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1의 해설)1. 기본적인 개요① [가]의 요지② [나]의 요지③ [나]의 비판 - [다]를 근거로 하여④ 나의 주장 - 간단히2. 구체적인 해설① 제시문 [가]는 오토바이 여행과 자동차 여행을 임장감(현장감 정도?)을 기준으로 대비하고 있다. 자동차 여행은 여행자가 테두리 안에 갇힘으로써, TV 화면을 보듯이 타인의 입장에서 수동적인 관찰자로 머물 수밖에 없는 데 반해, 오토바이 여행은 여행자를 현장 그 자체에 존속하도록 함으로써 체험과 직접적인 의식의 동일성이 이루어진다고 얘기한다.② 제시문 [나]는 인간의 몸과 첨단 기계들이 결합하면서, 인간의 감각이 기계를 통해 연장됨을 이야기한다. 이는 나아가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과 기계의 상대화를 초래한다. 이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의 인간의 사이보그화, 사이보그의 인간화로 현실화된다.③ 그러나, [가]의 입장에서 볼 때, [나]의 상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인간의 감각이 기계를 통해 연장될 때 그러한 감각은 이미 현장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따라서 체험과 의식이 분리되고, 이는 ‘유괴알몸토막’, ‘집단자살’ 등의 끔찍한 사건들을 TV를 통해 보고도 ‘눈물이 나오질 않는’ 일상적인 무감각의 상태로 귀결될 뿐이다.④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기계들 속에 둘러쌓여 인간 내면의 감정을 잃어버리고, 파편화되어 가고 있다. 이처럼 기계로 연장된 감각의 삶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전자상가에서 감정 칩을 업그레이드’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사람들 간에 편지가 줄고, 이메일이나 문자메세지가 이를 대체하게 되었듯이 기계의 편리함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감을 줄이고, 각 개인을 원자화하고 있다. 기계의 편리함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대면(face to face)하는 공동체적 삶이 더욱 중요하다.(문제 2의 해설)1. 기본적인 개요① [가]와 [나]의 요지② 공통된 시각③ 시각의 차이④ 나의 주장 - 생략해도 될 듯함.2. 구체적인 해설① 제시문 [가]는 흡연을 함으로써 재계를 하지 못하고 공연히 재물을 소모함으로써, 대현, 부자 등 인간 자신의 일을 이룰 수 없다고 얘기한다. 이에 반해, 제시문 [나]는 흡연가에게 있어 담배란 사르토리가 말하듯이, 곧 그의 삶이며, 존재의 한정적 순간을 이룬다고 말한다.② 일단, [가]와 [나] 공히 흡연자에게 있어 담배가 삶의 일부분을 구성한다는 시각을 견지한다. [가]에서 흡연자는 진리 탐구, 학문, 살림 대신에 흡연을 하는 것이며, [나]에서는 흡연습관을 통해 존재의 한정적 순간을 구성함과 동시에 담배가 곧 삶인 경지에까지 도달한다.③ 그러나, [가]가 부정적 입장에서 흡연이 재계를 하지 못하게 하고 인간이 비로소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바라보는 데에 반해, [나]는 흡연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고 삶이 메마르지 않도록 한다는 긍정적인 입장을 갖는다. 또한 [가]가 담배로 인해 다른 일을 하지 못하는 폐해를 강조한데 반해, [나]는 건강과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담배의 가치를 강조한다.(문제 3의 해설)1. 기본적인 개요① 각 제시문의 요지② 공통점③ 각 제시문의 연관성④ 구체적인 사례⑤ 나의 주장2. 구체적인 해설① 제시문 [가]는 인간이 스스로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듯이 ‘도다리’로 대표되는 일반 사물을 본래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준에 맞춰 나누려고 한다고 말한다. 제시문 [나]는 각 민족은 선과 악에 대한 각기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고 이는 가장 큰 권력이 되며 자신의 관점에서 가치 평가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각 민족은 자신의 가치 평가에 의해 타 민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제시문 [다]는 미국이 ‘그들’과 ‘우리’라는 양극화된 용어로 세계를 바라본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관점은 과거 고립주의에서 지금의 제국주의로 치닫게 했다고 얘기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관점이 공산주의자에서 포괄적 의미의 테러리스트로 변화했다고 한다. 제시문 [라]는 오리엔탈리즘을 서양인 자신이 동양이라는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이해하며, 이는 대비되는 이미지로 서양인 자신을 구성하기도 하고 동양을 상상적 존재가 아닌 현실의 제도, 학문, 식민지적 스타일로 구성하게 하였다고 얘기한다.② 각 제시문은 인간과 언어의 불가분의 관계를 얘기하면서,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규정하고, 또한 언어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 처한 현실을 바라보게 함을 공통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언어로써 남을 바라보고 이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불가능하게 함은 물론 이러한 상호이해의 결핍은 갈등과 대립으로까지 나아가게 한다.③ [가]에서 인간은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언어로 기준을 갖고 ‘도다리’라는 분리될 수 없는 객체를 분리하려는 오류를 범한다. [나]에서는 각 민족마다 선과 악에 대해 규정된 스스로의 언어를 가지고 타 민족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벽이 존재하게 된다. [다]에서는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는 언어로 인해 미국은 공산주의자와 테러리스트를 적으로 분류하게 되며 이는 테러리즘이라는 끝날 수 없는 전쟁을 양산하고 있다. 또한 [라]에서는 서양인의 자기 기준적인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로 인해 서양인 자신만의 고립적인 자아를 형성케 하고, 식민지적 스타일로 동양을 취급하게 한다.
한문문학에서 문학과 성정의 도야에 관해서조선 시대, 성정의 도야는 남효온이 《추강냉화》에서 역설하고 있듯이, 좋은 시의 요건이자 효용으로써 전통적인 문학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서거정의 이나 이이의 에도 이는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조선 초부터 관료층 문인들에 의해 세워진 문학관은 文以載道 라 하여 문학이 도를 담는 그릇이라 하였으나 실상 그 중심은 도가 아닌 문에 치우쳐 있었고, 인재를 등용할 때로 사장의 재질에 따라 요직이 결정되었다. 이는 이후 중종조에 조광조를 필두로 한 신진 도학파 문인들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이들 신진 도학파의 문학관은 以道爲文 으로 문의 독자적 의의를 인정하지 않고 도에 종속되는 것이라 본다. 그만큼 경술과 심성의 수양을 중요시하여, 조광조는 사장위주의 과거제도의 폐단을 지적하며 현량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사장파와 도학파 사이의 논쟁은 무오사화·갑자사화(연산군 10년)을 거쳐 기묘사화(중종 14년·1519)를 통해 극단적으로 가열된 바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논쟁 과정을 통해 도학을 존중하되 사장도 무시할 수 없는 논리가 도출되었고, 사장을 통해 문학의 독자적인 의의를 확립함과 동시에 도학과의 긴장을 유지하는 문학의 자리를 마련하였다.재도론적 문학관은 조선시대의 한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국문문학 장르의 창작 및 평가에도 준거의 틀을 제공했다. 특히 조선 후기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사대부 문학가들은 이 재도관을 심화·발전시켜 나갔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학관은 조선시대 문학의 경향·맥을 형성시키기도 했다. 고려 중엽까지는 불교가 성행했기 때문에 문학과 도학과의 관계는 그리 중시되지 않았다. 고려말 이후 성리학이 대두된 이래,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도학과 문학의 병존을 그 이념으로 하였다. 재도관이 확립된 이후, 조선 후기의 한문학은 산림으 경세파 문학과 실학파 문학이 주요한 맥을 형성하였고 경세의 문학이 주류가 되었던 것이다.구체적으로 조선시대에서 문장과 도의 관계를 논한 문학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김시습의 경우처럼, 문장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문학관을 나타내는 경우이다. 김시습은 그의 시 에서 文章於道未爲尊 이라 하여, 문장이 도에 비해서 높은 것일 수 없다고 보았다. 다른 하나는 문장을 도에 견주어 小技 로 일컬으면서도, 그것이 도를 나타내면 단순히 소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문장의 효용성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문장이 비록 소기이기는 해도 그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내세워 문장을 옹호한다. 서거정이나 김종직이 이에 속한다. 역사적으로 후자의 주장이 우세했다고 볼 수 있으나, 어떻게 보면 이 둘의 입장은 서로 대립적이지는 않다. 공통적으로 문장보다 도를 우위에 두고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고, 그런 상황에서 문장은 도를 담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문학은 성정의 도야에 힘써야 한다는 재도론적 문학관은, 문학의 도덕성·교훈성을 내세우는 강한 목소리였다. 이는 유학자들의 오랜 학풍을 통해 굳어져 온 문학에 대한 일종의 규범이었고, 오랜 세월 문학의 창작과 평가에 깊게 관여해 왔다. 조선 후기에 소설이 기세를 떨치던 상황은 바로 이런 문학관을 긴장시키는 요인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소설이 심성의 수양에 방해가 되고 도덕을 해친다는 논리에 입각한 소설 배격론에는 재도론적 문학관이 분명 핵심적인 논거를 대 주었을 것이다.그러나, 당시 유학자들의 그러한 문학관이 고리타분한 윤리나 도덕에만 얽매여 문학의 발전을 해치는 요소가 되었다는 식의 평가는 좁은 견해일 수 있다. 앞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도를 우선하는 이러한 관점이 문학 행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문학의 본령과 가치, 이상에 대한 물음을 진지하게 던져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문학이 성정의 도야에 힘써야 한다고 보았던 당시 문학관은, 문학의 소재를 윤리나 도덕에 관한 것으로만 한정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생의 길을 보여주는 문학에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이렇게 본다면 조선 후기에 소설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유학자들의 논란은, 기존의 재도론적 문학관과 그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바로 그 문학의 도 에 대한 개념 재정립으로서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참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문학, 성정의 바른 것을 나타내어 성정을 순화하는 문학을 추구해 온 전통적인 문학관은, 조선 후기에 소설의 활성화를 계기로 스스로의 논의의 폭을 심화시킨 셈이다. 사람의 성정을 바로잡을 수 있는, 도에 가까운 글이 결국 소설을 긍정하게 되는 몇몇의 예가 되었고 이후의 소설사를 이끌어내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몽유록 은 소설인가? 아닌가?몽유록(夢遊綠)이란 몽유의 형상을 빌려서 구성된 소설이다. 주인공이 우연히 날개를 얻어 이계(異界)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체험을 한 끝에 현실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난다. 결국, 이계에서의 체험이 본 줄거리가 된다. 이계에 들어가기 이전과 돌아온 이후는 내용 전개를 위한 도입부와 결말에 해당하며 주인공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의 시공(時空)이다. 이계는 비일상적인 몽유의 시공이다. 이계는 공간적으로는 천상·지상·지하·수중·기타가 되며, 시간적으로는 과거·현재·미래 또는 무시간(無時間)의 세계가 된다. 구성에 따라서 이계 체험을 처음부터 분명한 꿈 형상으로 설정하는가 하면 당초에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못하게 하였다가 이계 체험이 끝남과 동시에 꿈을 깨는 것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우리 문학사상 몽유 형상은 몽유록 계통이 출현하기 이전에 벌써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고대설화에서부터 시작하여 시가, 수필, 고전소설, 그리고 현대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태로 표현된다. 이처럼 꿈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일시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학사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나타난다.꿈은 인간의 억압된 잠재의식을 표출하는 장치로써 작품 속에서 소외된 지식인의 욕구를 분출하기 위한 양식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조선조는 봉건사회의 체계적 폐쇄 현상을 꿈을 통해 자아 욕구를 분출시키고 있는 몽유록이 성행하였다. 몽유록은 조선의 사대부들에 의해 성립되고 향유된 바 있는 하나의 역사적 장르이다. 내용의 공통적 특질은 '오래 전에 죽은 인물들의 망령을 꿈속에서 만나 기이한 일을 체험하다가 꿈에서 깨는 이야기'로 집약될 수 있다. 몽유록은 조선 전기에 있어 집권세력과 사림과의 충돌, 당쟁의 발화, 양란을 겪으면서 정치적·사회적·사상적 모순과 균열의 틈바구니에서 일정한 계층(소외된 사대부)의 의식을 대변하며 등장한 양식이다.몽유록에서는 꿈과 현실의 두 중심 축이 대립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현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꿈이라는 형식을 빌어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즉, 꿈과 현실, 불만 충족 또는 이상실현과 사회불만이라는 이중적 대립을 통해 현실을 재구성함으로써 현실에서 부딪치는 모순과 그에 따른 사회불만을 극복하고 있다.이러한 대립관계는 몽중세계의 '만남'을 통하여 작가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만남'은 울분토로나 자탄 그리고 이상세계 지향의 의식표출로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써 사회계층간의 대립과 갈등을 자연스럽게 표면화하고 있다. 즉 '만남'의 공간적 배경은 소설 구성에서 단순한 만남의 장소가 아니라 작품에서 사건의 대립과 갈등 양상이 전개되는 공간적 배경이며, 계층간의 대립과 갈등을 야기하고 해소하는 장소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만남'의 장소는 토론의 장소이며, 토론은 등장인물 상호간의 갈등이 표출되는 방식으로 설정되어 있다. 토론양상은 이념적 성격의 토론, 인물평으로 전개되는 토론, 호소의 양상을 띠는 토론이 있다. 이념적 토론은 역사적 현실과 유교적 이념사이의 모순에 대한 인식에서 기인된 것으로 몽유록 작가 층의 의식 규명에 중요한 단서가 되며, 인물평 중심의 토론은 사서를 통해 역사지식을 얻은 사대부들의 희필적(戱筆的)인 성격을 반영하고, 등장인물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토론은 다른 토론에 비해 훨씬 절실하고 격정적이며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토론 양상은 현실과 이상의 모순을 실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등장시켜서 작가 의식을 표출한다. 이러한 토론식 내용전개는 현실을 비판하거나 이상을 표출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역사적 사건을 그 소재로 하고 있으며, 그 본질적인 갈등은 등장인물의 의식과 역사적 사실과의 갈등에 있다.몽유록 서술 구조에서 시연은 그 바로 전의 토론에서 야기된 갈등을 등장 인물 각자의 내면 속으로 침잠 시키는 것, 곧 갈등의 내면화 과정이 응집된 것이다. 몽유록 작가들은 등장인물들이 읊는 시속에 그 등장 인물들의 역사적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몽유록은 작가의 현실세계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가공의 세계에서 몽유자의 사회적 의식을 표출함으로써 현실세계에서 경험한 소외와 좌절을 몽중 세계에서 의식적으로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으며, 더 나아가 정신적인 활동을 해소시켜주는 보상심리의 기능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몽유록에서 꿈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갈등과 이상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며 수단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직접적으로 사회에 대한 항거를 할 수 없었던 사회에서 꿈장치라는 우의적인 수법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작가의 세계관이 나타난다. 몽유록은 표면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부정에서 벗어나 꿈이라는 내부 세계로 들어가 버림으로써 사회와 현실세계로부터 단절되는 양상을 가져오는 듯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억압된 현실상황에서 기인한 것으로, 그 이면에는 현실에 대한 저항과 현실비판의식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몽유록 소설은 작가의 현실 인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이러한 몽유록의 장르적 성격에 대해서, 조동일은 (가사의 장르 규정-한국어문학회 2권, 어문학, 1969 pp.55~86)에서 몽유록은 교술 장르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교술의 교는 알려주어서 주장한다는 뜻이고 술은 어떤 사실이나 경험을 서술한다는 뜻이라고 조동일은 언급하면서 그 특징으로 있었던 일을 확장적 문체로, 일회적으로, 평면적으로 서술해 알려 주어서 주장한다 는 점을 들고 있다.또한 몽유록을 소설 장르로 다루기에는 미흡하다고 보는 견해로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몽유록은 스토리의 인과적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몽유록은 역사적 실제 사건이나 실존인물에 관한 지식의 토대 위에 성립된 문학으로 이러한 지식의 전달과 비판의 성격은 서사 장르가 아닌 교술 장르의 특성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서대석도 (몽유록의 장르적 성격과 문학사적인 의의-한국학논집(3), 계명대 한국학연구소, 1975)에서 역시 교술 장르설에 동의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몽유록에서는 등장인물의 성격이 구현되지 못하고 있으며, 인물의 의식을 통한 갈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몽유록에서의 갈등은 작품외적인 역사적 현실과 몽중 인물의 의식과의 대립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품외적인 사실이 생략되어 있기에 갈등은 지속적인 전개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몽유록의 내용은 서사성이 약하다.또한 몽유록에 등장하는 인물은 거의가 역사적으로 실제 생존하던 인물이고, 그 생존 사실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들의 행위는 그들이 생존시에 활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인물은 작자가 창조한 완전한 허구적 인물이다. 따라서 독자는 몽유록의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외적인 역사적 지식은 필요로 하나 소설 속의 인물은 작품자체로서 충분히 이해된다. 이런 점은 몽유록이 소설과는 다른 하나의 증거가 된다고 본다.몽유록에서 몽중 사건의 구성은 인과적으로 짜여있지 않다. 원생몽유록에서 단종과 사육신이 차례로 읊는 시는 순서를 어떻게 바꾸어도 전체 의미에는 별로 달라질 게 없으며, 강도몽유록에서도 부인망령들의 대화 순서가 달라지더라도 작품의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뚜렷하지 않고 사건과 사건이 연결되지 않으면 그 글이 서사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몽유록은 서사성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몽유록의 몽중 사건은 역사적 사실의 토대 위에서 구성된다. 작품외적인 지식에 의하여 작품이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몽유록에서 독자는 소설에서와는 달리 허구를 통한 감동이 아닌 사실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된다. 이런 점에서도 몽유록은 소설과는 다른 장르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이에 반해 유종국은 몽유록 소설 연구 (유종국, 몽유록의 양식적(樣式的) 성격 , 아세아 문화사, 1987)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서대석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작품으로 피생 , 강도 , 대관제 , 금화사 를 들고 있으나, 그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역사적 사실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작품 안빙 , 사수 , 부벽 , 금생 에 대해서도 그 같은 해석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안빙 과 부벽 에 등장하는 몽중 주도적 인물들은 그들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지 아닌지 조차 구분할 수 없다. 사수 와 금생 에 등장하는 인물이 비록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고 하나 이야기의 주제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사건적 소재가 전혀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이 문제시되어 주제로 표출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결코 사실의 의를 해석,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아니하다. 이를테면 원생 은 세조의 왕위찬탈이라고 하는 사건으로부터 알 수 있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이미 이러한 사건과 사건의 의미는 항간에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그것만을 전달하기 위해서 소설형식으로 재론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세조와 그 추종자들을 비판하고 단종과 사육신을 추모 동정하여 울적하고 비분한 심회를 토로할 것일 뿐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 조신전 비교-서사, 허구, 사실의 상관 관계를 중심으로《삼국사기》는 인종 23년(1145)에 편찬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이다. 왕명에 따라 김부식을 책임편찬관으로 하고 최산보·이온문 등 8명의 참고(參考)와 정습명 등 3명의 관구(管句)를 비롯해 11명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또한 《삼국사기》는 신이한 설화형태로 전승되던 고대 사료를 분해해서 개서(改書)하여 기록하였으며, 김부식을 비롯한 편사관들은 술이부작(述而不作) 의 객관적 서술자세를 취하였다.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들이 당시 학자들에 의해 고증을 거친 것이며, 국가 차원에서 검증된 것임을 말해준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도 삼국사기를 국사(國史) 또는 본사(本史) 등으로 부르는 것을 볼 때 삼국사기를 정사(正史)로 인식하고 있었다.반면 《삼국유사》는 그 이름부터 유사(遺事)인데, 유사란 사가의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 표현한 것을 말한다. 즉, 삼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의 이야기들을 엮어 놓은 역사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삼국유사》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수는 없으나 완전한 형태의 사서(史書)로 보기 또한 힘들다. 《삼국유사》에는 민간 전승 사료들을 기록해 놓았으며, 신이한 설화들을 그대로 제시하였는데, 물론 일연은 설화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서 파악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이 내포하는 상징적 의미를 파악하려는 의도에서였다.따라서, 《삼국사기》 권 14 2 대무신왕조에 실려있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나 《삼국유사》 권 3에 실려있는 "조신전" 이야기는 모두 역사서술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실려있는 형태로만 본다면 그 모습 또한 현재의 소설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서사의 양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문학적 수식이나 체계적인 사건 전개의 양상을 따져보기 힘들며 단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서사 양식을 역사적 제재로만 취급하기에는 그 또한 문제가 있다. 술이부작의 원칙으로 객관적 역사만을 기록하려 했다는 《삼국사기》에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여러 가지 허구적·비현실적 요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적병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냈다는 북과 나팔은 현대적 사고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분명 그 당시에는 세계를 이해하는 다른 문화적 코드가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객관적 역사만을 다루려 했다는 정사에서 신이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당시에 적병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북과 나팔이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그것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거나 혹은 그 당시의 문화적 코드를 바탕으로 접근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서사의 양식을 빌어 쓰여진 사실에 이처럼 허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역사와 문학이라는 세상을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구별해 낼 수 없도록 만든다. 서사의 양식을 공유하며 사실과 허구라는 서로 다른 서술 방법을 보이는 것으로 보통 이해되는 역사와 문학의 차이는 이처럼 때로는 하나로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그러나 때로는 배타적으로 보이는 사실과 허구라는 두 가지 코드가 이렇게 하나로 결합되어 있을 때 본질적 목표인 역사적 진실, 삶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아직 분화되지 않았던 시기의 서사 양식으로부터 우리는 삶의 진실이라는 본질적 목표에 보다 가깝게 생각을 진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사실이냐 허구냐의 문제를 따지는 것은 요원하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여 그것이 진실이나 실체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역사적 사실도 기록자의 주관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신전 에서 꿈에 나온 내용이라 하여 무조건 허구라고 할 수도 없다. 조신 부부가 유리걸식하는 모습은 당시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실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사건 혹은 내용 자체가 과연 사실이냐 허구냐가 아니라 그것이 사실로 기술되었느냐, 허구로 기술되었느냐 가 문제다.작자의 의도나 목적에 따라 기술 방법은 설명, 서사, 논증, 묘사 등이 있을 수 있다. 이중에서 설명은 독자의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기술 방법으로, 주제나 제재를 해석하고 이유와 의의 등을 쉽게 밝혀서 기술한다. 역사적 기록은 이 서술 방식을 택한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의 이야기를 전할 때, 그 목적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정보 혹은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다. 여기에 덧붙여 편찬자는 논평하여 말한다. 이하는 전술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평가가 이루어지는 부분으로 논증의 방법으로 기술되었다. 논증은 어떤 견해나 진실여부를 명백하게 하고 나아가 작가가 증명한 대로 독자가 믿고 행동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여기서는 고사를 들어 증명하고 있다. 논평이 역사적 사실과 엄격히 구분되어 쓰인 것은 그만큼 역사적 사실을 기록할 때 객관성을 중시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고 따라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와 같은 경우는 사실로 기록되는 것 에 초점이 맞추어진 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 조신전 의 경우도 사실을 기록하는 것 을 위주로 하는 기록물이다. 조신전 은 구성상 서두부-행적부-결말부-논찬부로 전개되는 전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내용의 사실성 추구, 기록성과 교훈성 부각, 설명과 논증 위주의 기술 등을 갖추고 있어 전 양식에 부합하는 작품이다. 조신전 의 내용과 구조가 허구적인데도, 우곡현 이나 세달사(세규사) 등의 실제 지명을 등장시키고, 민담에서 증거물 역할을 하듯 돌미륵이 출현하는 점은 내용의 사실성 추구와 일맥상통한다.서사란 결국 단순한 사건의 흐름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즉 사건을 나열하는 그 과정에서 사건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가 스스로 창출되고 또한 독자로 하여금 그러한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하여 재구성의 기회를 가지게 함으로써 그들 나름대로의 의미가 창출되도록 하는 일련의 작업이 서사라는 개념에 녹아들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실과 허구라는 두 요소는 이러한 서사적 글 쓰기의 지향점을 획득하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시점을 방법으로 소설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가소설과 마찬가지로 우리네 삶에서도 누군가의 시각인지, 그리고 그 시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중요한 문제이며, 오래 전부터 철학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예를 들어, 역지사지(易地思之) 나 동상이몽(同床異夢) 이란 말에서 보듯이 같은 사건이나 상황이라 해도 그것을 보는 관점과 시각에 따라 그 해석과 전개 양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실생활 속에서의 시각과 관점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학문 분야에서도 무엇을 기준으로 바라보는가는 그 결과를 충분히 뒤바꾸어 놀 수 있는 충분조건이다. 과학에서 패러다임이란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객관적인 사실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이라는 학문 분야에서도 시각이나 관점은 세세한 사항은 물론 전체적인 체계를 뒤바꾸어 놓을 수 있다.남의 얘기, 곧 크게는 우리가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에서 이러한 개념을 통합하는 시점 이란 용어는, 그래서 놓치기 쉽지만 반듯이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어떠한 소설이 어떠한 시점을 적용하여 쓰여졌느냐에 따라 그 소설의 전개 양상은 매우 판이하게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역사는, 그 허구성과 사실성의 개념을 제외하면 많은 부분에서 소설과 일치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당시의 현 주소를 세밀히 기록하고 진실화 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역사와 소설은 같은 맥락 위에 놓여져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역사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사실성을 그 기반으로 하는 역사 서술도 시대가 감에 따라 계속해서 재평가되고 재해석되며 그것의 가치는 비록 같은 사건일지라도 매우 상이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많이 있어왔던 사실이다.물론, 소설 속에서의 허구적인 사건이 다시 패러디되지 않는다면 재해석되거나 재평가되는 일은 없다. 그 소설 속에 놓여져 있는 시점은 작가에 의해 한 번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나며 그것이 바뀌어서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이렇게 한 번 이루어진 시점이 그 소설 속의 사건과 또한 전체적으로 소설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시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소설을 연구하는 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점은 그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을 결정하며 그 분위기와 전체적인 맥락을 이어놓는 독자의 창이 되기 때문이다.시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할 때, 소설의 가치를 결정하는 진정 중요한 요소는 그 사건 구조와 전개 양상, 그리고 인물의 설정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다른 요건들에 앞서 소설을 읽는 사람에게 시점의 중요성을 다시 살펴봐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당위론적인 입장보다는 현상학적으로 소설이 독자에게 다가오는 방법을 이해할 때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소설이란 무릇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소설책 속의 화자가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나갈 때, 독자는 화자의 말을 따라 상상력으로 그 맥락을 구성해 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설이 극예술이나 영화 등의 장르와 가장 눈에 띄게 구별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장치의 존재가 단순히 보여주는 것을 떠나서 더욱 더 보는 이에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단순히 보여주는 것으로서는, 그것이 비록 더욱 실제적으로 다가오기는 하지만, 그것을 보는 이의 생각을 쉽게 지배할 수는 없다. 보여줄 제재를 선택하고 그 안의 사건을 구성자의 마음대로 만들어 놓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보는 이의 시각마저도 쉽게 통제할 수는 없게 된다. 예를 들어, 같은 제재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소설 춘향전 과 영화 춘향전 은 시점면에서 서로 판이하다. 영화 춘향전 에는 작가의 의도는 있을지언정 그와는 별 관련이 없이 많은 시점이 존재한다. 관람객은 단순히 그 영화를 볼뿐이며 그 내면 안에서 구성하는 방법까지는 결정지을 수 없다. 만약에 한국의 문화를 잘 모르는 외국인이 영화 춘향전 을 본다고 할 때 그것을 바라보는 눈은 분명 보통의 한국인이 바라보는 눈과 많이 다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