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와 라깡.머리글.오늘날 아주 단순하게 프로이트의 혁명적인 발견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 다시 말해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알아보려는 사람은 대단한 비판적,이론적 노력을 기울여서, 우리와 프로이트를 갈라놓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편견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가로질러 가야만 한다.오늘날 맑스주의자들은 그들이 고발했던 이데올로기(정신 분석을 악용한 수정주의)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동 이데올로기들을 고발했던) 그들은 프로이트의 혁명적 발견과 그것을 혼동하여, 사실상 적대자의 입장을 인정하고 그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적대자가 그들에게 부과했던 이미지 속에서 정신분석의 실체를 승인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의 작용에 의해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특히 어려웠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지배적인 사상 은 완벽하게 자신들의 지배 역할을 수행하여, 그것에 맞서 투쟁하고자 하는 바로 그 정신들을 자신도 모르게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악용을 가능하게 했던 수정주의의 존재에 의해 그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실제 이데올로기의 타락은 정신분석의 생물학주의와 심리주의, 사회학주의로의 타락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는 프로이트의 몇몇 개념들이 모호함이 이유가 됨을 알 수 있다.오늘날 프로이트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음의 세가지 규칙을 부과한다.1 그것을 반동적으로 악용하는 이데올로기 층을 조잡한 속임수로서 거부한다.2 어느 정도 과학적인 몇몇 학문의 권위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정신분석의 수정주의가 가진 더욱 미묘한 모호함 속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3 프로이트가 사용해야 했던 개념들 속에서 이러한 개념들과 그것들이 사고하는 내용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 인식론적 관계를 확인하고 명확히 규명하기 위하여, 진지한 역사적-이론적 비판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내가 알기로는 19세기에 두세 명의 어린아이가 태어났다. 사람들이 예기치 못했던 그들은 맑스와 니체, 그리고 프로이트다. 그생아 들이다. 자연은 위반된 규칙이고 미혼모이고, 따라서 합법적인 아버지의 부재인 것이다. 서구의 이성은 아버지 없는 아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한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나는 그들이 과학 또는 비판의 탄생이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프로이트의 이론적 고독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는 사유하고자 했을 때, 다시 말해 추상적인 개념들의 엄격한 체계의 형태로 그가 매일 그의 실천과의 만남에서 찾아낸 특별한 발견을 표현하기를 원했을 때, 그는 자신의 이론의 선례, 이론적인 선조를 찾고자 헛되이 애를 썼고 결국 그것을 거의 찾을 수 없었을 때 다음과 같은 이론적 상황을 받아들이고 정돈해야 했다. 즉 스스로 자시의 발견이 위치할 이론적 공간을 구축하고, 이쪽 저쪽에서 빌려온 실을 가지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막막한 체험의 심연 속에서 무의식이라는 무진장한 물고기를 낚을 그물을 짜야했다.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바로 그때에 무의식은 말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무의식이 벙어리라고 한다. 이는 그가 당시 지배적인 에너지 물리학과 정치경제학, 그리고 생물학에서 빌려온 도입된 개념들 속에 그의 발견과 실천을 구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인식 밖의 에외적인 사항들도 나타나는 의식의 문제틀에 의해 각인된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그의 이론의 구성에 방해가 되었다. 그의 선임자라곤 작가인 소포클레서,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괴테와 금언들 정도 뿐이었기 때문에 이론의 도모는 프로이트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개념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지금 우리의 대상이 되고 있는 프로이트를 요약하면,1 실천(분석적 치료) 2 기술(치료의 방식) 3 실천, 기술과 관련된 이론.이러한 실천적, 기술적, 이론적인 이 유기적 전체는 모든 과학 분야의 구조를 상기시킨다. 형식상,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제공한 것은 과학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형식적 측면에서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관념적인 전문용어의 난해함, 그리고 때로 그것의 개념과를 제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실천적-기술적-이론적인 이 유기적 전체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안정된 총체, 확고하게 과학적인 수준에 이른 총체를 볼 수 있는가? 달리 말해서 거기서 이론은 진정으로,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이론인가? 반대로 그것은 실천(치료)의 단순한 방법론적 전환은 아닌가?이로부터 매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다음과 같은 생각이 도출되었다. 즉 그것의 이론적인 형태하에서 정신분석이 때때로 결과를 제시하기도 하였지만, 늘 그렇지는 못한 단순한 실천에 머물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단순한 실천은 기술로 이어질 수는 있으나, 진정한 이론은 없는 것이다.그러나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천 규칙들을 반영하는 맹목적인 기술적 개념들에 불과하다면, 이론없는 단순한 적용 그것은 법이 아닌가. 그것은 모든 마술이 그런 것처럼, 그것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이유인 사회적 욕구 혹은 요구에 봉사나는 그것의 마력적 효과, 여러 가지 효과들에 의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라면 샤먼 속에서 프로이트의 선조를 지적해냄으로써 정신분석이라는 사회적 실천, 이러한 마법의 이론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 분석은 부분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그런 이론을 지닌 실천인가?Ⅰ. 라깡의 첫마디는 프로이트가 하나의 과학을 확립했음을 말하기 위함이었다.정확한 진술이다. 정신분석이 하나의 과학이라면, 이는 그것이 고유한 대상을 가진 학문이기 때문이고, 또한 모든 과학의 구조에 부합하는 하나의 과학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특정한 실천 속에서 그 대상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변형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과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체계를 가진 모든 진정한 과학에서처럼 실천은 과학의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이론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하나의 계기이다. 이 계기내에서 방법(기술)으로 변모한 이론이 그것의 고유한 대상(무의식)과 이론적(인식) 혹은 실천적(치료)으로 접하게 된다.이러한 테제가 정확하다면, 속내 이야기를 주고받는 커플의 내밀한 관계를 알고 싶어하는 철학자들과 해석가들의 모지 못한다. 이 내밀한 관계에서의 환자의 고백과 의사의 직업상의 비밀은 상호주관성의 신성한 약속을 주고 받는다. 그것은 단지 실재의 한 부분, 실천 속에 있는 한 부분만을 담지할 뿐이다. 모든 과학적인 학문에서처럼 이론만이 비밀을 담지한다.프로이트는 자신을 이론가라고 저작의 곳곳에서 밝히고 있으며, 하나의 실천과 기술이 아무리 풍부하다 할지라도, 하나의 이론이 단순한 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엄정한 체계의 확립에 의해 그것의 권리를 인정할 때만 과학적이라는 평판을 받을 수 있다고 반복하였다.라깡은 이 단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프로이트에게로 돌아가자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즉 그에게서 이론을 찾아내어, 그것을 구분하고 명확히 하자.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그 나머지 모든 것은 그것으로부터 정당하게 생겨난다.프로이트로의 회괴는 프로이트 자신에게서 제대로 확립되어 고정되고 안정된 이론으로의 회귀, 깊은 성철을 통해 기반을 마련하고, 증명된 성숙한 이론으로의 회귀, 실제 삶 속에 그의 거처를 확립하여 방법론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겼기 때문에, 삶 속에 충분히 적용되어 정착된 성숙한 프로이트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학문이란 어린아이가 편견으로 살아가듯이, 유년기의 학문이란 편견으로 살아가는 것, 결국 부모의 세대를 살아가는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유년기로의 추락은 현상학자들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이름인 심리주의와 또는 맑스주의자들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실용주의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다. 서구의 이성(과학적인 만큼 법률적이고 종교적이며,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이성)은 실제로 수년간의 무지와 멸시와 모욕의 세월을 겪은 후, 그들 자신의 학문, 혹은 그들 자신의 신화에, 즉 행동주의적이건 현상주의적이건, 실존주의적이건 심리학에 또는 어느 정도 잭슨적인 생체 신경학에, 문화주의적 혹은 인류학적 형태의 사회학에, 그리고 철학에 정신 분석을 병합시칸다는 조건하에서만 정신분석과의 평화공존 협약을 맺어왔다. 결연의 가상적인 계보, 그러나 매우 실질적인 권한들과한 혼합과 공인된 학문분야로서 정신분석의 신화화에 동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하나의 학문이 다른 학문에서 빌려온 대상, 다른 학문이 버리거나 양도한 것이 아닌 정당하게 자기의 고유한 대상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 때에만 학문일 수 있다는 것을 잊었다.라깡이 개입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즉 오늘날 분석에 대한 이론적 해석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이러한 일탈과 축소 에 대항하여 대상의 비환원성인 분석의 비환원성을 옹호하기 위한 부분이었다.Ⅱ. 정신분석의 대상은 무엇인가? 인간의 분만으로부터 생겨난 조그마한 생물체의 인간으로의 변천의 결과들 중의 하나, 이번에는 이것이 바로 무의식이라는 간단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정신분석의 대상이다.Ⅲ. 라깡은 새로운 학문인 언어학의 도움으로 이론화의 시도에 성공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이미 모든 것이 언어와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한 바 있으며, 라깡은 이를 더 명확하게 밝혔다. 무의식의 담화는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프로이트는 그의 첫 대작인 『꿈의 해석』을 통하여 꿈의 변이형들을 두가지로, 즉 전이와 응축으로 요약하겨 꿈의 메커니즘 혹은 법칙 을 연구하였다. 라깡은 거기서 언어학이 지적하는 두 개의 중요한 문체인 환유와 은유를 찾아냈다. 그로써 오류, 실패한 행위, 재치있는 말, 증상은 꿈 자체의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담화의 연쇄 속으로 들어가 묵묵히, 다시 말해 귀를 멍멍하게 할 정도의 목소리로 억압 에 대한 무지 속에서 인간 주체의 언어담화의 연쇄를 배가시키는 기표가 되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형식적으로 언어학에 친숙한 하나의 역설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그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없는 유일한 영역, 즉 의미 연쇄 의 영역만을 이중적인 영역으로 삼고 있는 이중적이면서 단일하고 무의식적인 것이면서 언술과 관련된 담화라는 역설이다. 이로써 소쉬르와 그에게서 비롯된 언어학의 가장 중요한 소득물이 정당하게, 주체의 언어담화, 그들의 관계, 즉 그들의 관계와 동일한 비-관계,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중복, 전위와 .
쟝 셰노,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연구의 몇몇 시각들 , 아시아적생산양식론 ,까치.1930년경 소련과 코민테른내부에서 격렬히 전개된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관한 문제는 최근 (1960년대-발표자)에 다시주목 받고 있다. 그이유는 첫째 세계대전이후 민족해방운동의 고양과 이른바 제3세계 국가들(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발전에 따른 독특한 자본주의화나 비자본주의의 길에 주목을 가지면서 그들 나라가 가지는 특수성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둘째 비유럽적 세계에 대한 정보와 지식 진보의 결과이다. 오늘날 많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보다 더욱 상세하게 비유럽적 세계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있다. 마르크스 등의 비유럽적 사회에 대한 지식은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보다 다양하고 구체적인 지식을 가지고 세계사적 보편성에 관한 일반이론을 세우고자 한다.셋째 흐르시쵸프 시대에 나타난 스탈린에 대한 비판과 그에 따른 교조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보다 자유로운 연구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스탈린이 그의 논문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유물론 에서 제기하여 15년간 정착된 5단계설이 비판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련에서의 정치적 변화에 따른 새로운 분위기 형성과는 반대로 중국에서는 소련을 수정주의라 비판하면서 5단계이론을 더욱 더 완강하게 고짐한다. 이러한 스탈린 시대에 대한 반성과 소련과 중국같의 견해차이는 아시아적 생산을 다시 주목받게 하였다.넷째 비트포겔을 필두로하는 일련의 마르크스주의 배교자들이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개념을 부당하게 사용하여 아시아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변형,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비트포겔은 1957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동양사회- 전체적 권력의 비교연구 에서 본의의 마르크스가 생각한 아시아적 생산양식과는 거리가 먼 아시아 사회를 일종의 신비한 수리사회 와 전체주의 사회로 변형시키고 있다. 비트포겔에서는 일정한 생산력 발전의 수준에 있는 생산의 오구와의 관계에서 성립이 봉건적 단계를 거쳐 자본주의의 단계로 이행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양자의 입장은 내용을 달리하였더라도 중국 혁명의 단계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점에서는 동일시 되었다.이 토론을 계기로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은 중국과 일본에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소련에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존재를 거부하는 경향으로 기울었다. 스탈린의 경제발전 5단계에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으며 대다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문제를 동양적 노예제나 봉건제의 변향으로 보고 있었다.이러한 소련의 상황은 1965년 이후 크게 바꾸었는데 바르가의 사후 논문은 1931년 레닌그라드 대회의 결함을 명확히 밝혀내어 이러한 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시기의 토론의 교조주의의 소멸과 함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소련 뿐만이 아니라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들 까지 모두 참여하여 보련적인 역사과정에서 비유럽적 사회를 자리메김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의 기본개념인 사회구성에 관한 개념을 맹백히 하고자 하였다.반면에 중국에서는 1949년 이래로 동양의 역사를 서양의 역사와 같이 파악하여 중국역사도 5가지(원시공동체,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의 단계로 변화 발전한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시아적 생산양식 이라는 말조차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러한 중국의 역사가들은 그러나 그들이 가지는 교조주의적 태도가 가지는 어려움 역시 직면하고 있다. 예컨데 노예제 시기를 한(漢)에까지 연장시켜보는 입장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봉건제의 시기를 춘추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하 하면 기원전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이상과 같은 간단한 개관을 살펴보면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문제에서 야기되는 어려움을 잘알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문제를 무시해버리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역시 이러한 문제에 관한 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연구할 때 그러하였던 것처럼 끈기를 가지고 연구를 제개하여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논의를 위하여 우리는 역시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국가는 어떠한 방식으로 경제적 상위통제권을 가지고 생산을 통제하고 있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기본적으로 수리 관계의 거대공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농업에서 수리의 필요가 대규모의 공공사업을 가능하게 하였고 바로 이필요가 국가가 경제적 상위통제권을 가질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수리를 통해서만 국가가 경제적 상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볼수 없다. 토지에 대한 윤번제의 통제, 오로의 유지와 그 안전성의 통제(자급자족이 절대적인 아닌 만큼), 유목민아니 이방인 침입자의 군사적 습격에 대한 마을의 군사적 보호, 농민공동체의 능력을 벗어난 산업생산(광산, 야금) 등의 영역에서의 필요성에 의해 국가의 경제적 상위통제권은 작용하였을 것이다. 국가와 이와 같은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집행을 위한 대행자들과 많은 노동력을 전제로 한다. 대행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이 어떤 경로로 관료로 되었으며 농민공동체와는 어느정도의 분리를 이루고 있고 그 수장과의 관계는 어떠한였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노동력의 문제역시 대규모 공공사업에 제공되는 노동력의 원천에 대한 것과 그들의 계급적 처지는 어떠한가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스뚜루베의 경우 아시아 고대사회를 가부장적 노예제라는 개념으로 상용하고 있으며 빠랭은 총체적 노예제의 개념이 가지는 풍부함과 독자성을 강조한다.) 공동체에 대한 착취를 통해 국가는 잉여를 수취하며 이 잉여의 수취를 집행하는 것이 바로 관료들이다. 이 잉여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는데 하나는 강제의 표현인 폭력적 수단에 의해 징수된다는 것이고 다른하나는 공동체 내부의 생산능력을 초과하는 부분에 대한 표현이다.3) 아시아 사회에서 근본적인 계급모순은 무엇인가?아시아 사회는 이미 계급사회이지만 마을 공동체들이 이른바 총제적 노예제 상태 있음으로 독특한 계급관계를 가진다. 마을 공동체들은 잉여와 공물을 징수하고 군사를 징발하는 그리고 경제적 지위를 누리는 국가권력과 그대행자들인 관료와 귀족에 직접 종속되어보 는 입 장.-- 다와 라의 입장을 최초로 제기한 연구자는 퇴카이 이다.마, 이와는 달리 아시아 사회를 상이한 생산양식들(가령 노예제와 봉건제)이 결합된 형태로 생각 한다.-- 마와 같은 입장은 하나의 생산양식에서 지배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문제를 가진다는 것은 19세기 전반에 미국에서 나타난 노예제를 두고 우리는 이시기를 노예제라 칭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잘나타난다고 할수 있다.2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점주가 적용될수 있는 사회는 어떠한 사회들인가? 그리고 그것이 지니는 보편성은 어느정도인가?가, 중국주(주)왕조 시기(기원전 8세기)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일반적 특성들에 매우 잘부합된다. 토지에 대한 진정한 사적소유의 결여, 왕을 통한 고급관료에의 토지의 증여, 국가가 식량의 수집과 관리를 행하고 있는점, 토지가 정기적으로 재분배되는 마을에서의 분업은 진전되지 않고 있는점, 도시의 이중성, 생산은 마을내부에서 이루어지고 구성원들은 공납과 조세를 통해 왕과 제후에게 귀속되어 있다.한(한)대의 사회 : 사적소유가 진전되어 가는 시기로 보고 이러한 사적소유의 진전을 봉건제로 진화하는 토대의 형성으로 보고 있음. 그러나 국가가 중요한 경제적 기능 관개, 광산 등을 장악하고 있고 교역을 통제하고 나아가 제국적 관료체계는 봉건제와는 걸맞지 않는다.나, 베트남마을 공동체가 프랑스의 식민지화 이전까지 존재하고 있었으며 적어도 여(여)왕조(15-18세기) 시대부터 토지소유자들에 의한 토지의 사적 전유에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관개는 국가의 기초였고 토지에 대한 왕의 소유권이 늦게 까지 유지되고 있다.다, 한국조선시대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근본적 특성에 거의 완벽하게 부합한다.라, 인도인도의 역사는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개념을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무굴제국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찰이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관한 자신의 일반적인 사유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아울러 이것은 자료들이 지역적, 시지적 편중(인도의 에서 공동체의 성원이면서 동시에 이에 대한 실제적 착취형태로의 변화를 지적하고 있다. 아시아 사회의 기원에 관한 여구는 무엇보다 생산력의 발전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아시아 사회는 협업과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져 있는 사회이지만 여전히 원시공동체 사회와도 매우 흡사하고 유사한 모습도 가지고 있다. 인간과 공동체간의 끈이 여전이 끊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동양적 정체 라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것은 많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 역시 관심을 갖는 부분이다. 여기서 생산양식의 진화와 정치구조의 진화와는 구분하여야 한다. 정치구조에서 불안정성을 가졌다는 것이 곧 생산양식의 진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 사회에서 진화능력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 근본적인 모순을 파악하여야 하는데 이는 농민들에 대한 국가의 착위와 토지의 사적 점유를 목적으로 하는 힘들 사이의 대립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이런 관점을 가진다고 할 때 미묘한 문제를 직면하게 되는데 왜 아시아 사회는 자본주의로 발전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점에 관하여 퇴카이는 아시아 국가들의 정체성을 인정하기도 한다.아시아적 사회들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는 이른바 집합표상인데 이것은 우주의 힘의 소유자이며 들과 인간의 풍요로움을 관장하면서 동시에 최고의 입법권을 지니는 전제군주와 동일시된다. 중국의 천명사상이 대표적이다.4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원시공동체사회의 가장 일반적인 진화형태였다는 사실을 통해 다양한 지역들에서 폭넓게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기 역시 가설의 단계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제시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문제를 접근함에 있어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 원리들과 다른한편으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주제에 대해 마르크스가 행한 간결하면서도 구체적인 언급들을 고대사회의 연구에 창조적 방식으로 적용하여야 하며 이새로운 연구을 위하여 몇가지 언급과 함께 방법론적 규칙들을 표명하고자 한다.첫째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문제가 마르크스연구한다.
部體制의 성립과 구조 (고구려사 연구, 1999)2001.3.10 by 東1. 部의 성립고구려 초기 정치구조의 이해를 위해 5부의 성격과 구조에 대한 파악이 요구된다. 부는 고구려의 전시기를 통해 존재했으나 여기서는 부의 명칭이 方位名으로 바뀌기 이전인 초기 固有名의 부에 관해 살펴보겠다. 구체적인 고찰 시기는 고구려 초기인 3세기까지이다.- 部 의 용례1 部 의 기원 고구려본기 초기 부분에 나타나는 부에 관한 기술을 보면, 那 와 那部 가 혼용되고 있다. 당대에는 部라는 용어보다 那라고 하였는데 후에 한자식 용어인 部를 소급하여 붙인 것이다. 那란 어떤 천변이나 계곡의 집단을 뜻하는데, 이는 고구려 발흥지인 압록강 중류 산간지대의 하천 상하류에 형성된 집단 단위를 나타낸다. 이것은 국가 형성 과정에서 小國과 같은 것으로 상호통합과정을 거쳐 고구려 국가의 주요구성단위인 5부로 전환되었다.2 북방 종족의 部部가 편제 단위를 뜻하는 용어로 본격적으로 쓰여진 것은 에서 비롯한다. 에 나타나는 部의 용례는 첫째 몇 개의 戶로 이루어진 落 들의 연합체로 자생적 집단이며 하나의 정치단위, 둘째 한의 기미(羈 ) 정책에 따라 선비나 오환의 기존의 부가 세분되어 복속된 집단, 셋째 정치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한 파생적 집단, 넷째 고구려의 5부로 왕권 아래 귀속되어 있는 단위 정치집단으로 파악된다. 이상에서 部가 지칭하는 대상의 성격은 일정치 않지만 개괄적으로 보아 당대 중국인들이 그들과 직간접 교섭 대상이 되었던 장성 이북의 종족 집단들을 의미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괄적인 파악 이상의 구체적인 성격을 추출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해당 국가나 족속의 구체적인 역사 전개과정을 통해 고찰될 때에만 部의 실제 모습과 역사적 성격이 이해될 수 있다.3 의 部 의 용례 고구려본기에 部라고 칭한 집단은 방위명의 경우를 제외하면 연나부, 제나부, 환나부, 비류부, 관나부 등이 보인다.(연나부는 제나부와 같은 것으로 곧 절노부이며, 환나부는 순노부, 비류부는 소노부, 관나부 국가구조 내에서 집단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고 5부가 고구려를 건국하고 이끌어 나갔던 중심집단이었다는 정치적 측면이 맥족이라는 종족적 요소와 함께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도 마찬가지로 현재까지 알려진 신라 中古期 금석문에서 6부에만 部 를 사용하였다.- 部와 왕권5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를 씨족이나 부족으로 보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部의 전신인 那는 일정한 지역을 바탕으로 형성된 집단이며 部내에는 여러 집단이 있었으므로 씨족이라 할 수 없다. 또한 부족을 국가 형성 과정에서 나타나는 집단의 한 단계로, 기본적으로 비계급 사회의 집단으로 규정할 때 5부는 부족이 될 수 없다. 5부는 고구려 국가의 일부분으로 5부가 형성될 시기에 이미 사회분화가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部의 성격을 戰士團이나 행정구역 단위로 상정하는 견해도 있는데 전사단설은 의 5부 명칭을 퉁구스어의 방위 표현으로 잘못 해석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행정단위설은 각 部가 독자적인 제사 등 자치체로서의 면모를 보인다는 점에서 문제를 갖는다. 결국 기본적으로 3세기 전반까지 고구려의 部는 왕권의 일정한 통제 아래서 적어도 그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단위 정치체였다고 보아진다. 왕은 5부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던 계루부의 우두머리인 동시에 5부 전체를 통괄하는 장이었다.- 5부의 성립시기5부는 그 전신인 那들이 상호 통합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다섯 집단이다. 이는 5부의 성립시기가 압록강 중류 지역의 모든 집단들에 대한 고구려왕의 지배력이 확립된 때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대외적으로 제나에 작용하고 있던 외세를 배제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한나라 때 북과 나팔과 기인을 주었다. (고구려인이) 항시 현도군으로 와서 (한의) 조북과 의책을 받아갔다. (현도군의) 고구려 현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뒤 점점 교만해져서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고서 조복과 의책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 파악할 수 있는 위의 기록에서, 책구루를 통해서만 한군현과의 교섭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간 제나가 각각 행해오던 대외적인 외교, 무역 활동을 왕실이 통제하여 그 교섭 창구를 일원화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나중 이 무렵까지 남아 있던 여타 4나는 그 독자성의 일부를 상실하고 고구려 왕의 통제 아래서 자치를 영위하는 部가 되었다. 즉 책구루가 세워졌을 무렵이 곧 5부가 성립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태조왕 22년까지는 5부 체제가 확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2. 부체제의 구조- 部內部, 集團隸民, 侯國部는 왕권의 통제를 받으면서 일정한 자치력을 유지하는 단위 정치체로서의 성격을 가졌는데 部 내부에도 하위의 단위체가 존재하였다. 이를 部內部라 한다. 부내부 형성의 주된 계기는 제나의 상호 통합에 있었으며 부내부는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제나가 상호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인근 집단을 병합하여 반드시 부내부의 형태로 편입하였던 것만은 아니다. 고구려의 지배 아래서 동옥저의 각 읍락은 그 거수(渠帥)가 자치적으로 이끌어 나가 내부의 기존 질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구려에 공납을 바쳤다. 일종의 집단적인 예속민이 되었던 것이다. 이밖에 고구려(5부)가 세력을 뻗쳐 원근의 집단들을 그 지배 아래 복속시켜 나감에 일종의 하위 동맹국 내지는 종속국적인 성격을 지닌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이러한 侯國적 존재로서 동부여를 상정해볼 수 있다.이렇게 볼 때 고구려 초기의 部는 그 내부에 하위 자치 집단인 부내부들이 있었고 집단예민을 예하에 두고 있었으며 중앙의 왕권에 의해 일정한 통제를 받으면서 자치를 영위하고 있던 단위 정치체라고 할 수 있다. (133p 그림 참고) 이처럼 고구려 초기의 정치체제는 각급의 자치체들을 그 정치적인 통합 형태와 지배-피지배 관계에 따라 상하 누층적으로 편제한 형태였다. 이런 구조의 핵을 이루는 것이 部였다. 그래서 이런 국가구조와 그에 따른 정치운영 형태를 나타낸 정치체제를 부체제라 할 수 읍락민과 가(加)1 읍락민부체제 하 각급 자치체들 중 먼저 집단예민의 경우-동예의 읍락-를 동이전 동예조에서 살펴보면, 각 읍락은 산천을 경계로 한 구역을 지니며 각 읍락 구역 내의 산림과 하천, 초지 등은 그 읍락인의 공유지였고 족외혼의 풍습을 가져 씨족원 간에 혈연적 유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락 내에는 노비와 같은 예속민이 있고 거수와 같은 수장층이 존재하였으나 거수중 가장 유력한 자로 볼 수 있는 불내예왕 조차 그 거처가 민간에 잡재 하여 거주지의 차별화가 현저하지 못한 면을 보여준다. 이는 고구려 형성 초기의 那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에 일정한 도움을 준다. 고구려 초기의 사회구성을 이해하는 데는 비슷한 상황에 있던 부여에 관한 기사가 참조가 된다. 동이전 부여조를 보면 제가(諸加)가 몇 개에서 몇십개에 이르는 읍락들을 주관하고 각 읍락에는 거수인 호민이 있으며 그 아래 읍락의 일반민이 있었다. 전시에는 제가와 호민층 및 그들의 친족들만 출정하였던 것은 아니다. 집집마다 무기를 지니고 있다 는 읍락민들도 참가하였고 스스로 무장할 수 없는 빈한한 읍락민들이 양식을 운반하는 노무원으로 종군하였다. 이렇게 보면 당시 부여 사회는 제가층, 호민층,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읍락민, 빈한한 읍락민, 노비 등 대략 다섯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고구려 읍락의 상황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통해 피정복지로부터 공부(貢賦)와 전쟁포로 노에 등이 유입됨에 따라 사회분화가 좀더 진전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부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다. 고구려전을 참고하면 당시 5부 사회는 좌식자층, 자영농민층, 빈농층, 노비 등으로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2 대가(大加)5부의 대가층은 왕족과 부장 및 유력한 부의 부내부장 등이었다. 대가의 세력 기반은 부장이나 부내부장의 경우 우선 그들의 휘하에 있는 읍락들에 대한 지배권에 있었다. 대가들은 병력 동원권과 역역(力役) 동원권, 재판권, 공부의 징수 등의 권한을 갖고, 사적 기반 대가층은 비슷한 지배 기반을 가졌고 국가는 그들의 지배기반을 유지하는 데 긍정적 작용을 하였다. 계루부의 왕족 대가는 물론이고, 여타 부의 대가들도 그들의 지배 아래 있는 읍락의 저항이나 이탈 등의 급격한 변화를 억제하는 데 왕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특히 외세의 침공에 따른 근본적인 지배 기반의 파탄을 막는 데 있어 그러하였다. 곧 부체제 하의 고구려 국가는 5부 대가들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3. 부체제 하의 정치제도- 관등제와 제가회의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의 官 으로는 상가, 패자, 대로, 고추가, 주부, 우태, 승, 사자, 조의, 선인 등이 있고, 왕족 대가와 소노부 및 절노부의 장이 고추가를 칭하였다고 한다. 이런 간략한 기록을 통해 고구려 초기 관등제의 면모를 파악하기 위해 일단 각 官의 성격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상가의 相 은 위만조선의 왕 아래 귀속되어 있던 주요 집단의 수장으로서 휘하에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리고 있던 相 과 통하는 것으로, 상가는 4부의 장에게 주어진 위계로 보인다. 고추가는 위계라기보다는 일종의 존호로 세력이 상대적으로 큰 소노가와 절노가가 왕족 대가에 중하는 예우를 받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상가와 고추가가 세습적인 성격을 띠는 데 비해 패자 이하의 관동은 승급이 가능한 위계였다. 패자와 대로는 유사한 성격과 위계를 지녔던 것으로 보여지며 군사적 업무에 종사한 사례들을 보인다. 주부는 왕에 직속된, 대가층 출신이 아닌 인물들에게 주어졌던 위계였다. 승은 주부와 유사한 성격의 관등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관등은 그 명칭을 통해서도 하급 행정, 군사 요원에게 주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은 의 官이 관직은 아니었지만, 아직 관직과 관서 조직의 확충이 미흡한 상태에서 관등이 단지 관인의 위계만을 나타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 관등 자체가 특성을 지녀 일종의 관직적인 성격도 가졌으며, 아울러 그 관등 소지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면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이는 고구려 초기 관등제의 .
토지로부터, 꿈으로부터의 소외1. 영화 줄거리(파앤드어웨이 vs 생쥐와 인간)1892년 아일랜드에서는 소작농들을 착취하는 지주계급에 대한 농부들의 불만에 극에 달해 있다. 조셉(탐 크루즈 분)은 소작농의 아들로 자신의 아버지가 지주에 의해 죽게되었다고 믿고 복수를 다짐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지주의 딸인 쉐넌(니콜 키드만 분)에게 쇠스랑으로 찔리게 되고 이를 계기로 가까워진 그녀에게 미국으로 함께 가자고 한다. 미국에서 돈을 도난당한 둘은 고생을 하다가 쉐넌을 찾아 온 아버지에게 쉐넌을 맡기게 된다. 하지만 쉐넌은 다시 오클라호마 땅으로 오게 되고 그가 원하던 땅도 얻게 된다. 이상은 파앤드어웨이의 대략적인 내용이다.절친한 친구 사이인 레니(Lennie 존 말코비치 분)와 죠지(George 게리 시니즈 분)는 캘리포니아의 경제 침체 기간에 일자리를 찾아 나선 젊은이들. 그러나 이들의 채용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는데 이유는 레니의 유아적인 정신 능력 때문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태일러 목장에서 구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들은 목장주의 아들인 속좁은 컬리의 엄격한 감독하에서 힘든 노동을 하게 되는데. 육체적 피로가 계속되는 어려운 생활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친구도 제법 사귀게 되고 안정을 찾게 된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잠깐일 뿐, 컬리의 아름답지만 불행한 아내가 레니의 순수한 열정의 무고한 희생자가 되는 순간, 그들의 세계는 갈기갈기 찢어지게 되고 만다. 이상이 생쥐와 인간의 대략적인 내용이다.2. 인간에게 토지는 어떤 의미인가?효자이며 열혈청년인 죠셉(탐 크루즈 분)은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며 복수심을 불태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그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것은 땅을 모조리 빼앗긴 설움이다. 사나이는 땅이 있어야해! 이 말은 복수심에 우선해 그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는다. 복수심에 몰두한 그에 비해 쉐넌(니콜 키드만 분)은 순전히 현대(modern)와 자유(freedom) 를 구하는 모던 여성으로 등장한다. 즉, 전자는 자영농에의 처절한 열망, 후자는 (보장되긴 했지만)케케묵은 귀부인의 삶으로부터의 탈출이 관건이다. 물론 그 최종 지향점은 토지(land)로서 같다.그런데 둘이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서 땅을 얻기 위해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죠셉과 쉐넌은 서로의 이질적인 삶의 궤적을 이해하는 기회(고난?)를 갖게 된다. 땅을 얻겠다던 죠셉은 내기싸움꾼의 품삯에 만족하며, 자신은 정작 소외돼버린 싸움판 의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런 그 앞에서 쉐넌은 변했어! 넌 변했어! 라고 다그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쉐넌의 관점상 죠셉이 변한 것은 또한 쉐넌이 변했다는 걸 의미한다. 결국 변했어! 라고 다그치는 말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과 동의어일 것이다. 지주의 딸과 소작인의 아들 사이의 구원(舊怨)을 극복하고. 그러나 어설프다. 왜냐하면 그 극복은 아일랜드에서의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 미국 에서 애정이라는 방법으로 가능했기 때문이다.탄광지대를 떠돌며 자영개척민의 꿈을 차츰차츰 잊고 살던 죠셉이 오클라호마 땅을 향한 사람들의 행렬을 보며 다시 한번 열망의 불씨를 살린다. 그렇다. 비참한 소작농의 삶을 살았던 그는 결코 자영농의 꿈을 버릴 수가 없다. 내 땅에서 내 힘으로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열망이 단순히 토지에의 욕망 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생산을 담당하는 인간이 결코 소외되지 않는 공간으로서 토지 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깃발을 꽂아 획득한 황야의 공간은 노동하는 인간의 가치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땅 인 것이다. 텃밭의 꿈으로부터 시작해서.3. 인간의 꿈가능성을 얘기한 파앤드어웨이 에 비해 생쥐와 인간 은 우선 슬프다. 같이 보던 사람은 너무 슬프다며 눈을 가리기까지 했다. 이 영화에서도 토지는 죠지와 레니의 꿈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나약한 심리의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이끌어 내면서 이 세상은 정말로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것과 조그만 땅을 갖고 소박한 전원생활을 하고 싶은 꿈이 얼마나 모순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즐겁게 사는 컬리와 같은 인간보다 자신의 인간적 장점을 계발시키는 것이 더욱 올바르며, 켈리의 아내처럼 인생을 부정하는 것보다 미래를 긍정하는 자세가 더욱 훌륭하다는 명제를 원작자 스타인 벡은 제시하고 있다.캔디의 늙은 개가 동료들의 강권(!)으로 죽어나갈 때 죠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늙은 개와 같이 살기에는 주위 사람들이 힘들고 불편하다. 주위 사람들은 그 개 스스로도 힘들고 불쌍한 삶을 살고 있다고 규정한다. 그리고는 시혜를 베푸는 표정으로 개의 뒤통수를 날린다. 통증이 없을 거라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니는 개와 같은 신세(!)로 삶을 마감하게 되는데 정말 레니는 그 스스로도 버겁고 불쌍한 삶이라고 생각했을까? 그에겐 토끼를 키울 꿈과 작은 집에서 조지, 캔디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갈 꿈이 있었다. 이러한 꿈을 가진,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꿈에 행복한 공상을 하던 레니는 진정 불쌍한 사람이었을까? 도망다니던 레니를 발견한 죠지는 예전처럼 그와 함께 새로운 일터를 찾아 도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은 농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300불이라는 거금을 가지고 있는 캔디를 버리고 대신 레니를 택하기엔 자신의 꿈이 너무 임박했고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