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자기소개서 쓰는법외국계회사 또는 무역업무를 담당하는 상사 등의 경우 영문 자기소개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영문 자기소개서는 영문 이력서 에 첨부되는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뜻하며 한글 자기소개서를 영어로 쓴 것이라 생각하면 무난하다. 따라서 간결한 문장을 사용 해야 하며 분량은 A4용지 한 장 정도로 마치는 것이 좋다. 간결한 구직희망과 희망직종에 대한 자신의 자격 요건 등을 구체적으 로 기술하되 상세한 것은 이력서(Resume)를 참조케 하고 면접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특히 응시자가 자신의 경력을 적어 이력서 의 내용이 빈약한 경우에는 이를 보충하기 위해 이력서에 기재하기 어려운 자신의 능력과 희망, 자질 등을 진술해야 한다.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구미에는 실제적으로 자기소개서라는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력서를 제출할 때는 인사담당자, 또 는 해당 관련자에게 정중하게 편지를 써서 이력서와 함께 동봉하는데, 이를 ‘Cover Letter’라고 하며 , 이는 구직시 필수요건 이다.Cover Letter는 장황하게 쓰는 것은 금물이며, A4용지 한장 정도의 분량으로 작성한다. 방식은 일반편지를 쓰는 것과 거의 동 일하다.한글 자기소개서와 마찬가지로 간결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출하도록 영문 이력서에 첨부되는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말한다. 한글 자기소개서를 영어로 쓴 것이라 생각하면 무난할 것이다 외국인 기업에서 영문 이력서를 요구할 때 영문자기소개도 함께 제출하면 좋은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자기소개서에는 간결하게 구직 희망과 희망직종에 대한 응모자의 자격 요점을 기술하되 상세한 것은 이력서(Resume)을 참조케하고, 면접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특히 응모자가 자신의 경력이 적어서 이력서(Resume)의 내용이 빈약한 경우에는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이력서에 기재가 어려운 자신의 능력과 희망, 자질 등을 진술할 필요가 있다.영문 자기소개서도 한글 소개서와 마찬가지로 간결하고 명료하되 구체적으로 써서, 자신의 이미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기업 측에 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미국에서는 Resume라고 하고, 영국에서는 회C.V.(Curriculum Vitae를 줄임)라고 한다. 제목을 붙일 때는 회사를 구분하여 사용해야 한다. 요즘은 영국과 국문의 이력서가 외국 회사 외에 국내 회사에서도 많이 요구되므로 이번 기회에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우선 한국적인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아나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력서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기를 PR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외국 회사는 국내 회사 보다 이력서를 중시하며, 맡기게 될 업무의 범위나 직책이 처음부터 명확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응되는 명확한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는 사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의할 사항을 긴 문장이 아니라 간결한 어구로 표현해야 한다. 마침표와 쉼표를 정확히 붙이고,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게 하며, 특히 중학교 시절에 배운 실력을 십분 활용하여 주어 ''''I''''는 생략하고, ''''S''''의 시제에 주의한다.경력과 학력은 최근 것부터 시작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증한 한 빈란이 없도록 하며 장기간의 공백이 있을 때는 그 이유를 확실히 적는다. 취득한 학위는 빠짐없이 적어야 하며, 읽는 사람을 위해 전문용어 사용은 피한다. 약자는 가급적 하지 않아야 하지만 해야 한다면 처음 나올 때 완전한 말과 약어를 함께 적어 놓고 그 이하는 약자를 적는다.[Cover Letter에 써야 할 내용]1. 성명/주소resume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주소는 보통 미국식으로 쓴다. 단, 이력서의 양식이 아니라 서간 양식에 따라야 하며 두세줄에 들어가도록 균형을 잡아서 쓴다.2. 작성 날짜주소 바로 밑에 줄을 띄지 않고 쓴다. 이름, 주소에 맞춰 하나의 형식으로 쓰는 것이 좋다.3. 받는 회사명/ 주소/ 담당자의 성명 직위 (The inside address)보낸느 날짜에서 두 줄 정도 내려서 왼쪽에 쓴다. 담당자를 모를 때는 지망하는 회사로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는 것도 실례는 아니다. 특정한 수신인이 있는 경우 cover letter의 수신인은 겉봉에 쓴 수신인과 일치해야 한다.4. salutation 및 resume를 보내게 된 동기일반적인 편지에서 첫머리 인사말에 해당하는 부분을 salutation이라 하는데, 국어에서는 ‘~에게’라는 의미와 비슷하며 영문 편지에서는 보통 ?ear~:鸞箚?표현한다.salutation은 수신자 주소에서 한 줄 띄우고 시작하는 것이 적당하며 뒤에 :을 찍는 것을 잊지 말라. 주로 resume를 보내는 이유에 대해서 쓰는데 ‘어떠한 동기로 귀사를 알게 되어 취업을 희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간략하게 들어가야 한다.5. 본문 - 간단한 자기 소개(The body of the letter)cover letter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써 보내는 사람 자신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더불어 resume에서 공식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당신의 캐릭터를 보충하여 작성한다. 또한 자신에 대한 자격 요건 등을 잘 표현하여 호감을 갖도록 만든다.6. 인터뷰를 통해서 취업을 바라는 의지 표명cover letter 끝부분에는 자기 소개에 이어 취업을 희망하는 당신의 의지를 하나의 문장으로 쓴다. May I be given the opportunity of an interview?라고 애교 섞인 표현도 가능하다.7. 끝인사(complimentary closings)영문 편지에는 끝인사에서 쓰는 몇 가지 정형화된 표현이 있다. ‘Sincerely yours,??ruly yours蘭樗?표현이 흔히 쓰인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complimentary closings의 다양한 예Respectfully, Sincerely yours, Repectfully yours, Yours Sincerely, Yours truly, Very sincerely, Your very truly, Cordially, Very truly yours, Cordially yours8. 보내는 사람의 서명서명은 만년필로 하는 것이 좋으며, 검정색보다는 선명한 청색 잉크를 사용하는 것이 눈에 잘 띄고 고상해 보인다. 서명은 충분히 연습을 하고 나서 매끄럽게 쓰도록 하는데 너무 굵은 사인펜을 쓰면 유치하게 보이고, 볼편이나 너무 가는 프러스펜 또는 흐린 잉크를 쓰면 지저분해 보인다.
1. 서론 - 동백림 사건의 배경 -1967년 6월 서울에서 중정부 요원들이 몰려와서 3-4명씩 조를 짜가지고 6월 18일부터 서독내 20여개 지역 프랑스까지 퍼져서 현지 한국 지식인들을 이북간첩으로 몰아세워 마구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동백림 사건이라고 한다. 중정부는 그들을 A, B, C 급으로 나누어 체포 했는데 A급은 윤이상, 이응로 같은 거물급 인사였고, B급은 학위를 마치고 교편을 잡던 젊은 교수들, C급은 구라파 각 지역에 있는 대학의 재학생 이거나 파독 광부들 이었다. 이 사건은 중정부의 악명이 전 세계로 퍼지고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박 정권의 실패한 공작의 하나였다.{ 김형욱회고록2. 본론 - 사건 개요 -당시 한국은 굉장히 불안한 정국을 띄고 있었다. 대내적 요인으로는 6. 8 국회의원 부정선거 시비와 관련 하여 학생 데모가 끊이질 않았다. 특히 서울대 법대생들이 주도한 서울대 데모는 파장이 가히 전국적이었고, 뒤이어 신민당의 국회의원 당선자들까지 당수 유진오를 선두로 데모를 감행하였다. 그리고 대외적 요인으로는 북한과의 끈질긴 남북 공작이 있었다. 6. 25전쟁이후 간첩 공작은 끊이질 않고 있었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심지어는 스포츠 분야에까지 대결 구도를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중정부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 하게 된다. 당시 명지대 조교수 이었던 임석진의 제보로 간첩 수사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다. 67년 6월 혐의자의 호송요령, 감시요령, 검거요령, 관계되는 국제법에 대한 지식, 공항에서의 행동요령, 관계기관의 접촉요령등을 교육받은 요원들을 급히 파견 시켰고, 16일에는 3-4명으로 한조를 이루어 서독 각지와 프랑스 지역 약 20여개 지점으로 출발하였다. 중정부는 혐의자들을 거물급 순서대로 A, B, C급으로 나누어 달콤한 유혹으로 꼬드겨서 48명의 혐의자중 30명을 서독대사관에 집합 시켰다. 그러고는 현지의 눈을 피해 극을 지나 경유지가 없는 일본 항공에 태워 한국으로 압송 했다. 그러나 이중 8명은 눈치를 채고 미리 도주 하였고 10명은 무혐의로 판명되어 압송하지는 않았다. 당시 김형욱은 기자회견에서 대규모 간첩사건으로 보도했는데 지금 관련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거짓말이고 중정부의 조작이라고 하나 다른 이 들은 중정부가 제시한 증거들이 자신들이 가져왔다고 말하는 걸로 봐서는 그들이 사건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으나 중정부가 너무 과잉 수사를 한 게 아닌가 싶다.하여튼 서독정부는 이러한 납치 행동을 주권 침해라고 항의 하며 이로 인해 경제 원조를 정지하고 국교 단절까지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박정권은 갖은 고문으로 납치해온 지성인들의 허위 자백을 날조하고 재판을 벌여 사형을 포함해 유죄 판결까지 내렸지만 서독정부의 엄한 태도 앞에 정치적으로 협상하고 그들을 모두 서독으로 되돌려 보내게 된다. 또 이사건의 하나로 오인하여 서울대 민비연 관련자들을 체포한일도 있었는데 이것은 훗날 김형욱 회고록에서도 최대의 실수라고 고백한다.{ 김형욱 회고록부정선거 시비로 인해 여론 반전을 위한 묘책으로 끌여 들였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로 수사선만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여하튼 그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씻을 수 없는 이북 간첩이라는 오명은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게 되고 다시는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형욱 실종 미스터리1. 머 리 말제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지금까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조차 확정 되지 않은 인물, 누군가에 의해 영원히 실종 됐을 것이라는 추측만 남기고 있는 그는 육군중령으로 5.16 쿠데타의 주체가 되면서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63년 7월 중앙정보부장으로 올라 3선 개헌이 마무리되는 69년 10월 까지 3공 정권의 기축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른바 10월 유신이후 그가 휘둘렀던 권력, 주물렀던 기밀의 다른 한쪽 칼날이 그를 되찔렀다. 결국 미국으로 달아나서 박 정권을 매도하는 증언과 회고록 집필로 유신정권에 결정타를 치고 몰락의 길을 재촉 했다. 그리고 그가 54세의 나이로 프랑스에서 영원한 실종 을 맞이한 79년 10월 박 정권도 김재규의 10.26 총성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2. 김형욱 죽음의 배경과 의문여기서 그의 죽음을 놓고 2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북한 납치설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공권력 개입설이다. 물론 북한 납치설도 어떻게 보면 가능성이 있으나 영상에서 본바와 같이 사회적 정황상 북한은 그때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은 미뤄두고 한국공권력 개입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여기서도 두 갈래로 나뉘는데 서울로 이송하여 박정희가 직접 사살했다는 설과 중정부의 사주로 납치하여 파리나 제3국에서 살해한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 증언자들은 약간씩 서로 엇갈리는 증언을 하여 그가 직접 나타나서 밝히지 않는 이상은 확실한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봐서는 두 번째의 중정부의 사주로 암살되었다는 설이 가장 일리가 있다.그렇다면 왜 나는 새도 떨어뜨릴만한 권력자였던 그가 해외로 도피까지 해가며 불귀의 객이 된 것일까? 박정희는 김 부장의 별명 남산 멧돼지 , 돈가스 에 걸맞은 무식하리만치 저돌적인 추진력을 정권방어의 무기로 십분 활용해 왔다. 그러면서 그는 끊임없이 중간보스들의 일정한 파워게임을 유발하고 특정보스를 키우고 잘랐다. 그렇게 실력자간의 긴장관계를 조성함으로써 충성을 발휘토록 하고 그 위에서 장기집권을 꾀하는 방책을 쓴 것이다. 그래서 김형욱이 그렇게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안하무인으로 굴었던 배경은 박대통령의 용인술 덕분이다 라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볼 때 김형욱의 종말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그런 와중에 결정타가 바로 3선 개헌 이었다. 김형욱은 임기후반을 3선 개헌을 위해 바쳤다. 박대통령이 개헌 지휘봉을 움직이는 데로 김 부장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정적을 무찌르는 충실한 행동대장 으로 복무 했다. 그리고 그 악역의 대가가 김 부장 권력가도의 끝이었다. 3선 개헌이 이루어지면서 바로 토사구팽 된 것이다. 집권연장의 길을 연 박대통령에겐 그 순간부터 김 부장이 정치적 짐이 되었다.69년 7월 29일 의원총회에서 첫째 권력형 부정부패책임자 이 후락 대통령 비서실장, 김형욱 정보부장은 물러날 것, 둘째 중정부는 대공사찰에만 전념하고 정치사찰은 일체 하지말것을 요구 했다. 물론 박대통령도 처음엔 말도 안 된다며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은 이제 그만 쉬게 라는 한마디로 김 부장을 물러나게 만든다. 중정부를 물러난 이후 김형욱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72년 기업의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한 8.3 사채동결조치라는 것에 덜미를 잡히고 만다. 헌법상 대통령 비상긴급조치권에 따라 기업과 채권자의 채무 채권관계를 8월 3일자로 무효화하고 새로운 계약으로 대체하는 충격적인 경제조치였다. 이 때문에 상당수 부정축재자들이 타격을 받았는데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얼마나 재산상 손해 를 보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힘도 떨어지고 돈도 달아나는 낙이 없는 세월의 연속이었다.김형욱은 그렇게 76년까지 침묵의 세월을 보냈다. 또 그는 술과 도박을 좋아했는데 그의 최종목적지도 또한 도박장인 것을 보면 그의 생활 습관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박정희에 대한 배신감과 울분은 77년 미 하원의 박동선 사건 청문회 에 나가서 앙갚음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김대중 납치범 명단을 터뜨리며 그가 아는 사건 전모를 박정희의 사생활만 빼놓고 다 진술했다. 이어 재미 반유신세력의 핵심인물 김경제와 손을 잡고 박 정권 타도를 겨냥한 회고록 집필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서울에서는 그를 응징하려는 법까지 논의 할 정도였으니 그 파장은 안 봐도 훤했다. 여하튼 그 후에 79년 10월 그의 회고록이 완성될 무렵 그는 박대통령의 출판 방지를 위한 회유와 압력에 못 이겨 결국 요구를 수용하고 몇 십만 달러에 원고 원본을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김형욱은 사본을 남겼다. 그것이 화근 이었다. 말하자면 최후의 무기로 사본을 남겼는데 그만 그것을 주변사람들이 출판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그도 몰랐다고 하는데 그렇게 남은 돈을 받기위해 파리로 갔다가 실종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 때문에 그가 실종되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없다.
- Term Paper -인터넷비즈니스 사례연구{인터넷 경매사이트제 출 일 : 2001년 6월 15일좌 석 : 1열 3번학 과 : 국제통상학전공학 번 : 19711316이 름 : 한 성욱담당교수 : 정 창근 교수님목 차I. 서 론 -기업선정이유- 1II. 본 론1. 옥션의 경영이념 22. 주요 수상 실적 33. 옥션 의 현황 및 사업분야(a) 옥션측에서 제공한 소개자료 4(b) 사이트 현황 5(c) CEO 6(d) 발전 배경 6(e) 전략적 제휴 현황 74. 1/4분기 경영주요 하이라이트 7~85. 제공서비스 및 제품구성 96. 주요 수익원 107. 매출규모 및 사업성과 10~118. 사업전망 11(a) 손익계산서 12(b) 대차대조표 13(c) SWOT분석자료(성공/실패 요인) 14(d) 물류/유통 14(e) 광고/마케팅 15III. 결론 -내가 생각하는 옥션의 개선안 15~16I. 서 론 -기업선정 이유-불과 몇 년 전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한 인터넷의 열기는 이미 전자상거래라는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키며 수많은 사이트가 생겨나고 있다. 그중에서 신문과 잡지, 그리고 TV를 통하여 수없이 접할 수 있는 전자상거래 사이트 중에서 경매사이트의 선두주자 옥션 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1995년 9월 세계 최초의 인터넷 경매업체 e베이 가 생겨난 이후 시중에 이와 비슷한 수많은 인터넷 경매사이트중에 옥션 을 선택한 이유는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성공, 실패 사례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옥션은 지난 98년 4월 인터넷 경매를 들고 나와 "인터넷 경매=옥션"이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때마침 닷컴 열풍이 불면서 자금도 수월하게 유치할 수 있었다. 옥션은 창사 이래 고속성장을 거듭해 왔다. 99년말 42만 명에 불과했던 회원수는 작년 말 3백10만 명으로 1년 만에 7배 이상 불어났다. 물품 등록건수는 4배 이상 증가했고 경매성사금액은 25배 늘어났다. 작년 매출액은 2백45억원으로 1천5백56%나 급증했다. 그렇지만 공격적 마케팅으로 영업비용이 늘면서 1이트 개편2000년 1월한겨레신문사, 정보통신부, 중소기업청 공동주최전자상거래 중소기업부문 1위 선정(중소기업청장상 수상)매경이코노미 주최 벤처기업 10걸 선정중앙이코노미스트 선정 "한국의 리딩벤처 101선" 선정세계 IT1위기업(비즈니스위크 11월) 히까리통신(光通信)과전략적제휴200만 페이지뷰 돌파회원 50만돌파대한통운제휴 택배 서비스개시KKoje.com에 지분투자및 제휴2000년 2월회원 70만 달성한국통신 하이텔(공동 인터넷 경매)제휴2000년 3월회원 80만 달성CEO 이금룡 인터넷기업협회 초대회장 선출2000년 5월회원 100만 돌파2000년 6월KOSDAQ등록B2B옥션 사이트 오픈축산물 B2B사업 진출2000년 7월금융 포털 사업 추진(금융프라자 오픈)월 거래액 200억 돌파2000년 8월법원 경매시장 진출Community사이트 확대 개편2000년 9월인터넷 콜센터 오픈2000년 10월새한 정보 기술 30억 투자(물류 강화)CI개편 회원 150만 돌파2000년 11월공동경매 서비스 제공대정부(정보통신부)전자조달 서비스 제공2000년 12월회원 250만 돌파2001년 1월사이트 전면 개편(신 시스템 오픈)2001년 2월이베이, 옥션 대주주 지분 확보이금룡 사장 단일 대표이사 체제회원 300만 돌파2001년 3월자동차 포텼 사이트 (옥션 모터스)오픈옥션 제휴 프로그램(AAP)DHVMS3. 옥션 현황 및 사업배경{ http://www.auction.co.kra) 옥션측에서 제공한 소개자료{ ravenda@auction.co.kr 기업소개담당자 박수현옥션(대표이사; 李今龍)은 최근 세계 최대의 인터넷 경매업체인 美 이베이(eBay)사를 대주주로 유치함으로써 IT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닷컴업계가 수익모델 부재와 자금악화로 위기감에 시달리고 있는 반면, 1억2천만불의 대규모 외자유치를 성사시킴으로써 옥션은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굳힘은 물론, 향후 국내 인터넷기업들의 해외신인도를 크게 높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옥션이 대규모 외자유치에 성공할 수 있었던영업 현금흐름상으로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고, 연간 전체적(재무제표상)으로도 흑자실현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옥션의 최대장점은 수익성이 확실하게 검증된 사업모델이라는 점과 높은 진입장벽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 경매분야는 수수료 수입이 주요한 수익원천으로 상품 가격변동에 영향을 받지않는 수익구조를 갖고 있으며, 일정 규모의 경매물량이 확보되면 비용증가가 정체되고, 반대로 이윤이 급증하는 높은 영업 레버리지를 갖고 있다. 또한 구매에 의한 손실위험 및 재고위험이 없고, 물류비용이 들지 않아 일반 전자상거래업체에 비해 영업위험이 매우 낮다. 아울러 경기 불황시에도 가격에 민감한 소비자들이 가격경쟁력이 있는 경매사이트에서의 거래를 선호하게 됨에 따라 경기퇴조기에도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다. 옥션은 이미 오래전에 시장을 선점, 선순환과 수확체증의 법칙에 따른 시장선점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으며, 경매가 일종의 시장기능을 갖고있다는 특징 때문에 시장 선도기업으로써의 독점적 지배권을 충분히 행사하고 있다. 또한 지난 96년부터 개발해온 옥션의 온라인 경매관련 기술과 노하우는 한국의 다른 경쟁업체에게는 높은 장벽이 되고 있다. 특히 옥션은 국내 최초로 온라인 대금결제, 물품배송, 송금, 환불 등에 매매보호장치를 상용화함으로써 가장 안전한 거래를 보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점 때문에 옥션은 지난해 한국능률협회에서 발표한 브랜드인지도조사에서 네티즌들의 79%가 온라인 경매브랜드 중에서 옥션을 선정(2위업체 : 17%)했으며,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조사결과에서도 국내 네티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전자상거래 사이트(13.1%, 2위업체: 6.7%)로 선정됐다. 옥션은 올 들어 이용자의 편리성을 배려한 고객위주의 사이트로 홈페이지(www.auction.co.kr)를 대폭 개편했다. 또한 공동구매, B2B, 금융 및 부동산, 자동차 포털 서비스, 복권서비스, 공동구매 관련 제휴프로그램 등 새로운 온라인 상거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명실상부한 국내 대표 전자상거래업ng/전자결제농협,국민,외환,조흥,한미,평화,신한,한빛,LG캐피탈,삼성카드,BC,■국민카드,외환카드,다이너스,아멕스,신한카드,평화카드Portal/Shopping하이텔,Intizen, 에스원, LG Home Shopping, Kans ,테크노 마트,Joins.com 이리 귀금속 조합Network/MediaSK Telecom(011),한국통신프리텔(016), 한국통신 M.com(018) 신세기통신(017), 한국통신IMT-2000(한국통신 컨소시엄 컨텐츠 및 인터넷분야 전략적 주주)비트 컴퓨터중고품(Recycling)강남구청,용산구청,동대문구청,YMCA녹색가게,강남구 재활용센터,장애우 경매센터,중고피아노 백화점,TGM경매센터,수원알뜰시장,인천조달청 재활용센터,대전조달청 재활용센터부동산 플라자MK랜드,OKKOREA21,계약경제일보,랜드야,포드림,삼성생명,한국감정원(부동산테크),24Mall,하이텔,유니텔,천리안,부동산뱅크(네오넷)나브텍B2B/B2G한빛은행,미트마트옥션,서울보증보험,숙명여자대학교,비즈센스닷컴(서비스상품 Contents제공),코리온시스템(과학기재),아이피스(사무용품), 카람텍(B2B전자지불서비스) 등 500여 개 업체사회환원프로그램E-Money'희망만들기 캠페인, 아이들과 미래,자선경매등기타테라휴먼파워, Metaland(Net Point)4. 1/4분기 경영주요 하이라이트◈ 이베이, 1억2천만 불 투자통해 옥션 대주주 지분(50%) 확보-옥션-이베이, 외자유치 관련 합의내용 발표 (2001. 1. 8)-옥션 주총, Brian Swette (eBay COO) 등 신규이사(5명) 및 감사(2명)선임 (2001. 2. 12 / 3.30)-이베이, 옥션 주권인수 (주금납입) (2001. 2.15)-이베이와 공동 마케팅 프로모션 진행 (2001. 3.13 ~ 23)-이베이 맥 휘트먼 사장 방한 (2001. 3.27 ~ 3.30)옥션 신 시스템 오픈, 홈페이지 개편 및 서버, 경매엔진, 결제, 지불 등 백오피스 시스템 전면 교체 (2001. 1. 2)◈'클릭복권'사한 상품경매전고객센터경매진행 문의사항을 메일이나 전화로 상담할 수 있는 곳6. 주요 수익원{ http://www.auction.co.kr주)옥션의 수익원 중 가장 주요한 수익원으로는 낙찰수수료와 등록수수료를 들 수 있다. 현재 낙찰수수료는 CtoC, BtoC 거래에서 발생하고 있는데 CtoC 낙찰수수료는 .5%(2000년 12월 15일 인상) 수준이다.■■수수료 인상은 소비자 반응 및 시장상황을 고려하여 결정하였으며, 이는 99.12.15일 유료화 실시 이후 오히려 회원 및 거래액이 급증한 사례 통해 실증할 수 있으며, 그 후 2회의 수수료의 단계적 인상에도 불구하고, 거래액은 꾸준히 증가를 하고 있다. 경매의 활성화에 따른 인프라를 바탕으로 2000년에 도입되었던 다양한 수익원이 꾸준한 성장을 하고 있다. 즉, 실질 구매력 있는 양질의 회원을 다수 확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이들의 구매욕구와 성향을 분석해 낼 수 있음에 따라 각 개인에 맞는 1:1(one-to-one)마케팅 활동을 구사할 수 있으며 이는 낮은 비용으로 높은 마케팅 효과창출을 가능케 하고 있다. 또한 2001년에는 추천엔진을 도입함으로써 개인의 입찰과 낙찰 또 방문율을 바탕으로 적합한 상품을 추천하고 있다.■물품등록수가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이에 따른 등록수수료도 ■수익원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으며, 등록물품수가 많아짐에 따라 자신의 물품을 더욱 잘 팔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등록수수료는 기존의 "생활정보지"의 정보게재료와 같은 개념으로 이용자 측면에서 쉽게 수용될 것이며 미국의 e-Bay도 등록수수료가 주요한 수입원중 하나이다. ㈜옥션은 2000년 6월부터 등록수수료를 부과하였으며 현재 경매 시작가 2만 원 이하의 상품에는■100원, 2만 원 이상 금액에 대하여 건당 200원의 수수료를 2000.12.15일부터■부과하고 있다.■BtoC 거래가 활발해짐에 따라 ㈜옥션의 "파트너옥션"에 입점한 업체들로부터 수령하는 "입점업체 가맹비"도■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옥션에서는 입점업체로.
매스컴과 사회대중문화와 서태지의 관계학 과 : 국제통상학과학 번 : 19711316이 름 : 한 성욱담당교수 : 김 대식 교수님목 차Ⅰ. 서론Ⅱ. 본론1) MM의 역기능적 측면에서2) 서태지 성공의 정치적 배경3) 공륜폐지에 미친 기능4) 우리의 암울했던 대중음악사5) 이미지 메이킹Ⅲ. 결론Ⅰ. 서론1992년 초여름 열아홉의 서태지가 이주노, 양현석이라는 두 명의 댄서와 함께 팀을 조직한 것은 대중음악 전반에 걸쳐 댄스뮤직이 최고의 기세를 떨치고 있을 때 였다. 그들은 미래가 유망한 신인가수 중의 하나로 텔레비전에서 첫선을 보였다. 내가 그당시 중학생 이었는데 그들의 첫 공연을 우연치 않게 본기억이 난다. 그 당시의 첫느낌은 얘들 뭐야 , 이것도 노래인가 할 정도 였다. 그때 정체가 불분명한 정장차림의 평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음악이 시작됨과 동시에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매너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 하다고 생각되었던 한국어로 된 랩 을 능숙하고 세련되게 구사 하였다. 그것도 노래의 앞뒤나 중간 부분에 삽입되는 일부분으로서가 아니라 곡 전체의 반을 차지하는 주요 부분으로서의 랩 이었다. 감정에 호소하는 독백이나 알아듣기 어려운 속삭임이 아니라, 내용을 전달하는 가사로서의 랩이었다. 그 날 저녁, 서태지와 아이들은 불행히도 쇼 프로그램의 패널로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을 본 젊은 시청자들 사이에서 이 새로운 노래 는 순식간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왠지 처음엔 어색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렇게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지금은 그를 모르면 한국사람이 아니다. 다음 장에서는 그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어떻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와 매스컴, 사회문화등과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논하여 보겠다.Ⅱ. 본론1) MM의 역기능적 측면에서이렇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앨범은 1992년 4월에 발매되었다. 기록적인 히트였다. 그들은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 졌다가지 있다. 우선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얼마 전에 개국한 민방 SBS는 일단 시청률을 확보하기 위하여 젊은층을 주된 타깃으로 하는 프로그램에 신경 쓰고 있었다. 또한 때마침 사회적으로는 소위 신세대 의 대두가 조금씩 사회적인 이슈를 획득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돌풍을 일으키며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본인들이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신세대의 한 표본, 심지어는 신세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부각되기 충분했다.데뷔 첫해, 매스컴은 대게 서태지에게 호의 적인 편이었다. MBC는 간판 프로그램의 하나인 인간시대 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야심만만하고 자신만만하며 동시에 열심히 노력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모습은 그들이 반짝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소위 반짝 스타 이거나, 혹은 음악 실력 보다는 그 외의 것에 승부를 거는 소위 아이돌 스타 중의 하나라는 일부의 편견을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솔직히 그 때 한참 서태지는 어떻게 살까 궁금해 하던 나를 신세대들에게 그 방송분은 녹화해서 또 보며 한동안 교내에서 끊이질 않는 얘깃거리가 되었다. 그 해의 연말 TV저널 은 현직에 종사하는 신문방송의 연예기자 100명으로 구성된 선거인단 투표에서 가수부문 1위에 서태지와 아이들을 선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문 및 텔레비전은 쉬운 일이 아닌데 이례적으로 신인인 서태지와 아이들을 올해의 가수 로 선정하였으며 그들의 데뷔곡 는 올해의 최고 인기곡 으로 선정되었다.그러나 2집 발표때 이주노와 양현석이 연출한 헤어스타일은 KBS의 줄연정지 결정과 맞닥뜨리게 된다. 위기를 느낀 서태지와 아이들은 곤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을 단정하고 얌전하게 바꿈으로써 더 이상의 확산을 막는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겪었던 다른 사건들에 비하면 그리 큰일도 아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사건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바로 이를 바라보는 언론의 태도이다. 때의 서태지의 패션이 젊은 층에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을 호의적으로 보도했던 언론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레게 파마는 동아방송과 동양방송이 포함되었다. 그 이후 20여 년 동안,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은 두 개의 주요 방송사 즉 한국방송공사(KBS)와 문화방송(MBC)으로 재편되어 별 경쟁 없이 안전하고 사이좋게 공존하여 왔다. 그러나 1992년 서울방송의 등장은 방송계의 변혁을 알리기 시작 했다. 후발주자인 서울방송은 일단 시청자를 확보한다는 명제에 충실 했다. 그들이 가진 장점은 다른 두 개 대형 방송사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그렇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민간 상업방송이라는 타이틀이 주효 했다. 서울방송의 시청자 확보 전략 중에는 젊은 시청자들에 대한 어필이 주요한 내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당시 막 부상하기 시작한 신세대층은 가장 유력한 타깃이었다. 암울한 정치적 공허나 생존의 문제였던 절대빈곤을 모르고 자란 이 젊은 세대는 이미 AFKN이나 위성방송을 통하여 서구적이며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서울방송은 신세대의 구미에 맞는 프로그램을 과감히 제작 하였다. 수많은 소위 신세대 스타 들이 서울방송을 통하여 등장 하였다. 이들 중의 대부분은 지켜보기에 짜증나리만큼 자격 미달이거나 안쓰러우리 만큼 단명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신세대 스타들이 서울방송의 덕을 입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전략은 적중하였으며, 서울방송 오락프로그램의 시청률은 급상승 하였다. 그때까지 불안하게 방관하고 있던 다른 방송사의 프로듀서들은 서울 방송의 전략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방송사에 따라, 프로그램의 차이에 따라 다소 시간적인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세 개 방송사의 젊은 층을 겨냥한 오락 프로그램들은 그 성격이나 포맷이 모두 흡사해지기에 이르렀다., 물론 가장 큰 수혜자는 신세대로 불렸던 청소년층 이었다.물론 이러한 현상이 모든 이들에게 반갑게 받아들여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울방송의 개국으로 자극받은 다른 방송사들까지 합세해서 무분별하게 전개하고 있는 오직 10대만V에 의하여 생산된 대중문화의 획일성보다 더욱 중요하고 절박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매스미디어의 능란한 조작과 그의 막강한 영향력에 대한 서태지의 거부감은 다른 몇몇의 노래에도 암시되어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그가 서태지와 아이들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4년 동안 실제 상황으로도 여러 번 나타났다. 상식 개념의 획일성에 대한 서태지의 도전은 가사의 또 다른 부분, 즉 치마를 입고 나가볼까 하는 생각에서 또 한 번 발견된다. 남자가 치마를 입는다는 것은, 그것도 집에서 입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볼까 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엔 상상이 안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서태지는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전통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상식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가 결정에 참여한 적도 없고 스스로 동의한 적도 없는 규칙을 준수해야 하는가.- 그렇게 해서 서태지의 신랄한 조소는 그의 눈이 뒤로 돌아갈 때까지 그의 머리를 잡고 흔들어 대는 사회에 직접적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차라리 집에서 놀고먹는 것을 택하고자 한다. 물론 여기에는 어떠한 비판도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내 맘 이기 때문이다.그런데 과연 서태지는 그 모든 것이 절대로 내 맘 이라고 믿었을까. 대답은 아니다 일 것이다. 서태지는 이 사회가 불길하게 고집하고 있는 융통성도 없고 화해할 수도 없는 독선, 그리고 젊기 때문에 아직은 힘이 없는 세대에 대한 기성 권력의 궁극적인 제어기능 등을 감지하고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서태지는 그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서태지 자신이 제시한 위험한 꿈에 깔리지 말라 고 경고 한다.3) 공륜폐지에 미친 기능1995년 10월 서태지와 아이들의 네 번째 앨범이 가사를 모두 삭제한 연주곡 을 그대로 담은 채 발표되었다. 사건은 단지 한국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 시대에 뒤떨어진 태도를 입증한 또 하나의 예를 넘어서,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문화 시각에 대한 갈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난리법석은 이미 예측적인 부분이 작용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공륜의 수정 지시에 대한 서태지의 가사 삭제 결정,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하여 공륜을 비난한 여론등은 이번에는 이미 발매된 4집 앨범이 사전 심의때 없었던 가사가 무단으로 삽입되고 가사를 바꾸는 등 명백히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검찰에 고발 조치했다.물론 서태지 이전에도 공륜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막강한 파워를 휘두르며 건재해 왔다. 또한 물론 서태지 이전에도 공륜과 마찰을 빚었던 음악인들도 많았다. 최근의 예로서, 1992년 가수 강산애의 데뷔앨범 역시 공륜의 심의 때문에 가사 없이 반주만 발표 된 적이 있으며, 가수 정태춘은 사전심의를 아예 거부한 채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사건이 있을 때 마다 음악인의 창작성을 고려치 않는 공륜의 관료주의를 비난하는 소수의 진보적 언론도 존재해 왔다. 그리고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에 의하여 여하튼 공륜의 음반 사전 심의는 곧 폐지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점에서 서태지와 공륜의 시끌벅적한 전면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이 사건이 이슈가 되는 데에는 매스미디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몇몇 신문과 잡지들은 앨범이 발표되기 이전부터 이 소식을 전했으며, 사건이 발전될수록 더 많은 언론 매체에서 서태지의 4집 발표 및 그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송하였으며 정기 간행물, 특히 젊은 세대를 독자층으로 하는 잡지와 신문들은 연일 서태지를 표지로 다루었다. 또한 소위 서태지 신드롬 에 대한 책들이 시기 적절하게 쏟아져 나왔다. 뿐만 아니라 사건 전체를 통하여 컴퓨터 통신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 가사 삭제에 대한 보도에서부터 공륜 철폐 서명운동에 이르기까지 PC통신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여론 네트워크로 성장했음을 여실히 입증하였다. 이 사건의 전말을 두고 언론에서는 서태지가 이겼다 라고 쓰기 시작했다. 여론에 밀린 공륜이 결국 스스로 고발을 취하한 결과를 보고하는 말이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