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고학REPORT중국 문헌을 통해 본 삼국의 사회상과목명:교수님:학 과 :학 번 :성 명 :제출일:?들어가며1. 중국문헌의 성격2. 중국문헌에 나타난 고구려의 사회와 문화(1) 고구려인과 고구려사회(2) 고구려 건축(3) 고구려의 산성(4) 고구려 고분벽화(5) 부경3. 중국문헌에 나타난 백제의 사회와 문화(1) 중국 문헌의 백제 등장(2) 백제인과 백제 사회(3) 백제語(4) 백제의 주택4. 중국문헌에 나타난 신라의 사회와 문화(1) 중국 문헌의 신라 등장(2) 구당서 에 기록된 신라 사회(3) 신라 무역(4) 신라의 역사서 편찬(5)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등장5. 중국문헌에 나타난 발해의 사회상?나가며들어가며1. 중국문헌의 성격한국 고대사는 일찍부터 문헌의 한계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금석문이나 유물 유적발견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으며 외국문헌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 졌다. 외국문헌으로는 중국의 25사 와 일본서기가 기본 자료이다. 중국문헌은 그 외에도 자치통감(自治痛感) , 통전(通典) , 책부원귀(冊府元龜) 등이 있으나 이들은 전적으로 화이론 적인 서술로 일관되어 우리나라의 설명은 ‘중국 이해를 위한 부수적, 보조적 의미’에 불과 하다. 더구나 양국 관계 등의 설명에 치중하고 있으며 약간의 습속 차이점만을 부각하고 있다.그러나 국내 문헌에는 볼 수 없는 많은 기록들을 갖고 있으며 국내문헌의 보충적 의미와 원전의 성격을 띄고 있어 한국의 고대사회 이해에 기본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고구려의 예서제, 국동대혈, 부경, 도성체제 등을 비롯하여 백제의 요서진출과 신라의 화백 제상 등은 중국 문헌을 통해서 그 진상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런 중국문헌을 참고 할 때 고려하여야 할 점은 한국 고대사의 최초 문헌인 삼국지 는 사기 나 한서 와 달리 중국인의 천하관 보다는 현실적인 인식이 엿보이고 당시 사회상을 나타낸 민족지적 성격을 띄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어디까지나 중국의 역사를 기록하기위해 중국과 관계가 있는 는 글이 적혀있으며 신당서 에는 발해 책성 지방의 특산물로 된장을 꼽고 있다.지리적으로 산이 많고 농사지을 땅이 적으며 중국과 백제를 양쪽에 두어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을 하거나 난리가 나는 바람에 농사를 지을 새도 없이 싸우러 나가야 했던 고구려인들먹을 것이 부족하여 항상 바지런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잦은 외세와의 전쟁으로 인해 인내와 끈기 용기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삶의 낙을 잃지 않으려 축제를 즐기고 음주와 가무를 즐기면서 애환을 달랬던 것이다.고구려인들의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으며 이는 우리의 민족성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2) 고구려 건축그 나라 집은 반드시 산골짜기에 있으며 전부 이엉을 얹어 엮어 초가지붕이며 다만, 사찰. 신묘, 왕궁, 관청만 기와를 쓴다.- 구당서 권 199-그들은 음식을 절약하지만 궁궐 짓기를 좋아 하였다. 살고 있는 집 좌우에는 큰 집을 지어 귀신과 영성사직에 제사를 지냈다.- 삼국지 권30-이 두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기와를 쓰는 곳은 사찰과 신묘 왕궁과 관부뿐이며 살림집의 좌우에다 큰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이를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1958년 길림성 박물관에서 발굴한 건물지(동대자유지)는 정실2칸과 측실2칸으로 되어 있다. 정실2칸 중간에는 남북으로 좁은 통로가 있으며 처마 외곽은 화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정실은 비교적 유구지가 뚜렷하여 장방형으로 중앙에 큰 돌 한 개가 놓여있다.또한 연도가 동벽과 북벽을 따라 ㄱ자형으로 이룩된 이른바 ‘쪽 구들’을 하고 있으며 북벽의 서단에서 옥외의 굴뚝으로 연결되고 있다. 결국 이 건물은 고구려 도성인 황성으로 보거나 국사지로 생각하면서 고국양왕 9년에 세운 왕실사직과 종묘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또한 이곳에서 발견된 와당, 토기, 초석으로 건물의 규모를 예측할 수 있다.집안의 동대자유적은 황성이나 국사지로 보는 고구려 석조 건축유지로서 대표적이라 할 수 있으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맞선 고구려의 독자성이 중국으로부터는 토벌과 경계 위협의 대상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중국 측의 표현 일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고구려는 한국 고대문화의 성립을 주도하는 동시에 그 보존의 주역이 된 나라였다. 또한 고구려인들의 습성과 생활방식은 지금의 우리와 아주 흡사한 면이 많은 것도 볼 수 있다. 이로보아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이루는 우리의 조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3. 중국문헌에 나타난 백제의 사회와 문화(1) 중국 문헌의 백제 등장중국에서 보여 진 백제에 대한 관심은 결국 삼국사기 기록이 보여준 보충이라는 현실적인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중국문헌에 보여 진 백제상은 중국사 이해라는 기본시각 위에서 서술되었으므로 중국과의 관계 설명이 대부분을 이룬다고 하겠다.백제가 중국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5세기말의 송서 (487-488)이후이다.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정치적 시련을 받고 있던 때였으므로 그 내용도 백제왕의 군사적 호소에 대한 기록이 주를 이루고 있다.백제는 고구려가 3세기의 삼국지 에 나타나는 것에 비하면 2세기나 뒤에 중국에 알려졌으나 신라보다는 1세기 반 이상 먼저 소개 되었다.송서 에는 요서진출과 중국에 대한 조공, 책봉관계를 주로 다루고 있으므로 그러한 외교관계 속에서 간접적으로 백제의 생활상을 찾아 낼 수 있을 뿐이다.여기에는 특히 의회12년에서 개로왕17년까지 7차의 대송관계의 기록이 남아있다.남제 서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위서 에는 백제의 기원, 산업, 생활문제 까지도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위서의 내용은 고구려의 위협을 호소한 내용으로서 개로왕 당시의 어려웠던 백제 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7세기 초에 편찬된 양서 와 주서 이후에는 그 내용이 달라지고 있다. 특히 백제 사회상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한 주서 의 내용에서 우리는 중국 측에서 보는 백제 상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였다. 따라서 백제의 지배층은 고구려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반면, 통합된 마한계통의 피지배층은 마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그 구체적인 근거로는왕의 성은 부여씨로 어라하 라고 부르는데, 백성들은 건길지라고 부르니, 중국말로 모두 왕이라는 뜻이다. 왕의 아내는 어륙 이라고 부르니 중국말로 왕비라는 뜻이다.- 주서 백제전-을 들 수 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소수의 지배층은 다수의 피지배층의 언어를 차용하게 되었고 결국 백제어는 약간의 부여어계 언어를 포함한 마한 어였다고 보아 백제어와 고구려어는 서로 다른 언어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양서 백제전의 기록을 그대로 보아 백제어와 고구려어가 같다는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 안에서 상류지배층이 일반 국민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어휘에서 얼마 되지 않는 특수어휘에서만 차이가 나는 것으로 음운체계와 문법구조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에도 왕실은 일반 백성들과 다른 특수한 어휘들을 사용하였지만 이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게다가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는 아주 밀적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교류도 매우 활발하였으므로 양서에 보이는 백제에 대한 정보는 정확한 것 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4) 백제의 주택백제 서민의 주거형태는 고고학적 발굴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북서 나 양서 등의 중국문헌 기록에 의하면 마한시대 서민들의 주거 양상은 움집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현재 주거지 발굴에서 보이듯이 가운데 화덕자리를 중심으로 기둥을 세웠던 모습이 보인다.이러한 움집의 형태는 백제시대에 이르러서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그러나 북서 의 기록에서 백제인 들은 산에 거주 한다 는 기록을 볼 때 이는 주거지 선정의 특이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높은 산이라기보다는 구릉 지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백제문화는 백제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백제인의 생활양식으로 다양한 외래문화의 변용에입을 수 있었다. 소룰 부릴 줄 알고 말을 타며 남녀의 구별이 있다. 그 나라 벼슬은 자분한지, 알한지 등이 있다.(중략)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구려인과 비슷하였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 새겨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말을 하는데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 했다,- 양서 권 54 열전 48 제이 -이러한 기록을 보면 내용이 삼국지 의 것을 옮긴 듯 하고 신라는 진의 유망민이 남하하여 성립된 나라로서 마한에 의지하다가 분리된 마한통제하의 약소국 이었다.따라서 국가적 자립이 불가능하여 법흥왕 8년 양나라에 조공한 것도 백제에 의존할 정도로 고유문자조차 없는 후진국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5~6세기 신라의 모습이다.당시 고구려나 백제는 중국에게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신라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신라관은 오랫동안 영향을 주었다.다만 신라인의 진 유망인설은 삼국지 이후 수서 로 연결되었으며 삼국사기 의 고조선유민설로 이어졌다.(2) 신라인과 신라 사회옛날에 진나라의 전쟁을 피하여 도망 나온 사람들이 한나라 오자 마한에서는 동쪽지방을 주어 살게 하였다. 낙랑사람을 아잔이라 부르는데 동방 인이 우리를 ‘아’라 부르기 때문에 낙랑인은 바로 이들일 것이며 지금의 진한인 들이다.- 삼국지 권 30 진한-신라의 조상은 본래 진한 종족이니 전하는 말로는 진 나라 때의 사람들이 진의 전쟁을 피해서 마한에 와서 붙어살았다.- 양서 권 54 제이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격파하니 옥저로 쫓겨났다. 그 뒤 고구려로 대부분 돌아갔는데 남아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를 세웠다.- 수서 권 81열전 46 동이 -이 3개의 기록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이 지닌 북방 이주민이나 고조선인의 남하과정을 설명하고 있어 일찍이 조선의 유민이 이곳에 와서 산 곡간에 살면서 6촌락을 이루었다는 삼국사기 의 기록과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겠다.양서 에서 보듯이 신라가 본격적으로 대륙에 알려진 것은 6세기 이후라 하겠다.양서 다음의 이었다.
답사장소: ‘암사동 선사주거지’,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139번지 2호 외지정번호: 사적 제 267 호지정날짜: 1979.07.26시 대: 신석기시대1.답사장소 개괄이곳은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신석기시대(기원전 5,000~1,000년)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 터이다. 이 유적은 우리나라 중서부지역의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신석기 시대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1925년 홍수로 인하여 유적의 존재가 알려졌으며 1967년부터 1971년 사이에 전국대학연합 발굴조사단에 의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신석기시대 집자리 20여 기와 삼국시대의 문화층을 확인하였고, 특히 1975년에 이루어진 국립중앙박물관의 4차 조사에서 확인된 집자리를 현재 선사유적전시관에 복원하여 당시 집자리의 형태와 화덕, 기둥자리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 특징적이다.2. ‘암사동 선사주거지’ 답사 내용일요일(4월26일)답사날짜에 토익시험이 있는 관계로 교수님과의 답사에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다.① 암사동 선사시대 집터 유적암사동 선사주거지는 기원전 3~4,000년경에 우리나라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사람들이 살았던 움집터가 남아있는 집터유적(住居地遺蹟)으로 현재까지 29기의 집터가 발견되었다.1967년 대학연합 발굴단의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1971~1975년 사이 4차에 걸친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조사로 한국의 신석기문화를 이해하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확인되었다.집터의 형태는 원형과 네 모서리를 약간 죽인 말각방형(抹角方形)등으로 지상에서 약 50~100Cm를 파서 집터를 만들었다. 또한 암사동 유적에서는 당시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그물추, 갈판, 갈돌, 돌화살촉, 돌도끼, 긁개 등의 유물들이 많이 나왔고 탄화된 도토리 알도 발견되었다.암사동 선사주거지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집터유적으로 이 곳의 움집은 발굴 조사한 집터유적 위에 약 2m 두께로 흙을 덮고 9채의 움집을 가상 복원한 것이다.매표소를 지나 중앙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집터 유적 표시를 따라서 숲길을 걸어가다 보면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만 보아 왔던 선사시대의 움집을 재현한 집터 유적을 만날 수 있다. 총 9채의 움집이 복원되어 있는데 이 중 8채의 움집은 외부 형태와 기본 집터만을 복원해 놓은 것이고 나머지 한 채는 외부뿐만 아니라 움집 내부에 당시 사람들의 실제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여 관람객들이 실제로 내부로 들어가서 이러한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② 신석기인의 생활상우리나라 신석기시대집터로써 암사동 유적은 제일 먼저 알려진 곳으로 이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기원전 4∼3천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거의 대부분 땅을 깊이 파고 움집을??견고하게 지어서 살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는 완전한 생산경제의 단계가 아니고 일부 수렵, 채집, 어로에 의존하는 경제단계였기 때문에 대형 저장 시설 보다는 소규모의 저장시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암사동 움집은 한강을 끼고 널찍한 평지에?자리잡고 있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기반이 고기잡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고 하겠다. 이것은 어망추, 작살 등 어로도구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뒷받침되며, 화살촉들의 발견으로 인근야산에서 수렵을 했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또 도토리, 갈판, 갈돌의 발견은 신석기인들의 주식량이 도토리였으며 보습, 돌낫같은 농기구의 출토는 밭농사가 일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③ 움 집신석기시대 살림집은 동굴을 이용한 경우도 있으나 움집이 일반적이다. 움집이란 일정한 넓이와 형태를 가진 구덩이를 파 집바닥을 땅밑에 두고 구덩이안은 별도의 벽체 시설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닿게 된 집을 말한다. 신석기시대의 움집은 해안가 구릉이나 큰 강변의 대지에 지어졌는데, 직경 4∼6m 크기의 원형이나??모를 죽인 방형의 구덩이를 깊이 50∼100㎝정도 판 다음 화덕자리등릏 볼 수있었다.????화덕자리는 돌이나 진흙으로 원형이나 타원형, 장방형의 테두리를 돌려 집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보온과 취사에 이용되었다. 바닥은 아무런 시설이 없거나 또는 진흙을 깔아 다진 것이 있는데 그 위에 풀이나 짐승가죽 등을 깔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은 움구덩이 주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한 쪽 끝을 움 중앙에 모이게 묶어 골격을 형성하였는데 서까래 아래 사이에 잔나무 가지나 갈대, 억새 등의 풀을 이어 덮었다. 움집의 규모로 작은 움집은 2∼3명, 큰 움집은 5∼6명이 생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④ 저장공(貯藏孔)주거지 외곽에 자리잡은 저장공이 모두 4개 확인되었는데 모두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직경 2.3m에 깊이 0.34m, 직경 0.9m 에 깊이 0.35m, 직경 0.95m에 깊이 0.43m, 직경 0.85m에 깊이 0.28m의 4개가 보이고 있다. 규모가 비교적 크기 때문에 저장공(貯藏孔)이라 할 수 있는 이 시설물은 원형의 수혈로써 외곽의 한쪽에??2단의 계단을 만든 출입시설이 있다. 직경은 3.4m, 깊이는 1.74m인데 바닥은 어깨면으로부터 1.4m깊이에서 평탄해지다가 중앙부에 이르러 장방형에 가깝게 좁아지면서 깊게 파였다.⑤ 출토유물집터에서 드러난 유물중 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빗살무늬 토기이다. 이 토기는 바탕흙이 사질토에 운모가루 또는 석면과 활석이 섞여 있으며, 흙테를 하나씩 따로 빚어 차례로 쌓아올린 수법으로 만들어졌다. 그릇 모양은 곧은 입술모양에 뾰족밑 또는 둥근밑이고 반 달걀모양을 하고 있다. 빛깔은??부드러운 갈색이나,문살무늬, 생선뼈무늬 등 여러 유형이 있으며 무늬가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지역별로 크게 동북, 서북, 중서부, 남부지방의 4개 문화영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중서부 지방은 뾰족밑 토기가, 동북지방은 납작밑 토기가, 남부지방은 둥근밑 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뾰족밑 토기는 계란의 윗부분을?옆으로 잘라 버린 것 같은 모양을 보인다.??암사동 집터유적지에는 여러 가지 석기가 드러났는데 대표적인것으로는 돌촉화살·돌도끼·공이·긁개·갈판과 갈돌등이며 이러한 유물은 돌짐승의 사냥과 가죽을 벗기는 데??쓰였다고 보여지며, 공이는 들짐승의 뼈나??열매같은 것을 부수는데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갈판과 갈돌은 도토리알과 같은 열매를??갈아서 가루를 내는데 쓰였을 것이다.
시선을 잡아끄는 제목덕분에 선택하게 된 이 책은 내가 생각 했던 것 처럼 달콤한 커피의 향을 풍기지는 않았다. 폭력 이라는 제목의 후반부에는 우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달콤 쌉싸름한 맛 뒤에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담겨 있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책은 교역이 어떠한 역사적 계기로 발생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과 최초의 교역이 반드시 공급과잉 된 생산물을 내다 팔기 위한 제국주의적 경제관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조공무역이라는 형태를 지닌 아시아의 특이한 교역 형태처럼 세계 곳곳에서 오늘날 교역이라 불리는 원시적인 물물교환 형태로 설탕과 커피가 교환되었으며 이를 위한 폭력과 희생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당시의 물물교환 을 짐작케 한다.나는 이 책의 서평초점을 책 제목으로 연결하려 한다. 설탕과 커피에 의한 역사적 사실들과 세계사적 움직임을 따라가 보고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보고자 했다.오늘날의 교역이라는 말이 정착화 되고 각국의 정책화된 교역정책이 있기까지 선인들은 어떠한 방법과 형태로 이를 개척해 왔던 것일까?초창기 대륙 간의 모습을 요즘과 비교해보면 대단히 평등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 듯 보이기도 한다. 책제목에 거론된 폭력, 즉 국가적 단계의 개입이 교역에 이루어지기전 상황이 그렇다는 말이다. 아시아나 아메리카에 착륙한 유럽인들은 나름대로 신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시아 여성과의 결혼을 통한 혈연적 유대관계의 성립이나 이들의 관습을 익히려는 노력 그리고 이들의 종교를 이해하려는 노력까지 당시의 유럽 상인들은 오늘날 이루어지는 교역의 기반 역할을 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것 같다.그러나 이러한 평화로운 노력이 깨어지게 된 것은 유럽의 아시아-아메리카-아프리카의 식민착취가 이루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다. 이러한 식민착취가 이루어지게 된 배경은 다름아닌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계화 시대로 들어선 지금 우리에게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그 무엇이상으로 편리하고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고, 교역에 있어서도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가져온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그러나 이 책 에서는 교통과 통신이 지구를 하나로 통일한다는 진리를 반박한다.이전까지만 해도 토착민들의 풍습을 따르고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노력했던 유럽인들은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지리적 여건이나 기후,환경의 변화를 따르던 교역이 원거리 수송, 집단지배 시스템을 따르면서 자연법칙이 아니라 경제법칙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이로 인해 중개무역 상인들 보다는 제조업자나 금융업자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줄여야 하는 것은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문화적인 거리였기 때문에 이들은 광고를 하기 시작한다. 오늘날 말하는 supermarket이나 초시장이라는 개념이 이때에 생겨났다고 한다.책 머리에서 케빈 라일리라는 역사학자가 말한대로 지금우리가 살고 있는 ‘교역이 만들어 낸 세상’은 예전에 우리조상들이 살았던 세상과는 아주 많이 다르지만, 이미 그 안에 내포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경제적 행위는 인간의 문화가 그런 것처럼 이성적 시장이나 경제적 인간 이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다양성과 유동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책 제목이 그런 것처럼 이 책을 읽고 또한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릴 수 는 없겠다.커피무역의 역사는 내가 생각 했던 것 보다 훨씬 충격적 이었다.콜롬부스의 항해에서 산업혁명에 이르는 300년의 시기까지 노예무역 광산채굴과 더불어 붐을 이루었던 교역물품들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커피, 차, 초콜릿, 담배와 같은 마약상품이었다.이것들은 사치품으로 초기에는 주로 상류층에서 향유하지만 후에는 곧 아시아-아메리카 땅에서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인들을 착취하면서 유럽 사회 전 계층에 대중화 되게 된다.커피와 설탕이 세계 교역사에서 의미 있는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것들이 꼭 필요한 물품이 아니면서도 욕망을 조장하여 수요를 창출해낸 상품들 이라는 것이면서 비유럽세계를 일순간 공장들(플랜테이션)로 전락 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커피나 담배, 사탕수수의 모든 원산지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경작지대와 다르다. 예멘의 교역항구이던 모카에서 처음으로 작황 되었던 커피는 유럽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브라질에서 집단 재배되기에 이른다.이런 상품들이 대중화 되면서 유럽이나 미국 내 노동자들이 커피나 담배에 중독되어온 역사를 보자면 막 산업혁명이 일어난 시대 노동자들이 고된 노동시간에 고통을 덜 체감하도록 끊임없이 커피나 담배를 강요당한 것이다.커피는 현재, 세계에서 교역량이 두 번째로 많은 상품으로 현대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커피가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500여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이 긴 시간동안 커피는 무려 4개의 대륙을 거쳤고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했다.카이로, 이스탄불, 다마스쿠스, 알제 등의 커피하우스는 정치적 모의의 중심지였으며 성적인 타락의 온상지였다고 할 수 있었다. 흥분제에서 중독성이 강한 약물, 그리고 체제 전복의 촉매제에 이르기까지 커피의 다양한 궤적은 다양한 시대와 대륙에서도 계속 되풀이 되어 갔다.유럽에서는 17세기 상업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커피의 인기가 올라갔다. 중세의 중동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한 나무열매가 서구 자본가들의 상품으로 발전한 것이다.당시 유럽의 수도들에서는 까페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파리에서 까페가 호황을 누리게 된것은 토마스 브레넌의 말처럼 ‘사회적으로 열등한 무리들과 섞이고 싶어하지 않던 엘리트들의 결기’가 작용했다고 한다. 금속성 굉음을 내는 공장들이 산업시대를 열고 나가게 되자 커피는 여유뿐만 아니라 노동까지 상징하게 된다. 이렇게 커피는 꾸준히 소비량을 늘려갔다. 커피는 현대산업사회의 바쁜 삶에 일용할 양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 자체로 산업사회의 상품이 되었다.우리가 흔히 마시는 커피에 관한 역사는 이처럼 다양하고도 수많은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커피 하나로 세계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 만큼 인간들에게 있어 커피는 수많은 의미를 지니며 이를 얻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은 문명화된 사회를 건설하고 발전된 문화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커피 못지않게 혹은 커피와 함께 우리의 삶에 필수 요소가 된 설탕. 커피의 역사만큼이나 설탕의 역사도 흥미로운 기록을 가득 담고 있다.근대 초 까지만 해도 인간들은 달콤한 맛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여기에 사탕수수가 등장하게 되고 인류가 달콤한 맛을 알게 되면서부터 설탕의 역사가 시작된다.기원전 300년전 인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사탕수수는 대단히 느리게 전파되어 천년이 지나서야 중국 일본등지에 전파되게 된다. 처음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던 사람들은 아랍인들로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여 옮겨 심고 재배하기 시작한다. 다른 지역의 유럽인들은 십자군 전쟁 중 힘겹게 전투를 치르며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이 식물을 알게되고 이것이 설탕과 폭력이 엮이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 서론(1) 르네상스의 의미(2) 르네상스 시작배경(3) 르네상스의 전파2. 본론(1)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2) 여러나라의 르네상스(3) 구체적인 작가와 작품3. 결론르네상스를 보는 여러 시각4. 참고문헌1. 서론(1) 르네상스의 의미르네상스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이라는 뜻이며, 14세기 초부터 시작된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부활을 가르 킨다. 1860년에 부르크하르트가 에서 이 말을 단순한 고대 학문과 예술의 부흥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의 전 분야에 걸친 문화 혁신 운동이라고 넓게 해석함으로써 르네상스는 하나의 시대 개념으로까지 확대되어 근대적인 성격이 강조되었다. 그리스와 로마 문화는 미약하나마 중세에도 존속하였으나, 14세기경부터 고전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해졌다. 그래서 종교적인 중세문화는 다른 세속적이고 자유로운 근대 문화가 탄생되었다. 르네상스는 단순한 고전 문화의 부흥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근대 문화의 창조라고 볼 수 있다.(2)르네상스 시작배경르네상스가 시작되게 된 배경은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그러하듯이, 단순한 하나의 원인이 있었던 것만은 아니며 사회 전반적인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중 중요한 몇 가지 요인을 살펴 보려한다. 첫째는 고대 로마유적의 보존이었다. 중세를 거치면서 거의 소멸되다시피 하였던 세속적 로마의 문화들의 보존이 알려지면서 이를 모방,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둘째는 지리적 조건과 십자군 전쟁에 의한 지중해의 무역의 중심화 현상이었다. 즉 이탈리아는 많은 물건의 집산지임과 동시에 경제적 여유를 함께 지닌 도시로 성장하였다. 셋째는 십자군 원정으로 인하여 유럽에 동방문화가 전래되면서 유럽 내에서 스스로 예술의 발전에 대한 자극과 도전을 받았다. 넷째는 지배층의 예술보호 현상이었다. 경제적인 부를 지닌 지배층은 어떤 이기적인 목적에서가 아니라 예술 그 자체를 사랑하고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함으로써 르네상스기의 예술적 부흥을 가능하게 하였다. 다섯째는 견됨으로써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과정을 통해 실현되었다. 16세기에 미술사가 열전을 저술한 ‘바사리’는 고대미술이 야만족의 침입과 중세의 우상파괴운동으로 멸망하고 그 후 거친 고인트에 의하여 독일양식 즉 고딕이나 딱딱한 비잔틴 양식이 풍미한 뒤 13세기 후반 이후 화가 치마부에, 지오토 및 조각가 피사노 등이 나와 토스카나 지방에서 뛰어난 고대 미술의 전통을 부활시킨 사실을 리나시타라는 말로써 파악하였다. 이 말이 19세기 초엽 프랑스 학자의 주목을 받아 르네상스라고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개념에 명확한 윤곽을 주고 오늘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 최초의 학자는 스위스의 미술사가 ‘부르크하르트’ 이다. 그는 그의 저서 ‘치체로네’에서 이탈리아 인들이 말한 14세기를 르네상스에서 빼고 15-16세기를 초기 르네상스,16세기를 성기 르네상스라 불렀다. 고딕말기 지오토에 의해 열려진 사실주의 회화에서 르네상스에로의 길은 15세기에 피렌체를 중심으로 플랑드로, 프랑스, 독일 등지로 퍼져 나갔으며, 인간성의 회복, 자연의 재발견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미술에 있어서 주된 모티브는 종교적인 주제와 비종교적인 주제로는 풍경, 개인의 초상등과 그리스 신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표현 양식으로는 사실정신, 과학적인 정확성과 원근법 문제를 연구하여 발전을 보았다.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을 들자면 첫째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의 전환, 둘째 자유분방한 예술적 독창성, 셋째 개인적 예술 후원자 등장(Art patron), 넷째 예술에 대한 관심의 대중화, 다섯째 예술가의 지위 상승, 작가의 개성-주장 강조, 예술가의 긍지 고양, 여섯째 주제는 비종교적인 내용과 종교적인 내용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유화개발, 원근법, 인체 해부학의 연구로 인한 인체 묘사의 발전 그리고 사실적 자연주의 양상을 들 수 있다. 또한 원근법이 회화의 근간을 이루게 되어 색채와 구도의 다양성을 띄게 되어 각 지방마다 고유한 화파(유파의 쌍.마르코성당의 모자이크 장식과 피렌체 대성당의 스텐드.글라스 제작에 종사한 웃첼로는 원근법의 이론에 열중하고 또한 그의 최대 걸작으로 지목되는 ‘전쟁’ 3부작을 그렸다. 15세기 후반의 피렌체에는 훌륭한 선묘법에 따라서 꿈같이 아름다운 이교적 찬미의 세계를 만들어 올린 보티첼리(S.Botticelli)가 등장한다. 그는 명작 ‘봄’과 ‘비너스의 탄생’ 에 의하여 유명해 졌을뿐 아니라 수많은 ‘성모자상’을 남겼고, 만년에는 단테의 ‘신곡’의 삽도를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기르란다이오(D.Ghirlandaio)는 보티첼리와 나란히 당시의 피렌체에서 제일 유명하였다. 인물의 동세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생과 프란드라파의 사실주의 영향을 받은 치밀한 묘사력은 특출하였다. 그는 많은 제자들과 피렌체의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의 내전의 벽화를 그렸으며, 또한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이 때 파도바에서는 훌륭한 원근법의 응용과 강철같이 굳은 표현을 특색으로 하는 만테냐(A.Mantegna)가 활약하고 있었고 폐루지아 태생인, 한 때 라파에로의 스승이었던 페루지오(Perugino)는 애수에 찬 성모상을 그려 호평을 받고 있었다. 콜토나 태생인 시뇨렐리는 오리비에트 대성당의 성 피렌체 성당에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한 장대한 벽화를 남겼다. 조각가이며 동시에 화가였던 베록키오는 ‘그리스도의 영세’와 같은 명화를 제작하였으며, 그의 아드리에에서는 만능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Reonardo da Vinch)가 세상에 나와 미라노의 ‘최후의 만찬’을 비롯하여 ‘모나리자’‘암굴의 성모’등, 수효는 적어도 몇 장의 뛰어난 걸작을 남겼다.② 전성기 르네상스전성기의 르네상스는 1490년대 초반에서 로마가 제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한 1527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객관적 사실주의를 지양하여 한층 더 높은 주관과 객관의 융합으로 형성된 품격 높은 고차원적인 고전적 예술로 향하는 길을 열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탈리아 미술의 중요한 무대는 피렌체로부터 로마와 베네치아.R) 티에리.브스(D.T.Bouts) 한스.멜링(H.Memling)등은 기법적으로 사실적인 그림을 유화로 그렸는데 주로 종교적 주제를 많이 취급하였다. 그 에서도 반델.바이덴은, 고딕풍의 장식취미를 남기면서 깊은 종교성에 젖은 걸작을 제작하였고 부스는 이것에 표현주의적인 순박한 정열을 부어 넣었다. 멤링은 너무 큰 작품제작을 삼가도 중요한 소품을 많이 그렸다. 조그마한 화면에 기교가 교묘한 구도배치를 적절히 하여 그 작품들은 크고 넓은 느낌을 준다. 한쪽에서는 이와 같이 종교적 주제와 철저한 사실주의 정신이 인정된데 대하여 이와는 반대되는 현실 세계와 인연이 없는 기괴한 환상 회화도, 프란드로 예술의 특징의 하나로 인정된다. 이의 대표적인 예술가는 보슈(Bosch)이며 그가 종교적 주제로 표현할 때, 등장인물 속에 극단적으로 가리카츄어(Caricature)와 같은 악마적 표정을 취하였다. 이는 이탈리아의 명확한 통일이 성립된 고전적 구도에 대하여,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환상세계가 전개된다. 보슈와 나란히 부르겔(P.Bruegel) 역시 때때로 환상적인 것과 상징적 의미를 표현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일터에서 피로를 풀기 위하여 휴식하는 농민들과 마을의 혼례식등 순박한 농민의 생활정경을 주제로 한 작품도 많이 제작하였다. 독일의 회화는 숑가우어(Sshongauer), 그뤼네발트(Gruenewald)등이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중세적인 범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독일에서 르네상스를 보게 되는 것은, 뒤러, 홀바인, 크라나하드이 등장한 후 부터이다. 그 중에서도 뒤러(A.Durer)는 두 차례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을 통하여 독자적인 힘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려한 고전적 양식을 독일에 옮기고자 시도하였다. 그에 따라, 뒤러의 작품은 균형이 짜인 고전적 작품성과 독일적인 강력한 내면성과 양쪽의 특질을 겸비하고 있다. 뒤러는 또한 판화의 수법과 기술이 우세하여 목판에 의한 유린다. 수줍어 하고 있는 비너스의 신체는 10등신이며, 모델은 당시 피렌체의 최고 미인이었던 시모네타로 전해져 오고 있다.봄바사리의 은 메디치 가문의 코지모 대공(大公) 별장에 보티첼리의 그림이 2점 있는데, 하나는 이고 또 하나는 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또한 16세기 초의 한 무명 전기작가도 지오반니 데 미디치 델 반데 네레의 별장에 보티첼리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여러 점 있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별장의 1598년과 1638년의 재산 목록에도 보티첼리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음이 밝혀져 있다. 이상과 같이 과거의 소장처 기록이 확실한 보티첼리의 이 과 은 1815년에 이르러 우피치 미술관에 들어간 후 한때 아카데미로 옮겨진 적이 있었으나, 1919년에 다시 우피치로 되돌아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작 연대와 동기에 대해서는 역시 여러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1475년의 기마(騎馬) 경연대회 우승자였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와 그의 애인 시모네타 베스푸치의 사랑을 축복한 시인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고전적 상징시 를 1475년 무렵에 회화화(繪畵化)한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꽃이 만발한 피에조레의 저녁놀이 깃든 숲속에 사랑의 신 큐피드를 거느린 미의 여신 비너스를 화면 중앙에 설정하고, 왼쪽에는 막대를 치켜들어 이슬을 털어내리는, 주로 신들의 사자(使者)로 등장하는 헤르메스와 엷은 옷을 걸친 미의 여신들, 그리고 오른쪽엔 온몸을 꽃으로 장식한 봄의 여신과 그 뒤로 꽃의 여신이 바람의 신에 떠밀리며 나타나고 있다. 보티첼리 특유의 감미롭고 섬세한 곡선의 리듬이 최대로 발휘된 걸작이다. 정적인 청색조의 숲속 분위기와 여신들의 투명한 색조의 아름다움이 아주 잘 조화되어 있다. 또 는 양식이나 우의의 유사함에서 앞의 두 작품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1480년 오니산티성당에 그린 는 엄격한 사실적 표현으로 초상화가로서의 역량을 세상에 알린 작품이었다. 이듬해인 1481년에는 토스카나와 움브리아의 화가들과 함께 바티칸 궁전의 시스티나예배당의 벽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