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정당공천제의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지방선거에서 정당관여의 허용과 제한의 문제는 지방자치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서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지방선거에서 정당관여는 입후보자의 당적보유 허용여부, 선거시 정당공천 및 정당표방 허용여부 등이 포함된다. 현대 민주정치는 대의민주정치인 정당정치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각급의 선거에 정당이 참여하는 것은 지방행정에 대한 책임과 시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지방자치를 통하여 민주주의 사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취지이다. 이화같이 민주정치는 정당정치이고, 민주정치의 구현으로 지방선거에 입후보자를 정당이 공천하는 정당공천제는 민의를 수렴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민주정치 구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이다. 이제 정당은 오히려 민의의 수렴과 이의 정책반영이라는 중개적 기구로서의 역할이 보다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다. 또한 중앙정치와 지방정치를 연계하여 정치의 효율성을 확대하고, 시민의 감시와 비판기능을 보다 강력하게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정당참여의 이론이 타당하다 하겠다.정당공천제에 대한 논의는 크게 찬성론과 반대론으로 나뉘고 있으며, 서로 순기능과 역기능을 들고 있다.먼저 찬성론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지방자치는 민주정치의 기초이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출발이라는 견해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 이면서 정당정치를 중심으로 하여 실현되기 때문에 지방자치의 원리도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된다. 민주정치의 상징인 정당은 선거에 참여하여 대표자를 선출하고 아울러 시민의 의사를 수렴하여 정책에 반영하고 권력을 획득하여 당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 정당정치의 절차이다. 정당공천제의 순기능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첫째, 정당참여로 시민의 정책반영이 용이하다. 개인적인 시민의 의사보다는 정당을 통한 결집된 의사반영이 정책반영에 용이하며, 정책집행결과에 대한 감시와 비판기능이 가능하여 명실공히 시민의 대표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둘째, 정당참여는 대의적 민주정치를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시민을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결집이 용이하다. 지방의 의사와 여론을 형성하고, 조장함은 물론 대표하는 기능을 갖는다. 또한 의견을 달리하거나 다양한 의견 등을 정당은 이를 조정하고 통합함으로서 지방자치의 효율화를 기대 할 수 있다.셋째, 지방의 정치화로 풀뿌리 민주주의 구현이용이하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의 기초이고 근원이며 뿌리이다. 지방선거에 정당이 참여함으로서 시민의 정당참여가 가능하고 따라서 지방의 정치화가 활성화 된다. 정당의 기본적 조직인 지방이 활성화됨으로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구현이 가능해 진다. 반대로 정당참여가 제한 또는 배재된다면, 정당운영이 어려워지고 이로 인해 시민의 의사체계가 많은 제한을 받게 된다.넷째, 정당의 지방선거 참여는 후보자들에 대한 시민의 검증과 정당의 책임과 의무에 대하여 시민의 비판이 가능하다. 정당의 시민의 지지와 지원 속에서 발전되고 권력 확보가 가능하기 때문에 정당의 정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선출한 후보자의 자질과 품성, 능력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다섯째, 정당은 필요한 교육 및 훈련을 통하여 엘리트를 양성하고 사회에 기여하여야 한다. 지방의 엘리트를 선발하여 교육과 훈련 및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게 하여 지식을 배양하고, 중앙정치의 엘리트를 미리 양성하여 미래에 훌륭한 중앙정치지도자를 배출한다.반대론자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실제적으로 지방자치는 완전한 지방자치가 많은 제한을 받고 있다. 지방의 일에는 순수 지방자치의 사무도 있고, 국가사무이면서 지방에 위임하여 실시하는 사무가 상존하나. 따라서 지방자치는 국가사무와 지방사무가 병행실시되는 종합행정체제이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관여와 시민의 관여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체제에 정당의 참여가 전제된다면 중앙정부와 지자체간의 관계 외에도 중앙정당과 지자체간의 관계가 성립된다. 정당의 추천을 받아 당선된 지자체장은 두 개의 상전으로부터 지시와 통제를 받게 됨으로서 자율적 활동보다는 지도와 감독 하에 있는 지방자치에 반하는 지방행정을 실현하게 된다. 자치행정에 있어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실적제, 혹은 지업공무원제 등이 압력을 받는 소위 정치와 행정 일원론에 의한 엽관제적 폐해가 우려된다는 견해이다. 이에 정당공천제의 역기능적 견해는 다음과 같다.첫째, 지방자치에 중앙정당이 개입됨으로서 자치행정이 많은 제한을 받는다. 서구 국가에서처럼 중앙정당이 지방자치의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하고 중앙정당이 정당의 이익과 반하는 일체의 활동을 제한하고 방해하기 때문에 지방자치 구현에 많은 애로를 갖는다.둘째, 중앙정당 참여로 지방의 의사가 무력화되어 진다. 지방의 문제는 지방주민의 의사에 의해 해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앙당의 영향과 요구에 의하여 추진되기 때문에 주민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거나 혹은 주민의사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결정되어 진다.셋째, 중앙정당의 지방자치 지배로 인해 견제와 균형이 어렵다. 한 정당이 어느 한 지역에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다수석을 차지하거나 혹은 지방의회 의장을 모두 장악하게 되는 경우에는 지방자치의 원리인 견제와 균형이 곤란하다.넷째, 정당의 참여로 지방선거의 과열로 갈등과 마찰이 발생된다. 지방자치단체의 선거는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방주민만의 일이고, 또한 지방주민만이 책일을 져야 할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선거가 과열 및 혼탁해지고 또한 입후보자끼리 갈등과 마찰로 지역 주민이 단합되지 못하고 양분되는 현상이 발생되고 있다.우리나라의 정당공천제의 문제점과 해결 방향에 대해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이번 5.31 지방선거부터 정당정치를 발전시키고 책임정치 구현으로 지방정치를 활성화한다는 명분으로 기초의원까지 정당공천제가 도입됐다. 그러나 결국 정당공천제는 정당개혁없이 당리당략의 희생물이 됐고, 지방정치를 중앙정치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나라처럼 지역 이기주의가 심한 경우 공천신청자가 본선거보다 공천과정에 전력투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국회의원이 사실상 공천을 좌지우지하다 보니 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수단을 총동원할 수밖에 없다. 정당이나, 인물, 정책보다 정당과 국회의원에 대한 충성도 눈도장을 잣대로 공천여부가 결정되고 당선에서도 유리하다면 정당공천제는 그 명분을 잃게 된다. 지금의 정당공천제는 지방의원을 국회의원의 지역 사조직으로 전락시키고, 지방자치는 중앙정치에 예속되며, 지방선거나 지방자치는 중앙정치의 축소판이 된다. 지역 국회의원을 향한 맹목적 줄서기, 충성경쟁, 음성적 향응, 공천 헌금 등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국회의원은 공천권을 통해 내천, 사천으로 풀뿌리 지방정부와 지방정치를 장악하려 할 것이다. 정당공천제를 폐지하든지 대폭 손질을 가해 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이 소신과 열정을 갖고 일할 환경을 만들어줘야 할 것이다. 기초단위의 선거 모두 정당공천을 받게 돼 있는 선거법을 광역단위에만 공천을 허용하도록 고치거나 후보가 지지하는 정당을 공식적으로 내걸 수 있는 정당표방제를 도입하는 방안 등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시장·도지사·군수·구청장을 유권자가 뽑는 게 아니라, 국회의원이 임명하는 꼴로 방치해선 절대 안 된다. 또한 공천비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국민에게 불법은 반드시 처벌한다는 법 감정을 심어줄 수 있도록 검찰개혁을 통해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여 성역없는 수사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할 것이다.
사르트르의 무대에 나를 세우다.사르트르의 무덤없는 주검은 연극을 위한 글이다. 그 속에는 연극을 위한 무대가 있고, 연극을 완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각종 소품들이 있으며,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 있다. 사르트르가 만든 이러한 무대, 배우, 소품, 분위기 등을 그대로 두고 그곳에 나의 자아를 넣어 보고자 한다. 사르트르의 목적처럼 그곳은 인간이 자신의 가치관과 온전히 대립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신체적 고통에서의 해방, 혹은 목숨의 부지,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의 가치에 대한 불신 등 수많은 고통과 자신이 지키고픈 양심과의 갈등에서 과연 나 자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다.솔직히 사르트르가 마련해준 그런 장치를 현재의 나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나는 그다지 장을 사랑하지도 않고, 수많은 동지들의 목숨 또한 나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나는 그러한 상황에서 고문을 하는 자들에게 가면 모든 것을 토설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토설했음을 말하지 말아달라고, 그리고 동지들의 곁에 와서는 토설하지 않은 것처럼 묵묵히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살아 나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혹자들은 나를 매우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이라고 하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존재도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서 나간다면 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지금 목숨을 바칠 것 같이 소중한 무언가가 살다보면 또 생길 것이다. 신이 내린 가장 큰 선물이 망각이라고 하였던가? 아무리 큰 양심의 가책도 항상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 그 고통의 시간은 날이 갈수록 짧아 질것이도 나중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해 내 목숨을 부지 하겠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행동이다.나에게 적용하여 나의 가치 갈등을 유발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다면, 장이나 동지들의 목숨 보다는 나의 가족이나 나의 애인의 목숨을 적용시키는 편이 오히려 적절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오면 나는 정말로 고민스럽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직 그 상황에 있지 않아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동시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이제 사르트르가 마련해준 무대에 나를 세워보자. 그 상황에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내 자아에 대한 변명을 나도 모르게 수도 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내가 죽지 않아야 하는 이유들 말이다. 먼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남겨진 사람에게 오히려 고통을 주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야 한다. 내가 대신 죽어준다면 그들은 평생 나로 인해 가슴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짐을 내가 대신 지기 위해 난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변명을 하는 것이다. 책에서 나온 것처럼 ‘나처럼 젊은 사람은 살아남아서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도 살고 싶은 마음이 속으로 가득한 나에게는 솔깃하게 한다. 나는 내 이 어려운 상황에 닥치기 전에 재능이 있었는지, 혹은 선행을 하고자 한번이라도 마음먹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곧 내가 살아야할 이유가 되어 스스로 배신을 정당화 시켜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난 어떻게 선택을 할 것인가? 아직 그것은 나도 도저히 모르겠다. 정말이지 어려운 문제이다. 양심의 가책이나 자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릴 수 없어서 쉽게 배신을 할 수도 없다. ‘배신을 해서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을 모조리 죽이고 내가 살아남는다 하여도 아마 정체성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려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먼저 고문을 받고 있는 시간이다. 더 많은 생각들이 갈등을 격화시킨다. 고문 받는 동지의 비명소리가 들릴 때 마다 ‘저 녀석이 아마 토설을 할꺼야! 나 혼자 입을 다물고 있다가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지도 않아! 이건 개죽음일 뿐야!’ 거짓인줄 아는 소리를 혼자 머릿속으로 외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혹은 변명의 화살을 나에게 돌리기도 한다. ‘나는 저런 고통을 견디지 못할 꺼야! 차라리 빨리 토설하자!’ 이런 생각도 나를 괴롭힐 것이다. 결국 고문은 이것이다. 손톱을 뽑히거나 몸이 더러워지는 것보다 더한 고문은 바로 이것이다. 내 자아 속에서의 수많은 변명과 그에 대한 반론들 이러한 과정이 되풀이 되면서 나는 더 고통스럽다. 수많은 변명을 늘어놓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실망감으로 힘들어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실망에도 쉽사리 죽음을 선택할 수도 없다. 이러한 나의 이상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망이 나를 더욱 지치게 한다. 이렇게 스스로 정신적인 고문을 당하다가 이제는 내 차례가 돌아온다. 초죽음이 되어서 돌아온 동료, 그는 힘은 없어 보이지만 당당한 미소로 자신이 토설하지 않았음을 과시하며 나의 눈을 바라본다. 돌아온 동료의 그 눈빛을 보면서 나는 수많은 생각을 한다. ‘정말 정말 실토하지 않을 걸까? 저 눈빛 진짜일까? 나에게도 토설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가? 쳇, 나는 내 뜻대로 할꺼야! 이제 와서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이런 비겁한 생각과 ‘저 친구도 견뎠으니 나도 견딜 수 있을꺼야!, 당장 죽이지는 않는가 보군!, 견딜 때 까지 견뎌보자!, 그래야 후회라도 없지’ 이런 다소 희망적인 생각도 교차 한다. 그러나 정작 고문실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 이외에 모두는 나의 의지를 꺾으려는 존재들뿐이다. 사방이 적이므로 나는 철저히 외로워진다. 그들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도 알고 이런 고문을 받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알고 있는 고문의 달인들이다. 그들은 나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기도 할 것이며, 때로는 나의 생존욕구를 이용하여 내가 살아야할 정당한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사탕발림에 스스로 타협하고 싶어진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 이제는 힘도 없고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진다. 나의 의지에 한계가 온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 지금 말하려면 이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어.’ 라는 생각도 생긴다. 정말이지 갈등의 연속이다. 이쯤에서는 나는 이것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고통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나를 위한 갈등이고, 나를 위한 인내, 나를 위한 싸움이다. 고문하는 녀석들에게 못 이겨 토설한다면, 그것은 정말 치욕적인 일이다. 내 이상과 정체성을 뿌리까지 죽이는 일이다.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일을 내가 가장 환멸스럽게 느끼는 존재들에 의해 정해야 한다는 것은 참지 못할 일이다. 나는 결국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동지들의 품에 돌아온다. 내 다음에 고문실로 들어갈 나의 동지에게 힘없어 보이면서도 당당한 눈으로 말한다.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말이다. 그때서야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의 의미를 알게 된다. 나는 그렇게 나를 위해 그리고 나의 사랑을 위해 죽어간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그들이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이 고통스러워한다면, 나는 그 고통을 전해준 악한 사람인 동시에 고통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나를 즐겁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순간, 순간마다 나는 즐겁게 또는 자랑스럽게 살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선택을 준 나의 마지막 변명이다.
실존하는 매트릭스 ; 사회 시스템 통제20011769 행정학과 2학년 윤기선매트릭스를 보고 나서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다 하다보면 끝도 없을 것 같아 나에게 가장 많은 생각하게 했던 것에 대해 감상문을 적기로 하였다. 그것은 진실의 인식은 무엇이며, 현실 사회의 시스템 이라는 또 다른 매트릭스에 내가 통제 되고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우리는 푸르른 산을 보고 푸르다고 말하고, 장미를 보고 붉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붉다, 혹은 푸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태양에서의 가시광선 중 붉은색 혹은 푸른색이 그 사물의 표면에 흡수 되지 못하고 반사된 것을 우리의 시신경이 인식하여 뇌에 신호를 보내 우리가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붉거나 푸르게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보다 다양한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종의 신체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가르켜 색맹이라고 하며 그들의 눈에 붉게 혹은 푸르게 보이지 않는 것을 붉은 것 푸른 것으로 인식해야 하며 그것의 진실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붉고 푸른색임을 당연적으로 강요한다. 무지개의 색깔을 우리는 7개의 색으로 인식하고 에시키모들은 5가지의 색깔로 인식한다. 사실 무지개의 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존재하고 우리의 눈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가시광선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망막에 맺힌 상에 대한 사전지식에 의한 가치판단 기준에 따른 뇌의 분석작용의 산물을 그대로 진실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예를 사회적인 면에 적용해 보면 우리 사회의 체제와 언론 등에 의해 우리가 통제 당하고 우리의 인식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과 악의 기준은 가시광선의 색깔과 누구의 눈에 어떤 빛이 반사되어 인식되느냐와 같이 모호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진화하기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운명적 존재인지라 그 모호한 기준을 인류발전에 용이 한가 아닌가에 두었다. 인류발전이라는 미명아래 망설임 없이 정해진 그 기준에 의해 파생된 사회 규범과 윤리에 우리는 어느새 쇠뇌당해 있으며, 그것이 우리들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있다. 사회가 유도하는 쪽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따라간다. 예를 들어 초ㆍ중ㆍ고의 교육을 받고 대학졸업을 한 후 일정한 나이가 되면 가정을 이루어 사회유지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생산하고 그 2세를 사회에 유익한 존재로 만드는데 남은 인생을 소비하는 동시에 수익적 사회활동을 충실히 하여 사회체제의 유지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 하여야 한다는 강요를 받으며 사회화를 통해 그것이 당연한 것이며 그러한 생활이 행복이라고 가치 기준을 주입 당한다. 사회체제의 규범과 사회화에 의한 통제 외에 언론에 의한 통제로부터도 현대인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수많은 정보의 홍수의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대부분의 정보의 가치 판단을 언론에 맡긴다. 그 수많은 정보를 우리가 일일이 조사하여 판단할 시간과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는 고도의 분업화 전문화된 사회로 언론에 그러한 역할이 주어져 그 전문적인 일을 그들이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사실의 인식을 그들의 판단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진실은 뒤로 하고 그럴듯하게 포장된 언론의 보도에 맹신해 버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사물에 반사되는 어떠한 가시광선의 한 종류를 푸른색 혹은 붉은색 등으로 강요해버리는 것과 같다. 그에 의해 우리는 인식의 자유를 빼앗길 수 있고 하나의 톱니바퀴의 하나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 인간을 위한 국가. 언론 등을 포함한 SYSTEM이 아니라 SYSTEM을 위한 인간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