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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해의 대외관계와 무역
    발해의 대외관계와 무역1. 발해와 신라-남북국시대의 문제발해의 대외관계에서 신라와의 관계가 조명을 받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고 양국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된 것은 1980년대 이후였다. 이는 신라사 중심의 한국사 인식이나, 당나라 중심의 국제질서관이 장애요인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양국관계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해도 남북의 교섭과 대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신당서』에 신라도(新羅道)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삼국사기』의 신라 천정군에서 발해의 책성부까지 39개의 역과 함께 양국의 관문인 탄항관문(炭項關門)이 설치되어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신라에서 두 차례에 걸쳐 발해로 사신을 파견하였다든지 발해가 건국과 멸망의 시점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움을 청한 사실 등은 양국간의 역사적 관계가 유기적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한국사에서 신라와 발해의 관계를 ‘남북국시대’로 설정하는 문제는 큰 논쟁거리이고, 우리 민족의 민족사적 얼개가 걸려있는 문제이기에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한국학계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논의 , 연구해 왔다. 중국과 일본 등에서는 주로 발해의, 당과 일본과의 교섭에 관심이 집중되어 왔는데 특히 중국학계는 발해와 신라의 관계를 논급하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고 있는 입장이다.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남북국시대’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다. 신라와 발해가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이 통일국가를 이루기 위한 노력도 없었다는 것과 유득공의 ‘남북국시대’를 허망사념(虛妄邪念)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아무튼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는 일본에서도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설정하는 데는 부정적이다. 다만, 통일신라와 발해‘로 인식하는 선에서 발해를 한국사 속에서 서술하고 있는 정도이다.그러나 양국관계를 남북국시대로 보는 것은 몇 가지 이유로 생각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이고 흑수인들이 발해인으로 흡수 되었지만 이는 발해국의 중심세력이었던 속말인과 백산인들의 비중에 비해서는 미미하기 때문에 발해문화를 소수의 흑수말말문화로 이해함으로써 남북국시대 설정을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2. 발해와 당-발해의 민족사적 귀속문제발해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당과 빈번하게 접촉했다. 발해국의 대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발해가 당나라에 대해서 자주적이었는가 하는 문제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질서가 당나라 중심이었음은 인정되는 바이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바정권은 아니었다.발해사의 민족사적 귀속문제, 즉 발해가 한국사에 속하느냐 중국사에 속하느냐의 문제는 한국과 중국이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중국학계는 책봉과 조공의 관계를 염두하고 당나라의 ‘지방정권설’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건 말갈이 계승했건 문제가 되지 않고, 모두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자 중국사이기 때문이고 그들은 속지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위와 같은 논리라면 한국사도 그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데 함경도 평안도 지역등 고구려의 옛 영토가 모두 과거 발해영역이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기에 오히려 한국사가 발해의 후손을 자처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중국이 발해의 자주성을 부인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 및 러시아학계는 발해국의 자주성을 인정하여 왔다. 발해가 독자적 연호와 시호를 사용하였던 점은 당시 다른 언 왕조보다 자주적 성격이 강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발해국이 황제국을 자칭하였던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역사귀속문제에 비중이 두어지는 시각차는 한국과 중국이 약간 다른데 중국은 발해국이 ‘당나라 지방정권’이었던‘홀한주 도독부’였다는 정치적 문제에 집중되어 있고, 한국학계를 비롯한 중국 이외에서는 과연 발해가 고구려계승 국인가 말갈국인가하는 역사계승 관계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즉 한국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 인식하고 그 계승관계를 오늘날에도 이어가고 있으며, 고구려의 여러 문화도 가장 잘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3. 발해와 일본발해와 일본 사이에는 동경용원부의 한 곳에서 일본까지를 잇는 일본도(日本道)가 있었는데 『신당서』에 기록된 공식적인 교역로가 있었다. 남북국시대에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실라보다 더 빈번한 접촉이 있었다. 물론 일본측과 신라와의 교섭도 빈번하였는데. 민간차원의 교섭내용까지 담고 있어서 왕조간의 교섭으로 보자면, 228년간의 남북국시대의 발해와 일본은 신라보다 긴밀한 접촉을 하였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발해가 일본에 처음 사신을 파견한 시기는 발해 2대 대무예 무왕 인안(仁安) 9년이었고,두번째는 첫 교섭으로부터 12년 지난 3대 문왕 때인데 이는 문왕의 대외적 유화정책과 함께 수행된 것이었다. 세 번째는 문왕 대흥 16년인데 당시 발해의 대일 교섭태도는 전례와 다른 면이 있었다. 발해왕의 국서를 갖고 가지 않아 일본조정으로 부터 억류될 뻔한 사건도 있어서 양국간에 최초로 불편한 외교관계의 모습을 보였던 시기이다.발해와 일본의 두 나라가 적극적인 외교를 하게 되었던 까닭은 일본의 신라공격계획 때문으로 일본은 발해와 신라의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그들의 신라정벌을 성공시키려 하였기에 상당한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배경은 ‘안사의 난’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사의 난에 대한 소식은 일본이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고 난 이후의 부수적인 수확에 불과하여 당의 내정을 살피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일본의 사신파견의 일차적 목적은 신라정벌에 발해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초기에는 발해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발해가 758년 759년에 군사전문가인 무관을 일본에 파견함으로써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신라정벌 계획은 신라 조정으로부터 받은 ‘무례’가 명분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들의 정치적 위기를 밖으로 이전시키려는 의도였다.그러나 이러한 의도는 발해의 도중하차와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세 및 일본 내부의 사장으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발해는 당의 안사의 난을 계기로 변방의 요동, 이른바 ‘소고구려’지역에 신경을 쓰고 있는 입장이어서 일본의 신라 공격제안에 대해서 끝까지 도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발해와 당의 관계대선으로 인해서이다.이후 양국 교섭은 모두가 발해가 일본에 먼저 사신을 파견하였던 것으로 나타나 건국 초기와 같은 형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건국 초기의 목적이 정치적, 군사적인 면이 강했다면, 그 이후의 것은 경제적, 문화적인 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4. 돌궐 및 서역과의 관계돌궐은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는ㄴ데 고구려 및 발해와의 관계는 주로 동돌궐이었다. 고구려 및 발해의 돌궐과의 교섭은 서역과의 간접교섭이었다는 의미도 갖는데, 돌궐과 당나라가 대립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발해의 서역과의 관계는 오히려 돌궐과의 관계를 통해서 더 활발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발해가 서역과 교섭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 자료는 돈황문서인데 이를 통해 보면 8세기경에 서역인들은 발해라는 존재를 고려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들은 여전히 발해와 고구려를 구별하지 않고 있었다. 이 자료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한 반증이 될 뿐만 아니라 발해와 돌궐 및 서역과의 교류를 알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지만 단정하기라 쉽지 않다. 다만 그들과 발해인들이 교류하였다는 것은 서역제품으로 생각되는 유물들이 있어 주목되고 있다.또한 러시아의 샤브쿠노프에 의해 제기된 ‘흑초의 길’ 또는 ‘담비길’설에 의해 발해의 돌궐 및 서역과의 교류가 확인되고 있다. 실크로드와 멸도로 중앙아시아에서 극동에 이르는 이 교역, 교류의 길에 대해서는 아직 그 구체적인 자료가 미비하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발해와 서역의 교류 사실을 고고학적 자효를 통해 처음으로 밝혀냈다는데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인문/어학| 2007.06.16| 4페이지| 1,000원| 조회(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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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해의 성립과 발전
    발해의 성립과 발전1. 발해사의 전개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인 698년 건국한 왕조로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으로부터 마지막 왕 대인선(大??)에 이르기까지 15대왕이 재위하였다. 고왕 대조영은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돌권 및 신라 등에 사신을 파견하여 건국의 명분을 대외에 과시하였다. 그러나 군사적인 면에 집중한 나머지 정치조직을 정비할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고왕의 뒤를 이은 무왕은 안으로 국가의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영토를 크게 넓혔다.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도 수도를 2차례나 옮기면서 내정에 힘을 기울였고 왕권강화를 위해 대내적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정치발전을 이루었다. 문왕대에 비로소 발해는 당으로부터 책봉작위를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발해의 국세와 국제적 지위가 높아지고, 안사의 난 등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당이 발해의 도움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문왕 이후 귀족층의 권력쟁탈전이 빈번하다. 10대 선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왕권이 안정되고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어 영토가 크게 확대되었다. 전국은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고 13대 대현석대(大玄錫代)에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칭호를 듣기까지 하였다. 발해의 중앙정치제도는 장자상속제와 독자적 연호의사용등을 통해 전제적이고 자주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해동성국 발해도15대 대인선에 이르러 거란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였으며, 그들의 역사와 문화는 대부분 거란족과 여진의 역사로 계승하게 되었다.2. 연구동향발해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학계의 주장이 각기 다르다. 그 이유는 발해사에 대한 기록 부재에 있다. 또한 현대사의 국가적 이해관계를 빼놓을 수 없는데 발해 영역이었던 지역이 현재 중국, 북한, 러시아의 연해주를 망라하기 때문에 민족사적 귀속문제가 지금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맘북한의 기본적인 발해사관은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가로서 황제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발해의 자주성을 부인하고 책봉과 조공기록에 근거하여 당의 지방정권인 ‘홀한주도독부(忽汗州都督府)’ 내지 ‘발해군(渤海郡)’으로 간주하고, 그 건국 주체를 고구려유민이 아닌 말갈로 한다. 발해사에 대해 중국측이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본격적으로 주장한 시기는 문화대혁명이 지나고, ‘통일적 다민족국가정책’이 이념으로 정착되는 1980년대부터였다.그 전에 18세기에 유득공의 『발해고』에 의해 ‘남북국시대’로 규정한 것이 가장 앞선 것인데 이는 실학자와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생각을 이어받았으나 근대적 발해서 연구 즉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 이라는 견해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한규철고 북한학자들은 지배,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고구려유민이었고 자주성을 보인다는 견해는 내고 있다.남북한이 이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남북국의 성격에 대해 북한은 발해와 양립하였던 신라에 대해 ‘후기신라’라보고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점에 적잖은 차이를 보인다.이에 필자는 제한적이나마 인정해야 된다는 입장으로 신라 통일기는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건국되는 668년에서 698년의 30년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록의 혼란으로 한국사는 시대에 따라 발해국을 자국사로 인식하면서도 말갈의 국가로 인식하기도 하였다.한국사에서 발해에 대한 인식은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삼한(마한) 및 통일신라에 대한 정통의식의 농도에 따라 즉,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 인정하면서도 신라사의 한 인접국 정도로 기록함으로 항상 신라사, 신라의 삼국통일관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있다. 또한 시대마다의 북방관, 이를테면 고토회복 의식의 농도에 따라 발해사에 대한 인식정도가 달랐는데 발해를 고구려와 종족적 계통을 달리하는 말갈의 후손왕조로 생각하면서도 한국사의 체계에 넣기고 하였다는 것이다한편 러시아에서도 발해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데 고고학적 탐사와 발굴에 의해 일찍이 발해유적을 확인한 러시아는 자주적 왕조였음을 인정하고, 다만 말갈인들에 의해 건설된 왕조라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즉 독립국 ‘말갈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해의 고구려적 성격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일본의 발해사 연구는 만주침략으로부터 본격화 되었는데 발해유적 발굴과 함께 진행된 일본의 연구는 근대 발해사 연구의 획기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일제시기의 발해사 연구는 도리야마와 시라토리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도이야마는 대체로 말갈족 국가였다고 주장한 반면 시라토리는 이원적 주민구성설인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설을 제기하여 오늘날 한국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아무튼 제 3자적 입장의 일본이 민족사적 계승문제에서 만큼은 오늘날 한국학계와 가장 가까운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러나 발해와 일본의 정치, 외교적 관계에 대한 부분은 의견이 다르다. 그들은 『속일본기』에 입가가해 발해가 일본의 ‘조공국’이었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이와 같이 발해사 연구는 국내 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문제라 할 수 있다.3. 발해의 주민구성발해가 과연 고구려 계승왕조였는가, 말갈왕조였는가 하는 문제는 발해국의 역사귀속 문제와 함께 여전히 뜨거운 쟁점이다. 이 분야는 한국, 일본 등에서 특히 관심을 갖고 연구되었다.발해의 주민구성과 관련된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가 약간의 차이점을 가지는데 전자는 대조영을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발해의 고구려 계승관계를 뒤받침하고 있어 북한학자들의 전거가 되고, 후자는 대조영을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속된 자이니. 성은 대씨이다.”고하여 대조영 집단이 정치적으로 고구려에 부속된 무리나 종족은 속말말갈인으로 전하고 있어 중국학자와 말갈 지지자들의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또한 시라토리는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인인 이원적 주민구성론을 주장하였고 도리야마는 대조영을 말갈족 출신으로 인식해 발해의 말갈족설을 제시하였다. 그는 대조영을 ‘백산말갈’출신이하 하여 『신당서』의 ‘속말말갈’설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일본학계의 일반론은 시라토리의 설이 더 우세하다고 여겨지고 이후 발해 지배층의 고구려인설은 박시형, 미카이 등에 의해 수용되어 오늘날 한국 및 일본학계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있다.그러나 주민구성이 다원적이 아닌 대부분 고구려인이나 말갈인 어느 한족의 일원적이었다는 견해도 강력한데 중국과 러시아는 말갈설, 한규철과 북한학계는 고구려설을 주장한다.초기에는 박시형등을 중심으로 시라토리의 영향아래 다수가 말갈인설을 유지하였으나 1990년대 들면서 ‘발해본토’인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후손인 고구려인들이었다고 하여 오늘날 북한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즉 고구려왕조의 통치를 받았던 사람들은 고구려인이었고, 이들이 발해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필자와 결론을 같이한다.한편 발해국을 고구려 유민과 말갈로 구성된 왕조로 보는 이원적 주민구성론은 아직도 한국과 일본학계의 일반적 통설이다. 그렇다고 해서 발해사는 보는 시각이 같은 것은 아니다. 손진기는 고구려 이후의 발해를 발해족으로 인식하면서 족원의 다원성을 인정하였고 일본학자들은 말갈의 범칭(汎稱)적 성격을 인정하지만, 말갈의 실체를 고구려와 다른 종족으로 인식하는 것이 대세이다.그러나 한규철은 말갈이란 범칭일 뿐만 아니라 고구려 변방주민들의 비칭(卑稱)이었기에 이들은 예맥과 부여의 후손이며 고구려 주민이었다고 본다. 때문에 말갈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흑수말갈을 지칭하거나 고구려 변방인 이었다고 보아 발해의 고구려유민설을 주장한다.4. 발해의 영역과 위치발해의 위치에 관해 첫 도읍지인 구국(舊國)과 동모산의 위치에 대해서 상당한 의견 접근을 보았다. 구국이 길림성돈화시의 영승유적이라는 것과 동모산을 돈화시 성산자산성으로 보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 최근에 동모산을 연변지역에서 찾고 있는 의견이 개진되어 새로운 쟁점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무엇보다 중요하고, 쟁점이 되는 부분은 발해국의 영역에 관한 것이다. 발해의 영역은 아직 완전하지 않은데 이는 기록은 문제와 전근대의 국경개념이 갖는 한계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먼저 발해의 서변에 대한 것으로 요동이 발해의 영역인가 하는 문제, 가장 넓었던 시기의 서변을 어디까지로 보아야 하는가가 큰 쟁점이다. 중국측은 압록강하류의 박작구와 신성을 경계로 보지만, 많은 남북한과 일본학자들은 해동성국이었던 시기 발해국의 서쪽은 요동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북한에서는 발해와 당나라,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볼 때 요동을 포함한다는 주장이다.또한 도성을 서경으로 보고 있는데 그 위치에 대해 길림성 임강설(臨江設)과 집안설(集安設)이 가장 팽팽한 의견차를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학계에서 임강시설을 지지하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서고 암묵적으로 이 견해를 가장 많이 지지하고 있다. 다만 북한은 집안설을 내세우며, 한규철도 집안설의 타당성을 일정하게 수용하고 있다. 집안설의 요점은 과거 집안이 고구려의 정치중심지였고 비록 고구려쥬적이지만 유적내용이 모아산보다 훨씬 풍부하다는 것이고, 임강설은 1976년 이후 고고,조사에 의해 더욱 굳어졌는데 이 지역에서 여러 발해유물이 확인되면서 부터이다.
    인문/어학| 2007.06.16| 4페이지| 3,500원| 조회(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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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시대 문헌자료
    삼국시대의 문헌자료1. 문헌자료 연구의 의의문헌사료는 역사학의 기본자료로, 삼국시대를 연구하기 위한 문헌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다. 국외의 자료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중국 관찬서들이 있다. 이러한 문자자료는 당대 자료라는 점에서 1차사료로 취급되는데 석문(石文)과 금문(金文), 근래에 주목받기 시작한 그 외의 자료로 나눌 수 있다. 사실 좁은 의미의 문자자료는 금문이나 석문에 국한되어있으나. 본고에서는 다른 재질의 자료에 새겨지거나 쓰인 글까지 모두 포함하였는데 넓은 의미로 정의하는데 영일냉수비나 성산산성출토 목간, 무령왕릉의 왕과 왕비의 지석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문자자료의 출토가 중요시되는 이유는 기존자료로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역사상을 그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2. 자료의 수집과 간행-기초연구와 공구서자료의 수집과 발굴 혹은 발견된 자료는 기존의 문헌사료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역사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에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먼저 삼국시대 문헌자료에 대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 대해 역정을 전망하자면,,,.시작은 조선후기로 보는데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역동적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이우의 『대동금석서』,김정희의 『금속과안록(金石過眼錄)』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김정희의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연구는 오늘날의 논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정밀한 고증을 가한 걸작이다.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한반도지역 문화재를 대대적으로 조사하고 정리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사과정에서 수집된 탁본, 찰영사진과 필름, 지역 인터뷰 등 관련자료등은 총독부 및 이 사업에 관여한 일본인 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제공되었고, 이 연구는 일본인학자에게 독점되는 경향이 있었다. 대표적 예가 가쓰라기의 업적 『조선금석고(朝鮮金石考)』이다. 이는 고대와 고려의 금석문을 개별적으로 연구하고, 전체 금석학 총설을 마무리한 역작으로, 이 분야 연구의 초석이라 평가할 수 있다.해방 이후 삼국시대 금석문의 자료 수집과 정리는 그 중심이 한국인, 한국학계로 옮겨 오게 되었다. 이난영의 『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와 황수영의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은 일제강점기에 나온 『조선금석총람』에서 빠뜨린 금석문이나 그 후에 추가된 금석문을 망라한 것이다. 탁본의 사진자료가 중시되면서 조동원은 금석문을 비문 중심으로 지역별 탁본사진을 집대성하고, 허흥식은 『조선금석총람』에서 『금석유문』에 이르기까지 금석문의 석문을 총망라하였다. 이후 한국고대사회연구소에서는 『역주 한국고대금석문』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고대금석문자료집』이 간행되었고, 덕영의 『한국고대금석문종합색인』은 최초의 금석문 색인집이다.1990년대 후반부터 국공립박물관과 문화제 연구소 등 주로 국립기관을 중심으로 문자자료의 전시와 양질의 도록 발간이 이루어졌다. 또한 2003년부터는 금석문과 그 탁본의 사진, 기본해설, 원문과 해석문 및 참고문헌을 제시하는 서비스를 웹상에 제공하기 시작하였다.또한 금석문 혹은 문자자료 가운데 특화된 자료집이 간행되기 시작하였는데 국립창원문하재연구소에서 간행된 『한국의 고대목간』은 종래 금석문 자료집 일반과 달리 판독문을 실은 것이 아니라, 판독의 근거가 되는 사진과 적외선 사진을 실은 것, 더구나 실물크기로 전재하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자료집이며, 금후 자료집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3. 분야별 연구현황1) 석비삼국시대 석문의 대부분은 석비(石碑)가 차지한다. 비(碑)에는 돌로 만든 것 외에 쇠로 만든 것, 구운흙으로 만든 것들이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오로지 돌로 만든 석비만이 보일 뿐이다. 그 가운데 신라의 석문이 고구려나 백제의 그것에 비해 양에서 압도적이다. 이 중 고구려의 광개토왕비와 중원비의 두 석비와 신라의 진흥왕순수비에 집중되어 연구가 진행 되었다. 광개토왕비는 직접 조사하기에 비가 너무 크고 현실적으로 제약이 있기 때문에 주로 탁본에 의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일본의 요원 사카와가 광개토왕비문 탁본을 입수하여 일본에 가져가게 되었고, 그것을 토대로 일본 소속연구자들이 정열적으로 연구하였다.거의 같은 시기 중국에서도 광개토왕비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이 비문이 고구려 13대 서천왕(西川王)의 사적을 전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한국에서의 연구는 매우 늦게 시작되어 1955년 발표된 정인보의 연구가 처음이었다. 정인보는 일본의 석독, 해석이 그 근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왜가 백제, 신라등을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신묘년조 기사에 대한 해석을 인정하지 한고, 고구려가 왜를 격파한 것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이러한 해석은 북한학계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남한에서도 폭넓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미즈타니는 사카와가 가져온 탁본이 원석에서 취한 탁본이 아니라 묵수곽전본(墨水廓塼本)이라 연구의 근본적인 재겸토를 촉구하였고 이진희는 사카와, 아오에, 요코이등의 경력과 저술등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초기 연구와 일본 군부와의 관련을 집중 조명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주장한 신묘년조 기사가 그 부분을 긁어내고 글자를 고치는 변조를 감행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비문의 정복 대상이 세부적으로 검토되기도 하였고, 주어 교체설이 다시 제기되는 등 본격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에 일본에서는 이진희설의 검증을 둘러싸고, 비문 연구가 가속화되기도 하였다.1996년에는 고구려연구회 주최로 한, 중, 일 학자들이 모여 광개토왕비에 대한 이제까지의 연구를 정리하고 논의하는 포괄적인 장이 마련되기도 하였다.충북 중원의 고구려비는 1979년 단국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어 4세기대 고구려의 비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연구과정에서 고구려의 역(曆)이 연구되기도 하였고, 1999년에는 고구려연구회 주최로 양질의 적외선 사진과 직접조사를 통해 각계의 관련 연구자가 장시간 논의 속에 석독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를 심화시켰다.현재 알려진 백제의 비로는 사택지적비가 유일하고, 건립연대는 654년으로 추정되고 있다.비교적 비가 많이 남아있는 신라의 경우 석비의 진화과정을 알 수 있는데 초기의 비는 영일냉수비와 울진봉평비이다. 두 비는 모두 중앙에서 왕을 중심으로 한 신라 6부가 지방청치에 적극 관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6세기 전반 신라 6부의 실태와 화백이라 일컬어지는 의사결정의 일면 및 이 시기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신라 진흥왕 시기는 석비의 전성기라고 일컬을 만한데 진흥왕 순수비와 척경비(창녕비) 그리고 단양적성비가 그것들이다. 이중 황초령비와 북한산비는 제일먼저 연구되기 시작했고 뒤에 창녕비, 마운령비를 발견하였다. 이들은 왕이 관할하고 있는 영토를 순수하는 내용을 담고 중고기 신라의 신료(臣僚)조직, 인명표기와 관등제를 비롯하여 6부의 운영실태를 밝히는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정치행위와 관련된 것 말고 국가적 공사와 관련된 석비들도 있는데 영천 청제비, 대구 무술오작비, 남산 신성비, 명활산성비가 그것이다.다음에는 통일기를 전후한 왕이나 왕족 혹은 사원 등과 관련된 비들이 있는데. 무열왕릉비, 문무왕릉비, 김인문묘비와 청주 운천동사적비등의 조각들이 그것이다. 이들 비는 686년 전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이 무렵에 외형적 규모도 대형화되고, 문장의 서술형식도 중국의 전형적인 그것을 모방하여 화려해지고 있다.2) 그밖에 석문석비 외에 석각(石刻)과 묘지(墓誌)를 비롯한 석문들이 있다. 고구려는 성을 중심으로 석각들이 남아있는데 평양성에도 5종의 석각이 있고, 평북 태천군 농오리 산성에도 석각이 있는데 기년이 남아 있어서 산성의 축조시기를 고찰할 수 있다.신라의 석각은 울주 천전리 서석이 대표적이고 여기는 간지(干支)가 있어서 연대를 비정할 수 있는데 6세기 초반에서부터 9세기 초엽의 것까지 있다.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두 젊은이가 3년간 유교사상을 공부할 것을 맹세하고 이를 새긴 돌이다.백제의 석문으로는 무령왕릉의 묘지석과 능산리 사지에서 나온 사리감이 있는데, 여기 지석에는 무열왕의 생존 연대 및 생시의 이름, 역법, 상장례등이 논의되었다. 부여 능산리 사지(寺址)의 중앙부 목탑지의 심초석에서 출토된 사리감에는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丁亥年) 에 손위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백제시대 가장 빠른 사찰의 조성연대가 576년임이 밝혀지게 되었다.3) 금문쇠붙이에 새겨진 글, 즉 금문(金文)으로는 불상이 있다.고구려 불상은 연가칠년명, 건흥오년명, 영강치년명의 세 금동광배와 , 경사년명의 금동불 입상이 있는데 이들 연호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연호라고 보고있다.
    인문/어학| 2007.06.16| 4페이지| 1,000원| 조회(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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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임으로서 학급운영 방침과 방향 평가A좋아요
    담임으로서 학급운영 방침과 방향Ⅰ. 서론학년초 학급담임교사는 학급을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학급경영계획은 세우는 것은 필수적이다. 학급목표를 따라서 학급담임교사는 학급의 실태를 파악하고, 일정 기간 동안에 학급이 성취할 목표를 세우며, 이를 실천할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하고, 또 학급경영평가를 통해 경영의 결과를 파악하고 부족할 경우 피드백으로 보충?수정해야 한다. 여기서는 학급경영의 중요성을 우선 인식하고, 학급경영의 운영을 어떻게 운영해 나갈 것인가를 알아보고자 한다.Ⅱ. 학급 경영목표 및 방침학급경영은 학교경영)의 테두리 안에서 학급을 대상을 하는 경영활동이다. 학급경영의 기본적인 성격은 학급교사가 학교와 학년의 목표를 일관성 있게 받아들여서 학급내의 개개 학생들의 개성?능력?적성?진로등을 분석하고 파악하여 여기에서 나타나는 교육의 과제를 학교, 학년 계획의 과제와 조화시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학급의 주체성?창의성을 발휘해 나가는데 있다고 하겠다. 교육의 질적 향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수록 학급경영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학급경영의 의의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학급의 교육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점이다. 둘째, 학급은 학생들이 매일 생활하는 장이다. 셋째, 학급 경영 방식이 학생의 학업성취와 인격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학급의 바람직한 변화를 수반하지 못한 교육개혁은 진정한 교육개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진정한 교육의 발전은 교육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학급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점에서 학급경영은 중요하다.1. 학급 경영)목표1) 스스로 학급의 중심이 되는 학생이 되도록 지도한다.2) 책임의식, 바른 행동, 도덕관을 갖게 한다.3) 올바르고 효율적인 학습 습관을 갖게 한다.4)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인식과 개인의 책임감을 고양시킨다.5)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설정하게 하고 그 달성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도록 도와 준다.6) 국제화 감각과 진취적인 자세를 갖춘 인간상을 양성한다.2. 학급) 운영의 방침1) 교사는 학생들을 신뢰하고 격려해 주어 어떤 문제해결에 대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 해야한다.2) 학급에서 해야 할 것은 스스로 찾아서 할 수 있게 한다.3) 개인의 흥미와 욕구를 충분히 인정하며 수용하려고 애쓴다.4) 자신이 잘못하면 수긍하고 동료나 선생님께 사과를 할 수 있도록 한다.5) 학급이 서로 협동적인 분위기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학습에 참여함으로 서 가장 본질적인 자신, 그리고 창의 적인 자기를 찾도록 학급풍토의 조성에 노력한다.6) 학생의 자아 육성을 위하여 교사는 충분한 정보와 자신의 세계에 관한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7) 학생들이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흥미를 갖고 문제를 추구하며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도록 학급을 운영한다.8) 청소년기의 정서적 불안정과 성적 고민, 교우관계의 문제점을 수시로 상담하여 건전한 청소년으로 성장하도록 한다.3. 학급 운영의 중점 과제1)결석?지각이 없도록 근면성과 책임감 강화 아무리 좋은 교육 과정을 마련한다 하더라고 학생이 참여하지 않으면 그 유익을 얻을 수 없다. 일단 학급의 모든 학생들이 수업에 참석?참여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 바른 생활 습관을 통한 근면성과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2) 바른 수업 태도를 기르고 자율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도록 지도.-예절 바르고 올바른 생활태도를 갖게 한다. 강요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도록 유도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자신이 찾아서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자율이 다른 사람의 범위를 침범하지 않는 한도에서 이루어 져야 함을 명확히 이해하게 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지 않도록 지도한다.3)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 동시에 자아 정체성 성립-삭막하고 경쟁으로만 가득한 사회에서 교실에까지 그러한 분위기를 강요할 수는 없다. 아이들은 경쟁에 싸워 이기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먼저 배워야만 한다. 일률 단편적인 원리에 따라 서열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차이와 특성을 파악해 감으로써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만들어가며 자만심과 패배감, 이기심을 억제한다. 이러한 목표를 완성해 갈 때에 비로소 청소년 자살문제나 집단 따돌림과 같은 문제들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Ⅲ. 실천 계획 (지도 중점)1. 교과지도1) 아침 자율 학습 시간을 최대한 이용한다.① 월요일 : 담임과의 대화. - 올바른 가치관과 도덕적 신념을 강화하고 이의 실천의지를 북돋워 줄 감화, 훈화의 예화 자료를 준비하고 그 내용을 OHP, 또는 유인물 등을 이용하여 들려준다.② 화요일 : 독서 - 권장 도서 목록을 제시해 주고 독서 후 감상문을 쓰기를 통해 작문 능력과 사고력 향상에 기여한다.③ 수?목요일 : 한자 연습 - 매주 수?목요일은 한자 학습을 하도록 하고, 시간이 끝나면 학습한 내용을 걷어서 틀린 내용은 없는지, 잘못 표기한 한자는 없는지 점검한다.④ 금요일 : 한자 쓰기 점검 및 독서 감상문 발표.2) 수업시간에 바른 자세로 임하며, 숙제 및 소집단 활동에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활동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수업 시간에 필요한 준비물은 반드시 지참하도록 매일 지도한다.3) 효과적인 학습방법에 대해 급우끼리 서로 의견 교환을 하도록 한다.4) 수시 훈화로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학습 의욕을 느낄 수 있게 학급의 학습 분위기 조성에 힘쓴다.5)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도록 하고, 학력이 부진한 몇 명의 학생들은 방과 후 개 별 학습에 참여하도록 하며, 관심을 가지고 지도한다.2. 생활지도1) 교내생활① 지각하지 않는 습관을 기르도록 한다. 결석을 할 경우는 반드시 학교로 통보한다.② 학칙에 맞는 복장과 장신구를 착용하므로 단정하고 예의 바른 학생으로서의 생활이 될 수 있도록 한다.③ 교실이나 복도에서 뛰거나 심한 장난을 삼가며 복도나 계단을 오를 때는 좌측통행을 하도록 지도한다.④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한다.⑤ 수업 1분전에 자리에 앉아 주위 환경을 정리하고 수업준비를 한다.⑥ 교실에서 자신의 주위를 항상 깨끗이 하도록 지도한다.⑦ 교실 내 분리수거를 생활화하도록 지도한다.⑧ 학급 비품은 내 물건같이 아껴 쓰며 소중히 다루도록 한다.2) 교외 생활① 외출 시에는 항상 학생증을 지참하도록 한다.② 공공질서를 잘 지키고 버스나 전철을 타면 할아버지, 할머니,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자세를 갖도록 지도한다.③ 올바른 몸가짐과 언행으로 타인에 모범이 되도록 지도한다④ 만화방, 비디오방, 노래방 등에는 출입하지 않도록 한다.③ 소화기 사용법을 알려주고 학교 내의 소화기 위치를 가르쳐 준다.④ 교실에 설치된 모니터 등의 시설 주변에서 장난치지 않도록 수시로 지도한다.⑤ 교실 내의 망가진 물건은 바로 수리하도록 지시한다.⑥ 학우간에 지나친 장난을 삼가 해서 다치지 않도록 주의시킨다.⑦ 등?하교시에는 후문 쪽 비탈길로 다니지 않도록 지도한다.⑧ 교통질서를 준수하고, 보행 시 규칙을 잘 지키도록 지도한다.3. 특별 활동) 지도1) 목표 : 건전한 집단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여 심신의 조화로운 발달이 이루어지게하고 봉사정신과 자율적인 생활태도를 가지게 해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기본적인 자질을 기르게 한다.2) 기본방향① 자율적인 집단활동을 통하여 공동체의식과 봉사정신을 지닌 민주시민을 기른다.② 가정생활, 학교생활 및 사회생활에 필요한 원만한 인간관계를 갖도록 한다.③ 활동영역 및 내용을 체계화하여 초?중등학교와의 연계가 이루어지도록 한다.④ 다양한 자기표현의 기회를 마련하여 개성과 소질을 계발한다.⑤ 건전한 취미와 문화적 기초소양을 갖게 하여 여가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⑥ 단체활동은 집단적 활동의 체험을 통하여 강한 의지와 진취적인 기상을 육성한다.4. 특색교육지도1) 인성 교육 지도① 급우가 경쟁상대가 아니라 친구이며 나아가 인생의 동반자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지도한다.② 정직한 것이 최선임을 몸소 깨닫게 하도록 지도한다.③ 항상 우리 를 강조하여 집단 속에서의 화합과 단결을 배울 수 있게 지도한다.④ 학생이 학생다울 수 있도록, 학교에서 와서 공부하고 배우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 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교육학| 2006.12.26| 4페이지| 1,000원| 조회(3,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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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말 제국주의 이념의 수용에 따른 문제인식
    한말 제국주의 이념의 수용에 따른 문제인식역사교육전공Ⅰ. 서론 Ⅱ. 제국주의 이념의 논리(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Ⅲ. 제국주의 이념의 수용과 인식의 변화 Ⅳ. 제국주의 이념의 수용에 따른 문제점Ⅴ. 결론Ⅰ. 서론우리나라 역사학에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부분은 근대사라고 할 수 있다. 학교에 다닐 때를 생각해보면 고대나 중세의 역사는 비교적 자세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본 부분을 학습한 것에 비해 근대사에 관해서 학습한 부분은 극히 소량이고 일면의 사실만을 주축으로 그 이외의 평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들께서도 이 부분에 접근할 때에는 조심스러운 면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교과서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사 부분 특히 일제 강점기 때의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애국계몽운동이나 무장독립운동 등 그 모두를 진정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구국운동, 일제로 부터의 독립을 하기위한 최선의 길이라 표현되어있다.또한 많은 사람들과 학생들 역시 이런 시각에서 우리나라 근대사를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본인 또한 지금까지 이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의 글을 읽으면서 지금껏 알고 있었던 것이 진정한 우리나라 근대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특히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지식층들은 실력양성이라는 주장아래에 우리의 식민지화를 무지한 백성들의 당연한 결과로 귀결시키고 있다. 이는 이 당시 서양에서부터 불고 있는 제국주의의 논리를 그들의 해석에 따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글에서는 한말 제국주의의 논리 속에 들어있는 인종주의및 사회진화론과 이러한 것을 지식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Ⅱ. 제국주의 이념의 논리(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인종주의는 흔히 나와 타인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으로 그 차이에 대해 자연과학적 구분을 하면서 비롯된다. 이는 나와 타인과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만 그치면 문제가 아니나 그 차이로 생물학적 구분을 한 뒤 위계서열을 정하고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연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열등한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종차별적 성향이며 19c이래로 서양 제국주의 시대에 팽배하였던 지배적인 이념이었다. 신행선,「Ernest Renan의 "인종" 과 인종주의」, 서양사론, Vol.73, No.0(2002), p.5제국주의 시대 이전에는 서양인들이 비서양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피부색깔에 관계없는 인류의 동질성에 대한 믿음이 보다 더 강하게 나타나있었고, 인종간의 차이는 기후와 다른 요인들이 합해져서 생겨나는 것이며, 인종의 우월함과 열등함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관점에 있었다.그러나 19c에 들어오면서 차별은 곧 평등이라는 논리로 바뀌어 갔다. 즉 문명화의 대업을 지향하는 논리는 차이를 인정하는 것만이 진정한 평등이라는 논리로 바뀌었다. 이러한 논리는 일반적인 사고형태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무 의문 없이 그대로 수용되어져갔다.이보다 더 제국주의자들의 우월의식에 더한 기반을 제공한 것이 사회진화론인데 이는 사회도 생물과 같이 하나의 유기체이며, 생물의 발전법칙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회생물학적인 이론을 사회진화론에 맞는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이는 사회를 생존경쟁, 양육강식의 이론이 팽배하는 곳으로 보고 국가 사이의 분쟁과 사회의 불평등, 인종적 불평등을 자연의 법칙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게 되어 제국주의 침략의 이념으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Ⅲ. 제국주의 이념의 수용과 인식의 변화갑작스런 개항 이후 서양의 부와 물질문명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에 강한 충격을 받은 우리의 지식인들은 존망에 처한 국가를 구출하기 위해서 대안을 모색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런 이들에게 제국주의 이념의 논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나섰다. 제국주의 이론은 지금까지 중국중심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관. 즉 주체적인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는 이론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 시점에서 작용한 제국주의 논리 즉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은 뒤틀리고 왜 모습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였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수용한 제국주의 논리는 일부 지식인들의 내면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를 타자화, 식민화하면서 일그러진 근대의 자아를 형성하고 말았던 것이다.한말은 ‘변혁의 강제’와 ‘식민지 현실’이라는 역사상 중요한 기점에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적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던 방식들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응했던 방식이 지니는 한계에 대해서 성찰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한계에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폄하하고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21c를 살아가는 오늘에 중요한 시각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를 그리는 것은 과거에 대한 재해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개항은 우리 근대사의 정치 사회, 경제,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이 당시의 역사인식과 서술에도 많은 근대적지향성을 보여주었다. 개항으로 인한 여러 열강과의 접촉은 단순한 외교관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외부로 부터의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보존하기 위한 자아 정체성 확립을 보다 확고히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鄭昌烈, 「韓末의 歷史認識」, 『韓國史學史의 硏究』, 을유문화사, 1986또한 개항은 정체성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관의 변화도 일으켰는데 기존의 세계관, 즉 유교적이고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흔들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찾기 시작했을 것이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제국주의 이념 즉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인 것이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이념의 등장과 국제적 환경의 변화에 충격을 받고 서양문명 중심에 점점 고조되었는데 그 면을 보여주는 예를 들어보자.먼저 조선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라 불리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에는"북아메리카주의 적색인들은 대대로 게으름만 익혀온 종족이라서 공부하는 기력조차 스러져 버려, 미국의 백색인들이 학교를 세우고 교육할 길을 훌륭히 갖추어놓았다.…… 엽총 한 자루 가지고 산속으로 돌아가 일생 동안 가난하고도 괴로운 생활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아. 교육받지 못한 폐해가 이 육』, 서해문집, 2004. pp.123~124여기서 유길준은 백인종은 침략자인 동시에 자애롭고 선진적인 문명의 선도자고, 피해자인 적색인은 천성적 야만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서양의 제국주의가 내세우는 문명화의 대업을 선한 것으로 인식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독립신문』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찾을 수 있다."흑인들은 동양인종들 보다도 미련하고 흰 인종보다는 매우 천한지라. 미국에 토종은 얼굴 빛이 붉으며 생긴 것이 동양사람과 비슷하나 더 크고 개화된 것이 동양 인종만도 못한지라. …… 백인종은 오늘날 세계 인종에 제일 영민하고 부지런하고 담대한 고로……" 『독립신문』1897년 6월 24일.즉 흑인을 가장 미련하고 천한 인종으로 평가하고 백인종을 가장 영민하고 부지런하고 담대한 인종으로 여기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인종주의적 편견이 매우 서양중심적 문명화모델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양중심의 문명화 모델은 결국 문명화된 인종들이 미문명화 되어 있는 인종들의 국가를 개발시키는 것이 세계의 진보를 위한 문화인종의 의무이며 사명이라는 주장 즉 나아가 서양의 식민지화 또는 일제침략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논리라 하겠다.한편『독립신문』의 사설에서 보이고 있는 인종주의는 사회진화론적 관점과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자연과학은 약자와 우둔한 자는 항상 강자와 지적인 자의 노예라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자연의 법칙에 기인하는 결과를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독립신문』 1896년 11월 13일이와 같은 사회진화론의 생존경쟁,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기본 관점은 당시 국가적 위기에서 고심하고 있던 지식인들에게 국제사회의 힘의 정치와 서양제국주의의 아시아 침탈을 매우 잘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이론적 요소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그래서 그것은 결과적으로 힘이 강한 인종이나 국가의 약자에 대한 탄압이나 식민은 자연법칙적으로 정당하고 약자는 저항하지 말고 단지 이나 국가로서 강자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은 강조하지 않고, 약자 스스로의 자아비판으로 끌고 가 수동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는 것이다. 즉 제국주의를 범죄적 침략의 결과가 아니라 생존경쟁의 원리에 따라 서양인들이 규정한 제국주의 논리를 합리화하였다.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진화론은 패자가 승자가 되기 위한 의식된 행동의 요구와 필요성을 설명하는 이론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기능은 사실 서양의 사회진화론의 기본원칙과는 매우 모순되는 것이다. 서양의 사회진화론은 ‘적자’와 ‘부적자’의 불평등은 자연에 의해 처음부터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이러한 불평등은 결코 의식적인 행동에 의하여 제거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을 그들 나름대로 서양과는 다르게 해석하고, 패자가 승자가 되기 위한 의식적 행동의 필요와 요구라는 목적 아래에서 변형시켜서 사용하였는 것이다. 전복희,「사회진화론의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한국에서의 기능」, 한국정치학회보, Vol.27, No.1(1993), p. 422Ⅳ. 제국주의 이념의 수용에 따른 문제점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은 서양 열강이 자신들의 문명을 진화 단계의 최고 정점에 두고, 비문명 국가에 대한 제국주의적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 논리였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문명화된 일본이나 서구 열강의 눈에 그 당시의 조선은 야만과 미개의 이미지로 비추어 졌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눈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우리나라 지식인 스스로 내면화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따라서 그들은 미개와 야만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조선인들이 일본과 서양을 통해 유입된 신문물이나 신학문을 반드시 익혀야만 개화되고 문명화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국주의 열강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문명개화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고, 서양제국주의 논리의 내면화는 자신을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면서 스스로를 타자화, 식민화하였던 것이다. 정용화,「한국인의 근대적 자아 형성용
    인문/어학| 2006.12.26| 6페이지| 1,000원| 조회(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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