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2
검색어 입력폼
  • [한국사] 고려와 조선의 자기 평가A좋아요
    高麗時代와 朝鮮時代의 陶瓷器史學科 9413006박상열Ⅰ. 序論Ⅱ. 本論1.高麗靑瓷a. 高麗靑瓷의 起源b. 高麗靑瓷의 特色c. 高麗靑瓷의 種類와 變化2. 粉靑沙器a. 粉靑沙器의 起源b. 粉靑沙器의 特色c. 粉靑沙器의 種類3. 朝鮮 白瓷a. 朝鮮 白瓷의 起源과 特徵b. 朝鮮 白瓷의 時代區分c. 朝鮮 白瓷의 時代에 따른 樣式의 變化4. 沈壽官과 사쓰마도자에 대하여Ⅲ. 結論Ⅰ. 序論우리의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그 양에서 많이 존재하는 것은 도자기일 것이다. 도자기는 그 시대의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도시민이나 시골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사용한 것으로 그 시대의 삶과 꿈이 담겨 있는 당시의 미적 감각과 시대적 특징들이 잘 나타난 유산이다. 도자기는 그릇에 불과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릇이 아닌 한 시대의 삶과 문화를 담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자기를 이해하는 것은 그 시대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高麗와 朝鮮시대의 도자기 중에서 대표적인 高麗 靑瓷와 朝鮮의 粉靑沙器, 朝鮮 白瓷의 기원과 그 특색, 그리고 이들의 변화와 종류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Ⅱ. 本論1.高麗 靑瓷a. 高麗 靑瓷의 기원高麗 靑瓷는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의 하나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도자기이다. 이러한 靑瓷가 갖는 명성에 비해 靑瓷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어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이설들이 존재하고 있다.靑瓷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1930년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는데, 당시 대표적인 靑瓷연구가였던 나카오가 「朝鮮高麗陶瓷考」에서 "高麗靑瓷가 생긴 것이 언제부터인가 하는 문제는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의 시대에 중국의 靑瓷를 배우고 그 기술이 정교해진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의 시대인 1123년보다 50여 년 전인 문종때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한 이후 일제시대를 대표하는 '靑瓷 기원설'로 널리 알려져, 1960년대 초반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져 있다. 이에 대해 1960년대에 일본인 학자 는 靑瓷의 발생에 관하여 이처럼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말부터 중국의 월주요에서 전래되었다는 설과 10세기 후반에 高麗의 중앙집권화과정에서 발생하였다는 설이 있다. 필자는 후자의 10세기 高麗의 중앙집권화 과정에서의 그 당시의 지배층인 귀족들의 중국 도자에 대한 욕구에 의해서 靑瓷의 제작이 시작되었다는 설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 윤용이. 도서출판 학고재. 1996년『한국미술문화의 이해』 장경희 外. 도서출판 예경. 1994년b. 靑瓷의 특색불교사회와 귀족문화를 배경에 두고 高麗靑瓷는 은은하면서도 맑은 비색과 화려하고 당당한 선의 흐름을 지닌 형태, 그리고 독창적인 象嵌기법 및 문양을 특징으로 한다. 더욱이 高麗 이전의 기명들이 대부분 의식용 그릇이었던 데 비하여 高麗靑瓷는 합, 대접, 접시, 완, 술잔, 병, 주전자 등과 같은 실용적인 그릇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장식용 그릇인 꽃병(화병), 연적, 향로에는 오리, 원숭이, 사자, 혹은 참외난 석류 등의 동식물 모습을 표현했는데 매우 뛰어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매병은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가장 高麗 적인 특징을 보이는 형태이다.) 『한국미술문화의 이해』 장경희 外. 도서출판 예경. 1994년高麗 靑瓷의 바탕 색깔은 적록색의 고상하고 우아한 색깔이다. 그것은 청색과 녹색이 단순하게 배합된 색깔이 아니라 비취옥과 같은 느낌을 주면서 자기의 고유한 정서를 자아낸 색깔이다. 다시 말하여 高麗靑瓷의 색깔은 청색이 녹색보다 약간 강한 듯한 색감과 거기에 황갈색이나 회색이 미묘하게 비낀 독특한 갈색 계통의 밝은 청록색일 뿐 아니라, 그것이 바탕흙과 유약 속에 함유되어 있는 일정한 양의 철분이 가마 속의 높은 온도에 의하여 용해되는 과정에 얻어진 두터운 색 층의 색깔이 유리질 피막을 뚫고 우러나오는 그윽한 자기질의 색깔이다. 이 靑瓷의 색깔은 푸른색이지만 단조롭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윤기가 돌고, 선명하고 청신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포근한 맛이 도는 등 高麗자기에서만이 볼 수 있는靑瓷陽刻은 나타내고자 하는 무늬를 그릇표면에 도드라지게 하는 수법으로 靑瓷에 陰刻과 함께 사용되거나 靑瓷象形 에도 부수적으로 함께 나타나는 예가 많다. 陽刻되는 무늬는 연화, 연판, 연화당초, 모란, 모란당초, 보상화 부용, 파도, 버들과 갈대, 원앙, 봉황문 등이다. 靑瓷특징은 그릇의 표면을 透刻해서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의 靑瓷로서 透刻에는 두 가지 방법을 쓰는데, 하나는 나타내고자 하는 무늬 이외의 부분을 파내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나타내고자 하는 무늬 자체를 透刻해서 파내는 방법이다. 靑瓷象形은 나타내고자 하는 동물, 식물등의 형태를 본떠서 만든 靑瓷로, 서긍이 『高麗도경』에 기록하였듯이 숙련된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한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있다. 형태구성에 있어서 陽刻기법은 물론 陰刻이나 철채 등 다양한 수법을 겸하여 사용하고 있다. 사람, 사자, 원숭이, 오리 등의 동물형태와 식물의 형태를 본뜬 것으로 참외, 죽순, 연꽃등이 만들어졌다.둘째로, 高麗靑瓷의 장식기법 중 가장 두드러지고 대표적인 수법인 象嵌法은 문양을 陰刻하고 거기에 태토와 색깔이 다른 백토, 자토를 메우고 그 위에 靑瓷유를 씌워 굽는 것이다. 금속공예의 감입법이나 나전칠기의 象嵌法을 도자기에 응용한 것이지만 그 아이디어는 高麗인의 착상이며 이후 朝鮮 전기까지 우리 나라에서만 사용되고 성행한 기법이다. 그런데 象嵌무늬를 선명하게 나타내려면 유약 속의 기포를 완전히 제거해야 하므로 純靑瓷보다 유약색을 엷게 하고 태토와 구별되는 유리막 같은 유약으로 변화되었다. 즉 象嵌法은 유색의 아름다움 대신 문양의 장식적인 효과를 발전시킨 것이다. 象嵌靑瓷는 12세기 전반 경에 발생되어 중엽 경에는 뛰어난 발달을 이루었으며 처음에는 문양을 전면에 배치하면서도 정교하게 제작하였으나, 말기에는 갈수록 그림의 구도가 산만해지고 틀로 찍는 간편한 방법을 사용하다가 朝鮮 초기의 粉靑印花 등으로 이해된다. 주로 사용된 문양은 매병에 많이 보이는 운학문, 대접 등에 많이 나타나는 들국화, 보상당초문, 그리고 한 폭의 다.) 『아름다운 우리도자기』 윤용이. 도서출판 학고재. 1996년b. 粉靑沙器의 특색粉靑沙器는 그릇 표면을 백토로 분장하여 전체적으로 백색을 띠면 유약을 바른 후의 색조는 회청색을 띠는 도자기이다. 粉靑沙器는 한국 도자사의 큰 흐름에서 볼 때 靑瓷의 맥락 위에 있으나 靑瓷보다는 태토 내 철분의 함량이 적어 靑瓷에 비해 색이 밝아지고 유약도 희어져 전체적인 색감은 밝은 회청색을 띤다. 粉靑沙器의 특징은 그릇 표면을 백토로 씌우는 백토분장기법과 그 무늬에 있다. 백토분장의 동기는 잘 알 수 없으나 高麗말에 철분이나 잡물이 많이 섞인 조잡한 靑瓷가 제작되자 이러한 잡물을 감추기 위하여 백토로 분장하였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14세기 당시 중국도자가 靑瓷에서 白瓷로 이행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도 白瓷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표면을 백색화하려 했다고 보기도 한다.분靑瓷가 갖는 두 가지의 큰 특질, 즉 아주 한국적인 특성이 잘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또한 현대적이다 하는 이런 점을 많은 미술사가들이 일반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분靑瓷는 高麗시대 靑瓷가 갖는 깔끔하고 이지적인 느낌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보면 형태가 수더분하고 마치 숭늉 맛처럼 구수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형태와 문양에서 박진감이 넘친다는 점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혹은 아주 자유롭기도 하고 무엇에도 구애받을 것 없는 듯한 자유 분방함이 느껴진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질은 익살스러움이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보통 분靑瓷의 종류는 여러 유형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안에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을 그래서 자유로움을 자유롭게, 어떤 표현에도 구애받지 않는 그런 몸짓이 담겨 있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볼 때 우선 쉽게 느끼고 공감을 갖게 하고, 한편 미소를 띠게 한다.이런 粉靑沙器는 14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 사이에 생산되었고 15세기 전반 세종의 재위시기에 가장 다양하게 발전하여 전국에서 생산되었다. 粉靑沙器 그릇의 형태는 高麗시대의 것이 대부분 계승되면서 조금씩 변화되었으며, 대접의 5세기 전,후반을 거쳐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150여 년간을 白瓷를 흰 맛을 내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만들어진 그릇이다. 결국 高麗적인 문화가 朝鮮적인 문화로 흡수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난 청색의 세계에서 점차적으로 백색의 세계로 간 것이다. 따라서 분靑瓷는 15세기 전반에 象嵌靑瓷의 뒤를 이어서 象嵌분靑瓷, 印花분靑瓷로 이어지면서 차차 선각, 철화분靑瓷라고 불려지는 백토로 분장된 15세기의 분靑瓷가 만들어졌고, 동시에 白瓷가 공장에서 널리 만들어지고 왕실이나 관청에서 쓰는 그릇들이 白瓷로 바뀌어가자 일부는 민간의 소용품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서 보다 자유분방한 형태의 분靑瓷가 만들어지게 된다. 나중에 白瓷가 더 보편화되자 분靑瓷가 덤벙으로 白瓷화되어 가지만 마지막 몸부림일 뿐이고, 귀얄과 덤벙은 일반 민간에게 널리 쓰여지던 그런 민간의 막사발이라고 볼 수 있다.)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 윤용이. 도서출판 학고재. 1996년3.朝鮮 白瓷a. 朝鮮白瓷의 기원과 특징규사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딘 경질이 아닌 연질白瓷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靑瓷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이다. 이 때의 白瓷는 기벽의 두께가 일정하지 않고 유약에도 미세한 병력이 있으며 1300℃ 정도의 고화도로 변조하지 않아서 무른 편이며, 이후 11세기에는 초기白瓷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과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白瓷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白瓷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덕진에서 원대 청白瓷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白瓷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국로써 확인할 수 있다. 이러도이다.
    인문/어학| 2001.10.29| 16페이지| 1,000원| 조회(595)
    미리보기
  • [한국근세사] 권문세족과 사대부
    權門世族과 士大夫史學科 9413006박상열Ⅰ.序論Ⅱ.本論a. 權門世族의 形成過程과 性格㉠. 權門世族의 形成過程㉡. 權門世族의 性格b. 新進士大夫의 形成過程과 性格㉠. 新進士大夫의 形成過程㉡. 新進士大夫의 性格Ⅲ.結論☞ 참고문헌『한국사』(8) 「高麗後期의 권문세가」 민현구. 역사편찬위元회.1977년『高麗後期 權門世族층 연구』 김광철. 동아대출판부. 1991년『한국사』(5) 「新進士大夫의 성장과 朝鮮건국」.이익주 국사편찬위元회1994『역사학보』(23) 「高麗조의 吏에 대하여」. 이우성. 1964년『高麗시대사 (하)』 박용운. 일지사. 1987년『한국역사입문②』 「權門世族과사대부」 이익주. 한국역사연구회. 1996년Ⅰ. 서론高麗後期 정치사는 대내외적인 모순을 해결하면서 성장한 새로운 정치세력의 존재가 부각되었다. 구체적으로는 元 간섭기의 개혁정치를 비롯하여 공민왕대의 반元운동과 신돈의 개혁, 高麗말의 전제개혁, 朝鮮의 건국등의 과정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한 세력의 존재이다. 이러한 高麗後期의 정국 주도세력으로 사대부와 權門世族을 들 수 있다. 특히 사대부는 高麗後期에 성장하여 朝鮮을 건국한 새로운 지배세력으로서 그 존재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高麗後期에 정국을 주도한 대표적인 세력인 權門世族과 사대부의 形成過程과 그들의 구성범위와 性格에 대하여 규명하고 高麗後期사회에서 朝鮮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정치적 관계를 밝히고 자 한다.Ⅱ.본론a. 權門世族의 형성 과정과 性格㉠. 權門世族의 형성高麗 후기사회를 이끌어간 하나의 중심세력은 보통 權門世族으로 불리 운다. 또는 '權世之家', '權門勢族」등의 여려 명칭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들 세력을 '權門世族'이라고 부르겠다. 이 같은 權門世族이 高麗前期의 문벌貴族과는 性格이 다른 새로운 지배세력으로서 재편성을 보는 것은 대략 몽고와의 싸움이 종식되고 사회가 어느 정도의 안정을 되찾는 충열왕대 중엽 경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같은 개편작업은 이미 武臣정권 때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麗前期 이래 貴族의 지위를 유지하고 武臣정권 기에도 세력을 유지해온 집단으로써 前期에 貴族은 아니었지만 관인을 배출하기 시작하여 무인정권 기에 이미 權門世族으로서의 조건을 갖추어 왔던 세력, 武臣집권기초부터 관인을 배출하기 시작하여 이시기에 와서 비로소 權門世族으로 성장한 집단으로 高麗後期 權門世族 구성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제2기는 충선왕기부터 충정왕대까지로써 이때의 權門世族으로 성장한 집단은 최씨 정권기부터 관인을 배출해 왔거난 元의 간섭기에 들어와서 급성장한 집단들이 포함되고 있는데, 운을 배경으로 하여 세력을 신장시킨 집단이 權門世族으로 등장하기 시작하고 있다. 제3기는 공민왕집권기 이후로써 이 시기에 權門世族으로 형성된 집단은 元 간섭기 이후 관인을 배출하기 시작한 집단들이다. 이들 집단들의 특징은 두 가지 양상을 보이고 있다. 元을 배경으로 권력을 행사형 세력을 신장시킨 경우와 在地吏族에서 科擧를 통해서 관인으로 진출하여 그 지지 기반을 갖추고 점차 權門勢族化하여 변질된 세력의 경우이다.) 『高麗後期權門世族층연구』 김광철 동아대출판부.이들 權門世族의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첫째, 武臣정권시대에 성립되기 시작한 權門世族의 갈래로는 武臣세력 자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집권초기에는 비록 그 최고책임자가 자주 바뀌었지만 점차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가면서 武臣들은 높은 지위와 경제적인 부를 차지하고 사회적으로도 크게 세력을 확대시켜 權門世族을 형성하였다. 또 한 갈래는 「能文能吏」의 신진관인층으로 성장하여 보수화된 세력을 들 수 있다. 武臣정권시대에는 문학에도 능하고 吏務, 곧 행정실무에도 능한 사람들이 이상적인 관인형으로 대우를 받았거니와 종래 벌족에는 들지 못하던 하급관료 출신 및 향리의 자제들이 그 적격자로서, 이들은 武臣란으로 인해 기와의 통치질서가 무너져 행정적 공백이 초래된 가운데 科擧에 합격하는 등의 과정을 밟아 출세하여 權門世族의 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이 세력은 말하자면 신진사료인 셈인데, 그러나 그 대부분은 점차 문벌로 유지하여 또한 그 세력의 하나의 갈래를 형성하였다. 이처럼 종래의 여러 문벌貴族이 그대로 온존되면서 비록 前期에 비해서 약화되었지만 세력을 떨치게 되는 것은 高麗 왕실의 온존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사실 최고의 貴族가문이라 할 수 있는 왕실이 온존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문벌貴族의 부분적인 존속을 가능하게 하여 주었다, 前期 이래의 여러 문벌貴族들은 후기사회의 변모된 여건 속에서 자기를 변화, 적응하여 가면서 새로운 신분체제의 재편성 과정에서 權門世族의 한 갈래로써 高麗 사회를 지배하여 갔다. 둘째로 元 간섭기에는 元에 편승한 신흥세력이 대우하여 權門世族의 한 갈래가 되었다. 인접한 대元관계가 高麗사회에 새로운 세력층을 낳게 하여 부元세력으로써 權門世族의 한 갈래를 형성하게 된다. 元에 환관으로 들어가서 세력을 얻은 것을 배경으로 해 본국의 일족에게 벼슬을 주게 하는 경우 및 元에 이조하는 국왕을 수행하여 친종행이의 공신이 됨으로써 입신한 경우 등이 모두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어떻든 高麗後期 지배세력으로서의 權門世族은 이처럼 武臣정권시대에 재편성되고, 대元관계의 전개를 통하여 새로운 세력이 더하여 지는 가운데 그 고격이 갖추어졌다고 하겠다.) 『高麗시대사 下』 박용운. 일지사. 1987년㉡. 權門世族의 性格權門世族은 정치적인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 정치적 지배세력으로 權門世族은 고위관직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都堂의 구성元으로서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그같은 지위를 대대로 이어 갔던 존재들이었다. 또한 權門世族들은 자기네의 지위를 이어나가기 위한 입임의 방법으로 科擧보다는 門蔭制에 많이 의지하였다. 權門世族이라고 하여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高麗後期에 있어서도 門蔭制는 前期에 못지 않게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고, 이들은 입임의 수단으로 門蔭制를 이용하였다고 말할 수 이따. 權門世族들의 이러한 경향은 그들이 非文非儒的 성향을 농후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 權門世族의 구성요소로써 武臣신또는 유학적 소양과는 대체적으로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그와 같이 하여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세력을 떨쳤던 權門世族들은 왕실 내지는 자기들 상호간에 중첩되는 혼인을 맺어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세력확대를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高麗後期의 權門世族 역시 前期의 문벌貴族과 유사한 점이 많았던 것인데, 그러나 한편으로 양자간에는 상당한 차이점도 있었다. 우선 구성 성분만 보더라도 종래의 문벌관념으로는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는 역관이나 변방 출신등 부元세력이 權門世族에는 다수 포함되었고, 또 武臣으로 출세하여 權門을 이룬 경우도 前期의 문벌貴族의 구성성분과는 상이하다. 아울러 權門世族의 非文非儒的 성향도 文臣을 표방하였던 前期의 문벌貴族과는 대조되는 측면이며 가문 그것의 권위를 가지고 貴族적 특권을 누렸던 前期의 문벌貴族에 비하여 후기의 權門世族은 都評議使司라는 구체적인 정치기구를 통해 권력을 행사한 관료적 性格을 농후하게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 차이가 보이고 있다.權門世族의 性格에서 중요시 보아야 할 하나의 관점은 그들의 경제적인 측면이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한 農莊주였다는 것이다. 당시 국가에서는 관인들에게 들들의 복무에 대한 대가로써 祿科田을 지급하였지만 權門世族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전시과 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합법의 여부에 구애됨이 없이 그들의 권세를 이용하여 토지를겸병하여 農莊을 확대하고 경영하는 데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후 새로이 등장한 新進士大夫계층에서 農莊과 私田의 혁파을 위한 田地개혁을 주장한 근거가 되었다.) 『高麗시대사 下』 박용운. 일지사. 1987년b.신진사대부의 形成過程과 性格㉠. 신진사대부의 形成過程공민왕대의 신돈에 의해 주도된 신돈의 개혁은 權門世族을 정치적으로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졌으므로 개혁을 뒷받침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權門世族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新進士大夫'라 불리는 세력과의 정치적인 제휴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를 통고, 이곳을 중심으로 新進士大夫들이 세력을 결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科擧를 통해 文臣들 사이에 權門世族을 중심으로 좌주와 문생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權門世族을 약화시키고 新進士大夫 계층을 왕권의 기반으로 흡수 할 수 있게 되었다. 新進士大夫계층은 武臣집권기에 '能文能吏의 새로운 관인층'으로부터 시작하여 일부가 보수화되어 權門世族으로 편입되었으나 元 간섭기에도 지방의 향리들이 科擧를 통하여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추세는 계속되었다. 이들 신진 관료들은 元의 간섭과 측근정치下에서는 정치적으로 성장, 존립하기 위해서 權門世族에 의존해야 하였으나 신돈의 개혁을 계기로 權門世族과 정치적 이해를 달리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나가다. 新進士大夫세력의 대두는 이들의 지방사회에서의 성장을 바탕에 두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지방의 중소지주들이었으며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배경으로 이들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은 가능하였다. 또한 이들은 사상적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여서 일체감을 형성하여 더욱 세력을 확고히 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한국사』(8) 「新進士大夫의 성장과 朝鮮건국」.이익주. 국사편천위元회㉡. 新進士大夫의 性格高麗後期에는 權門世族과는 상반되는 性格의 新進士大夫세력이 형성되었다. 士는 讀書人을 말하며, 大夫는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을 의미했으므로 저들은 學者的 官僚이며 官僚的 學者이기도 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高麗後期 사회를 주도해 간 士大夫 세력은 그에 따른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앞서 말했듯이 士는 讀書人으로서 先學의 道을 배워 익힌 사람들이며 그들은 士로서의 교양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이 때의 士로서의 교양이란 주로 유학과 관계되는 소양을 의미하며, 이것이 사로 존재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되었다. 또한 이들에게는 士로서의 法度를 지켜 나갈 수 있는 경제적인 토대가 또한 있어야 하였다. 士에 합당한 禮法을 지키면서 가문의 체통을 유지하여 갈 수 있는 물질적 뒷받침을 위한 조건이며 지체를 유지시다.
    인문/어학| 2001.10.29| 6페이지| 1,000원| 조회(818)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2
2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0
  • A좋아요
    1
  • B괜찮아요
    1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18일 월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6:46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