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명상과 수행 레포트에 조금 뜻이 다른 과제를 내게 되어서 교수님께 사과드립니다. 저의 수행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제대로 된 결과물이 안 나오게 되었을 때 택한 이글은 페터를 주제로 삼고 있죠. 여러 언론이나 신문 또는 도서 각 분야에서 시끄럽게 떠든 거지 성자 페터 노이야르... 이 사람이 명상과 수행의 세계라는 강의와 연관이 있냐는 질문을 던졌 때 대부분 긍정할 것이라는 개인적인 생각하에 그에 대해 아는 여러 정보와 더불어 저의 견해를 주제로 글을 이어가겠습니다.먼저 페터란 인물에 대한 정보부터 보죠. 1941년 출생해 68년 프랑스 5월 혁명에 참여한 그는 청년 시절 사랑했던 연인의 갑작스런 죽음과 서구 문명에 대한 회의로 방황과 여행을 거듭하던 중 동양 사상과 종교, 특히 불교에 심취하여 붓다가 살았던 방식인 아나가리카, 즉 집 없는 출가 수행자의 길을 독일 쾰른의 한 복판에서 걸어가고 있다. 그에 대한 한 기사를 보면 무척 호의적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알 수있습니다. [ 그가 가진 것이라곤 낡은 누더기와 작은 손수레, 보자기, 실과 바늘이 전부다. 그가 자는 곳은 숲 속의 나무 밑. 하루 한 끼니만 탁발로 해결한다. 망명을 온 이란인이나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훌륭한 카운셀러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의 이야기속에는 언제나 동서양의 수많은 종교와 성현들이 등장하고, 심지어 셰익스피어의 아름다운 시들이 줄줄 암송된다. 그러나 항상 그는 진실하고 온유하며 겸손하여 자신의 깨달음과 지식을 드러내지 않고 누구에게나 다정한 친구처럼 대한다. 정신은 화석화된 돌이 아니고, 그 속에 갇혀있을 수도 없다. 아, 그러나 우리는 감각적인 쾌락의 돌 속에 갇혀 있다. 우리가 사는 집은 영원히 헤어날 우 없는 이중의 돌로 된 감옥이다. 페터 노이야르, 그는 정신을 가두고 있는 돌을 깨뜨리고, 마침내는 유폐된 정신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한 사람이었다. 그는 완전한 가난, 즉 무소유를 실천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무소유란 그까. 그를 위해 영등포구청 옆 당산공원으로 자리를옮겼다. 쾰른과 같은 하늘, 같은 햇볕이었다. 그는 쾰른의 노이마르크 중앙도서관과 숲을 오가며 독서와 명상을 하고, 무공해식품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먹을 수 있는 채소와 과일을 얻어 살아가고 있다."다른 노숙자나 부랑아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라는 물음에 그는 "천하기로 따지면 노숙자보다 더 천하고, 가진 것도 더 적다. 그러나 난 알코올이나 담배, 마약을 원하지 않으며, 24시간 내내 기쁠 뿐이다."사회보장제도가 잘 돼 있는 유럽에선 실업자들도 한 달에 우리 돈으로 70여만원의 실업수당을 받아 살만한 탓에 나태형 실업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는 실업수당을 비롯한 일체의 사회보조금을 받지 않는다. 돈을 아예 몸에 지니지도 않는다.가진 것이 없지만 더 가지려는 마음이 없으니 부족함 또한 없다. 그래서 모든 이에게 자비심을 가질 수 있다. 한국에도 실업으로 인한 노숙자가 적지 않다는 말에 그는 혀를 찼다."관점을 바꿔야 한다. 실업자는 보수를 바라지 않고 무슨 일이든 하려는 마음이 큰 행운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와 사용자는 설사 노숙자가 적임이 아니더라도 '당신이 해야 할 훌륭한 일이 있다'며 그를 끌어안는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친구들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 채 영하의 날씨에도 한뎃잠을 자는 그를 안타까워하지만 정작 그는 현대인들을 안타까워한다. "문명의 이기는 독 묻은 과일과 같다. 물질은 이기적 욕망을 더욱 자극할 뿐이다. 어느 쪽이 주인인가. 물질인가 사람인가. 사람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2차대전 직후 패망한 독일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서로 인간애를 발휘했다. 지금은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 가치를 잃어버렸다."붓다가 모든 탐욕과 분노의 어리석음을 끊어버리고 평생 길에서 산 삶에 감동을 받아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그는 "인디언은 늙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 조용히 삶을 정리하고 생을 마감한다"며 23년째 계속해온 이 생활을 죽는 순간까지 자 페터 노이야르와의 대화“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는 자신들이 받은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대담자:조효근 목사(본지 발행인)통 역:박은영(본대학 통역대학원 졸업)일 시:2001년 10월 1일장 소:독일 퀼른대학교 중앙도서관 별실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뒤셀도르프 공항 도착, 다시 퀼른으로 오자 마자 한정수 권사 댁에서 점심을 먹고 퀼른 대 도서관으로 향했다. 통역을 걱정했으나 뜻밖에도 본 대학 독일어 통역대학원 출신 박은영(박광웅 안수집사·한정수 권사의 따님) 씨가 맡아 주었다. 대학 교정으로 들어가 나무 숲을 살펴 보았다. 숲속의 어디에도 페터는 없었다. 도서관으로 갔다. 학생들에게 물으니 페터는 열람실에 있을 거라는 귀띔이다. 가방과 겉옷을 보관실에 맡기고 우리는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맞은 편 창가, 나는 즉시 페터 노이야르(60·사상가)의 뒤통수를 알아 보았다. 페터 노이야르는 지금 불교에 심취하여 부처를 따르는 길을 온 몸으로 익히는 수도자요 사상가이다. 한국의 일부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3무 생활(집, 부인, 재산 없음)의 구도자이다. 그는 식사도 하루에 한 번씩 오전 수퍼나 시장 상점에서 기한이 지난 음식물을 얻어서 먹는다. 철저한 자기 부정의 구도자이다. 맨발에 퀼른대 나무 숲이 그의 거쳐요 숙소인 철저한 무소유의 사람이다. 필자는 그의 특이한 생활, 특히 예수를 잘 믿기 위해 지금은 부처에게 배우고 있다는 그를 한 번 만나고 싶었으나 그가 한국에 왔을 때는 찾아가지 않았고, 언젠가 그의 터전인 독일 퀼른 대학 잔디밭에서 만나겠다고 했더니 의외로 쉽게 그를 만날 기회가 열렸다.조효근 목사 : 페터 선생.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온 조효근 목사입니다.페터 노이야르 :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한 분이 저를 찾아 온다고 했는데 그럼….조 : 예 그렇습니다. 제가 전재성 선생을 통해 10월 초 독일을 방문하게 될 때 페터 선생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요.페터 : (얼싸 안을 듯 기뻐하며 내 손목을 다시 꽉 쥔다)조 : 페터 선생, 당신의 극단적 금욕 생활을느끼지만 평범한 일상인의 모습이 아니라 산속 깊은 절(사원)에서 별도의 생활을 하는 등 자연인의 모습이 서투르지요. 그러나 예수는 그의 모든 제자들에게 사람들 가운데 사람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또한 그 가르침 대로 기독교는 일부 가톨릭이나 정교회나 콥틱 기독교 등의 수도원이나 수녀원을 제외하고는 일상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품격을 찾아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페터 : 견해의 차이이겠으나 나는 불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은 비슷하다고 봅니다.조 : 비슷할 뿐, 본질에 있어서 차이는 있지요. 페터 선생, 요즘 미국 세계무역센타가 테러에 무너지면서 미국 정부가 아프카니스탄을 공격하려 하는데 나는 마음이 우울합니다. 조금전에 당신은 불교와 기독교가 비슷하다고 했으나 나는 기독교와 이슬람이야말로 `비슷'하며 그 태생이 같은 아버지(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두고 하는 말임:편집 주)의 자식들이니 혈통 상으로는 하나요, 기독교와 이슬람은 구약성경을 받아들임으로 사실상 서로를 거부할 수 없는데 서로 싸우니 답답해요.페터 : 기독교나 이슬람, 유대교까지 모두 하나입니다.조 : 하나다. 참으로 당신은 편한 사람이군요. 나 역시 저들 세 종교의 태생적 일치, 구약 수용으로 과정도 일치라고는 보지만 그러나 종교로의 역사 과정을 모두 한 살림으로는 볼 수 없지 않을까요.페터 : 그렇게도 생각할 수는 있겠군요.조 : 우리는 역사의 과정을 중시해야 합니다. 내가 알기로는 12세기 십자군 전쟁기 이후로 이슬람이 기독교에게 원한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저들을 어떻게 달래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페터 : 행동 없는 종교들의 실수지요. 서로 사랑할 수 있으면 됩니다.조 : 기독교가 이슬람에게 무엇인가 주고 싶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슬람은 피해의식을 구라파에게 갖고 있으며 특히 아랍권의 한 복판에 이스라엘 국가가 들어선 것이 못 마땅할 것입니다. 이같은 현실의 기반에서 기독교는 이슬람과 화해를 하고 종교로나 혈통에 있어서까지 남남이 아니니 잘 지내고 싶어요. 당신의 도움말을 듣부분도 기독교의 앞날이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페터 : 나도 한국 불교에 불만이 있습니다.조 : 기독교 불교 모두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다시 태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페터 : 한국교회와 서구 교회 중 어디가 더 마음에 듭니까?조 : 서구 교회 입니다.페터 : 왜 그렇죠?조 : 서구 교회는 기본적 진실이 있지요.페터 : 서구 종교(독일 기독교)는 종교세 내지 않으려고 `나는 종교가 없다'고 합니다. 진실하지 않습니다.조 : 그것은 특정지역일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는 연륜이 천년 또는 이 천년입니다.그 저력을 나는 믿고 싶어요.페터 : 독일교회 목사들은 동성연애자들의 결혼에 동의했어요. 믿을 수 없어요. 퀄른에 전에는 교회가 360개처가 있었지만. 지금은 교회 몇 군데 없습니다. 진실도 열정도 없지요.조 : (페터는 구라파 교회에 미련이 없어 보였다) 페터 선생 내일 나는 윗덴 부르그, 마르틴 루터의 개혁 현장에 갑니다. 루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페터 : 당시에는 꼭 필요한 운동이었어요. 좋은 분이죠. 독일어의 은인이기도 하고.조 : 루터를 싫어하는 부분은 없는지요?페터 : 있습니다. 유태인을 나쁘게 평가한 점입니다.조 : 루터의 가르침 중 `만인 제사장'이란 교리가 있습니다. 이 부분이야 말로 예수가 신(神)의 세계를 떠나 모든 인간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한 대목인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페터 : 그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조 : 당신의 모습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생각케 하는 데….페터 : 나는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는 훌륭한 분이죠.조 : 당신도 이제는 노숙 생활을 청산하고 간디의 아쉬람 같은 거처를 마련하여 제자를 본격적으로 기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페터 : 나는 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 대학 안에도 나를 배우고 따르려는 이들이 많아요. 한국에 가고 싶어도 내가 여기(퀼른)를 떠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조 : 그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일 수도 있겠죠?페터 :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나
인간의 성격발달이론에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본 수업에서 배운 내용만으로 보자면 대표적으로 인본주의이론과 정식분석론, 환경론이 있다. 정신분석론에는 대표저인 인물로 행동주의의 프로이드가 있고 인본주의 이론에는 실존주의의 로저스가, 환경론에는 스키너가 있다. 본문에서 이 세가지 이론들에 대해 설명한다.첫 번째로 정신분석 이론 (Psychoanalytic theory)1. Freud의 성격발달이론많은 사람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S. Freud의 정신분석이론은 인간의 성격발달 과정을 설명하는 유용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Freud가 가정한 2개의 심리학적 동기는 성욕과 공격성이다. Freud에 의하면 모든 행동은 본질적으로 성적 혹은 공격적 충동의 무의식적 표현이며, 무의도적이며 무선적인 행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성욕이나 공격성과 같은 강하고 원시적인 동기는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영역 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성격의 구조를 원초아, 자아, 초자아의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본능과 충동의 근원인 원초아(id)는 정신에너지의 일차적인 근원으로서 출생시부터 작용하며 현실의 제한을 받지 않고 쾌락원리에 따라 만족을 추구한다. 반면 자아(ego)는 지각, 기억, 판단, 자기인식 그리고 언어기능을 포함하여 현실의 한계내에서 원초아의 충동을 만족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 원초아나 자아보다 다소 후기(아동기)에 발달되는 초자아(superego)는 양심과 자아이상(ego ideal)으로 구성되며 원초아보다는 현실지향적이지만 자아보다는 다소 이상 지향적이다. 또한 자아는 초자아를 거역하지 않으면서 원초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한다.Freud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분명한 성격발달의 단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성격발달은 영아기에서부터 청년기까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Freud는 인간의 성격은 인생초기에 대부분 확립되기 때문에 초기 아동기의 어린이를 양육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부모에 의해서 부과되는 사회적인 제지를 분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실상 Freud는 이러한 자기 통제와 지배는 항문기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하였다.Freud는 부모가 대소변가리기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욕구불만을 다루는 두가지 방법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만약에 부모가 거칠거나 강압적이면, 아이들은 대변을 참게 되어 변비가 되며 이러한 억제 경향이 심해지면 다른 행동에까지 일반화되어 항문적 보유(anal-retentive)성격이 된다. 성인에게 이런 성격이 나타나면 고집이 세고 인색하며 복종적이고, 시간을 엄수하며, 지나치게 청결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불결한 경향이 있다. 이것은 또 혼란과 모호함을 참거나 명확한 구분을 할 수 없는것 등과 같은 추방(expulsion) 의 원형이 된다.그 반대로 부모가 아이를 달래서 정기적으로 대장운동을 하게하고 대변을 한 후 칭찬을 해주며 목욕을 시키는 경우, 아동은 이런 행동에 즐거움을 느끼고 후에 항문적 공격(anal-aggressive)성격을 갖게 된다. 이 단계에 고착되면 잔인하고 파괴적이며, 난폭하고 적개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람은 애인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을 근본적으로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3) 남근기4세부터 5세 사이에서는 아동의 리비도적인 관심을 새로운 성감대인 생식기로 옮겨간다. 이 남근 심리성욕 발달기에 아동들은 자신의 성기를 자세히 관찰하고 자위행위를 하며 출생과 성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비록 아동의 성인의 성욕에 대한 인식이 대체로 부정확하고 모호하며 또한 아직 정립되지 않았지만 Freud는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그들의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명확히 성관계를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부모들의 성교를 목격할 수도 있고 또는 부모의 대화나 다른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런 원초적인 관계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Freud는 대개의 어린이가 성교를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공격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Freud의 이 단계에 대한 설명은 많은 오해와 논쟁의성과의 사랑이 만족스럽다.3. Erikson의 발달단계설Erikson는 Freud의 정신분석을 발전시켜 identity를 중심으로 한 자아 발달이론을 전개하였다.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사회적 존재가 되며, 그 후 만나는 사람들과 겪어야 하는 일들에 따라서 그의 사람 됨됨이가 변해간다고 한다. Erikson은 선천적 소질과 환경의 영향에 따라서 개성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사람마다 거쳐야만 하는 공통된 단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 각 단계마다 수행하여야 할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어서 그것이 성공적으로 해결이 되면 좋은 인품의 소유자로 성장하고 잘 안되면 반대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Erikson이 말하는 발달단계에 대해 알아보자.(1) 신뢰감 대 불신감 (0세∼1세)이 시기는 유아가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주로 돌보아주는 사람인 어머니와의 관계이다. 유아가 처음으로 맺게 되는 사회관계에서 어머니가 유아의 신체적·심리적 욕구와 필요를 적절히 충족시켜 주면서 일관성있게 돌보아주면 유아는 어머니 또는 돌보아주는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그러나 유아의 요구와 필요에 잘 응해 주지 못하거나, 유아를 다루는 방식에 일관성이 없게 대해주면 유아는 불신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Erikson은 이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보았다. 그 이유는 이 시기에 신뢰감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 생의 후기에 맺게 되는 모든 사회관계에서의 성공적인 적응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Erikson이 신뢰감만을 강조하고 불신감의 효용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인간의 참된 성장을 위해서는 불신감의 경험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긍정적인 성격발달을 위해서는 신뢰감에 대한 많은 경험이 중요하다.(2) 자율성 대 수치심과 회의감 (2세∼3세)Erikson에 의하면 이 시기의 유아는 여러개의 상반된 충동사이에서 스스로 선택을 하게 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나타낸다고 한다. (자율성을 가지려 한다.)이 단계의 정기제를 평형화란 개념으로 설명했다. Piaget는 아동의 발달요인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숙, 물리적 환경의 경험, 사회적 환경 등도 들고 있지만 평형화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개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평형은 동화와 조절의 균형을 말하므로 여기서 불균형이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불균형이 생기면 이것은 아동으로 하여금 평형을 추구하게 하는 동기유발이 된다. 불균형을 벗어나서 평형을 향해 가는 것은 모든 유기체가 가진 생득적 항상성이다. 따라서 평형화란 평형상태, 즉 균형을 향한 계속적인 추동이라고 할 수 있다.2. Piaget의 발달단계(1) 감각운동기유아는 태어나자마자 감각운동(0세∼2세)적인 행동을 시작하면서 환경을 느끼고 사물을 지각하게 된다. 감각운동적인 행동은 모든 지적발달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체나 감각적인 관계 그리고 환경적 대상에 대한 의식이 없지만 나중에는 대상과 자기를 의식하게 되고, 물체를 잡거나, 목표물을 향해 움직이거나, 소리와 행동을 모방할 수 있게 된다.이 단계의 아동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아동은 그가 직접 다루는 사물이 아니면 그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4,5개월된 아동은 동을 가지고 놀다가 그 공이 나보이는 곳으로 굴러가 버리면(예를 들면, 이불 속으로) 그 이불이 자기 손에 쉽게 닿는 가까운 곳에 있어도 그 공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공이 눈에서 사라지면 그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때의 아동은 사물에 대한 도식(schema)은 항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자기를 참조체제로 보게 되며 자신의 심리적 세계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단계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아동은 대상 항구성(object permanence)이란 개념을 발달시키게 된다. 즉 대상은 그가 직접 체험하고 있지 않을때도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결국 2세경이 되어서야 아동은 대상 항구성을 이해하게 되고 대상이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더라도 그 대상을 찾는 최고 수준인 마지막 단계에서는 스스로 마음속에서 승인하는 도덕법칙이 생겨서 이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약정된 의무와 공인된 법칙에 따르는 5단계와 개인의 양심에 좇는 도덕성의 인습이후 수준이라고 한다. Kohlberg는 어린이의 도덕적 수준은 부모나 동료집단을 모방함으로써 발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환경 사이의 인지적 상호작용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에 어린이를 자신의 도덕적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도덕철학자로 보고 있다.둘째로 인본주의 이론을 살펴보면 인본주의 심리학은 1960년대 초 미국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종래의 정신분석학(메타 심리학)이나 행동주의 심리학에 대한 제 3세력으로 심리학계에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본주의적 접근은 미국의 심리학자인 Maslow와 Rogers가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무의식적인 동기(정신분석학)와 환경적 자극(행동주의)에 의해 움직여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발전시키면서 태어나게 되었다. 인본주의 이론은 실존주의 이론, 형태치료(gestalt therapy)와 같이 실존주의 철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치료자와 내담자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실존주의 이론이 소외, 무의미, 불안 등과 같은 인간존재의 제한성과 비극적 측면에 초점을 두는 반면 인본주의 이론에서는 사랑, 선택, 창조성, 의미, 가치, 자아실현과 같은 인간의 자아실현경향과 긍정적 측면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인본주의 심리학은 정신분석학이나 행동주의에서 보는 것과 같은 치밀하고 확고부동한 이론체계라기보다 일종의 이념이나 가치의 체계, 운동(Movement)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욕구 5단계설·욕구불만족이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욕구가 만족되면 그것은 더 이상 동기를 유발하지 않는다.·인간의 욕구는 중요한 순서대로 배열되는데, 욕구단계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되어있다.·다음 단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전에 그 전 단계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만약 충족된 욕구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만다라를 보고...만다라는 임권택감독의 영화로서 소설로서도 존재하는데 그 시작은 상당히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법운은 주지승이 낸 문제를 해결하고 견성성불을 위해 절과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그러다가 법운과 지산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버스속안에서 만난다. 이때 검문에 지산이 걸렸는데 법운이 끼여들어 해결. 이 기회로 두사람이 알게된다. 지산은 옛날에 중의 신분으로 여자랑 잤다가 걸려 파계 당한 중이다. 법운은 어느 절로 갔다가 우연히 지산을 만나게 된다. 법운은 지산의 방탕한 행동(중의 신분으로서 술먹고 여자랑 같이 자는 등)이 마음에 안들이고 있다. 그러다가 둘은 같이 다니게 된다. 둘은 어느 창녀촌을 갔는데 그곳에는 지산의 여자가 있었다. 법운은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따라간다. 그곳에서 지산은 자기 자신의 여자랑 방을 옮기고 법운만 남게된다.법운이 잠을 자는데 어느 창녀가 들어와서 법운이랑 섹스를 하려고 한다.이때 법운의 한쪽맘한켠에 여러 가지생각이 교차된다.법운은 정신을 차리고 도망을 친다. 법운은 자기가 있던 원래의 절로 돌아간다. 돌아가니 지암선사가 낸 문제의 답을 알려달라고 한다.문제는 '어떤 새가 갇혀있는데 그 새가 너무 커버려서 꺼낼 수가 없다고 한다. 근데 그 새를 꺼내달라'는 것이다. 법운은 풀지못하고 달아난다. 그러다가 법운이 절에서 수관을 만났는데 수관은 자기 신체에 해를 가하면서 득도를 하려하고 있었다. 벌써 세손가락이 없었다. 불에 태운것이다.수관은 조실 선사에게 또다시 신체에 해를 가하므로 서 득도를 한다하니 호통을 쳤다. 그리고 법운도 한 손가락을 불에 태웠다. 그러다가 법운과 수관은 자기 자신들의 어리숙함을 느끼고 후회하며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또 다시 득도를 위해 절과 거리를 방황하려고 절에서 나왔다. 같이 걸어가다가 법운은 수관으로부터 지산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때까지 법운 마음한 쪽에는 지산은 중의 자격이 없다라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지산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마음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법운은 지산을 찾으러 가다가 우연히 슈퍼에서 술을 먹고 있는 지산을 보게된다. 둘은 같이 어느 산꼴짜기에 있는 절에 가서 수도를 한다. 그러다가 지산이 죽고 법운은 지산과 그 절을 함께 태운다. 법운은 곧바로 서울로 가서 어머님을 만난다.헤어진 뒤 한 여인과 동침한 다음 날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끝난 만다라는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승들처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에 평생을 바치는 건 어떤 것일까 과연 좋은것일까? 최선인가? 결국 지산처럼 깨달음을 얻지도 자신을 이기지도 못하면 어떨까? 억울하지는 않을지. 보통사람처럼 사는 것보다 얼마나 정신적으로 이득이라고 해여하나? 만족을 얻는 것일까? 육욕을 삼킴으로써 번뇌에서 벗어나겠다는 대목은 이해가 가지않는다. 육욕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맞나? 단지 신체적이유는 아닐까? 그것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건 아닌지. 단지 욕망을 이기지 못한 자신을 번뇌에서 구제하기 위한 그리고 이기지 못한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도피하고자 하는 자신을 이해시킨건 아닌지. 쓰고나니 무척 개인적인 관점이 되버린 것 같다. 또하나 나를 당황케하는 것은 한가지 떠오른 생각 때문이다. 법문은 절이 중생들을 구제하기위해 수련과 끓임없는 도전으로 자기자신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옛날에 석가모니가 있다고 했다. 그가 하는말을 책으로 만들고 승들은 그것을 탐구하고 참오한다. 석가모니는 내가 알기론 불교적으로 봤을 때 중생을 구제할정도로 깨달음을 얻은 인물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중생구제를 한 결과가 지금 결과이다. 중생 구제란게 지금의 경우라면 의미가 있는건지 옛 고승들의 말을 그대로 을는 노승이나 아니면 그 고승들은 과연 깨달음이란걸 얻고 한 말일까.나에게 회의를 느끼게 하고 정해진 틀에 의해 지금과는 아주 아마득한 옛날에 지어진 불법이란 책이 사회적으로 너무도 다른 세계에 사는 여기 사람들에게 얼마나 깨달음을 얻을수 있게 도와줄수 있는건지 그렇게 얻은 게 진정한 깨달음인지, 사실 이미 백년전에 그 책의 효용성인 깨달음을 도울수 있는 부분은 사실상 사라지고변화의 팔요성을 깨닫지도 실행할 용기도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이미 옛날의 어떤 훌륭한 사람의 말을 적은 책으로 전락한 건 아닌지. 이것은 나에게 승들에 대해 어느정도 정의를 내리게 하였다. 그들은 자기자신의 삶을 사는데 최선의 방법을 수행과 참오라는 방법으로 찾고 모든 중생이라기보단 자신 주위의 나름의 확실한 신념이 없거나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도우미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들 말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 중심으로 감독의 의도를 엿보자면 법운과 지산의 수도부터 봐야한다. 그들은 얌전히 절에서 수도하기 보다는 절을 나와 사람들과 부대끼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지산은 인간적인 욕망과 허무를 극복하지 못한채 죽음을 맞이한다.그러나 끝내 법운은 진정한 수도를 자기 혼자만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서 찾을수 있다 여기고 사람들틈으로 사라진다. 이것을 정리하자면 감독은 결국 꼭꼭 절에 숨어 있는 승들을 비판하고 진정한 수도와 성불은 여기 사회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는 가운데 있을 수 있다는 걸 말하고자 한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부분으로 돌아가 말을 하자면 이 영화의 전개방법은 나에게 하나 보여준 것이 있다. 지산과 법운을 개인적으로 접근함으로써 그들의 인간적인 고뇌, 불행한 삶들은 나에게 상당한 공감을 일으켰다. 대학의 문턱을 넘으며 고민했던 최선의 삶이란? 후회없는삶이란? 죽음을 가장 후회없이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등에대한 물음에 아직까지 약간의 자구책만을 가진 나에게 그들의 고뇌는 상당히 현실적으로 맞닥뜨려졌다. 그들에 대해 자신의 좀 더 가치있는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은게 나의 마음이다. 비록 그 결과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지만 과정은 결과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니까 온힘을 다해 생각하고 더불어 그들만큼 살아온 삶을 직시했을 때 후회없을 사람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다음으로 시각적인 몇 가지 부분이 나의 눈을 자극했는데 자주 등장한 배경인 길에 대해서 보자면 처음 부분에 지산과 법운은 엇갈린 길에서 서로 헤어지게 되는데 그들의 궁극적인 수행목적은 같지만 그들의 대조적인 수행태도를 암시한것이란 생각이들게 되는건 왜일까? 분명히 지산은 부분적으로 내가 물음을 가진 것도 있긴 하지만 그의 술을 먹는 다든가 자신의 여자가 있고 그 여자와 자는 등의 행동과 그의 언행에서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의 수행태도는 얾매이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깨달음을 추구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있고, 법운은 그와 반대로 얾매이는 것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것에서 지산과 같이 대담하게 벗어날 용기도 의지도 부족해 너무도 얾매여서 있는 걸 보아 길의 암시하는 바를 깨달을 수있다. 또 하나의 법운과 어머니와의 만남을 보면 글쎄, 너무도 많은 의미가 있어서 정의내리기가 힘들지만 서툴게나마 나의 감상을 말하자면 법운의 이전의 수행을 진정하지 않다고 보고 지산의 죽음이후 진정한 수행의 길을 찾고 인생의 큰 전환점을 가진 다는 점으로 볼 때 어머니란 존재 또한 법운을 가로막는 번뇌이고 그것을 극복했다는 시각으로 보았다. 만다라에 대한 나의 감상을 돌이켜 정리해 보면 분명 나에게 감독의 의도와는 맞지않을수도 있는 나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또한 불교에 대해 종교로서가 아니라 좀 더 개인적으로 생각도 해볼수 있었다. 분명 만다라는 감독에 의해 현 불교의 타락상을 비판하고 좀 더 진정한 의미의 종교로서의 각성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도는 세상과 격리되어야만 찾을 수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과의 만남에서 진정한 도를 찾을수 있다는 자기 실존적인 것을 볼 수 있는 훌륭한 영화라 하고 싶다. 요즘같이 일방적으로 관객에게 정보를 주입시키기기만 하는 영화가 판을 치는 이때 이같이 자신을 돌아볼수 있는 영화한편 보는 것도 삶을 가꾸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