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Ⅰ. 서론_카페베네의 연혁 및 성공전략1) 국내 성장 배경2) 국내 2008~2012년 성장요인3) 2013~2016년 카페베네 현황Ⅱ. 카페베네의 중국 진출 요인 및 시장환경 분석1) 국내적 요인2) 현지 시장적 요인3) 마이클 포터의 5 Forces를 통한 시장분석Ⅲ. 카페베네의 중국진출 전략 및 성과1) 2012년 카페베네의 중국 진출 현황2) 카페베네의 중국진출 전략(STP)3) 카페베네의 중국 4P 전략4) 중국 진출 성과Ⅳ. 결론_카페베네 중국 사업 안정화를 위한 전략적 제언1) 중국 진출 실패 원인 분석2) 자사 및 중국 시장에 대한 면밀한 분석3) 타기업의 중국 진줄 성공 사례 분석4) 사업 정상화 및 안정화를 위한 향 후 전략 제시5) 맺음말Ⅰ. 서론_카페베네의 연혁 및 성공전략1) 국내 성장 배경가. 매출현황 및 매장수카페베네는 2008년 4월 1호점을 론칭한 이후 2년 6개월 만에 국내 매장 수 400여 개를 돌파,단기간에 최대 커피 브랜드로 성공하였다. 2009년 ‘오곡라떼’를 처음으로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녹차빙수와 와인빙수등과 함께 알코올이 없는 칵테일을 판매함으로써 메뉴의다양성을 확보하였다.나. 국내 카페베네 SWOT내부환경강점(Strength)약점(Weakness)세련된 유럽풍 인테리어로 고급스러운 느낌사이드 메뉴 차별화HQ싸이더스를 통한 스타마케팅과 PPL공격적인 매장확장으로 노출빈도 증가후발주자로써 낮은 인지도스타이미지에 치중(한예슬 카페)Coffee bean 과 비슷한 네이밍메뉴의 다양성으로 주 메뉴 홍보부족외부환경기회(Opportunity)위협(Threat)고급커피시장의 확대새로운 카페문화소비자층의 다양화소득수준의 향상,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다각화(고객과의 접점, 마케팅수단 다양)기존 대기업들의 새로운 브랜드 런칭해외브랜드 커피전문점 진출사이드메뉴 전문점의 확대저가 커피전문점의 확대다. 카페베네 STP① Segmentation② Targeting- 20-30대 여성 고객 : 유럽풍을 추구하기에 고급스럽고 위주의 다양한 음식 메뉴를 구비하고 있으며, 커피 외에도 차,음료, 주류를 함께 판매한다.미국식 커피 전문점 대비 상대적으로 매장 면적이 큰 편이고, 레스토랑 식의 소파 테이블로구성되어 있다. 또한 Take-Out 이용 고객보다는 매장 내 이용고객이 많고, 매장 이용시간이미국식 커피전문점에 비해 긴 편이다. 현재는 일본/대만식 커피전문점의 시장 점유율이 더높은 편인데 이는 커피 외에 마실 것을 선호하고 여유를 즐기는 중국 특유의 차 문화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구분타겟판매 메뉴브랜드특징미국식1선 도시바쁜직장인중심업무 지구Take-Out커피 중심스낵 위주스타벅스(미국)∙ 1999년 중국 진출, 시장점유율 70%∙ 브랜드 선호도 1위, 33개 도시 400여개 매장∙ 다양한 블렌딩 커피 위주의 Take-Out∙ 하나의 문화로 소비한다는 혁신적 개념 도입맥카페(미국)∙ 맥도날드의 커피전문점으로 타 커피대비30~40%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커피 제공코스타커피(영국)∙ 영국 최대 커피전문점으로 2006년 중국진출∙ 70여 개 매장 보유, 고급스러운 분위기시떼커피(프랑스)∙ 2003년 중국 진출, 현재 중국 내 200개 매장∙ 입지환경에 맞춘 스타일 구현, 성공적 진출대만식2-3선 도시여유 추구 고객레스토랑 분위기커피 외 다양한차 종류음식 판매상도커피(타이완)∙ 1997년 진출, 중국 내 300여 개 매장 보유∙ 지역별 독자법인 설립, 브랜드 자체 운영∙ 2,3선 도시에서의 인지도가 상당히 높음퍼시픽 커피(중국)∙ 홍콩 83개, 중국대륙에 5개 매장∙ 친근하고 편안한 매장 분위기로 접근이농 커피(중국)∙ 2005년 설립, 현재 중국 200여 개 매장∙ 커피 외에도 차, 음료, 주류 함께 판매∙ 파스타, 샌드위치 등의 메뉴 구비나. 공급자 교섭력공급자 교섭력이란 원자재 가격, 물량, 품질에 대해서 공급자가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현재 중국의 공급측면에서의 유통망은 공급자 교섭력 측면에서 보면 소수의 유통망들이 정신 없이 구성하고 있어 공급자가 행사할 수 , 신흥 부유층, 중류층, 하류층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나. Targeting이러한 시장 중국 시장을 구분한 후 카페베네의 초기 중국 진입 전략을 보면 입지적 측면에서는1급 도시의 베이징의 중심지를 타겟으로 시작된 것을 볼 수 있으며, 부유층과 신흥 부유층을 대상으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부유층과 신흥 부유층의 특징을 살펴보면 복잡한 도시 속에 빠른변화에 적응하는 회사인으로 사회적 유행의 선구자이기 때문에 외국 음식문화에 대해 관심이 있고 쉽게 수용하는 편이다. 그리고 커피소비에 따라서 커피문화도 생겨났다. 그들은 커피가 그들이일할 때 피곤하지 않도록 해주며, 품위, 트랜드 그리고 로맨틱한 생활방식 같은 느낌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커피를 선호한다. 스타벅스와 같은 세계적 브랜드 커피를 선호하며 커피 전문점에 머물기보다는 Take-Out의 형태로 커피를 마시는 성향을 보인다.다. Positioning1급 도시에 거주하는 부유층과 신흥 부유층을 타겟으로 경쟁사로는 스타벅스를 꼽고 있다. 2012년 진출 시 3년 후 스타벅스의 매장 수를 추월하여 M/S를 확보할 것이라 공표하였다. 하지만 스타벅스와 아래와 같은 컨셉 차이를 보인다. 스타벅스를 이기기 위해서 카페베네가 세운 전략은미국식 커피전문점과 대만식 커피전문점의 강점을 모으는 것이다. 1군 도시의 부유층을 타겟으로프리미엄 커피뿐 아니라 중국인이 선호하는 요거트, 차, 빙수 등의 음료 메뉴를 제공할 뿐 아니라단순히 Take-Out해가는 것이 아닌, 휴식 공간을 제공하였다. 음료와 함께 서빙되는 음식도 갓 구워낸 와플, 케익 등으로 다양화하여 중국의 현지 니즈와 프리미엄 커피전문점으로서의 강점을 동시에 가져가고자 하였다.[카페베네 포지셔닝][스타벅스와 카페베네 차이]구분스타벅스카페베네주요 음료 메뉴원두 커피 블렌딩 음료커피 & 중국인 선호 음료음식 메뉴커피와 어울리는 간단 빵/스낵와플, 케익 등 다양한 디저트매장 컨셉커피 문화 인테리어화Take-Out 중심북카페 컨셉의 유럽피언 디저트 카페휴식처로서의 공간 제공국영기업 등이 합작회사로 선정되었더라면 더 좋은 성과를 기반으로 상호 보완적 관계로 상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끝내 중국 최초로문을 연 중관춘점을 폐점한 이유도 가명점주가 독단적으로 인테리어를 변경하면서 본사와의 마찰로 가맹계약을 해지한 것이다. 이처럼 상호 보완적이고, 프랜차이즈 강점을 확대해 갈 수 있는 강점이 없는 합작회사의 선정이 현재와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평가할 수 있다. 현재 합작법인의 대표 역시 중치투자그룹에서 고용한 사람으로 교체되어 한국 카페베네의 영향력이 더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나. 통제력이 약한 독립 프랜차이즈 계약 방식 선택독립 프랜차이즈 계약 방식은 최초 진입 장벽을 낮출 수 있는 진입 방식이지만 가맹점주의 통제와 서비스 표준화가 어렵다. 중국과 같이 개발 진행 중인 국가에서 식음료 사업을 한다는 것은 표준화된 서비스, 위생성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강력한 통제하에서 표준화하여 관리될 수 있다. 하지만 독립 프랜차이즈 계약방식은 가맹점주와의 분쟁 에서도 책임 여부를 명확히 하기 어려우며, 통일된 서비스, 관리가 어려워 고객 만족도가 떨어지기 쉽다. 프리미엄 디저트 카페라는 포지셔닝에 맞지 않는 서비스, 품질 관리, 인력 관리로 위생성에대한 문제제기,서비스 품질에 대한 고객 불만, 매장 앞에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종업원이 발생한 것이다.다. 포지셔닝 오류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카페베네의 중국 진출 STP 전략의 Positiong은 1군 도시의 부유층이라는 타겟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타 도시, 타 타겟으로의 확장성을 고려하여 미국식 커피전문점과 대만식 커피전문점의 2가지 강점을 모두 가져가려는 포지셔닝을 잡았다. 이로 인하여 다양한 음료, 음식 메뉴 및 충분한 휴식 공간등이 있는 해외의 트렌디한 카페문화를 따라가고 싶어하는 1군 도시의 소비자들의 근원 니즈를 만족 시키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음료, 음식 모두 높은 가격 포지셔닝으로 그 만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고객이 발 길을 끊는 사태를 초래했다.라. 식자재 공급 라인의가장 중요한 성공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중국 시장에서의 부진함을 이겨내고, 향 후 사업 정상화를 위해 제시하는 전략은 다음과 같다.가. 사업 정상화 및 안정화 시기까지 강한 통제권을 지닌 프랜차이즈 형태로 전환현재 중국에 있는 400여개 카페베네 매장은 한국의 카페베네와 관련이 없는 매장이라고 언론을 통해 인정할 정도로, 카페베네 본사는 중국 내에서 통제력을 잃은 상태이다. 중국 일부 매장에서 돈까스, 탕수육, 라면 등 한국 정규 메뉴가 아닌 상품들이 우후죽순 판매되고 있는 점,또 눈꽃빙수, 인절미 빙수 등 국내 프랜차이즈 경쟁사 제품도 카피해 카페베네 상품인양 판매하고 있는 것이 카페베네의 통제권 상실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본사정책에 반하는 메뉴로 기업 전체 이미지 및 정체성까지 타격을 주는 심각한 상황인 것이다.시장에 안착화되어 동일 서비스, 품질 수준을 달성하기까지 향후 개설 되는 매장은 일반프랜차이즈 형태로 운영하여, 일관된 메뉴개발, 위생 설비, 원자재 구매력 향상, 물류 시스템 확보등을 구축한다. 나아가 카페베네의 프랜차이즈의 매력도를 상승시키고, 현재 부정적인 브랜드인식 제고를 위해 본사 또한 경쟁사의 역량, 소비자 선호, 소득수준, 소비패턴, 해당 지역의 경제력을 비롯한 특성, 소비자 동선과 현재 미래 상권 등을 꼼꼼하게 수치화해 분석한 후 입점위치를 선정한다. 또한 기존에 매장 수를 가맹점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전략보다 매장 개설 신청자의 경력, 투자가능 비용, 경영능력, 운영전략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매장 신설 여부를결정함으로써 상생의 관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도록 한다.나. 현지화 메뉴개발 및 제안을 통하여 매장 장악력 확장앞서 조사한 것과 같이 중국 내 커피 전문점은 크게 미국식과 커피전문점과 일본/대만식 커피전문점으로 구분되며, 스타벅스가미국식 커피전문점 스타일의 형태에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 따라서 카페베네는 간단한 음식과 함께 커피를 즐기는 대만식의 형태의 커피 전문점 안착에 집24
[목 차]Ⅰ. 중국 진출 개요Ⅱ. STP Strategy1. Segmentation2. Targeting3. PositioningⅢ. 4P Strategy1. Product2. Price3. Promotion4. PlaceⅣ. Future TasksⅤ. Discussion Questions중국 진출 개요2002년 동풍기차 25%, 열달그룹 25%, 기아차 50%, 의 지분구조로 동풍열달기아(DYK)가 2022년 9월 11일까지의 합작기간으로 설립되었다. 합작대상인 동풍기차는 중국 3대 자동차 기업이며, 기아 이외에도 혼다, 닛산, PSA등과 합작하고 있었고, 열달그룹의 경우 자동차 회사가 아니며 지분을 국가와 강소성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국영기업 집단이었다. 또한, 중국에서는 관세를 무시할 수 없기에 중방측 보직자들의 도움과 역할로 통해 이를 해결하며 중국 진입을 성공할 수 있었다.동풍열달기아는 시장 현지화를 목표로 중국인을 조사한 결과, 날렵한 형태를 선호함과 동시에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인테리어를 선호함을 알게 되었다. 이에 16가지 옵션을 반영한 full 사양으로 다이나믹하고 스포티지한 이미지의 차로 현지화하였다. 자동차 부품은 현지에서 75% 조달하고, 중국의 지형적 특성을 반영하여 엔진을 신규 개발하였다. 이러한 현지화와 중국 소비자의 니즈를 반영함과 동시에 중국인에게 친근한 천리마(Tianlima)라는 네이밍으로 성공적인 진출이 가능하였다.(출처: 국제경영연구원 제 19권 특별호 2008년 10월)STP StrategySegmentation중국 진출 시 현대와의 생산차종을 분담하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하였으나 양자간의 출혈경쟁을 최소화하면서 모든 세그먼트를 아우르는 전체 모델 라인업(Full model line-up)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동풍열달기아는 C1세그먼트 차종인 천리마를 우선적으로 투입하고, 향후 상향식(Bottom-up)전략에 따라 상위 세그먼트와 다목적 차량(multipurpose vehicle: MPV) 세그먼트로 차종을 확대하기로 결정Tianlima)는 중국 고객의 니즈를 면밀히 파악한 후 기능과 성능을 확정했다. 중국인들이 심플한 디자인, 큰 사이즈, 호화스러운 인테리어를 선호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 요소를 반영하였다. 비록 천리마는 C1 세그먼트인 소형차에 속하지만 중국사람들이 럭셔리한 사양을 선호한다는 국민성을 토대로 에어컨, 가죽의자, 듀얼 에어백 등을 기본 장착했다.또한 엔진 배기량을 더 증가시켜 엔진 파워를 향상 시켰으며, 차가 더 스피드하고 강한 품질을 가지도록 리뉴얼했다. 이는 target층에게 역동적이라는 포지셔닝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중요한 기능적 특징이었다. 이 결과, 경쟁사 대비 높은 마력과 최고의 스피드를 자량하며 고객에게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다.Price중국 파트너는 끝까지 약한 브랜드력으로 인해 저가격을 주장했지만, 기아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심지어 출시일까지 상호 합의는 도달하지 못했다.2002년 12월 천리마(TianLiMa)는 중국 소형차 중에서 가장 높은 가격인 106,800위안(1,700만원)대로 출시되었다. 특히 동풍열달기아(DYK)는 중국 가솔린의 낮은 품질 때문에 엔진을 다시 설계해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가격 정책 유지가 불가피했다. 천리마(TianLiMa)출시 후 경쟁사의 모델들은 줄줄이 가격을 낮추어 2003년 1년 동안 심한 경우 가격이 1/3로 낮아졌다. 이는 2003년 바로 이전에 경쟁제품을 산 고객들의 불만이 증가하는 요인이 되었다.Promotion천리마(TianLiMa)는 동풍열풍기아(DYK)의 첫 출시 모델로 자체 브랜드 구축에 초첨을 맞췄다. 대중 미디어 광고에 집중하기 보다는 직접 시승하는 이벤트 등을 통해 홍보를 시작했다. 역동성, Power 라는 키워드를 알리기 위해 첫 번째로 선택한 홍보전략은 천리마(TianLiMa)라는 naming이었다.이는 ①수천 마일을 다리는 말, ②시대를 이끄는 엘리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제품의 특성 뿐만 아니라 target 고객층을 대상으로 이미지를 부각시키기에 적절한 nami% 이상의 중국 고객들은 그들의 차를 에프터 서비스 받고 자동차 부품을 구입할 수 있는 4S shop에서 구매한다는 것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볼 때 4S shop이 중국 시장에서 가장 적절해 보인다는 것은 분명했다. 만약 동풍열달기아(DYK)가 일반적인 4S shop과 딜러샵을 동시에 운영하는 폭스바겐의 방식을 선택했다면, 이는 거대한 지역의 유통 채널 확보를 보장하는 장점은 있었으나, 단점으로는 브랜드 이미지 손상 및 딜러에 의해 독자적인 가격인하를 통제할 수 없음으로 인한 리스크가 있었을 것이다.반면에, 만약 회사가 국산차와 수입차를 4S shop에 전시하고 파는 Nissan의 방식으로 결정했다면, 이것은 단순화된 유통 채널과 싱글 CI 브랜드를 통합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기존 브랜드의 고급 이미지를 손상 시킬 우려가 있었다.최종적으로 여러가지 방식을 고민한 끝에 동풍열달기아(DYK)는 4S shop의 싱글 시스템을 채택하기로 결론지었다.동풍열달기아(DYK)는 아래 표와 같이 구분한 4개의 지역군을 기반으로 중국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기준으로 한 도시별 상품 집중전략을 계획하였다. 즉, tier 1, 2 도시들인 상해, 북경, 광주 등 고소득 지역을 중심으로 C, D 차급을 집중하기로 하였다. 또한 이 지역군 내의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염두 해 RV차급도 동시에 전략제품으로 런칭 계획을 세웠다. 반면 남경, 천진, 청도와 같은 중소득 지역으로서 향후 경제성장 발전 추세에 비추어 향후 tier 1, 2 도시로 성장할 tier 3 도시 에는 중소형 및 소형 차급인 B, C1, C2 차종을 중점 판매하기로 하였으며, 주로 내륙에 위치한 도시들로 현재 중국 내 경제 성장의 혜택을 크게 받지 못한 서북, 서남 등 저소득 tier 4 지역에는 소형차종인 A, B 및 C1차종을 판매하기로 하였다.동풍열달기아(DYK)는 성공적으로 대량 생산 시설을 갖췄지만 여전히 딜러 네트워크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낮은 브랜드력으로 새로운 딜러 확보와 기존 딜추구한 천리마(Tianlima)에 비교해 보면 구식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며 업그레이드 하지 않음으로 중국 고객의 마음에서 멀어졌다 할다. 제품 디자인, 기능에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고가격 정책을 유지함으로써가격 경쟁력이 낮아졌다.유통 통제력 약화에 따른 브랜드 손상폭스바겐은 4S shop과 일반 딜러를 함께 운영함으로 지역 커버리지를 넓히는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공급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일반 딜러들은 통제력을읽고 가격을 낮춰서 판매하고, 프로모션의 일관성을 상실하는 등의 현상을 발생시키며 브랜드를 손상시켰다. 고급차의 이미지로 구축한 market share를 가격 인하 정책으로 고객들의 불만을 초래했다.중국에서 천리마(Tianlima)를 첫 모델로 정한 이유, 다음 모델 선정[천리마 선정 이유]낮은 브랜드 인지도동풍열달기아(DYK)는 중국 내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낮은 상황에서 이미 80년대부터 진입해있는 글로벌 경쟁사에 대응하는 대형차나 고급차 진입 전략을내세우기는 어려웠다. 또한 전세계적으로도 인지도가 낮아 세계적 인지도를바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전략도 적용하기 어려웠다.중국 시장 상황 적합 & 고객 니즈 부흥중국은 현재 성장률이 높은 시장이고, 아직 소득 수준이 1,2선 도시에서도 천리마(Tianlima)가 속한 C세그먼트인 중소형 차의 니즈가 더 높아 시장 매력도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시장 매력도가 높은 시장에 선 진입 전략을 수립하였다.기존 공장의 생산력기존 룽첸 공장에서는 천리마(Tianlima)보다는 작은 소형차 생산 라인이 형성되어있었다. 이에 기존 자원을 최대한 활동하며 조금의 증설을 통해 생산 설비를활용할 수 있었다.성공경험이 있고 빠른 현지화 가능천리마(Tianlima)는 원래 현대의 엑센트를 모체로 하며 한국에서 성공한 경험을가지고 있어 신제품 출시에 별도의 개발 기간이 많이 들지 않아 평균적인 개발기간인 2년보다 훨씬 단축된 7개월 만에 개발 가능하다는 요인이 있었다.DYK와 BHMC간의 관계DYK는 C1세그먼트 차종인 처린마를을 등장시켜 ‘천리마’의 힘있고 다이나믹한 이미지를 전달하고자 하였음이 적절했다고 판단 할 수 있다. 이렇게성공적 포지셔닝을 확보한 천리마에 추가적인 제언을 한다면 아래와 같다.첫째, 기아 천리마가 가진 타겟이 젊고, 트렌디한 성향을 바탕으로 2002년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바이두, 텐센트를 활용한 온라인 바이럴 프로모션을 도입한다면 타겟과 신규 유통 채널, 신규 마케팅 채널을 잡을 수 있는 효과적인 마케팅 툴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4S shop을 통해 거점 영업을 한다면 온라인 몰 구축을 통해 이 거점 딜러가 닿지 않는 지역까지 커버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 몰을 통해 견적을 요청하거나 원하는 색상의 차를 봄으로써 고객의 니즈를 더욱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천리마가 고가 정책을 유지한 이유높은 원가중국의 나쁜 가솔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엔진 투자와 풍부한 옵션 탑재에따른 타사보다 높은 원가 요소가 고가 정책을 유지하는 전략을 구사 할 수 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라 볼 수 있다.4S Shop 인센티브 유지동풍열달기아(DYK)은 후발 주자로 딜러를 모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판매 자신감을 부여함을 통해 우수한 딜러를 확보해 갈 수 있었다. 이러한 우수 딜러 확보가 가능했던 요인은 1) 지속적 교육 2) 딜러 성과 보상(인센티브)가 가장 주요하다 판단된다. 이러한 딜러 육성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적절한 수익 확보는 필수적으로 판단된다.가격 신뢰감 유지경쟁 차들은 천리마(Tianlima)의 안착화의 저항을 줄이고, 판매를 확대하기 위해 가격 인하 전략을 썼지만, 잦은 가격 인하로 인해 기존 고객들의 불만과 잠재 고객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천리마는 기능과 성능을 바탕으로한 가격 유지 정책으로 신뢰감을 줄 수 있었다.동풍열달기아(DYK)가 채택한 유통방식 장단점과 효율적 유통경로동풍열달기아(DYK)는 4S Shop 단독 운영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는 자동차 제조 업체가 딜러와의 엄격한9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전봉준이 왜 녹두장군으로 불리는지, 더 심하게 그가 정확히 역사상 어떤 의미를 지닌 인물인지 몰라도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이 노래를 다들 접해 봤을 것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걸쳐 음악시간에 구슬픈 단조 곡의 음률을 가진 노래를 소개할 때 단골손님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노래의 느낌은 한마디로 우울하고 슬프기 짝이 없다. 듣다보면 누구를 위한 노래인지 사연을 몰라도 애절한 한을 나타내는 곡조임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그의 안타까운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곡을 통해서 비극적으로 끝나는 그의 혁명정신과 애국심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사실 전봉준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그에 관한 유적지는 잊혀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와 관련된 유적지들은 전라북도의 이평에 자리 잡고 이있다. 전라북도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근교 밖으로 웬만하면 떠날 일이 없는 난, 그나마 서울을 떠나는 구실인 할머니방문 도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거의 중단되다 시피 되어있었고, 다른 지방을 방문하는 일도 자연스레 사라져 버렸다. 이 때문에 고향의 유적지에 대한 조사가 과제로 주어졌을 때 비록 나의 고향은 아니지만 부모님의 고향에 있는 유적을 조사하기로 진작 마음먹었다. 다른 지방에 있는 문화유산들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던 것을 만회해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정한 것이 전라북도 정읍과 고부가 집인 아버지, 어머니의 터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전봉준 장군에 관한 유적지이고 이들은 할머니댁에 들릴 때 지나쳐가던 곳이어서 낯설지 않고 친근감이 들었다.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죽산마을은 전봉준등 농민지도자들이 고부봉기를 모의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한 곳으로, 마을 입구에는 그것을 기념하는 탑이 서 있다. 이곳은 농민군의 황토 빛 발길과 함께, 내력이 얽혀있어 돌아보면 풀 한 포기, 흙 한 점, 부는 바람까지도 무심히 보고게 틀리지 않았다. 세련되지 않은 머리모양과 옷차림, 강한 표정,,,그 안에 느껴지는 열정, 강인함은 힘없던 자의 편에 서서 거대한 자들에 대해 맞서 싸운 그다웠다. 자신이 살고있는 시대에 대한 슬픔인지, 혁명의 좌절과 자신에게 돌아올 비극적 결말을 예감한 슬픔인지 알 수는 없지만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고 있지 않고 무언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 사진을 한 동안 응시하고 있다보면 괜시리 그는 슬퍼 보인다. 전봉준이 살았던 시대와 같이 전근대적인 신분계급은 없지만 부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계층의 벽은 더욱더 높아만 가고, 정치적인 외세의 침투가 아닌 경제적인 외세의 침투가 현재 위기상황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그리 틀리지 않다. 전봉준에 관련된 역사적 장소들과 함께 그에 대한 간략한 조사를 통해 과연 그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봉준장군 고택지 >이 건물은 일명 녹두장군인 전봉준 선생이 동학혁명을 일으킬 당시 거주하였던 집이다지정번호 : 사적 제 293 호소 재 지 :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 찾아가는 길호남고속도로 태인교차로에서 나와 30번 국도를 타고 부안 방면으로 5.3km가면 신태인읍 이 나온다. 신태인읍에서 서쪽으로 고부가는 길을 따라 동진강 다리를 건너면 만석보 옛터 유지비가 보이고, 여기서 이평면 장내리로 들어가 사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엇비슷하게 직진, 안내판을 따라 우회전해 1.2km 들어가면 조소마을 한가운데 있다. 버스 편은 동서울 또는 강남고속된다. 터미널에서 수시로 있는 정주 행을 타면 된다.{{▶ 고택지 내부전봉준의 옛집 모습은 원래 있던 방 1칸, 부엌 1칸, 광 1칸의 오막살이를 훨씬 번듯하게 복원한 것이며, 집 주위에 돌담을 둘렀고 한옆으로는 집터 만한 마당까지 내어 잔디를 심어놓았다. 고부봉기가 있은 뒤에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는 동학 교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의 집을 모조리 불질렀는데, 1974년에 이 집을 해체, 보수할 때 '戊寅二月十六日(1818년 또는 187면 지금은 밭으로 변해 있다.{▶{전봉준 묘역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고택500m)전봉준 단비는 고택에서 약 5백 미터 떨어진 소나무 숲에 위치하고 있다. 단비는 유해가 없는 허비로, 비문 앞면에는 태극 문양과 갑오민주창의통수천안전공봉준지단이라 새겨져 있다. 원래는 단비만 있었으나 천안전씨 문중에서 본격적인 묘역 정비를 하여 봉분과 전봉준장군운명시비를 갖추어 놓았다.{{▶ 전봉준 공원국립공원 내장산 입구에 조성되어 있는 이 공원은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읍시에서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1894년을 의미하는 높이 18.94미터의 주탑이 건립되어 있고, 둥근 보조탑 4개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주변이 잔디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 왼쪽에는 자연석에 새겨진 전봉준 공원이란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전봉준(1854-1895, 42살, 처형){전봉준은 나라 전체가 극도로 부패했던 시기에 태어나 고 통 받는 농민의 대변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외세 의 침탈에도 강력히 맞서 싸우면서 구국의 선봉이 되었 던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조선 말기 혼란한 시대상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던 많은 사건들 중의 하나를 주도한 인물 정도로 인식 될 수도 있지만, 그는 우리 역사에 있어서 몇 손가락 안에 손 꼽혀야 할 인물이다. 중요한 인물 중 에 한 사람이다. 그는 단순히 개인적인 야망이나 뜻을 실 현하기 위하여 행동한 것이 나리라 그의 말 그대로 "아무 런 죄가 없는 민중을 위하여 그 폐해를 없애려고' 봉기하였던 그때까지의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중의 힘을 결집하여 장삼이사의 백성으로 하여금 역사의 주역이 되도록 지도해 낸 선각자였다. 말하자면 그는 역사를 소수 엘리트가 주도하는 시대에서 다수 일반 민중이 만들어 가는 시대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고부군의 폐정이 조선 8도의 그것과 같다"고 주장하였고 "일본의 조선 침투는 다른 나라의 그것과 다르다"라고 인식하여 반봉건과 항일 투쟁에 일찍이 앞장섰던 그의 넒은 시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전해지고 있다.▶ 집안내력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의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부군 향교의 장의를 지낸 창혁의 아들이다. 아버지 창혁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을 배웠으며,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태인 산외리 동곡마을에 옮겨 자리잡았을 때에는 다섯 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마지기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이었으며, 이 무렵 농사일 외에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훈장일로 생계를 보태기도 하였다.▶ 동학에 입교1890년(고종 27) 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의 도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개혁의 지도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탐관오리 조병갑농민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은 영의정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로부터 여러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는데, 나라의 가뭄등 재해가 있었어도 면세해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음행·잡기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만석보의 부는 조병갑 등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였다.▶동학농민항쟁이 동안 자연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그리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 1894년 3월 하순 드디어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명이 넘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대장으로 추대된다. 그는 4개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그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민란은 전반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었다. 1894년 4월 4일 그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중 황토현에서 영군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 함평· 무안일대에 진격하고, 4월 24일에는 드디어 장성을 출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봉준의 사형정부의 원병요청으로 청국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천진조약을 빙자하여 조선에 진출해왔다. 국가운명이 위태로워지자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그의 휘하의 10만 여명의 남접 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 휘하의 10만 명의 북접 농민군이 합
선릉과 정릉 모두 안치되어 있지만 이상하게 지하철 이름은 그냥 선릉역인 지하철 2호선 선릉역에서 내려 대략 5분여 정도 걸으면 선정릉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강남 도심 한 가운데에 수백 년 전의 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무려 1시간은 꼬박 걸어야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이 곳은 빌딩으로 둘러 싸인 강남특유의 정경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를 갖추고 있다.답사를 한 날은 추석연휴가 막 끝나고 우리 수업이 휴강 된 9월 30일이었다. 그 날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따뜻하고 간간이 시원한 바람도 불고 하늘도 높고 맑고. 과제이기에 강제성을 띄고 시작한 답사이었지만, 일단 날씨 덕에 소풍가는 좋은 기분으로 답사 장소인 선정릉에 도착하였다. 입구에서 의례적인 사진 한 방 찍고, 입구에 놓인 팜플렛을 들고 들어갔다. 입구의 공익근무요원이 너무나도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속으로 하긴 여기에 평일 날 누게 오겠냐 싶어 '참, 심심하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들어섰다. 하지만 이게 웬걸, 선정릉 안에는 꽤나 많은 사람이 있었다. 손을 잡고 산책하는 노부부, 아이들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엄마, 신문을 얼굴에 덮고 잠을 청하고 있는 직장인으로 보이는 양복 입은 아저씨, 의자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아저씨, 잔디에 앉아 책을 읽다 잠든 청년, 웃 옷이 땀으로 흥건하도록 걷기를 하고 있는 중년 남자, 우리나라에 여행중인 외국인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선정릉 안에서 좋은 시간들을 보내며 즐기고 있었다. 답사를 끝내고 맛있는 점심을 하기로 했던, 나와 내 친구는 초밥을 잔디밭에서 맛있게 드시고 있던 아저씨를 보고 "우리도 도시락 포장해 가지고 올 껄"이라는 후회에 빠지게 했다. 볕이 너무 좋아서 그 곳에서 이야기하며 식사하는 것도 정말 좋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의 답사는 시작되었다. 이 곳은 그야말로 도심 한 가운데 있는 그린벨트였다. 선정릉 공원 안에 입장하니 산에 온 것처럼 풀내음이 가득했다. 비교적 평단한 길이지만, 등숙하기는 했지만 가만히 자세히 생각해 보니 어의없게 그들의 역할을 맡았던 연기자들 이름과 그들의 연기가 생각날뿐 직접적인 지식과 연결되지 않은 나를 발견하게 되었고, 선릉과 정릉을 비교하려고 했지만 뭘 비교해야 할 지도 혼란스러워 답사의 큰 줄기의 아웃라인도 잡기 힘들었다. 보고 비교하고 그러한 것들을 집에 돌아가서 인터넷에 있는 지식을 참고하여 답사 기행문을 쓰려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최소한 답사를 진행하기 전에, 내가 답사하려는 역사적 인물들이 누구인지 확실히 하는 작업은 물론, 그 시대적 상황에 진행되었던 사상 즉 종교 정도는 알아가서 그 것들이 한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지도자인 왕의 묘에는 과연 어느 정도 표현되었는지, 시대적 차이로 인해 선종과 중종의 묘의 특징은 어느정도로 변화하고 있는가를 분석했어야 했다. 이러한 사전 작업의 부재로 인해 결국의 허술하게 보고 와서 인터넷에 나온 분석들을 보고 뒤늦게 ‘아, 그게 그거 였구나’라고 알 수밖에 없었다.마지막으로 내가 선정릉에 방문했었던것은 2년인가 3년 전 가을이었다. 그 때에 비해 능으로 갈 수 있는 산책로나 능과 능으로 옮겨가는 길에 방문객들의 이동에 용의하게 길을 확실히 정돈해 놓고 있는 점은 반가웠지만,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변화도 있었다. 전에는 정릉은 완전 비공개였지만 그나마 선릉과 정현왕후능주변에 갈색으로 테두리를 쳐있었지만 관계자에게 부탁하면 하루에 몇시간은 능 주변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었는데 이제는 아예 원천 봉쇄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멀리서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 덕에 능의 앞 쪽은 볼 수 있었지만 뒤 쪽을 바로 보는 것은 아예 불가능 했고, 몇몇의 문인석들은 당연하게 뒷모습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능의 보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겠지만 안타까웠다. 그나마 선릉과 정현왕후릉은 가까이서 보는 것은 가능했는데 정릉은 위치와 구조상 가까이서 보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멀리서 관찰하며 기념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또 이번 과제로 내가 넉한 선정릉 공원에 다음에 방문할 때는, 날씨 좋은 날 내가 좋아하는 친구랑 내가 좋아하는 도시락과 따뜻한 커피를 싸가지고, 평소 읽고 싶은 책을 옆구리에 끼고 방문하고 싶다.그럼 지금부터 이렇게 개괄적인 이야기는 그만 접고, 능의 주인공인 성종과 중종에 대해 간략한 인물 정보를 언급한 후에 구체적으로 직접 관찰한 것을 자세히 먼저 적고, 부족한 부분을 객관적 자료로 보충하는 형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겠다. 답사 보고서를 쓰는 중간 중간에 느낀 점을 쓰고, 앞서 이미 선정릉을 방문하고 느낀 점을 이야기 했기 때문에 보고서 마지막에 따로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사적 제 119호로 지정되어 있는 선정릉에는 조선시대 제 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씨를 모신 선릉과 제 11대 왕인 중종을 모신 정릉이 있다. 선릉은 조선 제9대 성종과 제2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 정릉은 성종의 아들 중종의 능이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이자 덕종의 둘째아들로 세조 2년 1457년에 태어나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25년간 학문을 장려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1494년 38세에 이른 나이로 돌아가셨다. 정현왕후는 우의정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로 성종 11년(1480)에 왕비가 되었고 중종 25년에 6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로 성종 19년에 태어나 1506년에 왕위에 올랐고 재위 39(1544)에 57세로 돌아가셨다. 성종은 재위시절 업적으로 과거 조선의 명군으로 이름이 높았던 성종의 지명도가 높았으나, 요즘은 사극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중종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선릉{선릉의 조형적 특징{관찰{이 곳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 든다. 문인석 사이로 보이는 고층빌딩들은 이 능이 얼마나 도심지에 있는지 보여주기도 하고, 이 능이 만들어지고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도 느끼게 해주고, 이러한 장소에 이러한 능이 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가져오게 해준다. 얼굴은 중후감을 주며 표정은 사실적으로표현하였으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마석 2쌍, 양석 2쌍, 호석 2쌍, 정자각, 수라청, 망료위, 표석1, 홍살문, 재실로 되어 있다. 복두의 높이는 53cm로 턱 아래에서 박두끈으로 매어져 있다. 소매에는 4개의 융기선이 아래로 곡선을 만들어 너비가 143cm가 된다. 후면의 양각은 어깨 아래의 포를 부드럽게 내려 온 하수형 전각복두로 하여 실감있는 표현을 하였다. 첩리소매 넓이도 70cm가 되며 수직으로 내려져 있다. 홀은 길이 24cm, 폭 17cm가 되는데 상부만 나타나 있고, 전면의 관대도 첩리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배면을 참조하면 포의 중간 정도에서 착용되었으며 네 개의 사각형 안에 네 개의 판화가 있다. 나머지 요대 중 왕릉 2기, 후릉 1기는 우에서 좌로, 후릉의 다른 1기는 좌에서 우로 하여 대각선으로 내려오고 있으며, 맨 끝에는 1개의 사각형 안에 화판문이 있다. 신발은 포의 하단에 가려서 전면이나 측면을 볼 수가 없다. 무인석은 전체 길이 290cm로 안구를 중심으로 한 안면이라 생각되는데, 한국인과는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는 상이다. 투구의 정개에는 원형이 솟아 있고 그 주위에 4면으로 연주문이 시문되어 있다. 어린문이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있고 투구끈이 턱 아래에서 매어져 흉부의 좌우로 늘어져 있다. 갑옷은 전체적으로 솟을고리문이며, 흉부 가운데 대까지 3개의 연주문으로 할개식으로 되어 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싼 상태에서 칼을 잡고 있으며, 귀면문은 복부와 칼 손잡이, 양어깨에 시문되었다. 견갑도 솟을고리문양이고, 화문의 단, 융기종선의 토수로 처리하되 중앙은 연주문, 소매 끝은 화판으로 하였다. 늑갑은 2줄의 융기선 안쪽으로 서운을 나타냈으며 갑옷은 그 밑에서 무릎까지를 가리면서 단은 화판문, 그 다음은 보주를 3개씩 1조로 하여 시문하고 경계를 융기선으로 처리하였다. 칼 길이 149cm, 칼 집 길이 127cm로 소매 아래에서 끈 2개가 내려와 칼집을 고정시키되 끝에는 술을 달아 실물을 보는 것같이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궁릉소장유물경왕후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계비 윤씨는 원자를 낳고 그 후유증으로 열흘 만에 25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윤여필의 아들이요 죽은 장경왕후의 오라비인 윤임의 집안에는 비상이 걸렸다. 자기 집안 규수를 왕비로 보내 놓고 얼마나 기다렸던 원자의 탄생이었던가. 왕비로 책봉 된지 10년, 중종의 보령 스물 아홉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왕비가 죽은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핏덩이 원자를 끝내 지켜서 세자로 책봉하고 왕위로 이어지게 해야만 한다. 그래서 다음 계비도 자기 집안의 규수로 책봉되도록 했지만 의도와는 달리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것을 가리켜 양호위환이라고 하는가. 제2 계비가 된 문정왕후는 총명하여 중종의 총애를 받았고 드디어 왕자를 낳았다. 그러자 문정왕후는 물론 그의 오라비 윤원로, 윤원형 형제는 생각이 달라져서 사랑 받는 문정왕후의 아들이요 자기들의 생질로 왕통을 이어가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모두 세조비 정희왕후의 친정 후손들이었던 이들은 집안 간의 피나는 싸움이 벌어지고, 세상에서는 이들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 일컫기에 이르렀으며, 끝내는후일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숫한 사람이 죽는 을사사화(1545)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대윤이 천신만고 끝에 기나 긴 31년 동안이나 세자를 지키는데 성공하여 보위까지 이어짐으로써 쾌재를 불렀으나 이 또한 무슨 운명의 작란이란 말인가. 그 왕이 그토록 어렵게 등극한지 8개월 만에 후사도 없이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이가 곧 인종이다. 그렇게 되니 인종의 이복동생이요, 문정왕후의 아들이 등극했고 이가 곧 명종이다. 그 때 나이 열 두 살이었으므로 교활한 문정왕후가 이 후 8년간을 수렴청정하면서 오라비 윤원형 등을 끌어 들여 권력을 휘두르면서 대윤 일파를 몰아내고 국권을 어지럽혔다. 그 문정왕후가 온갖 영화를 다 누리고 나니 죽은 후에 자기 남편 중종의 곁에 눕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중종의 능은 원래 고양 원당의 서삼릉안에 있었다. 첫째 부인은 폐비가 되었을 뿐.
어느 시대이고 문화산업을 들여다보면 대중문화(예술)와 소수문화(예술)로 나뉘기 마련이다. 남성과 여성, 가부장제와 모계중심, 이성애와 동성애, 부자와 빈자, 백인과 유색인종, 인간과 환경,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등등 사회와 문화에는 주류와 비주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파워를 가진 주류들의 지배이데올로기의 전달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대중문화와 예술이 과연 문화에서도 동일한 힘을 발휘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물론 비주류가 주도하는 소수문화가 우월하다고도 볼 수 없다. 하지만 종종 미학적, 예술성 분석을 논하다 보면 문화, 예술의 힘은 소수문화가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비주류들의 소수문화에는 자본주의에 물들어서 예술을 표현하려하지 않고, 기존세력에 저항하는 성격이 두드러져 위로부터 강요된 문화에서 벗어나 순수한 예술성을 대중문화에서보다 더 쉽게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주류의 문화와 예술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에서 비주류의 모습 뿐 아니라 주류의 모습들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집시 또한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소수집단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은 확실하다.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이 이런 소수집단인 집시를 소재로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으로 보아 소수를 통해서 다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 것을 보인다. 이 영화는 어린 집시 소년이 거칠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영상 자체가 아주 이국적이고 아름답고, 관객에게 집시들의 사실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집시들의 고유한 생활과 사고방식을 충실하게 재현하였고, 연기 경험이 없는 집시들을 직접 출현시켰다고 한다. 대사들까지 전부 집시언어로 만든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감독의 노력으로 영화는 집시 특유의 민족적 정취를 담고 있다. 감독의 의도적인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완성된 영화 속을 지켜보다 보면 신기하게도 영화 속에서는 사실과는 딴 판인 초현실적인 이상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토속적인 미신과 신비한 사건들의 결고의 어는 집시들의 마을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10대 소년이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그를 무척 아끼는 자상한 할머니와 다리가 불편한 어린 여동생 다니라, 노름과 바람으로 항상 말썽을 피우는 골칫거리 삼촌과 함께 살고있는 평범한 소년이다. 우연히 얻은 칠면조를 아들인 삼촌에게가 아닌 페르나니에게 줄 정도로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살고 있다. 페르나니는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의 아즈라를 사랑하고 결혼까지 약속하나 아즈라의 어머니는 그가 부유하지도 않고 재주도 없다. 이유로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그 일로 인해 자살기도까지 하는 순수한 청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심령의술의 능력을 가진 할머니가 병에 걸린 앵벌이 집단의 우두머리인 아메드의 아들을 고쳐주게 되자, 아메드는 그 고마움의 대가로 다니라의 다리를 큰 병원에서 고쳐주겠다고 약속한다. 아이들과 부녀자를 사들여 이탈리아 등 각지에서 매춘, 앵벌이, 도둑질 등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페르나니는 그 대열에 동행하게 되고 처음으로 할머니 곁을 떠나 마을을 벗어나게 된다. 돈 때문에 결혼반대에 부딪치고, 동생의 병을 고쳐줄 능력이 없었던 그는 돈을 벌어서 사랑하는 소녀 아즈라와 결혼하고, 동생의 다리 수술비를 마련하는 하려는 희망과 꿈을 이루려 마을을 떠나게 된 것이다. 약속과는 다르게 아메드는 다니라를 한 이탈리아 병원에 입원시켜주나 쉽사리 고쳐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페르나니에게 돈을 벌어올 것을 요구하게 되고 이러는 도중에 여동생과 이별을 하는 상황에 이른다. 집을 떠나온 페르나니는 아메드 때문에 범죄행위를 하게된다. 이러한 생활을 통해 처음으로 돈이라는 것을 만지게 되고, 순수하기만 했던 그는 세상을 경험하게 되고 그 결과 차츰 타락해 가기 시작한다. 조직이 흔들리고, 병약해진 아메드에게 최고의 동업자라고 불리게 까지 된 페르나니. 아메드는 이제 그를 믿고 새로운 사업을 위한 새로운 일거리를 맡기게 된다. 페르나니는 아메드와 똑같은행위를 답습한다. 순수 찾아가게 되고 그가 가지고 돌아온 돈을 보고 그녀의 어머니는 페르나니를 반기며 딸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 아즈라는 임신을 하고 있었고, 페르나니 아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서로의 사이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 둘은 성대한 마을축제를 벌이며 결혼식을 올리고, 후에 아즈라는 아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게 된다. 페르나니는 아이 때문에 아내를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아들을 버린다. 그 후 페르나니는 여동생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다가 아메드 밑에서 동냥으로 일하고 있던 동생을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은 황폐화되어 있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다니라는 자신이 버린 아들을 보살피고 있다. 페르나니는 자신의 삶이 이토록 불행하게 된 것은 모두 아메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결혼식장에 있는 아메드를 찾아가 정중하게 인사 한 뒤 테이블에 앉아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해 포크를 날려 그를 살해한다. 복수에 성공했지만 그는 또 다른 복수심을 불러일으켰다. 결혼식을 망쳐 버린 페르카니를 아메드의 새로운 신부가 쫓아와 권총으로 살해한 것이다.그들만의 특유한 토속적인 집시 음악 속에 플라멩고를 추는 정열적인 사람들,,이 것이 바로 집시에 대한 판에 박힌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나타난 집시들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낭만적인 집시의 모습과는 꽤나 거리가 있었다. 평범한 시골의 한 마을을 보는 것과 같이 정감 있는 영상 속에 지극히 평범한 그들의 일상사가 사실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개인적이고 고향을 떠나는 것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을 줄 알았던 그들에게는 가족을 위하는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줬고, 고향에 대한 애착도 느끼게 해준다. 순수하고 순수했던 한 시골의 청년이 가족을 위해 마을을 떠났다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세속에 물들어 가는 과정을 통해 주인공의 회개의 모습(결국 불행하게 끝나고 말지만,,,)을 담고 있는 줄거리만을 언뜻 보면 그 동안 우리들이 많이 들어것은 앞서 이미 언급한 환상적이고 신비한 초현실적인 요소들이다. 이 요소들은 중요한 매 순간마다 등장한다. 이러한 영화장치를 보다보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주인공의 꿈과 같은 무의식세계인지, 아니면 주인공의 현실인지’ 같은 착각을 들게 할 정도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일 것이다. 실제로 주인공이 숟가락을 움직이는 염력을 보여줄 때, 난 주인공의 평소 희망하는 것을 보여주는 가상의 세계라 여겼었다. 감독은 이러한 영화장치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려고 했던 것일까, 그럼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환상적인 요소를 엿볼 수 있는 영화 속 장면을 찾아보고 그것의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해보겠다.집시들은 다른 집단보다도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집단 무의식 속에서 그들의 삶과 중요한 순간들을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 영화에서도 이러한 집시들이 성향이 여러 번 등장한다. 성자의 날, 결혼식, 마술적 리얼리즘이다.1.마술적 리얼리즘ㄱ. 주인공 페르나니는 눈길만으로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염력을 지니고 있다. 동전 따위를 벽에 달라붙게 만드는 일은 기본이고 영화의 말미에서처럼 포크를 날려 악한을 응징하기도 한다. 페르나니는 이러한 신비한 능력을 아즈라에게 보여주는 행위를 통해서 서로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주인공의 능력이 당연히 신기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독특한 것은 아즈라가 그의 염력을 보았을 때의 반응이다. 못 믿어 하거나 신기해하는 반응을 보여주는 대신에, 단순히 재미있어 한다. 마술처럼 신비한 현상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영화 기법으로 인해 사실주의적이면서도 또한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ㄴ. 페르나니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즈라의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며 소리를 지르자 그의 남편이 그녀를 벽에 걸어 놓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역시 어머니는 당황해하거나 남편의 행동에 화를 내지 않는다. 벽에 걸려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장면에서는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웃음을 축제로 변한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생명과 죽음은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생명의 주어짐을 통해 삶을 살지만, 죽음으로 인해 그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고, 죽음은 삶의 또 다른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에 이 장면이 나올 때, 이것이 주인공의 상상의 산물인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순간, 그것은 바로 집시들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 듯 하다. 그들 대부분은 육체적인 측면에서 현실 속에서 실제 살아가고 있지만, 정신은 꿈속에서 방황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3. 결혼식가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족은 적대적인 세상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동세에, 집시 세계와 비 집시 세계 사이의 복잡한 관계와 정체성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 할지라도 가까운 친지들 전체를 포함한다. 결혼은 공식적인 것이든 아니든 매우 주요한 의식이며, 친지들은 결혼한 부부에게 매우 강한 압력을 행사한다. 집시 세계에서 1년은 결혼식이라는 대축제로 점철되기 마련이다. 결혼식은 매우 중요한 만남의 기회이다. 왜냐하면 그 날은 신랑신부의 가족 친지들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집시들이 다 모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중요한 의식이 때문이 롬들은 결혼 비용을 놓고 장시간 협상하는 풍습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집시들의 특징이 모두 이 영화에 드러나 있다. 페르나니가 아즈라에게 청혼한 후 아즈라 부모님께 찾아갈 때 주인공이 ‘가지고 올 수 있는 돈’이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후에 페르나니가 돈을 많이 벌어 아즈라의 어머니께 가지고 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의 어머니는 둘의 결혼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러한 결혼 승낙 후에 결혼식 장면이 나오는데, 마을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거의 모든 마을 사람이 참석한 것과 같은 많은 인원들과 풍성하게 마련된 음식은 이 날이 집시들에게 소중한 날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결혼식은 모두 안 좋은 결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