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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포트] 어린왕자를 읽고
    어린 왕자의 존재 (어린왕자를 읽고)어린왕자는 존재란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설파한 철학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자신의 자전적인 관점이 녹아있는….저자가 사막에 혼자 불시착하여 절망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글은 시작되고저자는 어린왕자를 만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알고 사막에서 물을 찾음으로써 생명을 건지게 된다. 여기서 어린왕자는 인생의 희망을 상징하고 사막은 바로 우리의 인생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왕, 정치가, 사업자, 주정뱅이 등은 고립되어 있는 개인 개인들을 나타낸다. 어린왕자는 이러한 사람들을 사람이 아니라 버섯이라고 표현한다. 즉 겉으로는 사람같이 생겼으나 사실은 속이 비어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어린왕자는 장미꽃과의 불화로 자신의 별을 떠난다. 이 것은 곧 그가 - 다른 별에서와 같이 고독하게 살고 있었던 - 최초로 자신의 벽을 노크하고 들어온 장미란 존재와의 관계정립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즉 그는 장미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오해함으로써) 별을 떠나게 된다. 저자와의 처음 만나는 순간에 어린왕자는 양을 그려 줄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존재의 개념정의가 시작된다. 존재는 결국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요 믿음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인간은 서로간의 의사소통수단으로서 언어를 개발해냈다. 화가는 그림으로써 작곡가는 음악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의사를 나타낸다. 그런데 어느새 인간은 이러한 표현의 수단을 표현 자체인 것으로 오인을 한다. 즉 주체와 객체의 전도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추상화에는 작자가 감상자에도 전달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가 녹아 있다.이러한 자신의 의도는 감상자가 결국 이 그림을 통하여 작가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이해함으로써 달성된다. 결국 감상자는 그림을 통해서 작가의 입장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결국 감상자는 단지 색의 조합이 아닌 작가의 의도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그러나 인간의 표현수단의 한계는 이러한 진정한 의사소통을 더욱 힘든 것으로 만들고 오해를 만들어 낸다. 이 점에 대해서 저자는 여우를 통하여 길들인다는 뜻을 이야기 하며 언어는 오해의 근원임을 지적한다.결국 우리는 서로간의 길들이는 과정을 통하여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고 개인적인 소외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것이 진정한 존재라는 것이다. 서로 고립되어 있는 다양한 군상들은 사실은 버섯으로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왜냐하면 존재란 곧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을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알 수가 없으며 결론적으로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예를 들면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그 것의 가치를 믿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베이커씨의 아들은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 것은 우리에게는 존재가 아니다.이에 따라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존재는 주관적인 크기를 지니게 되고 바로 이러한 과정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과정은 자신과 남이라는 대립적인 상황을 극복하여 남을 자신의 일부분으로써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과정이다. 이는 자신의 입장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이루어 질 수 없으며 남을 진정으로 이해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이렇게 남을 자기화해 가는 과정 바로 이러한 과정이 길들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은 남을 이해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존재를 창조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어린왕자가 작가에게 설명해 가며 작가가 현실의 삭막함(사막) 속에서 마지막 남은 물(희망)을 다 마셨을 때 새로운 우물을 발견함으로써 작가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여기서 이 우물은 마치 인가에 있는 우물인양 모든 것이 준비된 완벽한 우물로서 나타난다.저자는 이 우물의 물을 단지 영양분이 아닌 하늘의 별과 인간의 노력 속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며 마음에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저자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예로 든다. 즉 우리에게 크리스마스가 좋은 이유는 바로 크리스마스에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것이 인생의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일이 즐거울 때는 하루 밤을 새거나 하는 것이 힘들지 않다.그러나 그러한 기대가 없어지거나 실망했을 때는 단 한 순간을 지내는 것이 무척이나 지루하게 느껴지고 힘들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물이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인생에 생기를 주는 말 그대로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은 생명수라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러한 선물의 의미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던가.
    독후감/창작| 2002.10.12| 3페이지| 1,000원| 조회(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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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혁명 평가A좋아요
    4.19혁명이라고 하면 대다수의 국민은 학생운동이라 생각해왔다. 왜 하고 많은 계층 중에서 학생들이 혁명을 주도했는지 알아보고, 또한 역시 4.19가 단지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였다고 보아서는 4.19를 역사 속에서 제대로 위치 지울 수 없게 된다. 이 레포트에서는 이러한 통속적인 4.19관을 약간 넘어 우선 1950년대 말의 한국사회의 구조에 대해서 그 토대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분석하고, 다음에는 그러한 토대의 변화에 영향을 받아 성장해 온 사회 각 운동세력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자. 그런 뒤에 4.19의 실제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러한 과정의 분석이 있은 후에 자연스럽게 5.16의 의미가 도출될 것이다.*1950년대 말의 사회경제적 토대일제시대는 분명하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시대였다. 여기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특성은 이미 형성된 것이다. 즉, 봉건적인 모순이 주체적인 극복을 통해서 성장한 소생산자를 기반으로 하는 민족자본가는 하나의 세력 또는 계급으로 성장할 수 없었고, 제국주의 자본과 결탁하여 그들과 수직적 분업관계를 형성한 매판자본가층만이 형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이 주어지는 순간, 그러한 매판성을 지닌 자본가층은 곧바로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본주의 국가와 수직적 분업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1950년대의 한국경제는 원조경제에 기생하는 매판자본가들이 주요 지배세력이 되는 체제가 된다. 이러한 매판자본가는 그 속성상 정치권력과 외세라는 두 지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950년대 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원조는 UNKRA, ICA, PL480등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한 원조는 한국경제의 자립적인 발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 미국의 대외원조는 그 속성상 후진국의 경제체계를 미국 자본주의에 종속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나 PL480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무상으로 한국에 상륙시킴으로써, 농업경제의 파탄을 초래했다. 또한 원조에는 생산재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즉, 1950년대의 한국소비재 원조에의 기생은 광범위한 실업을 만들어 수백만 명의 실업자들이 거리에서 방황했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60년의 총실업률은 34.2%였으며, 이것을 농촌과 도시로 나누어보면, 농촌 실업률이 29.1%, 도시실업률은 무려 42%에 달했다. 당시 도시민들은 빈곤과 실업사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농민들은 빈곤과 보리고개에 시달리고 있었다.* 1950년대 말 각 사회계층의 존재 상황우선 종속적 독점재벌의 경우를 보면 이들은 원조물자의 분배과정에서 정치권력과 유착관계를 맺어 소비재 가공업을 통해 상업적 이윤을 배타적으로 획득하고 있었다. 따라서 현상유지와 안정에 대한 이들의 욕구는 강력한 것이었다.다음으로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자유당 정권은 냉전체제의 보호아래에서 자기 생존을 보장받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법률적으로 보장된 자유민주주의와 서민권이 오히려 장애물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이념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다고 해도, 그러한 토대가 없는 이념은 역사현실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냉전체제의 한쪽 극에 위치하고 있는 미국의 지원이 없다면, 곧바로 그 존립기반이 허물어지는 허약한 정상배에 불과했다 .한편 쁘띠 부르조아나 중간계급은 그 실체로서는 야당 정치세력, 지식인, 학생, 중소상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면 당장 보수세력의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지식인 및 학생세력은 당시의 단계에서 주요한 비판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향유하고 있었고, 따라서 역사적 경험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층이었다.그럼 기층민중을 구성하고 있던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을 살펴보자.무엇보다도 1950년대 한국사회의 특징은 도시인구의 급증이었다. 당시의 도시인구는 중소지주의 몰락으로 인한 이농, 전쟁뒤의 월남민, 또한 약 20만명에 이르는 제대군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시빈민은 어떤 구체적인 생산관계 속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 농산물의 무차별적인 도입으로 궁핍화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농민은 점차로 소작농 또는 농업노동자로 전락해갔다. 아직도 인구의 대다수가 농촌에 생활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농촌의 궁핍화는 사회의 전반적인 위기로 확산되어 나갔다. 1961년의 소위 "4월 위기설 " 이라는 것은 이러한 상황의 반영이었던 것이다.미국의 고원경기가 과다한 대외지출로 인한 만성적 인플레에 견디다 못해 1957년에 대공황이 발생하여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대외원조를 습격하게 철회하기 시작하자. 이것은 한국의 원조 의존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고, 그러한 타격은 사회체제의 전반적인 동요로 나타났다. 즉,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한 모순이 격화되고, 그것이 지식인, 학생, 비판적인 정치세력에 의해 외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이 4.19를 통해 폭발적으로 분출된 것이다.*제 1공화국이승만 대통령하의 제 1공화국은 이승만이 헌법 제정 과정에서 주창하여 관철된 미국식 민주주의에다가 한민당이 주장한 의원 내각제적 요소를 다소 가미한 헌법과 정부 형태가 이땅에 실현되었던 시기였다. 이승만은 건국 과정에서 한민당을 비롯한 국내 민족 우파의 지지를 받아 가면서 신생국 정치 체제를 제도화하고, 그의 친미 일변도의 반공 노선을 견지하면서 대한 민국 체제의 생존 유지를 위한 필사적 외교를 전개한 것이다. 1950넌 5월 30일 제 2회 총선거는 5.10 선거를 보이콧했던 민족 세력도 차마하여 신생국 정부의 정통성을 보강하는 의의가 있었으나, 소장파 야권 세력의 진출로 이 정권의 정치적 기반은 불안해졌다.그리고 이승만 노선을 적극 지지해 오던 한민당이 정부 구성에 대한 불만을 품고 야당의 자리로 돌아서자, 이 대통령은 자유당을 조직했고 자신이 직선에 의하여 재선되기 위하여 1952년에 한국 전쟁의 와중에서도 관권을 동원하여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건국 후 남한에서는 좌우익 충돌이 격화되고 공산주의 테러리스트들과 게릴라들의 활동으로 민패가 막심했으며, 특히 6.25전과 함께 이 대통령은 자유당으로 하여금 대통령의 3선 및 종신 연임제의 개헌을 추진하게 만들어, 결국 1954년에 제 2차 개헌을 무리하게 통과시켰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국민과 야권에서는 반독제 신당운동을 전개하여 제야 우익 진영이 총망라된 민주당과 사회주의계의 진보당이 결성되어 자유당과 대결하였다. 그 후 권력의 기초가 점차 동요되어 정치의 양극화를 가져오고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 정치 경향이 각급 선거에서 현저히 부각되어 오히려 정당의 조직화와 정당 정치의 발전에 기여한 면도 있었다. 뒤이어 자유당 정부는 1960년의 제 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산이 없다고 예측한 나머지 1958년에 관권 선거용으로 보안법과 지자제의 개정을 강행하다 "2.4"파동을 야기했으며, 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대미문의 선거 부정을 감행하여 결국 4.19학생의거로 종신 일인 통치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4월 혁명의 과정4.19는 대체로 세 단계를 거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는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학생의 주도와 도시빈민 및 노동자의 가세로 4월 19일에 이르는 과정과, 둘째로는 4월 19일 이후 학생 및 비판적 정치인의 퇴조와 기층 민중운동역랑의 성장 및 일부 학생과 지식인의 이념적 성장 과정이며, 세 번째는 군부의 등장에 의한 5.16 쿠테타에로의 귀결과정이다.1>2.28에서 4.26까지대구에서의 2.28 시위는 구체적으로는 자유당 정권이 민주당의 강연회가 있을 예정인 일요일에 시내 대부분의 고등학생을 강제로 등교시킨데서 발생한 것이었다. 대구에서의 2.28 시위는 3.15부정선거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이에 축적되어온 지배정치세력에 대한 불만이 이제 폭발직전에 이르렀다는 것을 예고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3월 15일의 마산봉기에서는 이러한 학생의 주도아래 수 만명의 시민이 합세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여기서 학생들이 이 봉기의 주도체였음은 강조되어야 한다. 그 시위대를 이끈 것은 바로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을 맞고 사도에 있는 해동고에서 드디어 시위의 횃불이 타올랐다. 그리고 투표일 하루 전인 14일에는 시내 거의 보든 고등학교가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어 3월 25일, 4월 11일, 19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점차로 가두의 시민이 시위에 합세해 갔다. 4월 19일이 되면 대구, 광주, 전주, 부산 등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시위가 격화되기에 이른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기점으로 19에는 서울대 문리대생을 필두로 시내 각 대학과 고등학교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의 집결지인 중앙청 앞, 시청 앞, 광화문 내무부앞, 서대문 등에서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개시했다. 그러나 이미 시위군중은 무차별 사격에 의해 기제가 누그러들지 않았고, 파출소, 서울신문사, 반공청냔단 등을 습격,파괴해 나갔다. 여기에서 시위군중은 무력의 궁극적 귀결점인 군대와 맞부딪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게엄군이 진주하면서 시위는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군에 대한 군중의 공포 때문이라고 보기보다는 아직 군의 실체가 대중적으로 인식되어 있지 않았고, 시위군중들은 오히려 군인들을 시위군중으로 끌어들이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었다.그러면 한반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미국은 이승만에 대한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이것은 오로지 외세의 지지에 힘입어 존립하고 있던 이승만 정권의 실질적인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계엄령하에서도 시위는 전국에서 끊이지를 않았고 드디어 4월 26일에는 교수들마저도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4월 19일에서 26일에 이르는 기간은 시위의 쟁점이 부정선거와 경찰 발포에서 이승만 정권의 퇴진으로 상승되어 가는 시기이다. 즉, 혁명으로의 전환기였다. 그 과정은 학생을 초기 주도세력으로 하고 점차적으로 도시빈민, 중소상인 , 노동자가 합세해 가는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볼 때 26일에 이르면서 초기의 주도체인 학생세력은 더 이상의 혁명을 중지하려는 경향을 뚜렷히 보이고.
    사회과학| 2000.11.30| 7페이지| 1,000원| 조회(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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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농민운동과 갑신정변 평가A좋아요
    【 Report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의 비교갑신정변조선후기 사회 안의 일각에서는 나라 안의 사회ㆍ경제적 모순을 자각하고 세계 역사 발전의 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정치 세력으로 개화파가 등장하였다.조선후기에는 실학파의 거두인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자본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된 청의 현실을 목격하였고, 안핵사로서 진주민란을, 평안도 감사 시절에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을 직접 겪으면서 문호 개방을 통한 부국 강병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한편 중인 출신의 통역관이던 오경석은 1850년대부터 사신을 따라서 천진, 북경 등지를 드나들면서, 중국에 유입된 새로운 서구 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봉건적 낙후성을 느낀 오경석은 외국에 갈 때마다 자본주의적 문물 제도와 서양의 경험이 쓰여진 책들을 구해와 연구하였다. 이처럼 유일하게 외국 문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인 중국 사절의 통역관으로 여러 차례 중국을 드나들던 오경석은 조선의 봉건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동지인 유흥기에게 자신이 중국에서 들여온 책과 보고들은 것을 전하며 연구할 것을 권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급속히 나아가는 세계의 추세와 조선이 직면하고 있는 봉건적 폐해와 민족의 위기에 공감하고 일대 혁신 방안을 모색하였다.이들이 생각한 일대 혁신이란 조선의 정치적 모순을 깨닫고 문호를 개방하여 세계의 추세에 적응하기 위해 정치적 혁신을 꾀하는 것과 서구의 선진 문화를 도입하여 상공업을 발전시켜 부국 강병을 꾀하는 것이었다. 즉 오경석과 유흥기는 개화 사상의 싹을 틔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머무르지 않고 북촌의 양반 자제들 속에 개화 세력을 부식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일대 혁신'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신사상은 유흥기를 통해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박영교, 서광범 등 북촌의 청년들에게 전수되었다.김옥균을 비롯한 청년 지식인은 박규수, 유흥기의 사상적 영향과 그들에게서 전해 받은 서구 사회에 관한 문명 서적을 통해서 실학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일을 기약하며 체제 안의 개혁운동에 몰두하였다.1884년 3월 청은 대내적으로 왕의 교체로 정국이 혼미한 상태였고 6월에는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의 절반을 철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청의 조선에 대한 일시적 세력 약화로 수구파는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이는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키기에 호재로 작용했다.1884년 5월경 개화파가 급진적인 수단에 의한 정변을 모색하게 된다. 이 시기 개화파와 수구 세력간의 알력은 극에 달하였고, 마침내 개화파는 수구파 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과의 종속 관계를 끊어 내지 않는 한 더 이상의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된다.개화파는 이 호재를 놓치지 않고 개화파의 약세를 일본의 무력을 도움 받아서 정변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김옥균은 청ㆍ불 전쟁으로 청 정부가 조선 내정에 적극 간섭할 수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청ㆍ일 간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군을 이용해 청군을 견제함으로써 수구파 정권을 붕괴시키려 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에서 청과 정면 대결을 벌일 만한 세력을 아직 갖지 못했던 개화파를 돕는 것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청ㆍ불 전쟁의 발발로 일본은 개화파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되었고 개화파의 제안에 동의했다. 일본은 나름대로의 조선에서의 세력확장의 계기로 삼으려는 속셈이 깔려 있던 것이었다.9월 17일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개화파가 요구한 바에 따라 정변 과정에서 일본 군대를 동원해 왕궁을 호위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일본을 이용해 청을 견제하고자 하는 개화파와 정변을 통해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대를 노리는 일본 사이에 일시적인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개화파는 정변개시와 동시에 수구파(민비 세력)의 거두 민태호, 민영익, 조영하 등과 군대 지휘관인 한규직, 이조연, 윤태준 등을 제거한 다음 왕을 그들의 보호 하에 두면서 왕명에 의해 개혁을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이점은 나중에 개화파의 정강 중에 봉건주의 철폐와 배치되는 것이다. 김옥 - 최초의 근대적 개혁으로 평가받는 요인이 되었다.셋째, 봉건적 신분제도의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이는 문벌 폐지, 과거 제도의 폐지, 능력에 따른 인재의 등용을 제시하고 있다.넷째, 해상공국의 혁파, 내외 공채의 모집을 통한 산업, 운수의 발전을 주장하였다. -낡은 봉건적 생산 관계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로의 전환을 제시하고 있다.다섯째, 교육, 군사, 경찰 제도의 근대적 개혁을 주장하였다.이처럼 개화파 정부의 정강은 봉건 제도의 청산, 근대적 개혁, 민족 자주권의 수호를 지향했다. 하지만 정강 중에 봉건제도를 청산을 외치면서 봉건 체제를 떠받치는 봉건적 생산 관계인 지주ㆍ소작 관계의 폐지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개화파의 개혁에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개화파의 정강의 한계는 그 주도 세력이 모두 평민세력이 아닌 양반 사대부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개혁에의 문제점 때문에 개화파의 세력은 민중과의 연합이 아닌 상층부의 개혁으로만 머물렀는지도 모른다.우정국 거사 이후 고종이 창덕궁으로 환궁하기까지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청병의 개입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청군은 창덕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사태파악에만 주력할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이에 갑작스런 개화파의 정변에 놀란 민씨 세력은 서둘러 청군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청군은 개화파 정부가 미처 전열을 정비할 틈을 주지 않고, 10월 19일 1500명의 병력을 동원해 궁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김옥균은 고종에게 인천으로 가서 차후대책을 도모하기를 원했으나 왕은 이를 거절하였고 개화파를 돕겠다던 일본세력인 다케조에 또한 왕궁에서 후퇴하기로 함에 따라 김옥균 등도 할수 없이 일본군과 함께 일본공사관으로 후퇴하였다.이로써 개화파 정권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갑신정변이 실패하게 직접적인 원인은 청의 무력 개입 때문이었다. 청에 대한 사대주의 청산을 내건 개화파의 개혁 내용은 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그리고 갑신정변 근본적인 실패 원인은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온 탐관오리 조병갑은 갖가지 명목으로 힘없는 백성에게 수탈을 자행했다. 대표적 예가 만석보 밑에 필요 없는 저수지 팔왕보를 만들어 수세를 걷어 들여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조병갑의 탐학에 못 견딘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 500명은 음력 1894년 1월 10일 새벽 고부관아를 습격했다.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갔지만 봉기한 농민은 군민을 괴롭힌 아전을 끌어내 죄목을 취조하고 악정의 내력을 엄정하게 처벌하였다. 또 농민의 원성을 쌓은 팔왕보를 허물어 버렸다.그 이후 새로 부임한 고부 군수 박원명의 적극적인 회유책으로 농민군을 설득 스스로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눈치만 보고 들어오지 못했던 안핵사 이용태가 잠잠해지자 들어와서 조병갑의 탐학을 정당화시키고 민란 참가자를 색출, 갖은 횡포를 자행하였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은 다시 무장 손화중 접주를 비롯한 도내의 동학 접주들과 농민들이 3월 21일 백산에서 봉기하게 되었다.이 3월 봉기에서 전봉준은 '제폭구민', '보국안민'을 내세우고 전주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농민군은 전주로 향하던 도중 황토재에서 관군을 맞아 심야 기습전으로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농민군은 정신적 사기를 고양시키게 되었다. 사기가 충천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기세를 몰아 무장, 읍성, 고창, 영광, 함평, 장성 등의 지방 관아를 점령했다.한편 조선 정부는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양호 초토사 홍계훈으로 하여금 경군 800여명을 거느리고 출동하게 했다. 홍계훈의 정부군은 지방 영병과 연합하여 전주 주변의 고지인 완주, 다가산, 사직단 일대에 1500명으로 진을 치고 야포와 기관포로 전주성을 내려다보면서 포격하기 시작했다.창, 대창, 화승총 등의 구식 무기로 무장한 농민군은 홍계훈의 정부군을 무찌르는 방법은 접근전의 방법 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밖으로 나가 고지의 정부군을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정부군의 신예무기 앞에 무수히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농민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의미한다. 일시적이고 국부적인 성공에 도취하여 언약상의 성과만으로 투쟁을 중단하는 것은 과거의 모든 혁명 투쟁을 용두사미로 만들었던 것이다.2차 봉기서울에 입성한 일본군은 내정간섭을 함부로 하였다. 고종왕을 연금하고 민씨 세도가를 몰아냈으며 대원군을 왕의 칙명으로 입궐시켜 친일 개혁 정권을 세웠다. 또 군국기무처를 조직하여 국가의 모든 개혁 사업을 통제했다.그러던 중에 6월 23일 풍도 앞 바다에서 일본군이 청군의 군함을 공격한다. 그들의 제국주 의를 위해 이 땅에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것이 청ㆍ일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급박한 정세는 일본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나라와 민족을 위기로부터 구출하는 것이 조선 민족의 지상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세력은 전주화약을 맺은 후 지방에서 농민통치를 수행하고 있던 농민군이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고 청ㆍ일 전쟁의 위기적인 국면상황이 표면화되자 농민군은 1894년 7월 15일 남원집회를 계기로 농민군을 내부결속과 명령체제를 확립한 다음 전라감사 김학진을 포섭하여 2차 기병을 준비하게 된다. 1894년 9월 12일 동학 농민군은 삼례에 집결하게 된다.그러나 북접 교단은 남접 교단과는 달리 농민봉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차원에서 농민봉기를 원했었다. 북접 교단의 이러한 성격은 북접교단 지도부가 대체로 최하 빈농층 보다는 부농과 준농의 입장을 반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북접 교단은 정부와의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대결보다는 평화적인 국면에서 타협적을 주장했다. 반면 전봉준 등 남접 교단은 서울로 직행하여 봉건정부의 심장부에 강타를 날리려했다.결국 이러한 갈등은 남ㆍ북접이 서로 피를 흘리는 분쟁으로 터지고 말았고 이것은 앞으로의 전투에서의 농민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분열은 중도파의 설득 끝에 극적으로 타협을 이루고 연합하여 서울로 진격하게 되었다. -이러한 남ㆍ북접 간의 분열로 북상 지연은 관군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게되어 혁명의 패인으로 .
    사회과학| 2000.11.22| 7페이지| 1,000원| 조회(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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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포트]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평가A좋아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유홍준 지음 창작비평사 펴냄여행이나 소풍을 갈 때, 산을 오를 때, 그 길에는 반드시 하나 이상의 유물, 유적이 있다. 그만큼 우리 나라에는 문화 유산이 많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일이 많았다. 우리의 문화 유산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여행이나 소풍을 떠나는 즐거움 때문이었을까. 지금은 작은 탑 하나를 만나더라도 나는 그것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나를 붙잡는 것은 탑의 외침, 정확히 말하자면 그 탑을 만든 석공의 마음일 것이다. 문화 유산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문화 유산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과거와 이어질 수 있음이요, 우리가 과거를 살았던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음이다. 내가 문화 유산을 바로 느낄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주고 귀를 뚫어준 것은 친구에게서 빌려온 바로 이 몇 권의 기행문이었다.현실에 찌들어 사는 현대인들 대부분은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여행을 떠난 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날 때의 기분을 그 어디에 비할 것이냐! 그런 여행에 작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여행로 곳곳에 있는 우리의 문화 유산을 찾아보는 일일 것이다. 단순히 문화 유산만을 둘러본다면 따분하기 그지없을 것이고, 단순히 놀러 가는 여행 또한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다. 내가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것은 문화 유산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바램 때문이 아니었을까?책을 읽으면 문화 유산에 대한 소개보다도 자연 경관에 대한 묘사가 더욱 멋지다. 책을 읽다보면 실제로 그곳에 가 있는 느낌이 든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아름다운 들판과 산봉우리들! 그 아름다운 자연 어딘가에 우리 문화 유산들이 숨어 있다. 이 강산과 함께 몇 백년, 몇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문화 유산들은 이미 자연에 동화되어 거부감이 일지 않는다.산 중턱에 서 있는 빌딩은 이상하게 보여도, 산 중턱 계곡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아담한 자태를 뽐내는 산사, 그리고 나무들에 둘러싸인 작은 석탑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보인다. 자연과 문화 유산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자연이 아름다울수록 우리의 문화 유산은 더욱 빛이 나고, 자연이 훼손되면 문화 유산 역시 빛을 잃는다. 우리가 수 천년간 지켜온 이 땅이 곧 우리의 훌륭한 문화 유산인 것이다.그런데 문화 유산을 보호한다고 유물 주위의 모든 것을 밀어내고 울타리로 둘러버린다. 관광로를 뚫는다고 나무를 밀어내고, 산을 깎아 낸다. 가슴 아픈 일이다. 어느 탑이건 울타리로 둘러싸이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절이 건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의 자연을 느끼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책을 읽으면서 나는 정말로 문화 유산에 대해 무지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작은 조각상 하나라도 올바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기본적인 지식과 유물의 내용,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했다. 책에서는 더 나아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이야기, 유물의 의의까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것에 얼마나 무지했던가. 국악보다는 락에 대해서 더 잘 알고, 한복 고름 매는 법은 모르면서도 서양 옷의 패션의 흐름을 더 잘 아는 등, 우리의 문화는 잘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 태도는 우리가 고쳐야 할 태도라 생각한다.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말은 문화 유산에 국한된 말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일들이 '제대로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문화 유산에 대한 공부는 우리의 과거에 대한 공부이다. 우리는 과거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 유산에 대한 공부는 우리의 존재에 관한 탐구일 것이다.유물 앞에 서서, 또는 유적지에 가서 조용히 눈을 감아보면, 외침이 들린다. 과거에서부터 들리는 외침. 문화 유산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과거에 닿을 수 있다. 땀 흘려 서까래를 세우고 절을 짓던 사람들, 정을 들고 모난 돌을 쪼던 석공, 기와 하나에도 정성을 쏟았던 그들.
    독후감/창작| 2000.11.22| 3페이지| 1,000원| 조회(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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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7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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