로 삼아 많은 아동들을 괴롭히고, 아동들이 수학 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손을 내 저을 정도로 의무적인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카데미시즘은 수학은 실용성 뿐만 아니라 지적, 심미적, 품성 도야적 관점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이며, 즐길 가치가 있는 것임을, 그리고 아동 자신이 본성적으로 수학을 즐기는 경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2)리얼리즘20세기 초의 수학교육 개선운동은 새로운 산업시민사회의 대두, 중등교육의 대중화를 계기로 전통적인 아카데미시즘에 가해진 반성이었고 그래서 리얼리즘은 아카데미시즘과 대등한 지위로서의 수학교육 이념이 될 수 있었다.리얼리즘은 수학적 명제의 진위를 판정하는 데 있어 아카데미시즘과 전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아카데미시즘에서 진리의 심판자를 논리로 본 반면 리얼리즘은 진리의 심판자를 자연으로 봤는데 예를 들면 유클리드의 제 1공준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외에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 역시 삼각형을 종이로 오려내어 각을 잘라 모아 본다든가, 각도기로 실제로 측정하여 검증한다.이러한 리얼리즘의 대표자로 헤론을 들고 있는데 헤론은 수천년 동안 전해 내려오던 실제기하를 총괄했으며 그러한 기하는 고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의 실용적인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써 수학교육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는 이러한 헤론의 정신은 학교수학에서 전연 무시되고 아카데미시즘만이 왕좌를 누려왔다.여기서 부딪치는 한가지 어려운 문제는 실제수학을 학습하는 아동의 초기 학습활동을 그것과 전연 이질인 이론수학과 어떻게 원만히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수학에서는 진리판정을 할 때 실험, 실측이 실제 검증 수단이 되며 그러므로 아동의 학습활동은 활동적일 수밖에 없고, 활동적 학습방법이 수학적인 개념형성과 본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통찰에 비추어 활동적인 실제수학의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3)휴머니즘유클리드나 헤론은 고대의 수학자였지만 J.H.Pestalozzi는 근대 스위스의 교육사상가로서 더욱이 수학에는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수학을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수학교육은 아동의 밖에 있는 수학을 아동의 머릿속에 주입하는 것이 아니고, 아동이 본래 지니고 있는 힘에 의해서 아동에게 수학을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활동주의적 수학교육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교육학| 2003.04.06| 2페이지| 1,000원| 조회(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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