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이야기」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뛴 것은 바로 중국의 모든 종교건축 중에 가장 뛰어난 대표작 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천단(天壇)의 표지 사진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황금색의 신비로운 빛에 둘러싸여 있는 자금성의 모습도 퍽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비슷한 형태의 구조물들을 볼 수 없었기에 도대체 이 건축물들은 뭘까? 어떤 용도로 쓰여지던 것일까? 라는 호기심 어린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러한 호기심은 쉽게 「베이징 이야기」의 책장을 넘길 수 있게 해주었다.저자 린위탕(林語堂, 1895∼1976)은 수필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던 70년대, 「생활의 발견」이라는 수필로 한국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렸던 작가이다. 이 책은 1961년에 미국에서 영문판으로 출판되었었는데 당시 린위탕의 나이는 66세였다. 솔직히 책을 읽기 전에 「베이징 이야기」라는 책의 제목만을 듣고, 다른 여행아내서나 도시안내서처럼 지루하거나 편협한 견해로 도시 베이징을 그렸을 거라는 선입견이 들었다. 그러나 린위탕 특유의 재치가 어우러진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체와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함이 잘 어우러진 이 책은 비록 40년 전에 쓰여졌지만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또한 서양 사람이 쓴 베이징 관련 기록은 물론, 중국 역대 전적을 섭렵한 위에, 과거와 현재 베이징의 풍경들을 섬세하게 그린 그의 식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 자금성 이야기를 하다가 스페인 세비야의 고딕식 석주와 비교하고, 만곡형 지붕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뉴욕 국제 빌딩을 끌어들이며, 광서제의 비극적 운명을 말하다가 프랑스의 철가면 이야기로 옮겨가는 등 서양과 중국을 재미있게 비교하고 있는 것 역시 흥미로웠다.「베이징 이야기」는 공산화 이전 베이징의 풍경과 역사 유물,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모두 열 한 개의 소단락들로 구성되어있다. 책을 접한 후 제일 처음 다가오는 베이징이 이미지는 강렬한 황색이었다.“햇빛을 받은 먼지는 세상을 온통 옅은 황갈색이나 회색으로 바꿔놓는다. 주택의 담장은 회색이나 황갈색으로 물들고, 먼지에 싸인 오래된 사원의 담장도 적갈색으로 변하며 흙먼지로 뒤덮인 용마루는 검은색이나 푸르스름한 회색을 띤다.”{) 본문 p.13 : 16∼20다만 놀라웠던 것은 베이징의 뿌연 먼지가 이렇듯 서정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뒤이어 작가는 베이징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대해 그의 주관적인 견해를 가미하여 전반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는 베이징을 개성 있는 도시로 만드는 것이 ‘자연과 예술, 그리고 인간의 삶’이라고 꼽는다. 이 세 가지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중앙공원이나 고풍스런 담 근처의 가게에 앉아 국수를 먹는 사람들 속에서 편안함과 한가로움을 발견하며, 바로 이런 것이 “중국 문학이나 예술의 정수를 만들어내는 여유로움” 이라 말한다.“수북한 밥그릇과 따뜻한 방과 넉넉한 용돈이면 만족”하는 간소한 생활과 소박한 사상 속에서“사람들은 정신의 자유분방함으로 위대한 예술을 창조했다.”{) 본문 p.12 : 19∼20그는 일관적으로 베이징의 매력은 금빛 찬란한 황실의 궁전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좁은 골목골목에 배인 베이징인들의 아기자기한 삶을 통해 베이징인의 낙천적이고 순박하며 예의바르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들, 관용과 조화의 미덕을 아는 사람들을 묘사하려 했다. 주거지역에 있는 좁은 거리인 후퉁이 깨어나는 새벽의 모습, 대형 소리굽쇠 소리를 울리며 찾아오는 이발사, 밤 11시께 설탕물에 담근 탕위안 장수가 내는 도자기 두드리는 소리 등등은 인상적이다. 베이징은“바로 할머니처럼 사람들에게 편안하면서도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본문 p.17 : 11∼12곳이다. 이렇듯 린위탕은 다른 무엇보다 베이징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서 어떤 매력을 발견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물론 린위탕이 만난 사람들은 1930년대의 베이징 사람들일 터이다. 제2차 세계대전, 사회주의체제로의 전이, 문화대혁명을 겪은 데 이어 개혁·개방의 소용돌이에 있는 현대의 베이징 사람들이 아직 그 시절의 품성과 삶의 모습들을 간직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이 책의 원제목은「제국의 베이징: 린위탕이 말하는 중국의 일곱 세기」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책 곳곳에는 중국의 역사가 스며들어 있다. 명·청 왕조를 중심으로 고대 중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베이징을 해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날의 화려했던 베이징에 대한 실감나는 묘사는 가슴 뭉클하게 만들었다. 특히 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등루(燈漏-물시계)는 여러 기계장치들과 함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모두 4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등루는 각각 해, 달, 별 등의 위치를 나타내며, 동물 형상들을 한 인형들이 각기 자신의 방향에 따라 일정한 시각이 되면 내부의 종을 친다. 시각에 따라 다른 악기를 치고, 물의 유속과 높이까지 정확하게 나타나는 등루의 과학성은 정말로 놀라웠으며, 지난날의 베이징이 얼마나 화려했고 번성했던가를 드러낸다.다른 역사적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의화단 사건, 서태후(西太后) 이야기, 명의 마지막 황제 리쯔청(李自成)의 자살 장면 등은 특히 재미있었는데 마치 역사책을 읽는 듯한 즐거움이 있었다. 특히 린위탕은 서태후에 대해서는 여러번 언급하고 있다. 서태후는 베이징의 역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린위탕은 그녀를 정치적 예지, 강인한 성격, 과단성 있는 정핵 결정능력과 확고한 정권 장악능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인간 관계에 영양을 미칠 수 있는 여성 특유의 계교(計巧)에 뛰어났다. {) 본문 p.85 : 2∼4고 평하고 있다. 또한 서태후를 완고하고 식견이 부족한 여성으로 묘사하면서 포르투갈(Portugal)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부분은 웃음을 자아냈다. 의화단이 마법의 주문으로 서양의 총알을 막아 낼 수 있다고 믿었던 그녀와 당시의 중국인들도 역시 웃음을 자아냈다. 어쨌든 중국의 근대화를 가로막았던 서태후를 저자는 정확히 읽어 내고 있으며 회의적인 시선을 던진다. 서태후는 근대적인 중국 해군을 창설하기 위해 마련된 예산에서 은 2,400만냥을 유용하여 자신을 위한 거대한 유원지인 이화원(좌측사진)을{통해 그녀의 자취를 베이징에 남겨 두었다. 또 다른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이야기였다. 어렸을 적에 영화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아주 감동 깊게 봤었기에 매우 친근하게 다가왔다.베이징의 건축을 살펴보자. 베이징의 현재의 모습은 대략 1270년에 쿠빌라이의 명령으로 건설된 것으로 그 이후 궁전, 사찰, 주택 등을‘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게’재건하는 등 도시를 장식하는 데 지속적으로 각별한 노력이 행해졌다. 그 결과 베이징은 여느 도시와는 구별되는 독특함을 갖추게 됐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베이징의 건축은 서양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서양의 고딕식 성당이 상승하는 정신과 하늘로 향하는 열망을 표현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베이징의 경우 궁전의 웅장함은 펼쳐진 행진형 대열이다. 베이징의 건축물에 있어서 많이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중국인들이 건축 재료로 돌을 경시했기 때문에 대부분 나무를 사용하였고 그리하여 많은 부분 부식되어 사라진 것이다. 거기다 1860년 영불연합군에 의해 원명원(圓明園)을 비롯하여 많은 건축물들이 파괴되어 버렸다. 우리나라도 외세에 침입에 의해 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되고 파괴되었기에 남의 일처럼만 느껴지지 않았다. 많은 민족들이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서는 소중한 문화 유산들을 불태워 버리는데 이는 인류가 애써 가꾼 것을 다시 인류가 파괴하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에는 제일 앞에서 언급했던 천단을 비롯해 여전히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이 있다. 줄리엣 브레든이 묘사하는 색다른 느낌의 천단과 더불어 많은 서양인들이 격찬한 중국의 건축물들을 언젠가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 중 하나는 바로 7장과 8장에 나와있는 사원, 탑 조형예술과 회화, 서예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부분들 역시 린위탕의 유쾌한 문체로 꽤 재미있게 써내려 갔지만 7, 8장에 드러난 그의 예술관과 베이징만의 독특함은 더욱이 감동적이었다. 특히 아버지께서 서예를 하시고 어렸을 적 서예를 배운 경험이 있기에 서예는 종이 위의 춤이다. {) 본문 p.169 : 14∼15
Ⅰ. 머리말민중 반란이란 민중이 주체가 되어 일으킨 전제지배의 압박과 수탈에 대한 저항운동이다. 중국에서의 이러한 민중 반란은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秦)왕조가 출현한 이후 최후의 왕조인 청(淸)제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에 일관해서 보이는 현상이다. 환언하면 그것은 중국 전근대사회를 특징짓는 전제왕조체제와 뗄 내야 뗄 수 없는 정치 현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민중반란의 실태를 명확히 하는 것은 중국 전근대사회의 해명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중국 민중 반란 가운데 세 가지만을 추려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Ⅱ.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 《진시황의 초상화》이 반란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일어난 농민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B.C. 221년에 진왕(秦王) 정(政)은 6국 가운데 최후까지 남아 있던 제(齊)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 전제체체를 창시하였다. 그는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였으며, 도량형·화폐·문자의 통일, 민간 병기의 몰수, 장성의 축조 등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시켜 나갔다. 이러한 여러 진나라의 정책을 뒷받침한 진나라의 정치사상은 법가사상이었다. 법가사상에서는 황제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삼았고, 황제가 제정한 법을 정치를 수행하는 데 최고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엄격하게 법이 적용되었다. 또 황제가 백성들을 개별적으로 직접 파악하여 인두세, 요역 등을 부과하는 지배방식이 군현제에 의해 전국에 미쳤다. 시황제는 이러한 천하통일 정책을 추진함과 아울러 아방궁(阿房宮), 여산능(廬山陵)도 조영해 나갔다. 70여만의 죄인이 사역되고, 조영에 필요한 자재도 먼 곳에서 수송되어 왔다. 시황제가 죽은 후, 2세 황제{) 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胡亥)는 여산능에 시황제를 장례하기 위해 새로이 요역을 할당하였고, 많은 죄인을 동원하였다. 2세 황제는 당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아방궁 조영공사도 재개하여 많은 인원을 사역시켰다. 이 때문에 농민에 대한 수탈은 한층 강화되어 농민은 부담에 허덕이게 되었으며, 정치에 대한 불만은 날로 높아만 갔다. 진승·오광의 궐기는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다.그렇다면 이 최초의 농민 반란군을 지도한 진승과 오광이라는 인물은 도대체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진승은 河南(하남) 출신으로 字(자)가 涉(섭)이므로 진섭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머슴을 살았다. 당시의 머슴은 노예나 노비의 신분이라기보다는 남에게 고용된 농업노동자라고 이해하는 편이 옳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고용하여 농업경영을 하는 방식이 그 때 이미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의 농촌경제가 매우 오래 전부터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진승은 머슴을 살 때 주인과의 대화에서 매우 유명한 成語(성어)를 남겼다. “어찌 참새가 기러기의 큰 뜻을 알겠는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는 그의 말에서 정치세계에 뜻을 세우려는 의욕과 신분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저항정신이 엿보인다. 오광도 진승과 같은 하남 출신으로, 역시 매우 가난한 농민이었다.이들 두 사람은 진시황의 아들이 황제를 계승한 기원전 209년에 변방으로 징발됐다. 이들이 가게 된 곳은 지금의 북경(北京)에 가까운 지역으로 당시는 주로 가난한 이들만 변방수비를 위해 동원됐다. 그러나 미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홍수를 만나 길이 막힌 그들은 도저히 기한 내에 도달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당시의 법은 정해진 시일 안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무조건 처형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진승과 오광은 “지금 도망가도 죽고, 봉기해도 죽을 수 있다. 이왕 죽는 것이 마찬가지 일 바에는 난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죽는 편이 낫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진에 의해 천하가 고통 당한지 이미 오래라, 천하를 위해 일어서면 호응하는 자들이 많으리라.”라며 봉기를 결정하고 일행을 선동했다. 진승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장초(張楚)로 정했다. 자신의 행동이 전국시대의 초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장초는 중국 최초의 농민정권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봉기한 지 얼마 안되어 농민군은 정부군에 진압됐다. 애초 진승의 농민군은 두 개의 대열로 나누어 진격했다. 진승은 본부대에 잔류하고, 오광은 병력 일부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갔다. 오광의 부대는 곧 정부군 지도자를 내세워 수도로 돌진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던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주문과 오광 양부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승리를 놓친 진승은 B.C. 208년 12월, 농민군 내주의 반도에 의해 피살됐다. 봉기한지 1년여 만이었다.비복 진승과 오광은 실패했지만, 이들은 진의 멸망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들이 반란한 틈을 이용하여 전국 각지의 귀족세력, 특히 통일전 진나라와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후예들이 진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특히 항우(項羽)(B.C. 232-202)와 유방(劉邦)(B.C. 256-195) 이 두 인물이 등장하여 패권을 겨루다가 결국 B.C. 206년 진이 붕괴되고 한이 탄생했다. 진의 멸망과 한의 계승은 진승과 오광에 의해 그 계기가 마련됐던 셈이다.거시적 측면에서 진승과 오광이라는 두 빈농에 의해 봉기했던 이 반란은 결국 농민운동과 왕조교체의 순환적 반복이라는 중국사의 독특한 발전패턴을 형성시키는 최초의 선례를 남겼다. 진(秦) 이후 통일과업을 완수한 한(漢)나라도, 고대제국을 완성시킨 당(唐)왕조도, 세계적인 대국을 일으켰던 몽고족의 원(元)제국도, 궁극적으로 농민운동에 의해 성립된 명(明)정권도, 마지막 전제왕정을 이끌었던 청(淸)도 농민운동에 의해 무너졌다. 여기서 한가지 더 주목할 만한 점은 거대한 통일제국을 무너뜨리는 대규모 농민운동이 이미 2천년 전에 발생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20세기의 공산혁명이 농민을 주축으로, 농촌을 혁명기지로 하여 성공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Ⅲ. 황소(黃巢)의 난중국 당(唐)나라 말기 875∼884년에 일어난 대농민 반란이다. 당나라 말기에는 지방 번진(藩鎭)의 세력이 늘어나고 중앙관리의 당쟁과 환관의 횡포가 겹쳐서 지배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인민에 대한 수탈도 강화되어 토호나 상인층도 반왕조의 경향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이에 도처에서 반란이 발생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구보( 甫)의 반란(859∼860)과 군인 방훈(龐勛)의 반란(868∼869)이 있었다. 이후 전국에 기근이 내습하여 사회적 불안은 절정에 달하게 되고,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소금 밀매업자로서 반체제적 활동을 해오던 산둥[山東]의 왕선지(王仙芝) ·황소 등이 난을 일으켰다.황소는 산동성 하택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문무를 좋아하였으나 과거 시험에는 낙방하였다. 874년 왕선지가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황소도 또한 군사를 일으켰다. 해마다 계속되는 한발과 수해, 충해로 인하여 고향을 버리고 유랑 생활을 하는 자들이 속속 그들의 휘하로 모여들어 삽시간에 수 천명의 군사를 모을 수가 있었다. 왕선지와 황소는 일정한 거점을 정해두고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공격하는 작전을 폈기 때문에 토벌하는 관군 측에서는 포착하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이 북방 출신인 황소군의 장병들은 영남의 풍토에 익숙지 못해 병사하는 자가 잇달아 발생하여 10명 가운데 3,4명이 죽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진군하던 황소의 군대는 공격 방향을 북쪽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북쪽으로 돌아가 큰일을 도모하자.”이것이 황소군의 구호였다. 큰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시시하게 절도사 따위가 되겠다는 뜻이 아니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황소의 북벌군은 커다란 뗏목을 만들어 계림에서 상강의 흐름을 타고 형주, 영주를 지나 담주를 격파하였다. 이 곳에서 정부군 10만 명이 소멸되어 시산혈해를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의 기록. 『신당서』는 중국 당나라의 정사(正史)로서 이십오사(二十五史) 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단지 『당서』였던 것이 송나라 때 내용을 고쳐 『신당서』로 편찬되 어 『구당서』와 『신당서』로 나누어졌다.이윽고 황소는 장안에 남아 있던 황족 전원을 몰살하고 12월에 함원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여 나라 이름을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라 칭하였다.그러나 대제 금통 4년, 즉 883년에 이르러 황소군의 전력은 눈에 띌 정도로 약화되어 장안의 남·서·북은 모두 당군에 의해 봉쇄 당하게 되었다. 동쪽으로 통하는 길은 원래 황소군의 부장 주온(朱溫)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황소군의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주온이 당군에 항복함으로써 낙양과의 교통도 차단 당했다. 이렇게 해서 장안은 점점 고립 상태에 빠지고 물자마저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주온의 배반은 황소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고, 당왕조에게는 천병만마나 다름없는 큰 힘이 되었다. 장안에서 탈출한 황소는 추격하는 주전충, 이극용과 1년 이상 싸웠으나 패배를 거듭함으로써 거의 전멸 상태에 빠졌다. 금통 5년(884) 6월 황소는 겨우 1천 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태산 동남 낭호산으로 도망쳤으나 호랑곡 전투에서 패하자 자결하였다.황소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당왕조는 이 반란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어 그 후 23년간 겨우 명맥을 이어갔을 뿐이었다. 이 23년 동안은 번진(절도사) 세력이 강성하여 환관들을 모조리 죽이고, 살아 남은 조정 중신들도 모두 황하에 던져 죽임으로써 당왕조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907년에 이르러 선무 절도사(하남성, 산동성, 안휘성 일대의 장관) 주전충{) 황소군을 배반하고 당왕조에 투항한 것으로 당왕조로부터 요직을 받은 주온이 당나라로부터 하사 받은 이름이 전충(全忠)이다.이 당왕조 최후의 황제 애제(哀帝)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의 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양(梁)이라 하니 이 나라를 역사상 후량(後梁)이라 부른다. 이렇게 해서 당왕조는 고조로부터 20대(代) 290년 동안 이어오던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먼 옛날 고전이지만 아직까지 사랑 받고 있는 춘향전 은 소설이기 전에 판소리로 만들어졌다.민속악의 하나로 광대의 소리[唱調]와 그 대사[唱詞]의 총칭이라 정의되는 판소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며 장단에 맞추어 일정한 내용을 육성(肉聲)과 몸짓을 곁들여 창극조(唱劇調)로 두서너 시간에 걸쳐 부르는 민속예술형태의 한 갈래이다.조선 시대 평민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한 무렵 발생한 판소리는 출발 자체에서부터 완전하게 보호받으며 육성된 민족 예술은 아니었다. 그러나 판소리는 전통적인 윤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기존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판소리 중 아직까지 자주 불려지고 알려져 있는 것들이 박타령·수궁가·심청가·적벽가·춘향가이며 그 중에서도 최근까지 가장 많이 영화화되는 것이 바로 춘향가이다. 춘향가는 판소리로 불리어지다 소설로 정리되고 최근에는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졌었다.그 중 가장 최근에 임권택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춘향뎐은 춘향전이 이야기 자체보다 소리와 함께 할 때 느끼게 될 감동이 커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영화와 판소리를 함께 하고자 시도한 영화이다. 국창 인간 문화재 조상헌의 춘향가가 영화 전반에 흐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조금은 생소한 판소리, 그리고 소리에 맞춰서 움직여지는 듯한 배우들의 행동은 참 재미있었다.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처음으로 관심이 갔던 것은 배우들의 외모였다. 극 중에서 이몽룡의 역을 맡은 배우의 한국적이었던 눈매나 얼굴 모습이 참 잘 어울린다 생각하며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부분에서 보면 각자의 개성있는 배역에 맞는 적절한 인물의 연기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판소리 춘향가 를 들었을 때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 했다. 가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지금이 어느 대목인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들리는 건 의성어나 의태어들 뿐 예를 들면 우루루루루 히익히익 이런 소리들 뿐 이었다. 가사 전달이 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리듬을 느끼는 일 뿐이었는데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주로 하는 판소리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으니 남은 리듬은 그저 단순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특히 내가 들었던 부분이 옥중가 와 몽중가 부분이라서 슬픈 느낌의 곡조였고 이는 듣고 있는 내게 지루함을 더 하였다. 물론 현장감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판소리를 그저 녹음된 CD를 통해 들은 것이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판소리가 조금 더 대중화되고 우리의 판소리를 세계 전체에 알리기 위해서는 가사 전달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듯 하다. 뿐만 아니라 바쁜 현대 사회에서 직접 공연장을 찾아가는 일보다는 녹음된 음반들을 가지고 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현장에서 느끼게 되는 어떤 감동들을 녹음된 음반으로도 전달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지루하게 들었던 판소리였지만 영화에서 접할 수 있었던 판소리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오히려 이번 영화에서는 여러 번 영화화되어 이미 식상할지 모르는 고전의 소재를 새로운 방법으로 신선하게 표현함으로 예전에 접했던 영화와는 전혀 다른 영화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걸쭉한 목소리의 판소리를 들으며 직접 배우들의 연기를 눈으로 보니 판소리에 대한 가사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판소리 장단이나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쉬웠다. 또 이리 오너라~ 엎고 놀자~ 하며 시작되는 사랑가 는 흔히 들어 익숙하던 앞 소절 때문인지 스스로 장단에 맞추어 흥얼거리기까지 하며 영상 뿐 아니라 판소리를 즐길 수 있었다. 그저 음악으로 들을 때의 판소리에서 느끼지 못 했던 동적인 느낌도 영화를 보면서는 느낄 수 있었다. 광한루에서 성춘향 의 그네 타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 이몽룡 이 방자 에게 일러 춘향이를 데리러 오라 하여 그 명을 받고 춘향이에게 가는 방자의 모습이 판소리의 대목과 정확히 맞춰 지는 것을 보며 그저 음악을 들을 때보다 또는 그저 영화를 볼 때보다 더 동적이고 리듬있게 느껴졌다. 또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해서 옥고를 치르며 고문을 당하다가 변사또에게 죽여주시오~ 하고 소리를 지르던 장면에서 여배우의 목소리와 판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나오는 부분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만약 이 장면을 판소리로만 들었다면 영화에서보다 실제적인 상황의 절박성을 느끼지 못 했을 것이고 영화의 영상으로만 보았다면 판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느낄 수 있었던 강한 인상은 느끼지 못 했을 것이다. 이런 장면들은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의 생각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부분이다.판소리를 듣고 영화를 본 후에 읽은 고소설 춘향전 에서는 지금까지 교과서를 통해서 읽었었던 판소리계 소설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다. 특별히 판소리를 접해 볼 기회가 없었을 때는 4.4조의 가사체로 쓰여있는 내용들이 리드미컬(rhythmical)하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미 판소리를 들어 그 느낌을 익히고 영화를 통해 판소리의 가락에 흥이 나게 되었던 후에는 소설의 가사가 마치 판소리의 한 부분을 듣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봉이 나매 황이 나고, 장군 나매 용마 나고, 남원의 춘향 나매 이화춘풍 꽃다웁다. 하는 춘향모 월매 가 이몽룡이 춘향과의 혼인을 허락해 달라 할 때 대답하던 부분처럼 4.4조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나는 장면에서 특히 그러했다.