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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고대사] 한국고대사 신분제
    제1장 신분제고대사회와 중세사회의 신분제는 혈통에 의한 세습적인 성격으로 존속되었고, 당시 사회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1. 귀족고대 국가의 지배층인 귀족은 족장출신으로서 피지배층과 구분되었다. 고구려는 가(加) 로서, 신라는 간(干) 이나 찬( ) 으로, 백제는 좌평(佐平) 혹은 솔(率) 로서 관직에 나아가 지배층이 되었다.그리고 정복한 집단의 족장을 중앙의 귀족으로 편입시키는 등 이른바 족장의 세계 를 존속시켰다. 귀족 중에는 족장의 신분과는 차이가 있는 자들은 왕의 인정을 받아 고위관직을 차지하면서 귀족화되기도 하였다.2. 중·하급 지배층귀족과 일반민의 중간에 있는 자들은 귀족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였지만 일반민보다 우월한 지위로서 중·하급 지배층으로 존재하였다.그 주류를 이룬 소족장과 일부 일반족원, 지방족장들은 중앙의 행정관리나 군대의 중간지휘자, 품계(品階)를 병사가 되기도 하였다.지방의 유력자들은 지방관을 도와 세금을 걷거나 부역을 징발하는 등 준관료적인 위치를 차지하였고 촌주(村主)등의 지위를 세습하여 면세받고 녹을 받는 등 지방에서는 지체있는 존재들이었다.3. 평민중·하급지배층 밑의 신분으로서의 평민은 대게 농민들로서 군대에 가고 부역, 세금을 내는 의무를 지거나 길쌈으로 가사에 종사하였다. 기본적으로 자유민 이지만 과중한 세금의 의무로 인해 노비보다 어려운 처지에 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노비에게는 제한된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노비보다 못한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고 국가에 의무를 다하였다.4. 노비평민 밑의 신분인 노비는 개인이나 국가, 사원의 소유물로서 서양의 노예와 같은 사회적 존재였다. 주인은 노예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거의 완전한 권리를 행사하였으며 노비 즉 노예는 자신의 가정을 이룰 수 없었고 남녀 노비 사이에서의 자녀는 어미 노비의 소유주에게 소유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노비는 스스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거나 주인의 의사에 따라 해방될 수 있었다. 소유물로 취급받던 노예가 같은 인간인 주인에 의하여 해방이란 인위적인 조치를 받게되면 갑자기 인간으로 여겨지는 것은 오늘날의 의식수준에서는 아이러니 한 일이다.제2장 골품제고대사회의 신분제 중 하나인 신라의 골품제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1. 골품제의 구조신라의 골품은 성골과 진골 그리고 6두품, 5두품, 4두품 그리고 평인(平人)의 등급으로 구분된다. 왕족 혹은 중앙귀족(성골, 진골)인 골족(骨族)과 중소관리인 두품(頭品族) 그리고 평인(平人)으로 나뉘며 노비와 지방민은 골품에 포함되지 않았다.성골은 다른 중앙귀족들이 속한 등급명인 진골과 구분하기 위한 명칭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법흥왕 이래 진덕여왕까지의 왕실만으로 한정되며, 그 후 무열왕 이후에는 성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진골은 중앙귀족이나 왕족 등이 속한 등급으로 국가권력을 통해 확보한 기득권을 바탕으로 모든 고위직을 독점하고 사회 경제적인 특권을 누렸다.2. 골품제의 사회적 기능첫째, 골품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관등(官等)에 차이가 있었다. 1등급 이벌찬에서 5등급 대아찬까지는 진골이 오를 수 있었다. 6두품은 6등급인 아찬이하의 관등에, 5두품은 10등급인 대나마 이하 관등에 오를 수 있었다. 4두품은 12위 대사이하 17위까지의 등급에 오를 수 있었다. 진골이나 상위 두품에 속한 자들은 관직에 오를 기회가 하위 두품에 비해 많았고 승진에도 차이가 있었다.둘째, 골품에 따라 생활에서 차등적인 규제를 받았다. 옷감의 종류와 색깔, 수레를 꾸미는 장식, 그릇의 재질, 집의 크기, 지붕에 설치하는 장식물, 마굿간의 크기에도 제한이 있었다.3. 신라사회의 성격당시 신라사회의 신분 차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대다수 고대인들은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골품제는 왕경민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실질적인 면에서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한계로 작용하는 경우는 일상생활의 차원이 아니고 관직에 취임하고 승진하는 경우에 있었다. 이에 대해 두품자들의 진급 욕구를 일부 해소하기 위하여 일부 관등 내에 또다시 다수의 등급을 설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생활에서의 제한 규정이란 실제적은 문제로 과도하게 인식될 가능성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관직 취임에서의 제한이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사회 나아가 한국의 고대사회를 지나친 신분적 분별이 작용하는 경직되고 폐쇄된 사회라 강조해 말할 수만은 없는 면이 있다.제3장 신분제의 변화우리나라 고대의 신분제도는 시간이 경과하고 사회적 여건이 변화함에 따라 변화되었다. 고조선의 경우 범금8조에서 신분의 하락을 면하는 방식이 생겨났고, 삼국시대의 경우 골품제의 하위 두품인 3두품, 2두품, 1두품이 사라져 평인이 되었으며, 지방민의 지위가 골품에 연계되는 변화도 있었다.삼국시대 후반의 사회는 전쟁과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신분제 변동이 있었다.전쟁으로 병력동원이 절실해져 유능하거나 전공을 세운 지방민에게도 관직을 주는 경우가 발생하였고, 사유재산의 축적이 가능해져 농민을 주류로 하는 피지배층들은 지위를 향상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하위 두품간의 구분은 점차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대적 신분제위 동요와 변화는 상대적으로 조금 더 개방적인 중세적 신분제의 형성을 향하여 나아갔다.제4장 순장제순장은 자발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이나 법 혹은 사회적 억압에서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타인의 죽음에 이어 죽임을 당하는 경우만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의 다수는 남편의 가문이나 친정 가문의 명예와 관련하여 직접 간접의 억압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질적으로는 강제적으로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만큼 순장의 한 변종이라고 볼 만하다.1. 한국 고대 순장제의 실상우리나라 고대의 순장에 대하여는 영남지역에 있는 일부 신라계 무덤과 가야지역 무덤들의 발굴에 의한 출토 예들이 가장 사실적으로 이 풍속을 보여준다.신라 지증왕에 의하여 순장이 금지되었던 6세기 초 이전까지 신라 왕실의 무덤은 적석목곽분이라는 큰 무덤들이었다. 이 무덤 중 순장이 확인되는 무덤으로는 황남대총의 남쪽무덤과 경주 월성대에서 조사된 것들이다. 최근에 발굴된 경상북도 경산의 임당지구 조영동 고분군의 19호 묘로 명명된 무덤이 순장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일제시기에 발굴된 양산의 부부총에도 순장자가 묻혀 있었으며, 금관가야가 있었던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순장 목곽묘가 다수 발굴되었는데 제1, 3, 7, 8, 11, 13, 23, 24, 39, 47호 무덤에서도 순장자가 확인되었다. 이 밖에 고령 본관동 고분군이나 성주 성산동 고분군에도 순장자가 확인된다.위의 순장사실을 살피면 피순장자들은 묘의 주인격인 주피장자보다 신분적으로 낮은 자들이었다. 피순장자들은 주피장자에 비해 부장품이 매우 적었으며 주피장자의 발치 혹은 주인의 머리방향과 달리하여 머리를 향하는 경우도 있었다.2. 피순장자의 신분족장이나 왕 그리고 권세있는 귀족들의 무덤에는 노비뿐만 아닌 평민이나 귀족까지 순장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계급을 중시하는 고대사회에서 피순장자의 계급이 차이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왕의 절대적 권력 앞에서는 계급이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엇다고 보여진다. 노비 평민, 그리고 귀족들은 왕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로서 동질적인 존재엿었을 것이다. 이들을 순장한 것은 고대인들은 사후에도 생활이 지속한다고 여겨 사후에도 주인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점과 죽음을 두려워한 권세있는자들이 비첩이나 노비, 시녀, 시종들등을 동반하여 두려움을 덜어보려 한다는 점이 이유일 것이다.
    인문/어학| 2004.10.22| 5페이지| 1,000원| 조회(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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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중국의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현재 중국이 당면한 현대화와 민주화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과정을 되짚어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혁명전 중국의 농업구조와 농촌사회의 특징인 인구압력, 상업화, 계급분화, 국가의 개입, 농민소유권의 발전, 그리고 소농경제의 탄력성 등을 심도있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인구압력과 노동집약적 생산중국은 계속되는 인구압력으로 단위면적당 생산력은 높지만 노동생산성은 대단히 낮은 노동집약적인 농업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농업기술이 정체되었고, 농업에 의한 자생적 자본축적도 어려웠다. 퍼킨스와 엘빈은 이 원인으로 인구압력으로 인한 농업기술의 정체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인구감소와 농업기술 혁신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견해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중국의 전통농업은 노동생산성은 낮지만 토지 이용도에서는 효율적이다. 따라서 기술혁신은 적절한 해결방안이 아니다. 둘째로, 농업을 통해 산업화를 위한 자본을 자생적으로 축적하지 못한 이유로서 과잉인구가 적합한지에 대한 문제이다.그러나 노동집약적인 농업구조로 농업기술 혁신도, 잉여생산도 불가능 했으므로 인구압력은 중국의 전통적 농업을 규정하는 특성중 하나임에 틀림없다.고도의 상업화혁명전 중국농업의 상업화 수준은 비교적 높았다. 농민들은 시장을 통해 생산물을 교환하였고 임금노동이나 가내 수공업 들을 통해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서구 자본주의가 침투하면서 중국 농가들의 시장 의존도는 더욱 커져 상업화가 진전되었다. 이로 인해 시장이 발전하여 농민들과 외부세계가 연계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전통 농업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상업화를 달성하였고, 촌락의 구조도 단순히 폐쇄적이고 고립적이지는 않았다.
    사회과학| 2004.03.17| 1페이지| 1,000원| 조회(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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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중국의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현재 중국이 당면한 현대화와 민주화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과정을 되짚어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혁명전 중국의 농업구조와 농촌사회의 특징인 인구압력, 상업화, 계급분화, 국가의 개입, 농민소유권의 발전, 그리고 소농경제의 탄력성 등을 심도있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인구압력과 노동집약적 생산중국은 계속되는 인구압력으로 단위면적당 생산력은 높지만 노동생산성은 대단히 낮은 노동집약적인 농업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농업기술이 정체되었고, 농업에 의한 자생적 자본축적도 어려웠다. 퍼킨스와 엘빈은 이 원인으로 인구압력으로 인한 농업기술의 정체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인구감소와 농업기술 혁신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견해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중국의 전통농업은 노동생산성은 낮지만 토지 이용도에서는 효율적이다. 따라서 기술혁신은 적절한 해결방안이 아니다. 둘째로, 농업을 통해 산업화를 위한 자본을 자생적으로 축적하지 못한 이유로서 과잉인구가 적합한지에 대한 문제이다.그러나 노동집약적인 농업구조로 농업기술 혁신도, 잉여생산도 불가능 했으므로 인구압력은 중국의 전통적 농업을 규정하는 특성중 하나임에 틀림없다.고도의 상업화혁명전 중국농업의 상업화 수준은 비교적 높았다. 농민들은 시장을 통해 생산물을 교환하였고 임금노동이나 가내 수공업 들을 통해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서구 자본주의가 침투하면서 중국 농가들의 시장 의존도는 더욱 커져 상업화가 진전되었다. 이로 인해 시장이 발전하여 농민들과 외부세계가 연계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전통 농업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상업화를 달성하였고, 촌락의 구조도 단순히 폐쇄적이고 고립적이지는 않았다.계급분화 현상혁명전 중국의 농촌사회에서 진행된 계급분화의 원인이 무엇인가?자본주의 맹아론의 입장에서는 농업의 상업화로 말미암은 촌락민들의 토지 상실과 상인들의 고리대를 계급분화의 원인으로 보았다. 최근에는 인구압력에 의한 계급분화론이 대두되었는데 중국의 경우 인구분화를 구체적으로 논증한 실증적 연구는 아직 없다. 그러나 가족규모나 토지소유간의 상관관계가 높았음을 증명하는 연구는 있다. 한편 중국 특유의 균분 상속제 -분가할 때 아들들에게 똑같은 양의 토지를 상속-가 지속적인 계층하강을 초래하도록 작용했던 것으로 발견되었다. 비록 이와 같이 계급분화의 요인은 다양하고 복합적이었지만 계급분화 현상자체는 중국의 농촌사회를 규정하는 주요특징임에 틀림없다.국가의 적극적 개입중국농촌에는 국가에 의한 수리시설 관리가 공산혁명이전까지 계속되었는데, 국가의 수리사업에 대한 적극적 참여는 결국 수운교통의 발달을 통해 농촌의 상업화를 도운 셈이 되었다. 동시에 국가는 농촌의 생산관계에 비교적 적극적 개입하여 국가, 지주, 농민간의 균형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균형이 붕괴되었을 때, 농업사회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농민소유권의 발전농민소유권은 농민과 토지간의 결합력을 강화시키는 제도적 장치로서 매매, 상속, 저당, 임대가 가능하였다. 이는 공산혁명이전 중국의 농민이 농촌사회의 역학관계에서 비교적 강력한 지위를 누렸음을 반영한다. 중국에서의 농민소유권의 발달은 명청교체기 또는 17세기 전반족 위기와 연관도니 사회경제적 변동의 일부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농업집약화, 농업의 상업화, 도시부재지주의 증가, 조세제도의 문란, 농민운동의 격화 등이 상호작용하면서 농민소유권이 발달한 것이다.소농경제의 탄력성혁명전 중국의 농촌경제에서 소농은 농업생산조직으로서의 지배적 양식이었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소농경제의 탄력성을 강화시켰던 요인으로는 농촌수공업의 발전과 농민들의 강력한 지위와 투쟁력을 들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중국 농업사회의 특수성을 전제로 성립된다. 경제선진 지역에서는 농민소유권의 발전으로 소농의 지속성은 제도적으로 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소농은 제국주의의 침투로 야기된 시장경제의 확대에서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한 더 많은 기회를 발견하였다. 이로써 소농의 경제활동은 탄력을 더해 나갔다.소농경제와 경제발전소종경제의 지속성은 장기적으로 자본주의 농업발전을 막고 지주경제의 발전을 초래하였다. 소농은 기아지대 -시장임금보다 적은 가족의 노동댓가-를 받으면서도 존속하여 자본주의적 임차농이 등장하지 못하고 지주제 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한편 소농의 지속성은 자본의적 산업화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형성을 막았다. 그 결과 프로레타리아계급과 자본주의 농업경영은 형성되지 못했고, 자생적인 산업화를 위한 농업으로부터의 자본형성은 불가능하였다.제국주의와 농업농민문제19세기후반부터 침투된 제국주의 세력으로 중국은 이중적 경제구조가 형성되었다. 연안지역은 외국자본의 통제아래 있는 현대적인 지역으로, 내륙지방은 독자적 농촌지역을 확보한 전통적인 지역으로 나뉜 것이다. 이러한 반식민지 상태에서 국민당정부는 중국이 산업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거의 수행하지 못하였다.20세기 농업위기와 공산혁명20세기 중국농촌은 경지부족, 농업의 침체, 계급적 대립 등의 심화로 위기에 빠진다. 여기에 정치적 불안정이 더해지자 농민들은 집단적이며 폭력적인 저항으로 반발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당은 새로운 이념과 조직을 제공하여 중국농촌을 혁명기지화 하였다.
    인문/어학| 2004.03.17| 3페이지| 1,000원| 조회(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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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소농 경제의 탄력성 : 가족농 재등장의 중국사적 의미
    소농 경제의 탄력성 : 가족농 재등장의 중국사적 의미양필승 편저 (1991): 255-76. 건대사학>공산혁명 이후 소멸되었던 소농이 마오 쩌똥의 죽음과 함께 가족농으로 재등장하였다. 공산혁명 이전 오랫동안 존재했던 소농경제의 범주와 특수성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소농경제가 탄력성을 갖게 된 사회경제적 요인들을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최근의 가족농 재등장의 배경과 장래를 살피고자 한다.소농은 가족노동만을 사용하고 개별적 가족경영에 의존하는 소규모 농업경제 조직을 말한다. 중국 공산당은 농촌사회를 착취계급인 지주-부농, 피착취계급인 빈농-고농 그리고 착취계급도 피착취계급도 아닌 중농으로 분류하였다. 이들 중 소농의 정의에 비추어 가족노동만을 사용하는 중농과 빈농만이 소농의 범주에 속한다.중국사회에서 소농경제는 농촌 수공업의 발달과 농민들의 강력한 지위, 투쟁역량으로 활발할 수 있었다. 소농들은 대부분 수공업, 임금노동 등으로 부족한 경작수입을 보충하였다. 또한 그들은 토지집중현상으로 농지에서 유리될 때마다 투쟁으로 토지를 되찾았는데 이 과정에서 지위가 향상되었다. 이 두 가지 사회경제적 요소들이 소농경제를 뒷받침 하였다. 이러한 소농경제의 탄력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 기아지대-가족노동이 시장임금보다 낮은 가격으로 평가되도록 책정된 소작료-이다. 소농은 기아지대를 지불한 이후에도 생계를 위해 농가경영을 계속하였다. 반면, 자본주의적 경영농은 이윤이 없다면 임대경영을 꾸릴 수 없었다. 결국 기아지대로 인해 자본주의 농업은 발전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지주경제가 발전하여 산업사회로의 발전을 가로막았다.혁명전야의 소농경제는 인구압력과 토지 집중 현상으로 위기를 맞는다. 특히 소농과 토지 엘리트간의 대립이 첨예해 농민운동이 점차 격화되었다. 그러나 농업위기는 공산혁명으로 해결되었다. 특히 토지개혁을 통해 소농들에게 토지를 되찾아 주고 지주제를 소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소농경제가 소멸되는 듯 했으나 공산혁명 후 실시 된 대규모 집체경영의 한계를 인식한 개혁 주도세력은 마오 쩌똥의 죽음과 함께 가족농을 장려하였다.재등장한 가족농이 혁명전의 소농경제와 연속성을 갖는다는 시각에서 농촌문제에 대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인구억제 정책과 가족농의 재등장은 서로 상충된다. 가족농을 적극 장려하면서 그 노동력의 원천인 가족 즉 인구를 억제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다음, 가족농의 재등장은 사회주의 체제의 뼈대인 공유제를 위협하고 있다. 농지 재분배이후 공식적으로는 농민이 토지를 사유화 할 수 없지만 실제는 농민이 소유물로 인정하고 있어 농민소유권이 발전 할 소지가 있다. 마지막으로 가족농의 재등장이 그 특성상 가족적 유대관계를 강화 시켜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공산당의 독점적 위치가 약화될 수 있다.소규모의 가족노동만을 사용하는 가족농이 다시 중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혁명전에는 가족농이 바탕을 이루는 소농경제의 탄력성은 자본주의 농업의 발전을 방해하여 산업사회로의 길을 막았다. 20세기에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밑거름이 되었지만 그 후의 새로운 농촌환경은 소농경제의 소멸을 가져왔다. 중국농촌사회에 있어 소농의 탄력성이 결코 보탬이 된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농은 가족농으로서 재등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농업의 특수성으로 인한 소농과 가족농의 연속성을 인식하고 중국의 과거와 미래를 이해해야 한다.
    인문/어학| 2004.03.17| 2페이지| 1,000원| 조회(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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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고지키」와 「니혼쇼키」가 전하는 이야기 평가A좋아요
    1.「古事記」와 「日本書紀」가 전하는 이야기「古事記」와 「日本書紀」는 민족종교의 비교적 오랜 모습을 전해주는 중요한 사료이며 일본인 스스로사 일본의 사회, 역사, 사상에 대해서 기술한 오래된 책으로 그 자체가 귀중한 문화재이다.1.「古事記」와 「日本書紀」의 공통점① 제기(帝紀), 구사(舊辭)등으로 정리·가필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② 씨성사회의 산물이다.③ 역대 천황의 계보와 각 시대의 일들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기술한 역사서 체계이다.③ 사상적 창작과 사실의 가공·변형한 기술이 있다.(단, 日本書紀의 天武천황, 特統천황의 3권은 정확한 사실의 기록이다.)④ 고대 초기 민중의 생활모습이 나타나 있다.민간전승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가장 오래된 요소예: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두 신의 건국에 관한 설화 등은 옛날 부터 민간에서 전해오는 설화이다ニハツヒ의 신, アスハ의 신, ハヒギ의 신 등 실제로 민간에서 섬기던 신들이 열거되 어 있다.⑤ 천황과 지배계급의 지배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이야기 체계를 갖는다.권두의 '가미요'이야기에 민간전승과 함께 지배계급의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예: 가미요의 내용: 황조신의 권위와 그 의지의 실현, 일본 군림이라는 내용을 중신으로 전개→대왕이 군주로서의 지위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정치사상을 신화를 통해 표현한 것2. 오늘날의 記와 紀예전에는 기와 기의 이야기가 일본인의 선조의 천황을 숭배하는 존황정신의 원천으로 생각되어 국민적 고전으로 존중을 받았지만 그 존황정신이라는 것은 지배계급만의 사상이었다. 6세기 초의 현실 상황이나 민간설화를 소재로 하여 지배계급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기 때문에 전체적 구상이 결코 민족적 서사시라고는 할 수 없다.2. 古事記①「古事記」가 만들어진 배경天武천황은 중앙 집권 국가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정치 활동에 있어서 “일본의 지배자로서의 지위”의 정당성을 내외에 강하게 나타낼 필요가 있었다. 그를 위해서는 천황가의 역사를 중심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성립된 과정을 기으로 그런 문화 사업이 유효했던 것이다. 즉 “이 나라가 생겨서 여기까지 발전해 온 것은 역대 천황의 공적에 따른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당시의 유력 호족들에게 전해지던 전설과 신화등을 정리해 일본 공식 역사를 구축했다.② 古事記의 의외의 오락성古事記라는 작품은 재미있고 감동적인 오락성 있는 문학으로서 완성되었다.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활약하는 등장인물들도 다채롭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심정은 매우 인간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도 커다란 감동과 공감을 주고 있다.③ 고지키의 내용こじき의 전체적인 구성은 上·中·下권,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上권 : 초대 천황 神武천황까지의 이야기로 결국 이것은 완전히 신화이다. 상권에서는 신 들의 탄생과 생애를 쓴 드라마가 이야기되어 있다.イザナギ와 イザナミ부부사이의 갈등, アマテラスオオミカミ와 スサナオノミコト 남매의 이야기, スサナオ에 의한 ヤマタナオロチ퇴치하는 대모험 활극, スサナオ의 6대 손자인 オオクニヌシ가 シナバノシロウサギ를 구한 자비 깊은 일화 등·中권 : 神武천황에서 神천황 (제 15대)까지의 일화를 모으고 있다. 내용은 극히 전설 적 으로, 허구와 사실의 중간적 위치를 갖는다. 당연히 神武천황에서 수대의 천황까지 는, 상권에 등장하는 신들과 다름없는 가공의 인물이다. 古事記의 절반 이상은 틀림 없이 허구일 뿐이다. 그리고 중권에는 한 비극의 주인공 ヤマとタケルノミコト의 드라마도 들어있다.·下권 : 仁德천황 (제 16대)에서 推古천황 (제 33대)까지의 기록이다. 古事記는 상권에서 중권, 하권에도, 허구에서 사실로 완만하게 이행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古事記는 전편에 남녀의 이야기가 실로 많은데 물론 하권에도 정신적인 사랑과 남 녀의 육체적인 욕망의 문제를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여성 멸시나 부정 등의 도덕적 생각은 불고 등의 외래 사상의 영향으로 일본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古事 記시대의 고대인은 그런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성의 문제를 사람이라고 하는 생물 로서의 심의 대상으로 여겼다. 따라서 여기에 기술되어짐 신화 나 전승되어진 것 중에 남녀의 드라마는 어느 것은 장렬하고, 어느 것은 노골적이 면서도 구애됨이 없이 되어 있다.또, 古事記에는 일본 예부터의 생과 죽음에 관한 가치관이나 일본의 농경 문명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회관도 잘 해독할 수 있고, 원시적인 천황 숭배의 마음가짐도 포함되어 있다.3. 日本書紀① 日本書紀가 만들어진 배경古事記는 日本書紀보다 8년 먼저 완성되었다. 古事記프로젝트를 추진한 天武천황은 완성을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元明천황이 의지를 이어 만들어냈다. 그러나 元明천황이 古事記의 완성을 보고 만족스럽지 못했던 모양으로 자신이 납득해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내야 한다고 해서 진지하게 시작한 후 日本書紀가 만들어진 것이다.② 日本書紀의 완성도日本書紀의 제작의 スタンス는 역사를 상대적, 객관적으로 보는 합리적인 태도와 연결된다. 日本書紀에서는 신화를 이야기할 때 하나의 설명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가지 설명을 덧붙인다. 따라서 참으로 성실한 태도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日本書紀구성의 커다란 포인트는 꽤 완성도 높은 편년체로 만들어 졌다는 점이다. 기재 사항이 정확히 역사 순으로 배열되어 있고 각각의 일화의 년,월,일이 기록되어 있는 등 배려가 구석구석까지 미쳐 있다.또한 다루고 있는 범위가 古事記보다 방대하다.기술법은 년월일을 명기하기도 하고, 대륙, 반도의 사서를 인용 주기하기도하고 별전을 병기하는 등 사서로서의 객관성을 중시한 흔적이 엿보인다. 순 한문체 편년식의 기술법을 채택하고 있으나 가요의 표기 따위에는 일자일음의 음가나를 사용하고 편찬기에 새로이 흘러 들어온 대륙 북방의 한음을 사용한 점이 [古事記]나 [万葉集]과 다르다.③ 日本書紀의 박력 있는 전개日本書紀의 내용을 문학적으로 한마디로 한다면 「남성다운 기개있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을까. 「대외적인 사서로서의 중국의 역사에 대항에 주겠다」는 정열이 편찬 스텝에게 있었던 것인지, 권력 쟁탈의 드라마 등 엄격하고 격렬한, 피 비린가 생생하게 이야기되어 있다. 전국 시대의 활극 같은 박력신등, 실로 재미있는 드라마로 완성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의 우아한 이미지와의 차이에 아찔아찔할 정도이다.④ 日本書紀와 六國史조정은 日本書紀의 완성에 꽤 만족한 모양으로, 그 후 편찬하는 역사서를 시리즈화해, 헤이안 전기까지 日本書紀를 처음으로 하는 6권의 역사서를 만들어 낸다.이것은 六國史로 불려져, 전 권을 읽으면, 神武천황 (초대)부터 光천황 (제 58대)까지의 사적을 알 수 있다.4.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다른 점古事記는 어디까지나 일본어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로 쓰여졌고 日本書紀는 중국어로 쓰여졌다. 日本書紀가 한자로 쓰여진 것은 - 국제감각-으로 유지되어진 グロバル 적인 역사서이기 때문이다.당시 일본에 있어 해외는 중국과 조선 동아시아 문화권을 가리킨다. 그 곳은 일본에 있어 선진국이 그 문화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이 정치적·문화적 목표였다. 그래서 해외에 당당하게 보여질 역사서로 日本書紀가 만들어진 것이다.따라서 이 책에는 일본 내외의 사건을 -세계 전체 속에서 의미를 부여한다- 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과 조선의 일도 열거하고 두 나라의 교섭에 대해서는 특별히 자세히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기개는 古事記에는 없다.신화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日本書紀]와 큰 차이는 없으나, [日本書紀]가 완성한 전제적 고대국가의 정정에 위치하는 천황을 받드는 새로운 천황관에 서서 묘사하고 있는데 비해서, [古事記]의 경우는 그것보다도 전대의 왕권의 소유자로서의 천황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소박한 씨족전승의 원래의 모습을 많이 닮고 있다. 문학성도 이러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5.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비교古事記日本書紀성립년712 ( 和銅5 ) 년720 ( 養老4 ) 년편자オオノヤスマロトネリ親王문체한자의 음을 빌린 일본식 표기순수한 한문성격·物語의 형식을 갖는다·신화, 설화, 가요에 중점·문학성이 풍부하다·史書의 성격이 강하다·연대를 따라 일어난 일을기록한 편년체·사실의 객관적인 기술3권·상권: 천지창조에서 시작한 신화·중·하권: 神武천황에서推古천황까지의 이야기·전 30권·神代, 神武천황에서 特統천황까 지의 이야기특색·국내적이다황실의 위신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신화, 설화, 가요에 중점을 두고 있다.·국제적이다외국에게 일본의 국위를 나타내 보인다.의의·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천황가의 신화·六國史의 시초·국가의 正史라는 성격6. 風土記713 (和銅6)년에 조정은 제국에 「風土記」를 작성해 제출하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나라·군명의 유래와 국내의 산물, 또한 토지의 상황과 산하의 모양, 또 토지의 전설 전승을 기록하게 한 것이다. 반전수수를 철저히 하기 위해 각 국의 상황을 파악하는 목적으로 제출시켰다고 한다.이 명을 받고 어느 정도의 나라가 제출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出雲國風土記」는 완전한 형으로 존재하고 그밖에 常陸, 播磨, 豊後, 肥前의 5개의 「風土記」가 현존하고 있다. 이것들은 「古風土記」라고 부른다. 또 이외의 책들에 인용되어 남은「逸文」이 있다.① 성립배경·겐메이 천황의 칙명으로 보고된 지리와 고전승 등을 편찬한 지리지·「 고로가 전승하는 옛 이야기」에 수록된 각 지방에 전승되는 신화, 전설, 설화는 풍부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② 문체거의 한문체로 되어 있지만, 센묘체나, 만요가나로 된 부분도 있다.③구성과 내용·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후도키는 「이즈모 후도키」·문학성이 짙은 이야기 : 나라만들기, 날개옷 전설(나무꾼과 선녀)등④문학사적 의의·지방이나 민간의 고전승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각국에서 전하는 신화, 전설, 설화를 기술하고 있다·역사적, 문학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7. 세계의 신화와 일본의 신화① 그리스로마 신화 ··· 카오스(Chaos)로 부터 신들의 탄생태초에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고 '카오스(Chaos,혼돈)'만이 존재했다. 카오스는 무질서하고 정형이 없는 덩어리로 모든 물질의 원형과 에너지로 꽉 찬 공간이었다. 물질들과 에너지가 아직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모든 것이 서로 뒤엉켜 있는 상다.
    인문/어학| 2003.09.17| 5페이지| 1,000원| 조회(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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