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현의 연혁1920년 4월 13일 전남 전남포시 비석리 56번지에서 박명수와 조기국의 장녀로 출생{1925년 ( 5세 ) 전북 군산시로 이주1926년 ( 7세 ) 군산 공립보통학교 입학1932년 ( 13세 ) 군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전주 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1936년 ( 17세 ) 전주 공립여자고등학교 졸업4월, 경성 관립여자사범학교에 입학1938년 ( 19세 ) 경성관립여자사범학교졸업전북 순창공립보통학교교사로 이듬해인 39년까지 재직1940년 ( 21세 ) 경성관립사범학교의 미술교사 에구치 게이시로에게 수업받음1941년 ( 22세 )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에 입학제20회 조선미술 전람회에 이 입선1943년 ( 24세 )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을 출품, 특선으로 총독상을 받음운보 김기창을 처음 만나 5년간 교재 하다1944년 ( 25세 )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1945년 ( 26세 )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연구실에서 연구 후 8{CDOT15 해방직전에 귀국1946년 ( 27세 ) 운보 김기창(동양화가)과 결혼, 슬하에 1남 3녀를 둠.1947년 ( 28세 ) 사업부장의 발안으로 현재의 신세계(당시 삼월백화점)화랑에서 제1회 부부전1948년 ( 29세 ) 제2회 부부전(서울)동양화 7인 전에 출품( 동화 화랑)1949년 ( 30세 ) 제3회 부부전(서울)1950년 ( 31세 ) 제4회 부부전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이 6{CDOT25로 중단됨1951년 ( 32세 )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 친정집으로 피난, 회화탐구1955년 ( 36세 ) 피난지 군산에서 서울 성북동 56의1번지로 이주제7회 부부전 (중앙공보원)1956년 ( 37세 ) 제8회 대한미협전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 수상, 출품작국전 초대작가가 됨1957년 ( 38세 ) 백양회 창립전에 출품(서울)뉴욕 월드하우스화랑 초청, 현대 한국화전에 출품유네스코와 숙명여자중학교 주최 세계 아동미전 심사위원 역임(이후 1960년까지)1959년 ( 40세 ) 성신여자 중학교 주최 아동미전 심사위원 역임(이후1963년까지)1960년 ( 41세 ) 자유중국 대만 국립 예술원 및 홍콩시 미술인 협회의 초청으로 백양회전에 참가1961년 ( 42세 ) 일본 동경 동화신문사 및 대판시 미술협회 초청으로 백양회전에 참가1962년 ( 43세 ) 필리핀 하눅 미술전에 출품서울특별시 문화위원 역임1964년 ( 45세 ) I.I.E.(국제 교육학회) 초청으로 도미.미국과 유럽, 중동지역의 미술계를 순방하와이 호놀룰루 동서 문화교류센터에서 초청 부부전1965년 ( 46세 ) 뉴욕 국제미술전 초청 출품워싱턴 오벨리스크화랑의 초청으로 부부전1966년 ( 47세 ) 서울 성신여자사범학교 동양화과 교수 역임 (이후1967년까지)1967년 ( 48세 ) 프랑스 미술인 협회 주최, 뤼네빌{CDOT니스{BULLET렌시 박물관과 칸느 미술관 초청으로한국 미술전에 출품1968년 ( 49세 ) 중남미 방문 후 재차 방미(訪美)로스엔젤레스시 미술인 협회의 명예회원이 됨1969년 ( 50세 ) 뉴욕시 프레트 그래픽센터와 BOB BLCKBUNN판화 연구소에서 판화를 연구함1971년 ( 52세 ) 프랑스 칸의 제3의 칸느회화전에 출품미국 펜실베니아주 아렌타운미술관 초청. 부부전1972년 ( 53세 ) 국립현대 미술관 주최, 한국근대미술 60년전에 출품문화공로상 수상샌프란시스코 아시아화랑 한국현대화 초청전에 출품1973년 ( 54세 ) 미국 하와이 아카데미 오브아트 주최, 판화전에 출품(작품매입, 영구보존으로 선정됨)플로리다 미술관주최, 마이애미 그래픽 비엔날레 판화전에 출품1974년( 55세 ) 유럽과 아프리카 미술계 순방 후 귀국제6회 신사임당상 수상6월, 귀국기념 판화전 개최(신세계 미술관)1975년 ( 56세 ) 7월에 방미(訪美). 입원 치료하다가 11월에 귀국1956년 ( 57세 ) 1월 2일 죽음박래현의 예술적 배경{우향은 그의 회고록에 적고 있듯이 아버지 박명수씨의 극진한 보살핌과 사랑으로 구김살 없는 진취적인 여성으로 자란다. 비록 어릴 때 꿈은 여자로써는 가지기 어려운 의사나 영화감독이였지만 사법학교 재학 시절 새로 부임해 온 일본인 미술선생의 영향으로 화가가 될 것을 꿈꾸게 된다.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년 남짓 교편생활을 하다가 화가의 꿈을 펴기 위해 1940년 일본유학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 해는 조선총력 조선연맹을 만들고, 그 문화부 산하에 전시체제의 문화, 예술단체를 발족시킨 해였다.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한 우향은 전반적인 동양화를 가르치는 일본화과에 입학했다. 당시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향도 일본화로 기초를 닦고 일본화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 불행한 시대로 인한 시민지 시대의 미술교육은 그의 초기작품 , , 등에서 잘나타나 있다.일본으로 건너간 그 다음해인 1941년 제20회 선전에서 입선한 작품 과 43년 총독상을 수상한 작품 에서도 일본화풍이 잘 반영이 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동양화와 서양화의 절충형식을 흡수한 것으로, 나름대로 독특한 양식이긴 했으나 작가의 개성이 결여되고 식민지 시대의 회화정신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우향의 예술절 배경은 불행한 출발에서 시작된다 할 수 있다.우향의 회고담을 보면,40명에 가까운 교실에서 한국학생이라고는 나 하나 뿐이었다. 원래 여학교시절부터 일인과 합동교육을 받아 온 나는 나도 모르느 사이에 어느 민족적 경쟁심이라 할까 이런 것이 생기고 그 마음은 이곳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더욱이 조국의현실과 장래를 지고 가야 하는 우리의 임무를 생각할 때 유학생이라는 명칭은 사치품은 아니였다.라고 적고 있다비록 일본화를 배우지만 나라 잃은 서러움에 부단히 노력하고자하는 흔적과 조국을 걱정하는 우향의 마음을 드러내 준다.당시 일제 식민지로 인한 민족 말살정책과 문화의 탄압은 적잖은 예술가들을 비굴하게 만들었다. 화가들은 예술 그 자체를 위한 작업이 아닌 일본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여 때로는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붓을 잡아야 했으며, 징용을 선동하기 위한 만화나 일본을 추대하는 책표지의 삽화등을 강제로 그랴야 했다.1945년 8{CDOT15해방과 함께 일본의 잔재 청산이 강하게 불어닥쳤다. 방향을 모색하던 한국화단은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는지 조차도 모른체 막연히 전통만을 옹호함으로서 1949년에 실시된 제1회 국전에서 수묵화가 주류를 이루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이는 당시 동양화단의전반적인 현상으로 겉으로 드러나느 일본화풍의 탈피에만 급급하였음을 알수 있다.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완전히 일본화법으로 그려진 우향의 작업 또한 일제 식민지가 막을 내렸고, 그간의 모든 일본색의 추종과 감염이 비판되면서, 정신적 문화적으로 고유의 민족색을 찾고 자주성회복이 강력히 제기되던 해방직후의 새로운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20대 신진이었던 우향도 화가로서 새롭게 시작하지 않은면 안되었다.일본화풍의 탈피를 위한 모색을 하면서 같은 길을 가는 운보와의 결혼은 작가적 생애에 있어서나 작품세계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운보 없는 우향의 예술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인생과 예술에 있어 비슷한 길을 갔지만 운보의 영향을 자기식으로 수용하고, 가족과 운보를 사랑하는 만큼 그만의 예술세계에 있어 독자적 영역을 확립하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탈피와 자기성숙 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아 도전하는 우향의 예술은 대체적으로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탈피하려는 것과 일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것에서 비롯된다과 할 수 있는데, 1950낸대 그의 작품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기존의 화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한국적인 소재를 주로 다푸고 있음을 알수 있다. 특히 그의 작품 속에서는 우리 나라 옛 여인들이 즐겨 등장하는데 여인의 머리모양이나 저고리, 치마가 지니는 특유의 색감과 형태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는 선묘의 단순함과 경쾌함을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이렇듯 우향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여인상 속에서 우리의 고유한 미감의 원형을 찾고자 했는데 1950년대에서부터 60년대에 걸치는 10여년 동안 줄곧 여인상만을 다루고 있다. 처음 40년대의 여인상들은 대체로 일본화의 화법을 그대로 원용한 것으로, 배경을 없애고 인물만을 단조롭게 클로즈업시키는 평면화법은 운보의 스승인 이당 김은호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지만, 아무튼 그것이 근대적인 미감을 추구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화법임에는 틀림없다. 이 점은 우향 자신의 작품경역에서도 서서히 드러나느 것이다. 왜냐햐면 우향의 작품은 그 후로부터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우향에게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는 색채표현에 있어서 점묘적인 방법, 혹은 번지기 수법이 나타나며 인물 자체에서도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과거의 단조로운 인물이 점차 복수로 등자하게 되고, 인물을 형태적으로 왜곡시킨다거나 혹은 선들이 경직되면서 점차 조형적으로 발전됨을 보게 된다. 즉 입체적인 요소가 가미된 현대회화의 기법을 원용하게 됨으로써, 서서히 일본화의 스타일에서 벗어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우향은 반추상적 표현의 작업을 거치고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추상화 작업에 몰입하는데 이는 어릴 적 농촌에서 자라면서 보아왔던 민속품이나 맷방석, 엽전꾸러미 같은 데서 얻어진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었다.이처럼 그가 걸어온 탐구의 길은 일본화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적인 미감을 찾고자 한데서 그의 예술적 배경은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타민족으로부터의 지배로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민족의 미학을 추구하고, 창작의 끈을 늦추지 않았던 그의 예술적 역정은 작품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 되리라 본다.박래현의 예술관{소박한 감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할 수 있다. 우향 자신에게 있어 예술은 멀리서나 어렵게 찾을 것이 아닌 일상에서 구해져야할 성질의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즉 그것들은 인간의 감정 속에 어떤 귀한흐름의 움직일 때 얻어지는 것이며, 감정이 자유롭게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 웃음과 슬픔과 놀라움의 진폭을 밀도 있게 형성할 때 거기에 예술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지구환경과학 과목박종길 교수님 교수학과학번이름{엘니뇨란 무엇인가?{원래 엘니뇨라는 말의 뜻은 페루 연안의 따뜻한 해류를 가르키던 해양학상 용어로써, 스페인어로 "아기예수" 또는 "남자아이"라는 뜻입니다.지금 전세계에 기상 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이러한 기상 이변은 세계 각국에 자연 재해를 가져 왔다. 엘니뇨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상학자들은 16세기 이전부터 발생한 것으로 추측한다. 엘니뇨가 발생하면 흔히 페루에 홍수가 발생하는데, 페루의 옛 유적에서 산사태에 의해 매몰되어서 폐허가 된 도시가 발견되기도 했기 때문에 아주 오래 전부터 엘니뇨현상이 일어났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엘니뇨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때는 페루 연안에서 잡히는 안초비 어획량의 급감과 더불어 전 세계적인 곡물 흉작이 일어난 1972년이다. 그리고 '82년과 '83년에 걸쳐 발생한 '세기의 엘니뇨'로 엄청난 경제적, 인명적 손실을 일으키면서 엘니뇨는 기상 이변과 자연 재해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일본 기상청의 보고에 따르면 올해에도 적도 부근 태평양의 수온이 4월부터 급상승해 지난 '82∼'83년의 사상 최고 수온에 접근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엘니뇨현상은 기존의 엘니뇨보다 더 큰 피해를 줄 것으로 예상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있다.엘니뇨는 원래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이 해류가 12월말경에 가장 심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남미 페루 연안의 바닷물의 온도가 올라가는 계절적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바닷물의 온도가 올라가면, 연안 바다에서 물고기 떼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비가 많이 내린다. 그러므로 어부들은 고기를 잡으러 가지 않고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다. 엘니뇨가 '아기 예수'라는 뜻으로 의미가 변하게 된 다른 이유도 있다. 그것은 엘니뇨 때문에 물고기들이 이동하게 되어 어획고가 감소하므로 어부들이 고기가 잘 잡히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한 달 가량 지속되었기 때문에 더욱 간절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최향 - 한반도{엘니뇨현상이 다른나라뿐만 아닌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엘니뇨 때문에 나타나는 변화는 특정 어떤 곳에만 한정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에 걸쳐 나타나는 것이다. 엘니뇨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몇 가지 자료 분석을 통하여, 엘니뇨가 발생하는 해에는 우리나라의 겨울철 평균 온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여름철 강수량의 변동에 있어서는 6개월 후인 겨울철 열대 태평양 해수면 온도 변동과 관련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한반도 여름철 강수량이 증가하면, 그 해 겨울철 열대 해수면 온도가 증가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기후중위도 지방에 위치하고 있어서 적도 태평양뿐만 아니라 북서쪽 고위도지방에서 흘러들어오는 공기의 흐름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 세력이 엘니뇨의 영향과 함께 겹쳐져서 우리나라에서는 열대나 아열대 지방처럼 엘니뇨의 영향이 나타난다. 그리고 엘니뇨와 동반되는 해수면온도 변화는 열대지방뿐만 아니라 중위도 해수면온도에도 나타난다.또한 엘니뇨는 2∼6년 주기로 나타나는 기후시스템의 자연변동 현상으로 태평양 상에는 엘니뇨 변동과 연관되어 있는 매우 다양한 해수면 온도변동이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지구상에는 엘니뇨에 직접적(동시적)으로 영향을 받는 지역이 있는 반면 엘니뇨와 연관되어 나타나는 해수면 온도변동에 영향을 받는 지역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름철 몬순 강도와 엘니뇨는 음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엘니뇨 해에는 몬순이 약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몬순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반도의 기후가 엘니뇨에 영향을 받을 것으로 유추된다. 한반도 기후가 엘니뇨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1994∼1995년의 가뭄과 북한지방의 홍수, 1996년과 1997년의 북한지방 가뭄 등은 엘니뇨 영향임이 밝혀졌다. 특히 금세기 최악의 엘니뇨가 형성되었던 1997년 8월 중순 이후 극심한 가뭄이 나타났다. 그러다가 11월에는 3, 4일 간격으로 많은 비가 내려 다목적 댐 유역라졌다. 또, 5월 이후에나 발생하는 말라리아가 벌써 발병하는 등 병충해가 일찍 발생하여 이상조짐을 보였다.. 환경에 끼친 영향수질피해98년 여름, 우리나라 국민들은 중국 양쯔강 일대 홍수를 남의 나라 일인 양 생각했지만 그 홍수를 일으킨 중국대륙 저기압이 지리산 일대의 남부지방에서부터 영향을 주기 시작해서 우리나라의 곳곳을 물바다를 만들었다. 98년 집중호우의 위력은 대단했다. 1년 동안 내려야 할 비와 맞먹는 양이 20여 일만에 쏟아진 것이다.당시 서울지역의 경우 한달 동안 1202.8㎜의 비가 내렸는데 당시 지난 30년 동안 연평균 강수량인 1369.8㎜의 88%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이 비로 인해 인명, 재산피해도 일어났고, 이 비로 인해 식량 수급의 어려움을 우려하는 전망도 정부에 의해 제기됐다.이상화탄소 증가98년 일어난 엘니뇨현상으로 인해 우리나라 대기 중에 있는 이산화탄소의 증가 추세가 더욱 빨라진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이 하와이에서 관측한 결과에 따르면 이산화탄소량 급증 추세는 세계적인 경향이었다. 원인은 엘니뇨가 초래한 지구 온난화로 인해, 땅속 이산화탄소 방출량 및 생물들의 이산화탄소 방출량이 함께 증가했기 때문이라 추정했다.. 경제 사회에 끼친 영향수산물피해해수면 온도 상승으로 비브리오 패혈증 주의보가 예년보다 보름정도 빠르게 발령되자 수산시장과 횟집들이 큰 타격을 받고 있다. 동해안 가리비 양식장의 어획량도 절반 이상 줄어들었고 석회조류의 이상 번식에 따른 백화현상으로 수산물도 격감하고 있다. 엘니뇨의 영향은 먹는 물에까지 미쳐 팔당호의 경우 이미 녹조주의보 기준을 넘어섰으며 남해안에는 적조 조짐을 보이고 있다.농작물 피해수박·참외 등 여름과일이 예년보다 보름정도 일찍 출하됐지만 비를 자주 맞아 맛이 떨어지고 작황도 좋지 않다. 마늘·양파 등 겨울에 파종한 농작물은 잎만 무성할 뿐 알이 드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작물 수확 감소로 인한 경제적 피해콩, 옥수수 등 주요 작물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이들 작물의 생산4 도정도 상승하기 때문에 호남지역에서 쌀 생산량이 30% 감소하고 배, 포도, 복숭아 등 온대성 과수가 정상적인 생육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예측했다.해양 생태계 분포의 변화연근해 수온 상승과 쿠로시오 난류의 강세로 90년대 들어 어류의 분포, 동물성 플랑크톤 분포와 해파리류 밀도 증가 등 해양 생태계 분포가 변하고 있다고 밝혔다.엘니뇨 등 최근 해양 온난화에 따라 겨울철 연근해 수온이 상승하면서 연근해 어류 분포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99년, 국립수산진흥원은 최근 남해안 일대를 조사한 결과 제주도에서 추자도를 거쳐 남해도 연안의 최근 수온은 30m 대가 14∼17 , 표층이 15∼20 를 나타내 예년보다 1∼2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고, 최근 30년 간 수온은 각각 남해 0.61 , 동해 0.62 , 서해 0.88 상승했다고 보고되었다. 특히 겨울철 해양 온난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이에 따라 최근 남해안의 경우 여름철 북상했던 난류성 어종 삼치가 연안을 따라 남하해 머물면서 밀집어장을 형성하고 있고, 방어도 겨울을 보내기 위해 남하하던 과정에서 수온이 높고 먹이생물이 풍부한 제주도와 추자도 근해에 몰려있다.엘니뇨의 영향 - 중남미 지역{엘니뇨의 시작은 페루 앞 바다의 수온상승으로 감지하게 된다. 즉, 엘니뇨는 페루 근처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남미 국가 중에서 페루가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실제로 벨라운데 대통령의 정부는 세기의 엘니뇨라고 불리는 '82∼'83년의 엘니뇨 때에 홍수로 인한 막대한 피해 때문에 민심을 잃고 붕괴되었다. 한 보도에 의하면 그때 입은 피해에 대한 복구가 아직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그렇다면 중남미 국가 중에서 페루만이 이런 큰 피해를 입는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칠레, 콜롬비아, 브라질, 볼리비아 등 해안과 내륙을 할 것 없이 모두가 큰 피해를 입는다. '82∼'83년의 엘니뇨 때에 중남미의 대부분의 국가가 홍수 또는 가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중남미지역에서만 홍수와 가파괴된다. 특히 72-73 년의 엘니뇨 해에는 멸치가 거의 잡히지 않았고, 구아노도 거의 멸종 위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페루의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브라질'94년의 엘니뇨로 북동부 지역에 가뭄이 계속 되면서 소, 양, 돼지 등 가축의 60%이상이 죽었다. 올해의 엘니뇨로 가뭄이 계속 이어져서 아마존이 화재에 휩싸여 있다.. 볼리비아올해의 엘니뇨 때문에 내린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고, 산사태가 발생해서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현재 전국이 엘니뇨에 의한 폭염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부는 남부의 추키사카, 포토시 등 2개의 주를 재해지역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자본이 없기 때문에 엘니뇨에 대비하기 위해서 국제사회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고, 동부의 산타크루스시는 파라이강의 범람에 대비하기 위해 유럽으로부터 200만 달러의 지원을 받았다.. 칠레올해의 엘니뇨로 건조한 사막지대에서 30가 넘는 홍수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상고온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콜롬비아엘니뇨로 인한 가뭄 때문에 커피 재배에 막대한 손실(1천 7백만 달러; 약 1백 70억원)을 입었다.. 멕시코'82년의 엘니뇨로 미국의 센디에고와 인접한 티타나시에서 폭우로 인한 산사태 때문에 인명피해를 입었다. 올해 9월 21일에 시속 190km의 바람을 동반한 헤리케인 '노라'가 서부해안에 상륙하여 그 일대를 폐허로 만들었다. 인근의 동태평양에서는 해수의 온도 상승으로 산호가 죽고있다.. 코스타리카이미 엘니뇨에 의한 고온과 한발로 쌀, 콩, 옥수수, 커피 및 어업과 목축부분에서 수 백억 달러의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고 인근의 동태평양에서는 해수의 온도 상승으로 산호가 죽고 있다. 그리고 전염병의 일종인 댕기열도 40%정도 증가했다. 남미 서안의 페루 연안에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바다 하층의 찬물이 올라오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바다 밑에서 영양가가 높은 유기 물질이 바다 위로 계속 공급되어 어류가 풍성하고 이에따라 세계 5대 어장의 하나로 꼽힌다.이렇게 엘니뇨는 세계 있다.
1. 해체음악해체음악의 이해해체는 구조의 그물망이 완결된 곳을 찾아 그 논리적 매듭을 풀어 그 구성 이론을 규명하여 재구성함을 뜻하는데, 데리다는 『목소리와 현상』(7장 「기원의 보완」)에서 "음악의 악보 역시 지시적 기호이다."라고 주장을 하며, 음악에 해체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음악의 악보 역시 지시적 기호이다."의 의미는 악보는 어떤 악기를 어떤 손가락으로 어떻게 연주하라는 지시적 기호지만, 동시에 표현적 기호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악보에 적힌 새로 만든 동요를 보고 노래를 부르는 교사에게 이 악보는 표현적 기호이다. 그러나 피아노에 앉아서 이 악보의 기호들이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움직여야 하는 학생에게는 지시적 기호이다. 서양 음악사에 나타나는 해체적 성격의 음악음악사에 있어 11세기와 20세기초반, 즉 2번에 걸쳐 해체적 성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1세기를 전후 단선율 음악에서 다성 음악으로 옮겨짐. 11세기에 발생하여 12세기에 본격화되는 두 성부 이상의 음악의 발생은 앞시대의 단선율 음악을 해체하고 나타난 현상이다. 이 변화를 발전적 변화로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적 해석이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그곳에는 해체적 작업이 숨어 있다. 두 성부의 음악을 만들면서, 동시에 울리는 두 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규칙이 필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