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1. 청자의 정의와 발생1) 청자의 정의2) 청자의 발생2. 청자의 발전1)제1기2)제2기3)제3기4)제4기3. 청자의 종류1) 순청자2)청자상감3)청자철화4) 청자동화5) 청자화금6) 청자퇴화4. 고려청자 제작 방법참고문헌1. 청자(靑瓷)의 정의와 발생1) 청자의 정의청자란 글자 그대로 풀이한다면 청색의 자기라고 할 수 있겠다. 청색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니, 정확한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청(靑)자를 쓰게 된 데는 글자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뜻에도 연유된다 하겠다. 서긍(徐兢;1091∼1153)의《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도기의 색이 푸른 것을 고려인들은 비색이라고 한다. 근년에 들어와 제작이 공교해지고광택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술항아리[酒樽]의 형태는 참외 모양과 같은데 위에는 연꽃 위에오리가 엎드려 있는 모양의 작은 뚜껑이 있다. 또한 완·접시·잔·꽃병·탕잔도 잘 만들었는데,모두 중국의 일정한 형태의 기명을 만드는 정기제도를 모방했으므로 생략하여 그리지 않으며 술항아리만은 다른 그릇과 다르므로 특별히 알려둔다.{ 陶器色之靑者 麗人謂之翡色 近年以來 製作工巧 色澤尤佳 酒樽之狀如瓜 上有小蓋 而爲荷伏鴨之形 復能作 花甁 湯 皆竊倣定器制度 故略而不圖以酒樽異於他器 特著之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에서 청(靑)자를 따온 것이라고 추측된다. 또, 이 글귀에서 빛깔이 푸른 것을 비색(翡色)이라고 한다는 구체적인 명칭이 나타나 있다. 비색이란 어떠한 빛깔을 가리키는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비취색(翡翠色)의 뜻으로 사용된다. 이 비색이라는 말은 막연하게 푸른색이라고 하는 것보다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청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방향을 바꾸어 설명하면, 청자는 철분이 극소량 들어 있는 태토 위에 1-3% 정도의 철분이 섞인 장석유(長石釉)를 입혀서 구운 것이다. 유약 속의 철분이 환원염(還元焰)에 의해서 제일산화철이 되어 청자색으로 되는 것인데, 산화염(酸化焰)에 의해서 황색조의 제이산화철로 된 것도 성격상 청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전의 기형에 변화가 있으며 문양 표현 기법과 내용이 다양해진다. 대접의 경우 주종을 이루던 월주요식의 굽다리 밑이 넓고 측사면이 직선인 형식이, 굽다리 밑이 좁아지며 대접이 우묵해지고 측사면이 완만한 내경된 곡선을 그리다가 구연부에서 약간 외반되는 형식으로 바뀐다. 또 내면 구연 밑이 외반되기 시작하는 곳에 한 줄의 음각대선이 생긴다.초기 청자 시기의 병·주전자 등은 금속기에서 영향을 받았던 각 부위가 예리하게 꺾이는 강인한 형태에서 점차 모든 부위가 도자기의 특색이 나타나는 유연한 곡면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음각문양은 가늘고 부드럽게 세련되고 국당초문·파어문·앵무문 등 그 종류가 다양해지며 양인각문이 많이 등장한다. 초보적인 양각문과 철화문·퇴화문이 나타나며 상감문양도 계속 시도된다. 전대에 이어 화형 대접·접시 등이 계속 나타나며 과형 등 상형 기명도 등장한다.유약은 점차 밝아져서 12세기 전반기의 비색유로 접근한다. 용인시 이동면의 가마를 제외하고는 내화도가 강한 갑발로 발전하여 갑발이 얇으면서 커지고 두번, 세번 사용할 수 있어 11세기 이후의 요지에서는 갑발의 퇴적도 점차 줄어든다.11세기 전반기의 고려는 중국의 송과 활발한 문화 교류를 가짐으로써 고려 청자가 앞으로 맞이할 절정기에 비약적인 발전 계기를 마련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2)제2기(1050-1150)이상과 같이 긴 숙련기를 거쳐서 고려의 도자기는 11세기 중엽부터 고려적인 세련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청자·백자의 기형과 의장(意匠)에 유연한 곡선 주조의 고려적인 풍모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유약, 태토의 질과 번조기술, 문양 표현 기법과 문양 자체가 또한 진일보하였던 것이다.청자의 기형에서 일부 금속기를 모방한 주전자와 광구병 등은 중국의 영향이 남아 있으나 대접, 접시 등 일반 기명들은 구연이 유연하게 외반되는 등 유려한 면이 더 발전되어 단정한 가운데 예리한 맛이 깃들어 있다. 문양은 상감 기법의 시도가 조금씩 늘어나고 음각과 양각이 예리해지며 특히 양인각이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11세기 도자사에서 하나의 절정기였다. 11세기 후반기이래 생동감이 넘치면서 유연한 세련을 거듭하여 온 청자와 백자는 유약과 태토 모두 차원을 높여서 한층 정치해졌다. 이것은 비단 도자기뿐만 아니라 이 무렵 모든 고려 공예와 회화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 등과 견주어 보아도 발전한 것이며 고려자기의 기형과 의장 등 조형 감각과 기술에 분명한 독창적인 고려화의 경향을 짙게 나타내게 된 것이다. 순청자 절정기의 비색은 시유된 유약의 두께가 얇고 비취옥과 같이 녹색이 비쳤으며 유약 내에 미세한 기포가 많아 반실투성으로 태토가 은은히 비춰 보인다. 그러므로 섬세한 음각이나 세밀한 양인각 등이 은은하게 나타날 수 있어 한층 기품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보다 청자를 몇 백년 먼저 만들기 시작하였으되 그 최고의 절정기는 우리 고려청자의 절정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든 중국 청자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북송 휘종 연간의 여관요 청자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여관요 청자는 기형 자체도 엄정하며 예리하고 적절한 과장이 있어 냉엄한 기품이 있으며 유약은 얇으나 투명하지 아니하여 거기에 음각은 물론이고 양각문양이 시문되었다 하더라도 볼 수 없으며 태토 또한 유약을 통해 전혀 비춰 보이지 않는다.우리 청자의 비색이 산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나 모시발이라면 중국 청자는 깊은 웅덩이의 물이거나 비단발과 같아서, 하나는 맑고 은은하면서 투명하고 하나는 진하여 불투명하고 두꺼운 장막을 드리운 것과 같다. 이때 우리 청자는 유약과 함께 기면의 정리도 매끄럽고 전체적으로 각 부위가 서로 잘 조화되어 균형이 잘 잡히면서 준수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병·주전자 등 큰 그릇의 굽을 깎는 방법과 번조 때 굽 밑 유약을 훑어 내리고 눈을 받치는 방법도 가능한 한 단아하고 깨끗하게 하였다. 눈을 받치는 방법은 11세기 중엽까지는 굽 밑과 그 안쪽 바닥의 유약을 훑어내고 내화토눈을 위주로 하였으며 11세기 후반부터 항아리·병·주전자·화분 같은 큰 그릇은 내화토와 가는 모래비짐눈을 받쳐 번조하였으며, 대접·접시 등 양각청자, 투각청자, 상형청자로 세분된다.1 소문(素文) 청자 : 기명의 표면에 어떠한 채색도 가미하지 않은 청자로, 정선된 흙으로 얇게 구워내기 때문에 그릇의 형태와 유약색이 뛰어난 것이 많으며 주로 청자 초기단계에 제작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인종장릉 출토라고 하는 참외형의 청자가 대표적인 예이다.{청자음각연화절지문매병2 청자음각(陰刻) : 그릇의 표면에 음각으로 가는 선 무늬를 새긴 것으로 그 위에 유약을 입혀서 구워내기 때문에 음각선을 나타내려면 유약이 투명하게 되도록 완전히 녹일 수 있는 숙련된 기술이 요구된다. 음각되는 무늬는 연호, 연화당초, 모란, 국화, 국화당초, 파도문 등이며,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에 걸쳐 널리 사용된 기법이다.{ 청자양각죽절문병3 청자양각(陽刻) : 나타내고자 하는 무늬를 그릇 표면에 도드라지게 하는 수법의 청자로 음각과 함께 사용되거나 청자상형 등에 부수적으로 함께 나타나는 예가 많다. 양각되는 무늬는 연화, 연판, 연화당초, 모란, 모란당초, 보상화, 부용, 파도, 버들과 갈대, 원앙, 봉황문 등이다.{청자투각칠보문뚜껑향로4 청자투각(透刻) : 그릇의 표면을 투각해서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의 청자로서 투각에는 두 가지 방법을 쓰는데, 하나는 나타내고자 하는 무늬 이외의 부분을 파내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나타내고자 하는 무늬 자체를 투각해서 파내는 방법이다.{ 청자나한좌상5 청자상형(像型) : 나타내고자 하는 동물·식물 등의 형태를 본떠서 만든 청자로, 숙련된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한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있다. 형태구성에 있어서 양각기법은 물론 음각이나 철채 등 다양한 수법을 겸하여 사용하고 있다. 사람, 사자, 원숭이, 오리 등의 동물형태와 식물의 형태를 본뜬 것으로 참외, 죽순, 연꽃등이 만들어졌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2) 청자상감(象嵌)고려청자의 장식기법 중 가장 두드러지고 대표적인 수법인 상감법은 문양을 음각하고 거기에 태토와 색깔이 다른 백토(白土), 자토(紫土)를 메우고 그 위에 청자유를 씌워 굽는 것이다. 세련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청자는 13세기에 들어 원(元)과의 관계 등으로 제작이 늘어났다는 기록이《고려사》에 보이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 시기의 작품도 몇 점 있다. 12세기 전반기의 화금청자는 아무 문양이 없는 소문(素文) 바탕 위에 사실적인 문양을 금분으로 나타냈으며 13세기의 화금청자는 거의 대부분이 상감된 문양 부위에다 화금문양을 시문하였다.{청자상감퇴화초화문표형주자6)퇴화(堆花)청자퇴화문은 철화문에서 고려인들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며 문양 구성은 주문양만이 있는 것이며 미숙한 것도 있으나 종속문이 있는 경우는 주문양을 회화적인 구성으로 하여 고려 특유의 문양 구성을 하고 있다. 매우 희귀한 예이기는 하나 청자에는 전면 백토를 분장하고 그 위에 자토로 그림을 그린 것과 일부 면에 백토를 분장하고 분장 부위에 음각으로 화훼문을 나타낸 것도 있고 퇴화문 주위에 백토분장대(白土紛粧帶)를 두르고 그 분장대에 음각으로 당초문 등을 나타낸 경우가 있다.이러한 수법은 초기 청자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여러 종류의 청자에 널리 이용되었다.4.고려청자 제작 과정청자를 만드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정성과 정밀을 요하는 작업이다. 흙을 수비(水飛)하여 성형, 정형, 조각, 장식, 시유, 소성 등을 거쳐 완성품이 되기까지는 무려 60∼70일 정도가 소요되며, 소성과정에서는 초벌은 800 , 본벌은 1,300 의 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야간 이틀 이상을 연속 불을 지펴야 한다. 또 신비스러운 비색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불과 태토(胎土)와 유약의 3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되고, 가마 내에서 불의 작용과 기상 조건에 따라 변화무쌍한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청자를 제작하는 어려움은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어느 한 부분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전체적인 균형미를 잃게 되는 것이 청자이다. 그래서 청자 제작이 어렵다고 한다.1)수 비청자를 만들기 위한 점토는 점력이 풍부하고 내화도가 높으며 입도가 균일하고 철분 함량이 과다하지 않으며 수축율이 크지 않고 재벌구이 후의 태.
지석묘의 정의와 형식지석묘 사회지석묘 연구사1)고대문헌2)태동기(구한말~1945)3)출발기(1945~1970)4)발전ㆍ심화기(1970~1990)5)정립기(1990~현재)참고문헌지석묘의 정의와 형식지석묘는 세계적 분포를 보이고 있는 거석문화의 한 무덤형식이다. 일반적으로 거석(megalithic)이라는 어휘는 그리스어의 ‘크다’(mega, large)라는 말과 ‘돌’(lithic, stone)이란 단어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지석묘도 당연히 거석을 이용하여 만든 무덤의 형태를 말한다.(유태용;2003 p.46) 지석묘의 외형상 탁자모양인 것에 유래해 돌멘(dolmen)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이는 켈트어의 '탁자'(dol)와 ‘돌’(men)의 합성어이다. 지석묘(支石墓)를 문자 그대로 정의하면 ‘돌이 고인 무덤’을 의미한다. 순한국어로는 말 그대로 돌을 고여 놓았다는 의미로 ‘고인돌’ 또는 ‘굄돌’이라고 부른다.(유태용, 2003, p.46) ‘고인돌’이라는 명칭이 한자용어인 ‘지석묘’라고 최초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에 의해서였다.지석묘는 크게 다음과 같은 3가지 형식으로 구분한다.(※별첨1 참고)ㆍ탁자식: 넓은 판석으로 된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형식으로, 판석 4매로 짜맞춘 무덤방 위에 납작한 덮개돌이 올려진 것이다. 책상처럼 생겨서 탁자식이라 한다. 주로 한강 이북부터 중국 요령지방까지 집중 분포되어 북방식(北方式)으로도 불린다. 북한에서는 발굴지역명을 따서 오덕형(五德形)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집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석붕(石棚)이라고 한다. 큰 것은 주로 제단이나 기념물로 축조된 것이다.ㆍ기반식: 판돌이나 깬돌로 무덤방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받침돌 4~8개를 돌린 후 덮개돌을 올린 형식이다. 덮개돌은 괴석형태를 한 것이 많고 무덤방과 덮개돌 사이에는 받침돌로 인한 공간이 있다. 바둑판처럼 생긴 탓에 기반식이라고 부른다. 이 형태는 호남과 영남지방에 주로 분포되어 있어 남방식(南方式)으로 불린다. 북한에서는 아직 기반식, 건축에 많은 노동력이 들 것이라는 전제는 오래 전부터 통용되어 왔다. 그래서 그러한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권력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받아들여져 왔고, 지석묘는 지배자 계급의 무덤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상식화되어 왔다. 그것은 지석묘는 지배자 계급을 매장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고 그것을 일정한 기간동안 축조한 하나의 집단이 존재하였다고 보는 것이다.지석묘가 축조되었던 세계의 대부분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도 성숙한 농경단계에 이르러서 지석묘군이 축조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단순히 과거에 우리가 상식화했던 전제처럼 집약적인 방식의 농경에 의존하였던 사회에서는 계급이 분화되고 상위계급의 지배자들이 노동력을 동원하여 지석묘를 축조했다는 설명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지석묘를 적절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경에 의존하였던 사회의 정치?경제적, 이념적 맥락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석묘를 포함한 환호취락 등과 같이 한반도 청동기시대에 축조된 기념물들은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며, 그것을 축조하였다는 것은 당시인들이 주변환경을 해석하고 또 그것을 변경시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농경사회의 진전에 따라 청동기시대인들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경관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의 방식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그에 대한 실천의 능력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채집으로부터 벗어나 농경에 대한 의존도가 보다 높아지면서 성숙한 농경단계에 다달한 청동기시대인들은 주변환경을 변경시키고 정착생활방식에 몰입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진전이 공간과 그를 이용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시간과 역사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 변화가 지석묘군을 축조하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한반도에서의 지석묘는 생업경제의 형태가 농경을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단계로부터 축조되기 시작했다. 성숙한 농경단계에 들어선 청동기시대의 기념물은 현재로서 두세가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로는 지석묘군과 같은 매장시설로서 닮았다. ...고 쓰여 있었다.ㆍ중국 금나라(金代)의 왕적(王寂)이 쓴 「압강행군지」에는기유년에 서산에 가보니 한 석실이 있었는데, 그 돌은 가로 세로가 무려 3장이나 되고 두께는 2자가 넘는다. 돌의 모양은 매우 정제되어 마치 바둑판과 같았으며 대석 아래에는 3개의 돌이 벽을 이루고 있는데 그 높이가 무려 1장이나 되고 그 깊이도 1장에 가깝다. ... 이를 그곳 사람들은 석붕이라고 일컫는다.는 대목이 나온다.ㆍ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권이십삼, 남행월일기(A.D 1200년)에는다음날 금마군(지금의 전북 익산)으로 향하려 할 때 이른바 지석(支石)이라는 것을 구경하였다. 지석이란 것은 세속에서 전하기를 옛날 성인이 고여 놓은 것이라 하는데, 과연 신기한 기술로 이상하다.는 기록이 있다.이상의 기록들로 보아 지석묘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추측할 수 있다. 먼저, 지석묘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기록은 원봉3년으로 기원전 78년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지석묘의 축조에 대해 전혀 구전되거나 알려진 바가 없는 것으로 보아 지석묘는 이보다 훨씬이른시기에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또한 기록상으로 보아 지석묘에 대한 명칭이 이미 고대부터 쓰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대석(大石), 석붕, 지석 등과 같은 표현이 그 예이다. 지석묘의 형상에 대한 기록도 주목할만 한데, 1~5장까지 이르는 거대한 지석묘의 크기, 바둑판처럼 생겼다, 돌이 벽을 이루고 있었다와 같은 내용에서 그러한 의미를 읽을 수 있다.2)태동기(구한말~1945))지석묘는 선사시대에 무덤의 한 형태로 다수가 축조되었지만, 오랜 역사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다가 구한말 선교사였던 W.R. Carles와 W. Gowland 등에 의해 서구학계에 소개되면서 한국 고대의 거석문화의 산물로 역사가들로부터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W.R. Carles는 서울에서 원산으로 가던 중 포천에서 본 지석묘를 보고 본국인 영국에서 1883년 “한국에서의 생활”이라는 글에서 소개하였다. 그0)해방이후 북한에서 먼저 지석묘 연구가 시작되었다. 정백운은 「조선 고대 무덤에 관한 연구」를 1957년에 발표하였는데 그는 석실의 위치에 따라 북방형과 남방형으로 나누고 신석기시대 말 내지 금속기사용기의 묘제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전까지의 신석기시대 설에 대하여 금속기 즉, 청동기시대까지 내려본 것이 주목되는 점이다. 도유호는 「조선 거석문화연구」를 발표하며, 지석묘는 동남아시아에서 황해도 쪽으로 전래되었다는 동남아 전파론을 주장하였다.우리나라 사람으로 지석묘를 체계적으로 고찰한 임병태는 1964년에 「한국 지석묘의 형식 및 연대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논문에서 지석묘를 탁자식ㆍ기반식ㆍ무지석식으로 분류하고 그들 형식을 다시 석실의 위치와 숫자에 따라 좀더 세분하였다. 그는 한국 지석묘의 상한연대를 B.C 3세기 이전, 하한연대는 처음에는 A.D 1세기경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중에 하한연대를 B.C. 2세기경으로 다시 견해를 수정하였다.김재원과 윤무병이 1962년부터 남한의 12개 지역에서 총 60여기의 지석묘를 발굴조사하여 이를 집대성한 『한국지석묘연구』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들은 지석묘를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분류하면서, 한국 지석묘의 발전은 북방식에서 남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남방식은 다시 무지석식에서 유지석식으로 발전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들은 지석묘의 상한은 B.C. 8세기 이전이며 하한은 북쪽을 B.C.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사이로, 남족을 B.C.2세기까지로 보았다. 그리고 경기도 파주군 옥석리 지석묘 발굴시에 지석묘의 아래층에서 노출된 주거지의 탄소연대가 B.C.640년으로 산출되어 처음으로 지석묘에대한 절대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를 얻게 되었다. 특히 여기에서 출토된 이단병식 마제석검을 토대로 한국의 마제석검이 세형동검을 모방했다는 이리미츠 교이치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충북 제천 황석리 지석묘의 발굴조사에서 인골이 출토되어 지석묘가 무덤으로 기능하였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배층의 묘제로 보았다.이융조의 「양평 앙덕리 지석묘 문화」에서는 상석의 운반문제와 발굴결과를 토대로 지석묘 문화를 다양하게 해석하였다. 이융조는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발굴결과를 통해 지석묘사회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그는 1980년에 「한국 지석묘 사회와 그 의식」을 발표하여 지석묘 연구의 폭을 넓혔다. 사자와 관련시켜 머리 방향무제, 영생문제, 색, 예술품, 제의 등에 대해 이론을 제시하고 특히 물과 관련성을 주장하였으며 그 사회를 연장자와 현자가 지배하는 족장사회로 보았다.이 시기에는 지석묘 연구에 있어 질적인 면으로도 심화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김병모는 1981년 발표한 논문 「한국 거석문화의 원류에 관한 연구」에서 한반도의 지석묘는 농경과 함께 동남아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보았다. 즉, 벼농사의 기원지가 동남아이고 벼농사가 해루를 따라 민간신앙과 함께 이동해 왔다면 지석묘의 전파도 거석숭배사상과 함께 그 같은 루트에 따라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분포된 지석묘가 난생신화의 분포와 일치하고 있음을 착안하여 역시 동남아시아로부터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였다.또한 이 시기에 특기할 점은 1981년 2월에 한양대학교에서 개최된 “아시아의 거석문화”라는 주제로 국제세미나가 개최되었다는 것이다. 그 세미나에 인도네시아,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 등 5개국으로부터 거석연구와 관련된 학자6명이 참가하여 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지건길은 「동북아시아 지석묘의 형식학적 고찰」에서 지석묘를 크게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대별하여 묘실축조방법에 따라 여섯 가질 나누고 이를 적석의 유무에 따라 세분하였다. 또 그의 「지석묘사회의 기원에 관한 일고찰」은 축조기술상의 문제에서 사회적 협동체제가 갖추어진 공동체 사회에서 지석묘를 축조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장제에 있어 집장제의 가능성, 그리고 지석묘의 방향을 자연숭배사상과 결부시켜 지석묘 사회의 복원을 시도하였다.최몽룡은 「전남지방 지석묘사회의 계급의 발생」과 「전남지방 지석묘사
(그리스 신화의 죽음의 신 하데스.로마신화의 플루토(Pluto), 디스(Dis), 오르쿠스(Orcus)에 해당된다. 퀴클롭스에게 받은 퀴네에(Kynee)를 쓰면 살아 있는 것들의 눈에는 그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데스의 이름은 하이데스(Haides)에서 나온말인데 이 말의 뜻은 '보이지 않는 자' 또는 '보이지 않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하데스의 별칭으로 플루토스(Ploutos:부자)가 있다. 이는 '풍요의 뿔'이라는 보물이 있는데, 바라는 것을 만들어준다. 머리 셋 달린 개 케르베르스와 같이 있는 모습으로 자주 나타난다. 하데스는 냉혹하고 무정한 신이다. 인간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아내로 맞이한다. 죽음의 신인 하데스에겐 자식이 없다.하데스는 제우스와 포세이돈과 마찬가지로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크로노스에게 잡아 먹힌다. 제우스는 꾀로 아버지 뱃속에서 다시 살아 나오자 하데스는 제우스 편에 서서 크로노스와 티탄을 상대로 싸운다. 이때 그는 퀴클롭스에게서 황금 투구 퀴네에를 무기로 받는다. 이 투구를 쓰면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황금 투구는 아테나 여신이 즐겨 빌려 썼다. 또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자를 때에도 빌려 썼다. 전령의 신 헤르메스도 제우스의 전갈을 비밀리에 전할 때 이 투구를 빌리곤 했다. 티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크로노스의 세 아들이 제비뽑기를 했을 때, 맏형인 하데스는 지하세계를 맡게 되었다.지상에서 지하세계로 가려면 아케루시아(Acherousia) 호수와 아케론(Acheron)강을 건너야 한다. 이 호수와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지하세계의 늙은 뱃사공 카론(Charon)의 배를 타야 한다. 이 영감은 죽은 자들의 영혼을 은전 한 닢을 받고 건네주지만 산 사람은 결코 태워 주지 않는다.아케루시아 호수와 아케론 강은 지상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스튁스는 지하세계의 강이다. 스튁스 강은 지하세계를 아홉 겹으로 둘러싸고 있다스튁스를 건너면 음울한 벌판이 펼쳐진다. 망령들은 이곳에 거주한다. 이곳은 빛이 안 들어와 땅거미 질 무렵처럼 항상 희미하다. 푸른빛이 도는 회색의 세계이다. 모든 사물이 어렴풋하게 보이고 음산하기 짝이 없다. 이 벌판에서는 살아서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다.하데스 궁전의 문은 케르베로스라는 개가 지키고 있다. 이 개는 머리가 오십 개나 되었다. 앞에 달려 있는 세 개는 개 머리이지만 등에 달린 나머지는 갖가지 짐승의 머리가 뒤섞여 있다. 꼬리는 독을 뿜는 뱀 머리이다. 생긴 모양만으로도 겁에 질리게 한다. 케르베로스는 하데스의 궁전으로 들어갈 때는 아무런 간섭을 않는다. 그러나 궁전에서 나오려는 사람은 이 개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하데스의 지하세계에서 살아 나온 인간은 세명이다. 죽어야 하는 인간의 몸으로 맨 처음 죽은 자들의 왕국을 찾아 온 영웅은 오르페우스이다. 그의 아내 에우뤼디케는 독사에 물려 죽었다. 그녀를 잊지 못한 오르페우스는 음악의 신비한 힘을 빌려 지하세계로 내려간다.두번째 인간은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이다. 테세우스와 그의 친구 페이리토스는 지하세계의 여왕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여 페이리토스의 부인으로 삼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며 지하로 내려갔다.지하세계에 대한 인간의 침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건은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다. 케르베로스를 데려오라는 에우뤼스테우스의 명령을 받은 헤라클레스는 하데스의 왕국으로 내려가 임무를 완수한다.(그림으로 보는 그리스 신화 속 죽음1827년 파리 루브르 미술관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난 프랑스의 화가 들라클루아는 다비드풍의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낭만주의 회화를 많이 그렸다. 「사르다나팔의 죽음」은 성도의 함락을 눈앞에 둔 바빌로니아의 왕이 무사들을 시켜 그의 왕비와 애첩들을 살해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환하고 밝게 묘사되어 있는 살육장면과 반대로 구석에 어두운 색조로 그려져 있는 왕은 이 모든 광경을 관조하고 있다. 주제와 양감의 격동, 붉은 색을 기반으로 한 현란한 색채, 휘감고 돌아가는 곡선 등은 낭만주의의 주요 특징과도 상통되며 들라크르와는 이를 무기로 작품의 미학을 완결시킨 듯하다.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가 이국적이며, 화려한 꿈의 세계를 연상시킨다.화면에서 드러나는 일말의 슬픔은 작가의 창조적인 상상력을 통해 승화된 것으로 낭만주의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전면 왼쪽에 호사스런 치장을 한 왕의 애마가 요동치는 모습이 보이고 침대로부터 대각선 방향을 따라 벌거벗은 미희들이 칼을 맞고 죽거나 죽어가고 있다. 배경 쪽에서도 지금 죽음의 잔치가 진행되고 있다. 이 모든 잔혹한 사태 앞에서 왕은 아무 일 아닌 냥 평온한 시선으로 잔치의 진행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세계의 중심이므로 흔들려서는 안된다. 비록 패배는 분명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패배가 왕의 존엄마져 앗아갈 수는 없다. 그 극한의 감정, 그 실존적 상황은 분명 낭만주의적인 것이다. 비록 기성세대는 비난을 쏟아 붓겠지만 낭만주의는 분명 근대적 정서을 얻기 위한 유럽미술의 사춘기적 투쟁이었다. 극단적인 죽음의 상황, 왕의 극단적인 자제력, 그리고 죽어가는 여체에 덧씌워진 사체애적 관능미 등 사르다나팔의 제 요소는 확실히 사춘기라는 평을 받는다. 새로운 개안을 위한 격렬한 투쟁의 모습이라고 한다. 1907~1908년경 캔버스 유채 22×83cm 개인 소장참으로 고혹적인 아름다움이다. 여인의 풍만함은 터질 듯 화면을 장악했다. 그녀의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나온다. 달콤하지만 뭔가 퇴폐적인 분위기가 물씬거리는 그림. 죄악의 냄새가 있고 절망적인 죽음의 그림자마저 엷게 드리워져 있다. 농밀한 에로티시즘을 담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의 이 그림 '다나에'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어느 새 몽환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인체 표현, 그 중에서도 다양한 연령층의 여인누드를 서양미술사 안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낸 작가로 알려지고 있는 클림트는 유겐트스틸 운동을 주도했던 오스트리아의 거장이었다. (유겐트스틸 운동이란 독일어 문화권에서 아르누보 양식을 호칭한 것으로서 아르누보의 특징인 식물을 모티브로 하는 화려한 장식효과를 보다 극적으로 연출하는 점이 색다르다.)그는 여인을 사랑하고, 여체에 탐닉했던 자신의 성 의식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다. 한편 에로티시즘을 바탕으로 시대정신의 나락과 자본의 발흥에 따른 인간(여성으로 대치되어)의 상품화를 죽음이라는 세기말적 분위기에 녹여 표현한 작품을 상당수 보여준다. '다나에'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에로틱한 분위기는 여체를 묘사해내는 독특한 작가의 개성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클림트는 여성의 작은 심리변화를 절제된 표정으로 여인의 나신에 숨겨 둠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분위기를 즐기도록 배려한다.이 작품에서도 그의 이런 팬서비스(?)는 예외 없이 드러난다. 살포시 감은 눈과 대조를 이룬 벌어진 입술. 무엇을 살짝 감아쥐는 듯한 긴장된 손의 표정 등은 분명 한 여인의 심리묘사와 연관된 구체적 표현이다. 몸을 크게 오므리고 흐벅진 여인의 허벅지 를 화면 중앙으로 배치한 클림트의 의도는 섹시한 분위기의 연출과 함께 이 여인의 포즈를 태아의 그것과 유사하게 보임으로써 상반된 두 가치의 합일과 원초적 모습을 담아두려 했다.다나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에게 겁탈 당한 여인. 그녀를 작가는 화려한 장식에 둘러 쌓이게 하고 뽀얀 나신을 그 속에 묻어 겁탈 당한 여인의 슬픔과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병치시키고 있다. 이는 당시 인문학이 관심을 기울인 인간 내면세계에 대한 관점- 본능적 충동(이드)에 의존하는 새로운 인간상에 대해 보내는 이 작가의 지지로 보인다.(불교와 기독교에서의 죽음첫째, 불교의 지옥은 마귀들이 죽은 영혼을 괴롭하는 거라면 기독교의 지옥에서는 마귀와 마귀 추종자들이 함께 괴로움을 당하는 곳이다.둘째, 불교의 지옥은 언젠가 영원한 종말의 날에 끝나는 거지만 기독교의 지옥은 영원하다. 최후의 심판 날이 와 여태 활개치며 다니던 사탄과 그 추종자 마귀 그리고 인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감으로 그 수는 계속 늘어난다.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히 결박해버리신다고 되어 있다.셋째, 불교의 경우, 다음 생에서 안 좋은 걸로 태어나 죄 값을 치르다 못해 더 이상 구제 불능인 자들만이 지옥에 떨어지고 기독교의 경우 죄 값을 대신 치를 자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나님이 지정해서 그를 믿는 것을 조건으로 죄를 안 묻고 지옥에 안 보내기로, 그래서 기독교의 지옥에 가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 값을 대신 치렀음을 안 믿는 자들이다.가장 큰 차이는 일시적/영구적인 것이다. 기독교는 어차피 지구상에서의 인간의 삶은 1회적인 것으로 보고 이 1회적 삶에서 하나님 믿으면 천당에 가서 영원히 잘 살고 여기서 안 믿고 악행 하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불교의 지옥은 여기서 지은 죄만큼 지옥에서 산다. 그 후엔 다시 인간이나 축생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지옥 이후에 다시 온 인간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면 이번엔 극락에 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극락은 기독교의 천국과는 달리 여기서 착한 일을 하면 가는 곳이지만 그 착한 일의 효과가 다하면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온다.그래서 불교에선 기독교와는 달리 "열반"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이다. 즉 불교에선 착한 일해서 극락 가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아니고 (왜냐하면 착한 일의 효과가 다하면 다시 인간세계로 돌아오므로) 영원한 자유의 세계로 가는 "무여열반(열반에 들면 다시는 인간세상 등을 윤회하지 않는다)"이 극락보다 훨씬 위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림으로 보는 기독교에서의 죽음 엘 그레코, 1608년, 캔버스에 유채, 260 x 171cm희랍인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엘 그레코는 여느 화가들보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영향을 덜 받았다. 또한 전문적인 훈련이나 회화의 중심지에서 벗어난 생활을 하면서 작품을 그렸기 때문에, 중세 시대 영향과 틴토레토의 회화에서 받은 깊은 감동을 자신의 작품 속으로 흡수시킬 수 있었다.
Ⅰ. 기획 동기요즘 세대는 디지털 세대라 불릴 만큼 각종 디지털 기기에 친숙하다. 또한 어느 곳에서나 핸드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해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을 누구나 한번쯤 봤을 것이다. 디지털 세대의 젊은 사람들은 이용이 편한 디지털 기기를 통해 빠르게 이미지와 영상에 친숙해져 가고있다. 그런 현실을 반영한 듯 청소년과 영상매체를 접목시킨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기획되고 실행되고 있는데, 청소년 영화제나 영화 학교를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래서 영상에 익숙한 청소년들을 위해 새로운 교육방법을 기획해 보게 되었는데, 바로 청소년이 직접 영상물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영상 매체를 이용하여 교육을 할 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보다는 직접 참여해서 만들어보게 함으로써 내용을 좀더 깊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또 영화가 아닌 다큐를 선택한 이유는 특별히 강제적으로 영화는 안된다는 식으로 창작에 제한을 두려한 것은 아니고, 단지 다큐처럼 사실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청소년들이 다큐를 제작하는 동안 창조적인 사고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의 역사를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역사 다큐 제작 캠프의 개관을 하고자 한다.Ⅱ. 캠프의 운영1. 필요한 인원: 각 분야 전문강사 총10여명 (경주 역사 전반, 다큐 제작 전반, 시나리오 제작, 촬영 기법, 편집).보조 인원(학생 10명당 인솔 교사 1명 배치)과 캠프 진행 요원.2. 시설과 진행: 숙박 시설(인근 학교의 기숙사 또는 유스호스텔 활용), 기기 시설(경주시 문화재단이나 청소년 문화센터), 레크레이션 프로그램 마련.3. 재무: 학생 개인당 5~6만원 선의 캠프비 부담.그 외는 지원받을 수 있도록.4. 홍보: 각 학교 안내문 발송, 인터넷 홈페이지 운영 및 배너 광고.Ⅲ. 캠프의 개요1. 캠프일정: 0월 00일(0요일) - 00일(0요일) 4박5일2. 캠프장소: 역사의 도시 경주3. 준비물1) 다큐 계획서 1부.주제: 한정된 주제를 정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소재가 될 수 있는 경주에서 전해지는 전설이나 유명한 문화재, 유적지 들에 대해 간단한 예습 수준의 내용이 필요하다. 세부적인 시나리오 작성에 대해서는 캠프에서 교육 받는다.2) 개인준비물4. 다큐촬영:장소-경주 시내 일대(차량이동) 촬영콘티에 따른 특별한 장소는 적극적으로 섭외예정.조구성- 제작(기획 및 실무 등), 연출(감독 및 조감독 등), 촬영(촬영감독 및 조명), 녹음 팀으로 10여명씩 한 조로 구성. 인솔 교사 1명이 각 조마다 배치.촬영 준비물- 촬영 장비(카메라, 편집용 컴퓨터, 기타 장비, 편집용 프로그램)제공.5. 다큐에 필요한 그 밖의 사항은 주최측에서 준비.6. 작품 완성 및 시상식:상영회를 통해 심사위원들(학생들 자신 또는 전문 강사들)의 심사를 거쳐 대상(1작품)/우수상(1)/가작(3)/인기상(1)을 시상하여 상금과 상품을 지급한다. 상을 받은 학생은 경주내 대학 입학시 가산점을 주는 등의 특전도 마련한다. 상영회 이후에도 학생들이 만든 작품을 인터넷 등을 통해서 계속 상영하여 다른 학생들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Ⅳ. 캠프의 장단점 분석이미 청소년들이 스스로 영화 제작을 참여할 수 있는 캠프는 경기도 이천시에서 주관하는 “이천 청소년 영화 캠프”, 서울시 청소년정보문화센터에서 주관하는 영화 학교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 캠프와 달리 다큐 제작 캠프가 내세울 수 있는 특징은,첫째, 사실성을 강조하는 다큐라는 형식을 빌렸다는 점이고,둘째, 소재와 주제에 있어서 경주의 역사라는 한정을 두어 교육적인 목적을 드러내고자 하였으며,셋째, 그래서 이 캠프는 다큐 제작 기법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도 깊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넷째, 디지털 기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도 기존 6mm카메라를 사용하는 영화 제작 캠프와는 달리 보다 빠르고 쉬운 방법의 영상 편집 기술을 배울 수 있다.그러나 캠프의 기한이 정해져 있다 보니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제작의 한계가 생길 수 있고, 그로 인해 다큐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거기다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보다는 디지털 방식의 제작 기법이 기기의 가격이 비싸고 제작에 따른 프로그램 등이 필요하므로 재정적인 면에 있어서도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하다.Ⅴ. 캠프의 가능성아래의 사진은 제2회 대한민국 청소년미디어대전 다큐멘터리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대성고 학생들의 라는 다큐의 한 장면이다. 학생의 작품이라고 생각 되지 않을 만큼 잘 들어진 작품이었다. 요즈음은 청소년들에게 후원만 해준다면 이 정도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비록, 이 대성고 학생들처럼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고 다양한 편집 기술 활용할 기회까지 제공할 만큼의 기간은 아니다. 그러나 대성고의 학생처럼 잘 만든 작품성 있는 다큐 제작에 다큐 캠프의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캠프도 든든한 후원이 가능하다면 캠프에 참가하는 청소년들에게 다큐에 대한 기본적인 제작 실무와 역사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일거양득의 교육적 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일자캠 프 내 역비 고구 분내 용0월0일개 회입소식 및 참가자상견례(캠프 주최,청소년지원단체, 전문강사 등등)이론교육경주 역사 강의(강사진: 역사 전문가, 박물관 학예사)다큐 시나리오 제작 실무(강사진: 시나리오 전문가)팀구성청소년 영화제작팀 구성 및 스텝결정시나리오완성주제 선정후 시나리오 작성, 보완 및 콘티작성0월0일이론 및 실습교육다큐 전반 강의(강사진: 다큐 감독, 전문강사)촬영 및 편집의 이론 강의 및 실습 (강사진: 촬영, 편집분야 강사 )촬영역사 다큐 제작팀별 촬영0월0일촬영역사 다큐 제작팀별 촬영편집역사 다큐 제작팀별 편집(가편집)0월0일편집청소년 영화제작팀별 편집(본편집) 및 제작레크리에이션캠프파이어 - 초청가수 노래-축하파티 및 장기자랑이벤트사 진행0월0일시사회다큐 제작팀별 시사회 및 연출자 제작소감 발표시상식단체 및 개인상 시상(정식 시상식 별도일정)폐회 및 해산폐회식Ⅵ. (참고) 캠프 일정
..PAGE:1목차영화음악이란?영화와 영화 음악 소개추천하는 좋은 음악..PAGE:2영화 음악이란?+ =촬영된 필름 녹음된 음악 완성된 필름..PAGE:3영화 음악이란?스코어는..영화를 위해 순수하게 창작된 곡악기를 이용한 연주가 중심삽입곡은..기존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편곡하여 사용근래에 영화 속에서 자주 사용..PAGE:4영화 누가 많이 보나?스포츠조선 2002년 1월 19일 조사..PAGE:5영화와 영화 음악 소개인생은 아름다워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아들을위해서 웃는 그의 얼굴..로베르또 베니니의 감동의연기가 다시 눈물짓게 합니다..PAGE:6영화와 영화 음악 소개뉴욕의 가을째즈 선율이 아름다운 곡입니다.영화는 그리 재미있다는느낌은 들지 않았지만,영화 내내 흐르는 째즈음악이 참 좋았습니다...PAGE:7추천하는 좋은 음악My lovePaul McCartney비틀즈의 폴 매카트니의 음악Don't worry baby..........beach boys영화 ‘마이걸2’에 삽입드라마 ' 네 멋대로 해라' 중 '꿈을 꾼 후에‘감동의 드라마에 삽입된 허밍음악↑모두 들어보세요.^^..PAGE:8추천하는 O.S.TOnce Upon A Time 엔니오 모리꼬네O.S.T중에서도 베스트Love Affair 엔니오 모리꼬네피아노 솔로는 이 음반에서 가장 백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