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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뢰는 무기를 이긴다 -체사레 보르자에 대하여
    로마의 한 귀족 집안에 장검 한 자루가 소장되어 있다. 그 장검은 그 아름다움으로 해서 몇 세기를 두고 "검의 여왕"이라 일컬어져 왔다. 이 칼은 그 정교한 장식으로 보아 아마도 의식때 패용 되었거나, 주인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하다. 그리고 그 검을 자세히 살펴보면 도신의 3분의 1쯤, 날밑에 가까운 부분이 금바탕으로 되어 있는데, 겉과 뒤의 폭이 넓은 면은 각각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고, 그 네 면에는 각각 "D. O. M. HOSTIA") "신은 최고이며 위대한 것, 그에 대한 희생", "CUM NUMINE CAESARIS OMEN") "카이사르의 위대한 힘의 전조와 함께" 체사레는 라틴어의 카이사르를 이탈리아어로 읽은 발음이다. 체사레는 이러한 이름의 공통성으로 해서 카이사르에 대하여 스스로 그 후계자이고자 염원했음을 알 수 있다., "FIDES PRAEVALET ARMIS") "신뢰는 무기를 이긴다.", 그리고 마지막 한 면에는 지구주위에서 평화 회복을 기리는 춤판이 벌어지는 그림으로 끝나있다.이것이 바로 체사레 보르자의 칼이다.체사레 보르자는 로드리고(후에 알렉산데르 6세) 와 반노차 카타네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하지만 체사레는 "성스러운 결합"에서 태어난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다. 하지만 그는 추기경인 아버지 덕분에 이미 16살 때 팜플로나 주교직에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는 떠들고 즐기기를 좋아하는 피사 대학의 학생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로드리고가 1492년 알렉산드로 6세로서 교황의 자리에 오름에 따라 그의 인생도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타게 된다.1492년 체사레는 아버지인 교황에 의해 발렌시아 대주교직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1493년 그는 추기경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로서 체사레는 주홍색 법의) 빨간색 모자와 함께 추기경의 상징이다.를 입게 되었다. "교회의 군주"가 된 것이다. 그가 18살 때의 일이다.그 당시 이탈리아는 자유 도시가 발전함으로서 상공업이 융성하게 되고, 그로 인해 얻은 막대한 부를 가체제를 확립하고 이탈리아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중해 동쪽의 새로운 재배자인 터키 제국의 위협도 이탈리아로선 무시할 수 없었다.많은 역사가들이 근대 이탈리아의 시작으로 보는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침입. 이 사건의 원인은 무엇일까? 크게 2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다. 먼저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명예욕 때문이라는 것과 일 모로 즉 루드비코 스포르차의 책략이라는 것이다.샤를 8세는 샤를마뉴) 프랑크 왕국의 왕. 800년에는 로마에서 서로마제국 황제가 된다.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은 삼분되어 오늘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초가 되었다.의 위업을 흠모하여 자기도 그처럼 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생각이 도달하는 것은 결국 외국 원정이었고, 그는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일 모로' 라는 별명을 가진 루드비코 스포르차는 밀라노 공국의 실력자로서 어린 조카를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을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섭정의 자리에 달갑게 안주할 생각은 없었는 듯 하다. 그는 동생인 아스카니오 스포르차와 함께 조카한테서 공작의 자리를 빼앗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섭정으로서의 오랜 실적으로 민심은 그에게로 기울고 있었으나 나폴리 왕이 어떻게 나오느냐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밀라노의 공작인 잔갈레아초 공작의 부인이 나폴리의 공주였기 때문이다. 일 모로는 여기서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샤를 8세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나폴리 아라곤 왕가를 밟아 없애는 데 프랑스를 이용하기로 결심하게 된다.1494년 1월 25일 노련한 정치가로 알려진 나폴리 왕 페란테가 죽었다. 그 왕위는 적출의 왕자 알폰소 2세가 계승하는 게 당연한 일로 생각되고 있었으나, 프랑스 왕이 엉뚱한 시비를 걸어 온 것이다. 만약 교황이 알폰소를 인증한다면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침입할 것이다. 이 것이 샤를 8세가 교황에게 보낸 협박이었다.) 샤를 8세는 나폴리보다 왕의 대관식을 주관하는 측, 곧 새 왕에 대한 인증권을 가진 로마 교황에게 항의를 제기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교묘한 속임수로 샤를 8세를 환영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해 샤를 8세를 알프스 넘어로 쫓아낸다.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보면 알렉산데르 6세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고 있다.나는 아주 최근의 실례 중에서도 한 가지만은 간과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알렉산데르 6세에 관한 것이다. 그는 사람을 속이는 것밖에 생각지 않았고 그것만을 해온 사람이지만, 그래도 속일 상대가 없어서 아쉬워한 적은 없다. 이 교황만큼 효과적으로 확약하고, 그 확약의 실행을 야단스레 맹세하고서도 전혀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속임수가 늘 그의 뜻대로 잘 통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인간의 이런 면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아마도 체사레는 이러한 아버지로부터 어느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었던 '정치'를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홍색 법의를 몸에 감음으로써 교황 다음가는 지위에까지 오른 그의 가슴속에 그것만으로 안주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움트기 시작한다. 그리고 체사레는 1498년 추기경의 자리를 반납하였다. 드디어 체사레는 주홍색 법의를 벗어 던지고 세속의 세계로 나온 것이다.우선 체사레는 프랑스 왕 루이 12세와 비밀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의 주된 내용은 체사레가 루이의 희망에 따라 교황이 루이의 이혼과 재혼을 허락하게 해주는 대신 루이는 체사레에게 군대와 영토를 준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체사레는 이탈리아의 중부 로마냐 지방에서 행동을 시작한다. 체사레는 교황인 아버지를 등에 업고 교회의 권위 회복과 횡포한 참주들의 제압이라는 대의명분을 걸고 로마냐 정벌에 나선다. 그 결과 포를리를 제압하는 등 성과를 거두나 루이의 변덕으로 다시 로마로 물러나야만 했다.체사레는 로마에서 1500번째 성탄절을 맞이하게 된다. 한편 북쪽에서는 프랑스와 밀라노가 밀고 당기는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밀라노 탈환을 꾀하여 공세로 나왔던 밀라노 공작 일 모로가 결정적인 고배를 마시고 자기 자신이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며 이탈리아 5대 열 세력 아래 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의 앞을 막는 나라는 피렌체와 볼로냐 정도 였다. 하지만 볼로냐를 향해 출진한 그의 군대는 프랑스 왕 루이 12세에 의하여 돌아와야만 한다. 이것은 피렌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였다.당시 체사레와 루이의 관계만큼 흥미진진한 것도 그리 많지 않다. 존경을 나타내며 정중하고도 친애감 넘치는 태도로 서로를 대하면서도, 철저하게 상대를 이용하고 상대편의 움직임을 견제한다. 루이는 체사레에게 '나의 가장 사랑하는 종제'라 부르고, 체사레도 언제나 '체사레 보르자 디 프란치아') "프랑스의 체사레 보르자"라고 서명한다. 서로가 속이고 있는 판인데, 상대편이 속고 있지 않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한편 루이는 자기가 원조하기는 했으나 체사레의 너무나 빠른 세력 신장에 위험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이 12세는 체사레에 대한 견제를 서두른 나머지, 그의 이탈리아 정치에서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르려 하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의 라이벌을 자신의 링 위에 불러들이고 만 것이었다. 바로 체사레를 나폴리 원정에 참가시킨 것이다. 스페인 와 페르난도와 맺은 그라나다 협정) 1500년 11월,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스페인의 왕 페르난도와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 사이에 맺어진 협정. 나폴리를 양분하여 차지한다는 내용이다.에 따라 일으킨 원정이었다. 그 전쟁에서 체사레는 루이의 용병대장으로 출전하여 1500명으로 3500명이 수비하는 카푸아를 점령하는 등) 보통 공격군이 수비군보다 많으며 가장 이상적인 비율은 공격군:수비군=1:3 이라고 한다.많은 활약을 보인다. 결국 나폴리는 프랑스의 지배 하에 들어가고 이로써 이탈리아의 양대 명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와 나폴리의 아라곤 가는 프랑스에 무릎을 꿇게 된다.그 후 로마로 돌아온 체사레는 로마 주변의 호족을 정리하고 자신의 영토를 정리하는 등 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동안 그는 그 특유의 외교술로 피사를 손에 넣게 된다. 드디어 그가 프랑스 왕 루이의 손에서 떠 '의무'가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개혁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국가나 지배자들에게는, 체사레의 이런 구상이 매우 비상식적인 것으로 보였다. 단 한 사람, 그것도 이로부터 10년 후에 이것을 실행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체사레의 매제이기도 한 페라라의 알폰소 데스테가, 캉브레 동맹에 가담하여 베네치아 육군을 무찌른 싸움에서 일시적으로 징병제를 채택하였다.당시의 이탈리아를 아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었을 이 개혁에 눈을 뜬 사람은, 26살의 체사레, 25살의 알폰소, 그리고 33살의 마키아벨리, 이 세 젊은이였다.체사레가 그 짧은 일생에서 관계를 가진 두 사람의 위대한 르네상스인 이 마키아벨리와 레오나르도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에 의해서 그 이념에 불이 당겨지다시피 하여「군주론」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그는 결코 「모나리자」를 그린 화가만은 아니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국토 계획이었다. 그는 그의 이상을 실현시켜줄 군주를 찾아 이탈리아를 떠돌아 다녔다. 로렌초 메디치의 피렌체, 일 모로의 밀라노는 물런이고 베네치아 공화국까지... 하지만 결국 피렌체로 돌아올 수밖엔 없었다. 그 레오나르도가 체사레에게서 이상적인 군주를 발견한 것이다. 체사레는 새로 일어난 군주이다, 자기 나라를 처음부터 만들어가야 된다. 먼저 성채와 요새의 완비, 그리고 정복 도상에도 시가의 정비와 운하의 건설, 도로의 건설 등 국토계획을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레오나르도의 재능은 그러한 체사레에게는 소중한 것이었을 것이다.레오나르도와 체사레.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 속에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완전한 이해의 일치였다. 여기에는 예술가를 보호하는 파트롱 대 예술가의 관계가 아니라 상대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냉엄한 목적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서로 자기의 목적을 명확히 하는 자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진지한 존중의 마음이 우러난다. 26살의 체사레도, 그리고 50살을 맞는 레오나르도도, 서로 상대에 대하여 진
    인문/어학| 2001.11.04| 6페이지| 1,000원| 조회(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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