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92년 4월 일본의 불교 신자 풍신수길은 15만 7천 여 명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 출정(出征)을 계기로 일본 국내에 크게 퍼진 천주교를 없애고자 했다. 선봉장으로 천주교 신자들만으로 편성된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흑전장정(黑田長政 구로다 나가마사)을 비롯하여 오도순현(五島純玄 고지마 쥰겐), 천초종원(天草種元 야마 쿠사 다네모토) 등 5만여 명이었다. 1593년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인 전교회장(후간 에이온)과 함께 소서행장이 머물고 있던 경상도 웅천성에 왔다. 왜군 신자들을 돌봐 주었으나 별로 전교 활동을 못하고 1595년 일본으로 돌아갔다.2) 임란 7년 후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4만 여 명 중에 장기(長崎)지방 근처에서 7천 명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 후 덕천막부(德川幕府)의 금교정책은 1611년부터 1720년까지 1백 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조선인 신자 7천명도 모두 순교하였다.3)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는 인질로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을 데리고 갔는데, 북경에서 소현 세자는 아담 샬 신부와 사귀게 된다. 세자가 북경에 있는 동안 조선인 2∼3명이 세례 받았다고 한다.4) 우리나라 실학(實學)운동의 선구자는 지봉 이수광(1563∼1628년)이다. 특히 마태오 리치 신부가 지은 책 「천주실의」등을 보고 새로운 실학을 일으켰다. 이 서적이 전승되어 그 후 8대 손에 이르러 천주교를 믿는 운동이 일어나고 후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5) 이수광의 실학운동이 이어 오는 중에 1백여 년 지나 천주교 연구운동이 한강 유역 광주 에서 남인학자 이익과 그 문인들 사이에 일어났다. 틋히 천주실의를 애독하면서 「천주는 곧 유가의 상제(上帝)와 같다」고 했다. 1760년 경에 이익의 제자 안정복을 비롯하여 선비들 사이에 천주교 서적을 서학[西學 :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 天學 : 천주를 믿는 학문]이라 하여 크게 읽혀졌다.6) 이익과 안정복 사이에 논의되던 천주교는 마침내 믿는 신앙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거의가 남인퍼 학자들로 권 철신·일신 형제, 이벽과 정약전·약종·약용[1762∼1836년, 다산(茶山), 요한] 삼형제 등이다. 이들은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 천주교 교리 연구 강학회를 열고 신앙운동을 일으켰다.7)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한 당시 27세 이승훈은 부친이 동지사로 북경 가는 편에 따라가 그곳 천주당에 갔다. 이벽의 부탁대로 거기서 40여 일 머무르는 동안 필담(筆談) 으로 교리를 배우고, 귀국 길에 1784년 2월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조선인 선비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귀국 후 명례동[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을 중심으로 이승훈, 정약전 삼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조선 교회를 창립 하였다.8) 1784년 겨울부터 김범우의 집에서 주일(主日)행사를 거듭 한 것이 관헌에 발각되어 모였던 신자들이 모두 잡히게 되었다. 김범우는 태형을 받은 후 귀양살이에서 죽었다.첫 번째 순교자이다. 이후 1887년 5월 30일 한·불 수호 조약[1886.6.4]이 비준될 때 까지 1백 3년 동안 공적(公的)박해를 받게 된다.9) 1789년 신해년에 조상 제사 문제로 박해를 받았다. 이것이 그 후 1백년 동안 거듭되는 박해의 표면적 이유가 된다.10)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들어옴으로써 조선 교회 창설 11년만에 성직자가 있게 된다. 전국 신자 수는 4천여 명이 되었다. 그 후 1800년에는 전국에 1만여 명의 신자가 생겼다.11) 1801년 신유년 주문모 신부와 이승훈을 위시하여 이가환, 권철신, 정약전 삼형제 등 남인파 학자들이 모두 처형되거나 귀양감으로써 대박해가 일어났다.12)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성직자 없이 30년 동안 조선 교회가 크게 발전한 것에 감동되어, 북경 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를 임명했다. 이는 조선 교회 창립 후 47년 만의 일이었다. 이때 프랑스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전교활동을 하게 되고 교우 수는 6,64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