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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근대사]메이지 유신의 성립과 전개 평가A좋아요
    메이지 유신의 성립과 전개역사학과 001152 이희주次 例1. 들어가며2. 개국 전 일본 역사와 상황1) 개국 전 일본 역사2) 개국 전 일본 상황3. 개국4. 일본의 변화1) 공무합체의 움직임과 존왕양이 운동2) 토막운동과 에도 막부의 멸망5. 메이지 유신1) 메이지 정부2) 판적봉환3) 폐번치헌6. 메이지 정부의 초기 정책 과정1) 이와쿠라 사절단2) 문명개화3) 징병령4) 지조개정5) 정한론7. 메이지 유신의 의의와 한계8. 나오며1. 들어가며중세 막부(幕府) 중심의 지방 분권체제가 끝나고 근대 일본이 시작되는 메이지 시대의 시작을 보통 1868년 천황이 천왕 1대에 1연호를 쓰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실시하던 시기로 본다. 이 시대에 일본은 에도 막부(幕府)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적 지배체제를 타파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정부 아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입헌적 정치 체제를 실현하고 산업화를 꾀하여 국민 국가적 체제를 갖추면서 제국주의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그 결과 청(淸)나라를 제치고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지만, 급속한 근대화의 과정에서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어 ‘아시아 각국을 침략한 제국주의 국가’라는 오명을 얻게 되기도 했다.본 고(考)에서는 이런 막부중심 체제에서의 쇄국(鎖國)정책의 쇠락과 열강들에 의한 개국과정, 개국을 통하면서 겪게 되었던 변화를 알아보고, 메이지 유신의 의의와 한계에 논해 보고자 한다.2. 개국 전 일본 역사와 상황1) 개국 전 일본 역사일본의 역사는 1854년 미국의 압력으로 개국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개국 이전의 일본은 섬나라라는 특성상 안으로 철저히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만큼 19세기 개국과 근대화가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근대화를 논하는데 있어 개국 이전의 일본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일본에서는 약 7C 말부터 통일된 모습의 정치권력과 국가의 틀이 형성되었다. 이때를 야마토(大和) 시일어나고 또 도시에서는 쌀 가격의 폭등으로 폭동이 발생하게 되었다.이러한 정세 속에서 봉건 사회는 혼란을 거듭했고, 사회체제를 변하시키지 않고는 혼란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사쓰마(薩摩) ? 죠슈(長州) 등의 각 번에서는 개혁에 성공하여 이윽고 메이지 유신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와 같이 18세기에서 19세기 중엽에 걸쳐 막번 체제의 모순이 표면화되고 막부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은 해결되지 못하여 막부는 급속히 쇠퇴해 갔다.3. 개국17세기 시민 사회의 형성과 18세기의 산업 혁명의 여파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미국 에도 파급 되었고, 서양 열강들은 시장과 식민지의 획득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아시아 ? 아프리카 지역은 16세기 이래로 최대의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1840년에 비롯되는 아편 전쟁과 일련의 중국 시장 공략 과정에서 청의 패배는 조선과 일본에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일본의 에도 막부는 1844년 네덜란드 국왕의 개국 권고를 무시하면서 조선과 유사하게 쇄국 체제의 유지를 희망 하였다.이즈음 미국은 북태평양에서 활동하는 자국 포경선의 기항지와 대중국무역의 중계항으로서 일본의 개국을 바라고 있었다. 1848년에 멕시코로부터 빼앗은 캘리포니아지방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미국의 서부개척은 급진전되었고 대중국무역도 활발해져 한층 일본의 개국을 필요로 하였다.1853년에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인 페리는 군함4척을 이끌고 우라가(浦賀)에 내항하여 국서를 보이며 개국을 요구하였다. 막부는 페리의 강경한 태도에 굴복하여 국서를 받아들이고 이듬해 회답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직후 러시아도 나가사키(長崎)에 내항해 개국을 요구하였다. 당시 로쥬(老中))였던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는 이제까지 막부가 정치를 독단으로 결정해 온 관례를 깨고 외교정책에 대해서 널리 여러 다이묘와 막부의 신료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또 조정 측에도 페리내항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이러한 막부의 조치로 이제까지 막부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던 천황의 권위가 높아지고승하여 도시에 사는 무사와 죠닌의 생활은 큰 타격을 받았다. 또 무역상인과 재향상인은 물자를 산지에서 구매하여 이를 직접 개항장에 보내 거래했기 때문에 도이야(問屋 , 도매상)들도 타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막부는 특권상인을 통해 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1860년에 잡곡 ? 물기름 ? 포목 ? 생사 등 5품목은 재향상인과 외국상인의 반대로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4. 일본의 변화1) 공무합체(公武合體)의 움직임과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미국의 개국 요구는 에도 막부의 250년간의 정치 관행이 흔들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정치적 구심점의 역할을 해야 할 막부가 페리의 국서 교부 문제를 교토의 천황과 조정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정치 참여가 금지되어 있던 다이묘(大名)에게도 널리 의견을 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에도 막부 창건 이래 정치적 활동이 금지되었던 양 세력에게 정치적 해금조치를 단행한 것을 의미하였고, 이후 일본의 국내 정국에는 새로운 소용돌이가 몰아치게 되었다.미국 공사 해리스가 통상 조약 체결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을 당시 막부는 장군의 후계자 승계 문제로 대립이 발생하고 있었다. 막부 내 온건 개혁파와 사쓰마 번주는 인물론을 중시하여 능력있는 히토쓰바시가(一橋家)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를 밀었고, 보수파인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등은 장군계와 혈통이 가까운 기이(紀伊)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德川慶福)를 지지하면서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보수파가 승리하면서 막부는 보사파인 이이 나오스케가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막각(幕閣)의 책임자인 다이로(大老)로 취임하면서 막부 독단으로 칙허를 얻지 않은 채 미 ? 일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교토의 조정과 반대파의 다이묘 세력들을 처벌하는 등 탄압을 가하였다.(안세이(安政)의 대옥(大屋)). 이러한 탄압에 분노한 미토번(水 藩)의 낭사(주군을 잃은 무사들)들은 1860년 3월 사쿠라다문 밖에서 나오스케를 암살하였다.(櫻田門의 변).에도 막부에서는 조정과의 융화를 꾀하고 막부의 권위를 이 때문에 죠슈번은 이제까지 반목해 왔던 사쓰마번과 제휴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형세를 파악한 도사(土佐)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 ? 나카오카 신타로 등은 반막부의 기치를 내걸고 1866년에 사쓰마와 죠슈 양번간에 군사 동맹의 밀약을 맺게 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막부는 제2채 죠슈 정벌을 강행하였으나 막부를 지지할 것이라 믿었던 사쓰마번은 출병을 거부하였다. 결국 막부의 죠슈 정벌은 실패로 돌아가고 막부는 이미 정치적 권위의 상실과 더불어 군사적 실력 면에서도 전국을 호령할 능력이 없음이 밝혀지고 말았다.1866년 12월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고 이듬해 1월 메이지(明治) 천황이 즉위하였다. 장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막정(幕政)의 개혁을 추진하고 막부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최후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대해 사쓰마 ? 죠슈 양번은 공경이 이와쿠라 토모미와 연락하여 토막(討幕)의 실행계획을 세우고, 드디어 10월 14일에 조정은 양번에 대하여 토막의 밀칙을 내렸다.한편, 전 도사번주(土佐藩主) 야마노유치 토요시게(山內豊信)는 시국의 평화적인 수습을 바라여 막부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大政奉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고코 쇼지로(後藤象二郞)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 뜻을 막부 측에 건백하였다. 그 내용은 천황 아래에서 막부를 포함한 웅번이 연합 체제를 구축한다는 구상이었다. 이 건백서를 받은 막부에서는 장군 요시노부가 웅번제후회의(雄藩諸候會議)에서 실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조정에 대정봉환)을 올렸고 조정은 이를 수리하였다. 사쓰마 ? 죠슈 양번은 막부를 무력을 동원한 정변을 일으켜 왕정복고의 대호령(大?令)을 발포하였다. 그 내용은 장군 요시노부의 사직을 정식으로 허가하고, 섭정(攝政) ? 관백(關白) 및 막부를 폐지하며, 조정내에 총재(總裁) ? 의정(議定) ? 참여(參與) 3직을 설치하는 것 등이다. 이제 정치의 운영은 신정부측에 넘어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270년간 계속되어 온 에도 막부는 멸망하고 약 700년간에 걸친 무가정치의 역사는지 못 했다. 따라서 신정부는 사쓰마 ? 죠슈 ? 도사의 3번 군사 약 8000명을 도쿄에 불러들여 친병(親兵:나중의 근위병)으로 조직한 뒤, 1871년 7월 폐번치현을 감행하여 전국에 있던 261한을 모두 폐지하고 이어서 이전의 한의 구획에 관계없이 전국을 부 ? 현으로 나누어 3부(府) 302현(縣)을 설치했다. 부현에는 새로 임명된 부지사 ? 현지사를 파견하는 한편, 구 지번사에게는 도쿄 이주를 명령하고 구 번의 군대를 해산시켜서 무기 ? 성곽 등을 정부가 접수했다. 여러 번은 이미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신정부가 부채를 떠맡았기 때문에 폐번치현(廢藩置縣) 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성공했다. 이리하여 신정부는 전국의 토지와 인민을 모두 직접 통치하게 됨으로써 통일 국가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판적봉환 때에는 고대 율령제적 관제를 본떠서 신기관(神祇官) ? 태정관(太政官) 아래 각 성을 두는 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폐번치현 뒤에는 중앙 집권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태정관을 정원(正院:입법 ? 사법 ? 행정 총괄) ? 좌원(左院:입법 자문) ? 우원(右院:각 성의 행정 사무 합의)의 3원제로 하고, 그 아래 각 성제에 의한 정부 요직은 사쓰마를 비롯한 4번의 출신 관료들이 차지했기 때문에 나중에 번벌정부(藩閥政府)라고 부르는 관료 정부의 토대가 마련 되었다.6. 메이지 정부의 초기 정책 과정1)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신정부는 1868년 5개조 서문에서 양이 방침을 취하지 않고 개국 화친 정책을 내세웠다. 개국 화친은 막부가 구미 각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준수하고 국제법에 따라 우호 관계를 지속 시킨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양이를 신봉한 일부 사람들은 신정부가 왕정 복고의 이상을 저버렸다고 반정부 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신정부는 막부가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폐번치현을 계기로 중앙 정부의 관료 기구를 정비한 정부는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한 예비 교섭을 추진하고 구미 각국의 문물 ? 제도를 조사하기 위해이었다.
    인문/어학| 2006.05.14| 11페이지| 1,500원| 조회(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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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세종 대(代) 문화발전
    세종 대(代)의 문화 발전次 例1. 들어가며2. 한글3. 과학4. 음악5. 나오며1. 들어가며한국사회에 있어서 세종 시대)는 신(新)왕조 개창의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되고 자주적 문화를 꽃피운 문화의 황금기였다. 세종 시대는 안으로 통치제도의 틀이 정비되어 사회가 안정되어 크게 발전하고, 밖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영토를 넓힌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한 시기였다. 이때에는 또 당시의 문제였던 어려운 한자 보다는 백성들이 자신의 의사를 쉽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한글이 창조되어 민족문화 발전의 기틀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발명하였고, 천문학 부분에서는 많은 천문기구들을 경회루에 설치해 천문관측을 하여 칠정산(七政算)이라는 역법서(曆法書)를 편찬하여 후에 일본에 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음악적인 면에서도 박연과 함께 미비한 조선 초의 음악을 근본 적으로 옛 법에 맞추어 정리 하였다.한편, 이러한 문화적, 과학기술적 성과들은 세종 시대 전반을 규정하는 여러 사회 정치적 조건들과 연결 지어 생각해볼 때 그 역사적인 의미를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세종 시대는 다른 어느 시대와도 달리 안정된 왕권과 정치질서를 유지했고, 새로이 국가이념으로 채택된 유학이 그 사상적 실천을 모색하는 시대였다. 그리고 유교 정치의 진전은 곧바로 유교적 교양을 갖춘 관료들이 사회질서의 중심에 서서 사회를 이끌어 가는 유교관료 사회로의 진전을 의미했다. 본고에서는 세종대(代) 한글과 과학, 음악의 발전에 대해서 알아 보고자 한다.2. 한글우리 나라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예악(禮樂)과 문장(文章)을 지니고 있기는 하나 우리말과 중국말이 전혀 달라서, 공부를 한 사람들이 자기의 뜻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워 늘 걱정이었다. 더욱이 형벌을 다루는 사람이 그 범법한 사실의 내용 경위를 밝히기가 어려웠다. 옛 신라의 설총이 이두(吏讀)를 시작한 뒤로는 관부나 백성들 사이에서 계속 쓰였지만, 역시 남의 글자를 빌어서 쓰기 때문에 뜻의 표현이 역시 걸치고, 때로는 막히었다. 사람이 중대한 일을 맡아서 다루는 데 있어서는 우리말로써 제 뜻을 바로 표현하여, 그대로 바로 적을 수 있어야 했었다. 또한 세종이 나랏일을 맡아 볼 때 여러 가지 조건이 있어 백성에게 알려 주는 방법으로 우리 글자를 창안하게 되었겠으나, 궁극에는 우선 글을 모르는 무지한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이에 세종은 백성을 다스리려는 정신에서 언문청(諺文廳)과 정음청(正音聽)을 궁중에 두고 정음(正音))을 연구하고 한문으로 된 책을 정음자로써 한자의 음과 뜻을 밝히고, 그 글을 우리말로 옮기는 언해(諺解)의 일을 하였다. 세종의 뜻은 25년(1443)에 이르러 정음 28자를 창제하게 되었다. 이것은 치민(治民)의 정신에서 우러러 나왔던 것이다. 28자는 무궁하게 활용할 수 있고, 아주 간결하면서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정밀하게 되어 있어서 널리 쓸 수 있다.세종은 정음자가 배우기 쉬울 뿐만 아니라, 백성의 송사(訟事)에 그 사실 경위를 밝히는 데, 정음자를 써서 백성의 뜻을 제대로 알릴 수 있다고 일러주고 있다. 정음자는 그 소리의 맑고(淸) 탁한(濁) 것을 뚜렷이 구분하게 되어, 악가(樂歌)에서도 마음대로 얼마든지 쓸 수 있고, 바람 소리, 학(鶴)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짓는 소리까지 무엇이든지 소리나는 대로 글자로 표현해서 기록 할 수 있다. 이처럼 훌륭한 글자를 더 자세히 해석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 주려고 하였다.그리하여, 정인지는 「해례」의 서문에서 훈민정음의 설명만 보면, 누구든지 선생에게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을 것이라고까지 하였다.3. 과학세종 시대에 과학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종대왕의 과학기술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의욕적이며 거시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혁신적으로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하였고, 조직적인 공동 연구 체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자립하기 위하여 자주적으로 꾸준한 노력을 하였다. 이와 같이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은 신라와 고려의 과학기술 전통을 계승하고 밖으로는 중국과 이슬람 과학의 영향으로 형성되어, 한국 과학사상 가장 훌륭한 과학적 발전을 이룩했다. 그리하여 그 후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이러한 세종 때 과학 기술문화의 독자적인 전개는 분명히 새로운 발전이었다. 과학 기술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이렇게 수준 높은 학문, 문화, 예술적 성화가 짧은 동안에 이루어진 적은 한국의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다. 그것은 조선식의 창조적인 과학, 기술 전통의 구축으로 이어졌다. 15세기 전반기의 과학기술사에서 세종 때와 같은 유형의 발전은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로 특히 주목할 만하다.이순지는 중국에 이미 알려졌던 천문계산 방법을 소화하여 우리나라에 맞는 새로운 체계를 완성했고, 그것을 정리해서 책으로 남겼다. 해와 달, 그리고 5개 행성의 궤도 계산 방법을 터득하여 그는 10년 연하의 천문학자 김담(金淡)과 함께 칠정산(七政算)을 완성했던 것이다.장영실은 세종16년(1434)에는 자격루(自擊漏)라는 물시계를 만들었으며 4년 뒤에는 옥루(玉漏)라는 또 다른 형태의 물시계를 만들었다. 자격루는 전통적인 물시계를 정밀 자동시보장치)를 가진 자동물시계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것은 첨단 기술에 의한 시계장치의 기술혁신이었다. 자격루가 순전히 자동물시계로서 천문과 무관한데 반해, 그 뒤에 만들어진 ‘옥루’는 자격루에다 천상을 표시하도록 장치를 더 정교하게 만든 것이다. 옥루의 동력은 물레바퀴의 회전에 의하여 전달되는 여러 개의 톱니바퀴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송, 원 시대에 만들어진 혼천의(渾天儀)와 세종 15년(1433년)에 만들어진 조선의 혼천시계의 기술을 이은 것이다.세종은 농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농상집요(農桑輯要)」와 「사시찬요(四時贊要)」와등 중국에서 들어온 농서(農書)에 의해 농사짓는 법을 백성들에게 일러주도록 힘썼으나, 다시 세정은 정초등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에 맞는 알맞은 농서를 새로 편찬하게 하였다. 세종 11년(1429)에 새로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設)」은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농사법의 실시를 일러주고 있고, 감사나 수령에게 그 시행에 힘쓰도록 일러주고 있다.박서생은 통신사로 일본에서 수차를 보고 귀국한 뒤, 수차의 개발에 힘을 썼다. 박서생은 사람이 발로 밟아서 물수레를 돌리면 고인 물이라도 논밭에다 퍼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본의 수차의 모형을 만들어 바쳤는데, 세종은 한재(旱災)를 구제하기 위하여 좀 더 힘을 덜 들이고 관개할 수 있는 수차를 강력히 권장하였다.
    인문/어학| 2006.04.25| 4페이지| 1,000원| 조회(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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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Blanche 평가B괜찮아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작품에서 Blanche Dubois의 이름은 불어이다. Blanchea는 흰색을 뜻하고 Dubois는 숲을 듯한다. 그녀의 이름은 흰 나무숲과 같은 순결함과 고귀함을 나타낸다. 블랑쉬는 순결함과 섬세함을 나타내는 동시에 남부 귀족들의 우아함과 고귀함을 나타낸다. Blanche Dubois라는 이름 자체는 그녀의 이중성을 암시하고 있다. 몰락한 귀족의 딸인 그녀의 거만함과 과거와는 다른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인정하지 못하는 자존심이 여러 가지 사건을 초래한다. 자신의 경제적인 능력부족이 Stella의 집에서 기거하는 상황을 만들어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우아하고 고고하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을 특히 Stanley를 경멸하는 그녀의 말투와 행동들, 결국은 자신을 보호해줄 동생과 동생 남편이라는 보호막도 잃고, Mitch의 사랑도 잃어버리며, 결국은 자신이 쉴 수 있는 어느 곳도 가지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 된다. 이러한 이중성을 가진 Blanche Dubois를 볼 때 이 작품은 물질문화라는 현실과 정신문화의 대립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Blanche Dubois를 꼭 비판해야만 하는 것일까?Blanche Dubois는 예민하고 순수한 사람이다. 그녀는 과거의 화려한 생활전통 속에서 자라난 여성이다. 그런데 그녀가 가슴에 응어리지는 고독감에 시달리어 끝내는 정신적 파국에까지 몰리게 된 가장 큰 불씨는 첫사랑의 남편인 앨런의 상실이다. 그리고 자신의 안식처였던 Belle Reve의 몰락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술을 자주 찾고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견디기 쉽게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한다. 또한 성적쾌락을 쫓는 것 또한 자기붕괴를 통해 정신적인 만족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생활들을 사회는 가만두지 않았고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사회의 냉담과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동생 Stella에게 오지만 이 곳 또한 Blanche를 가만 두지 않는다. 환상 속에서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과 귀족의 속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과거에 대한 죄의식을 숨기려는 노력으로 현실의 불빛을 피한다. 그녀는 전구의 사실적인 빛을 피하고 싶어 종이등 이라는 환상의 갓을 씌우고 싶어한다. 어둠 속에서만 편안함을 느끼는 그녀에게 전등의 강렬한 불빛을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므로 Mitch가 갓을 벗기고 전등불을 켰을 때 그녀는 절규한다. 갓 없이 드러난 전구는 현실을 상징하며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 종이 갓을 씌우는데 Mitch가 이것을 찢어버리는 것으로 그녀를 파괴한다.Blanche는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죄의식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종교적인 회개의식을 행하듯 목욕을 한다. 이 의식은 장녀와 같은 추한 과거를 지워버리고 항상 젊고 순결한 아름다운 세계에 머물고자 하는 상징적인 노력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목욕을 하는 동안 Stanley는 Blanche를 파괴하기 위한 일들만 하고 있다.Blanche는 과거를 잊고 새로 시작하기 위해 일부러 우아한 척 한다. 흰색 드레스만 입고 공연을 보고 깨끗함만을 추구한다. 하지만 Stanley는 이런 Blanche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녀의 과거를 낱낱이 들추고 새로운 안식처를 찾기 위해 온 자신의 집에서 쫓아낸다.
    인문/어학| 2001.05.14| 2페이지| 1,000원| 조회(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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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로본한국고대사
    고대(古代)의 사회(社會)와 문화(文化)를 우리는 역사라는 관점에서 공부했다. 모든 것은 본질은 같지만 관점은 여러 가지다. 그럼 역사는 무엇인가? 역사는 인간을 살피는 것으로 여러 가지 관점을 병렬식으로 떼어놓고 살피는 것이 아니라 관계(Relation)를 중요시하며 살펴야 한다. 여러 관점들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서는 묶어줄 기준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치사(政治史)를 기준으로 역사를 살펴보자. 그럼 왜 정치사를 기준으로 잡는 것일까? 정치는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인간의 총체적 사회의 핵심인 것이 정치이다. 정치사를 볼 때에는 우선 정치의 지배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 정치의 지배권을 가진 자에 의해 사회가 변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어떠한 방법으로 정치적 지배권을 유지하고 행사하였는가를 탐구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지배세력 안에서 그들의 결속을 어떻게 유지하였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럼 이제 이런 관점들을 가지고 한국의 고대사를 살펴보도록 하자.한국의 고대사를 논할 때는 대개 선사(先史) 시대부터 신라말(新羅末)을 이야기한다. 선사시대라는 것은 역사이전의 역사 즉 문자가 나오기 전의 역사이다. 한국의 구석기(舊石器) 시대는 없었다는 이론이 있었는데 한반도 전 지역에서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그것은 설자리를 잃어 버렸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한반도(韓半島)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년 전부터이다.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 함북 웅기 굴포리, 강원도 양구 상무룡, 충남 공주 석장리, 충북 단양 수양개 유적등이 유명하다. 이러한 유물들은 동굴이나 강가에서 자주 발견 되는데 이는 구석기인들의 주거지역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구석기 시대에는 무리사회이고 이동생활을 하였다. 지금과는 달리 채집경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들은 자연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구석기 시대에 공동체 생활을 하였지만 평등한 관계였다. 인간들은 직립(直立)을 하게 되면서 뇌(腦)가 발달하고 두 손의 자유를 얻으면서 도구들을 제작하였는데 구석기인들은 뗀 석기를 사용하였다.우리나라의 신석기(新石器) 시대는 B.C. 6000년경부터 시작 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와 봉산 지탑리와 평양의 남경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된 좁쌀은 신석기 시대의 생활을 보여준다. 토기와 탄화된 좁쌀은 구석기의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식량을 저장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 시대에는 부족사회(部族社會)를 이루고 있었다. 부족은 혈연(血緣)을 바탕으로 한 씨족(氏族)을 기본 구성 단위로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사회 역시 지배, 피지배의 관계가 발전하지 않은 평등 사회였다. 혈연 사회는 토템(Totem)을 매개로 하나의 혈연적 유대감을 가진다. 또한 내부의 중요한 일들은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였는데 이는 후에 신라의 화백(和白)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신석기 시대에 이어 한반도에서는 B.C. 10세기경에 청동기(靑銅器)시대가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는 생산경제가 더욱 발달하고 분업이 이루어지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청동기로 무기를 제작하여 정복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이로 인해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졌고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의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청동기 시대에는 군장(軍葬)이 지배하는 연맹국가(State)가 출현하는데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古朝鮮)이다. 고조선 사회의 8조법을 보면 생명과 사유재산을 중요시 여기였고 형벌과 노비가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뒤를 이어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연맹국가가 생기는데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이 대표적이다. 이 연맹국가들은 철기를 사용하여 농업을 발전시키고,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점차 삼국 형성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국가 발전과 더불어 고대 사회가 성장하였다. 고대사회가 성장하면서 지방의 족장 세력은 중앙의 보다 강력한 힘에 의해 통합되어 갔다. 족장 세력은 종래 그가 다스리던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국왕의 지위가 강화됨에 따라 점차 왕권에 복속되어 갔다. 왕권이 확대됨에 따라 율령을 반포하는 등 체제의 정비 작업이 추진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끊임없는 정복 활동을 펴 영토를 확장 시켜 갔다. 한편, 고대 사회에서는 불교(佛敎)가 수용되어 중앙 집권화의 진전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처럼, 고대 사회는 안으로는 강력한 왕권과 정비된 율령(律令)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룩하였고, 밖으로는 활발한 정복(征服) 활동을 통해 영역(領域) 국가로서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구려는 1세기경 태조왕 때 고씨가 왕권(王權)을 세습하였다. 그리고 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에 이르러 중앙 집권화와 왕권의 강화에 새로운 진전을 가져왔다. 종래 부족적 전통의 5부가 행정적인 5부로 바뀌고, 왕위 계승은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다. 소수림왕 때는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 이러한 것은 중앙 집권 국가의 체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정치 조직은 대대로 이하 10여관등이였다. 대대로는 수상으로서 국사를 총괄하였다.백제는 초기에 정복왕조 성격이 강하였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에 이르러, 관등(觀燈)을 비롯한 율령반포, 복색 제정을 하였고 4세기 후반에 이르러 침류왕 때 불교를 수용하였다.신라는 4세기 후반 내물왕 때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내물왕 이후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세습이 이루어졌다. 김씨 왕족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폐쇄적(閉鎖的) 신분 제도인 골품 제도를 마련하여 통치(通治) 기반을 구축하였다. 골품제도는 가 족장 세력을 통합, 편제한 것이었는데, 그 세력의 크기에 따라 4, 5, 6두품의 신분을 주었으며, 진골, 성골은 왕족이었다. 무열왕 이후로는 성골 출신의 왕이 없어지고, 진골에서 왕이 나오게 되었다. 6세기부터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로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한다. 법흥왕 초기에 율령이 반포되어 17관등 및 백관의 공복이 정해졌을 뿐 아니라. 골품(骨品)제도가 정비되어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여 갔다. 이 때에 귀족(貴族)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대등이 설치된 것은, 신라가 왕권 중심의 귀족 국가 체제를 갖추어 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상대등은 귀족 회의를 주관하면서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졌다. 또한 이시기에 불교가 수용됨에 따라 중앙 집권 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신라는 씨족 사회의 전통을 계승, 발전 시켰다. 화백과 화랑도(花郞徒)가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인문/어학| 2001.04.19| 6페이지| 1,000원| 조회(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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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고대정치사
    한국고대의 사회와 문화에 대하여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자. 한국사에서 고대는 일반적으로 선사(先史)부터 신라말(新羅末)을 이야기한다. 사회와 문화는 인간의 관계를 살피는 것으로, 즉 역사(歷史)인 것이다. 이것을 역사학적 관점으로 살펴보는 것이 역사학을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사회적 존재로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는 관계(Relation)를 맺으며 살아간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데에는 정치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결국 역사는 정치가 중심에 서서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정치사가 기준이 된다.한국 고대사에는 구석기가 없다는 이론과 구석기가 있었다는 이론이 있었는데 한반도에서 구석기유물들이 출토됨에 따라 전자는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한국에 구석기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70만 년 전부터이다. 구석기 유적으로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도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유적, 함북 웅기 굴포리, 강원도 양구 상무룡리, 충남 공주 석장리, 충북 단양 수양개 유적등이 있다. 이곳에서는 석기들과 함께 하람과 동물의 뼈 화석, 동물 뼈로 만든 도구 등이 출토되어 구석기시대의 생활상이 밝혀지게 되었다. 구석기인들은 주로 뗀석기를 이용하였으며 후대에 올수록 석기의 모양을 변화시키게 된다. 그들은 동굴과 강가를 찾아 이동생활(Seasonal Camp)을 하였다. 또한 무리를 지어 다녔으며 채집경제로 주로 사냥을 하였고 서로 평등한 공동체적 생활을 하였다. 인간은 직립을 하면서부터 두뇌가 발달하게 되고, 손이 자유롭게 되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부터 언어가 발달하게 된다는 특징을 가지게 되는데 구석기시태에 이런 모습이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중 대표적인 것으로 여인상이 있는데 이것은 출산은 즉 풍요를 나타내는 것으로 종교적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신석기 시대에 오면 간석기가 쓰이게 되는데 이때에 특징적인 유물이라면 토기를 들 수 있다. 토기는 저장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때에는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체제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농경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농경으로 인한 정착생활이 일반화되므로 촌락을 형성하게 되고 이것은 원시적 사회체제라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촌락의 특징을 열거한다면 첫째, 혈연을 중심으로 한 씨족 사회로 그들은 애니미즘,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을 믿었다. 예를 들어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한 부족은 말을 숭배하였으며, 김알지를 중심으로 한 부족은 닭을 숭배하였다. 그들 모두 알에서 태어났는데 알은 둥글고 하얀 것으로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둘째, 공동체 사회였다. 그 증거로 씨족회의를 들 수 있는데 이때에는 공동소유와 공동분배, 즉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였다. 신라의 화백회의는 서로 평등한 지위에서 합의하는 회의로 그 예로 돌 수 있다. 셋째, 각각의 씨족 영역 안에서 활동을 하였다. 영역이란 산천(山川)을 경계로 하였다. 이 때에는 책화라는 것이 있었는데 자신의 부족 영역이 아닌 곳에서 사냥을 할 경우 손해 배상하는 것이다. 넷째, 각각 부족이 서로 교역을 하였다. 그 예로 물물교환 내지는 족외혼을 들 수 있다.촌락중심의 사회는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성읍국가(State)를 형성하게 된다. 대략 기원전 10C부터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청동무기로 다른 부족을 지배함으로써 생겨나게 된다. 이 당시 유물을 보면 청동무기(비파형동검, 세형동검)와 청동의기(방울, 거울, 동탁 등)가 대표적인데, 이 때는 정복전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게 된다. 이것은 계급의 분화, 즉 전쟁에서이긴 지배계층과 정복당한 피지배계층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초기 신석기 시대의 촌락(Village)에서 읍락(Town)으로, 읍락에서 성읍(City)으로 점점 사회가 커지고 결국 국가형태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등장과 일치하는 것으로 통치조직, 군대가 필요하게 되고, 이것을 유지하게 위한 세금을 걷게 된다. 결국 청동기로 인한 정보전쟁과 신분분화, 신분세습이 이루어지게 되고, 인구증가에 따른 공동체적 유대감의 붕괴되었고 사유재산 성립하였다. 그러나 지배층은 공동체적 유대감을 유지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공유지를 유지하여 필수품 등은 공동 경작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당시 나온 국가로 고조선과 부여를 들 수 있다. 고조선은 농경문화, 사유재산제, 신분제, 선민사상, 토템사상, 제정일치제 등을 특징으로 성장하였다. 부여의 사회상을 보면 청동기 사회의 특징을 더 알 수 있는데, 중국의 기록을 보면 邑落有豪民 民之下戶, 皆爲奴婢 라는 기록이 있는데 호민, 하호, 노비와 같은 신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배계층에 해당되는 사출도(馬加, 牛加, 加, 狗加)는 대가, 호민은 소가에 해당되었다. 고조선, 부여 모두 청동기시대에 생긴 우리나라의 최초의 국가형태이다.철기가 사용되면서 성읍국가는 연맹왕국 형태로 바뀌어 가게된다. 철기는 청동보다 제조가 간단하며 청동보다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때에는 가장 유력한 성읍국가의 지배자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선출의 예로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하나의 가문이 왕위를 독점, 세습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선출의 의미는 강력한 왕권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 기록을 보더라도 명망군이라고 하여 지배층은 무장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왕은 있지만 각자 체제를 유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례로 부여에서는 흉년이 들자 왕을 내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당시 왕의 개념은 연맹장으로 군장과 제사장의 임무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성읍이 아닌 궁궐에서 살았으며 최고의 정치적 지위를 누렸다. 그리고 이때의 국가들은 일정한 연맹체를 이루었는데 그 예로 부여의 사출도와 고구려의 5부족 연맹, 신라의 박 , 석 , 김 씨(氏)의 왕위 계승, 가야의 6가야 연맹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 연맹국가에서는 귀족회의가 존재하였는데 고구려의 제가회의, 신라의 화백회의, 백제의 정사암회의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회의는 귀족의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며 왕을 견제하였으며,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사회가 연맹국가로 변모하면서 질서유지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것은 법률제정을 의미한다. 최조의 법은 고조선의 8조법으로 그중 3개가 현존하는데 살인자는 사형,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보상, 절도하는 자는 노비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부여의 법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그 중 새로운 법은 간음 하지마라, 투기하지 마라 등이 있는데 이것은 일부다처제와 축첩의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맹국가의 왕은 제사장의 임무를 한다는 것을 언급한 바가 있다. 연맹국가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일을 했는데, 부여에서는 은력상 정월에 영고가 있었고 고구려에서는 10월에 동명, 동예는 무천, 삼한에서는 오월제와 시월제가 있었다. 이것은 사회적 종교적 의미이며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연맹국가시대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도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여 고대왕국에 이르게 된다. 고대왕국의 특징이라면 왕이 선출에서 세습으로 바꾼 것과 왕족과 왕비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정치사회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복잡해집에 따라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공동체적 유대감을 초월한 고등종교인 불교가 수용되어 왕즉불(王卽佛)사상으로 체재를 재정비하였다. 먼저 고구려는 1세기 태조왕때 왕위세습이 이루어졌으며, 소수림왕때 불교를 받아드렸으며 태학을 설립하여 새 인재를 양성하였다. 백제는 3세기 고이왕때 왕위 세습이 되었으며 율령을 반포하여 6좌평 16관등을 만들고 관리 복색을 지정하였다. 이후 침류왕때 불교를 수용하였다. 신라는 4세시 말 내물마립간때부터 왕위 세습이 되었으며 호칭에 있어서도 신하와 구분되어 왕권강화를 엿볼 수 있다.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였으며 왕즉불사상을 적극 수용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삼국불교는 왕실불교, 귀족불교의 성격을 띈다. 즉 인과응보, 전쟁 사상은 귀족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신분제사회유지에 기여하였다. 또한 법흥왕 18년에 상대등을 처음으로 두었다. 삼국성립에 따라 왕권은 강화되었다. 정복국가가 되면서 왕이 군사권을 가지게 되며 정복에 따른 토지, 노비지배권이 생겼다. 왕위는 선출에서 형제세습을 거처 부자세습으로 바뀌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성읍지배자들은 독립성을 상실하고 중앙귀족으로 변화하였는데 이것은 신분제도가 필요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의 골품제도가 있어 왕, 진골귀족, 6두품부터 1두품까지 구분을 두었으며 신분에 따라 의복, 가옥, 장식 등에도 차등을 두었다. 그리고 귀족사회유지를 위한 합좌회의제도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회의의 특징은 만장일치제로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신라의 화백회의를 들 수 있는데 약 20명의 대등과 그들의 대표인 상대등이 회의를 주관하였다. 백제는 정사암회의에서 상좌평을 선출하였으며, 고구려는 대대로를 선출하였다. 이들 귀족의 대표들은 왕권을 견제하며 귀족들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삼국은 중앙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수도를 중심으로 성을 쌓아 올렸으며 대성과 소성의 구분이 있었다. 성의 목적은 수도를 보호하는 것으로 성주는 무인이 주류였다. 군역, 조세를 양인, 농민이 부담하였으며 촌을 단위로 파악하였다. 이것은 원시 공동체적 성격을 이용한 통치방법이었다. 신라의 남산신성비에 따르면 촌의 단위로 역을 동원하였으며 마전을 촌 단위로 공동 경작, 공동 분배하였다는 것을 이를 알 수 있다.
    인문/어학| 2001.04.19| 4페이지| 1,000원| 조회(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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