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이나 콘서트에 대한 경험은 여러 번 있으나, 연극에 대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 과제로 “예술의 전당에서 연희단 거리패의 햄릿이 하거든요? 한번 가서 봐보세요.”하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정말 너무 설레였다. 처음 접해보는 분야에 대한 흥분이랄까? 친한 친구를 불러서 함께 연극을 보러 갔다. 처음에 극장에 들어서서는 깜짝 놀랐다. 생각했던 것 보다 극장이 너무 작아서 였다. 그러나 연극을 보면서 ‘아… 객석이 무대와 가깝고, 좌석이 얼마 없을 수 밖에 없구나..’ 하고 느꼈다. 연극이 시작 되었다. 나는 2층의 중간에 자리를 잡고 보았다.연극의 큰 줄거리는 어려서부터 들어오던 햄릿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햄릿을 읽어보지 않은 나에게 햄릿과 기타 배우들이 던지는 대사들에 깜짝 놀라곤 했다. 기억에 남는 표현을 적어보면, 길덴스턴과 로렌크란츠와 햄릿이 피리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햄릿의 대사이다. “나 같은 건 마음대로 피리 삼아 놀려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내 마음 속에 구멍을 잘 알아 비밀을 캐내고 저음에서 고음까지 내 심금을 울려 보려고 했는가? …이 작은 피리보다 놀리기 쉬운 존재로 착각했는가.” 이 밖에도 많은 대사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라는 대사가 나왔을 때는 아는 대사가 나와서 뿌듯했다. 연극을 보는 중간에도, 다 보고 나서도 가장 인상깊에 남는 인물이 햄릿의 어머니, 거투르드이다. 전 왕(햄릿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그토록 비통하게 울던 여인이 두달만에 남편의 동생품에 안겨 웃을 수 있을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보수적이네, 개인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거투르드였다면 절대로 남편의 동생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혼자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들 알고있는 사실이다. 거투르드는 햄릿의 삼촌을 남편으로 택하면서 주변사람(햄릿)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사랑만 중요했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배려가 없 서서 한번쯤 생각해 보는 일도 재미있는 일인 것 같다. 내가 연극 햄릿을 보고 나서 가장 크게 받은 느낌은 내 마음으로 비수처럼 달려드는 말들이었다. 햄릿과 현대 사회의 유사점 같은 것을 분석해내지는 못했다. 그저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은 인간의 삶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참 설레임으로 흥분되는 공연이었고, 보는 동안에는 재미와 감동으로 충만된 공연이었고, 연극이 끝난 뒤에는 보고서 작성의 어려움이 있는, 자칫 그냥 재미로 지나치지 않고,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공연이었다.생 애영국 스트래트퍼드 출신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64년 4월 23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물론이것이 확실한 기록은 아니며 단지 그각 1616년 4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로 미루어 추정해 낸 것에 불과하다. 또 하나 그가 1564년 4월 26일에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그것을 보충해 주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영국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한 위대한 문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 전반에 걸친 확실한 자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조부인 리처드 셰익스피어는 농부로서 장남 헨리와 차남 존의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존 셰익스피어는 스트래트퍼드에서 농산물 판매에 손을 대어 상당한 치부를 했으며, 중에는 그곳에서 유력한 명사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557년 그는 스트래트퍼드 근방에 있는 윌름코트의 지주인 로버트 아든의 막내딸인 메리와 결혼하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그들 사이에 출생한 8남매 중 장남이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으나, 사업의 부진으로 가산이 기울기 전인 1580년까지는 그래머 스쿨(Grammer School)에 다녔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18세가 되었을 때 윌리엄은 앤 헤서웨이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보다 8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그들 사이에는 스잔나와 햄닛, 주디스의 3남매가 있었다. 윌리엄이 어떻게 청년기를 보냈는가에 대해서도 역시 구구한 억측도 깊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1596년 8월 아들인 햄닛의 죽음으로 인해 셰익스피어는 고향인 스트래트퍼드를 방문했다. 고향에서 가족들과 옛 친지들을 만나본 뒤 그는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키는 데 힘을 썼다. 스트래트퍼드에서 돌아온 그는 1599년 템스강가에 건축된 글로브 극장 부근에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셰익스피어는 1600년 이후 일련의 비통한 비극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을 시도하게 된 그의 내적인 변화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1601년 에섹스 경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절친한 친지이며 후원자였던 사우댐프던 백작이 종신형을 받은 사실과 아버지 존의 죽음이 셰익스피어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게다가 막내 동생 에드먼드가 유행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1608년에는 어머니 메리까지 사망하여 셰익스피어는 매우 심각한 실의에 차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언제 다시 고향인 스트래트퍼드로 돌아왔는지 그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런던의 유행병을 피해 낙향해있었던 듯하다. 그는 1610년에서 14년까지 스트래트퍼드의 많은 부동산을 사들였고 이후에 그곳에 머무른 흔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1616년 1월 25일 자신의 유언장을 작성한 그는 3월 25일에 그것에 서명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아마 이때 이미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해 있음을 깨달았던 듯하다. 이렇게 해서 세계적인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616년 4월 23일 53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작 품 해 설이 언제 씌어졌으며, 또 처음 상연된 것이 어느 때인지 분명한 것은 알 수 없고, 다만 그 연대를 대강 추정할 뿐이다. 즉 이 처음 상연된 것은 1601년에서 1602년 사이라고 추정되며, 따라서 처음 쓴 것은 1600년이 아닌가 싶다. 이 처음으로 간행된 이른 바 제1 . 4절본은 1603년이며, 2년 후에 제2 . 4절본이 책으로 나왔는데, 초판 때보다 행수가 증가되어 근 3천 8백 행이나 된다. 제1 . 4절본이 표절느냔,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이냐하는 문제가 우선 대두된다. 그리하여 서지학이 발달을 보게 된 뒤로는그 취사선택의 여지가 많은 까닭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여러 학자들의 여러 가지 판본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셰익스피어 연구가의 한 사람인 윌슨 씨 같은 분은, 제 2 . 4절본이 작자의 친필원고를 인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당시의 관례로 보아, 극단에서는 배우를 위해 한번 대본을 만들면 원고는 불필요하게 되므로, 그것을 그대로 인쇄소에 넘겼으리라는 것이다. 다만 이 4절본은 상기 선전문구에도 불구하고, 오식이 많고 구절이나 문구의 탈락도 눈에 띄지만 그래도 윌슨 씨는 이 제2 . 4절본을 훨씬 중요시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거의 다 그렇듯이, 도 셰익스피어의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 이야기의 소재는 따로 있다. 이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시대의 극작가로서 과 같은 복수극의 대표적인 작가이던 토마스 기드가 쓴 것으로 보이는 이 셰익스피어의 이 세상에 나오기 몇해 전에 런던에서 상연되었다. 이 은 이미 분실되어 현재로선 남아 있지 않지만, 셰익스피어가 이 극을 보고 의 착상을 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조금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12세기말에 덴마크의 삭소가 쓴 의 제3권에 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라틴어로 씌어져 있지만 그 골자를 프랑스의 베르포레가 1582년에 간행한 불문 제5권에 싣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은 이 중의 어느 하나를 소재로 삼았거나 아니면 양자를 다 소재로 취했을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와의 관계를 떠나서 보면, 의 이야기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화나 민족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이에는 옛날부터 해상교통이 열러 발틱해의 남안일대나, 혹은 아일랜드와 노르웨이의 병원지대에 에워싸인 해협은 언제나 두 민족의 뱃길에 큰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여기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는 1230년경에 산문으로 된 이야기 속의 시에 나타나 있다. 의 소재가 어디서 이 불길은 주위에 옮아서 화재를 일으킨다. 햄릿이라는 사나이는 짓궂고, 천진스럽고, 냉철하고, 정열적이고, 경솔하면서도 신중하고, 인품의 고귀한 왕자이면서 고약한 친구이기도 하며,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인 동시에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사나이기도 하다. 햄릿이라고 하면 흔히 매우 내성적이고 연약하며 행동력이 부족하고 우울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인공의 성격을 이렇게만 알고 작품을 읽는다면, 독자들은 의외의 국면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햄릿의 성격에 내성적이고 사변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에 매우 행동적이고, 때에 따라서는 잔인한 일면도 없지 않다. 이런 각양한 성격은 동서의 어떤 작품에서도 쉽사리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은 복수를 테마로 하는 비극이다. 이 비극의 장르는 셰익스피어 당시의 영구에서는 관객들에게 단연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복이 많고 자극적인 사건 등은 과장된 대사의 수식과 더불어 대중의 구미를 자극했을 것이다. 괴테는 햄릿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순수하고 고귀하며 정의감이 매우 강한 사나이, 영웅에게 요구되는 강인한 신경을 갖지 못한 사랑스러운 사나이가 짊어 질 수 없는, 그렇다고 해서 동댕이칠 수도 없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살고 있다.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강요되어, 그는 주저하면서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가는 후퇴하고, 하는 일마다 골칫덩어리라서 거의 목적의식까지 잃어 버리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안식을 되찾지도 못한다." 은 셰익프이어의 극 중에서는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이다. 영국에서는 물론,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도 옛날부터 일류 명배우들에 의해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이 너무 거창하여 상연에 적합치 못한 데 비하면, 이 작품은 다양하며 스릴이 많아 일종의 친밀감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비평가들 사이에는 이론이 분분했던 문제작이 일반 관중들에게는 압도적인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모순된 일 같지만 한편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연극은 주역을 맡은 자도 유리하여, 햄릿역은 혹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