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1. 서론 12. 토지조사사업 硏究史 23. 토지조사사업의 수탈성 재검토 41)조선후기의 공사전 문제 42)토지조사사업의 수탈성 문제 63)토지조사사업 이후의 토지소유관계 변화 104. 토지조사사업 연구의 새로운 전망 105. 결론 13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에 관한 고찰1. 서론1910년부터 1918년 사이에 시행된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하 ‘사업’)은 조선에서 식민지체제의 수립을 위한 첫 번째 작업으로서 실시된 식민지 정책이었다. ‘사업’은 조선에 근대적인 토지소유관계를 수립한다는 명분 하에 신고주의의 방식을 통해 조선후기에 성립해 있었던 토지소유권을 최초로 ‘법인’한 것이었다. ‘사업’은 이후 식민지시기 농촌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 완전한 농업사회였음을 감안할 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도 그 영향력이 지대한 것이었다.이처럼 ‘사업’의 영향력이 지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에 대한 연구는 그리 활발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까지도 ‘사업’에 대한 연구는 피상적인 수준의,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담론에 그치고 있었던 것으로, 충분히 구체적인 실증자료를 통하지 않고도 사업의 목적과 결과에 있어서의 수탈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했던 해방이후의 시대임을 고려할 때 필수 불가결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사업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 성격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중대한 결함으로 지적할 수 있다. ‘사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80년대 후반 들어 소위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쟁이 본격화하면서 부터였다. 수탈론과 근대화론의 전선이 형성되면서 ‘사업’의 수탈성에 대한 재검토가 행해졌고 실증적 연구를 통해 사업의 근대화 성과를 인정하는 주장이 나타났다. 다시 이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이 이어지면서 사업의 내용과 성격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되었다.토지조사사업의 성격논쟁, 즉 그것이 수탈을 위한 것이었는가, 근대화를 위한 작업이었는가에 대한 논쟁일본인 대지주의 진출 및 양반지주의 매판적 지주로서의 형성의 무기가 되었으며, 바로 거기에 ‘사업’의 식민지적계급적 성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신용하, 「일제하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一考察」,『한국근대사론』, 지식산업사, 1977, 87~92p그러나 1930년대부터 해방 후에 걸친 ‘사업’에 관한 연구는 공통적으로 조선말기의 농업생산력 발전의 수준을 매우 낮게 평가함으로써 한국 내부로부터 근대적 토지개혁을 추진하는 주체가 형성되지 못하고, ‘사업’은 외래의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수행될 수밖에 없었으며 조선시대의 양반을 수조권자 또는 봉건적 영유자로 보고 ‘사업’에서는 그들에게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사업 이후에도 토지소유에 봉건적 성격이 그대로 온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내용이 관철되고 있었다.그러나 1960년대 이후가 되면 이러한 통설적 이해는 한국사 내부에도 자생적인 역사적 발전이 있었다고 하는 새로운 역사인식의 제기와 연구실적의 축적 등으로 인하여 이른바 식민사관의 견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 맹아론’ 등으로 불리는 일련의 연구들은 식민화되기 이전인 조선후기에는 상품화폐경제의 현저한 발전에 의해 구래의 봉건적 또는 특권적인 지주제가 해체단계에 들어갔다고 보고, 예를 들면 토지 경영상의 광작이나 상업적 농업을 통한 경영형 부농 김용섭, 『조선후기 농업사연구-농업변동농학사조-』, 서민지주, 상품유통과정에서 사상의 출현과 같은 새로운 경제적 실력자인 중간계층의 대두에 주목하여 새로운 조선근세상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사업’에 대한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도 재조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그 가운데서도 조선시대의 토지대장인 양안을 처음 본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조선후기에 있어서의 양반지주제의 해체, 경영형 부농의 출현 등을 주장하여 조선후기의 새로운 상품경제적 동향을 설정한 김용섭의 연구 위 김용섭의 책가 특히 주목된다. 그리고 ‘사업’에 관한 연구와의 관련에서는 이른바 광무양전의 역사적 의의를 추구한 「光武업’을 통한 직접적인 수탈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구체적인 실상은 어떠했는지, 또 직접적인 차원의 수탈이 없었다면 다른 차원의 수탈은 어떠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마지막 하나는, ‘사업’이후에 성립한 토지소유관계의 모습이 어떠하였는가의 문제이다. ‘사업’을 통해 토지사유권이 확립되었다고 한다면 실제로 이러한 정책이 농민의 삶과 경작환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1)조선후기의 공사전 문제‘사업’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문제는 ‘사업’의 배경이 되는 조선후기 사적토지소유의 발달수준과 토지소유의 발달수준과 ‘사업’과의 관계이다. 이것은 사업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로, 즉 조선후기에 공전론이 지배적이었는가 사전론이 지배적이었는가를 규명하는 데에서 시작된다.먼저 공전론의 주장은 ‘사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고 이 주장은 한동안 식민사관의 잔재정도로 인식되었다. 최초로 공전론을 주장한 사람은 토지조사국의 총무과장으로서 분쟁지 처리의 일선에서 있었던 和田一郞 화전일랑, 『조선의 토지제도지세제도조사보고서』, (조선총독부, 1920)이었다. 和田의 공전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서 전국의 경지는 공전과 사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공전은 국유지였다. 반면 사전은 사유지로 볼 수 없고, 국가를 대신하여 특정의 기관이나 개인이 수조하는 권리, 즉 수조를 수취하는 권리를 국가로부터 분여받았던 토지였다. 그러므로 사전의 전주가 가지고 있는 권리는 수조권에 불과하고, 그 소유권은 공전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속했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고려부터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경지는 모두 국유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에서 토지 국유론이 지배적이었다고 보고, 따라서 조선에서 토지에 대한 사적소유권의 성장을 원천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정체성론 등의 식민사관을 강화하기 위한 논리라는 사유론자들의 비판을 받게 된다.물론 和田은 조선 초기 과전법 단계준에 그쳤고, 때문에 ‘사업’에서 소유권 증빙의 근거로 취급되지도 못하였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조선 양전사의 主규정을 통해 여러 발전적 추이를 확인할 수 있지만, 소유자라는 근대적 사유에 준하는 主규정을 전국적으로 확립시키는 일과, 主名의 형태와 성질에서 소유자 본인의 실명과 주소를 적어 증명관계를 확보하는 일은 ‘사업’에서 달성되었다고 보았다.2)토지조사사업의 수탈성 문제공사전 문제만큼이나 첨예한 논쟁을 일으키는 문제는 ‘사업’의 수탈성 문제이다. 일제가 ‘사업’을 통해 방대한 토지를 약탈하였다는 믿음은 완전히 정설화된 것이었고, 대부분은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굳이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입증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였다.두 번째 절 토지조사사업 연구사에서 언급된 박문규는 다음과 같은 측면의 수탈성을 지적하였다. 첫째, ‘사업’에서 소유권조사가 신고주의 방식에 의한 결과, 소수의 지주가 일촌일족의 공유지나 농민의 토지까지 자신의 사유지로 함부로 신고한 반면, 소유관념에 어두운 농민은 “소유증명의 불충분과 소정수속의 불이행 때문에 선조 대대로 경작해 온 사점지를 잃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는 전국 경지면적의 1/20에 달하는 구래의 궁방전이나 아문둔전 등이 국유지로 편입되었는데, 그에 따라 “지금까지 선조 대대로 이들 토지의 현실적 경작자였던 농민”이 기한부 소작농으로 되어 관습적 권리를 상실하였다. 셋째는 종래의 산림, 초원, 황무지가 사적으로 분할되거나 국가에 의해 領得됨으로써 농민의 관습적인 ‘입회권’이 소멸되었다. 박문규의 이러한 주장들은 이후 새로운 연구들에 의해 그 논리적 근거를 상당부분 상실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통해 토지가 수탈되고 농민의 권리가 무시되었다는 믿음은 확산되고 통설화 되었다.이러한 ‘사업’의 수탈성 주장은 줄곧 이어져 신용하에 이르러 완성된다. 그는 박문규 이래의 연구자들이 조선후기까지의 토지사유의 발전수준을 매우 낮게 평가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선후기에 이미 토지사유권이 확립되어 있었다고 이해하였고 따라서 계 원자료를 이용한 실증연구 배영순,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있어서 김해군의 토지신고와 소유권 사정에 관한 실증적 검토」등을 통해 그 논리적 근거의 취약함이 드러났다. 無申告地의 비중은 전국적으로 0.05%에 불과했으며 지주총대는 경제적으로 하층에 속하는 조사국의 말단 직원 정도로 지주계급의 대변자가 될 수 없었고, 그들의 신고서 날인도 신고의 접수 여부를 결정할 정도의 권력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또한 일제는 기한이 지났어도 근거가 있는 신고에 대해서는 접수를 마다하지 않았고, 더구나 무신고지에 대해 연고자를 찾아서까지 신고를 독려하였다. 김해의 사례는 분쟁지의 처리에 있어서 편파적 판정이 없었음을, 또 총독부가 분쟁에서 민유 처분에 비교적 관대했음을 보이고 있다. 이영훈外,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 민음사, 1997, 30p둘째는 ‘사업’의 목적의 하나로 거론되는 지세수탈의 문제인데, ‘사업’기간 중 두 차례의 지세 증징이 있었지만, 물가의 상승폭이 더 컸기 때문에 지세의 실질부담은 오히려 경감된 수준이었다.셋째는 ‘사업’을 통해 전체토지의 40%이르는 국유지가 강제로 창출되었다고 하는 통설의 허구성이다. 대한제국의 왕실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한 후 일제는 ‘역둔토실지조사’를 통해 국유지의 실질적 장악을 기도하였지만, 국유지 인민의 저항에 부딪혀 ‘사업’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직전 대량의 국유지를 민유지로 인정하게 된다. 이것과 ‘사업’기간 중에 새롭게 분쟁이 제기되어 민유로 인정된 것을 합하면, 당초 국유지의 30~40%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나머지 국유지조차, 인민의 지속적 저항에 부딪혀 효과적인 관리가 어렵게 되자, 일제는 ‘사업’이 종료된 다음 1923년까지 국유지를 공시지가로 綠故小作農에게 불하 처분해 버린다.넷째, 신용하가 주장하는 관습적인 경작권 수탈 문제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용하는 ‘사업’을 통해 지주의 토지사유권은 인정된 반면 농민이 관습적으로 향유하던 권리인 경작권도지권 등은 철저히 부정되었으며 이것이 일제의 방패막이 되는 지주계급의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