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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16세기 재지사족의 성장과 농업의 발전
    16세기 재지사족의 성장과 농업의 발전목차1. 머리말2. 재지사족의 성장과 농장(1) 사족층의 성장과 지주제와의 관련성(2) 16세기 農庄과 地主制1) 농장형성과 노비증식2) 主家?奴家?土地의 結合3) 농장의 관리(3) 16~17세기 農庄經營形態1) 奴婢의 小經營과 作介制① 作介事例 現況② 作介의 分定③ 作介의 收取2) 主家의 小經營과 家作制3) 非隸屬人과 ?作制(4) 17세기 農庄經營의 解體3. 농업의 발달 (이태진의 주장과 그에 대한 반론을 중심으로)(1) 수리시설의 발달(2) 저평지의 개간(3) 이태진의 주장의 배경과 문제점4. 맺음말참고문헌1. 머리말조선초기와는 달리 16세기 조선사회는 국가재정의 만성적 적자, 국역체제의 해체, 공민 ? 공전의 감소, ‘양소천다’ 현상의 발생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국가운영이 매우 어려워진 시기였다. 공적 영역의 붕괴는 그 구조의 최상위에 위치한 국가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 국역체제의 해체가 본격화하는 1520년대 후반부터는 공적 혹은 사적 영역을 조절 ? 통제하는 국가 고유의 기능이 상실되기에 이르렀다.이 시기에는 중앙의 권력자 혹은 관료층 같은 지배세력 이외에도 ‘사족’이라 칭하는 지방에서 성장하고 있는 새로운 계층이 존재했다. 이들은 이미 조선 초기 유향소 존폐과정에서 지방행정의 주도권, 곧 향권을 둘러싸고 국가와 대립하고 있었으며, 16세기 중반 이후 향안작성, 서원건립, 향약 시행 등 자치기구의 설치와 운영으로 기반을 확대하고 있었다.이 시기 사족층의 성장은 당시 사회상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국가재정의 만성적 적자상태, 국역체제의 해체, ‘양소천다’ 현상과 같은 공적 영역에서의 급격한 변화가 16세기 이래 사회구조로 정착되면서 사족층도 이러한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 대부분은 해체되어가는 국가의 전반적인 구조를 그들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본 발표문에서는 16세기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합류하게 된 사족층의 성장과정을 경제적 분야와 연관 지동심원꼴로 이해하였다.) 內圓은 농장주 자영의 노예제 경영, 外圓은 병작의 봉건적 경리였다고 한다. 농장구조를 두개의 동심원이 중첩된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1980년대 이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이들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먼저 농장경영의 중심이 내원에 있었다는 견해로 이호철은 16세기까지도 농장에서는 노비를 동원하여 경작하던 경작지가 병작지보다 많았다고 밝혔고, 이영훈은 16세기 농장의 구조를 주가와 노가, 전답의 복합적인 상호관계에 입각하여 해명한 뒤, 농장경영의 중심은 노비들이 경작하던 직영지에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이 연구는 규모면에서는 직영지가 병작지에 비해서 적지만 수입면에서는 직영지의 수입이 병작지의 그것에 비해 그다지 적지 않았다는 분석)과 맥락을 같이 한다. 따라서 16세기말까지도 병작은 미미한 위치에 놓여있었고 조선 전기의 농장은 주로 자기 경리를 가진 노비들의 부역노동을 통하여 경작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전장원적인 농장경영은 점차 노동집약적인 농법혁신, 직영지적 부역노동의 비효율성, 그리고 노비의 대규모적 도망 때문에 16세기 말부터 점차 해체되고 있었다는 것이다.이들 연구의 두드러진 성과는 分財記라는 고문서를 연구에 동원함으로써 기존 연구의취약점을 극복하고 16세기 농장경영 내에서 노비를 동원한 경작형태가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음을 밝힌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재기가 농업경영문서가 아닌 상속되는 재산의 틀을 정확하게 기록하는데 목적이 있는 상속문서라는 점을 과소평가하거나 또는 간과한 상태에서 이를 해석함에 있어서 부분적인 착오를 드러내었고) 농장경영 내에서 직영지가 차지하는 비중을 과대평가한 점에서 한계를 안고 있다.다음은 안승준의 농장경영의 중심이 외원에 있었다는 견해이다. 이 연구는 作介地와 私耕地에 주목하였다. 지주는 노비에게 작개지와 더불어 사경지를 분급하고, 노비는 자신에게 분급된 전 토지를 가족 노동력에 의거하여 경작하였다는 연구가 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작개지에서는 수확량의 ½에 해의 노비증식은 기존 노비의 출생에 의한 자연증가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상당수의 노비가 양민과 결혼하는 양천교혼소생 노비의 수도 증가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킴으로써 一賤則賤 이 적용되던 16세기에 노비를 급격히 증가시킬 수 있었다. 재지사족은 매득을 통하여서도 노비를 증식시켜 나갔으나 보유 노비 중 매득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2) 主家?奴家?土地의 結合주가?노가 ?전답이 어우러진 농장의 구조는 16세기 분재기를 통하여 엿볼 수 있는데 농장의 典型은 거대한 주가를 중심으로 10여채의 노가가 자리잡고, 하천이나 계곡의 물을 이용하여 쉽게 관개할 수 있는 곳을 따라 전답이 소규모 단위로 분산배치된 형태였다. 당시의 지주들은 이러한 구조를 갖는 농장을 여러 지역에 걸쳐 다수 보유하였다. 그 원인은 첫째, 그들은 개간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둘째, 다수의 지주들은 妻鄕?外鄕?師友關係를 따라 이주하거나, 개간을 위해 세거지를 떠나 他鄕에 卜居했다. 셋째, 자녀균분상속에 따라 원처에 소재한 처향?외향의 농장을 상속받는 경우가 많았다.3) 농장의 관리지주들은 농장의 위치에 따라 관리 형태를 달리하였다. 近處 農庄은 지주가 직접 관리하고, 遠處 農庄은 그곳에 거주하는 대리인을 통하여 관리하였다.지주는 舍音 등의 대리인에게 한 농장내의 농업경영 전반을 주관하는 권한을 위임했다. 『治家法制』의 안사신의 경우를 보면 그는 사음노에게 주인을 대신하여 戶內의 부역과 노비와 관계되는 모든 일 및 농사를 잘 검속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또한 안사신은 마름노와 농장에 거주하는 노비들간의 관계를 마치 주인과 노비의 구분과 흡사한 상하관계로 설정하고 있었다. 이같이 마름노의 권위를 강화시킨 이유도 농사전반을 좀 더 효과적으로 감독하기 위해서였다고 여겨지며 안씨는 마름노에게 舍音奴位라는 토지를 준 사실도 보인다. 그러나 농장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사음노의 처벌규정도 마련되어 있었다.16세기에는 농장의 관리 상태에 따라 지주들이 농장에서 사신은 모든 작개답에 대하여는 수취물의 종류를 지정하고 있으나 사경답에서의 수취물의 종류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경은 노비 보유자가 수확물의 전부를 직접적 경작자인 노비로 하여금 가지게 하는 토지였음을 알 수 있다.이상과 같이 작개와 사경의 성격을 이해할 때 16세기 농장경영에서 작개제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6세기의 작개제란 지주가 노비에게 작개지와 사경지를 짝지어 나누어 주고, 노비는 이것을 가족 노동력에 의거하여 경작하는 농장경영 방식이었다. 그리고 지주는 작개지 수확물의 거의 전량을 수취했고, 노비들의 사경지의 수확물을 차지했다.2) 主家의 小經營과 家作制16세기 지주들이 행하고 있던 가작)도 ‘병작제 이외의 다른 방법’이다. 가작제란 지주가 직접 노비 등의 예속인을 동원하여 농사를 짓는 경영형태를 의미한다.가작제는 주로 근처 농장의 전답에서 시행되었다. 원처 농장에서 가작제가 적극적으로 시행되지 않은 까닭은 起耕에서 타작에 이르는 모든 작업과정을 지주가 직접 관리하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하여 농작업이 지주의 주관하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 년 농사에 대한 책임을 노비들에게 추궁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작제하에서는 노비들의 태업을 방지하는 장치가 미흡했던 것이다. 근처 농장만을 보유한 지주의 농장경영은 그 중심이 가작에 있었지만. 근처 농장에 더하여 다수의 원처 농장도 보유하고 있던 지주의 농장경영은 그 중심이 작개와 병작에 있었다.3) 非隸屬人과 ?作制병작은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15세기 초에도 이미 농장경영내에 상존해 있었다. 민전에서는 노비와 같은 예속노동력이 부족하거나, 지주가 자경능력을 상실했을 때 병작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15세기의 병작제는 가작? 작개제를 보조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먼저 예속노동력이 부족할 때 발생하는 병작의 사례를 보면 이 경우 병작을 행하는 주체는 품관, 향리 등과 같은 부강인들이었다. 정부는 부역이 불균등해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 품관?향리들이 流移者들을 불러 모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조선 중기 농업생산력의 발달로서 지주들은 병작을 통해서도 곡물을 안정적으로 수취할 수 있게 되었다.3. 농업의 발달 (이태진의 주장과 그에 대한 반론을 중심으로)(1) 수리시설의 발달※ 이태진의 주장조선 초기의 수리기술 및 수리시설은 국가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진지역인 경상도에서조차 전체 수전 중에 관개답이 20% 미만이었다. 이런 수리조건은 이앙법을 기피하고 직파법이 발달한 근본 원인이었다. 14세기 이래 수전농업은 산곡간 주변에 한정해 개발되던 종래의 여건에서 벗어나 광활한 저평지로 이동하는 대변동을 치르고 있었다. 한반도처럼 산곡계류가 많은 자연조건 아래서는 산곡간 계류를 관개수로 활용하는 堤堰이 먼저 발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개간된 수전들이 주변의 하천수를 관개수로 활용하지 못하는 한, 천수답 상태를 면치 못하게 된다. 이러한 제약을 타개하기 위해 도입되었던 것이 水車와 천방인데, 수차는 세종대에 시험해보았으나 한반도의 자연적 특성 때문에 결국 실패하였다.사림 계열의 성장과 관련지을 수 있는 매우 주목되는 농업현상의 하나는 전통적 수리시설인 堤堰 이외에 川防, 즉 洑의 설치와 활용이 본격화하였다는 것이다. 천방에 관한 본격적 권장은 15세기 초 문종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작은 溪流를 부분적으로 막아 수전에 관개하는 소규모 천방의 경우는 아마도 고대로부터 관행되었을 것이며, 특히 15세기 이래 低平地로의 농지개간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이 같은 천방의 가능성과 유용성이 전제되고 있었을 것이다.우리나라의 역대 수리정책으로는 제언이 항상 중심적인 것으로 거론되어 왔으나, 15세기 후반으로부터는 천방이 보다 우위인 것으로 널리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종래 사용하지 못하던 하천수를 끌어다 활용하는 것이므로 제언의 경우에 비하여 쓸 수 있는 곳을 훨씬 더 많이 개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회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종래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던 대규모 관개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천방은 현지의 실정에 정통하며 이해관계가 절실한 현지인들에 의였다.
    인문/어학| 2006.04.30| 14페이지| 1,500원| 조회(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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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이사르 평가A좋아요
    공화정 말기의 시대상황 (포에니 전쟁 이후)로마는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게 되자, 이후 로마는 국력이 급격히 상승하여 사회의 여러분야에 걸쳐 구조적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권력의 집중, 부익부 빈익빈의 신분의 양극화가 급격히 이루어져서 BC 3 경에는 자영농이 몰락하고 라티푼디움이 발전하여 평민은 억압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따라서 평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이 시도되었다. 티베리우스 그락쿠스는 B.C. 133년 호민관으로 선출되자 이미 공문화된 리키니우스 법을 부활하여 귀족의 대토지 사유화를 억제하고 그들의 땅을 무산자들에게 분배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귀족들의 강렬한 반대에 봉착하여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형이 죽은지 10년 후 아우 가이우스 그락쿠스는 B.C. 123년 호민관으로 선출되어 다시 형의 유지를 관철하려고 하였다. 그는 빈민들에게 시장가격보다 싸게 곡물을 판매하고 카르타고의 식민지에 그들을 이주시키려고 하여 많은 사회계층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역시 귀족층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자 가이우스는 B.C. 121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그락쿠스의 개혁이 수포로 돌아간 후 로마사회는 몇몇의 계층들 사이에의 갈등을 겪게 되었다. 죽 원로원을 중심으로 지배계층을 대표하는 옵티마테스와 인민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포퓨러레스, 그리고 새로운 신흥계층인 에퀴테스가 대립하였는데, 이들은 다시 옵티마테스와 나머지 두 집단들의 합세로 옵티마테스와 포퓰러테스로 갈라져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유혈사테를 빚어냈다. 그리하여 로마 정치의 중추였던 원로원은 더 이상 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되었다. 특히 B.C. 2-1 세기 동안 로마는 정치적 공백 그대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은 군부지배계층의 발호였으며 여기에 벌족파와 인민파의 대립이 가세하여 로마정국은 난세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었다. 군벌들은 주로 용병제로서 사병을 모집하여 직업군인제도를 정착화함으로써 그들의 권 있는 대안으로 등장했다. 재산을 몰수당한 농민들은 대다수가 군대에 들어가 장기복무를 했으므로 이들의 지지야말로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귀족들 사이의 경쟁은 공직과 거기에 따른 이권을 얻기 위한 필사적인 경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집안은 이 경쟁에 적극 참여한 것 같지는 않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삼촌인 섹스투스 카이사르와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이었으며,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BC 64년에 콘술을 지낸 정도이다. BC90년에 로마가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로마 정부가 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자 로마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러자 당시 콘술이던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 대해 무기를 들지 않았거나 로마에 다시 충성을 맹세한 모든 이탈리아 동맹시의 시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긴급 법령을 도입했다.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집안이 로마의 귀족이면서도 반귀족파의 입장에 섰다는 것을 증명해준다.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난 날짜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태어난 날은 7월 12일 또는 13일이고,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연대는 BC100년이다. 그러나 이 날짜가 정확하다면, 카이사르는 법률로 정해진 최소한의 공직 취득 나이가 되기 2년 전에 몇 개의 공직을 맡은 것이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카이사르가 16세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훌륭한 여성이었다. 그는 어머니한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BC 84년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혁명에 참여한 귀족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함으로써 공공연히 급진파의 입장에 섰다. BC83년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동방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와 BC 83~82 년의 반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그후 카이사르에게 코르넬리아와 이혼할 것을 요구했다. 카이사르는 이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재산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떠나 군대에 복무하는 얻었다.그는 또한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를 토벌하기 위해 동방으로 진출하여 그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시리아와 유다도 정복하였다. 그는 기원전 62년에 막대한 전리품을 갖고 로마로 귀국하여 로마인들로부터 혁혁한 무공을 인정받았다.이 시대에 카이사르도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명문 출신의 카이사르는 민중을 위해 구경 거리를 많이 제공함으로서 그들의 인기를 모아갔다. 사려깊은 카이사르는 처음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다름 사람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그는 카틸리네의 음모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는 카틸리네의 음모가 물거품처럼 사라지자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와 함께 공화제를 타도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제 1차 삼두정치기원전 60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수스 사이에 카이사르를 맹주로 하는 비밀 동맹이 체결되었다. 이 동맹은 권력을 탈취하여 세 사람이 그 권력을 나눠갖는 이른바 삼두정치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삼두정치는 군사독재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카이사르를 집정관에 당선시키기 위하여 막강한 영향력과 재력을 동원하였다. 카이사르는 권력을 장악한 후 폼페이우스의 군인들에게는 약속된 토지를 그리고 크라수스에게는 토지분배에 필수적인 토지전매권을 제공하였다.이렇게 해서 키케로가 갈구하던 그 유명한 "조화로운 질서"즉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 계층간의 동맹관계가 파기되었다. 상층 부르주아는 쿠라수스와 품페이우스를 자신의 합법적인 대표자로 간주하면서도, 카이사르의 민중세력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귀족들은 어리석고 교만한 마음으로 아무런 도움도 원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특권을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서 고립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취지에서 귀족들은 당시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를 자신들의 대표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카이사르의 선출은 확고한 것이었다.카이사르를 동맹세력들이 내세운 조건들은 모두 이행하였다. 당선 직후, 카이사르졌을 때 폼페이아의 관련 여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혼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폽페이아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법관들이 카이사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자, 그는 "카이사르의 부인은 한점의 의혹도 없어야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는 자신의 여동생이자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케르의 부인-카툴루스는 그녀를 레스비아라고 불렀다.-으로서 키케로에 의해서 심한 비난을 받았던 클로디아를 클로디우스가 유혹하였다고 세상 사람들이 떠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제로 그럴만한 위인이 못된다고 증언하였다. 이번에도 키케로는 클로디우스를 맹렬하게 공격하였지만, 카이사르는 크라수스를 통해서 판사들을 매수하였다. 클로디우스는 무죄로 석방되었다.카이사르가 자신의 부인에게 불명예를 안겨준 클로디우스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이유는 평민 호민관에 출마한 그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장인과 친한 친구를 집정관으로 선출되게 함으로서 무산계층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사실 부인의 명예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에 클로디우스는 더 이상 가치가 없어진 폼페이아와 결별하고, 인척관계를 통해서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다른 여성과 혼인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와 니르보넨시스 지역을 통치하는 5년 임기의 속주총독에 임명되었다. 로마법에 따르면 아펜디노 산맥의 이북지역에 대한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반도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군림하게 되어 있었다, 카이사르는 반도의 주인이 되려는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카이사르는 원로원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자신이 제출한 법안에 대한 승인을 켄투리아회로부터 직접 받아냄으로서 원로원의 승인 없이도 통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실제로도 카이사르는 점차 독자적인 정책을 한층 강화하였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논의되는 모든 사항들을 정권을 한 손에 지고 싶었지만 카이사르에게는 아직도 어려운 일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게르만 인들을 내쫓는 일이었다. 이들 게르만 인들은 갈리안 인들보다 억세고 싸움을 잘하는 민족이었다.카이사르가 이들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애써 정복한 갈리아를 빼앗기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이룩해 놓은 그의 정치적 기반이 물거품이 될 우려마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의 투지를 불러일으키며 게르만인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그들을 라인강 너머로 격퇴시킬 수 있었다.그러나 카이사르는 안심할 수 없어서 게르만인의 본거지를 쳐서 아예 근심의 싹을 없애버리기로 작정하고 라인강 건너편 게르만인의 땅은 갈리아보다 더 험하고 숲으로 둘러싸인 미개지여서 로마인에게는 기후도 맞지 않는 전연 미지의 세계였지만 카이사르는 그곳에까지 침입해 들어가 로마의 힘을 과시했다.뒤이어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북쪽 해안을 통해 두 차례나 브리타니아에 침입에 들어갔다.그는 아직 미개한 섬나라였던 브리티니아를 정복하여 브리티니아의 왕으로부터 로마 의 지배를 받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이렇게 카이사르는 5년간에 걸쳐 알프스 이북의 전 갈리아 지방을 평정한 뒤 그들로부터 로마에 복종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로마로 귀환했다.그러나 이들의 약속은 진심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로마군을 몰아내고 옛날의 자유를 되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카이사르가 5년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자, 브리타니아인 및 게르만인들까지 포함하는 전 갈리아 지방에서 아르베니족의 왕 베르킨케토릭스를 중심으로 한 반란이 일어났다.그들의 죽음을 각오한 기세 앞에 용맹스러운 로마군도 당해내지 못하고 각처에서 패전을 거듭하였다.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카이사르는 곧바로 갈리아로 돌아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이번의 진압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반란군과 카이사르는 일진일퇴의 악전고투를 계속 해 나갔다. 그 사이에도 반란군의 세력은 갈리것이다.
    인문/어학| 2003.05.24| 10페이지| 1,000원| 조회(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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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신분제
    조선의 신분제심선주 조주원* 신분제의 개편◎고려말기의 사회신분문제고려 말기의 정치적 불안은 여러 부문에서 제기 되었지만 특히 사회 경제적 모순과 갈등으로 표출되는 사회신분 및 농지소유와 경영의 문란에서 야기되었다. 사회신분은 정치권에서, 또는 경제활동에서 일정한 직업을 혈연적으로 세습하면서 형성된 사회관행에 토대를 갖고 있었다. 국가는 국가의 재정기반으로서 사회신분의 역할 분담과 행동이 경제활동에서 유기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정치적 안정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려 말기의 사회, 경제, 정치적 모순과 갈등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신분문제는 대체로 국역(國役) 부담층의 혼란에 있다. 국역 부담층의 혼란은 국역 담당자인 양인층의 불안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들 기층민을 안집시키려면 국역에 대한 보상을 적절히 하여 국역 담당층이 다른 신분층으로 전입할 경우 불리해지는 여건을 창출 유도 해야했다. 양인의 부족으로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권의 법제적 노력은 호적법의 정비와 호적법의 정확한 운영으로 추구되었다.고려시기의 사회신분은 직역(職役)과 혼인을 통한 직역의 세습을 통하여 한 시기의 질서체계를 형성하였다. 그것은 직역이 효율적이고 성장 지향적인 속성을 세습이라는 관행을 통하여 유지, 보존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었다.여말선초의 지배 신분층 구성요건 특징은 이른바 권문세가(權門勢家)의 부류로서 제한된 특수계층만이 배타적으로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 유교교육과 과거제를 통하여 개방되었다. 향리층은 그 일부가 양반층으로 진출하고 나머지는 군현의 이족층(吏族層)으로 남는 양상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지배층 내부에서의 양극화 혼입 현상은 지배층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피지배층까지 포함하는 국가 천체의 문제로 확대되어 전 사회체제의 정비를 요구하게 되었다.◎조선 초의 신분제 개선: 개국 초 조선은 고려시기의 사회신분제에서 파생된 여러 문제점을 진단하여 새 정권의 사회정책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 신분제 정비는 고려시대가 신분제에 기초해 정치를 운영하였다는 데서 확보하고, 나아가서 그러한 사회관행을 지키려는 규범을 사업내용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사업의 주체인 관인층 이 노비를 소유하려는 성향이 강해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2. 양인(양인)과 천인(천인)을 분간하려는 구체적 법규를 마련3. 보충군(補充軍)제도의 설치4. 양천교가(良賤交嫁)소생의 신분에 대한 종모법(從母法)) 조선시대 노비 소생의 신분과 역(役) 및 주인을 결정하는 데 모계(母系)를 따르게 한 법.의 적용 관습을 바꾸어 어느 한 쪽이 양인 이면 양인이 되게 하는 조치를 취함.5.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 양인(良人) 남자와 천인처첩(賤人妻妾)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신분은 부계(父系)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한 신분법.채택2) 신분에 따른 국역 부과조선왕조가 신분을 법제화하면서 정비하려는 주된 목적은 신분에 따른 역의 배분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특히 양인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농민에게 국역의 대상으로서 여러 종류의 국역을 부과하였다 .또한 신분적 위상이 비슷한 공인이나 상인들에게도 국가의 수요에 따라 필요한 인원을 책정하여 소정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신량역천층(身良役賤層): 신분이 일단 양인으로 파악되지만, 그 역이 고되어 사회적으로는 천시 되는 사회계층이들은 稱尺者, 稱干者라 불리는 자들로서 이들의 직역은 국가가 국역으로서 일정한 인민이 담당 하도록 신분적으로 제한하여 세습토록 하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역을 수행하거나 물품을 조달, 공급하도 록 법제화한 것이다. 조선왕조는 이들의 성과를 공적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반대급부로서 그들에게 입사 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것의 명분으로 그들을 양인의 범주에 포함시키려 했다.그러나 양인층 가운데 관인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직역이 곧 국역이었다. 이러한 관행으로 지배신분층의 직역은 곧 역으로 환원되었고 피지배신분층의 역역(力役)이 직역으로 명명되면서 신분제 사회로 고착화되었다. 이에 피지배신분층은 국가의 노동력 수취대상이 되면서 농업생산에 기초한 조세와 함께 국가재정의려운 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농지로부터 이탈하여 역역 파악 대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유망하는 사회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국가재정의 안정과 함께 대다수 인민에 해당되는 농민이자 기층민의 안집과 직결되는 문제로서 새 왕조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기층민의 안집과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한 양민층 확대책의 일환으로 양인의 색출작업이 진행되었다. 이것은 호적법의 쇄신과 그 법제적 운영인 전민변정 사업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이 사회전체를 비추어보면서 기층민의 확보에 유의하여 진행되려면 양반직역에 해당하는 사회계층을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점과 전국민을 산업구조와 어떻게 조화시키느냐하는 문제도 고려되어야 했다.4)호적법을 통한 농업생산의 안정모색국가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생산품과 이를 생산, 유통, 분배하는 과정의 유기적 관계, 그리고 이 체제를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국가적 체제위에서 국가가 수요로 하는 필수품에서부터 고급문화 수요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품을 생산토록 하였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인원을 양성, 귀속시켰으며 그것을 세습토록 하였다. 조선왕조는 가장 중요한 농업의 식량생산에서 농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려는 정치적 노력을 기울이고 극히 소량의 전문품목 생산에 종사하는 장인에 이르기까지도 생산, 또는 운영부분의 인력을 배양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이러한 구상과 운영체제는 역사발전과정에서 변화와 수정을 맞이하였다. 이를테면 농민의 경우 이들의 지속적인 생산활동을 위해 국가는 토지와 영농기술의 향상, 생활보호를 위한 국가적 배려를 하였다. 그러나 토지에 대한 점유, 매매, 양도, 상속 등으로 표현되는 토지에 대한 권리를 농민들이 자유롭게 행사하지 못하게는 할 수 없었다. 국가의 절대적인 인구를 차지하는 농민인 인민이 토지로부터 유리되어 불안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을 때 왕조가 정치적으로 가장 큰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도 이 시기의 정치권에서는있었던 것도 당시의 이러한 사회경제적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었다.여말 선초에 이어 진전된 조선 초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농업부문 등의 생산성 향상을 가져와 양인, 양민들의 내적 발전을 가져왔다. 이는 그들의 정치적 요구로 정치권의 참여 기회를 양인의 범주로까지 확대시키는 한편 이와 정반대로 아예 공민의 범주에서 벗어나 사민화되는 양극화 현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교정하기 위해 호적법의 정비 즉 사회신분제의 재정비로 표현되었다.-조선 초의 신분제 재정비 요건1. 새 왕조의 공민 확보, 확대를 달성2. 공민인 양인들에게 의무만 지울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법제적 권리의 일부로서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공하려 함3. 지정된 직역을 점차 줄여 가는 방향으로 사회신분의 법제화를 이루려 함4. 새 왕조의 집권층은 새로운 권력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고도의 배타적인 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사회신분과 연계되는 직역을 호적에 표시함* 신분제의 두 견해1) 4분설ㆍ4분설은 1970년대 양분설이 제기되기까지는 통념적으로 수용된 학설로서 조선의 사회신분이 양천(良賤)의 큰 구분 위에서 상급 신분층으로서 양반층, 기술관ㆍ서얼ㆍ서리ㆍ군교 등의 중간계층으로 지배신분 범주로서 실존한 중인층, 광범위한 상민층으로 생산에 종사하고 있던 대부분이 농민인 양인, 최하위 신분층으로 천인, 즉 노비로 구분되는 신분계층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학설이다.ㆍ조선 신분구조의 특징조선시대 신분층의 구조는 정치제도와 연계되어 구성되어 있었다. 정치제와 연계된 양반은 관제상 文班 (東班)ㆍ武班(西班)을 구성하여 관료를 독점하고 있던 자들로서, 유교적 명분과 교육과 학문으 로 무장되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조선의 신분구조는 직역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면서 사회통념과 혼합되어 있다. 양반이 최고의 신분 층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좋은 직역에 종사하는 사회 신분층이라는 의미로 풀이되고, 이어 중인ㆍ양 인ㆍ천민층은 그 직역이 고된 천역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조선사회의 신분구성은 직역의 변동에 따라 변신들의 신분층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양반의 존재에 대한 학계의 논란조선 후기의 사회변동 중 내외적 요인에 의해 양반층 구성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는 실증적 연 구와 그 변화상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학계의 연구경향은 양반층의 구성 내용과 사회신분층으로서 양반의 존재에 대한 학계의 개념구성에 논란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 신분연구의 초점은 과거 사실을 재구성하여 막연한 양반의 실체가 아니라 양반의 존재 성립에서 그 파괴현상에 이르는 일련의 변 화상을 통해 한국사의 변화를 연구하려는 것으로 이를 통해 연구방법론과 연구수준이 향상되었다.※ 양반신분이라는 지배계급의 실체를 인정하는 견해- 양반이라는 말은 늦어도 고려 말부터 조선 봉건 지배계급을 지칭하는 신분적 규범이 되었고 이는 노비나 양인이라는 말처럼 명확하게 법제 적인 규범으로까지는 되지 못하였다. 또한 신분 구성의 내용 자체는 막연하여 이는 양반이라는 규범으로 포괄하였던 당시의 봉건 지배계급 자체의 구성이 복잡한데서 기인하였다.※ 양반은 문반ㆍ무반의 관료 관직자들과 이들의 가족ㆍ친족도 이 범주에 들어가서 지배신분층의 개념이 되었다는 견해-양반의 법제적 기준은 명백하지가 않지만 양반은 조선 초 최고 직역에 해 당하는 양반관료에 참여하며 조선시대 정치이념인 유교에서 주장하는 사회지도층으로서 군자의 인격을 소지하고 유교적 도덕률로 무장한 혈연집단을 가리키게 되었으며 사회의식에서 통념적으 로 사회신분층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는 문무관, 문무과 출신자, 생원, 진사, 녹사) 조선 시대에,의정부·중추원에 딸렸던 서리(胥吏). 기록·문서 따위를 맡았음., 有陰子孫과 이밖에 전직관료와 문ㆍ무 관품만 가지고 있었던 산관, 4祖) 조상(父, 祖, 曾祖, 外祖) 내에 산관이 있는 가문이면 모두 양반으로 간주하였다.ㆍ양반의 토지와 노비 소유양반들은 토지를 다량으로 점유하여 생활을 유지하였고 정부에서도 이들의 안정을 위해 토지 점유 의 일정한 혜택을 부여하거나 세제상 특전을 부여하였다. 이른바 과전법으로의 전제개혁은 조선조 양반의 토지
    인문/어학| 2003.05.24| 9페이지| 1,000원| 조회(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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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의 장원제 평가A좋아요
    목차1. 서론2. 초기의 고전장원제 : 카롤링 왕조 시대의 프랑스장원과 노르만 왕조 시대의 영국장원1) 카롤링 왕조 시대의 고전장원2) 11세기 영국의 장원3. 11-13 세기의 장원제: 장원 농민의 법적 신분과장원 경제구조의 변동1) 법률의 변천과 장원농민의 신분변동-프랑스를 중심으로2) 재판권과 장원농민3) 장원 경제구조의 변동4. 14세기 이후 경제상황의 변화와 장원제의 귀결1) 중세 말과 근대초의 경제상황의 변화와 장원제2) 영국장원제의 귀결3) 프랑스 장원제의 귀결5. 결론1.서론서양의 장원제에 대하여 탐구하고자 할 때에 우리 나라에 장원제에 대한 단행본 서적으로는 작년에 번역되어 출간되어진 마르크 블로크의 『서양의 장원제』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마르크 블로크가 강의원고로 쓴 것으로서 현재의 프랑스와 영국의 농촌사회 구조가 다르게된 원인을 장원제의 역사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밝히려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의 전체의 내용-프랑스와 영국의 고전장원, 장원제의 발전기와 쇠퇴기-을 요약해 봄으로서 프랑스와 영국의 장원제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현대 프랑스 농촌과 영국 농촌의 대조적인 모습프랑스의 특징적인 경작지 모습은 무척 길다랗게 뻗은 밭들이 있는가 하면, 계절에 따라서 어떤 때는 곡식의 수확물이 보이고 어떤 때는 건초더미나 사탕무우더미가 나타나며, 대규모의 촌락들이 존재하고, 날씨가 여간 나쁘지 않은 날에는 곳곳에서 사람들과 역축들이 일을 하고 있고, 가끔 양들이 곡식의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밭 위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광활한 평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 한 고장 전체가 거의 울타리가 없음을 볼 수 있다.반면에 영국은 토지가 어디서나 생울타리나 울타리로 구획되어 있음을 볼수 있다. 밀밭은 별로 없고, 수목과 풀밭이 많으며, 가옥들의 대다수는 외따로 떨어져 있으나 전체적으로 가옥과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장원의 정의경우에 따라서 그 크기가 매우 달라지는 어떤 땅이 있다고 가정해 보았을 때 그 땅의 경영은 토지생다.카롤링 시대의 교회기관의 대규모 장원은 매우 단순한 형태를 띄고 있다. 농경지는 영주직영지와 소규모로 된 농민보유지로 나눌 수 있다. 영주직영지는 전체 농경지 가운데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대규모의 농업경영에 필요한 주거용 건물, 곡물창고, 포도주 따위의 지하저장실, 헛간 등 여러 건물을 포함한다. 영주의 직영 농경지는 농민보유지들과 뒤섞여 장원 내에 흩어져 있었고 그 땅 조각 들은 농민보유지의 땅 조각보다는 더 컸다. 반면에 농민보유지는 영주직영지보다 그 면적이 훨씬 작았고 크기는 매우 달랐다. 이들 농민 보유지에는 영주에 대한 의무수행이 따랐는데 공납과 부역 중에 부역의 의무가 부담이 더 크고 중요성이 컸다. 그 중에서도 경작부역이 가장 중요하였는데 농민보유지 보유자들의 강제노역에 의해서 영주직영지를 경작한다는 점이 카롤링 시대 장원의 주요 특징이다. 따라서 농민보유지는 무엇보다도 그 토지를 보유한 농민에게 강제된 농업노동을 수행하는 대가로 주어진 보수라고 할 수 있다. 농민보유지 보유자의 경작부역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영주의 마음대로 사용하는 시간제 방식의 경작부역이고, 다른 하나는 일정한 땅조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경작하는 방식의 부역이 있다. 이렇듯 장원은 영주직영지와 노동력의 원천인 농민보유지들과의 상호 긴밀한 협력관계에 토대를 둔 경제적 기업체였다. 이런 긴밀한 협력관계는 집촌 형태의 주거지역에서는 장원의 크기에 관계없이 어떤 장원에서나 실현될 수 있었으나, 산촌형태의 주거지역에서는 긴밀한 상호관계가 대장원의 경우에는 실현되기가 비교적 어려웠던 데 비해 소규모의 장원의 경우에는 비교적 용이했다.또한 장원은 대부분 분할될 수 없는 단위들로 된 소규모의 농민보유지들이 영주직영지 주변에 모여있는 형태를 취했으며, 이들 농민 보유지의 종류는 최초의 보유자의신분에 따라서 구분되고 망스라고 불렸다. 망스는 주택이 중심을 이루며 영주의 입장에서는 농민에 대한 의무 부과의 단위를 이룬다. 이는 장원의 세포조직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영주들은 유현황이 정복 직전의 현황과 비교될 수 있는 영국 전체에 대한 방대한 재산목록 작성에 착수하도록 결정했다. 이는 『둠즈데이 북』이라는 별명으로 표현한 두권의 책으로 나타났다.영국에서 장원을 지칭하는 바로 manor( manerium, manoir)라는 말은 『둠즈데이 북』 안에서는 줄곧 전문적인 의미를 띠는데 manor라는 말은 영주직영지와 농민보유지들로 구성되고 영주가 지배하는 영역 내에 있는 농지와 황무지 및 임야를 포함하는 장원이었다. 어떤 땅조각이라도 매너에 속했으며, 영주의 법정이 매너의 재판소였다. 이 토지대장을 작성한 사람들이 처했던 상황을 살펴보면 그들은 정복된 앵글로색슨 왕국을 영주에 대해서 예속관계에 있지 않고 공납과 부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농민토지가 가능한 한 없게 하는 한편, 영주직영지의 주위에 배치되지 않는 농민토지가 없도록 하려고 했다. 영국을 지배하게 된 국왕 또한 그런 체제로부터 이익을 얻어야 했으므로 국왕의 봉신들인 영주들은 그들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이 국왕의 명령을 잘 따르고 의무를 잘 이행하도록 하는 데에 책임을 졌다. 따라서 노르만인 지배 아래에서 영국 왕국은 장원이라고 부르는 것의 거대한 집합체가 되었다.* 신분11세기 초의 앵글로색슨족 사회에서는 부자들이나 세력기관 또는 교회기관들이 비교적 큰 규모의 토지로 된 직접적인 경영토지 같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농장들은 대부분이 노예들에 의해서 경작되었는데 이는 대농장의 규모가 갈리아보다 작았고 11세기에 프랑스에서는 거의 사라지게 되는 노예가 11세기의 영국에서는 아직도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 노예노동은 풍부하기는 했지만 충분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영주에게 보호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성격의 지원까지도 받기를 기대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종속되었다. 이런 예속민 가운데에는 노예, 해방노예, 오막살이농과 이들보다 훨씬 우월한 지위에 있는 보르디에, 빌렝, 소우크맨이 있었다. 보르디에는 일반적으로 빌렝보다 작은크기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런 구분은 지속되지부터 그들을 보호했던 것은, 그의 부가 예속민들의 공납과 부역의 이행에 좌우되고 그의 위세가 예속민들의 수에 따라 결정되었던 만큼,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들 빌렝은 자유인과 부자유인으로 불리는 농노로 구분되었다. 농노는 자유인과 달리 세습적으로, 인신적으로 매여 있었다. 반면에 자유인은 영주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농노는 인신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면서부터 신체와 분리될 수 없는 예속관계로서 예속인이 된 경우에 사람들의 신분은 자유가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농노제는 순전히 인신적인 성격의 신분제였기 때문에, 농노의 토지보유가 여자 봉건농민의 토지보유와 차이가 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 프랑스 농노제의 본질적 특성이다. 다만, 농노의 특성은 농노가 영주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농노가 어디에 가 있건 그의 신분에 특유한 의무들과 관련해서는 그의 영주에 대한 예속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진정한 농노제는 국가권력이 보다 강력해지고 빈땅이 드물어지는 13세기에야 도입되기 시작했다. 농노는 토지를 떠나기 못하게 되거나, 떠나는 경우에는 그의 전 재산의 완전 몰수를 거부할 수 없었고 비천하다고 규정지어진 보유지는 농노들만이 보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농노의 토지 보유를 포함한 빌렝신분의 토지보유는 관습에 의해서 보호되었다. 장원재판소의 관습 적용으로써 이들 농민은 항구적이고 세습적이며 양도 능력을 가진 토지보유자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2) 재판권과 자유농민프랑크 시대에는 공식적인 볍률에 의하면, 재판관할권이라는 관점에서 프랑크 자유인과 노예로 구별되었다. 자유인들은 원칙적으로 오직 공법상의 재판소의 관할을 받았고 노예는 관례에 따라서 법률상의 주체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카롤링조 초기 이후에는 이러한 재판제도는 기능을 못하게 되고 정부는 예속관계 속에서 공공질서가 보장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예속관계의 발전을 장려했다. 세력가는 그가 거느리고 있는 피호보민에 대한 책임을 졌다. 이는 세력가가 피보호의 축소이렇듯 부역이 감소한 것은 경작해야 할 영주직영지가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민보유지가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이렇듯 영주직영지 축소의 원인을 프랑스에서 간단히 살펴보면 첫째, 관리 및 회계상의 문제점으로 당시의 관리자층은 회계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면서도 영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남용하고 영주직영지와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을 가로채기도 하였다. 둘째, 장원의 유지, 관리에 충당하고 남는 생산물의 이용과 운송의 문제점이 있었고 셋째, 영지 내의 주민수를 증가시키고 싶은 영주의 욕구로서 영주는 당시의 상황에서 부와 권력의 원천이 되는 영지 주민의 수를 늘리고 싶었으나, 주민 수를 증가시키려면 영주직영지로부터 토지를 떼어내어 농민들에게 분양해주고 영주직영지에 대한 부역노동도 축소하거나 면제해 주지 않을 수 없는 곤란에 빠졌었다.4.14세기 이후 경제상황의 변화와 장원제의 귀결1) 중세말과 근대 초의 경제상황의 변화와 장원제의 귀결* 14-15세기의 위기와 장원조직프랑스에서는 영주의 거대한 직영지가 대폭 축소되어 그 규모가 아주 보잘 것이 없게 되었다. 영주는 거의 소작료 수취 생활자로서만 존재하게 되었고 반면에 영주직영지의 축소에 따라서 소농이나 중농의 수는 매우 많아지고 몹시 견고한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영국에서도 역시 장원내의 영주직영지가 대폭 축소되었으나 전체적으로는 프랑스보다는 현저히 더 컸다. 농민경영지의 수는 프랑스보다 별로 더 적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한 보호는 프랑스에 비해서 훨씬 더 약했다. 하지만 이는 농민이 프랑스에서는 행복했던 데에 비해서 영국에서는 비참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되고 두 나라 모두에서 농민반란이 만연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장원제도가 시행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나타나는 농민대중의 근원적인 불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서유럽에는 전쟁, 사회적소요, 감성의 불안정 등 온갖 측면에서 혼란의 시대였던 중세 말의 마지막 몇 세기 동안 대대적인 봉기가 발생했다.프랑스 농민의 생활형편을 살펴보면 영국에서 보다
    인문/어학| 2003.05.24| 11페이지| 1,500원| 조회(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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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 전쟁 평가A좋아요
    * 목차1. 머리말2. 베트남 전쟁 1기-(1945~ 1956)3. 베트남 전쟁 2기-(1956~ 1972)4. 파리 협정 이후 베트남의 상황5. 베트남 전쟁의 성격6. 맺음말1. 머리말베트남 전쟁은 그에 앞선 (1934~36)과 함께, 현대사에서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근대에 들어서 많은 전쟁이 있었고, 20세기에도 세계대전이 두 번이나 있었는데도 유독 과 을 가리켜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베트남 전쟁은 그 성격과 배경이 복잡하다. 그 전쟁의 한쪽 당사자가 공산주의 세력이고 어느 한쪽이 반공산주의 세력이라는 사실만으로 베트남 전쟁을 로 획일화했던 단색적 도식화는 진실에서 너무나 먼 이야기다. 베트남 전쟁은 민족주의, 제국주의, 독립투쟁, 식민주의, 혁명, 반혁명, 통일 , 분열, 독립, 의존 등 20세기의 모든 갈등의 요소가 뒤범벅이 되어서 전개된 전쟁이었다. 그것이 '20세기의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따라서 나는 본문에서 두 시기의 베트남 전쟁과 전쟁 후의 베트남 상황을 알아보고 여러 가지 요소가 결부된 복잡한 베트남 전쟁의 성격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2. 베트남 전쟁 1기-(1945~ 1956)19세기 '제국주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아시아 전역은 유럽 열강들에 의해 조각조각 나눠지고, 베트남은 프랑스가 지배하게 된다. 1884년이래 70 년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가혹한 지배를 받아왔고, 20세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여기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 가속되었다. 일반적으로 베트민으로 알려진 베트남 독립동맹은 프랑스로부터 베트남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정당으로 1941년에 조직되었다. 이 정당이 공개적으로 공산주의 정당임을 표방한 것은 1950년대 중엽에 와서였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지 채 2개월도 되지 않아서 베트남 독립동맹의 지도자 호치민은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베트남 독립동맹은 베트남자가 주도하는 베트남 독립동맹은 베트남 북반부를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는 북베트남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비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베트남 남반부는 남베트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 딘디엠은 휴전 협상을 하는 동안에 남베트남의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디엠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디엠 정권의 구성원들 대부분은 프랑스 지배시절 그 하수인을 하던 자들이 대부분이니 통치행위 역시 그 수준에서 별반 다를것이 없었고, 당연히 인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북베트남의 호치민은 '프랑스에 대항한 독립투사'라는 경력 때문에 잔인한 공산주의 독재를 펼쳤지만 남북 모두에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갈라진 남쪽에 살면서도 호치민을 더 좋아하는 위험한 상태가 되기 시작했다. 제네바 협정은 남, 북 베트남을 인민에 의해 선출된 하나의 정부아래 통합할 목적으로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 아래 1956년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했다. 북베트남은 남북 양쪽에 이미 만들어놓은 광범위한 정치 조직에 힘입어 이 선거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남베트남에 자신의 지배체제를 강화해 좋은 디엠은 1956년 예정된 선거를 치르기를 거부했다. 미국은 디엠의 입장을 지지했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북베트남은 그때부터 정치적인 수단에 의해서 보다는 군사적인 힘에 의해 남, 북 베트남을 통일키로 결정했다.3. 베트남 전쟁 2기-(1956~ 1972)미국 국무장관 덜레스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해 미국 정부로 하여금 갈수록 민중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는 디엠 정권에 대해 경제적 지원과 군사적 지원을 해주도록 설득했다. 디엠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선출된 부락회의를 폐지시키고 사이공 정부에서 임명한 행정관들을 통해 통치했다. 또한 자신의 동료 가톨릭 교도들을 고위직에 등용함으로써 불교도들을 분노하게 했다. 북베트남에서 훈련받고 무장한 베트남 독립동맹 병사들, 즉 베트콩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암살, 매복공격, 태업, 전항공작 등남이 이처럼 정치적 수렁에 빠져있는 동안 베트콩의 활동은 더욱 거세져갔다.통킹만 북폭-선전포고 없는 전쟁 개시8월 북베트남의 초계정 수척이 통킹만에서 미군 구축함 매독스호에 사격을 가했다는 보고를 들은 존슨 대통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해군 비행기들에게 북베트남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국 의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에게 "공격을 격퇴하고........더 이상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통킹 만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통킹 만 결의안은 사실상 대통령에게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공식적인 권한을 부여해 주었다.민족해방전선의 전면 공세통킹만 사건으로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행동을 단행한 지 2개월째인 64년 11월1일, 해방전선은 사이공 북방의 비엔 호아 미국공군기지를 공격, B-57형 폭격기 27대를 파괴하고 다수의 인명피해를 안겨 주었다. 미군기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이것이 처음이다. 곧 이어 12월 24일 밤, 해방전선은 사이공 시내의 미군 숙소를 폭파하고, 미군 사망 2 부상 63, 베트남인 부상 34라는 대피해를 입혔다. 이 일련의 공격은 해방전선이 미국 군대와의 직접 투쟁이 불가피해졌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해석되었다. 남베트남 정부와 전반적 정세에 더욱 강렬한 충격을 주려는 의도와 해방전선이 단순한 게릴라전에서 조직적 부대전투를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또 미국의 북폭으로 남, 북 베트남의 전투가 일체화되었다는 것과,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 군사행동에 보복하는 뜻도 있었다. 남부에서 미군을 상대함으로써 북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견제하려는 전략으로도 해석되었다.해방전선군은 65년 2월 7,8일 북부지방 플레이쿠 미군기지에 연대규모의 조직적 대공격을 가했다. 10일에는 퀴논의 미군숙소가 폭파당했다. 플레이쿠 기지에 대한 해방전선군의 공격은 미국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좋은 구실이 되었다. 이 공격 직후, 존슨 대통령의 명령이 내려지고 전폭기 되었다.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끝나다미국의 지상병력이 67년 11월, 마침내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 최고수준인 47만 2천 800명을 넘어 54만 9천명에 달하자, 전쟁은 베트남의 국경을 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됐다. 전쟁은 진정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되었다. 통킹만 사건 직후,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가 병력을 파견하고, 70년 캄보디아 정변으로 미국의 뒷받침을 받은 우파 권력과 좌파 세력이 민족상잔을 전개하게 되면서부터 인도차이나 대륙은 국경 없는 하나의 전장으로 화했다.미국의 압도적인 물량과 과학무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물질적 위력이 강해지면 질수록, 인도차이나 민족의 민족해방세력은 강대해지기만 했다. 인도차이나 전역에 대한 비치사성 각족 독가스와 식물고사용의 화학무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됨으로써, 인도차이나전은 처음으로 생태학적 대량파괴의 문제를 인류에게 제기하였다. 해방전선측을 돕는 소련과 중공은, 상호간의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공화국을 통한 현대무기 원조의 필요성으로 미국과의 전쟁 일보전 상태에까지 깊이 관련되었다. 쌍방 전쟁방법의 잔인성은 세계의 양심과 국제여론을 자극하여 미국에게 날로 불리한 국제적 조건으로 굳어져 갔다. 미국내의 국론분열과 반전세력은 내부에서 국가적 일체성을 파괴하는 작용을 하여, 미국은 마침내 닉슨으로 하여금 70년, '미국의 국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선언과 함께 20년에 걸쳤던 정치, 군사 간섭정책에서 물러나기 시작하도록 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으로 무장한 거인은 만신창이가 되어 일개 후진 약소 민족과 협정을 맺고 73년 1월, 27년 만에 이 파란 많은 땅에서 물러서기를 약속했다.◎ 협정안의 주요 내용1) 휴전은 그리니치 표준시로 1973년 1월 27일 24시에 발효되며 시한이 없이 실시된다.2)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포로가 된 미군은 협정발효 후 60일 이내에 전원 석방한다.3) 협정조인 60일 이내에 미국을 비롯한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모든 외국의 군대, 문관, 군 사요원 및못지 않게 많았다. 1974년 남베트남은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는 변경 지역을 포기하기 시작했고, 베트콩은 여러 지방 도시들을 점령했다. 1975년 1월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북베트남군이 푸오클롱 성을 공격하자 남베트남 정부군은 후퇴했다. 예상치 못하던 남베트남 정부군의 푸오클롱 성 포기는 북베트남군으로 하여금 남베트남에 대한 총공세를 결행할 수 있는 때가 왔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에 북베트남군은 중부 고원지대에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고, 남베트남 정부군은 3월 이 지역을 포기했다. 그리고 나서 티우 대통령은 광트리, 위에시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남베트남군은 해안 도시들을 하나씩 포기하더니 4월초에는 남베트남의 북반부를 북베트남군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남베트남 정부군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때까지 남아 있던 미국인들은 베트남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과 함께 비행기나 배를 타고 탈출했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의 뒤를 이은 두옹반민의 남베트남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사이공은 아무 저항없이 점령되었다.남베트남에는 군사정부가 세워졌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되었다. 사이공은 호치민 시로 개칭되었다.베트남의 오랜 전쟁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베트남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집을 잃었다. 농촌은 폭격과 고엽 작전에 의해 황폐화 되었으며, 도시는 심하게 파괴되었다. 농업, 상업, 공업은 정지되었다. 미국의 경우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를 위한 경제 프로그램은 그 인기 없는 전쟁에 들어간 경제적, 군사적 비용 때문에 대부분 중단되었다. 전쟁에 들어간 총비용은 약2000억달러에 달한 것으로 집계된다.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이웃 나라인 캄보디아와 라오스가 공산화됨으로써 새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중요한 강국으로 부상했다.5. 베트남 전쟁의 성격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자신이나 외부의 관심있는 사람에게 각기의 입
    사회과학| 2002.11.29| 8페이지| 1,000원| 조회(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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