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림사건.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의 발표로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은 관련자 임석진(당시 34세, 철학박사)이 귀국하여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다. 검찰의 공소장에 의하면 북한은 1957년부터 비교적 통행이 자유로운 동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대남공작 경험자인 박일영을 동독대사에 임명하였다. 또한 조선노동당 연락부 대(對)유럽공작총책인 이원찬을 상주시키고 막대한 공작금을 동원하여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에 재학 중인 유학생 및 각계각층의 장기체류자들에게 공작을 시작하였다.이들 관련자들은 서신·문화·주민의 남북교류와 미군철수, 연립정부수립, 평화통일이 불가능할 때의 무력남침 등에 대비한 간첩교육을 받았다. 그 중 11명은 평양에 다녀온 후 해외유학생·광부·간호사 등의 명단을 입수하여 평화통일방안을 선전하고, 국내 민족주의비교연구회와의 연계 및 각계 요인들에 대한 포섭, 선거에서의 혁신인사 지지 등의 지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1967년 12월 3일 선거공판에서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하여 조영수·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강빈구·윤이상·어준에게는 무기징역 등 피고인 34명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상주장학관을 급파하여 유학생 및 해외인사들의 반정부활동을 감시하였다. 그러나 공소장의 내용과는 달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현재까지 주장하고 있다. 사건 당사자들은 관련자들을 처음 만났으며, 평양을 방문한 적도 없고, 북한으로부터 간첩활동을 하라는 지령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간첩단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현재 재평가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보면 이 사건 역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확한 재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박정희 정권이 6·8 부정선거 등으로 민심을 잃고 곤혹스러운 시기였던 1967년 7월. 교수·유학생·음악가·화가 등 200여명이 검거되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 이른바 '동백림거점납치로 인한 국제적 망신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우리 나라 최대의 공안조작사건으로 불리고 있는 동백림사건. 대다수의 국민들 기억속에서 아직도 반한(反韓)인사로 인식되어온 음악가 윤이상에 대한 명예회복 논쟁이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대두되고, 당시 유학생으로 연루된 한 교수는 '중앙정보부가 만든 코미디'였다고 단정하는 동백림사건!김종대 교수. 그는 이 동백림사건에 연류되어 투옥됐던 그가 중정이 만든 코미디였다고 단정을 한 것이다. 밑의 글은 김종대 교수가 기고했던 글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1960년대 나는 서독에 유학하면서 분단된 독일 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동서독간에 대학생 교류가 있었는가 하면, 냉전시대라고 하지만 ‘모스크바 2주여행, 파격적인 가격!’운운하면서 크레믈린궁을 배경으로 한 광고물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남북한의 극한대립을 독일사람들은 의아해 하고 안타까워 했다. 이에 소수 독일거주 한국인들은 가능한 통로를 이용해 남북간 대화를 유도하고 상호 이해의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먼 장래에 통일의 초석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C학형과 함께 동베를린의 훔볼트대학에 교환교수로 체류중이라는 ‘김일성대학의 이교수’를 동베를린에서 만날 수 있었다.그는 우리를 위해 음식상을 차렸다. 평양에서 시베리아 철도로 수송해 왔다는 오곡에 술까지 곁들인 식탁을 대하고 우리는 이국 하늘 밑에서 우리 전통음식의 빛깔과 냄새, 그리고 그 풍성함에 순간적으로 압도됐던 게 사실이다. 우선 그들이 권하는 개성인삼주와 뱀술을 마셨다. 일단 일이 그렇게 된 이상 괜히 찜찜한 마음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젊은 우리는 기분좋게 폭식에 가까운 식사를 했다.그리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남북의 분단현실을 논의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그들이 환대하는 목적이 점점 선명해졌다. 예컨대 “6·25동란은 한국과 미국의 북침에서 비롯되었다”는 등의 주장을 늘어놓는 식이었다. 그 경직된 사고를 고쳐놓을 수 있을 만큼 격의없이 대화할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그것으로 그들과이 있고 몇년이 지난 1967년 초여름, 나는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독일에서 한국으로 연행돼 조사받고 기소돼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됐다. 어느날 나는 ‘인간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지며 독방에서 면벽한 채 상념에 잠겨 있었는데, 사법연수생으로 보이는 20여명의 견학그룹이 내 감방 앞에 나타났다.“동베를린을 거점으로 간첩활동을 하다 검거된 해외유학생 중의 한사람입니다” 교도소장이 나를 소개하자 그들은 좀 더 가까이서 나를 관찰하려고 좁은 철창 틈으로 서로 머리를 부대꼈다. 나는 마치 밀림에서 문명인들이 놓아둔 덫에 걸려 인간세계의 철창에 갇힌 희귀종 맹수인 듯했다. 감방 문위에는 ‘요 주의’ 푯말이 붙어있었다. 나는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서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호기심을 해결했던지, 혹은 내가 곧 시국사범으로 처형되리라고 마음 속으로 결론을 내렸던지 연민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들의 표정이 하도 진지한 바람에 나는 어이가 없어 그만 참지 못하고 “하하하” 큰 소리로 파안대소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그들은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하더니, 나에게 정신이상 현상이 나타났다며 나즈막히 옆 동료들과 속삭였다. 이처럼 나는 영락없는 오해와 착각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그들이 떠난 뒤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두 동강이 난 조국의 한 부분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동베를린으로 갔다가, 이미 갖고 있던 조국마저 잃어버릴 위험한 지대로 굴러떨어졌다는 착잡한 생각이 엄습했다.당시 김형욱씨의 중앙정보부는 권력의 핵이었다. 그가 그 정도 권력을 유지하려면 큼지막한 사건들을 찾아내거나, 없으면 만들어내야 했을 것이다.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간첩단 사건’이라는 엄청난 제목으로 국내 반독재세력을 잠재우려 했으리라는 추측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동베를린 사건을 다룬 검찰이나 사법부 역시 독일 등지의 세계감각을 익힐 기회가 없었을 뿐더러 우리나라 법관들이란 대개 대학과정을 도외시한 채 법전만 암기해 자격을 얻은 경우가 많아 그들이경우도 왕왕 있었다. 게다가 중앙정보부의 힘에 밀려 구형과 언도가 모두 일종의 코미디에 불과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상정할 수 있지 않은가.이 ‘거창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엔 대개 심장병이나 암으로, 혹은 우울증으로 만년을 해외에서 시달리다 사망했거나, 혹은 조국을 영원히 등지고 외국인과 결혼해 해외에 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받아 반한감정으로 일관하는 인사도 있는 것으로 안다.나는 그나마 살아남은 몇사람 중의 하나로 이렇게 회고의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나역시 지금까지 시민권 행사에 적지 않은 불편을 겪었다. 예를 들면, 박정희 통치시엔 아예 여권을 받을 수 없었고 전두환 시대에 우여곡절 끝에 단수여권으로 일부 지역에 한해 여행할 수 있었다. 노태우 시대에도 여권 신청 때면 알음알음의 미묘한 통로를 거쳐야 했다. 소위 ‘문민시대’가 열린 뒤 나는 여권을 갱신하면서 그런 통로를 거치지 않아도 되겠거니 기대했으나 역시 안기부 신원조회에 걸려 그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었다.내가 지금 여권을 갱신하려 할 때 소위 ‘국민의 정부’가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하다. 나로선 희망적으로 생각하지만 안되면 이젠 평생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내 자신의 아이러니를 만끽할 여유마저 생겼다. 패잔병의 훈장처럼 ‘꼬리’를 달고 평생을 살아가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그러나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내가 왜 간첩사건에 연루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작곡가 윤이상씨나 이응로화백 등도 마찬가지다. 이분들도 조국의 분단현실을 안타까워 하고 더 나은 조국의 미래를 열어보려 애쓴 분들이며 해외에서 사망할 때까지 한국을 사랑했으며 다만 당시의 비민주정부를 증오했을 따름이다. 결국 이들에 대한 정부의 잘못된 인식이 이들을 오히려 친북성향의 인사로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른다.15세기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는 이단자로 처형되면서 화형에 필요한 화목을 가져오는 순박한 노파들을 보고 “단순한 성자여!”라고 중얼거렸다. 거대한 권런 노파처럼 행동한 법집행자들에게 이미 고인이 된 사건 연루자들은 얀 후스의 독백을 내뱉었는지도 모를 일이다.동백림 사건’으로 한국은 오랫동안 그 이미지를 크게 훼손당해 왔다. 비단 이 사건뿐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이젠 다수 국민이 알고 있다. 김대중 납치사건도 같은 경우일 것이다. 지금 그분이 대통령이 되어 그 배후를 파헤치려 한다. 이 납치사건과 광주사태만을 현 정부가 관심있게 처리한다면 이것 또한 오해의 여지를 남길 수 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같은 그로테스크한 코미디도 이젠 막을 내린다고 공식 선언해야 한다.그리고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보자면, 지난 73년 최종길 서울법대교수의 의문사 사건과 그 배경이 된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과 같은 과거의 석연치 않았던 모든 사건들을 재조명하는 일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역사의 큰 흐름을 읽고 죽은 자들의 영혼을 달래주고 살아남은 자의 상처를 쓰다듬어주는, 그래서 모두를 포용하는 큰 정치가 지금 정부가 내건 ‘제2의 건국’의 정신을 이뤄야 한다.당사자들은 대부분 역사의 비극이자 희대의 코미디였던 이 사건을 기억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개 60대 노년에 접어들고서도 옛일을 회상하는 것이 두려워 서로 연락을 끊고 산다는 이들은 이렇게 입을 모아 말했다관련자 중의 어느 누구도 간첩이 될래야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실제 그런 행위를 한 적도 없다.따지고 보면 절규에 가까운 신원호소다. 물론 정밀검토를 거칠 일이다. 다만 50년대말-60년대초 독일, 프랑스 유학생으로서 동베를린 또는 평양을 오간 실정법위반 사실에 대한 인정과 그러나 북한편에 서서 반 국가행위를 한 적은 없다 는 부인 사이에 놓인 아슬아슬한 거리가 눈길을 끈다. 이들은 그때 북의 대사관을 방문하게 된 동기로 이렇게 말하였다.우리 세대에 통일을 못 이루면 통일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패전국 일본은 소니 가 유럽에 진출하는 등 엄청나게 발전하는데 우리는 무슨 죄가 있어 남북이 갈려 으르렁거리느냐는 울분이 컸지요. 여기에, 통일을 위해선 공산주의를 직 겁니다
박정희 정권 18년을 통하여 가장 오랜 기간 그리고 가장 많은 의혹과 물의를 빚은 사건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인혁당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 역시 모든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법대로 처리된 것이었다. 검찰의 기소단계에서부터 제 1심, 항소심, 대법원의 확정판결 그리고 법무부장관의 확인을 거쳐 사형집행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이 처리된 사건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혁당 사건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내외로부터 커다란 의혹을 샀다. 일부 사람들은 인혁당 사건이란 조작된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했다.관련 피고인 8명이 대법원의 판결이 있고, 스무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처형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그리고 25년이 흐른 오늘까지, 인혁당 사건의 진위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 되고 있다.인혁당 사건이 맨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64년 8월 14일이다. 이날 김형욱 중앙 정보부장은 기자회견을 소집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은 전국에 수배 중에 있다."며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남한 내 지하조직 사건이라는 것이 사건발표의 요지였다.1차 인혁당 사건이 발표되던 64년은 김종필과 일본외상 오히라의 비밀협상 사실이 드러나면서, 굴욕적인 대일외교에 반대하는 학생, 지식인 세력과 한일회담 재개를 앞둔 정부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던 때였다.그 와중에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발표한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3.24 이후의 학생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한 이 인민혁명당은 1962년 1월 우동읍 집에 서 북괴로부터 특수사명을 띠고 남하한 간첩 김영춘의 사회로 통민청 중앙위원장이 던 우동읍과 동맹간사 김배영, 김영광, 민민청 간사장이던 김금수, 동 경북 간사장 도예종, 사회대중당 간사였던 허작, 전진보당원 김한득, 빨치산 출신 박현채 등이 참가한 가운데 창당 발기인회를 갖고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 경제 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 북괴로동당 강령 규약을 토대로 인민혁명당의 새 강령과 규약을 채택함으로써 발족하였다. 인혁당은 창당후 조직을 확대해오다가 1964년 4월 북괴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동당 중앙상임위원인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함과 동시에 학생데모를 4 19와 같은 혁명으로 발전케 함으로써 현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에서 관련자들을 조사하다가 1964년 8월 18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 사건이 정보부의 손을 떠나 검찰에 넘어간 뒤부터 인혁당 사건은 묘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정보부가 주장한 것처럼 사건이 그렇게 북괴의 지령을 받은 어마어마한 국가보안법 사범이 아니라는 점과 이로 말미암은 검찰내부의 분규 및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설 등이 나돌기 시작했다.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혁당 사건은 그 결과로 다시 한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네 명의 담당검사가 만장일치로 공소를 기각한 것이다.그들은 "관련자들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불온단체를 조직했다는 혐의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었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고 항명의 경위를 밝혔다. 최대현 검사를 제외한 3명의 검사는 기소거부와 함께 사표까지 제출했다. 이렇게 되자 검찰과 중앙정보부는 발칵 뒤집혔다. 대규모의 국가보안사범이라고 대대적인 발표를 했는데 담당검사들이 무혐의라고 손을 들고 말았으니 수사당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네 명의 담당검사가 만장일치로 공소를 기각한 것이다.고문폭로에 검찰 측에서도 조사에 착수, 일부 사실들을 확인했다. 기소단계에서부터 말썽이 많았던 인혁당 사건은 우여곡절을 거쳐 검찰은 서울고검의 한옥신 검사로 하여금 사건의 재수사를 지시했다.애초의 연루자 47명, 그러나 판결은 도예종을 포함한 13명에 대해서만 유죄가 선고됐다. 죄목도 반국가단체 구성의 국가보안법 위반에서 반국가단체의 찬양, 고무 등의 반공법 위반혐의로 공소장을 경미하게 변경했다. 대법원에서는 이들예종에 대한 3년형을 최고로 선고했고, 이로써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당초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발표했던 어마어마한 사건은 용두사미격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그리고 10년 뒤, 인혁당 사건은 부활한다.1972년 박정희에게 영구 집권의 길을 열어놓은 유신헌법이 발표되고 처음 1년, 유신체제는 별다른 저항없이 순항하는 듯 했다. 그러나 힘의 논리는 그만큼의 저항을 불러왔다. 강압을 통한 박정희 영구집권 체제는 서울대 문리대의 시위를 시작으로 한 대대적인 유신철폐운동의 벽 앞에 부딪혔다. 재야 민주인사들의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은 열흘만에 30만명을 넘길 만큼 국민들의 호응을 받았고, 종교계에서도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 등을 통해 유신반대의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었다.1974년 1월 8일, 방학중임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선 전남대생 1천여명의 개헌요구 데모가 벌어졌다정부는 유신헌법이 보장한 대통령 비상권한인 긴급조치권의 발동으로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봉쇄하려 했지만 반체제의 불길은 수그러질 줄 몰랐다.긴급조치권 등을 통하여 학생데모와 관련, 정부가 대공관계와 연계된 모종의 강경책을 쓰고 나오리라는 전망이 감지되었다. 그 같은 우려는 3주일 후인 4월 25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사실로 드러났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발표한 내용은 예상한대로 학생데모의 배후에는 공산당의 조종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10년만에 다시 듣는 '인혁당'이 그것이었다."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재건위 조직과 재일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1974년 4월 3일을 기해 현정부를 전복하려 한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이들은 북괴의 통일전선 형성공작과 동일한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권수립을 목표로 했으며 과도적 정치기구로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획책했다."10년만에 등장한 '인혁당', 그러나 인혁당 사건은 10년 전인 그때와 혐의 사실이 비슷했다. 학생들의 반정부데모가 뚜렷해질 시기에 배후조종세력으로서 학생시위를 공산혁명도, 노동자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은 점이 공통점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민청학련 사건에는 인혁당 뿐 아니라 윤보선, 지학순, 김동길, 김지하 등 각계 명망가들도 학생데모의 배후조종자로서 함께 기소되었다는 것이다.민청학련과 관련돼 구속된 인원은 1,024명, 긴급조치 하의 판결은 가혹했다. 이철, 유인태 등 학생운동 주동자와 김지하 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 됐고, 무기징역 7명 총 32명에 대해서는 무거운 형량이 내려졌다. 그러나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열 달이 채 못되어 전원 석방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학생이나 익히 알려진 명망가들이란 점 때문에 국가변란을 꾀했다는 죄목은 국민들로부터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석방의 환호뒤엔 숨죽여 통곡하는 이들이 있었다. 국민들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얼굴들. 인혁당재건위 즉 민청학련의 배후조종으로 잡힌 2차 인혁당 23명의 가족들이었다. 민청학련의 배후라는 인혁당 관련자들은 처음부터 민청학련 사건에선 소외된, 관심밖의 낯선 인물들이었다. 실제 재판과정에서도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 심리는 분리돼 진행되었다.74년 5월 27일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인혁당사건의 피의자는 모두 23명. 내용은 다음과 같다."인혁당은 [남한에 강력한 지하당을 조직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61년 남파된 북괴간첩 김상한이 재남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1962년 1월에 조직한 지하당이다. 인혁당의 조직과 활동상황은 1964년 6 3사태 배후조종자로 인혁당 관련자들이 검거됨으로써 처음으로 드러났는데 당시 김상한과 재정책 김배영이 1962년 5월 월북하고 없었기 때문에 검거된 자들은 고문에 의한 조작설을 유포, 법정투쟁을 통해 극히 경미한 형을 받았다.그 뒤 1967년 김배영이 인혁당 재건지령을 받고 다시 남파되었다가 검거되어 인혁당의 진상이 뒤늦게나마 입증되었으나 일사부재리의 원칙 때문에 다시 처벌할 수 없었다.인혁당은 그 뒤 지하로 잠복했다가 1972년 7월 4일 남북대화의 시작을 틈타 지하활화, 1973년 10월 이후의 학원소요와 유류파동, 개헌청원서명운동 등이 일어나자 제2의 4 19로 사회혼란을 조장, 민중봉기로 정부를 전복함으로써 적화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라고 속단, 인혁당 재건을 완료하고 학생을 선동, 폭력에 의한 정부전복을 기도하다가 검거된 것이다."비상보통군법회의를 거쳐 항소심인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이들이 받은 형량은 사형 8명, 무기징역 7명 , 징역 20년 4명, 징역 15년 4명 등 하나같이 중형이었다.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수사와 재판은 파행적이었다. 민청학련의 배후조종의 혐의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과 분리되어 재판은 진행되었다. 수사는 끝까지 중앙정보부 수사관에 의해 이뤄졌고, 가족면회는 금지됐다. 가족 중 단 한사람만이 참관할 수 있었던 법정에선 반론의 기회도 없었다. 사실심리 절차가 무시되기도 했다. 파행적인 재판 속에서도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힌 인혁당 관련자의 가족들은 어느 한곳 호소 할 데가 없었다. 그러나 가족들의 구명운동은 백방으로 펼쳐졌다. 구명운동으로 중앙정보부까지 불려갔던 가족들은 다시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공판기록이 변조된 것이다. 조작된 공판기록 부분은 법정증인의 한 사람인 김종길 변호사에 의해서 확인됐다. 그러나 최종판결은 변조된 공판기록을 토대로 선고됐다. 그리고 상고는 기각됐다. 대법원에선 군법회의에서 내려진 중형을 원심 그대로 확정 판결한 것이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겐 사형이 내려졌다.그리고 그날 오후, 고려대엔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됐다. 75년 4월 8일의 일이었다. 이날을,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의 인혁당 관련자들과 그 가족들 앞엔 또 하나의 파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법원의 상고가 기각되고 채 스무시간도 지나지 않은 새벽, 8명 전원에겐 사형이 집행됐다. 그들에겐 재심의 기회도, 탄원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날 가족들은 사형집행일인지도 몰랐다. 사형집행 소식은 이틀이 지나서야 언론에다.
71년 8월 23일 서울이 발칵 뒤집힌다. 군복을 입은 신원을 알 수 없는 23명의 무장요원이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진입한 것이다. 공비침투라는 군당국의 발표를 들은 시민들은 한바탕 전쟁의 공포에 휘말리게 된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대기중이던 군인과 총격전 끝에 청와대로 향하던 이들은 수류탄 자폭으로 끔찍한 최후를 마친다.그러나 이들은 공비가 아닌 북한 주석궁 침투를 목적으로 비밀리에 지옥훈련을 받은 실미도 특수부대원으로 밝혀진다. 기간병들을 사살하고 청와대로 진입하려던 실미도 특수부대 난동사건은 진실을 밝힐 기회도 없이 역사속에 흔적도 없이 묻혀 버린 것이다.북파목적으로 창설되었다는 실미도 특수부대. 정식 명칭은 2325 전대 209 파견대였다. 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해서 '684부대' 라고 불렀다. 특수부대 창설은 68년 김신조가 이끄는 북한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던 1·21사태에서 비롯된다.김신조를 선봉으로 한 북한무장공비 31명이 대통령과 정부요인을 암살할 목적으로 청와대앞 3백미터까지 잠입한 이사건은 당시 국내외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들은 한국군 특수부대 복장으로 위장한 뒤 서부 휴전선을 넘어 산을 타고 남하하여 송추 일영쪽을 거쳐 세검정에 이른 다음 자하문 고개까지 올라왔다. 이때가 밤 11시쯤. 청와대와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까지 잠입한 것이다.그러나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수상한 자들이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고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게 된다.정체가 드러나자 이들은 검문경찰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며 일대 접전을 벌인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한다. 무장공비들은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져 북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한다. 군경은 합동으로 일제수색작전을 펼친끝에 공비 29명을 사살한다. 나머지 한명은 수류탄으로 자폭하고 민가에 숨어있던 김신조는 생포된다.우리측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는 등 104명의 인명피해를 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250만명의 향토예비군을 창설했고 학생들에게 교련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미국대통령 특사가 방한하여 양국간 안전보장을 위한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워싱턴에서는 제1차 한·미 국방장관 회의를 열어 연례화되었다.그리고 한국정부는 북한의 남파 게릴라 침투에 대비하여 군내에 공비전담 특수부대를 편성했고 전방에는 155마일 휴전선에 철책을 구축하였다.대통령의 목을 베러 왔다는 김신조의 말은 온국민을 흥분시켰다. 김신조부대의 청와대습격사건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박정희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며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아온 박대통령의 반공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피의 대응을 요구했고 반공열기는 용광로보다도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우리도 김일성의 목을 베어와야 한다는 임무를 맡고 창설된 실미도 684 주석궁폭파부대도 바로 이러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시대적 산물이었던 것이다청와대를 노린 무장공비 침투에 분노한 박정희가 그 보복 조치로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부대 인원도 김신조 특공대와 똑같은 31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훈련요원과 동일한 수의 기간요원들이 있었다. 모든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대장과 직접 교육병들을 담당하고 같이 행동하는 소대장, 통신병, 의무병, 보급병 등이 있었다.실미도 특수부대는 당시 권력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북 공작책 제1국장 이철희에 의해 만들어졌고 부대관리와 훈련은 공군이 맡았다. 그들은 혹독한 지옥훈련 3개월만에 북한 주석궁을 침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실력을 갖춘다.그러나 실미도 특수부대가 창설된지 3년 4개월만에 하극상, 청와대행, 자폭과 함께 훈련원 31명은 모두 죽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데올로기 시대 한반도 역사의 씻을수 없는 오욕으로 남아있다.실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 직선 거리로 20km 떨어진 해발 80m, 2제곱km의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이다. 중앙정보부가 당시 북파 특수부대를 훈련시킬 최적의 장소로 이곳을 지적했다.그들은 3년 4개월동안 체포되면 죽는다는 교육을 하루에도 몇번씩 받았다. 조국 통일을 위해서는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북한 침투훈련을 위해 위성사진을 본따 북한 지형의 모형을 만들어 훈련했다. 독도법 호신술 산악훈련 폭파기술 등을 배웠다. 기간요원과 훈련병 모두 처음에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김신조부대를 능가해야 한다는 각오로 산악구보를 하더라도 그들보다 1초라도 더 빨리 달렸다. 훈련중에 동료 7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실미도 특수부대원들의 기량은 최고에 달했다. 목숨을 건 훈련 3개월만에 목표물이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그들의 사격실력은 백발 백중이었다.훈련요원과 기간요원이 함께 먹고 자면서 똑같이 생활했다. 당초에 약속했던 3개월이 지나면서 상부로부터 보급과 지원이 줄어들었고 실미도의 문제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실전명령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참아온 석달. 그러나 예정되었던 68년 8월에 북한침투 명령이 떨어졌다가 전격 취소되고 만다. 그 이후 지옥같은 훈련을 3년이나 견디어 내면서 작전 명령을 기다려 왔지만 그들에게 단 한번도 북파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당시 실미도 밖의 상황은 남북 화해분위기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은 684 부대를 만든 장본인 김형욱에서 이후락으로 바뀌고 실미도 처리문제는 계속 미루어진다. 국제 데탕트의 영향을 받아 남북한 역시 대화노선으로 나간다. 이후락은 마침내 평화통일안을 천명하고 남북회담으로 이어진다. 북한 침투를 목적으로 창설한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가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어느누구도 선뜻 나서는 사람없이 버려진 684부대. 마침내 끔찍한 최후의 날이 다가온다. 1971년 8월23일 새벽 6시. 탈출을 위한 훈련병들의 행동개시와 함께 실미도는 삽시간에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현장으로 바뀐다. 특수훈련을 받은 훈련병들이 일당백의 기량으로 기간병을 습격한다. 24명의 기간요원중 교육대장이던 준위등 12명이 사살되고 6명은 바다로 피하려다 익사하였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경비병 5명과 김방일 소대장등 모두 6명.그리고 훈련병들은 인근섬 무의도에 들어가 배를 타고 낮 12시 30분경 3년 4개월간 갇혀 있던 실미도를 빠져 나와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다. 12시 53분 송도외곽에서 탈취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연락을 받고 대기중이던 육군 24명과 총격전을 벌인다. 그들이 타고가던 버스의 바퀴가 펑크나자 마주오던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한다.오후 2시 15분경 운전기사가 탈출하자 실미도 훈련병이 직접 차를 몬다. 대방동 로터리 유한양행앞에서 그들이 몰던 버스가 가로수에 받혀 멈춘다. 그리고는 수류탄 자폭으로 최후를 맞는다. 생존자 4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되고 이사건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영원한 미궁에 빠지게 된다. 사건발생 3일후 당시 국방장관이 전격 사표를 냄으로써 이사건은 의문을 가질 기회도 없이 종결된다.고도로 훈련된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행동을 했더라면 작전이 훨씬 용이했을 텐데 왜 무리지어 청와대로 향하려 했을까? 공군 정보부대 중앙정보부는 실미도에서 벌어진 난동사실을 정말 몰랐을까?국가를 위해 젊은 피를 바친 전사들. 684 부대원들은 애국이라는 이름아래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다. 그들에게 실미도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애국의 섬이요 희망의 섬이었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이한몸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애국심과 죽도록 훈련하여 맡은바 임무를 완수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수 있다는 희망이 넘치는 섬이었다. 실미도에 들어온 684부대원들은 앞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인간한계를 뛰어넘는 그 모진 훈련을 다 받아냈던 것이다. 피보다도 진한 전우애로 똘똘 뭉쳤다. 실미도는 그들에게 꿈과 희망의 섬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극한상황에서 인간 한계를 뛰어넘는 지옥훈련을 이겨낼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0.1%의 가능성도 안되는 실낱같은 희망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