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Ⅰ. 부처님의 생애를 접하며...,Ⅱ. 부처님의 탄생에서부터 열반1. 출가이전2. 출가에서 성도에 이르기까지3. 교화에서 열반Ⅲ. 부처님의 생애를 읽고 나서..,※ 참고 자료불교설화편찬회, 「이야기로 들은 부처님 일생」(우리 출판사, 1998)Ⅰ. 부처님의 생애를 접하며...,우리의 사회 현실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의 지속과 헤어짐의 연속이며 각 사람마다 불성이 있고 행복을 즐기며, 고통을 싫어하면서도 살생하고, 도둑질하며, 거짓말하고 이러한 것들의 혼란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즉 욕망이란 세계속에 호흡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욕망의 세계를 부처님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서 조그만한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첫 장을 연다.Ⅱ. 부처님의 탄생에서부터 열반1. 출가이전마야 왕비가 친정에 가서 아기를 낳기 위해 코올리성으로 가는 중 카필라 성과 코올리 성 사이 룸비니라고 부르는 동산에서 꽃가지를 잡고 선채 아기를 낳았는데 이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러나 안타깝게 7일만에 마야부인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그뒤 어머니를 잃은 태자는 마하파사파제티라는 이모의 손에 키워졌다. 이 무렵 아시타 선인의 성서로운 일들을 간파하고 슛도다나왕을 찾아와서 태자는 출가하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일체의 사바세계를 교화시킬 인물이 될 것이라 예언하였다. 이 예언을 들은 왕은 처음에는 무척 기뻐하였으나 차츰 왕통을 계승해야 할 태자가 출가하면 어떻하나 걱정하였다. 슛도다왕은 궁전내의 모든 것은 완전하고도 아름답게 꾸며 태자의 마을을 즐겁게 하고 눈을 기뻐게 하였다. 그래서 이 곳에서 모든 것을 만족하였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던 중 태자는 처음으로 성밖으로 외출을 하게 되었다. 그 외출도중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 곳을 지날 때 까마귀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다가 재빨리 땅 위로 내려와 그 벌레를 죽여서 먹어 버렸다. 태자는 이때 비참한 살상의 광경을 보고 깊은 자비심을 일으켰다. "까마귀는 벌레를 죽임으로써 그의 먹이로 삼았다. 이렇듯 중생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사이 태자는 직접 궁밖에 나가고 싶어 왕에게 윤허를 구하고 삼성의 동쪽문에서 행렬을 지어 원림으로 향하였다. 그러는 중 태자는 머리는 백발이고 등은 굽어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가까스로 걷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였다. 처음보는 늙은 사람으로 인하여 태자는 "시간은 흘러 지나가고 시절은 변하여 나이를 먹음에 따라 늙음에 이르는 길은 대단히 빠른 것이다. 나는 한나라의 태자로서 부귀를 누리는 자이자만, 그렇다고 해서 늙음을 벗어날 수는 없다. 세상사람들이 매일환락에 빠져 어김없이 다가오는 늙음을 알지 못하고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얼마나 가련한 일인가." 이러한 것을 생각하며 사색에 더욱 깊이 빠졌다. 슛도다나왕은 시종으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보고 받은 뒤 깊이 상심하며 태자의 출가를 걱정하며 왕은 다시 시녀를 늘려 태자의 관심을 돌리기에 고심하였다.이로부터 태자의 두 번째 출타를 허락하였다. 이번에는 저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미리 노인이나 병자는 얼신도 못하게 포고령을 내리고 모든 준비를 완벽히 하였지만 태자의 남문을 통하여 원림은 결국 병자의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이때 태자는 병고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무서운 병고는 빈부귀천의 구별 없이 누구도 면할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사람들은 찰나의 향락에 빠져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음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다시 태자는 사색에 빠지게 되었다. 태자는 "우리의 몸은 커다란 괴로움의 집결체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무지로 인해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괴로움을 피하고 환락에 빠져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려고 조차하지 않는다. 그 가여운 병자를 보고도 그의 괴로운 고통을 보고도 내 어찌 원림에 나아가 즐길 수 있단 말인가?" 태자는 전보다 더욱 근심에 잠겨 명상을 하였다. 이러한 것을 본 왕은 우다인에게 태자 가까이에서 벗이 되어 세속의 즐거움을 설명하고 태자의 마음을 움직여 출가의 뜻을 버리도록 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왕은 태자에게 우다인을병상에 누워 무상의 바람이 불어오면 죽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인생이 헛되고 무상함에 몸을 떨었다. 이로인하여 生(생)·老(노)·病(병)·死(사)의 괴로움을 깨달은 바 즐거움을 가질 수가 없었다.2. 출가에서 성도에 이르기까지출가의 인연이 닿을 때를 기다리던 태자는 스물 아홉 살의 봄을 맞이하였다.태자는 잘못된 것을 얻으려 함이란 자신의 늙음과 병드는 것과 죽음을 피할 수가 없으면서도 그와 똑같이 덧없는 것들을 찾아 가지려 함을 말하는 것과 올바른 것을 얻으려 함이란 이같은 잘못을 깨닫고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초월한 인간의 모든 고뇌를 떠난 경지를 찾아가지려 함을 말하는 것을 깨닫고는 지금이야말로 올바른 것을 찾아야 하는 때라고 생각했다. 왕은 태자의 이런 출가의 뜻을 짐작하고 있었으나 이제 막상 그 말을 들어니 마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출가의 포기를 간곡히 종용하였다. 결국 왕은 야소다라가 출산일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으니 자식이 태어난 후에 출가하도록 하라고 권고하였다. 부왕의 간곡한 말을 뿌리칠수 없는 태자는 아들이 태어나는 날만을 기다렸는데 야소다라가 아들을 낳아 온 궁전이 기쁨으로 들썩거린 것을 알았다. 아들의 출생소식을 듣고 "라훌라"라고 외쳤다. 이말은 새로 태어난 아들이 자신의 출가구도에 있어서는 장애가 된다는 탄식의 말이었다.이로부터 출가의 시기에 대해 고민하다. 챤타카만에게 말을 준비해달라고 하고 결국 출가의 길로 떠났다. 태자는 生老病死(생로병사), 憂悲苦惱(우비고뇌)를 단절하지 않는 한 다시는 이 궁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맹세하였고 또한 아누다라三머三보리를 얻지 못하고 또 轉法輪(전법륜)을 하지 못한다면 다시는 부왕과 만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은애의 정을 단절할 수 없다면 다시는 마하파사파제왕비와 야소다라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 맹세하였다.이 출가로부터 태자는 고행림 깊숙이 들어가 이윽고 바가바 선인이 있는 곳으로 갔다. 태자는 바가바 선인에게 여기 있는 선인들은 나름대로 갖가지 苦行(고행)을 쌓고 있는데 열심히 하는 은 태자는 생로병사의 근본은 어떻게 하면 단절할 수가 있는가 질문을 하였다. 그에 대답하길 생사의 근본을 단절하기 위해서는 먼저 출가하여 계행을 따라 겸손비하하여 어떠한 굴욕도 달게 받는 인욕을 닦고 적정한 곳에서 선정을 닦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며 그뒤 수행의 공덕으로 번뇌에서 벗어나 욕계·색계·무색계 의 三界(삼계)를 점차 거슬러 올라가서 무색계의 절정인 非想非非想處(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여기까지 오면 우리들의 육체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까지도 면할 수 있다고 하며 이를 彼岸(피안)이라 부르는 경지이며 그 경지에 이르면 생노병사의 괴로움은 이미 없어지는 단계라 하였다. 이말은 들은 태자는 선인의 설명에는 귀를 기울이고 있으나 또 다시 실망을 아니할 수 없었다. 태자가 생각하기는 선인이 말하는 경계도 필경 마지막의 경지가 아니며 따라서 영원히 번뇌를 단절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피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흡족하지 못하였다.이 선인들에 이어 웃다카라마푸트라 선인의 암자에 찾아가 법과 율에 있어 청정행을 행하기를 원하면서 웃다카라마푸트라 선인과 여러 가지 토론을 했어나 이 선인의 법 또한 비상비비상처를 획득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여기서도 선인의 법에 만족하지 못하였다.태자는 그뒤 가야산의 고행림으로 갔다. 태자는 네에란자라 강의 기슭에 조용히 앉아 모든 중생들의 性能(성능)을 思惟(사유)하였다. 그결과 앞으로 6년 동안 고행하여 중생을 제도하자는 염원에 도달하여 서서히 고행의 생활을 하였지만 6년이 지나도 해탈의 길은 아직도 그 방향조차 뚜렷하지 않았다. 태자는 나와 같이 고목처럼 쇠약해진 몸으로 해탈의 길을 얻는다면 어리석은 중생들은 육체를 굶주리게 하는 것이 열반으로 생각하게 할 것이다. 이 생각을 한 뒤 태자는 절식은 그만두고 영향을 충분히 보충한 연후에 열반의 길에 도달하자 그것이 바른 성도의 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행으로 인한 기력이 쇠해진 태자에게 수자타는 우유죽을 공양하고 그것을 먹은 태자는 쇠약해러 올라가서 이 생인이 유래하는 바를 더듬어 보면 그것은 사랑하는 자에 대한 욕구, 즉 取(취)에서 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취는 사랑에서 생기고 사랑은 고락의 감수 즉 受(수)에서 생기며 그 수는 외계와의 접촉 즉 觸(촉)에서 생기는 것이었다. 또한 그 접촉은 육입이라고 하여 육근을 갖추어진 데서 오는 것이며 그 육근은 명색이라 하여 모태내에서 심신의 생성작용에서 오고 그 명색은 識(식)이라 하여 수태의 찰나에 의식의 각성에서 오는 것이다. 또한 그 식의 선악의 행위, 즉 行(행)에서 오고 그 행은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망에서 오는 것이며 이리하여 무명의 미망은 살아 있는 중생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을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육입이 멸하고, 육입이 멸하면 촉이 멸하고, 촉이 멸하면 수가 멸하고, 수가 멸하면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老死(노사)가 멸하고 따라서 근심과 슬픔, 고뇌도 함께 滅盡(멸진)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꾸로, 혹은 순서대로 십이의 인연을 관찰하여, 싯다르타 태자는 오래 전부터의 소망을 이루고 비로소 여래 즉 佛陀(불타)-깨달은 사람이 되었다.3. 교화에서 열반부처님(고타마 싯다르타)이 녹야원으로 가시는 도중에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우파카라는 자와 만나 귀의하였고, 무차링 용왕이 귀의하였다. 이윽고 부처님은 바라나시에 도착하였다. 부다 가양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에 베나레스의 교외에 있는 녹야원이라 부르는 먼 곳까지 걸어서 옛 친구 카운디냐, 마하나마, 밧다이, 아셋지, 다샤발라 카샤파 등의 다섯 사람을 만나러 간 것이지만 전날 고행을 버리고 미인으로부터 음식을 공양 받았으므로 타락한 존재라 생각하였지만 성도한 것을 알고 마음속 깊이 뉘우쳤다.부처께서 설법하시길 "사는 괴로움(生苦), 늙음의 괴로움(老苦), 병의 괴로움(病苦), 죽음의 괴로움(死苦),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괴로움, 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의 괴로움, 얻고자 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 우리들
목 차1. 서론····················1-21) 네슬레의 현지화 마케팅 연구 방향2) 회사소개(1) 한국네슬레2. 본론····················3-71)네슬레의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 노력2) 네슬레의 현지화 전략(1) 글로벌 브랜드 전략3) 한국 네슬레의 현지화 노력(1) 도입기(1979∼1986년대)(2) 성장단계(1987∼1996년대)(3) 경기 침체기에서 현재까지(1997∼현재)3. 결론····················81) 한국네슬레의 마케팅 전략 개선점2) 국제마케팅차원에서 한국네슬레의 마케팅 전략 고찰참고문헌··················· 91. 서론1) 네슬레의 현지화 마케팅 연구 방향다국적 기업으로서 네슬레가 해외지사 중 유독 한국네슬레만이 한국에서 시장점유률이 36%로 동서식품에 밀려 2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지난 3년간 소비자만족도 조사에 있어서는 동서식품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한국네슬레가 다국적 기업으로서 각국의 소비자들의 서로 상이한 식생활 문화를 갖고 있다는 측면에서 글로벌 브랜드전략과 현지화전략의 절묘한 절충적 전략을 통하여 식품산업 만큼 글로벌 마케팅이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시장에 진입 현지화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외국업계가 이처럼 한국에서 소비자 만족도 1위를 차지하고 점차 시장점유률을 높여 나가는 사례는 글로벌 브랜드로서 현지화에 노력한 성과라 하겠다.우리는 앞으로 글로벌 브랜드로서 현지화에 성공한 케이스라 볼 수 있는 한국네슬레를 초기 진입 단계부터 현지에 이르기까지의 마케팅 전략의 변화를 소비자 시장접근방식에 따라 살펴볼 것이다. 이를 초기 한국시장 진출의 도입기, 성장단계, 경기침체기에서 현재까지 이르는 큰 분류의 시점을 대상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또한 마지막으로 다국적 기업으로서 한국네슬레의 마케팅전략을 국제 마케팅 차원에서 고찰 해봄과 동시에 한국네슬레가 더욱 소비자와 밀접한 현지화 전략 방향 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2) 회사소개네슬레는 1866년 앙리요음료가 되었으며 전시 경제의 조건 속에서 생산과 판매량이 증가하였다. 네슬레의 총판매 수입은 1938년에 1억 달러에서 1945년에 2억 2500만 달러로 급증하였다. 전쟁이 끝나갈 즈음 네슬레 경영자들은 그들이 세계 커피의 관심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네슬레의 전통적인 사업 기반을 토대로 회사는 점점 더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커피는 네슬레의 주요제품으로 자리잡았으며 네스카페의 주목할 만한 성장은 이어졌다. 1950년에서1959년까지 인스턴트 커피 판매는 거의 3배가 되었고, 1960년에서 1974년 사이에 그것은 다시 4배가 되었다. 회사의 총판매량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5년 동안에 두배씩 총 두번 증가하였다. 1966년 냉동건조방법이 발전하게 되자 테이스터스 초이스 인스턴트 커피가 생겨나게 되었다.(1) 한국네슬레한국네슬레는 지난 1979년 한서식품과의 합작을 통하여 한국 시장에 진출을 하였고 지난 1987년에 한국네슬레가 설립되었다. 한서 식품을 1988년에 네슬레 식품으로 회사명을 변경하였으며 1993년에 한국네슬레로 흡수 합병되어 100% 외자기업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현재 네슬레는 대표이사로 이삼휘를 주축으로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계속해서 추진해 나가고 있으며, 외국기업으로서 특히 까다로운 식품시장에서 선전해오고 있다.◎ 한국네슬레의 역사1979. 7. 한서식품㈜ 설립 / 스위스 네슬레 S.A 사와 농어촌 개발공사(내부투자가)1981. 8. 이유식(쎄레락) 및 조미식품 공장 준공1987. 10. 한국네슬레 설립 / 네슬레 S.A사와 두산그룹 / 인스턴트 커피 외 18종1988. 1. 한서식품㈜에서 네슬레식품㈜로 상호 변경1989. 10. 커피/커피 크리머 공장 준공1993.3~9. 제2 냉동커피 공장준공 / 네슬레 식품(주)을 한국네슬레로 흡수 합병1996. 8. 두산그룹 주식 전량 매입1998. 10. ISO 14001 인증 획득2. 본론1)네슬레의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 노력-인스턴트 커피 개발 사례네스카페의 시작은 1930년으로 이었으므로 그 원인을 파악하는데 실패하였다. 결국 네슬레는 투사법을 이용하여 그 원인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100명의 주부들을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누어 각 그룹의 주부들에게 가상의 부인의 쇼핑목록을 보여 주었다. 두 부인의 쇼핑목록은 커피의 종류이외에는 동일하였다. 한 쇼핑목록에는 Nescafe instant coffee, 그리고 다른 쇼핑목록에는 Maxwell House Ground Coffee가 있었다. 부인들로 하여금 쇼핑목록을 본 후 자기들이 본 쇼핑목록의 부인의 개성과 특성을 간략하게 적도록 요구하였다. 그 결과 전체 응답 주부 중 48%가 인스탄트커피를 구매한 주부를 게으르다고 응답하고, 4%의 주부만이 ground커피를 구매한 주부를 게으르다고 응답하였다. 또한 48%의 응답자가 인스탄트커피를 구매한 주부는 살림을 잘 못할 것이라고 평가하고, 12%의 주부만이 ground커피를 구매한 주부가 살림을 잘 못할 것으로 평가하였다.그 당시 주부들은 인스턴트커피는 게으르고 살림을 잘못하는 주부들이 구매하는 제품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이 투사법을 실시한 결과 밝혀졌다. 이러한 결과는 기존의 서베이 조사를 통해서는 밝혀지기 어려운 내용들로 소비자의 내면의 의식을 간접적으로 물어 봄으로써 가능하였다.즉, 네슬레는 시대와 소비자들의 욕구변화를 적절히 포착하여 문제점을 인식하고 신제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소비자들에게 신제품에 대한 적절한 인식을 제공치 못했으며 이로인해 긍정적인 태도를 끌어내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자료원: Mason Haire, "Projective Techniques in Marketing Research," Journal of Marketing, 14, April 1950, pp649-656이 사례를 통해 네슬레는 제품의 개발이나 품질개선 못지 않게 소비자와의 마케팅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함을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2) 네슬레의 현지화 전략(1) 글로벌 브랜드 전략네슬레가 글로벌 브랜드로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은 서다.② 경쟁업체이때는 아직 커피에 대한 활발한 경쟁시장이 형성되어 있지도 않은 시기였다. 하지만 국내에는 1968년에 창립한 동서식품이 먼저 커피산업에 진입 미국 재너럴푸드사와 커피제조 기술도입계약 체결 동서식품 최초의 제품 맥스웰하우스 레규라 그라인드 커피 생산판매 개시, 맥스웰하우스 인스턴트 커피 생산판매 개시를 하고 있었다.③ 한국네슬레의 현지화 노력◆ 한국 소비자의 까다로운 입맛에 대처 전략수립(청주 현지공장 설립)올해로 창립 16주년을 맞는 한국네슬레는 까다로운 국내 소비자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외국계 식품회사다. 당시에만 해도 매우 보수적이었던 국내 소비자의 입맛을 잡는 데에 자신이 있었던 네슬레는 1979년 농어촌 개발공사와 합작회사인 한서식품을 설립해 국내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는 테이스터스 초이스 등 현지에서 생산된 네슬레 제품을 손쉽게 마켓에서 구매해 즐길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식품은 매우 보수적인 소비재다. 입맛이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해외 기업이 본격적으로 상륙하지 않았던 80년대의 국내 소비자들은 새로운 식품; 더군다나 해외 브랜드의 식품에 대해서 다소 회의적이었다. 한국네슬레는 이 같은 국내 상황에 맞서기 위해 다양한 현지화 전략을 수립해 진행해 나갔다. 그 중 첫번째가 현지 공장 설립. 1979년 한서식품 설립 당시 충청북도 청주시에 설립한 현지 생산 공장은 다국적 식품회사 네슬레가 한국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원동력이다.(2) 성장단계(1987∼1997년대) 마케팅전략① 한국의 식생활구조이 시기에는 소비자들이 식품에 다양화, 편의성 등에 관심을 가지는 시기였다.② 현지화 노력◆ 한국 소비자 빨리 빨리 문화와 편의성을 강조한 전략채택 ①네슬레가 진출한 전세계 77개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커피자판기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국내 소비자들이 자판기 커피를 선호하는데 주목 전국에 3000여개의 자체 자판기를 설치 운영 중에 있다.◆ 한국 소비자 빨리 빨리 문화와 편의성을 강조한 전략채택 ②한국시장 증가, 외식산업 및 식품산업의 발전, 주거환경의 변화 등으로 우리의 식생활이 급격히 서구화되어 가고 있는 단계이다. 서양채소나, 과일, 양주, 커피 등의 소비가 점차 늘고 밥 위주의 식사에서 빵이나 우유, 반조리 식품, 가공식품, 인스턴트 식품 등을 이용하는 가정이 증가하고 있는 시점이 현시점이다.② 현지화 노력◆ 한국의 특수한 북한 문제에 대처한 현지화전략북한의 기근이 국제 문제로 등장했던 지난 97년에는 북한 어린이 돕기 차원에서 80톤의 이유식 제품을 북한에 기증했다. 또한 98년과 99년에는 식량지원, 수재민 돕기 행사에 제품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한 사례로써 가시적인 경제적 효익은 없으나 네슬레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 특히 북한문제라는 한국의 특수한 문제에 대해 일조한 기업이라는 한국네슬레의 이미지 제고에 이바지 했다.◆ 한국 경기침체에 따른 소비자 밀착전략IMF시기인 한국의 경제침체기에는 TV나 광고 판촉행사 등으로 고객의 발길을 잡기 힘들어지자 소비자를 직접 찾아 나서는 마케팅 전략을 사용 한국네슬레는 "너무 재밌어; 너무 맛있어"라는 주제로 전국의 유아원과 유치원을 찾아다니는 바니전국투어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이에 많은 어린이의 소비계층을 확보 부모에게까지 호응이 가도록 소비자 밀착 마케팅 전략을 사용하였다.◆ 한국 소비자의 건강에 대한 관심증대에 따른 전략한국 네슬레는 지난 10여년동안 국내 어린이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우유 보조식품인 네스퀵을 새롭게 출시했다. 이는 한국 부모들이 자녀 건강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 성장기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필수적인 7가지 비타민과 칼슘 등 영양적인 면을 보강해 새롭게 출시하였다.◆ 경쟁사인 동서식품에 대비 한국소비자에 대한 침투력 증대전략보다 효율적으로 한국 소비자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으로 다국적기업 네슬레의 현지화 전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는다는 점이다' 한국 네슬레의 주력제품인 '네스카페'와 '네스티' 등을 제조 및 판
목차제 1 장 문제제기·················· 1제 2 장 한국의 노동환경의 변화·········1-2제 3 장 외국인 고용허가제 발생 배경······2-3제 4 장 내·외국인 고용정책의 문제점·······3-5제 5 장 개선 방향·············· ·····5-6참 고 문 헌·············· ·········7제 1 장 문제제기우리나라는 현재까지 끊임없는 노동관계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내국인 노동관계로는 가장 최근에도 지하철 노조 파업, 화물연대 파업등으로 사회전체가 혼란을 겪고 있으며, 1960년대 이후로 독일, 중동국 등 각국으로 인력을 수출하는 나라였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외국인력을 수입하는 나라로 전환되어 외국인 노동관계까지 사회적 이슈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대표적인 이슈가 외국인 고용허가제 일 것이다. 앞으로 내국인 노동관계에 관한 각종 문제들과 그 개선방향과 아울러 외국인 고용 문제에 관해 연구함으로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합리적이고 장기적인 정책대안을 모색하는데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제 2 장 변화하는 한국의 노동환경우리나라는 IMF라는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노동시장에서의 실업과 고용불안정의 상황에 직면하였으며, 고용안정을 조건으로 비정규직을 우선 해고하도록 방치하거나 임금 삭감을 감수하는 등 노동환경의 변화를 겪고 있다. 노동자들간에 내가 해고되지 않기 위해서는 동료를 밟고 서야 한다는 인식이 만연하는 등 노동자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고, 그러한 비인간적 경쟁에서 탈락해 직장에서 쫓겨나면 생활고와 함께 모든 것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사회분위기로 고용문제에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이러한 노동환경의 변화는 첫째 경제적 측면에서 IMF로 인한 실업률 증가에서 찾아 볼수가 있다. 1963년 8.1%였던 한국의 실업률은 그동안 다소 기복이 있었기는 하나 지속적으로 감소해 온 결과 1996년에는 가장 낮은 2.0%를 기록하고 있다.박동운, 『노동시장의 유연성』, (자유기업센터, 1997), p.44.그런데 제조업과 관련하여 기술발전이 노동환경 변화에 미친 두 가지 특징은 언급할 수 있다. 먼저 1992년에서 1994년 간에 제조업 종사자는 4.5% 증가했는데 이 중 정보·지식 관련 제조업 취업자는 13.0% 증가한 반면 그 이외의 취업자는 2.6%만이 증가했다. 또한 같은 기간 동안 고용증가율이 빠른 5개 업종은 사무·계산·회계용 기계, 기타운송장비, 조립금속제품, 출판·인쇄·기록매체 복제, 그리고 의료·정밀·광학기계·시계로 나타났는데 이 중에서 기타운송장비 제조업을 제외한 4개 업종은 정보·지식관련 제조업이다. 이는 제조업의 경우 정보 관련 분야의 고용증가가 다른 분야보다도 더 빠르다는 것을 보여준다.김애실, 『정보기술의 혁신과 산업별 구조의 변화』, (한국외국어 대학교, 1997), pp. 21∼41.또한 노동관계법 개정에 관해서 이와 같은 맥락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법과 제도와 관련된 노동환경 변화의 대표적인 예는 1996년에서 1997년 간에 있었던 노동관계법 개정일 것이다. 정부는 한국경제가 대내외적으로 당면해 오고 있는 노동환경 변화를 감안하여 노동관계법 개정을 추진했다. 노동관계법 개정의 기본방향은 "경쟁력 강화와 삶의 질 향상을 균형있게 실현하는 노사공영의 제도적 구축을 위하여 첫째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증대시켜 경제의 활력을 제고하고, 둘째 노사의 자율과 책임을 강화함으로써 민주적 노사관계를 지향하며 셋째 국제적 규범과 기준을 존중하면서도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여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든다는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박동운, 앞의책, p.54.제 3 장 외국인 고용허가제 발생 배경국내 근로자들의 이러한 노동시장의 변화에 대하여 각종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외국인 노동인력 문제 또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지금 현재 논의가 되고 있는 고용허가제의 배경은 한마디로 현행 연수생제도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결함 때문이다. 이에 관해 살펴보면 첫 번째 현행 연수생 제도하에서는 국가간 공식적 협약이 없이 민간 인력 송출기관이 인력의 흐연수생의 무단 이탈과 불법 취업, 이로 인한 인력의 암시장 형성 및 노동시장의 왜곡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탈하는 연수생이 증가하는 만큼 불법 체류자도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즉 이것은 현 연수생 제도를 통한 인력수급 체제를 그대로 둔 채 강행하는 불법 체류자에 대한 단속은 구조적 한계가 있으며, 실효를 발휘하기가 어려움을 나타내 준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문제가 객관적으로 존재한 가운데 외국인 근로자들과 시민단체들이 이러한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하면서, 연수생 제도가 가진 모순점을 고쳐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1994년 1월에는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던 불법 취업자들이 중심이 되어 경실련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뒤 불법 체류 근로자들도 산재를 당하는 경우에는 사실상의 근로관계가 인정되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로 산업기술 연수생들은 이른바 합법적인 신분으로 근로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산재 적용이 되지 않는 기이한 현상과 더불어 연수생들은 불법 체류자보다 낮은 저임금, 감금노동, 수당 없는 강제잔업, 송출업체의 횡포 등 지극히 열악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네팔 출신 연수생 13명이 1995년 1월에 농성을 벌이게 되었다.) 안상규, "외국인력고용·관리정책과 그 개선 방안," 고려대정책 대학원, 2001. 08. pp.39∼45.이렇게 사업기술 연수생제도가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고, 나아가 국제적 문제로까지 비화되자 노동부에서는 연수생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즉 1995년 3월 1일 이후부터 외국인 산업기술 연수생의 보호 및 관리 관한 지침을 마련, 연수생에게도 법정 노동시간과 최저임금, 산재보험 등 기본적 노동조건을 보장하도록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연수생은 법적으로 근로자가 아니므로 사업주가 지침을 위반해도 법적으로 처벌이 어려워 근본적 관리대책 마련을 위해서는 고용허가제 도입이 시급하노동자들 역시 공용에 대한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정체성과 대안을 모색해 왔다. 이들은 서로 상충되는 고용의 이념을 둘러싸고, 대립과 갈등을 경험하면서, 타협의 공간을 만들어 왔다. 이러한 타협은 항상 내재된 모순과 각축의 여지를 안은 불안정하고 잠정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끊임없이 요동하는 불확실성 속에서 정치, 경제 및 사회적 환경에 따른 큰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해 왔다.) 박준식, 『세계화와 노동체제』, (도서출판 한울. 2001), p.68.경제 위기 이전의 고용체제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에 이르는 10여 년 동안 한국제조업의 대기업들은 고용의 사회적 구성방식을 경험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 기간 동안 제조업의 작업현장에서는 정치 및 경제적 환경의 변동, 이해 당사자들 간의 전략적 관계의 변화와 더불어 몇 차례에 걸쳐 주도적 고용체제가 변모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고용체제의 역동적 변화의 과정에서 우선 고용의 구성방식은 시장 모델로 볼 수 있다. 1987년 이전 대다수의 대규모 제조업체들은 사실상 자유 고용의 원리에 의해 그들의 고용방식을 조직화해 왔다고 보아야 한다. 노동력의 무한정한 공급, 기업의 저임금 경쟁전략, 테일러 주의적 작업조직, 인적 자본에 대한 최소한의 투자, 높은 이직률 등은 이 시기에 노동시장 체제의 기본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체제는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낮은 신뢰에 의해 조직되어 있었고, 생산직 노동자들의 노동시장은 조직적 성격보다 개방적 성격을 훨씬 강하게 갖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작업현장의 행위자들 간에는 신뢰 형성의 여지가 극히 적었다. 노동자와 경영자간에는 깊은 불신이 작업현장 속에 깊숙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불신의 구조화는 시장 모델이 요구했던 작업현장의 사회적 조건이다. 경영진이 추구하던 고용의 권리와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시장계약의 논리가 지배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격적 대우나 내부 노동시장에서의 승진 기회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자부심과 지위 의식을 부여하는 내부 노동시장의 논것이 기업의 전략이었으며, 자율성과 재량, 조직에의 헌신이 없는 노동자들에 대한 감시와 감독을 통해 물리적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조직관리의 핵심 요소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주된 대안은 조직을 이탈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시기의 시장 모델은 전형적인 낮은 신뢰구조가 제도화된 노동 시장 체제로 볼 수 있다.) 박준식, 『생산의 정치와 작업장 민주주의』, (서울: 백산. 1996), pp.35∼43.그리고 연공 모델은 급속히 변화하는 시장과 기술 환경에 신속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시장과 기술의 유연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상과 작업조직의 유연성이 확보되어야 하지만, 연공 모델은 이러한 유연성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또한 이 시기에 거의 전 산업에서 한국 기업의 지배적인 작업조직 원리로 굳어진 대량생산에 의존하는 작업조직 모델은 노동자들의 유연한 숙련을 요구하지 않는 작업조직의 성격이 강했다. 연공적 원리가 유연성을 갖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근속기간과 생산성이 비례해야 하지만, 기업들의 작업조직은 단기간의 숙련 습득을 요구할 뿐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숙련 향상을 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업조직과 생산성, 보장 및 평가체계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로 인해 연공 모델의 한계가 들어 나기 시작했다.) 박준식, 앞의책, p.78.외국인 고용정책의 문제점으로서 우선 운영상의 문제점을 들 수 있다. 산업기술연수제도는 현재 우리나라의 유일한 단순기능 외국인력의 도입수단으로 91년 아래 시행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산업기술연수제도가 일부 중소제조업의 인력난 완화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제도 자체의 문제점과 운영상의 비효율성으로 우리나라 인력난의 전체적 완화에는 큰 도움을 못 줄 뿐 아니라 오히려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고 판단된다.산업기술 연수제도의 대상범위가 너무 좁아서 인력난 해소에 큰 기여를 못한다는 점이다.효율성에 관해 문제점을 살펴보면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중기협)은 단지 기술연수생을 추천할 수 있는 추천기관일 뿐 연수생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